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동쪽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佛也, 世尊!
'어의운하'는 계속 나오는 관용구다. '뜻에 있어서 어떠한가?' 세조본의 우리말에 따라 "네뜻이 어떠하뇨?" 로 번역하겠다.
4-5. "수보리야! 남. 서. 북방과 사유. 상. 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不? "佛也. 世尊!"
사방四方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다. 사유四維(바유)라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가는,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말한다. 여기에 上과 下가 들어가 10방위가 된다. 우리가 보통 시방十方이라고 하는, 가능한 온갖 방위를 가리키는 인도인의 개념화방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4-6.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不可思量.
4-7.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가르친 바 대로 머물지니라."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단但(다만단)'을 '오직'으로 한 것은 세조본의 우리말을 따랐다. '가르친 바 대로' 라는 것은 本分에서 말한 내용을 가리킨다.
노자 제2장에 '공성이불거 功成而弗居'
공을 세우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이다. 비록 내가 씨를 뿌리고 심지만 그것을 반드시 내가 거두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다.
성공한 것이 자기 공로가 아니라 은혜임을 받아들이고 그 공로의 혜택을 흘러가게 하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마음이 '성공이불거'의 마음이다.
학교로부터 등록금과 기숙사비 뿐 아니라, 생활비까지 받아서 생활했다. 차도 없고 모든 것이 불편한 상황에서 먼저간 선배들이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내가 너무도 황공해하고 미안해할 때 그분들이 한 말이 있다.
"우리도 그렇게 많은 친절한 도움을 받아왔기에 이렇게 베풀고 섬기는 것이다. 전혀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했다. 내가 베풀지만 그 열매를 돌려받으려 하지 않고, 그 친절히 흘러가게 해준 것 같다.
('공성이불거 해석은 'Ohr오르' 님의 불로그에서 모셔온 글임)
중국인들에게서는 『노자』가 분명 선행되었던 지혜의 경전이다. 이 선행하는 의미의 틀에 따라 외래적 사상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格義'불교라고 한다. 우리는 격의를 너무 협애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격의불교라는 의미를 너무 비하해서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모두 인류의 지혜의 소산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장의 지혜와 대승불학의 지혜는 그 맛은 다르지만 의미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리실견분 (如理實見分) 第 五
5-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의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법보신문의 해석이 훨 이해가 잘된다. 도올의 해석은 너무나도 독고다이 인 듯이 느껴졍)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여리如理'는 '理와 같이', '리理대로' 라는 뜻이다(如理라는 글자가 본문에 없기에 쪼매 헤멨다ㅜㅜ 그런데 제5의 제목을 왜 중요취급하는지ㅋㅋ). '理'라고 하는 것은 '사事'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사事는 인연의 사실들이다. 리理는 그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본체론적 의미를 지닌다. 리理는 진여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생멸의 세계가 아닌 생멸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언어는 오로지 생멸의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며 진여眞如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격절된(끊어진)다. 본 分에서 말하는 '상相'은 바로 언어와 관련된 것이다. '如理'는 곧 언어를 격절시킨다는 뜻이다(굉장히 의미가 깊다. 방금 아내는 수선충당금이 전월에 비해 6,400이 더 청구 되었다고 말했다. 1500세대에 적용하면 거의 천만원에 가깝다! ).
'實見'에서의 '실'은 부사적 용법으로 '여실히'의 뜻이다. 그러니까 '여실하게 본다'의 뜻이다. 그런데 나는 '그 참모습을 보라!' 라고 번역하였다.
불교의 '三身說'은 붓다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다양한 인식의 구조를 밝힌 이론이다. 1. 법신法身 2. 應身 3. 報身을 말하는데, 이외로도 化身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법신은 '진리의 신체'를 의미하며 영원불변의 진리의 當體를 가리킨다. 법불. 법신불. 법성신. 자성신. 여여불. 여여신. 제일신. 진신 하는 것들이 모두 이의 다른 이름들이다.
응신이란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세간의 사람들의 부름에 향응하여 나타나는 신체라는 의미다. 응신은 크게 보면 결국 색신이다.
보신이란 우리 인간이 부처가 되기 위한 因으로서 행업을 쌓아 그 행업의 報로서 완전한 공덕을 구비한 불신佛身이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나 도올은 현재 역사적으로 살아 있다. 이 도올은 색신을 구비한 자로서 매일 밥 먹고 똥싸고 울고 불고 애들하고도 다투고 살고 있다. 내가 방귀라도 뀌면 아내는 옆에서 실제로 쿠린내를 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책으로 나를 접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나를 접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설하는 진리만을 이 책을 통해 접하고 그 진리의 주체로서의 도올 김용옥이라는 존재를 그냥 상정할 뿐이다. 내가 죽고난 다음에 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갑자기 도올이 타계한 이후의 도올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분위기넹ㅎ)
한 인간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가 있다. 그 첫째가 色身이라 하고 그 둘째가 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색신이란 역사적 실존인물을 가리키는 것이요, 법신이란 진리의 구현체로서의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24/5/4, 14:30 부평지식산업센터 옆의 예전에 두어번 갔었던 '가츠' 에 가서 안심.등심가츠를 먹고 효성동 2번 종점을 배회한 후 귀가하여 한숨 잤다. 20여분 잤나보다. 쩡이의 전화가 왔고, 그로인해 나는 깨었다. 내일 아침부터 모래까지 비가 예보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이번 연휴는 책을 집자하고 몸을 保하는 방편으로 삼아야 할 듯 하다.
기독교의 문제점은 법신 예수를 모르고 색신 예수에게만 집착한다. 불교의 문제점은 색신 붓다를 너무 무시해버리고 법신 붓다만을 진리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색신과 법신에 대한 명료한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색신의 신화화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바다위를 걷는다든가 뭐 그런 것들이 좀이나 많은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가 실제로 죽었다해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얼마든지 초대교회의 제자들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날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픽션이 순식간에 퍼져 당대의 사실로 확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쉽사리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상식적이고도 건강한 논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입에 담지 못할 이단에 속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립 자체가 '부활의 믿음'으로 인하여 성립된 것이고, 사도 바울이 개종 자체가 '부활의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기에, 만약 예수부활을 이렇게 사실적 가능성으로 기술하게 되면 기독교사가 성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신학이 성립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色身과 法身을 분리하면 예수의 부활이라는 케리그마는 색신의 사실이 아니라 법신의 사실인 것이다. 예수의 법신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 논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사실이요, 소망의 사실이요, 대망의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적 진리의 사실이다.
기독교가 색신과 법신을 애초부터 분리하지않았기 때문에 많은 혼동이 생기고 오히려 색신의 신화화라는 미신만을 낳게 된 것이다. 예수의 색신에 집착하고 있는 뭇 중생들에게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상식에 어긋나는 쌩거짓말들만 내뱉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색신과 법신을 분리한다면 예수의 부활은 '미륵불의 하왕생'보다도 더 리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카톨릭신학의 삼위일체론도 오로지 성부.성자.성신의 신비적 이동異同의 문제만 집착하고 있을 뿐, 내가 말하는 색신과 법신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아무 쓸모도 없는 복잡한 교리가 되고 만다(완전 기독교교리를 쌩가고 있는 중ㅋ).
붓다의 생애 자체가 신비적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러니칼하게도 더 추상화되고, 예수의 생애는 너무도 신비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역설적으로더 구체화된 것이다. 싯달타는 카필라성의 왕자, 그색신은 법신 위에 잠깐 걸쳐진 지푸라기보다 못한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불교가 색신을 무시하고 법신에 집착한 것은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나 도올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와 우주 전체의 이법을 논하는 웅대한 정신에 접한다. 그러나 사실 나 도올은 출판사에다녀오다가 경찰한테 티켓이라도 뜯기는 판에는 애숭이 전경아저씨 한테 살살 빌고 있는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치주염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는데, 치과에 가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은 그 끔찍하도록 짜릿한 큐렡의 공포 이외에는, 우주고 인간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가냘픈 서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색신이 이렇게 초라하다 해서, 감히 이 도올의 우주적 정신을 얕봐서야 되겠는가? 나 도올의 가치는 김용옥의 색신에 있지 아니하고 법신에 있다. 그것은 나색신의 더러움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그 인간이 설하는 법(진리)에 있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철칙을 논구하고자 함이다.
나 색신을 괴롭히지 말라! 길거리에 걸어가는 나 도올을 놓고 쑥떡꿍 쏙딱꿍거리지 말라! 나는 매일 매일 울고 웃는 초라한 인간이니까. 붓다도 예수도 그랬을 것이다.
여기 1절에서 '신상身相으로 여래如來를 보지말라' 는 뜻은 바로 붓다를 색신으로 바라보지 말고 진리의 구현체인 법신法身으로서 바라보라는 대승의 명령인 것이다.
5-2.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이르신 몸의 형상이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신상(身相)은 곧 육신을 말씀하신 것이니, 육신은 실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합하여 조직된 것이요, 따로 자체가 뚜렷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은 주춧돌, 기둥,
들보, 중방, 연자, 도리, 평방 등으로 합하여 세운 것인데, 이것을 하나하나씩 빼어 놓으면 '집'이라는 존재는 찾아
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고, 거짓 이름 한 것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상이라고 부르는 '삼십이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부처님 혹은 전륜성황의 몸에 구족된 32종의 미묘한 특징을 가리키는 것이다. 족하안평립상. 족하이륜상. 장지상. 족근광평상. 수족지만망상. 수족유연상. 족부고만상. 이니연박상. 정립수마슬상. 음장상(자지가 馬王의 자지처럼 산봉우리같이 크고 우뚝 솟으나 보통 때는 오므라들어 몸 속에 안 보일 정도로 숨어 있다ㅋㅋ). 신광장등상. 모상향상. 일일공일모생상. 금색상. 장광상. 세박피상. 칠처융만상. 양액하융만상. 상신여사자상. 대직신상. 견원호상. 사십치상. 치제상. 아백상. 사자협상. 미중득상미상. 대설상. 범성상. 진청안상. 우안첩상. 정계상. 백모상이 있다. 그 묘사가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로 점차 올라갔는데 인도 사람들의 '미인관' 이라든가 '초인적 인간상'에 대한 관념이라든가 의학적 지혜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부처는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날 이런 색신의 모습으로 쳐다보려 하느뇨?"
空의 이치를 터득한 수보리는 대답한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오니이다."
5-3.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無我論이 강한 어조로 노출되어있다. 여기 처음 '허망'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허망은 곧 인간의 인식과 관련된 말이다.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 수단이 모두 허망하다는 뜻이다.
'견제상비상'의 見은 '깨닫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법정 스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이 구절을 어느 선객이 諸相과 非相을 같이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해석한 적도 있다. 文義의 맥락으로 보면 바른 해석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하여도 그 宗至에 어긋남은 없다."
원불교는 법당에 모신 법신불이 참으로 법신이라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등신불等身佛일 필요가 하나도 없다 하여 아예 그것을 원圓의 모습으로 추상화시켰다.
단하천연(739~824)이 혜림사에 머물 때, 매우 추운 겨울 날씨에 법당에서 좌선을 하다가 궁둥이가 시려우니까 법당에 놓인 목불상을 도끼로 뻐개 불지피우고 궁둥이를 쬐이는 장면이 있다. '諸相非相'의 의미를 한번 이와 관련시켜 다시 새겨볼 만하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금강경』에 처음 나오는 사구게四句偈다.
그가 스승마조의 부촉에 따라 남악의 석두선사를 찾게 되자 석두선사는 그를 2년간 부엌일을 시킨다. 어느날 석두선사는 법당 앞의 풀을 깎아야 되겠다며 대중들에게 낫과 괭이를 들고 나올 것을 지시했는데 단하만은 머리깎는 칼과 물을 가지고 와서 선사 앞에 꿇어 앉았다.
선사가 머리를 끄덕이고 웃으며 그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머리를 깎고 나니 단하의 정수리가 볼록 솟았는데 선두선사가 이를 어루만지며 "천연스럽구나"했다. 단하가 선사의 말을 받아 말했다. "이름을 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언제 너의 이름을 지어주었느냐" "조금전에 천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마조에게 법명을 받았다는 내력은 이렇게 전해진다.
그가 석두의 곁을 떠나 다시 강서의 마조대사를 배알할 때 그는 마조대사를 뵙기 앞서 승당내에 봉안돼 있는 문수보살의 등상 목을 타고 앉았다. 대중들이 깜짝 놀라 마조대사에게 고하니 마조가 달려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오,나의 제자여. 천연스럽구나." 그러자 단하가 내려와 말했다. "법명을 지어주신데 대해 감사합니다" 이로써 천연이 그의 법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하선사가 낙양의 혜림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겨울 날씨가 너무 차서 난로를 찾으나 보이지 않고 땔감을 찾던 중 법당 안에 모셔진 목불상을 발견했다.단하는 목불을 안고 나와 모탕위에 놓고 쪼개 군불을 지폈다. 때마침 혜림사의 원주스님이 이를 보곤 깜짝 놀라 고함을 쳐댔다.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그러나 펄펄 뛰는 원주를 보고 단하는 천연스레 말했다. "나는 부처를 태워 사리를 얻으려는 참일세" 그러자 원주는 더욱 화를 내며 대들었다. "목불인데 무슨 놈의 사리가 있단 말이오" 이때 단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단하는 그런 원주에게 호통을 쳤다. "사리가 나오지 않으면 부처가 아닐 것이오. 만일 그렇다면 나를 책할 것이 없지 않느냐" 이일을 두고 어떤 스님이 진각(眞覺)대사에게 물었다. "단하는 목불을 태웠고 그 절 원주는 펄펄 뛰었는데 누구의 허물입니까?" 진각대사는 말했다. "원주는 부처만을 보았고 단하는 나무토막만을 태웠느니라"
(04:33, 차 닦으로 갈거여, 안갈거여? 포천 푸른하늘펜션 이후 더러워진 차를 닦아야 하긴 하겠는데ㅋ 오늘 종일 집자를 하고 점심으로는 돈가스를 먹었고, 20분을 잤고 다시 집자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終.)
(22:07, 삼우A에 청바지 공짜시혜 받아 된밭공원을 들러서 오다. 연휴 첫쨋날이 어느덧 저물어 간다~~
정신희유분 제6
바른 믿음은 드물다
正信希有分 第 六
6-1.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정신正信'은 '바른 믿음'이다. '實信'과 상통한다. '信'이란 글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 의미에서이 '믿음'이라는 용례로 쓰인 적이 없다. 그것은 '실증한다' 라는 의미에 가까운 내포를 지녔을 뿐이다.
'希有'는 '드물게 있다'의 뜻이다. 인간세에서는 언제고 '바른 믿음'은 희유한 것이다.
이 分은 말세론적 색채를 깔고 있다. 불법이 날이 갈수록 즉 인간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쇠퇴하리라는 것은 초기불교승가의 믿음 중의 하나였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단절과는 근원적으로 문제의식이 다르다. 역사의 모든 순간이 종말론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우리는 '위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여기 이 절에서 수보리는 인류가과연 이러한 말세론적 분위기 속에서 금강경의 지혜와 같은 심오한 사유를 삶의 가치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6-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말라.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도 계율을 지키며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 이 글귀에 잘 믿는 마음을 낼 것이며, 이를 진실한 것으로 삼으리라.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梵文에는 '후의 오백년대' 라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三時사상 중에서 가운데 시대인 '상법像法' 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시란 불타의 멸적 후의 시대를 正法. 像法. 末法의 3기로 나누는 시대구분을 말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대강 불멸후 500년이 되기 때문에 곧 정법이 멸하고 상법이 시작되는 혼란의 시기를 지칭한 것이라 말했다. '후오백년'을 그렇게 볼 수 있는지 나는 의문이다.
나는 '후오백년'이란 말이 어떤 정확한 三時의 시점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불법이 쇠퇴한 멋 훗날의 시대로 생각함이 옳을 듯하다. 대승불교의 흥기를 불타 열반 후 500년 정도로 보는 관점은 역사적 정황에 대체로 들어맞는다.
불타는 수보리에게 이른다. "그렇게 비관적인 소리 하지 말아라! 아무리 말세가 와도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는 자는 반드시 있을 것이며, 이 금강경의 설법에 독실한 믿음을 내고,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구원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6-3.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서너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자리에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는 즉시 오직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라는 것을.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졸립다, 22:42 그만 자려고 한다. 감긴다 눈. 終. 아까 노래점수 98점이 나온 현영의 늘씬한 몸매가 자꾸 떠오른다. 붐의 나부끼는 자연스러운 도움. 203호에 여인이 이사를 왔다. 생김새가 어쩜 그렇게 인형같던지.. 김건희를 보는 것보다 더. 난방 밸브를 각 실별로 튼다는 것을 아내와 가르쳐주고 왔다. 왜 그렇게 넓고 어두운 쇼파를 쓰는지, 튼 방 저쪽이 보이는 유리창에 커튼을 다는 이야기에 대하여 아내가 조언하다)
(24/5/5, 어린이날(일요일) 06:41
여기 '부처'는 '깨달음'을 상징하며 역사적인 싯달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선근을 심었다'는 표현은 이미 오랜 윤회의 시간 속에서 훌륭한 행동과 덕성과 지혜로 선업을 쌓아온 그런 보살들을 형용하는 말이다. 깨달은 많은 사람들 밑에서 功을 쌓았다는 뜻도 되고, 많은 깨달은 자들을 존경하면서 살았다는 뜻도 된다.
여기 '乃至'를 모두 관용구적인 '내지'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일괄적으로해석하면 뜻이 안 통한다. 여기서는, 乃와 至를 떼어서 해석해야 한다. '곧... 하는데 이르다' 라는 뜻이다.
6-4.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뭇 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여기 '실지실견'이라 함은 기독교의 전지전능이 아니다. 각자는 근본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비극적 상황에도 훌륭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되리라느 ㄴ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동학에서 '萬事知'라 한 것과도 상통한다.
6-5. 어째서 그러한가? 이 뭇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출처]'흐르는 강물처럼' 에서 한문을 모셔 옴
이 글의 핵심은 '무법상역무비법상'에 있다. 박테리아를 쳐부수는데 항생제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항생제를 계속 먹으면 그것이 더 큰 병을 불러 일으킨다.
空사상은 존재를 실체의 존속으로 파악하는 (우를 범하는)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더 없는 좋은 약이다. 그러나 空그자체에 집착하면 더 큰 병이 생겨난다. '惡取空의 뜻, 공의 이치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난 집착'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불교도들이나 스님들 중에 '해탈한 체' 거드름을 피우는 자들이 많다. 공병 걸린 자들이다. 그런데 공병은 치료가 더 어렵다. 상식의 파괴가 아닌, 상식의 파괴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無法相은 실체의 부정이다. 無非法相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無我', 그것이 실체화되어 또 하나의 我를 형성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서양에는 이러한 사상이 빈곤하다. 기독교가 천박한 전도주의에 머물고 있는 역사적 현실도 이런 깊은 생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6.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약심취상'은 '그 마음에 존재의 상을 갖는다' 는 의미이다. 이는 곧 마음의 상을 바로 밖에 있는 대상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된다. 만약 법이란 생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만약 그릇된 법이란 생각을 취하여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모든 중생이 천만불소에 선근을 심어서 다시 사상(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상도 없으며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다. 사상이 가로막아 무량복덕이 오는 것을 막아 더 못 오게 한다. 사상이 없으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심법이 천하에 미쳐 거기서 오는 복덕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무량복덕을 얻는다 하신 것이다.
6-7.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아니라고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비트켄슈타인의 표방하는 대로 인간의 언어체계는 實在의 정확한 그림이 될 수가 없다. 실재세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해도 부정적으로 표현해도 다 부족한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의 구사는 논리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 논리의 법칙은 실재세계의 모습과는 무관한 또 다른 께임일 뿐이다. 이 양자의 정합성에서 세계를 규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궁극적으로 헛된 것이다(내 삶의 모든 현상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상황의 설명은 언어로써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그 모든 언어는 인간이 만든 기표체계에 불과하구나!). 타락타투스의 마지막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지어다.
6-8.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뗏목(벌筏)의 비유는 참으로 기발한 것이다. 강이 많은 지역에서 생활한 인도사람들에게서 생겨난 지혜의 비유인 것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다 할 때에 우리는 뗏목과 같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자! 어렵게 뗏목을 구했고, 뗏목은 아주 훌륭한 나무로 곱게 다듬어져서 잘 만들어져 있다. 내가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이 뗏목을 얼마나 어렵게구했던가! 그래서 뗏목이 저쪽 언덕에 도착을 했는데도, 뗏목이 좋고 뗏목이 아름답고 뗏목이 귀하여 그냥 뗏목 속에 주저앉아 있다면 도대체 어느 날에 피안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무리 어렵게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그러느라고 강을 건넌 것이다)진정한 신앙인은 예수를 버려야 한다(이제는 강을 건넜은니 뗏목에서 내려서야 한다).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느님을 만났다 하더래도(그러느라고 우리는 간난신고의 강을 뗏목을 이용하여 건넜다), 우리는 여호와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이제는 그 뗏목에서 내려서야만 피안의 땅에 안착할 수 있다). 그래야만 참으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만 참으로 여호와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方便'의 사상은 결코 간단한 사상이 아니다. 인류최고의 지혜를 결집한 두 마디인 것이다. 황 삐엔!(~의 뜻을 찾았으나 없다)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파미르고원이라는 지형상의 조건으로 격절되고 차단되어 교섭이 없던 시절, 붓다가 살아있던 그 시절 그 즈음에, 중국에는 노자니 장자니 하는 성인이 살고 있었다. 『장자』의 「外物」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물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버려(잊어)야 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버려(잊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말은 뜻을 상대방에게 나타내는 수단이므로 뜻을 알고 나면 말은 잊어버리게 된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나는 언제 그런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내 어찌하면 『말을 잊어버린 사람』을 만나서 더불어 얘기할 수 있을까?)
