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를 말하다
- 나는 난처한 상황에 시를 수영으로 읽었다
박홍재(제5회 수상자)
수영은 시를 쓰는 일만큼 장점이 많은 운동이다. 우선 혼자 즐길 수 있다. 단체활동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딱 좋다. 즉 파트너가 없어도 좋다는 말이다. 또 언제든 할 수 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땡볕이 내리꽂든 가릴 날이 없다. 수영장 수온은 적정하며 수질은 먹어도 좋을(?) 만큼 소독하고 여과한다. 수영복 한 벌이면 준비 끝이니 비용 부담이 적은 편이다. 시 쓰는 일이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모르면 몰라도 시를 쓰며 사유하고 고뇌하는 일이 수영장의 깊이와 면적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러운 예단이다. 어느 시인은 ‘시인이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는 피바람이 분다.’ 했으니.
나는 요즘 수영을 한다. 수영을 하면 몸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천상 몸이 게으른 터라 수영장까지 가는 길이 멀지만, 시작만 하면 바로 ‘참 잘 왔다’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전 일이다. 못해도 30여 년 전쯤은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영 실력은 젬병 급이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의 자세가 중요하다. 잘해보겠다는 마음가짐에 따른 성실성과 면밀한 연구와 끈기는 순전히 기본자세에 속한다. 그때 나는 직장이 특수한 교대근무제라 수영 강습에 결석을 밥 먹듯 했다. 잘 될 리 없었다. 이번 주 강습에 출석하면 다음 주는 으레 빠지기 일쑤였다. 기초가 탄탄하지 못하니 웅장한 탑을 쌓을 수 없는 것은 뻔할 일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수영에 입문하면 발차기와 숨쉬기를 배운다. 발차기, 쉽게 보지 마시라. 막상 잘 안된다. 주행하는 동안 허벅지로 끊임없이 물을 눌러주어야 한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리 근육에 통증이 온다. 안 쓰던 근육을 무리하게 쓴 탓이다. 통증은 내일도 모래도 쉬지 않고 발차기해야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숨쉬기는 또 어떤가? 물 밖에서 숨을 마시고 물속에서 내 쉬어야 한다. 얕볼 일이 아니다. 자칫 거꾸로 마시고 내쉬다간 코로 마신 물로 눈물을 쏟게 될 것이다. 우리가 평생 숨을 쉬고 사는데 숨쉬기를 배워야 한다니, 제대로 배워두지 않으면 수영장 물먹고 배부른 탓에 다음 끼니는 걸러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수영을 시작한 지 불과 5~6개월 만에 수영을 그만두었다. 속성 강좌인데다 불성실한 수강 태도였으니 내 수영 실력이란 양, 가 수준이었다고 보아야 맞다.
내가 수영을 썩 잘하지 못한 것은 어릴 적 먹은 약간의 트라우마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과 저수지 아래 작은 둠벙에서 물놀이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 앞에서 수영 실력을 뽐냈다. 둠벙 이편에서 저편까지 헤엄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때 나보다 네댓 살은 더 먹은 동네 형이 내가 하는 수영은 수영이 아니라 개헤엄이라며 놀려댔다. 그리고는 동네 형이 물속을 잠수하여 잠시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기겁하여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왔는데 친구들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사실 잘못하면 죽을 뻔한 경험이었는데 망신은 망신대로 당한 억울함이 나의 트라우마로 연결된 것 같다.
내가 수영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근 25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그동안 건강 유지와 취미활동으로 다른 운동을 두루 익히기도 하였다. 축구, 족구, 하이킹, 배드민턴이며 50대면 모두 시작하는 걷기까지. 그런 와중에도 마음속에 늘 개운찮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은 게 도사리고 있었는데 나는 어떻게든 그놈을 깨끗하게 끄집어내고 싶었다.
다시 수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수영 교본도 샀다. 한 권이 마음에 차지 않아 다른 책을 염탐하기도 했다. 교본에서 가르친 대로 적용해 보았다. 수십 년 전, 처음 시작할 때 밭을 엉터리로 일궈놓은 탓으로 새로 시작하느니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황무지를 일구는 게 나을 일이었다.
