이 세상 빛들이 모두 나를 향해 쏟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를 얻은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다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대학1학년때, 여대생이던 나는 S대 남학생들과 남산 독일 문화
원에서 EOS 라는 독일 문학 써클을 하고 있었다. EOS는 새벽의 여신이며 그 여신이 주는 의미
처럼 내 이십대는 서서히 기지개를 펴며 아름다운 시작을 준비하였다. 그 써클은 주로 독서를
하고 그것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 그런 활동을 하였는데 카프카나 헷세 그리고 독일 작가는
아니지만 까뮈, 샤르트르 , 강은교씨등 을 논하며 우리는 우리의 순수한 이상세계와 현실을
넘나들며 남산의 따스한 바람을 맞았다.
그해 여름방학 우리는 설악산과 동해바다로 M.T를 가기로 하였다. 엄마에게는 과 친구들끼
리 가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시킨 나는 며칠 전부터 남대문 시장을 뒤져 예쁜 옷과 핀등을 사며 죄
책감 반 즐거움 반으로 뒤척이기도했다. 우리는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였다. 여기저기 청
소가 안된 터미널 그리고 허름한 완행버스. 그러나 여름날 작열하는 태양은 젊은 우리들에게
벅찬 그리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만을 허용할뿐, 아무 것도 보이지않았다. 내설악을 넘
어가는 길은 이름 모를 나무들과 들꽃들. 바람의 향기, 안개, 구름에 묻혀버린 산들로 설레움이
가득 하였다. 낡은 백담산장에서 비가 후드득 그어 내리던 산사에서의 낭만은 묘한 기분을 느
끼게했다. 산장 뒤는 꽃들과 나비들로 황홀한 축제가 벌어졌으며 써클사람들과 포카점을 치면
서 알수없는 나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즐거웠다.
내설악을 지난 우리는 넓은 해안도로를 거쳐 낙산사에서 여정을 풀었다. 소나무 숲을 지난
조그만 방갈로가 우리의 숙소였다. 생명이 춤추는 바다내음, 맑은 솔내음. 꿈꾸던 문우들,
내 가슴에 살며시 들어 앉았던 내가 몰래 좋아한 상호. 힘겨운 입시를 겪고 세상에 갓나온 대
학1년생에게 바다는 창조주의 오묘함 그 자체였다. 새벽에 수평선을 따라 떠오르는 빛의 시작
을 알리는 일출의 환희, 태양의 정열 , 격렬한 사랑, 소라의 추억. 바다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
다. 우리가 바다의 정취에 취해 모래사장을 정처없이 거닐고 있을 때 저멀리 한남자가 파도가
유난히 심한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파도와 한몸이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이것이 써클 회장이었던 욱이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으로 보았던 죽음이었다.
거제도에서 오직 한명만 보냈다는 S대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집안과 거제도의 영광이
었던 형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항상 과묵하고 매서운 눈초리, 한편의 시를 듣는 것같은
절제되고 아름다운 언어로 차가운 애자언니의 가슴을 불같은 열정으로 채웠던 이름처럼 슬픈
욱이형. 거제도에서는 가난함 속에서 오직 잘난 아들에 대한 사모로 지친 삶을 보상 받았던 ,
앞으로 가장 귀중한 무엇을 잃은 허탈감에 그의 인생 전부를 힘들게 보내야하는 한 초라한 여
인이 올라왔다. 몇몇 2학년 형들을 제외한 우리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쉼없는 침묵이 흘
렀고 방향없는 눈동자만이 떠돌아 다녔다. 상호는 고개를 숙이고 운동화끈을 풀렀다 맸다 만을
반복했다. 삼복더위에 겨울 스웨터를 걸친 난 오돌 오돌 떨고 있었다. 한 사람은 너무나 빨리
그의 길을 가버렸으며 나는 구경꾼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들은 잔인한 그들의
운명에 대해 이세상과 타협하여 살 수 있을까? 여리디 여려 가엾은 내영혼도 찢어지고 있었
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가에 보이던 노을은 왜 이리 빨간지. 나는 욱이형의 영혼이 노을이
되었을 거라고 믿었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쓰고 흐느끼는 나에게 엄마가 무슨일이냐고 물어도 나는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할수없었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잔인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다가오는 가을도 우리는 침묵
하였다. 겨울이되고 써클 회원들은 다시 지리산자락에서 조우하였다. 우리들은 다시 깔깔대며
여행에 충실하였다. 그의 존재는 이미 원래부터 죽어있던 사람처럼 아무런 일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고 추억일뿐. 나는 겨울 바람속에 간간히 들리던 그의 냄새를
맡기도 했으나 그 말을 꺼내는 것은 우리들 사이의 금기사항이었다. 또 다시 봄이오고 나는 전공
필수인 토플 성적이 나오지 않아 공부를 하느라 써클도 잘 못나가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날 이후 파도는 생과 죽음의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바다가 모든 생명이 잉태되는 창조의
가장 내밀한 언어라면 파도는 그 생명이 넘어야할 생과사의 인생애환일 것이다.