진리에 도달하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칠용이가 "금강경에 어느 곳에서 뗏목에 대한 비유가 나오나?" 라고 의뭉스럽다는 듯이 물었었다. 나는 어물어물쩍하고 말았으나 여기 6分에 그말이 나오는구나!
붓다는 장자가 죽은 약 4.5세기 후에 장자를 만나러 중국에 왔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출발이요, 이것이 격의불교의 시작이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대규모의 문명교류의 시발이었다.
중국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서는 라오쯔. 주앙쯔가 있다. 인도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서는 싯달타가 있다. (도올은 말한다. 우리 조선문명은 19세기 중반에 동학사상이 형성되었다. 제주4.3민중항쟁, 여순민중항쟁, 4.16혁명, 5.18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저류에 위대한 사상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 고조선의 후예들은 주앙쯔, 싯달타, 예수를 뛰어넘고, 룻소, 칸트, 헤겔을 뛰어넘는 우리들 자신의 논리와 이념을 형성해야 한다. 시호! 시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개벽의 때다(무슨 호기가 갑자기 들어차 이런 표효를 하는 것일까?)!
무득무설분 제7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슴
無得無說分 第 七
7-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인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과연 있는 것인가?"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과연'은 문의를 살리기 위해 첨가한 것이다.
아뇩다라는 무상(無上), 삼먁은 정등(正等), 삼보리는 정각(正覺)을 뜻합니다. 무상(無上)이라고 함은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지은 모든 업장을 모두 소멸하였으므로 삼계에서 더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등(正等)은 무상(無上)의 법을 증득하신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에는 일체중생이 평등하고, 청정한 마음은 법계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정등이라고 하고, 정각(正覺)은 무상(無上)의 도(道)를 증득하신 청정하신 마음을 가졌으므로 정각(正覺)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얻었다고 함은 본래 없는 것이다. 왜냐? 얻는다는 것은 잃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생긴 것은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얻는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얻는다 하면 벌써 유(有-있음)가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면 있다 없다를 떠난 까닭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법(法)이니 비법(非法)이니 하는 군더더기의 말이 붙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내가 설한 법 또한 이와 같다는 말씀을 거꾸로 물으신 것이다.
7-2.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먀삼보리라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縟多羅三邈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부처님의 깊으신 뜻을 수보리는 드디어 알아챘다. 이곳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머무르고 정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취하거나 버림이 자재로울 것이요, 이곳은 정한 법이 없는지라 머무르고 떠남이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얻음과 버림이 머물고 떠나는 것을 두지 않음이라. 때와 인연에 따라 들고 남이 자재함에 일정한 곳이 따로 있지 않을 것이며, 일정한 법이 따로 있지 않을지니, 이러하므로 경에 이르기를 정법이 있지 아니함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정법이 있지 아니함으로 여래가 가히 설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實在에 대한 언어적 규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실재는 無常하여 찰나찰나 변해가고 있는데 그것을 규정하는 언어는 그것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고정시킨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한 세계는 常의 세계다. 상의 세계는 妄相인 것이다.
천당의 불변적 삶을 추구하는 소승적 기독교인의 망상이 어떠한 오류에 속하는 것인지 이제 좀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당도 無我 속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7-3.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7-4.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함이 없는 법으로 이루어져 범인들과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노자의 무위는 자연에 수순하고 조작이 없는 것을 말하므로 무위는 무작위(無作爲)일 뿐 무행위(無行爲)가 아니다. 이에 반해 유가는 도가와 더불어 천도(天道)의 형이상학적인 견지에서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인간 땅에 구현하는 덕(德)의 실천면에서는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에 반하는 인위적인[有爲] 수양과 노력을 강조하였다.
(24/5/5, 일요일 종일 비. 자다가 집자 하다가, 자다가 집자 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어언 16:29. 아내가 시청가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ㅎ 오늘 어린이날인데 이로아천사님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없는 형편이지만 5만원권 금배추 한장을 이따가 징메이고개 밥집에서 만나면 선물해야 겠다. 오후 잠을 코베아간이의자에서잤더니 엉덩이가 아프다. 하지만 정신은 참 맑아졌다. 서재 창틈으로 바람소리가 휘파람이다.)
마지막 문장의 뜻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콘체의 범문梵文 영역은 아래와 같다.
Because an absolute exalts the Holy Perwons.
절대자가 성스러운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절대가 성스러운 사람들을 고귀하게 만든다' 라고 했는데 꼭 성신이 성자를 고귀하게 만든다는 식의 표현같이 느껴진다. 성인은 이미 무위로만 생성되는 사람이며 그것으로 인해 고양되거나 저하되는 존재일 수 없다. 막스 발레사의 독일어 번역에 의하면 '왜냐하면, 고귀한 사람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들에 의해 특징 지워지기 때문이다.
너무 서양적 냄새가 나는 번역이지만 물론 그 내면적 뜻을 콘체가 이해 못하고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여기서 '無爲'라 함은 인간의 언어가 단절되는 절대 眞如의 세계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나타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무규정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며 무한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에 의해 제약당하지 않는 세계라고도 영어로 번역된다.
일체성현,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유차별'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구절이 없다. 이 부분의 번역으로서가장 좋은 한역은 '진체'의 것이다. '일체성인개이무위진여소현현고 一切聖人 皆以無爲 眞如所顯現故.' (일체의 성인은 모두 무위진여로써 현현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번역들이 '有差別'을 無爲에 대한 有爲的 분별세계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아마도 라집의 의도는 賢聖들이 有爲差別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는 대승적 현실성의 맥락을 강조하는데 있었을 것이다. 라집의 구문의 해석은 '일체 성현은 모두 무위법으로써 하지만, 차별이 있다'가 되는데 만약 연속적으로번역하면 '일체 성현은 모두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갖는다, 차별을 짓는다'가 된다. 그 대체의 뜻은 모든 성현이 비록 차별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오로지 무위의 법 즉 함이 없는 法, 만들어진 것이 아닌 法에 의해서만 드러나게 된다(顯現)는 뜻이다.
이러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나의 라집역에 대한 최종적 해석은 아주 단순하다. '유차별'을 분별세계에 관한 논의로 보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뛰어나다', '범인들과 구분되어지는 위대함이 있다' 는 내용의 형용사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의법출생분 제8
依法出生分 第 八
8-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겠느냐?"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이 장에서 우리의 '악취공'의 가능성을 경계한다. 法을 버리고 非法을떠난다 해서 그럼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無爲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실적 도덕적 행위는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행하는 자세가 보살승에 올라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는 인도인의 심한 우주관의 한 전형이다. 중국인들은 매우 소박한 天地, 즉 음양의 하늘과 땅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인의 우주관은 오늘날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갤럭시이론들과 비슷하다. 과장된 표현이심하지만 우주의 실상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수미산須(모름지기수)彌(두루미)山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그것을 동심원으로 둘러싸는 일곱 개의 산맥이 있다. 그리고 제일 외연에는 鐵圍山이 둘러쳐 있다. 이 九山의 사이사이에 八海가 있다. 또 그 제일 바깥쪽 바다에는 四大州가 떠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수미세계이며, 위로는 색계의 初禪天으로부터 아래로는 大地下의 風輪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하나의 수미세계를 1,000개 모든 것을 小千世界라고 한다. 중천세계와 대천세계까지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한 부처님의 교화의 범위가 된다(ㅎ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구나, 인도인들은. 이런 불요불급한 설명들을 나는 왜 집자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이런 묘사는 처음이자나자나!ㅎ' 언어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ㅋ).
이렇게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찰 수 있는 칠보만큼의 많은 물질적 재산으로 어떤 사람이 보시를 한다면 과연 이 사람의 복덕은 많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태 19:24)"
또 예수의 산상수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17:23, '로아의 날'에 하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노오란 배추잎 한장 바칩니다. ㅡ하부여지가)
(21:59, 누룩골은 역쉬 인기짱이었다. 우리에게 찍힌 살집좋은 종업원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건 그녀가 뭔가를 갖고 있다는 증좌. 사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 여자가 틀림없다고 생각든다. 비를 맞으며 차를 운행하는 이서방이 있고 카드로 음식값을 지불하는 석하군이 있다. 집에 와서 롯데캐슬과 현대힐 스테이트를 이야기 하고, 춘천 서면 박사마을에서 만난 잔소리 안하는 어른 예기를 나누고 최씨 셋과 박.이.우 다른 성씨 예기하며 웃고, 과자를 사러 우성마트에 두 사위가 갔다 오고, 쫀드기를 굽고 그리고 로아를 데리고 로아맘이 먼저 자릴 떴다. 다른 셋은 지금 맥주를 먹고 있다. )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 6:19~21) [이 대목이 목사들이 신도들 사기치기 꼭 좋은 대목이라고 자주 수군거리는 대목이 아닌가! 나는 이 대목을 회상할때마다 기독교의 어떤 먹이그릇의 고리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했을 때의 하늘은 저 푸른 구름 위가 아니다. 그 구름 위에는 싸늘하고 희박한 공기가 있을 뿐이다. 그 하늘은 바로 '대승의 마음'인 것이다. 예수가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한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함이다. 보물을 오직 세속적인 향락을 위하여 쌓아둔다면 내 마음은 오직 그 세속적 향락과 함께 있을 뿐이다. 여기 '하늘' 이라 함은 보이지 않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이다. 칠보 공덕의 궁극적 효용은 보이는 물질세계의 풍요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다웁게 깨닫고 사느냐 하는 형상을 넘어선 마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 형상을 넘어선 마음의 세계를 예수는 '하늘'이라 한 것이다(Heaven=Mind).
그런데 일단 칠보공덕의 세속적 효용을 붓다와 수보리는 긍정하는 자세로 대화를 진행한다.
8-2.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오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오니이다."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福德多."
대승적 마음가짐이란, 곧 복덕에 복덕이라는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복덕을 복덕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만 복덕은 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함이 없음을 행하면 되지 않음이 없다' (우무위, 즉무불치)
『대정』 판본에는 '즉비복덕성'이 '즉빕복福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식자상의 오류로 간주된다. 나카무라는 대정 본의 오류를 그대로 따랐고 이기영本 역시 동일하다. 우리가 이런 경우 어떤 근거 위에서 대정의 판본을 오류라 할 수 있는가? 대정도 정교하기 이를데 없는 훌륭한 판본이지만, 대정과 『고려』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대정은 활자배인본이요, 고려는 목판본이라는 것이다. 목판본이 활자본에 항상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복덕'이 '복복'으로 바뀌어야 할 하등의 필연성이 없다. 우리 『고려대장경』의 판본의 우수성이 처처에서입증되는 것이다. 위대하도다! 고려Corea라는 대제국 문화인들의 섬세한 손길이여!
세조본도 '즉비복덕성'으로 되어 있다.
8-3.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곧 이 경 중에서 사구게라도 하나 타인을 위하여 설파하는데 이른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의 사람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문 중에 經이라 하니 이는 불타의 한나절 설법인데 어찌 경이라 할손가? 이미 금강경 이라는 책이 설법자의 손에 쥐어져 있기라도 하단 말가? 인도문화는 본시 오디오문화다. 입에서 귀로 전달되는 것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화다. 중국의 한자문화는 비디오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책이라는 걸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경이라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의 불타의 설법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헌이 아니라 노래다.
칠보공덕자에 대한 현실적 긍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전제로서 복덕이 복덕성으로 인식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했다. 어떤 위대한 사업가가 있어 큰 사업을 벌리고, 그 돈이 돌고 도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돈이 돈으로서 가치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돈의 돈됨을 부정하는, 그 돈의 돈됨을 초월하는 곳에 그 돈의 가치가 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호와 어느 한 촌부가 깨달음의 한마디라도 타인에게 전달한 것을 비교할 때, 과연 누가 위대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도올은 거대재벌은 한번에 도산하여 해체될 수 있지만 반짝이는 금강석과도 같은 지혜의 말씀은 도산하거나 해체될 수가 없다고 말하며 촌부의 우위를 설 한다)
여기 '사구게' 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행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의 말씀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어느 구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이 금강경의 4ㅐ의 사행시만을 낭송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이는 수주대토守株待兔의 宋人의 우보다 더 우매한 것이다.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농부가 밭을 갈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횡재한 농부는 죽은 토끼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토끼를 요리해 먹었다. 맛있는 토끼 고기를 먹으면서 농부는 숲속에는 자유롭게 사는 토끼들이 많은데 굳이 힘들게 농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농부는 농사는 접어둔 채 하루종일 나무 밑둥만 바라보며 토끼가 와서 부딪혀 죽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밭에 가 보았지만 이미 잡초가 우거진 뒤였다. 결국 일년 농사를 망친 농부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8-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縟多羅三邈三菩提法 皆從此經出
바로 이 『금강경』이 說하고 있는 대승의 지혜야말로 일체의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의 원천인 것이다.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나서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없다. 여기붓다의 최후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최후의 심판,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8-5.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참으로 충격적인 최후의 일언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의 佛은 곧 '깨달음'이다.
불법佛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一言은 바로 대승불교의 마지막 선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도올의 이 발언은 뭔가 도착된 듯 느껴진다. 주류를 잃고 엉뚱한 논리로 건너 뛴 비약이랄까?)
(그러나 수보리야! 불법이라고 하는 금강경 도리도 그것에 얽매이면 참다운 불법이 될 수는 없다.(이 말이 정확한 해석에 가깝다고 본다)
yhse522님의 블로그에서 모셔 옴)
佛法은 존재 그 자체이다.
존재 그 자체 가운데 특히 존재의 근본인 부처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이란 한계가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상대로 따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이 지구에 오신 이후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어도 그대는 불자이고 알라신을 믿어도 그대는 불자이고
아무것도 믿지 않아도 그대는 불자이다. 그대가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하는 한.
당연히 불법이라고 이름 붙이면 그 순간 불법에 어긋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여래께서 說한 것이 없으며 설한 것도 모두 뗏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불자라고 생각하면 이미 불자가 아닌 것이고,
부처가 되겠다고 하면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고,
부처님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부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불법을 깨치겠다고 하면 불법을 깨칠 수 없게 되고,
불교를 내세워서 자비를 베풀면 불교를 망치는 것이 된다.
그래서 無住라고 하는 것이다. 어디에든 머물면 불법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불법에 머물면 그것은 곧 불법에 어긋난 것이 된다. 불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전체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부분으로서 항상 苦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된다.
이정표는 이미 세워져 있고 길도 끝까지 닦여 있는데 단지 자기 자신이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항상 그 자리에서 머물고, 또
억지로 길을 가다가 옆길로 새고 만다.
문제는 길이 아니라 길을 가다가 중간에 머물고 마는 나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여래의 설한 법을 깊이깊이 자기 내면에 받아들여 한없이 무거운 번뇌망상의
짐을 덜어내어 마음의 무게를 덜고, 여래의 등불로 자기 내면을 비춰
자성불을 보면 되는 것이다.
ㅡ지공선사의 블로그에서 모여 옴
一相無相分 第 九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다
9-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노라' 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이 제9분은 역사적으로 금강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금강경은 소승과 대승이라는 구분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당대에 성립한 부파불교에 대한 통렬한 반성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로 이 分은 금강경이 쓰여진 당대의 부파불교의 통념에 대한 매우 통렬한 비판의 어조를 깔고 있다. 여기서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四向四果'라고 하는, 소승부파불교가 인간수행의 과정으로 설정한 4개의 계위에 관한 것이다.
제1위; 須陀洹 入流
'인간세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의 흐름에 방금 들어간 자'의 의미다. 즉 속세를 떠나 전문적인 비구승의 길에 초입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제2위; 斯陀含 一往來
사다함이라 음역되는 것으로 직역하면 '한번 오는 자'가 된다. 해탈은 두 번 다시 생사의 굴레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벗어난다는 뜻이다. 수행이 깊어져 三結(有身見, 戒禁取見, 疑)을 끝어 버리고 탐.진.치의 삼독의 죄업이 희박하게 된 이 단계에 오면 천상이나 인간세에 단 한 번만 더 윤회의 굴레로 들어갈 뿐 더 이상의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제3위; 阿那含 不來
아나함이라고 음역되는 것으로,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이다. 이 경지는 상당히 높은 경지로,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절단시킨 사람으로, 사후에 색계.무색계에 태어날지언정 절대두 번 다시 욕계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미 覺者의 위치에 간 사람이다.
제4위; 阿羅漢 응공
소승불교에서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붓다의 위치보다는 아래로 설정된다.
9-2.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만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이 分에서 깨고자 하는 것은 모든 수도인들의 자의식이다.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생겨나는 자의식을 모두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을 의역하였다.
9-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 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9-4.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 번 왔다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제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사다함? 하늘과 땅을 이제 단 한 번만 왔다갔다 할 자라구? 우리 이제 대승들은 그러한 신화적 상상력의 단계에 머물러 우리 존재를 규정짓는 바보짓을 하지말자! 사다함이 사다함일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천당 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구? 수보리는 말한다. '감'이라는 게 없나이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구? 하늘에서 천군천사 대동하구 빵빠레를 울리면서 오신다구? 수보리는 말한다. '옴' 이라는 게 없나이다.
도올은 말한다. 이게 다 소승기독교인들을 위한 신화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라구. 기독교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대승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가? 감과 옴이 없는(불왕래)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가? 꼭 천당 가고 지옥 가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할까? 연보돈 내어 기도원 짓고 교회당 건축해야만 천당 갈 것인가? 사방에 드높이 올라가는 건 모두 교회 건물뿐이니 그많은 건물 지어 무엇 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생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것이 다 소승기독교의 폐해다. 매일매일 십일조 내라구 쫄린 주머니 털어 공해뿐일 건물 짓는데 우리민족의 신앙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사이다(ㅋㅋ).
9-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 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9-6.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 올 자' 라 하지만, 실제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만 아나함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无來 是故 名阿那含
우리 해인사本에 '實无來'로 되어있는 부분이 명본明本에는 '무불래無不來'로 되어 있고, 세조본도 명본을 따랐다. 언뜻 보기에는 아나함이 不來의 뜻이므로 그것의 부정은 '無不來'가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불래'라고 하면 그것은 이중부정이 되어 '오지 않음이 없다'가 되어 '언제고온다'가 된다. 근본적으로 '不來'라는 개념의 부정이라는 맥락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집은 '無來' 즉 온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다시 아니 올 자' 라고 하는 개념을 파기시켜 버린 것이다. 이 깊은 뜻을 모르고 그것을 '無不來'라고 고치는 것은 옛사람들, 특히 교정을 좋아하는 소학가들의 천박함에 지나지 않는다. 六祖의 주석에도 '故名不랱
, 而實無來'로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육조가 본 금강경 판본에는 '無來'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해인사판본의 우수성이 이런 데서 입증되는 것이다. 이기영은 또 이 부분만 '무불래'로 원문도 고치고 번역도 그에 따라 했으니 도무지 그 일관성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별 생각없이 통용본을 따르신 것 같다(누구인가 이기영은?).
9-7.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앞의 3위는 모두 '果'로 되어 있었는데 최후의 제4위는 그것이 '道'로 되어 있다. 아라한의 증득의 상태가 이전의 3단계와 다르다고 하는 차별성을 두어 라집이 그에 맞추어 번역한 것이다.
'아라한'은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자' 또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의미다. 그러면 여기 문장의 실내용은 이렇게 된다. "아라한이 '나는 이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이렇게 해석하면 이해가 보다 잘 될 것 같다.
9-8.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실제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 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전체적 의미는 존경을 받을 많한 사람이 나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미 我相의 노예가 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 삶에서 쉽게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태이다. 존경스러운 우리사회의 리더들이 반성해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9-9.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무쟁삼매의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라는 이 같은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무쟁삼매최위제일'의 원문은 '다툼이 없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최고의 사람'이다. '다툼이 없다'는 것은 나 이외의 인간들로부터의 온갖 모욕과 박해와 비난, 그리고 외도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든 감정이나 오염에 물들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보리가 속세로부터은퇴하여 깊은 숲속에서 홀로 살면서 마음의 평정과 평화를 즐겼던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이런 뜻이 최후의 일절에 나오는 '낙아란나행자 樂阿蘭那行者'의 의미와 결부되어 있다.
9-10.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라는 생각을 했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 라는 것은 정적한 곳에서 일체의 경계를 끊어버리는 무쟁삼매를 수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을 하고 있는 수보리는 곧 '함이 없다' 는 말로 자신을 비우고 있는 것이다(지나온 나의 발자취, 행위를 회억해 보면 ~~한 '티'를 내며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뻐기는 행태가 다반사였던 것 같다. 뭐 배구나 축구나 족구 때에도 마찬가지다. 용선이와 대리운전을 했던 송도 그곳의 로터리가 생각난다. 대표적으로... 그가 "나는 팁맨이다" 라고 자랑했을 때 속으로 질투했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나를 본다. 지금은 안그럴것 같다).