수영의 영법에는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이 있다. 자유형은 프리스타일로 어떤 영법으로 헤엄쳐도 무방하다. 배영이든 평영이든 접영이든 아니면 개헤엄을 쳐도 상관이 없다. 다만 남들이 모두 적용하는 크롤 영법을 외면한다면 성적은 보나마나일 것이다. 현재까진 개발한 영법 중에서 가장 빠른 자세가 크롤 영법이니까. 잠영이 더 빠르긴 한데 인간이 숨을 쉬지 않고 계속 수영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긴장하며 자유형을 익히기 시작했다. 시선은 수영장 바닥을 본다. 호흡의 리듬을 깨뜨리지 않는다. 팔과 다리에 힘을 뺀다.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체력이 따라주지 못했다.
배영은 유일하게 수영장 안에 들어가서 출발한다. 누운 채로 천장을 보고 나아가니 흡사 자유형을 뒤집어 놓은 꼴이 된다. 사는 일도 뒤집어보면 또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다. 물 위에 누워 언뜻 엉뚱한 생각에 빠져 물 먹기 딱 좋은 영법이다.
평영은 이른바 개구리헤엄이다. 고대 벽화라든가 그리스나 로마 기록에 나타난 인류의 헤엄은 평영이었다고 한다. 네 가지 영법 중 가장 느린 영법인데 나로선 가장 익히기 어려웠다. 지금도 영 속도가 나지 않는 게 발차기와 팔을 뻗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아직 멀었다.
마침내 접영이다. 버터플라이라고도 하는데 나비가 나는 모습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 내 실력이 나는 듯 쏘는 듯 가볍게 시원스럽게 헤엄칠 수는 없지만, 접영하고 나면 짜릿한 맛이 있다. 접영의 맛을 약간 알긴 안 모양이다. 날아가는 대포알을 상상하며 양팔을 휘저어 보라. 가슴과 등이 물속을 웨이브 하는 춤을 추어라. 해류의 물살을 타고 오르는 고래를 상상해보라. 나는 어쩌면 접영을 하기 위해 수영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레인의 끝에 도달하면 소진된 체력과 오르내리는 허파의 일렁임에 오히려 짜릿한 쾌감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요즘 수영에 재미가 붙었다. 좀 된다 싶으니 더 잘하고 싶다. 여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있어서다. 어릴 적 동네 형이 내가 둠벙에서 헤엄치는 것을 개헤엄이라 놀릴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개헤엄에서 탈출할 용기를 가졌었더라면, 삼십 년 전 바야흐로 수영을 시작했을 때 고단한 생활을 핑계 삼지 말고 부단한 끈기와 인내로 계속 노력했었더라면, 근 25년여 취미로 삼은 잡동사니 운동에 기웃거리지 말고 마음속에 풀지 못하고 담아두었던 수영을 계속했었더라면, 피하지 못할 수영를 진작에 운명처럼 맞아들였었더라면.
어느 날 수영장의 지인이 물었다. ‘나의 수영을 말해’보라고. 당황스러웠다. 나의 수영이라……. 이제야 소위 혼영(접・배・평・자) 레인을 가까스로 돌아오는 단계인데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나의 수영은 산의 줄기가 아닌 산의 뿌리도 발아하지 못했으니 산의 형체나 정신을 말하기엔 무리였다. 다만 이미 시작했으니 내일의 다짐 정도는 짧게 말할 수 있을는지.
다시 말하지만, 이번에는 수영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 돈키호테처럼 막무가내로 물속을 휘저어 보고 싶다. 횡영이니 입영이니 하는 경기종목 외 영법도 도전해보고 싶다. 새로운 영법도 선보이고 싶다. 현란한 테크닉은 물론이다. 거꾸로 서서 헤엄치거나 석 자 높이씩 수면을 퉁퉁 튀어 오르는 로켓 발사방식 영법을 보게 될 것이다. 막판을 참지 못하고, 고수의 수영인들이 경청해주시는 자리에 지리멸렬 참 민망하고 곤란한 말을 늘어놓았다.
‘나의 시’를 굳이 말하자면 ‘나의 수영’에 대한 비유쯤 되겠다. 이처럼 나의 시를 말하기에는 이르다. 엊그제 신인으로서 시집을 출간하였다거나 지면이나 인터넷 매체에 띄엄띄엄 이라도 시를 발표해온 게 아닌 처지에 ‘나의 시론’을 고민해 볼 시적 대상이 빈약했다. 졸고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