파란 몸이 하얗게 부서지며 끝없이 절규하는 파도. 때론 산처럼 높은 분노와 깊은 절망으로 때론
가랑비같은 잔잔한 슬픔으로 흐르는 파도.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여름이 오듯이 그리고 그
추웠던 겨울도 우리에게 한조각의 추억으로 미소 짓게 만들듯이, 인고의 세월을 보낸 상처투성이
조개가 진주를 만들듯이, 파도는 끝없이 우리에게 흘러 아픔을 딛고 겸손과 깨달음으로 나아가
아름다운 인간으로 화하고자 하는 조물주의 섭리가 아닐까?
첫댓글 기쁨과 설레임으로 가득찬 MT. 성난 파도에 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가난의 찌든 삶속에서 오직 한가닥 희망의 불빛이던 자식을잃고. 절망속을 허우대며 한많은 삶을 살아야했던 모친의 절규가 귓전에서 맴도는듯 합니다. 여름이님 덕에 저도 푸르던 옛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산 독일문화원 요번 겨울엔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고운 발걸음 감사드립니다
여름이 님의 진솔한 글을 읽으면서 ....짧은 생을 마감한 S 대생 너무 가슴이 아퍼요 아들을 먼저 앞세운 어머니의 심정 .땅을치고 통곡 했을 어머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때 많이 놀랐어요. 낙산사하면 그형이 생각납니다. 모임 애써주시고 제글에 소중한 발걸음 놓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여름이님 글에 .. 저도 옛날 미팅하던 생각이...옛날을 반추하며 산다는것은 행복한 사람이지요, 그러니 추억거리를 많이 만드며 살아야 겠어요.정모날 여름이님 환하던 얼굴이 아른거려요.^^
전 나리 언니의 따듯한 눈빛이 맴돕니다. 앞으로도 많은 추억을 만들어야겠지요.
아, 젊은날은 역시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작열하는 7월의 열기와 햇볕처럼 찬란했거늘--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설렘과 그리움으로 잠을 설치던 그 청춘의 감격과 번뇌의 시간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미지의 세계와 연인을 꿈꾸면서 탐구에 매진하던 그 청순했던 영혼과 열정은 이제 모두 사라졌단 말인가? 여름이님의 좋은 글 <파도>를 통해 지난 젊은 날의 번뇌, 열정, 순수했던 그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ㅎ
그렇게 모든 것은 추억이 되어버렸네요. 앞으로 남은 세월도 먼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빛나겠지요. 히스토리님 뵙게되어 반가웠습니다.
대학 3학년 여름에 경포대를 찾은 우리 일행 4명이 리라호 태풍에 해수욕을 못하나 걱정하던 중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햇빛이 나고 파도가 다소 잠잠해져 해변 텐트에 한명만 남고 세 명이 군용고무메트 타고 해수욕하던 중 파도에 메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엎치락 뒤치락 생사의 고비에서 헤엄쳐 다가온 고등학생에 의해 구출된 적이 있어요. 그 때를 생각하며 S형의 운명에 가슴아픕니다. 그래요, 바다가 모든 생명이 잉태되는 창조의 가장 내밀한 언어라면 파도는 그 생명이 넘어야할 생과사의 인생애환일 것입니다.
그때 형이름이 건축공학과 2학년 류(유)욱이었어요.아마 성산님과 4살차이 일거예요.그때는 몰랐는데 젊은날은 먼 과거지만 언제나 저를 두근거리게합니다 언제나 고운 발걸음 놓아주셔셔 감사드립니다
낙산사 해돋이 보려고 년말 몆번 가보던 곳입니다 여름이님의 아픈 추억이 있는곳입니다....하얀 파도 밀여드는 그겨울 바다 상처로 억룩진 거북 한마리 바다로 돌여보네주었는데 2번인가 되돌아와서 안타가워지만 마지막에 바다로 돌아가는 뒷모습에 마음 내려놓고온 동해 바다 저또한 아픈 사연에 기억이 아니지만 동해 바다에 추억 오늘 이창에서 다시 만나고 갑니다...
추운 날씨에 어찌 지내시는 지요. 시골에 며칠 갔다 오셨다는 말씀 여유당 한줄인사에서 들었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다녀갑니다 수고 하셔습니다
여름이님이 지난 젊음을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