莊嚴淨土分 第 十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10-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있느냐? 있지 아니하냐?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여기 '정토'란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本文속의 '佛土'와 동일한 뜻이다. 정토란 말은 '청정국토淸淨國土'라는 말을 두 굴자로 압축시킨 것이다. 淨土란 '부처님의 나라' 즉 깨달은 자들의 나라며 淨福의 영원한 이상향이다.
天國이란,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원의에 즉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 이다. 의롭고, 평화롭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어떤 새로운 기준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축복된 나라이다. 실제로 이러한 나라는 '추상적 질서BASILEIA를 의미한다. 불교의 정토와 기독교의 천국은 동일한 개념이다.
예수는 인간세에, 천국이 가까왔다는 외침으로써 등장했다(하느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 마가 1:15)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시며" (누가 11:2 주기도문 중에서)
예수의 삶의 시간동안에 천국은 도래했는가?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고 죽었다. 천국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천국의 도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 예수의 재림이다. 이것은 미륵의 하생이나 거의 동일한 생각이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교회의 사람들은 56억 7천만 년 후에 나타나는 미륵의 하생처럼 그렇게 시간을 멀리 잡지 않았다. 예수가 곧 내려온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사도, 바울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느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끌어 올려 공중에서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위로하라 (데살로니카전서 4:16~18)
그런데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는 오지 않았다! 아아! 실망스럽다. 이러한 민중의 시람을 또 다시 깨우치고 나오는 사상이 '교회론'이다. 즉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콤뮤니티, 그 공동체가 바로 천국의 도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바로 예수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 공동체에 속한 성원은 그몸의 지체라는 것이다(로마서 12:4~5 고린도전서 12:12).
그런데 이러한 교회론의 맹점은 또 다시 교회에 부여된 재림적 의미의 특수성 때문에 교회가 다시 특수화되고 선민화되고 제식화되어 갔다. 그리고 말틴 루터의 도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카톨릭의 역사, 그 후에 이루어진 신.구교의 모든 역사 속에는 초기기독교의 기본적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이거이 금강경을 강해하고 있는 것이냐? 기독교를 강해하고 있는 것이냐?ㅋㅋ 하여튼 꼭 기독교 이야기를 붙여대야만 금강경 강해가 쉽게, 방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교수법적인 도올의 방편인가?).
내세정토來世淨土는 사후에 갈 곳으로 설정된 극락세계이다.
정국불토淨國佛土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정토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천국의 현실적 실천이다. 바로 현실속에서 정토를 만들어 가는 행위가 곧 '보살행'인 것이다. '정淨'은 불국토를 깨끗이 한다고 하는 우리 삶의 현실적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인 것이다.
常寂光土는 일체의 한정을 넘어선 절대정토이며, 그것은 곧 법신法身의 土이며, 법성의 土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미 있는, 이미 도래되어 있는 정토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바즉적광'이라는 사상이 도출된다.
'파루시아(재림)은 초대교회 사람들의 결집을 위한 권면적 수단이었다. 천국은 곧 나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고 하는 생각조차 없애야 하는 것이다. 천국이 곧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생각조차 없는 상태, 그때 비로소 천국은 실현되는 것이다.
제1절에 然燈佛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부처님은 과거세의 佛로서 예언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세에 있어서, 과거불이 수행자에게 미래의 세에 있어서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고 하는 보증을 확약하는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연등불은, 타오르는 등불과도 같은 부처님으로서, 석존 이전의 과거세에 존재 했던 이십사불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연등불수기도<사진>는 중앙에 부처님이 손바닥을 정면을 향한 채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쪽 발 옆에는 엎드려 바닥에 머리카락을 깔아놓은 수행자의 모습이 작게 묘사돼 있는데, 머리를 풀고 엎드려 있는 수행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인 운뢰 범지다. 머리카락을 밟고 서 있는 부처님은 연등불 또는 정광여래로, 운뢰 범지에게 수기를 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조각은 2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아프가니스탄 카불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었으나 미군 공습으로 박물관이 피폭돼 현재 보존상태를 알 수 없다.
<증일아함경> 권11 ‘선지식품’이나 <불본행집경> ‘수결정기품’에는 연등불의 수기를 받은 보살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증일아함경>을 보면 운뢰(雲雷)라는 범지(梵志, 바라문)가 정광여래로부터 수기를 받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설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발마대국으로 향한 운뢰 범지는 그곳의 왕이 정광여래를 초청해 의복과 음식을 공양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운뢰 범지 또한 정광불을 친견하고 꽃과 향을 공양하고 싶었지만, 발마대국의 왕이 “향(香)과 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것을 팔지 말라”는 명을 내린 터라 꽃 한 송이 구할 길이 없었다. 마침 어떤 바라문의 딸 선미(善味)라는 여인이 다섯 송이의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발견한 운뢰 범지는 꽃을 팔라고 권했다. 여인은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부가 되겠다고 허락해 준다면 꽃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음 생에 정광여래처럼 되고 싶다고 서원한 운뢰 범지라 여인의 말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으나, 그 서원을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여인의 약속을 믿고 운뢰 범지는 다섯 송이의 꽃을 사 정광여래께 향했다.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정광여래께 뿌리며 운뢰 범지는 이 복으로 말미암아 다음 세상에 정광여래처럼 될 것을 서원했다. 그리고 정광여래가 진흙을 밟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풀어 진흙길 위를 덮었다. 그 때 정광여래가 운뢰 범지의 뜻을 알고 “너는 다음 세상에서 석가문(釋迦文) 불·여래·지진·등정각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내렸다.
지금 이 정토분의 대화는 석가가 자신의 전생을 회상하며 묻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기 중요한 것은 바로 연등부처님으로부터어떤 보장이나 확약을 받았다고 하는 그 법이 실체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도가 아닌 것이다.
10-2.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실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여래가 전생에서 샤카의 성자가 됨을 확약 받았기에 성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소승적 발상이요, 대승적 발상이 아니다.
10-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10-4.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불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은 장엄하게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장엄하다 이름하는 것이오니이다."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장엄불토' 라는 말은 '불토의 건립을 성취한다' 라는 뜻이다. '~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완성한다'의 복합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시명장엄'의 名은 명사가 아니라 '이름한다'는 동사이다. 그리고 그 앞의 是는 지시대명사로서 앞의 문장 전체를 받는다. '이것을 장엄이라 이름한다'의 뜻이다. 여기에는 장엄이라 이름하는, 그 이름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즉 장엄하게 내가 불토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아상이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것을 장엄하게 한다라고 표현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우리의 현실적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로 긍정되어야 할 사태며, 부정되어야 할 것은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 는 나 보살의 의식이다. 그것은 '장엄'은 이름뿐이다 의 뜻이 전혀 아닌 것이다. 금강경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의 오류가 모두 이 '시명'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스님들이 너무 쉽고 안일하게 '알음알이'니 '헛된 이름 뿐' 이니 하는 식으로 보살의 사회적 행위를 내쳐버리는 空病에 빠져있게 되는 병폐가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알음알이'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참 지혜가 아니라 문자적 지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0-5. "그러므로, 수보리야! 뭇 보살과 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또한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마지막 구절이 육조 혜능이 출가의 인연이 되었고 그로 인해, 오조 흥인을 찾아뵙게 되었다는 『단경』, 『 전등록』 의 이야기는 앞서 개략을 논할 때 상세하게 언급하였다.
10-6. 수보리야! 비유컨대, 그 몸이 수미산처럼 큰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몸이 크다 할 것이냐? 크지 않다 할 것이냐?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수미산왕'이라는 표현은 산 중의 왕이라 해서 붙인 이름일 수도 있지만 중국불교문헌에서는 모든 사물에 王자를 붙여 그것을 생명체로서 존중해주는 의미의 접미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 자지가 말자지 같다 했을 때도 '
馬王'의 그것 같다 했고.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의 거소가 있는데 곧 삼십삼천인 도리천이다.
10-7.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큽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부처님께서 그 몸은 몸이 아니라 말씀하기기 때문에 비로소 이를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내부에 복을 쌓아 만든 몸도 연기(緣起)의 산물이라, 아무리 커도 덧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제아무리 존경을 받는 영적 지도자도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망상체(妄想體)이다. 심하면 악마이다.
옛 스님들은 ‘사람들은 귀한 사람 몸을 받아놓고 몸뚱이를 섬기다 죽는다’고 한탄했다. 이런 것들은 지나가면 그만이다. 마음속에 빛나는 수정으로 자라고 크지 않는다. 35억년 동안, 아직 의식이 출현하기 전까지, 그리고 고등의식이 출현하기 전까지, 인간은 몸뚱이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비신, 시명대신'과 '비장엄, 시명장엄'은 동일한 논리적 구조로 되어 있다. 부정이 아닌 대긍정의 논리다. 그러나 그 대긍정의 전제는 身이 身이 아니라고 하는 '無我(실체의 부정)인 것이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24/5/6, 17:00 종일 집자하다가 잠자다가를 반복했다. 비가 내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이벤트가 두려운 나이가 된 것일까? 아니면 어제 어버이날이라고 2拾 챙긴 것 그것 밖에 없어서 맘이 쫄린 것인가!ㅎㅎ 분홍색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로아맘과 로아의 손짓과, 이서방의 손흔듦을 보았다. 이녀석들은 그냥 자신들의 집 403호로 들어갔다. 들어가라고 손짓해놓고도 무연 보고 싶구나! 여보, 병방시장에 수제비먹으로 갈래요?)
11-1.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인도의 古문명은 하라파, 모헨죠다로 등의 유적지에서보여지는 하라판문명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것을 포함하여 인더스강 계곡 전체문명을 가리켜 인더스계곡문명이라고도 총칭한다(BC 3300~ BC 1300). 그러니까 지금 파키스탄 펀잡 지역이다. 이 하라판문명은 아리안들이 중앙아시아에서 하향 이동하기 이전의 토착적인 농경문화였고, 그들의 언어는 아리안어가 아닌 드라비다어군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명은 기원전 1750년경 급속히 쇠락했다.
키가 크고, 말 잘 타고, 얼굴이 허옇고, 술 잘 먹고, 노래 잘 부르는, 호전적이고 거친 사람들, 이들은 산스크리트어라는 특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아리안은 하라판문명의 쇠락과 더불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토착문명을 흡수해갔다. 이들은 베다문학을 만들었고, 브라만계급을 형성했고, 지배계급으로서 카스트제도를 정착화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에서 점차 동진을 시작했고 서서히 그 문명의 센터를 갠지스강 유역으로 옮겼다. 붓다시대에는 모든 문명이 갠지스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이 갠지스강의 비유는 암암리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인도인들의 한과 낭만을 짙게 깔고 있는 것이다. 인간 붓다의 생애도 갠지스강의 한 모래알처럼 그 역사의 홍류 속에 쓸려 지나갔을 것이다(멋진 표현이다!).
여기 '여항하중소유사수'의 구문에서 '所有'가 『대정』본에는 '소소所所'로 되어 있다. 해인사본의 '所有' 가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세조본도 '所有'로 되어 있다. '소소所所'는 '處處'와 같은 의미로, '곳곳에'의 뜻이며 '모든'의 뜻으로 새길 수는 없다. 이것은 단순한 식자상의 오류일 것이다. 해인사판본이야말로 모든 본의 근원이 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의 '불不'은 여태까지 모두 '그렇지 아니한가' 로 새겼으나 사실 이것은 한문에 있어 의문형을 만드는 방식의 문장패턴일 뿐이므로, 그것을 따로 새기지 않고 그냥 의문형으로 번역하면 그 뜻이 정확히 반영되는 것이다. 따로 번역하지 아니한다.
11-2. 수보리가 사뢰었다: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11-3.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써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須菩提 我今實言 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아금실언고여'는 여태까지 없었던 표현인데, 산스크리트 원문에 '내가 너에게이른다. 수보리야! 너 잘 듣거라'로 되어 있는 것을 축약한 것이다. '實言'이라는 말 속에는 '잘 명심하라'는 간곡한 권면이 숨어있는 것이다.
11-4.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言 甚多 世尊
11-5.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인도인들의 과장법의 표현과 그 진실한 내용이 잘 조화되어 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돈은 필요한 것이다. 『금강경』은 칠보의 공덕을 천시하거나 낮잡아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도 '甚多'한 것이다.
인간의 경제적 삶은 인간존재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가치는 그것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 집에 금은보화를 채워놓는 것이 중요한가?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이라도 참으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 땅의 (민중)젊은이들이여! 깊게 생각하고 또 깊게 생각할지니.
尊重正敎分 第 十二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12-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 하나라도 설하는데 이른다면, 마땅히 알라.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도 같은 곳이 되리라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함에 있어서랴!
復次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蓚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이 분 역시 대승불교운동의 역사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이 금강경의 성립이, 부처님의 탑묘와 같은 것이 많이 지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탑묘가 많이 지어진 아쇼까왕의 시대 이후가 될 것이다.
(2024/5/6, 월요일 21:52 토,일,월 사흘연휴, 일요일날에 어린이날이 겹쳐서 대체휴무로 월요일까지 쉬었다. 그 연휴 첫쨋날은 날씨가 참 더울정도로 좋았지만 나가고 싶지 않았고, 그 다음 이틀동안은 내내 비가 내렸다. 나는 집자를 열심히 하였으나 실제로 279페이지에서 멈출 수 밖에 없다. 바로 지금. 왜?? 자야 하니까ㅋㅋ 폰을 지도에서 어디를 갔고 그런 것이 다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하는 쇼킹한 방송을 보았다. 직업의 베테랑?? 그런 방송. 물론 어디서 잤는지까지도 다 나온다고 해서 깜짝 놀랐고 왜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어.. 금강경이 32分 까지 있으니 이제 간신히 1/3을 집자한 것인가? 이렇게 열심히 집자를 해보지만 금강경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 느낌이다.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실감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금강경을 읽고 가장 많이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뭔가가 있을 것도 같고. 성철스님의 마지막 유언을 나도 의뭉스럽게 생각했었는데 확실히 개신교목사들과 나는 같은 종족인가 보았다. 아마도 스님은 스스로 지옥으로 가셨구나 싶다. 그것을 어찌 범인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
(24/5/7, 08:07 곧 출근시간이다. 아! 어케 사흘을 이리도 빨리 보내버렸단 말이냐?ㅎㅎ 그 시간은 참 변함없이 자기 시간을 지키고 있구나! 어제 하루 출근을 안했을 뿐인데,ㅎ 마음이 헛헛한 게 기묘하다. 잃어버린 연휴?ㅋㅋ 하지만 그 기간에 금강경에 올인했으니 뿌듯함도 있고, 역쉬 일하고 쉬고 하는 템포가 인간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이 分의 근본사상은 바로 요즈음의 교회나 사찰의 정황과 비슷하다. 목사님이나 스님께서는 헌당한다고 신도들을 못살게 구는데, 이 금강경의 기자는 바로사구게 하나라도 외우는 그 자리가 바로 교회요 법당이요, 싯달타의 탑묘보다 더 중요한 성소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탑묘'는 부처님의 묘소로 가장 큰 존경을 바쳐야 할 곳이다. '아수라'는 혈기가 왕성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귀신의 일종이다. 이란이나 인도나 고대신화에서는 이 아수라는 善神들이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인드라신(제석천)등의 대두와 더불어 아수라는 데바의 적으로 간주되었고, 항상 신들에게 싸움을 거는 악마. 귀신류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 데바와 아후라(아수라)의 관계가 이란의 신화에서는 거꾸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윤회전생설 중, 육도설에 있어서는 아수라가 사는 세계를 '아수라도'라 하여 천.인과 함께 삼선도三善道의 하나가 되며, 불법의 수호신의 지위를 허락받았다. 따라서 여기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수라는 악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불법수호의 신의 함의로 쓰인 것을 알아야 한다.
힌두신화에서는 아수라들과 데바들은 불사의 묘약인 아므리따를 추출하기 위하여 밀크의 대양을 같이 휘젓는다. 그리고 이 아므리따의 소유를 위해 양 진영은 끊임없는 영원한 투쟁을 벌인다.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이 아수라가 벌이는 비참한 싸움의 장소를 보통 '아수라장'이라고하는데, 우리나라의 일상언어에서는 엉망진창, 개판, 난장판을 '아수라장' 이라 하는 것도, 불교설화를 통하여 옛날부터 이런 이미지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습속 속에 힌두의 신화가 부지불식간에 침투한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아수라왕과 제석천의 전투는 『俱舍論』에 묘사되고 있는데, 제석천궁을 공격한 아수라왕이 해와 달을 잡아 손으로 덮는 데서 일식.월식이 생긴다고 말하고도 있다(ㅎㅎ).
12-2.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과 그의 존경스러운 제자들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것을."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이것은 '교회론'의 최종적 해석이다. 내가 이 금강경을 내 방에 꽂아두면 곧 내 방이 부처님의 사리탑이 되고 법당이 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참신하고 과격하고 진실한 사상인가?
불교에서 '成就'는 '몸에 구비되어 있다', '달성한다', '완성한다, 충분히 이루어진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우리말의 '성취한다' 는 그대로 불교의 용례에서 온 것이다.
여기 '若'은 그냥 명사와 명사를 연결하는 '또는'의 의미로 쓰였다.
(08:29, 이제 아침집자를 접는다. 남은 5분의 시간에는 마틴을 위로하자ㅎㅎ)
(5월7일 화욜, 20:58 연휴 전의 금요일에는 6층에 올라가려면 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아팠다. 오늘 2동 609호 텐션 옥상의 물탱크 하부를 보러 올라갔을 땐 힘듦이 1쯤 될까?? 그만큼 몸이 保藥을 복용한것처럼 새근육이 생겼다ㅎ 그곳뿐일까? 1동 617호의 벤츄는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고. 오후에 긴 사다리를 옥상으로 올릴려구 했으나 점적이 끊이지 않아서 결국 이테시스 강의를 들으며 오후를 보내야 했다. 집에 돌아와 두부찜과 멸치 김장김치와 두릅.취나물을 먹으면서 점심의 누룽지로 인한 허기짐을 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로아와 그림도 그리고 가위를 떨어뜨려 줏으러 1층에도 나가믄섬, 일 하고 들어온 저녁은 행복했다. 왜?? 연휴 때의 저녁은 그렇지 않은데 근무한 화요일 저녁에는 이리도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것일까? 저녁 mbc뉴스에 이재명 대표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예정이라고 했다. 칼침에 단식에 몸이 아마도 말이 아닐 것이다. 시련 없이 대통령이 되면 박근혜나 윤석열 꼴 날 껄 앎으로 어려운 굽이를 만날 수록에 더욱 더 힘을 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마음 집중한다.
如法受持分 第 十三
법에 따라 받아지녀라
13-1. 이 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야 하오리까?"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13-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를 마땅히 받들어지닐지라."
佛告須菩提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콘체는 『금강경』이 바로 여기서 끝난다고 보고 있다. 콘체의 이와 같은 분석은 공부를 깊게 한 사람의 통찰력 있는 문헌 비평적 발언이다. 실제로 금강경의 주된 암송이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사실 내용적으로 보면 이 이후의 금강경은 여기까지의 내용의 사족에 불과하다.
콘체는 이 13분에서 29분까지의 자기 번역을 자평하여 "도움이 안되고, 결착이 나지 않으며, 지루하고, 영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주 적극적으로 혼란스럽다." 고까지 혹평한다. 그리고 30장부터 32장까지 참신한 새 기운이 솟고 있다고 말한다.
분명 이후의 부분이 잡스러운 비빔밥 재탕일 수는 있으나, 이 뒷부분이 없다면 금강경은 진실로 소품에 머물렀을 것이고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마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반복은 반복이 아닌 변주며, 그것은 아마도 금강경의 기자들에 의하여 세심하게 오케스트레이션된 의도적 구성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의도를 살리는 방향에서 살을 붙이고 문법적 구도를 부드럽게 가다듬고 음색을 자연스럽게 하여 새롭게 연출해낼려고 노력할 것이다.
13-3.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설한 법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느냐?"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汝當奉持'에서 멋있게 끝난 피날레를 억지로 논리를 붙여내어 끌어간 느낌이 역력하다. 그러나 퍽으나 자연스럽게 논지를 펼쳐가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가 금강경을 가장 중요한 所依(의지할의) 경전으로 삼으면서도 우리나라가 자체로 소유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고려대장경 본을 텍스트로 한 금강경이 역사적으로 희유하다는 이 사실을 도대체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여기 3절의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 즉비반야바라밀 則非般若波羅蜜 '이 우리나라에서 나온 거개의 『금강경』에는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蜜,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 로 되어 있다.
'則' 字가 '卽'으로 되어 있고, 끝에 '시명반야바라밀'이 첨가되어있다.
무비스님본이 그렇게 되어있고, 또 여러 판본을 비교연구하신 석진오 스님본이 그렇게 되어 있고, 이기영본은 나카무라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대정본의 모습대로 되어 있으나, 그 우리말 해석에는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라는 구문을 첨가해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그 첨가해놓은 상황에 대한 특별한 설명도 없다. 다시 말해서 해석할 때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보지 않고 한국의 통용본을 따랐다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있지도 않은 것을 적어놓은 아주 단순한 허위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본에도 『대정』본에도 '시명반야바라밀'이라는 구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五家解』 에 기초한 世祖 언해본에 나타나고, 玄岩新書의 김운학 역주, 『新譯 금강경오가해』 속에 영인되어 있는 일제시대판본으로 보이는 현토본에 나타날 뿐이다.
고익진 선생이 책임교열한 동국대학교 『한국불교전서』 속에 들어가 있는 득통 기화의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 본 속에도 '시명반야바라밀'은 존재하지 않는다(도올은 이 사실을 본인이 일일이 대조해 보아 비로소 안 자신만의 先지식일까? 아니면 이미 어떤 누군가의 비평론을 읽고 마치 자신의 선지식처럼 난체하는 것일까? 이책 저책 마구 쓰느라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무슨 시간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판본하며 사열하여 칙則字나 卽字나 시명 같은 문제점을 밝혀 낼 수 있겠는가? 더더구나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는 더더욱 그런 작업은 요원하리라).
이것은 판본의 무검토에서 생겨난 단순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문의 국제적 신빙도를 추락시키는 아주 부끄러운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학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이러한 사례들이 우리나라 논문에는 비일비재한 것이다(이 얘기를 들으니 김건희의 박사논문의 대 희극의 무대가 떠오른다. 국민대는 그리하여 아마도 박사 신빙도가 국내 최저수준으로 떨어졌지 않았을까나?? 그런 형태의 박사논문이 횡행하는 작금에 불교학 박사들 역시 별다를 것인가! 기대하는 게 차라리 안쓰럽지 않을까??).
나는 동경대학교 중국철학과에서 학창생활을 거치면서 일본 학자들이 너무도 뼈저리고 가혹하게 이런 문제에 관한 비판의식을 축적해가면서 학문여정의 일보 일보를 쌓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 너무도 무지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시명반야바라밀' 하나쯤 삽입한다고 금강경의 대의가 변화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금강경의 의취가 더 일관되고 풍부해지는데 뭐가 그렇게 야단법석이냐?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그것이 오히려 들어가 있는 형태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쯤 첨가된다고 금강경이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라집한역본의 사실이다. 학문에 있어서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첨가할 때는 그 첨가하는 정확한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누가 했는가? 필부필녀가 했을 것이요, 선남선녀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목판이다. 한 글씨 한 글씨 써서 파넣은 것이다. 그런데 한 글자도 쉽사리 어긋남이 없는 善本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석학들의 수준이 고려말기 대장경 판각을 관장했던 학인이나 공인들의 수준에 못미치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과연 우리의 학계가 이토록 기본을 무시하는 학통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기르고 있다면 이런 민족의 손끝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전자산업이나 여타 정밀산업이 나올리 만무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학문의 토대가 쌓여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을 따라 잡느니 어쩌니 말하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고려대장경의 판본을 정밀하게 검색해보는 기초적 학문의 자세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매우 긴 도올의 잔소리가 간신히 끝이 났다. 도올의 말을 따라가면서 목청을 분석해보면ㅎ 하여튼지간에 꼰대중에도 왕꼰대에 가까울 것이다. 본인의 한자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다고 이토록 뛰어난 척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걸까ㅎㅎ 공부라는것이 평생 한길만 파도 끝없이 새로운 사실이 솟아나는 법인데, 도올선생은 하여튼 다작에 속하고 그러다 보니 나 같은 평범한 눈에도 어떨 때는 급조로 인한 무식의 단면이 눈치채이기도 한다. 금강경은 조금 자신있는 과목이겠지 싶다. 목소리 톤으로 볼 때).
13-4.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13-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다 하겠느뇨?"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13-6.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言 甚多 世尊
13-7. "수보리야!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우리나라의 여타 번역이 바로 이 '是名'의 해석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대로다. 반야의 사상은 근원저으로 우리의 '언어'의 세계를 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라는 방편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언어 그 자체가 파라독스 덩어리인 것이다. 아무 낙서도 없는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팻말을 걸어놓은 것돠도 같은 근본무명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妙有的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티끌을 티끌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를 세계라 이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시간 22:52, 머리가 조금, 저 깊숙이에서 띠~잉 한다. 열이 나고 있다는 증거. 로아와 놀아주다가 멸치 똥을 따다가 조금 늦게 시작한 저녁 집자. 목욕하고 등에 로션 안바른다고 말한 거 같은데 또 끝나고나니까 서재로 와서 발라달라고 한다ㅎ 내일은 이경훈박사 면담하고 약을 타러 간다. 13:30, 그래서 오늘 주소장任에게 그 예기를 어렵게 꺼냈는데 흔쾌히 수락했다. 6월 16일 일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20일 오후에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나흘휴가 예정. 길수와 여주 장박사네 모임, 15:00는 결국 17:00로 변경되었다. 유황의 한마디 첨언에ㅎ )
[사흘을 비가왔고, 오늘(5/8, 06:35) 아침에 대지는 비로소 명징하게 꾸정心을 걷어냈다]
이 집에서 주방으로 저 풍경을 보면서 20여년을 살았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작전역 쪽으로 이사 갈 것이다. 그리되면 아마도 보이는 계양산 동쪽 사면의 저 풍경이 그리울 수도 있을 것 같으다. 아침 볕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다.
13-8.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뇨?"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13-9.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삼십이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수보리가 묻는 형식은 아닌 것 같애. '어째서 그런가하오면' 의 평서문이 맞지 않을까?ㅎ)
13-10.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다 바쳐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또한 다시 여기 한 사람이 있어 이 경 중에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지녀 딴 사람에게 설하였다 한다면 이 사람의 복이 더 많으리라."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다음의 분에서는 매우 감성적인 텃치로 바꾸어 우리를 감동시키면서 포괄적으로 총술하고 있다. 다음 분은 참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감동적이다.
離相寂滅分 第 十四
상을 떠나 영원으로
14-1.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의취를 깊게 깨달아 눈물 흘려 흐느끼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신다는 것은! 저는 예로부터 얻은 바의 혜안으로도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이 제 14분은 금강경 전체에서가장 긴 분이다. 콘체의 말대로 주된 암송이 제13분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어떤 제2주자가 옆에 있다가 그 전 내용을 간추리고 요약하여 총결짓기 위해 다시 한 번 읊어내린 듯안 인상을 주는 分이다. 여기 '심해의취, 체루비읍'과 같은 구문의 첨가는 이전에는 없었던 감정적 표현이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법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을 닦고 나서...' 로 되어 있는 것을 라집은 읍泣한다 라는 아주 간략한 중국적 표현으로 바꾸었다.
(07:53, 밥을 먹고 샤월했다. 길병원 이경훈박살 만나는 날.
오늘은 어버이날, 형한테 전활했다. 안받아서 끊었는데 곧 왔다. 배드민턴 중의 활기찬 숨소리가 느껴진다. 형 오늘 날씨 너무 좋네요. 그렇네~ 오늘 어버이날이라서 형 생각하면서 전화했어요. 어 그러냐? 고마와~~ 그렇게만 통화는 끝났다. 하지만 어제쯤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최명암이라는 걸. 생전 나쁜 말은 동생한테 하지 않으셨구나! 실제로 일흔 넷 잡쉈으니 누구에게나 어버이임은 확실하다.
14-2. 세존이시여! 만약 여기 다시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그 믿는 마음이깨끗하면 곧 참된 모습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알겠나이다.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實相이라는 말은 眞如와 같은 의미로,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의미한다. 실상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철학에 있었던 말이 아니고 바로 구마라집의 구역舊譯에 의해 유행하게 된 말이다. 나카무라는 현존하는 산스크리트 원본보다 라집이 저본으로한 산스크리트 텍스트가 더 古本이었다는 것을 여러 용어의 유무나 변형태로서 입증하고 있다.
14-4.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닫고 이를 받아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할 수 없지만, 만약 훗날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있어 이 경을 얻어듣고, 믿어 깨달아 이를 받아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14-5.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이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자를 곧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14-6.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如是如是
14-7. 만약 또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이야말로 심히 희유의 사람이라는 것을.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14-8.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여래는 설하였다.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고, 그래서 비로소 제일바라밀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14-9.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여래가 설하기를,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인욕' 이란, 대승보살의 수행덕목인 육바라밀 중의 하나이다. 인욕이란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모욕과 박해, 외도外道의 박해자나 비방자들의 비난, 중상, 모략, 굴욕 등을 참아내어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직장에서 소위 윗급을 만날 때 갖은 느낌들을 부딪히게 되곤하지. 그때의 비난, 굴욕을 느낄 때 그것을 참는 것을 '인욕'이라 하는거구나.)
'참는다', '인내한다' 라는 말을 할 때, 흔히 우리는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박해의 실체를 상정하기 쉽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참음은 근원적으로 '욕됨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받는다는 적극적인 뜻과, 모든 일에 대하여 희노애락의 동요됨이 없이 사물의 본성이 평등무이平等無二함을 깨달아 해탈한다는 의미로 확산된다. 사실 인욕의 본질은 참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박해의 실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단순히 참는다는 것은 '인욕'이다. 그런데 참는 대상이 없어지고 참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지, 즉 내가 참고 있다라고 하는 의식마저 해소되어 버리는 경지가 곧 '인욕바라밀'이다. 참으로 대승적 예수는 그렇게 자기가 인류를 대속한다 하는 의식도 없어야 하고 또 자기가 인욕했다고 하는 인욕의 의식조차 없어야만 진정한 예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아無我의 바라밀지혜가 없으면 그는 항상 배신감에 젖게 되고 불운에 대한 저주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불타는 인욕바라밀조차 그것이 인욕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욕바라밀일 수 있다는 역설의 논리를 여기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훈아가 노래 잘하는 강좌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는 근자 은퇴를 시사하였고, 마지막 콘서트를 전국을 돌며 하는 중이다. 김정은 돼지 발언을 하는 그를 보면서, 도를 넘긴다고 웃기고 있다는 비웃음을 물긴 하지만 노래강좌하는 젊은 모습을 보니 새삼 그가 순수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변한다. 나도 변하고 나훈아도 변하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08:35, 아침 집자 終.)
[시청을 지나 시청역 전철을 향하다가 큰붓꽃을 만났다
킁킁, 향이 조쿠나!
우아함. 상황의 치장 없이 허투루 대접하는구나 싶어 짠했다~
아, 활짝 핀 너의 인생 며칠이나 갈까?]
오늘은 어버이날
자식들 생각에 함몰되어
돌아가신
엄니.아버지를 잊었네
(24/5/9, 07:57 아침집자 始作ㅎ 소소가 유현주의 여정을 노래방에서 불러 단톡에 올렸네~ 나는 사부작카페에 가서 반해서의 목소리로 듣고 있다. 폐부를 관통하는 씨~원함으로 피로가 싹 날려가버린다. 울 딸의 목소리에서도 어떤 느낌을 느껴서 자못 감동스럽다.
초기 불교설화문악이 크게 성행하여, 오늘날 『대정대장경』 제3~4冊 전체가 본생경으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방대한 문학을 형성했다. 바로 이러한 문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솝우화나아라비안나이트 속으로도 흡수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가리왕과 찬디바리(전생의 붓다의 이름이며 '인욕의 수행자'의 뜻)의 이야기는 『현우경』 권제2에 쓰여져 있다. 도올이 상술하였지만 패스한다.
14-10.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그것은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신체가 낱낱이 버힘을 당한 것과도 같다. 나는 그때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어째서인가? 그 옛날에 마디 마디 잘림을 당했던 그 때에, 내가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코 분노와 미움을 냈으리라.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이러한 끔찍한 가리왕의 이야기는 결코 설화가 아니다. 보스니아, 씨에라 레옹, 라이베리아, 이스트 티모르를 보라! 지금도 보수를 자처하는 인간들은 태극기를 앞세우며 사람들을 마음대로 제거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그날 만을 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진정한 혁신도 없고 진정한 보수도 없다. 오로지 무명 속에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의 추태가있을 뿐이니, 우리를 짓누르는 업장을 모두 거둬내자!
14-11. 수보리야! 나는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것을 뚜렷이 기억하노니, 그 때의 세상에서도 나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14-12.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할지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며 또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어다.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08:32, 출근시간이 되었다. 금번 여주에 갈 때 하얀민들레, 입영전야, 송학사를 연주하리라... 아침집자 終.)
(24/5/10, 금요일 05:49 다섯시쯤 깨어 다시 잠들려고 누웠지만ㅎ 눈이 감기지 않고 그 잠시 사이에 방안이 어연 부우옇게 밝아지는 거였다. 달콤한 잠은 이미 불가능하다고 뇌가 포기함을 내 어쩌란 말인가!ㅎ 기상 전의 내 체조를 하고 나니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입 안을 닦고 큰 컵으로 계방산 약수를 먹었다. 부엌 창밖을 내다보니 계양산 동쪽 능선의 아침 노을이 참 좋겠구나 싶다. 어젯밤엔 'RC歌'를 작성하여 간단하게 연주하여 루트나인 단톡에 올렸다. 돌이켜보니 시인을 지향할 게 아니라 작사.작곡의 울타리를 기웃거릴 걸 그랬다. 시는 시어를 조탁하는 것도 되게 어렵고 음악도 그렇지만 시어로써 詩意를 창조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게 보통적으로 손쉽지가 않다. 그런데 음악은 어떤 형식.방식이 정해져 있다. 물론 음악도 결국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려면 결코 쉬운 건 아니겠지만...시인은 정말 타고나야만 한다고 결론내리고 포기하고 말았다.
14-13. 만약 그 마음에 머무는 바가 있다면, 그 머뭄이 머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항상 보살이라면 그 마음이 색에 머뭄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왜?? 보살은 자기 자신의 행복의 삶을 살지 못하고 가치없고 생각없는 일체중생놈들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보시를 하며 살아야만 할까??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하느니라.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약심유주, 즉위비주' 는 그 함의가 너무 축약되어 있어 난해하다. '유주有住'가 곧 '비주非住'가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안된다.
(다른해석) 만일 마음에 머무름이 있으면 이것은 머물음이 아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그러해서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시공에서 시간을 공간을 붙잡고 잠시도 놓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잡을 수 없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는데 혼자 정체되어 있으면 현상유지를 하는 게 아니라 뒤처지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면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재투자 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에 의해 가치가 줄어든다. 마음도 그렇다. 끝없이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같이 변하지 않으면 머무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퇴보하는 것이다. 약심유주 즉위비주(若心有住 卽爲非住)이다. 욕망은 이루어도 충족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에 머물면 머무는 게 아니다. 끝없이 욕망에 떠밀려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종당(鐘堂: 마침내)에 기다리는 건 고통의 바다이다. 가까스로 욕망을 이루더라도 기대하던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얼마 안 가 다른 욕망으로 질주하는 이유이다.
욕망을 품는 마음(행: 行)과 이루어진 욕망을 평가하는 마음(수: 受)이 다르다. 즉, 우리 뇌에서 욕망을 관장하는 부분과 호오(好惡)를 관장하는 부분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어느 한 쪽에 이상이 생기면 해당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욕망하는 부분이 망가지면 좋아하는 일이 발생하면 좋아하지만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부위가 망가지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성취가 되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은 하나가 아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수많은 부위(팀)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욕망을 관장하는 부위와 호오(好惡)를 관장하는 부위 등 여러 부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종종 욕망의 충족은 만족(好)을 가져오지 못한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려면 욕망 자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론은 ‘인간의 고(苦)란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수수께끼 같은 선불교적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위·무위라는 양변을 초월한 제3의 길이다.
마가렛 대처는 ‘개인만 있고 사회는 없다.’고 했고, 에밀 뒤르켐은 ‘개인은 없고 사회만 있다.’고 했다. 뒤르켐에 의하면 개인이 가진 생각·감정은 대부분 사회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이게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전체주의가 된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대중에게는 자기 생각이 없다. 자기 생각인 줄 아는 생각도 사실은 남의 생각이다.’라고 했다.
개인과 사회의 문제가 종교적으로 나타나면 영혼이다. 개체의 영원성에 빠지면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지만(아트만 론), 사실은 단 하나의 큰 영혼만 있다고 하게 되면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된다. 일종의 영적 군집론 또는 영적 사회주의이다.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靈)의 조각으로 보는 기독교 신비주의도 이와 유사하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4. 여래는 설하였다. 일체의 뭇 상들이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또 설하였다. 일체의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14-15. 수보리야! 여래는 참말을 하는 자며, 살아있는 말을 하는 자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며,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다.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의 법, 그 법은 실하지도 허하지도 아니하니라.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光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이 대목은 좀 의아스러운, 의뭉스러움이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 궂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대체 왜?ㅎ 사기꾼이 사기칠 때 이렇게 강조한다. 강조할수록 부정적인 인상이 더해만 가는 거는 상식 아닌가.)
14-16. 수보리야!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캄캄한 어둠 속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눈이 또렷하고 찬란한 햇빛이 온갖 형체를 비추고 있는 것과도 같다.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연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어둠과 빛은 근원적으로 그 이원성의 실체화를 위한 것이요, 여기서 말하는 어둠과 빛은 근원적으로 그 이원적 실체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의 로고스사상은 플라톤적인 발상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같은 문명권의 같은 사유패턴 속에서 다른 양식의 길을 선택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14-17. 수보리야! 앞으로 오는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열심히 읽고 외우면, 여래는 깨달은 자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모든 이들이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持經功德分 第十五
경을 외우는 공덕
15-1 "수보리야! 여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 나절엔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이 몸을 바쳐 보시하고, 또 점심 때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다시 또 저녁 때 갠지스강의 모래수 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한다 하자!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매일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겁의 시간 동안을 몸바쳐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우러나와 거슬리지 않는다면, 바로 이 사람의 복이 저 사람의 복을 이기리니. 하물며 이 경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남에게 해설해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 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나는 정말로 2000년 동안 말 진짜 못하는 놈
한 놈 알고 있어요.
이 놈이 어떤 놈이냐면 십자가 왼편에 매달린 왼편의 강도,
진짜 말 못하는 놈이예요.
이 놈이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자기도 괴롭고 아프고 힘들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가운데 구세주라는 분한테 뭐라고 그래?
"니가 무슨 구세주냐? 니가 진짜 구세주면 너도 살리고 나도 살려봐라."
너 구세주도 아니다 이거예요. 예수님도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서 아파 죽겠는데
이놈이 이상한 소리하니까 대꾸를 해요? 안해요? 대꾸를 안해요.
그런데 난 2000년 역사상 진짜 말 잘하는 사람 한사람 알고 있어요.
이게누구예요? 오른편에 있는 강도예요. 오른편에 있는 강도가 뭐라고 해요?
"야 이놈아, 너하고 나하고는 죽어도 싸. 그런데 이분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 전부 다
병 고쳐주고 함께 했던 분인데 니가 무슨 자격이 있어 그런 말을 해?" 그리고 한마디
더해요.
"주 예수님 마지막 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왼편에 있는 놈한테는대꾸도 안하던 예수님이 '가상칠언'이라고, 십자가에서 일곱 가지 중요한 말을 해요.
"다 이루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보십시오. 이 몸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목마르다."
그리고 이 오른편의 강도한테
"너야말로 오늘 나와 함께 진정으로 낙원에 들 것이다."
막판에 말 한번 잘한 바람에 천국 입장 1호 고객이 되었어요.
ㅡ황창연 신부 '귀티나는 대화법' 중에서
'수지受(받을수)持(가질지)지' 는 내가 '받아 지닌다' 고 그냥 뜻대로 풀었지만, 실제 의미는 귀로 듣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간직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암기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경'의 세계는 인간의 마음을 매기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암기 이상의 위대한 신앙행위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소리를 내 마음에 새기는 작업인 것이다.
'초일분', '중일분', '후일분' 은 아침 점심 저녁 정도의 아주 느슨한 개념이다. '하루종일' 의 뜻이 된다.
'무량백천만억겁'은 인도인들의 과장법의, 엄청난 스케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공상의 여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08;08, 아침집자 終. 나는 일주일에서 금요일이 가장 행복하다ㅎ 왤까?ㅋㅋ ...왜 가깝게 훅 다가서지 못하고 가끔씩 뜸하게 전화나 하는 사이일까? 궁금증이 마침내 풀렸다. 이번주 토요일 천안 독립기념관에 가. 스물 몇명이서. 나는 친구들과 만나는 게 참 좋아. 다들 나이 먹어 늙는데 유독 젊은 거 같아요. 그래? 원장님도 그런 뜻으로예기하던데... 공감하지만 비로소 아! 남자의 욕심에는 탐탁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경계에 있구나! 그것이 원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나레이션은 잊지 말고 마음에 품자고 다짐한다. 어버이날 경로당에 만오천원 옥수수 과자를 선물하고 절을 드렸다.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감사가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장감사인줄 알고 좀 불편했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1동 112호 할머니는 어제 과일을 주면서 송감사와 싸웠다고 말했다. 오후에 6동 앞에서 송감사와 지영자할매를 만났다. 인사를 나누었고, 여보 씻었엌? 08:17분이다 서두르자~~)
(20:55, 불금. 밤이 조금 깊다. 내일은 루트나인 여주의 두학이네 농원에서 예정돼어 있다.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들으며 나 군대간다고 행가래쳐주던 그 놈과 그 옆의 친구가 왜?? 불편하게 느끼고 싫어지고 있을까? 무슨 엄청난 혜택을 입고 그 은혜를 저버려서 비롯된 감정의 못난 골일까? 아무튼지 내일이면 판가름나리라. 년말모임에서 옆자리에 앉아 내 무릎에 얹히던 손길이 가끔 생각키우기도 하긴 했었다. 음로론이 자꾸 머리를 혼동스럽게 한다. 사이에 끼어서 말 풍선 띄우는 못난년이 있을 수 있다. 여하튼 그런 거 아니니까 아무 문제 없다. 한편 있으면 좋고 없어도 불편하지 않는 친구가 켕길 거 또한 뭐가 있겠나. 잘 해결하고 즐거운 시간 갖겠다고 한다.
15-2. 수보리야! 요약하여 말하건대, 이 경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가히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으니, 여래는 이를 큰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고, 가장 좋은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느니라.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최상의 지혜는 최상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설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요, 깨달음의 지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설하여질 수밖에 없다. 여기 '대승'이라는 표현은 '이것 위로는 아무것도 없는 道를 향하는 사람들'이란 표현만 있다. '소승'과 짝지어 대비되고 있지도 않다.
'불가사의' 란 말은 일상언어에서 '이해가 되기 어려운 기묘한'의 상투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의 언어개념이 격절되는 세계에 대한 형용이다.
15-3. 여기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이를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고 가없는 불가사의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스스로 깨닫게 되리라.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阿縟多羅三邈三菩提
'광위인설'의 '광'字 같은 표현은 좀 후대의 전도주의적 성격이 강화된 표현이다.
보통 '땅 끝까지 전파하라' 운운하는 따위의 전도주의는 [마가복음(공관복음서의 원형)]에도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 첫머리에 나온다. (1:8). '하담'은 '걸머멘다'의 의미이다. '자기의 어깨로써 보리를 걸머진다'가 된다. 티베트역문은 '일체중생은 자기의 깨달음을 어깨에 멘다' 이다. 그 뜻을 생각해보면, '자기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나는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스스로 깨닫는다'로 의역하였다.
'어깨에 멘다'는 것은 내 자신의 것으로 한다. 내 자산으로 만든다. 내 힘으로 삼는다의 뜻이다.
15-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작은 법에 만족하는 자들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하여 해설하지도 못하게 되느니라.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낙소법자'는 소승을 간접적으로 지칭한 말이다. 즉 당대의 아라한을 추구하는 부파불교의 비구들을 가리킨 말이다. '낙소법자'는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로 직역되지만, '작은 법에만족하는 자들'로 표현을 달리하였다.
'아상' 이 '아견'으로 바뀌어 있다. '아견'은 '내가 실체로서 있다고 하는 견해'의 뜻이다.
我見에 집착하게 되면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청수聽受) 남을 위하여 해설할 수도 없다는 것은 만고의 명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학문(학문이 원형은 '문학問學'이다.묻고 배움)을 하는 기본자세에 관한 것이다. 우선 남의 말을 들으려면 내 마음을 비워야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 도올이 지식이 많다고 말하는데, 나는 지식이 없다.단지 내서재에 책이 많아 그책에 있는정보들을 활용할 뿐이다. 단지 내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담을 수 있고, 남의 말들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주워담을 수 있을 뿐이다.
아상. 인상을 없애는 데는 '허기심虛其心' 노자3장의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15-5. 수보리야! 어느 곳에든지 이 경이 있게 되면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하는 곳이라. 마땅히 알지니라! 이곳이 곧 탑이라는 것을!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드리고 주위를 돌면서 온갖 꽃의 향기로써 그곳에 흩으리라."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修羅 所應供養 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遶 以諸華香 而散其處
앞서 말했듯이, 이 마지막 절의 멧세지는 '교회론'의 궁극적 해결이다. 교회라는 조직에 집착하는 자들은 교회는 지상에 이미 도래한 천국이며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류의 교회론의 도그마에 빠져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교회라는 조직을 관리해야만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 속에 들어가 있는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이러한 금강경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천막지기'로, 신도로부터 금전 한 푼 취함이 없이 홀로 사시지 않았던가! 『금강경』 이 말씀, 그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야곱이 돌베개를 쌓은 곳이 어디 시멘트 건물 속이던가? 예수가 사탄의 시험을 받은 고난의 간증처가 바로 허허벌판 광야가 아니었던가? 세레요한이 구원을 외친 곳이 그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요단강이 아니었던가? 사막의 이사야 선지자는 그 미세한 주님의 음성을 어디서 들었는가? 드높은 고딕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울림통에서라도 들었단 말인가? 어찌하여 대형교회로만 가는가? 어찌하여 허리띠 졸라매어 연보돈만 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는가?
'공양'이란 말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대접한다'는 뜻이다. 종교적으로 위대한 경지에 간 사람들에게 공경스럽게 자구 등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22:18, 왼손 엄지도, 손등의 줄기도 아파라~ 아까 잠시 안마기 위에서 졸았는데 쩡이와 아내의 말다툼ㅎ 소리에깼지. 쩡이가 설겆이 하겠다는 것을 말리는 아내의 목소리들이 서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ㅋㅋ 이상한 모녀간이네 증말ㅋ 다섯째칸에서 C메이져인데 '도레미파솔'로 솔로를 시작하고 응용. 확장라고 권유하는 "난리블루스'. 그의 목소리가 편하다. [기타 초보자도 따라할 수 있는 애드립 &] 내일의 고단한 여정을 위하여 그만 푹 쉬자! 오늘 새벽 다섯시쯤에 깼는데 싸이렌 소리가 났고, 사라져 가는 그 곳이 어디일까? 했는데 서해그린 2동 103호에서 난 불이었다. 119가 103호 가스를 잠궜어야 했는데, 203호 가스를 잠궜다나?? 지반장의 이야기다. 그가 나 퇴근할 때 쪽지를 주었고 아무것도 없어서 찢어 버렸다.)
(24/5/11, 토요일. 새벽의 침대에는 차츰차츰 부옇게 색조가 번진다. 그때가 04시 얹저리였다. 잠을 더 청하였으나 불가함을 느꼈다. 아내는 곤하게 잔다. 남편은 그모습을 보면 늘 애잔한 나자가 된다. 낮 내내 로아와 씨름하고 저녁 만찬을 꾸리고 몸은 불고 이곳저곳의 근육통을 호소한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할텐데..,
아내는 가끔 "나 가족력이있자나요~ 당신 나 치매걸리면 요양원에 보내지 말고 당신이캐어해주세요." 라고 말한다. 그런소릴 들으면 약간 혼동이 온다. 오래 살게 되어 즐거워야하나? 아내 없는 인생이 닥치면... 아마도 최초의 절망이 밀어닥치지 않을까? 모든 것을 지금 케어해주는 아내를 잃고나면 닥칠 혼란이 벌써부터 버겁다.
박인희가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왔다. 와~~!! 46년생이라고 한다. 명암이 형이 50년생이니까 형보다 네살 더 먹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미국에서 많이 생활하고 여든에 모국의 인기 앵커의 방송에 나와 방금 '모닥불'을 들었다. 가는 떨림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햐안머리, 굵은 테 검은 안경, 부리부리한 눈, 이마의 사마귀는 내가 아는 그녀와 영 매치되지 않아 초기에는 당황스러웠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조심스러운 언어와 떨림이 전해져 오며 낯섬이 친근으로 변해간다.
能淨業障分 第 一六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16-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이는 전생에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임마누엘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나 현실적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의 문제를 아주 심도있고 고민스럽게 파헤치고 있다. 간략히 말하면, 도덕과 행복의 괴리 문제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을 읽었었지. 젊은날에. 그런데 그땐 이해가 전혀되지 않았다. 독서 약력이 일천해서 그랬겠지. 그런데 오늘 도올의 지성을 통하여 비로소 그 개략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가끔 도올의 '주역강해' 그런 곳에서 민낮으로 만나 그런 걸 불편해 했던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싶다. )]
칸트는 도덕은 상식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우리의 직관은 건전한 도덕의 궁극적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철학의 임무는 이 궁극적 기준을 명료하게 명시하는 작업일 뿐이다. 칸트는 이것을 '정언명령'이라 불렀다.
칸트는 인간이 결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정언명령의 의무를 실천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아무리 나의 도덕의지를 실천하고 산다고 해도, 바로 그러한 삶이 나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상황!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괴리며, 이 문제로 인해 우리의 모든 '억울함'의 느낌이 발생한다.
칸트는 이 '억울함'의 느낌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로서 神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에 의하여 그의 미래적 삶에 있어서 오늘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도덕의 근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좋은 일 하면 손해 본다'에서 좋은 일 하는 행위는 손해 보는 것의 조건이 되며, 따라서 '좋은 일 함'이 원인이 되고 '손해 봄'이 결과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분석의 상식적 구조이다. 그래서 이 인과관계가 억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윤회연기를 도입하면 우리의 추론은 단연코 깨어지고 만다.
여기서의 인과관계의 설정이 너무 협애한 현재적 시점에만 국한되어 그 연기적 실상의 전체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행위는 미래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선과를 거둘 것이며, 현재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악과惡果는 과거의 나의 악업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인과관계를 기나긴 윤회의 과정속에서 넓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일 하면 손해본다' 라는 우리의 현실적 판단은 옳은 듯하지만,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미신적인 전생이나 후생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의 삶에 있어서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이 곧 나의 현재적 행위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양하는데 보다 포괄적인 인식의 지평을 제공하는 훌륭한 논리구조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일 해서 손해 보기 때문에 좋은 일을 안할 것이 아니라, 손해 보든 말든 반드시 선업善業을 계속 쌓아가는 행위야말로 나의 삶의 정언명령이라는 것이다(내 영혼 깊숙히 들어오는 참으로 귀중한 구절이다).
이 절은 바로 선남자선여인이 금강경의 실천으로 인해 현시적으로(는) 핍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과거 악업의 결과일 뿐, 오히려 그러한 핍박으로 인해 나의 전생의 죄업이 다 씻기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하는 희망에 찬 찬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16-2. 수보리야! 내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아승기의 겁이 기나긴 시간 동안에, 연등부처님을 뵈옵기 전에도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많은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고, 또 이 분들을 공양하고 섬김에 조금도 헛된 세월이 없었어라.
須菩提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아승기'는 '셀 수 없음'의 의미이다. 10의 59승으로 알려져 있다. '나유타'는 1,000억에 해당되는 수량의 단위. 여기서는 부처님의 숫자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쓰였다.
16-3.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잘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공덕을 쌓는다면, 그 공덕에는 내가 과거세에서 그 많은 부처님들을 공양했던 그런 공덕이 그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천만억분의 일 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하리라.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어떠한 종교적 행위의 축적도 한순간의 깨달음의 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이 래디칼한 금강경의 메시지야말로 모든 관습의 루틴에 빠진 종교인들에게 벼락을 내려치고 있는 일갈일 것이다.
(07:38, '코드톤을 연습하지 마시고, 코드톤을 찾아서 사용해보세요! ㅡ난리블루스. 를 찾아 들으면서 집자를 한다. 코드톤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니 투지가 생기네ㅎㅎ 나는 이제 침대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푸욱 자고 나면 '달걀과 들기름' 이 기능을 번져 하초로 확장해 들어가리라. 나를 지금 억압하는 것은 안과황인데 고민한 만큼 상큼한 바람이 되리라~)
(24/5/12, 22:13 여주에서 올라와, 하우고개 정상부의 빵집에 세 식구가 들렀다. 배경은 소래산. 가스버너 해프닝이 길수와 있었고ㅎ GanSukogoeri 3flower and 앞 뚝방 산책 후 병방시장에서 냉면&수제비로 석식하다. 곱게 늙는 중년여인이 둘 있고 늙어 주름투성이의 중년남자가 둘 있는데 버무린 배추김치와 갓김치 단무지가 너무 행복에 족하다. 가남읍 양귀리. 천평 정도의, 하우스 2개, 천개의 고추모.. 장난이 아닌 장두학의 농사규모에 놀라다. 마음을 써서 황과 동환이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기타는 연주되지 않았다. 새벽 뻐구기 울음소리와 지지배배 제비의 비 온 다음날의 아침풍경은 황홀했다. 이경실 양귀비의 표정이 살아 있고, 팔뚝살이 굉장해서 놀랐다. 장사장이 심근경색을 앓아서 모든 것 처분하고 귀농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친절한 초대였고, 알맞고 맛있는 반찬에 놀라고 아내에게 준 김치에 감사하다. 황이는 용인으로 들러 간다고 하고 세가족은 같이 상경하여 커피 후 헤어지다.
16-4.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법이 쇠퇴한 먼 훗날에도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지니, 그 때 그들이 얻으을 수 있는 공덕을 내가 만약 자세히 다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마음이 미쳐 흐트러지거나, 반신반의하여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라! 이 경의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 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須菩提 當知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不可思議
이 절의 마지막 한마디는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를 연상케 한다. 모든 신비주의는 신(God)이라는 언어를 넘어서 신성(Godhead) 그자체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나 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구극에 있어서는 이러한 합일조차도 거부되는 단절이 드러난다. 신과 나라는 모든 실체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지혜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모든 지혜의 신비는 주관과 객관, 주부와 술부의 대립이 해소되는 자리에 서있다. 어떠한 언어도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없다. 그래서 불가사의한 것이다. 금강경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금강경의 지혜는 우리의 상식으로영원히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의 세계에 서있는 것이다.
(졸립다! 그만 자자~~ 지금 시간 22:34, 감긴다 두 눈. 운동한 후 근육을 안 풀어주면 활성산소가 사람을 무척 늙게 만든다는 것을 조선헬스에서 읽어 모셔왔다. 어디로? '건강 및 여행정보'에 실어 놓았음)
(08;30 출근 5분전에 뭘 집자하려고ㅋㅋ 24/5/13
'호의'는 의심이 깊어 결심이 서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우가 초봄에 언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모습에서 그뜻이 유래되었다.
제 17분부터는, 제2분에서 제기되었던 질문, '운하항복기심(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이 반복되면서 다시 여태까지의 모든 논의들이 반복되어 전개되어 나간다. 17분부터는 전반의 내용이 반복되는 후반으로간주한다.
콘체의 말대로 전반이 끝난다면, 제13분 2절에서 끝난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금세기의 명화, 쿠로사와의 라쇼몬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의 중복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금강경의 편집체계는 바로이러한 중복의 정직성과 다양성과 변주성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침집자 終.)
(22:28, ㅋㅋ여지껏 모하다가 이제야 컴을ㅜㅜ 펜타토닉 그림 8장 올리고 그것이 실제로 맞나 연습하느라. 그런데 G메이져펜타음이 1~5까지 잘 연주되고있다는 감이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섬에서 박항서 감독이 직원이 되어 밭을 개간하고 전복을 따는 방송을 보며 웃었고 안정환 CEO의 리딩이 점잖코 코믹하였다. 김남일의 조금은 쑥쓰러운듯한 제스쳐가 보기 좋고 셔누의 젊음과 굵은 전복이 좋은 이미지를 주었다. 윤태진의 건강한 이쁨도 큰 관심을 끌게 만든다.
究竟無我分 第 十七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17-1.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마땅히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해인사본은 목판본이기 때문에 각의 시간과 수고를 덜기 위해 약자나 속자를 많이 썼다. 그 예, 爾(너이)-尔, 萬- 万, 無- 无, 號(부르짖을호)- 号, 莊(장중할장)- 㽵, 所- 소, 此-차, 陀(험할타)- 陁 등이다. 본 금강경은 앞으로 두고두고 많은 사람에게 정본으로 읽히게 될 상황을 고려하여 '无'를 제외한 모든 글자는 정자로 환원하였다.
제2분 3ㅈ절에는 '웅운하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운하응주'로 되어 있다. 상통하는 용법이다.
17-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선남바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어야: '나는 일체중생을 멸도한다 하였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고 보니 실로 멸도를 한 중생이 아무도 없었다' 라고.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전체적으로 2.3분의 내용을 압축한 것인데 그 문자를 사용함이 아주 절묘하고 경제적이고, 그 변주의 느낌이 아주 새롭다.
1절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음에 '心'이 있으나 본절에는 '心'이 없다. 송본. 원본. 명본 보두 '心' 들어가 있으나, 우리 해인사본에는 '심'이 없다. 그러나 해인사본은 뒤에 '당생여시심'이라는 말이 따라오기 때문에 그 중복을 피하여 心을 뺀 것이며, 이것이 라집역의 원 모습임이 분명하다.
17-3.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者
이 절의 끝에 나오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음에도 '심'이 없다. 세조언해본에는 있는데, 우리나라 통용본들이 모두 이 언해본류의 조잡한 개악판본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일제히 '심'을 삽입하고 있다. 『대정』만이 우리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왜? 우리 한국사람들은 아무도 우리 자신의 해인사판본을 따르고 있지 않을까? 이 기초적인 오류를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이 현상이 진짜 잘못된 오류인지 아닌지, 무엇을 가지고 도올은 우리나라의 현상을 기막혀하고 답답해 하는것일까? 어떤 사정이나 변화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면? 도대체 그냥 대조해보고 어떤 차이점이 나오면 이렇게 '기초적인 오류' 라고 매도해도 되는 것일가? )?
(23:16, 퇴근해서 한숨 잤었다. 로아녀석이 같이 놀아달라고 해서ㅎ 우쨌뜬지간에 자긴 잤는데 녀석의 털썩 안김에 깜짝 놀라 깨고 말았다. 김병규가 전화해서 "모래 강서구에서 행사가 있으니 14:00까지 12만원에 일하자고 했다. 반갑게 받았다. 어떤 기쁨이 떡잎처럼 흙을 받쳐 올라왔다. 금일(5/13일 월요일) 집자 終.)
(08:02, 24/5/14일 화요일 집자 始作
17-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느냐? 있지 아니하였느냐?"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따로 있지 아니하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17-5.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도무지 있지 아니한 것이다.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17-6.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고 한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이런 귀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명본明本에는 고려본의 '수기受記'가 '수기授記'로 되어 있다. 일반불교용어로 말할 때는 '授記'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여기서 '受記'라는 표현은 그 전체가 與라는 수여동사의 직접목적이 되어 있다. '여수기與受記'는 '기를 받음을 허락한다', '받을 기를 주다'가 된다. 따라서 우리 해인사본에서는 授 字를 안쓰고 受字를 의도적으로 쓴 것이다. 우리나라 통용본들은 이러한 맥락의 고려가 없이 이 受를 授로 고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참 딱한 노릇이다.
'석가모니'라 할때 '석가'는 싯달타가 속한 종족 이름이다. '모니'는 영감을 얻은 자, 예언자, 고행자, 성자의 뜻이다. 석가모니란 '석가족의 존경받는 수행자'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는 콘체의 번역대로, '어떤 한 법이 존재하여, 그 존재하는 법에 의하여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얻는다'는 뜻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하는 마음의 상태가 하나의 법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하는 마음의 상태가 하나의 실체화되는 오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법을 부정하게 되면, 무상정등각 그 자체의 존재성이 해소되어 버릴 것이다.
(08:35, 아침집자 終. )
(2024/5/16, 목, 06:53 어제는 강서구의 '홍원사' 에 가서 김병규와 봉축행사를 가졌다. 나를 짓누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행사 끝날때까지만 비 오지 않았으면! 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승의 날에 전쌤을 뵙지 못해서다. 매년 이맘 때 후자 때문에 고민한다. 잘 지나갔다 싶으면 다시 또 그날로 회귀하는 이 인연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 진리에 나도 따라야 하리라.
17-7.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이것은 여래가 자신을 여래라 부르는 것에 대한 최종적 선포이다.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딜 뿐(如)이라면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면 '구원Salvation'이라는 개념이 성립불가능하다는 것이다.
'如'는 문자 그대로 '같다'이다. '여如如' 는 '같고 같다'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불교에서 이 如 字만큼 혼란스러운 글자가 없다. 사실 인도사람들이나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여'라는 말을 쓰면서도, 이것을 변화의 배후에 상정되는 불변의 진리라는 식으로 쓸 때가많다.
다시 말해서 생멸하는 현상의 근원을 이루는 불변의, 항상 같고 같은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의 배후에 항상 같고 같은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실체의 오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어에서의 '여'는 그냥 '그러한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과 본체라는 이원적 인식구조가 근원적으로 틀 지워져 있지 않은 상태의, 말하자면 아무 틀도 없는 가운데서의 그냥 그러한 모습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현상일원론적 해석이다. 나는 금강경은 이러한 철저한 현상일원론적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 '현상' 이라는 말 자체의 상대적 어폐가 또 개재된다.) 바로 이 점이 '금강경'이 후대에 禪의 소의所依경전으로 인식된 측면일 것이다.
17--28.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깨달은 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그러한 법이 있지 아니한 것이다.
若有人言 如來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17-9.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바로 그 속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나니, 그러하므로 여래는 설하기를, 일체의 법이 모두 부처님 법일 뿐이라 한 것이다.
須菩提 如來所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어째서 이 分이 여췌餘(남을여)贅(혹췌)라 말하는가? 이 분이 없다면 금강경의 무상정등각이 여실如實하게 우리 가슴에 와 닿을 길이 없다. 위대하도다! 금강경의 기자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위대한 심포니를 지었도다.
깨달음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내가 참 기독교인이요 네가 사탄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다. 사탄도 껴안으면 곧 천사요, 천사도 껴안으면 곧 사탄이라! 진실한 여여와 허망한 미혹이라는 생각, 그것이 없는 자리가 곧 여래의 무상정등각이다.
일체의 존재(法)는 곧 깨달음의 존재다.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각자覺者요, 붓다인 것이다. 풀 한 포기에서 성자의 모습을 보라! 꽃 한 송이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라!
17-10.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바 일체의 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17-11.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것과도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그 장대한 몸이 장대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장대한 몸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10分에서 이미 언급. 여기 '인신장대'하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싸이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살의 덕망이 위대하다는 뜻이다. 즉 그 위대함은 위대함이 아닐 때만 위대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08:23, 아침집자 終. 아, 집자는 끝이 없구나! 오늘 반납일이기도 하넹ㅋ 저~ 번에 반납하고 또 가져왔는데 이번에도 미쳐 못 끝냈도다.)
(18:54, 햇볕 받으며 퇴근. 워낙 청명한 날. 그래선지 조금 춥음. 아침에 장사장의 양귀리 사진영상에 댓글을 달았다. 두학이는 양귀리의 투명하고 맑은 정경을 '날씨 좋다'고 말했다. 심플한 말에는 5월의 녹음을 스치는 바람이 스며 있다. 도서관에 반납 차 다녀오다. 역쉬 '금강경강해'를 세번째로 빌림. 병규에게 영상과 그림을 보내다. 12만원 입금됨. 내겐 몹시도 필요한 돈이었다. 그녀들은 퓨전국악그룹으로 명칭은 '퀸' 이다. 싱어, 대금, 장구, 그리고 가야금이 있었는데 가야금 연주자의 가녀리고 서슬있는 기품에서 숭배감이 솟았다. 더우기 그 현란한 손가락을 보면서 '예능인이 되려면 저 정도는 돼어야 하리' 라고 감탄하다.
오늘날, 우리 정치지도자들을 보면 왜 그렇게 모두 위대해질려고 노력하는 지를 모르겠다. 그다지도 못하는 영어를 그다지도 열심히 하려 하고...소위 지식에 대한 콤플렉스를 깨끗이 벗어났으면 좋겠다. 리더십의 본질은 기민한 상황판단과 명석한 가치판단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판단능력에 있는 것이지 지식에 그 리더십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만 나왔으면 어떻구 국민학교만 나왔으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 소신 있게 꾸밈없이 자신있게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 그 如如의 진실을 우리 국민들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을 크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위대함은 위대함이 아닐 때만이 그 위대함을 발휘할지니.
17-12. 수보리야!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 만약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멸도하리라' 하고, 이와 같은 말을 지었다하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어쩨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진실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있는 법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17-13. 그러므로 부처는 말하느니라. 일체의 법이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라고."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17-14.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이런 말을 짓는다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불토를 장엄케 한다고 말한 것은 즉 장엄케 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장엄케 한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제10분 3.4절의 주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17-15.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면, 여래는 비로소 그를 참으로 보살이라 이름할 수 있다 설하느니라."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그 유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의 클라이막스는 '無我法'이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불교의 종지는 '無我'요, 대승의 종착은 '無我'요, 보살의 종국은 '無我'다.
(눈 위 근저부위가묵지근하다. 조금 전에 쩡이는 내게 "아빠, 아빠 나이에는 눈을 좀 쉬어 주어야 하는데 아빠는 작은 글씨를......" 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나도 종종 그런 걱정을 하곤 하니까. 눈 너무 혹사하여서는 안 될 일이다. 눈을 보호하자. 오늘 목요일이 깊어간다. 내일은 금요일. 내일 저녁은 차박을 해볼까? 한다. 계곡에 들어가서 잘 자고 아침을 맞는 것이다. 대지를 숨쉬고 대지의 새벽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뿐더러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과 일체가 되어볼 일이다. 20:50, 집자 終. 병규에게 12만원 벌어서 아내에게 5만원 뜯겼다ㅎㅎ 딸은 능력 있다고 치켜준다. 딸에게도 돈을 조금 주었으면 하였지만 통장에 20만원이 채 못되니 그것은 안될 일이다.)
(08:15, 자전거로 효성뒷산에 다녀오다. 체력단련장. 거꾸로 본 숲은 이질적이지만 아름다웠다. 저마다 움직여 어디로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 사이좋게 간격을 유지하면서 잘 살고 있다. 한평생을. 비박을 정하고 장소는 산정호수쯤으로 정하지만 다음날 동선을 잘 짜야 한다.
一切同觀分 第 十八
모든 것을 한몸으로 보아라
18-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육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사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肉眼
18-2.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사옵니다."
'눈이 본다' 할 때, 과연 눈이 보는가? 눈동자를 후벼 파내어 책상 위에 놓는다면 과연 그것은 보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 눈은 과연 보는 것일까? 감각기관의 기능의 국부성은 그것 자체로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을 가틍케하는 신체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사태이다. 눈은 결코 보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과정의 한 단계를 담당하는 빈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
본다' 고 하는 전체적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라는 총체적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생리적 과정의 사실인 동시에 우리 인식의 단계적 제고를 말하는 것이다.
18-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天眼
18-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법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法眼
18-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불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다. '법안'은 현상계의 형테를 넘어서서 그 다르마(법)
(24/5/20, 08:14 06:00 전에 눈을 떠서 효성동 뒷산의 체육공원엘 다녀왔다. 자전거로 국궁장까지 간 후 도보로, 맨발로 능선길을 걸었다. 그끄저께인 금요일 포천 장암리 이동갈비촌 뒤의 천변에서 비박 후 토요일 '가리산' 등산. With In. 어제는 두산 위브 옵션 선택한 후에 아내의 제안과 쩡이의 주도로 을왕리 해수욕장의 이웃엘 가서 조개찜 먹다. 모래와 백사장이 참 좋더라. 저~ 번 징메이고개에이어 이번에도 소소네가 계산하였다ㅜㅜ 아직 경제의 날이 덜 서 있거나 돈이 있구나 하였다.. 엄마가 계산한다고 분명히 말했건만.
그 자체를 직시하는 눈일 것이요, '佛眼'은 모든 존재의 구분이 사라진 如如의 눈일 것이다.
18-6.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저 갠지스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11분에서 언급되었던 '갠지스강의 모래'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기대는 또 '갠지스강의 모래' 하면 바로 '칠보공덕'으로 옮겨 가리라는 예상을 한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이 '갠지스강의 모래'는 칠보공덕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매우 신선하다. 이 分 전체의 주제는 육안을 넘어서는 심안의 문제라는 일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에 언급되었던 상투적인 개념의 틀을 새롭게 사용하는 자세가 변주의 색다른 다양성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8-7.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하나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든 모래, 그만큼의 갠지스강들이 있고, 이 갠지스강들에가득찬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세계가 있다면, 이는 많다고 하겠느냐? 많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무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여기 갠지스강의 모래에 대한 과장된 형용을 많은 사람들이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과장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 도올은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다!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란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물리적 우주가 아니다. 물리적 우주는 물론 그 무한대의 시공연속체를 전제로 하면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세계는 '삶의 세계'인 것이다. 존재가 인식하는 세계요, 나의 감관이 구성한 세계요, 나의 행업이 지어놓는 세계다. 나에게 있어서 세계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삶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도 알고보면 이러한 '
삶의 세계'의 총화에 불과한 것이다. 한 집안에서도 부인의 세계가 다르고 아들의 세계가 다르고 딸의 세계가 다르고 나의 세계가 다르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바퀴벌레가 인식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들의 중첩구조를 불교에서 '연기'라 말하는 것이다.
(08:35, 아침 집짜 終.)
(24/5/21, 화욜 08:10 오늘도 효성뒷산 체육공원 행. 월요일은 힘든 Day. 화요일이니까 조금 낫다ㅎ
18-8.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갖가지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로소 마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 의 표현에 내가 윗절에서 말한 '삶의 세계'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온갖 종류의' 라는 '種'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 '若干種'의 번역으로 썼다.
여기서 말하는 '心'이란 원어로 '의식의 흐름'을 뜻한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의식 및 무의식이 현재.미래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의식작용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진체는 '心相續住(마음이 서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어떤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 라 번역했다.
불교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心의 流住로 본다. 그대한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물리학적 우주도 알고보면, 물리학자들의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우주인 것이다. 우리는 너무 과도하게 그 하나의 세계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불교라는 것은 이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전환시키려는 거대한 사회운동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생각해봤을지언정, 과연 참으로 위대한 마음의 혁명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18-9.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여기에 이르면 누구든지, 선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덕산방, 임제할'의 한 주인공 덕산선감(780~865)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것이다. 당나라 선승들의 뼈저린 구도적 삶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파도 결코 픽션 속의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절깐 앞에서 빈대떡을 팔고 있는 조선의 할머니 중에, 지금도 금강경을 암송하고 있는 분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덕산 스님같은 큰스님에게 이와 같은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신 분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단지 침묵할 뿐이다.
지혜는 지식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교만이나 오만을 불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강경의 지혜로 영원히 입문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행하게도!
법계통화분 제19
(아침집자 終. 08:33)
(19:23, 퇴근 후 석식. 석식 참석자 참외 먹음. 이서방과 로아 아내 그리고 나. 화요일은 일주일 중에 무게가 두번째로 무겁다. 젤 무거운 건 월요일. 토요일과 일요일 화려할수록에 월요일은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마련이다. 죽을 때도 이와 같다. 복권 당첨되서 화려하게 인생을 탕진했다면 죽은 후의 삶이 굉장히 (하루하루가) 무거울 것임. 그 반대라면 죽은 후 굉장히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거임.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이러한 비밀을 캐내는 재주가 있다고 척 함. 오늘 6동 3~4라인 1층 계단의 안전대 부식부분을 걷어내고 재용접하였다.
19-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는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많다 하겠느냐? 많지 않다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은 복은 정말 많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그러하옵니다" 하고 대답하는 양식이 18분과 같다. 18분과 19분은 같은 사람에 의하여 암송되었을 것이다.
19-2.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라고 하는 실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결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 不說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 說得福德多
'故'가 '이복덕무고'에 그 용례가 드러나는 바대로, 故는 다음에 오는 문장의 접속사로 흔히 쓰였다. '以 ...故' 류의 문장패턴은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달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故'를 해석할 때 문두에 오는가 문미에 오는가를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한의학 문헌을 읽는다든지 할 때, 무차별하게 불교식으로 '故'를 문미로 끊어 읽는 경우가 많다. 나쁜 버릇에 속하는 독법 중의 하나이다. 'because' 와 'therefore' 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離色離相分 第 二十
20-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부처가 색신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색신을 구족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는 '색신을 구족했다하는 것은 곧 색신을 구족한 것이 아니다' 라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색신을 구족했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 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여기 바로 내가 앞에서 말한 三身의 한 테마가 나오고 있다. 여기서는 분명하게 '색신'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루빠까야'로 되어 있다. 바로 여기서 '응신'이니 '화신'이니 하는 따위의 후대의 개념을쓰지 않고 '색신'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 자체가 금강경 텍스트의 토기경전적 성격을 확보해주는 것이다.
'루빠'란 바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할 때의 바로 그 '색'이다. '루빠'란 ' 구체적인 형체를 가진 것'의 뜻이다. 즉 공간을 점유하는 것, 데카르트의 용어를 빌리면 연장성extension을 갖는다는 의미다. '구족한다'는 것은 '단려端(단정할단)麗(고울려)한 신체를 완성한다', '단정한 모습을 구비하고 있다'의 뜻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나 도올이 도올서원에 서서 강의를 할 때, 앞에 있는 도올서원 재생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나 여기 서있는 도올이 단정한 신체를 구비하고 있다고 그대들은 생각하는가?" 역사적 실체로서의 신체를 구비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은 과연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한번 말해보라!
20-2.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뭇 상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뭇 상을 구족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뭇 상이 구족되었다 하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다' 라고 설하셨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뭇 상이 구족되었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 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여기 '뭇 상'(諸相)이라 한 것은 제5분에서 언급한 32상류의 색신을 형용한 말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非說所說分 第 二十一
21-1.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노라' 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 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진실로 이 후반의 經이 없었더라면, 『금강경』은 오늘의 금강경이 아니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그 언어가반복이 아니요,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신랄함으로 잠들어 있는 우리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내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곧 너는 나를 비방하는 자라! 그 얼마나 신랄하고 통렬하고 장쾌한 일언인가!
이 주제는 제6분 마지막에서 뗏못의 비유로 비추었고, 7분에서본격적으로 다루어졌던 주제였다. 그러나 이 21분의 어조는 훨씬 더 촛점이 강렬하고 날카롭게 독자를 치고 들어온다. "곧 너는 나를 비방하는 자라!(즉위방불). 이제 다음의 『성경』 구절을 들어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누구든지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라' 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어떤 이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면 그는 곧 나 예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이른 바를 깨닫지 못한 자라. 나는 길이 아니요, 진리가 아니요, 생명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이 말씀은 4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쓰여져 있는가? 이 말씀은 바로 『대승복음서』에 쓰여져 있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이다. 재미있게도 이 말씀은 여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서가 아닌 요한복음 특유의 논리 구조 속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은 장면,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최후의 만찬 후에 이루어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고별강연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색신의 무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나는 너희에게 길을 보여주고, 진리를 설하며, 생명을 얻게 하여 준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길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생명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곧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인간의 언어가 격절된 곳에 서있는 성령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로고스사상이요, 이것이 바로 그노시스사상이다. A가 곧 B라고 하는 것은, A라는 주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길만 남는다는 뜻이다. 예수가 있고 또 길이 있다면 예수는 영원히 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나의 無化즉 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보지 않고 성경의 문자만을 보며, 예수의 법신을 보지 않고 예수의 색신만을 보고 있다. 요한이 말하는 로고스를 보지 않고, 복음서기자의 말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 17절의 말씀을 보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고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게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7)
21-2. 이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 법이 설하여지는 것을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아니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을 중생이라 해서도 아니 되고 중생이 아니라 해서도 아니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중생이 아님을 여래가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중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6분의 첫머리와 14분 14절의 주제가 절묘하게 새롭게 결합되어 변주되고 있다.
여기 '혜명慧命'이라 한 것은 산스크리트어인데, 제2분 1절에 '장로수보리'라 했을 때의 長老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어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산스크리트 텍스트상으로는 차이가 없는데, 라집이 한역하면서 다른 표현을 쓴 것과도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기실은 전혀 그러한 상황이 아니다. 이 부분은 전체가 라집역이 아니라 보뎨류지역본에서 補入된 것이다. 이 62字는 장경2년(822)에 僧 영유가 진역(라집본)에 없는 것을 위역魏譯(류지본)에서 보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류지는 자기의 번역 속에서는 일관되게 '혜명'을 쓰고 있다.
본절 맨 끝에 '중생중생자'와 같은 표현은 본시 산스크리트 원본에 계속 이와 같이 반복된 형태로 나타났던 것인데 라집은 이렇게 반복된 형태로 번역한 적이 없다. 보뎨류지는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중생을 두 번 반복하여 번역한 것이다. 라집역과 그 스타일이 전혀 다른 것을 이 부분에서 느낄 수 있다.
(집자 終. 최팀장은 지친 육신에 흰색상의에 크낙한 지친 눈으로 독상을 받으며 말했다. 다음주 수요일 이원행사가 있는데 사장이 누굴 사회자로 해야 하는지 머뭇거리길레, "직접 지목해주세요." 라고 말했다고. 주위에서 본인을 추천해주었다고 말한다. 나는 쩡이가 역시 사장에게 직접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긴 하였지만. 그것이 어쩌면 쩡이를 한 단계 상승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리라 본다. 그녀는 '아빠 나는 한가지 버릇이 있는데요, 나는 무언가를 하면서 종종 실망해왔기 때문에 어떤 기대를 안해요~~~ 그게 장점도 단점도 되지요. 하긴~!!~~ 기대를 안하므로 냉정해질 수 있고 실수를 않치. 그래서 이런 말은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으므로 직장동료에겐 안해요. 하지만 가족에게는 다 얘기하죠. 녀석은 곧 일어섰고 뭐라고뭐라고 하는데 그 뜻이 얼핏 아빠 나 용돈좀 줘요로 들리는 걸 어쩌누... 난도 8만원 쯤 밖에 없단다ㅜㅜ)
(21:07, 오늘은 (리어커) 펑크난 타이어튜브를 수리하였다. 아마도 내 주도로 한 최초의 시도였고 성공하였다. 아마도 유튜부가 한몫하지 않았을깤ㅋㅋ 무시가 서로 다른 바퀴, 빵꾸 난 곳을 메꾸는 패치 사러, 1차 패치붙임 실패는 바이스로 물려놓아서일까?ㅋㅋ 리어켜 내부 내장공사까지도 끝냈넹 아는척하는 강선생님에겐 톱으로 널판지를 썰게 했다.
無法可得分 第 二十二
얻을 법이 없어라
22-1.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심은 곧 얻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오니이까?"
須菩提白佛言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爲無所得耶
7분, 17분 등지에서 나왔던 주제가 간결하게 반복되고 있다.
22-2.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조그만큼의 법이라도 얻을 바가 있지 아니함에 이러렀으므로 비로소 아뇩다라사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縟多羅三邈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縟多羅三邈三菩提
세조본, 宋, 元, 明 삼본 및 통용본에는 '여시여시' 앞에 '佛言'이 있으나, 우리 해인사본에는 없다. 『대정』은 우리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淨心行善分 第 二十三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
23-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것이다.
復次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阿縟多羅三邈三菩提
23-2.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는 것으로써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23-3.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라 하는 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 한 것이다.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보슬비와도 같은 잠언이다. 2절에서 '선한 법'을 이야기하고, 또 사람들이 '선한 법'이라는 말을 실체적으로 받아들일까봐 무서워서 제3절에서 친절하게도 그 '선한 법'을 다시 해설한 것이다. 그 논리의 간곡함이 실로 정연하다 하겠다. 그 논리의 간곡함이 실로 정연하다 하겠다.
불교는 초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파계를 했다해도 윤리적인 흠이 되지 않는다. 중광 스님이 걸래짓을 하고 다녀도 그것은 세간에서 비윤리적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초윤리'와 '비윤리'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초윤리는 윤리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비윤리'는 상식적인 악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초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윤리의 파괴가 아니라, 윤리의 고착성과 협애성에 대한 경고다. 초윤리적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의 수련을 요구하는 것이요, 또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래설비선법'이 明本에는 '여래설즉비선법'으로 되어 있다. 세조본은 대체로 명본을 따르고 있다. '대정'은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앞뒤 문맥상 '卽'이 없는 표현이 더 간걸하고 직절하다.
(오늘 「갈대」의 작가 신경림 시인이 별세하셨다. 오후 늦게 컴을 통해서 비로소 알았다. 그 이후에 티비뉴스가 방송을 내보내는 걸 본다. 한동안 뜨음 하였다 하였더니 역시나 아프셨고, 타계 소식이다. 돌아가셨구나! 유명세를 타던 노령의 유명인사가 활동을 안하고 보이지 않는다면 거개 병마와 싸우고 있을 터이다. 가수 현철도 그렇다, 대개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눈이 피곤하다. 집자 終. 21:55)
(24/5/23, 18:29 목요일 오후의 저녁시간대. 필경 중구봉에 닿을락말락하는 햇볕일텐데도 아직 양기가 만만찮게 느껴진다. 오월도 하순에 접어들었구나. 오랜만에 가지치기를 두 그루 했다. 2동12호 보성할머니가 민원을 넣었고, 송감사님이 소장에게 오더하였던 2동과 1동 사이 은행나무 가지치기. 양광이 반짝거리며 까닭없이 온 몸에 활기를 넣어주는 계절이다. 앵두가 분홍빛깔로 익어가고 있는 2동 앞베란다 화분.. 상근이는 그저께 쯤 골목에서 외제차가 튀어나와 부딪쳤다며 골절상 12주를 받았다고 하였다. 6월 15일에 내몽골 여행가는데 총무가 그러하니 걱정이다.
福智無比分 第 二十四
복덕과 지혜는 비교될 수 없다
24-1.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들만큼 쌓인 칠보더미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또 어떤이가 있어 반야바라밀경 내지 그 사구게 하나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타인에게 설한다면, 앞의 칠보복덕은 이에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백천만억분의 일 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 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혹자가 말하기를, "사업하는 사람들은 금강경을 읽지마라." 일리가 있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는 심히 금강경을 곡해한 것이다. 도올은 말한다. 사업하는 사람일수록 금강경을 읽어라! 금강경은 결코 칠보공덕을 부정하지 않는다. 삼천대천세계의 수미산만큼의 칠보더미를 창출하는 경제적 노력은 可貴한 것이다. 문제는 그 귀한 노력이 삶에 가치를 주는 '깨달음' 으로 성화되지 못한다면, 그 노력이 참으로 허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재물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물보다 더 귀한 깨달음의 지혜를 사회적 가치의 우위로 두지 않는 사회는 곧 부패하고 패망한다. 이것은 역사의 정칙이다. 삶의 여유가 있는 자라면 이 도올이 주석한 책을, 대고려제국의 성대한 대장경판본을 텍스트로 삼은 유일한 이 금강경을 많은 이들에게 보시하라! 한강변의 모래 수만큼의 칠보공덕보다 더 큰 복덕이 생겨나리라.
化無所化分 第 二十五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다
25-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너희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지고 있음이라.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 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18:49, 이서방이 소대장에서 저녁을 산다고 한다. ㅎㅎ 재능있넹ㅋㅋ 終.)
2~3일전, 밤이 으슥하여 눈이 뻑뻑해지도록 집자하였건마는ㅉ 두 개의 다음을 다운받아 어케저케 하다가 그만 그 집자 分을 다 날리고 말았넹ㅜㅜ 그래서 충격으로 몇 날을 집자 땡땡이ㅋㅋ 오늘부터 다시 힘받아 집자 시작하련다고... 24/5/27, 08:12 단 그 잃어버린 부분은 기분이 나빠서 일단 뛰어 넘겠다!
27-2. 수보리야! 너는 혹 이와 같이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모든 법을 단멸해버린 상을 설한다고.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 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자는 법에 있더 단멸한다고 하는 상을 설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何以故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者 於法 不說斷滅相
우리의 마음은 본시 斷滅한다고 하는 행위의 대상으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禪의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나의 마음을 단멸한다고 했을 때, 단멸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마음은 단멸당하지 않기 위해 그의식이 더욱 깊어지고 강렬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심연의 파라독스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범하는 오류가 곧 인간의 심적 에너지를 실체화시키고 객관화시켜 분석하는 대상화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심리분석을 받는 자들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병이 깊어져 간다. 다시 말해서 심리분석을 하고 있는 자나, 심리분석을 당하는 자나 다 같이 병이 심화되어만 가는 것이다. 정신분석 의사들의 상당수가 정신병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영화들이 고발하고 있는 상황에 어느 정도 그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근자에 이런 영화를 본 기억. 아들이 외출했다가 오니까 없어졌다. 경찰은 집착하는 그녀를 이윽고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 그의사의 행동은 확실히 정신병자 같았다!).
본 절 제일 앞머리에 '여약작시념'의 '汝'가 대정본에는 없다. 단순누락으로 생각된다. 우리 해인사본에는 '汝'가 있다. 그리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설제법단멸상'에서 송.원.명 삼본이 모두 '보리' 다음에 心이 더 있고 '단멸' 다음에는 相이 빠져 있다. 번역의 문맥상 우리 해인사본이 더 원의에 가깝다는 것은 누구든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정은 우리 해인사 판본을 따랐다.
不受不貪分 第 二十八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28-1.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일체의 법이 아가 없음을 알고, 인을 얻어 이루면, 이 보살의 공덕이 앞의 보살이 얻은 바의 공덕을 뛰어 넘으리라.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바로 제법무아 즉 '일체법무아' 라는 보살운동의 캣치브레이즈가, 『금강경』이라는 대서사시가 끝나가는 마지막 무렵에서 그 강렬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 또 '갠지스강의 모래'가 나오므로 칠보니 사구게니 하는 식상하는 예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지만 금강경의 기자는 그러한 단순한 반복의 우를 범하지 않았다. 조건절도 매우 갈략하게 줄였으며, 주절은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개념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득성어인'인데, 그 원문의 전후의 뜻은 '보살이 자아라고 하는 것도 없고 생하지도 않는 법들에 관한 지혜를 인내를 통하여 얻었다고 한다면' 의 뜻이다. 그러나 한역은 그런 맥락적 뜻을 압축시킨 것이다.
(08:32, 오늘 아침집자 終. 아침산책, 밑의 테니스장 여인이 번호를 받아갔다. '황진이' 아빠는 오늘도 체육시설에 올라왔고, 나는 오해를 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배드민턴 사람이 없으므로 산에 올랐다... 말이 된다.)
(21:50, love of my life를 듣고 있다. 피아노 심플한 선율과 비올린의 벼랑길을 걷는 듯한 접촉감, '내 (인)생의 (하나뿐인)사랑' 어느 과거의 싯점으로 이 노래는 나를 데리고 가네~ 아마도 우리나라의 대학에 교환교수로 왔었을 듯 싶은 프랑스 남자, 원당리 폭포동 다리 근처에서 그와 대화를 영어로 나눴는데..., 그가 말했지. 영어 잘하네요~~ 칭찬에 겸연적어하였었지. 나는 그때 이 노래를 공부하였었던 거 같기도. 확실히 이 노래는 뭔가 당기는 곳이 있다. 저녁엔 푸성귀를 분배하고 뼈해장국을 먹었다. 오버더로드 칠형제네, 명성에 오욕은 없었다. 겸손하기까지 한 점원까지. 햇볕에 그을려 더러는 반점이 생기었다. 자주 아프곤 하였고 아들의 눈치를 보는 듯하기도
28-2. 수보리야! 뭇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수보리야! 보살은 자기가 지은 복덕에 탐하여 집착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 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 說不受福德
'功成而弗居'
(24/5/28, 22:48 내일은 08;00 출근이다. 시간 늦지 않도록 주의!! 은행목 전지로 인한. 오늘 러브팝 신설하고 호텔켈리포니아를 첫 손님으로 모셨다. 금일 집자 終.)
(24/5/29, 20:09 나무 자르는 폼이 자연스럽고 힘있고 믿음직한 한 일꾼을 오늘 만났다. 그가 굵은 은행나무를 자르고 내려와 내가 타 간 쌍화차를 한잔 했다. 그리고 다른 젊은 사람이 향나무를 향해 다가가 전지를 시작하였는데, 자른 나뭇가지가 민가 지붕으로 떨어질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무사히 잘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를 다 자르고 1동 쪽으로 이동하였을 때 그 향나무의 형상은 내게 안타까움을 안겼다. 잘라버렸으면 좋았을 나뭇가지 하나가 찌~익 사선으로 늘어져 눈에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옥에 티. 역쉬 그 젊은이는 기대에 못 미치는 기술자였던 것이다. 그 시원시원한 일꾼이 했다면 저런 찌질한 가지의 늘어짐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향나무 전지가 끝나기 전에 (그들을 믿고) 체크하지 못한 내 탓이다!!
...의 위대한 한 표현일 것이다. 공을 세우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이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공성이불거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따뜻하고 깨끗하리라.
威儀寂靜分 第 二十九
위엄 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
29-1.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를 일컬어, 오는 듯 가는 듯, 앉는 듯 눕는 듯하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 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나는 인간적으로 이 분을 매우 좋아한다. 그 언어가 극히 평이하고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뜻을 아주 詩적으로 리드믹하게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카무라는 如來의 본 뜻이 여기서 해설하듯 그런 말 자체의 풀이에서 유래되는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렇게 간 사람' 의 뜻으로 '완전한 인격자', '인격의 완성자' 라는 단순한 존칭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금강경의 시대에만 와도 이미 벌써 '따타가따'에 대한 어원풀이를 가지고 많은 의미의 pun(말장난)을 지어내는 논의가 성행했던 것을 알 수 잇다. 더우기 '여래' 라는 번역술어가 확립된 이후의 중국에서는 그뜻을 원전에서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여래' 라고 하는 한역개념 그자체에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레토릭( 화려한 문체나 다소 과장되게 꾸민 미사여구) 이 무한히 개발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의 원천을 바로 금강경의 이 分이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따타가따'에서 '갔다'는 의미보다는, 이승의 구원을 위하여 '왔다'라고 하는 이타의 구제자적 성격이 강조되었다는 것은 이미 2분2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여기 '약내약거약좌약와'의 번역은 산스크리트 원문이 '여래는 가고, 혹은 오고, 혹은 머물고, 혹은 앉고, 혹은 침대에 눕는다' 로 되어 있으므로,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다' 로 변역할 수 있지만, 그렇게 번역하면 한역의 맛이 사라진다. 여기 '약내약거'식의 표현은 이미 노자에 나오는 표현방식을 빌린 것이다. 노자 6장에 '면면약존綿綿若存(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이라는 말이 있고, 41장에 '약존약망'(있는 듯 없는 듯)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표현에 따라 중국인들은 이를 대구적對句的으로 이해한 것이다. '온다, 간다' 보다 '오는 듯 가는 듯', 그 얼마나 시적인가?
29-2.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 구절인가? 우리의 인생이여!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랴!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一合理相分 第 三十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
30-1.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힘껏 부숴 티끌로 만든다면, 네 뜻에 어떠하뇨, 그 티끌들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21:45, 금일 집자 終. 머리가 띵해 오고 번잡스러움이 번지고 열이 난다는 것은 '이제 그만' 하라는 신호다. 그럼 더 하고 싶어도 멈춰야 옳으리. 오래도록 이 집자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말이다ㅎ
조금 전에 '여래자(사람은)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라는 어구에서 몹시 거대한 충격을 받아 멍멍하다. 온 바도 없다하는데 과연 어딘가에서 오긴 왔다. 그곳은 어디일까? 우리는 오이나 토마토 혹은 돼지고기나 쌀밥으로부터 생겨서 이곳에 아버지.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왔다. 틀렸는가?? 그리고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갈까? 과연?? 참으로 허깨비방망이나 어린애 같은 소리만 같구나! 죽으면 마땅히 오이나 토마토 혹은 돼지나 쌀밥이 나오는 흙으로 돌아가리라~ 음악이 점점 좋아지더니 근자에서부터 비로소 팝송이 내 속으로 숨쉬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녁내내 팝송을 들었다. 『연주인을 위한 파퓰러 1001곡집』 이 책은 대건고 음악선생으로부터 슬쩍 한 것이다. 내 미래를 예감한 듯이. 그 선생에겐 미안하지만 아마도 그 선생에겐 무용지물에 장식용에 불과했을 것이다. 자기 전에 Love me tender를 하나만 듣고 자자! 내일은 길병원에서 건강검진 차 오전 반차를 썼다.)
(24/5/30, 18:35 도시 직장인의 하루가 끝났다. 집에는 여리고 보드라운 천사가 순수의 페이스를 들이대면서 하비지의 힢을 툭툭 친다. 이건 안돼. 할머니꺼야ㅋㅋ 불량식품科ㅎ 인 비닐호스에 담긴 단 고체물질(이거 나도 초딩 때 많이 먹은 기억이 삼삼하지~)이 바닥에 흩어져 있길레ㅎ 으잉?? 이게웬 떡이냐? 하면서 맜있겠다고 소리치자 안방에서 뛰어 나오며 안된다! 고 소리친다ㅎㅎ
分名에 텍스트의 문제가 있다. 세조언헤본에는 분명이 '一合相里分'으로 되어 있다. 또 기타의 통용본에는 '일합리상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轉寫과정에서 생겨난 동음異字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원명은 나카무라가 제시하는 바대로 '一合離相分'이다. 기타 판본은 '離'를 '理'로 잘못 표기한 데서 생겨난 전사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조에 통용된 금강경 본들이 매우 판본학적으로 열악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불교의 텍스트는 일단 모두 해인사대장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분명分名과 해인사판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조언해본, 판본이나 언해나 모두 탄탄한 기초 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학자들의 불경이해 수준이 정밀함을 결하고 있고 그 의취의 깊은 곳을 세밀하게 파헤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옛말을 연구하는데는 큰 도움을 준다. 불경연구의 방편으로서 별로 큰 가치는 없지만 당대의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민중의 보편적 언어수단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학문이라 해서 옛 사람들이 더 잘 알았으리라는 망상(생각)은 버려야 한다. 자료의 범위가 협애하고 인식의 범주가 너무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 많다. 오히려 21세기야말로 고전학의 최전성 시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콘체는 금강경 주 텍스트가 13분 2절에서 끝난다고 보고 그 이하 29분까지는 주 텍스트의 조잡한 재탕비빔밥으로 보았지만, 제 30분부터는 새로운 텍스트가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30분부터 다시 주석을 개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금강경을 바로보지 않지만, 제30분은 여태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불교의 핵심이론의 새 측면을 텃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이 합리合離 즉 離合의 문제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이합집산이라는 말이 있다. 떨어졌다, 붙었다, 모아졌다, 흩어졌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중국인의 세계관에 있어서는 氣의 '취산聚散'과 같은 용례가 이미 장자에 나오고 있는데(잡편 「즉양則陽」편에 나온다), 이러한 취聚(합合). 산散(리離)의 개념을 불교적 세계관의 격의의 틀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합合이란 매크로(거시)의 세계다. 리離란 마이크로(미시)의 세계이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합合의 세계이다. 매크로의 세계인 것이다. 나무, 집, 사람, 책상, 항아리 이 모든 것들이 매우 거시적인 사태들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거시적 세계의 인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세계는 항상 마야 즉 환幻(변할환)의 가능성으로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사물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매크로에서 마이크로로 들어가면 반드시 인식론이 개재된다. 인식론적 반성이 없이는 마이크로의 세계를 논구할 수가 없다. 아마도 불교와 기독교가 그 세계관에서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인식론의 유무다.
기독교는 종교적 진리에 관한 한, 인식론을 거부한다. 예수가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그 부활을)인식할 수 있는가? 그것을 과연 우리는 정당한 판단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러한 모든 분석, 즉 인식론적 분석을 기독교는 거부한다. 기독교가 인식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식론이 기독교 서구라파 문명전통에서는 과학이나 철학의 분야로 독립되었다.
"로아 못봤어요?"
"응? 우리도 로아 못봤어요~~"
로아는 엄마.아빠의 초인종 소리에 즉각 안방 침대의 이불속으로 뛰어들어 숨었다. 내가 퇴근해도 똑같은 패턴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로아와 장난을 하면서 하루의 끝을 맞는다. 결국 침대에 숨어 있는 로아를 안아주면서 술래잡기는 끝난다. 로아는 피곤한 표정으로 "졸려~~" 하고 짜증을 내면 어른들은 조바심을 친다ㅋㅋ 조금 전에는 이마를 바닥에 부딪쳐서 우는 녀석을 찬물로 수건을 묻혀 계속 차게 유지해주어야 했다. 아이구! 이럴 때면 가슴이 쿠웅~~~ 내려앉고 만다. 찬물로 식혀준 덕분에 다행히 퍼렇게 멍들지는 않았다.
(24/6/3일 월요일 22:15 아내가 짜증이 나서 어젯밤 한숨도 못잤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당신하고 끝까지 살 수 있을까 걱정되요. 당신 형 보기 싫어서."
아내가 내 대신 금계국 꽃밭에서 운전대를 잡았고, 서천IC로 들어가 홍성휴게소에 들어갔을 때 아우의 KAN이 보였다. ㅎㅎ군산 비응항에서 출발했는데 용케 같은 휴게소에서 만난 것이다. 이쪽도 아우는 자고 제수씨가 운전해서 왔다고 하였다. 냉커피를 누가 샀는지 들고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 와서 아내가 말하길, 형에게 냉커피를 물었는데 사양하길레 우리들 냉커피만 샀고, 형은 홀로 편의점에 들어가서 음료를 두개 사서 하나는 제수씨에게 주고 내게는 안주고 가버렸다. 아내는 자기는 안 주고 제수씨만 주었다고 밤새도록 성이 나서 잠을 하나도 못잤다는 것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젯밤 아내의 말을 듣고 실없이 웃고 잠도 잘 잤다. 오늘 회사에갔다가 오니 한다는 소리가 "어떻게 당신하고 끝까지 살 수 있을까 걱정돼요. 당신 형 꼴보기 싫어서..." 란다.
그런 소리 듣기도 싫커니와 나도 그렇게 속이 좁은 형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과거를 소환하며 형을 까대기 했다. 좀 모자라는 인간이라고. 그러니까 그런 인간한테 정나미 떨어져서 성질부리지 말고 그냥 그렇게 모자라는 사람이구나! 하고 편히 살아라~ 라고 다소 흥분해서 씹었더니 나도 조금 속이 편안해졌다.
초저녁에 명례누나가 낮의 내 전화를 안받더니 전화가 왔다. 형이 이번 익산 여행에서 웃기도 잘하고 이런 저런 농담도 했다고 과하게 칭찬하길레, 형은 (사회성과 관련해서) 좀 모자란다고 까대기 했다. "천국이 내 안에, 내 밖에 있는 것이요, 지옥이 내 안에 있는 것인데 무스기 죽어서 영혼이 어디메를 간다고 죽을때 까지만 같이 살자! 죽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갈린다! 그따위 소리나 지껄이는 인간... 이라고 하자 명례누나가 웃으며 나를 살살 달랜다. 얘야 형이 사우디 가서 죽다 살아돌아와서의 굳쎈 믿음이니 형이 그런가보다 하고 말아라! 그래요. 알았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종교적이더구만 큰아들도 똑같이 종교적이니 이게 무슨 시츄인지요? 내가 만약 참지 못하고 무슨 말일랑 바쳐들라치면 누나가 눈짓좀 해주세요ㅋㅋ 그러면 대들지 않을께요.
나보다 사실 나는 동생이 더 걱정돼요. 나는 그래도 바른 말이라도 해대지 동생은 지금 형에게 악이 바쳐 있어요. 누나는 처음 듣는 예긴지 깜놀한다. 오늘은 지영수 반장에게 아침나절에 나무둥치의 새로 돋은 풀을 뜯어라~ 2동 4라인의 화단에 깔린 깔개는 뭐냐? 등등 싫은 소리를 해댔는데 지반장은 나의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 소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게 무안도 하고 기분도 종일 영 그랬는데 결국 모든 타깃은 명암형에게 집중되고 말았다. 모자란 사람이니 그런줄 알고 당신이 참아라.
아내는 방금(22:39) "냄새가 다 나갔는데 문 닫아도 돼요?" 라고 묻는다. 평설문체로 보아 화는 다 풀린 것 같다ㅎ 7월 둘쨋주 일요일 옥계리선영 풀벨 때 안가고싶어요 ~ 아내가 형과 형수와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기 전에 내가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안다. 아내의 성질머리도 만만찮고, 형과 형수의 오불관언 윗사람의 고집도 또한 그 몇 배 쎄니 결국 부딪치면 다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내가 참고 이해하여야만 풀릴 일인기라~ 절대로 나이 먹은 사람의 고집 안바뀌어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는 것이라고 오늘 낮에 틱톡에서 봤지 않은가베!!!
오늘 집자 終ㅋㅋ 어제 익산여행에서 돌아오다. 22:42)
(24/6/4, 07:55 실컷 까대기하고 난 후에는 어떤 떫더름한 허접함이 찌끄러기처럼 만져진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다 물러가고 없어 컨디션은 맑게 갠 하늘 같다ㅎ 까대기의 긍정적인 부분이다. 내 형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 너무나 착해서 그것에 고착해버려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 그것을 변변찮다고만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발상이다. 내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되어서, 아마도 그것때문에 비잉 돌려 그런 비평을 하는 건 아닐까?? 실컷 욕하고 또 사랑하고 그게 형제가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나 불교는 모든 인식론적 가능성을 수용한다. 불교는 어떠한 명제에 어떠한 분석을 가해도 그 결과가 조금도 그 종교적 진리와 어긋남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마랳서 불교는 인식론적 반성의 철저성 위에 서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과학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심오성인 동시에 그 한계인 것이다.
기독교전통에서는 인식론이 종교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의 발전이 저해된 그러한 아니러니를 인류의 역사는 노정시킨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역사에 있어서, 과학의 성과가 인류의 보편적 자산이 되어가는 지금, 과연 그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사를 바라봐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ㅎㅎ)내가 지금 이 글을 죽으라고 힘들게 쓰고 있는 나의 책상 앞에는 큰 창이 있고 그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있다. 과연 내 앞에 잔디밭(lawn)이 있는가?
저기 잔디밭이 있다! 저기 잔디밭이라는 존재가 있다. 저기 잔디밭이라는 존재의 실체가 있다! 과연 그런가? 잔디밭은 거시적 세계다! 그러나 미시적 세계로 들어가보면 그것은 많은 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과연 잔디밭은 있는가?
남의 집 잔디밭을 보면 아름다웁게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은 좋다. 그러나 그것을 가꾸는 주인집 사람에게는 정말 미칠 노릇이다. ...이런 짓을 안 하면 잔디밭은 곧 흉물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지렁이.모기.뱀이 우글거리는 덤불로 바뀐다.
잔디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잔디는 과연 존재我인가? 나는 매일 아침 이 글을 쓰다 말고 잔디밭에 나가 잡초를 뽑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몇 평 남짓한 테에라도 푸른 풀밭이 있다는 것이, 매일 갇혀 살다시피하는 나에게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러나 잡초를 뽑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이 잡초에게 얼마나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들에 나가면 바랭이 웬수, 집에 들어오면 시누이 웬수라던데! 과연 뗏장풀과 클로바와 바랭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뽑아내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불교에 있어서 매우 본질적인 질문이다.
잔디밭의 유지가 하나의 폭력이라면, 그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나의 존재는 하나의 폭력이다! 나의 생명은 신의 폭력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가? 몸을 하루만 안 가꾸어도 내 몸은 잡초처럼 온갖 꼬무레기들이 돋아나고 병이 걸리고 하지를 않는가? 암이 걸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이 하루를 정결하게 살아야 하! 나의 몸의 호미오스타시스(평형)체계는 분명 잔디밭의 유지와 같은 폭력적 사태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 분의 1. 2절은 리離 즉 미시의 세계를 말한다. 3.4절은 합合 즉 거시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말한 '티끌'은 곧 리離의 미시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잔디라는 합合의 상태가 존재하지도 않는 가합의 픽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학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거시적인 가합상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가합상태를 구성하는 구성 최소단위 그 자체는 실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과학적인 원자론의 세계관은 대강 이러한 생각 위에 서있다. 이 구성 최소단위를 소승불교에서는 바로 법法 즉 다르마라고 불렀다. 이 입장을 소승불교는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
나라는 실체는 없지만 나를 구성하는 법은 실유實有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대변하는 철학이 바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소승철학불교인 것이다.
금강경은 이러한 有論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매우 래디칼한 사상인 것이다. '아공법유'라고 한다면 결국 '무아론'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잔디밭은 풀 한 포기 한 포기로 구성되어 있다. 잔디밭은 없어도 풀은 있다. 과연 그런가? 풀 한 포기는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또 다시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식물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또 그 세포 하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핵과 세포질과 세포막과 미토큰드리아, 골지체, 리보좀(뇌과학에서 읽었던 단어이다!)... 그럼 또 핵은? DNA는?
무아론無我론의 궁극은 법유法有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세계는 空인가?
나는 최소한 한문의 '미진중'은 단순히 '미진'의 복수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뜻은 '
원자의 집합체'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가루로 부숴만든 결과가 또 다시 '집합체'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석연치 않다. '집합체'라든가 'colection'이라는 표현은 이미 가합의 매크로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원자'와 '집합체'는 동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도인들은 원자 그 자체가 시공을 점유하는 미세단위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는 '먼지라는 덩어리' 즉 먼짓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 먼짓덩어리가 많으냐 적으냐고 묻는 것이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마이크로한 세계로 부숴버리면 티끌이라는 법이 남지 않겠는가? 바로 이 법조차를, 제30분의 철학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30-2.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만약 그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티끌들이라 설하지 아니하셨을 것이오니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오니이까? 부처님게서 설하신 티끌들이란 티끌들이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들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卽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여기서 분명하게 '아공법유'의 '법유'를 부정하고 있는 대승정신의 철저성이 드러나고 있다. 존재는 無다. 과연 이 無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어떤 중의 화두가 '무無'였다. 그러나 그 중은 끝내 無의 화두를 꿰뚫치 못하고 말아서 그의 스승은 다른 화두를 건넸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만큼 '無'라는 화두는 힘든 것 아닐까? 젊은이들에게 평생 곱씹어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過하다.)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평생을 두고 두고 곱씹어보라!
(13:05, 한낮에 사무실에서ㅎ 전주임 제사라 휴가 냈슴ㅋㅋ 수목소독을 복숭아 나무가 몹시 기다려왔고, 나는 화장실 쪽에서 쏴달라고했으나 그들은 그냥 그 전통의 장소에서 그가 하던대로 했다.
30-3.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오니이다. 그러므로 세계라 이름하오니이다. 어째서이오니이까?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큰 전체상일 것이오니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큰 전체상은 하나의 큰 전체상이 아니오니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큰 전체상이라 이름하오니이다."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1.2절에서 '리離'의 세계를 말했다면, 3.4절에서는 '합合'의 세계를 말했다. 리離는 지소무내至小無內(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다)의 세계가 될 것이고, 합合은 지대무외至大無外(가장 큰 것은 밖이 없다)의 세계가 될 것이다. 붓다는 곧 우리가 합의문제로 사유의 방향을 틀면 곧 세계 그 자체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는 것을 3절의 초반부는 시사하고 있다. 즉 세계 속에 티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티끌의 합의 궁극은 세계 그 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 '일합상'은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보고 그것이 실체實體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콘체는 a materal object(한 물리적 대상)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오역이다.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Cosmos이다. 여기 일합상이라는 표현은 그 우주보다 더 추상적인 표현이다. 혜시가 말한 지대무외로 본다면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연장적 연속체extensive continuum:가능한 가장 큰 사회)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현재적 사유로써 상정할 수 있는 가장 큰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이 연장적 연속체의 하나의 구현이다. 물론 이 연장적 연속체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사유의 산물이다. 따라서그것마저 우리의 집착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연장적 연속체는 실체가 아닌 영원한 가능태일 뿐이다. 그것은 구현의 자리(場)인 것이다.
30-4. "수보리야! 하나의 큰 전체상이라 하는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범용한 사람들이 그것에 탐착할 뿐이다."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대한종합관리의 이사가 와서 공평환씨 사직 관련하여 소장과 얘길 나누고 갔다. 고집 어쩌쩌구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이가 과연 공씨에게 사정을 제대로 들었을까? 혹여 전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한 김영안씨를 보며 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와 예반장은 한꺼번에 둘을 같이 해결했으면 싶은데 소장은 그가 장감사와 엮여 있어서 주저하고 '다음 기회에' 하고 말았다. 이것도 직장이니 소장의 사정을 외면하고 비판할 수만도 없다ㅜㅜ 그런 사정을 아침에 예반장과 2동 측부통로에서 나눴다. 1동 통장이 그때 옆을 지나쳤고 인사를 얼결에 하였고, 기 빨리는 자 옆을 지나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 소리를 그녀가 누군가로부터 들었을 것이라고.. 그게 누군지는 개략 짐작은 한다. 의심하자면 말이다...
不可說, 不加思議. 그대들이여! 모든 것을 말하려 들지말라.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우주요 인간이다. 비트켄슈타인의 침묵도 말할 수없는 것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트켄슈타인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쓸데없이 떠드는 것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지어다.
知見不生分 第 三十一
앎을 갖지 말지어다
31-1. "수보리야! 누가 부처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느냐?"
須菩提 若人 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 解我所說義不 不也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지견知見'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흔히 불교계에서, 특히 사려 깊지 못한 스님들이 이를 '알음알이'라고 번역하는데, 제발 이런 추잡스러운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엥?? 이 무신 소리고?? 이게 왜 추잡스러운 말인가!)
'알음알이', '먹거리' 이 따위 말들은 전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최근세 무식한 자들에 의해 날조된 매우 천박한 비국어이다. '먹을 거리'는 가능한 말이지만 '먹거리'란 있을 수없는 말이다. 어떻게 동사의 어간이 관형사형 어미가 없이 직접 명사에 붙을 수 있는가? '하다'에서 '하일'이 가능한가? '할일'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먹거리가 우리말이면 옷은 '입거리'가 되어야 하고, '볼거리'는 '보거리'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합성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말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왜 하필 '먹다' 라는천박한 느낌의 말을 어간으로선택해야 하는가? '자실 거리'라 해도 될 것이요, 얼마든지 다른 좋은 표현이 있을 것이다. 韓語를 피한다 해서 천박하고 어법에 벗어나는 우리말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타락이요, 우리 언어생활 격조의 하락일 뿐이다.
'알음알이'도 통사적으로나 음성학적으로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에 불과하다. '알다'에서 '알이'라는 비루먹은 명사형은 도출될 수가 없다. 그냥 '앎'이라 해도 좋고 그냥 '알음알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절간문턱에 '알음알이'를 가진 자 여기를 넘어오지 말라'는 둥 이따위 불결한 팻말을 돌에새겨놓고 있는 스님네들! 그대들 알음알이부터 후벼 파 내버리시오. 지견知見을 가진 자일수록 절깐에 들어와야 하고, 우리는 그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어친절화게 그들의 지견을 버리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대화를 거부해서는 아니 된다. 방망이를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 방망이는 곧 너를 향해 들어라! 이것이 곧 대승정신일지니.
[전주 한국소리 문화의 전당 야외공연장, 현역가왕 콘서트에서]
31-2.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제일 앞머리의 '세존' 앞에 세조본, 송, 원, 명본, 통용본에는 '불야不也'가 삽입되어 있다. 내가 통용본이 조잡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곳에 다른 곳과 비교하여 같은 패턴으로 획일화시키는 것이 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매끄럼하게 불필요한 말들을 삽입하는 용렬함 때문이다. 라집은 그러한 획일적 병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인사판본에는 그러한 용렬한 자의 장난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신선한 고본古本의 고졸古拙한 느낌! 그 이상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대정본은 우리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이 표현은 여일하게 계속된다. 대정본이 해인사본을 따랐으니 당연한 결과이련만...).
31-3.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일체의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을지니, 마음에 법의 상을 짓지 말라. 수보리야! 말한 바의 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는 곧 말하였다. 법의 상이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법의 상이라 이름하는 것뿐이니라."
須菩提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不必言說.
應化非眞分 第 三十二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32-1.
(금일 집자 終. 도올에 대하여 , 금강경의 바다에 마침내 가까왔다 등등 금일 시아버지 제사라 빠진 전주임 , 통화끝물 감사합니다 라는 사족을 붙여 누가 리딩해주길 원하는가 3초소 뒤의 바람에 에어컨이 배경이 되어 준다. 22:44)
(24/6/5, 08:20 집자할 수 있는 시간이 15분. 짧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할까? 어젯밤에 31분은 다 집자했지만 날아가삐고 말았는뎅ㅜ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의 마음을 발하고, 이 경 내지 그 사구게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 복이 저 칠보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 勝彼
32-2. 그리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연설한단 말인가? 상을 취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연설演說'이란 말은 이미 불교 이전의 문헌에 보이는 말인데 한역불전에서 불타의 가르침을 남에게 설한다는 의미로 잘썼다. 연설이란 '연하여 설한다'는 뜻으로 연이란 '물 흐르는 대로 그 물가를 따라서 자세히' 의 뜻이 있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에는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위하여 이 가르침을 말하여 들려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말하여 들려줄려고 하지말라! 그래야 비로소 말하여 들려준다고 말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이 논지를 라집은 아름다웁게 바꾸었다.
불취어상, 여여부동.
상을 취하려 하지 말라
여여하게, 부동하게!
노자의 말에
집대상 천하왕
執大象! 天下往
모습 없는 큰 모습을 잡아라!
천하가 스스로 간다.
이제 눈물겨웠던 우리의 『금강경』 강해도 아쉬운 고별을 말하게 되었다. 나는 금강경에 나오는 이 마지막 게송과 더불어 너무도 절박했던 색신의 노고를 풀려 한다.
32-3. 어째서 그러한가?
何以故?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아침집자 終. 08:40 몇일 만에 새벽의 효성공원엘 다녀 왔다. 체리를 몇 개 따서 가져 오다. 벚도 몇 개 따먹었다. ㅎ눈치주던 효성공원 헬스장 남자의 눈빛이 유치찬란하다ㅎㅎ 왜 내 자릴 차지하고 있어 그런 의미겠지ㅋㅋ 일종의 갑질,
인간은 늙을수록에 유치하고 노여움 많고 인내심이 없다)
(18:43, 퇴근. 내일은 현충일~~ 지반장에게 월요일(그저께)에 오더를 주었더니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여 상황을 되돌려 보았다. 그랬더니 내가 아무래도 조금 앞서 나간듯 보여 퇴근 전에 1초소로 가서 사과의 마음을 지반장에게 내비쳤다. 노회하달까?? 관리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한다고 직원(김영안씨겠지)에게 말했다나?? 이 말에도 우리와 경비원이 서로 다른 파트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해주는(3동 화단 나무둥치의 새싹 제거) 고로 다른 일이 급할 때 최주임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 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내가 우려했던 그 부분이 연관성을 갖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전혀 상하관계가 아니고 협력관계라는 의미 아니겠나. 그 말이 맞다. 금일 아침 5동 505호쯤이 전출하였고, 내어 놓는 가구가 있어 (지반장이 일지를 들고 오지 않아)조회가 불발되었다. 가 보았을 때 김영안씨의 표정이 뭔가 불편하였었고 나는 예감이 예반장하고 뒷담화 한 발언이 그에게 들어갔나 추측하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게 증명된 셈이다. ...매실을 아프게 살을 파내고 보조개 크~은 이하늬의 수절과부 티비를 보다가 다시 컴 앞에 앉았다. 21:56 현재
32-4.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시었다. 장로 수보리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색과 우바이, 그리고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믿고 받아들이고, 맏들어 행하더라.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 優婆塞優婆尼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金剛般若波羅蜜經
'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는 1분 1절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초기 불교승가를 구성한 사부대중을 말하고 있다. 비구와 비구니는 출가이중二衆으로 구족계를 받는 사람들이고 우바색과 우바이는 재가이중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받는다(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 우바색은 남성으로 청신사, 근사남, 선숙남 등으로 의역되고, 우바이는 여성으로, 청신녀, 근사녀, 선숙녀 등으로 의역된다.
통용본에는 제일 마지막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그러나 라집본의 유일한 정통 텍스트인 우리 해인사고려대장경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들어 있으므로 반드시 이 경의 이름으로 이 경을 끝내야 한다. 『대정大正』도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본도 마지막에 이 경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통용본들이 『금강경』을 '신수봉행'에서 끝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의 진언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더 중요한 판본의 문제는 바로 라집본에 유일하게 그 뒤로 진언眞言이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금강경』의 모든 한역본 중에서 진언이 있는 것은 라집역본 하나밖에 없다. 보뎨류지, 진체, 달마급다, 현장, 의정의 역본이 모두 이 진언을 결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존하는 산스크리트본에도 진언이 빠져 있는데 그렇다고 라집이 이 진언을 창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라집이 저본으로 쓴 산스크리트 텍스트에는 이 진언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티벹본에는 보다 자세한 진언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라집역본 외의 다른 판본, 송.원.명 3본, 세조본 이하 우리나라의 모든 통용본이 의도적으로 이 진언을 빼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진언을 빼버린 것은 『금강경』의 이해가 선종화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진언을 빼버릴 수는 없다.
우리 해인사대장경판의 소중함은 바로 이 금강경의 경우만 해도, 라집역 금강경의 제 모습을 온전하게 전하고 있는 유일무이의 고孤본이요, 고본古本이라는 사실에 있다. 라집역 금강경 판본 중에서도 온전한 진언이 텍스트로 붙어 있는 판본은 우리나라 해인사 고려판본 단 하나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금강경을 말할 때 그것이 라집본인 이상에는 반드시 이 진언으로써 경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금강경이요, 참다운 우리 금강경이요, 고려제국 사람들의 섬세하고 위대한 손길이 담긴 세계적인 『금강경』인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라는 진언을 빼먹으면 『반야심경』의 맛은 반감된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의 그 모든 것의 실제적인 종교적 의미는 그 진언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금강경의 지혜도 이 진언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진언이란 나의 육신의 발성기관의 진동이 아닌 우주의 소리요, 신의 소리인 것이다.
(22:25, 슬슬 졸립다. 이제 지반장 껀은 잊자ㅎㅎ 자꾸 생각해봐야 아무 이익도 없어. 그리고 내가 직속상관이 아닌 것이 분명하잖아. 우리는 단지 한 아파트의 각기 다른 파트를 맡고 있을 뿐이야. 대신 소장과 경리 그리고 관리주임인 나는 아무래도 경비원과는 그 질이 다를 수밖에 없음은 명약관화 하다. 내일 6시에 계양을 뜨기로 한다. 그러면 5시에는 일어나야 옳다. 자자!)
(24/6/6, 현충일. 오늘 마석 천마산을 다녀왔다. 대체적으로 삼각형으로 느껴지는 형체에 '한북정맥'의 거의 끝부분에 우뚝 선 산이다. 운악산 지나 분기한 천마지맥은 비금산- 철마산- 천마산- 마석터널 위- 백봉- 그리고 양평 두물머리로 가서 자맥질하며 맥이끊긴다. 천마산에서 보는 북쪽의 지맥 모습은 참으로 기막히다. 용의 앞과 뒤의 꼬리가 구불구불 휘어져 천마산으로 기어 오는 모습이 천하의 장관이기 때문이다. 호평에서 헤메고, 천마시민공원으로 하여 들머리 삼았다.
진언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진언은 진언일 뿐이다. 인간의 의미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진언은 나의 신神과의 대화다. 그때 나는 다름 아닌 신神이다. 진언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힘을 갖는 것이다. 진언, 그 자체가 브라만인 것이다. 삼라만상 이 우주가 모두 진언이다. 이 진언에 의하여 곧바로성불한다고 믿는 것이 진언종의 신며이다. 이 진언에 참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기나긴 금강의 지혜의 여행을 했어야만 했다는 것을 마음에 되새기자! 금강경을 못 외우더라도, 이 마지막 진언이라도, 어려울 때나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한상 내 바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자!
'나모'는 '남무南無'로 음역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존엄하신 지혜의 완성의 여신에게 경배(귀의)하는 인사의 말이다. '지혜의 완성'이 여성명사화 되어 신격화 되고 있다.
마지막 '스바하'는 기독교의 '아멘'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행복이 깃들기를, 축복이 있기를' 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도에 가면 사람들이 성스러운 곳에 향을 뿌리면서 '스바하'를 외친다.
중간의 '옴'은 우주의 소리다. 'AUM'을 표기한 것이다. A는 소리의 시작이며, U자는 지속이며, M은 끝이다. 이것은 우주의 탄생과 지속과 소멸을 다 함축하는 진언인 것이다.
중간에 슈로다는 슈루띠의 변현일 것으로 추측된다. 슈루띠는 '듣는다' 는 뜻이다. '하늘의 계시, 신성한 교의'의 뜻도 된다.
『금강경』은 논리의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찬가요, 해탈의 노래다. 그 노래가 이 진언 속에 다 함축되어 있다. 진언을 말할 때는 반드시 리드믹한 노래로 불러야 한다. 장음과 단음, 역양의 고하의 묘합을 살려!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이것으로 나의 강해는 끝난다.
2024년 6/6 22:05
집자 終.
『금강경』 강해하시느라고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 선생께 정중히 치하 드림
ㅡ끝.
經後說
나는 어려서부터 궁금한 게 많았다.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너무도 쉬운 이야기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누가 농담을 던져도 같이따라 웃지를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아둔하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동감이었다. 어머님 말씀이 서너 살 때부터 길거리를 지나다가도 풀 한 포기가 궁금하면 거기에 덥쑥 주저앉아 떠날 줄을 몰랐다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궁금증들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선생도, 책도, 아뭇잎도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성장하였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불교강의를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도무지 불교라느 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중이 되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너무도 머리가 나뻤기 때문에 직접 중이 되어 불교의 세계를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의 고향 산골 어느 폐찰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승복을 입었다. 그리고 열심히 도를 닦았다. 그렇게 삼 개월이 흘렀다.
나는 승복을 입은 채 상경을 시도했다. 갑자기 서울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완벽한 스님의 모습을 하고 여장을 차렸다. 스무 살 남짓했던 나의 푸른 청춘이 그 잿빛 승복조차 푸르게 만들어 버리고 말 그런 활기찬 모습이었다. 나는 대로를 행진했다.
나는 이때 너무도 깊은 충격을 받았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너무도 많은 아줌마, 할머니들이 그어린 소년인 나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절을 해야 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절으 ㄹ올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승복을 한번 입고 크게 깨달았다. 그 얼마나 우리 민중 속에 불법에 대한 신앙이 깊게 자리잡고있는가 하는 것을. 나는 그것을 처음 몸으로깨달은 것이다. 엄격한 청굦도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나, 그리고 당시 신학대학을 갓 나왔던 나에게는 더 이상의 충격이 없었다.
드디어서울에 왔다. 신촌 엄ㅁ나 집 문에 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나가 이 내 꼴을 보고 얼마나 놀라실까? 우리 엄마는 평생을 무섭도록 정통적인 기독교신앙에 헌신해 사신 분인데 이런 마귀 모습을 하고나타나다니! 대문을 짤칵 열고 들어서는 순간!ㅃ 계단 위에 엄나가 서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 나의 엄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엄마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도 없이 날 빙그레 미소로 반겨주셨다. 참으로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무말도 없으셨다. 그 순간에 대하여 오느날까지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 순간의 엄마의 미소! 그것은 가섭의 미소보다 더 소중한 나의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그때 엄마의 그미소가 없었더라면, 오늘 이 『금강경』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는 체험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여기 기 금강경 강해는 나의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이것은 니ㅏ의 삶의 깨달음의 역사요, 나의 무지의 체험의 역사요, 나의 삶의 환희의 기록이다. 기독교와 불교에 깊은 싱앙체험이 없었더라면, 오늘 이 금강경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본질을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부활과 성령의 은혜를 말하며, 회개와 사랑을 말하지 않고 천국의 도래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나느 ㄴ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인으로컸다. 나느 ㄴ성격을 다 외웠고, 나느 ㄴ엄마나ㅡㄹ 따라고사리손을 호소 불면서 매일매일 새벽기도에 나가, 뭔지도 모르면서 애통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성스러운 방언도 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사도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갔다. 나는 신학대학에다니면서 이미 여기저기서 명설교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나는 나의 언설의 카리스마를 누구보다도ㅓ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언어는 뭇 대중들에게 성령을 베푸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서 목사가 되었더라면 최소한 빌리 그ㅡ래함보다는 더 위대한 전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쯤 어마도 엄청난 성전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머누도 잘 알기에, 분명 신의 뜻이 다른 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신학대학을 나왔다. 너무도 내 목소리가 신의 음성을 닮았기에 나는 나를 더 이상 기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학대학을 걸어나오면서 내가 흘렸던 눈물은 지금도 후회함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고독하게 살았다.
나의 무지는 계속되었다. 아무리 아무리 묻고 찾아봐도 이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를 않았다. 그렇게 나는 천지를 헤멨다. 그렇게 지천명의 나이가 지나갔다.
그런데요즈음 좀 이상한 일이 생겼다. 조금 무엇인가 아는 듯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 모릿속에 궁금해서 집어넣어 놓은 지식들이 서로 춤추면서 어떤 모습을 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을 받기 시작하고 내가 처음 집필한 붓이 아마도 이 금강경강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 방대한 원고를 꼭 스무 날 만에 썼다. 초가을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지루하게비가 쏟아지는 9월에이 글을 썼다. 다른 원고에 대한 피치 못할 약속을 지켜야 하기에, 7월 한 달 강의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멀리 도망가 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고 한 번 붓을 놓아버리면 영원히 못쓸 것 같아 결사적으로 붓을 놀렸다. 반야 지혜의 여신이 내 붓을 움직여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원고를 스무날 만에탈고하는 그런 무지한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관심은 우리 이 조선땅에서계속 살아갈 젊은이들이다. 요즈음같이 젊은이들이 보수화되어 가고, 역사의 대의나진실에무관심해져가는 사태를 나는 방관할 수없다. 우리조선의 역사는 젊음을 상실해서는 아니 된다. 나느 ㄴ이땅의 젊은이들이 이 금강경의 벼락 같은 회초리를 맞고 정말 크나 큰 마음을 가지는 위대한 사람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