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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교
오늘(5/1)은 노동절 116주년 기념일입니다.
매우 의미있는 날 임에도 노동절의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여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근로자' 라는 말 대신 '노동자' 라고 표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별거 아닌것 같지만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실천해 볼까요.....노동자!
우리 중개업자들도 자영업자라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영세한 '비임금성노동자' 일 수 있습니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지는 않지만 본인의 노동력으로 수익을 창출하여야 하는.....
노동절에는 집안의 일로 충남 강경을 다녀왔습니다.
젓갈로 유명한 지방의 소도시 이지요
강경에 가면 금강을 가로지르는 황산대교가 있습니다.
황산대교는 충남 논산시 강경읍과 부여군 세도면을 연결하는 길이 1,050m,
폭 12m의 왕복 2차선 다리이며 인근에 황산포가 있어 황산대교라고 이름했다고 하구요.
1986년에 준공한 황산대교의 특징은
국내에서는 호남고속도로 확장구간의 원곡천교에 이어 두 번째로
연속압출공법이라는 신기술을 적용하여 건축한 교량이며,
연속압출공법으로는 당시 동양 최대의 공사였다고 합니다.
연속압축공법을 황산대교 공사에 도입하며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경간를 50m의 등경간으로 나누어 1,050m의 전 구간을
이음새 없이 시공하였고 때문에 교량구간의 평탄성이 매우 좋아 졌다고 합니다.
이 기술의 도입으로 국내 교량건설기술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황산대교의 건설로
도선에 의하거나 육로를 크게 우회하여야 했던 강경읍과 세도면의 교통이 원활하게 되었습니다.
황산대교는 충청남도에서 발주하여 설계와 시행은 영국 스트롱홀드 인터내셔널에서,
시공은 삼부토건이 맡았으며 3년 3개월의 공기와 76억 원의 공사비용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강경쪽에서 바라다 본 황산대교입니다.
내친김에 금강 주변의 모습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신무산(897m)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함께 발원하여
군산에서 서해와 만나는 유역 면적이 9,885㎢, 연장이 401㎞로
남한에서는 낙동강, 한강 다음으로 큰 강입니다.
금강의 본류는 전북의 장수, 진안, 충남의 금산, 충북의 영동, 옥천, 대전의 신탄진,
충남의 세종, 공주, 부여, 논산, 강경을 지나
충남 서천의 장항과 전북의 군산을 사이로 서해에 이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하천이 그러하듯 금강도 물의 흐름이 불안정 하고 홍수가 빈발하여
금강 하류에 부여의 규암평야, 논산천 유역의 강경, 논산평야와 같은 넓은 평야지대가 발달했음에도
잦은 홍수로 수해를 입어 왔으며,
홍수 방지와 관개용수의 확보를 위해 1980년에 대전의 신탄진 부근에 대청댐을 건설하여 개선하였으며,
그 후 대청댐 인근의 대전, 청주, 천안 등의 도시가 성장하고 각종 용수의 수효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대청댐은 이들 도시의 주요 상수원이 되었습니다.
대전과 천안, 청주는 대청댐 없이는 지금과 같은 크기의 대도시를 유지할 수 없으며
1990년에는 금강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금강은 수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지금은 대청댐 외에도 용담댐이 금강 상류의
전라북도 진안에 1992년 착공하여 2001년 준공이 되었습니다.
용담댐의 물은 도수터널을 따라 전북 완주군 고산 저수장으로 보내지면서
금강의 물이 만경강으로 유역을 바꾸게 되며
도수터널 끝에는 금강의 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소가 가동중입니다.
용담댐은 저수량으로 볼 때 소양강댐, 충주댐, 대청댐, 안동댐에 이어 다섯 번째이며
전주, 익산, 김제, 군산, 장항, 충남 서천 등 4개시 2개 군에 수돗물을 생산하여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군산과 부안 앞바다의 새만금 간척사업 역시 용담댐의 물이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듯 금강은 담수량 기준으로 3위와 5위의 다목적댐 2개를 품고 있으며 최근
상당한 양의 물이 금강유역 상류에서 용담댐을 통하여 유실되기에 대청댐의 수위는 낮아지고
수질오염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금강 우측으로 강경읍내의 모습도 보입니다.
강경은 강경천과 논산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발달한 천혜의 내륙항 이었으며,
오일장인 강경장은 4일과 9일로 조선시대에는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큰 상권이 형성되어 금강하류에 발달한 하항도시(河港都市)로서
내륙교통이 불편하였던 시절에 물자유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가까이는 상류의 공주, 부여, 연기, 청양지방과
멀리는 청주, 전주지방까지 포함하는 넓은 배후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한 평야의 중심지였으므로 편리한 수운에 힘입어 큰 교역의 장소로 발달할 수 있었지요.
강경 옥녀봉에는 용영대라는 유적이 남아 있는데 드나드는 배들의 안전한 운행과
상업의 융성을 기원하던 곳이라고 하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미 완전한 시가지가 형성되어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물자의 집산지가 되었습니다.
강경포구는 구한말까지 금강연안의 문호였고 원산, 마산과 함께 그 시대 대표적인 수산물의 집산지가 되었으며,
군산열도의 어장을 비롯한 서해 수산물이 이곳에 모였고 중국산 소금을 수입하여
조기 등 어류를 염장, 가공하는 중심지로 매우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1890년대에 군산항이 개항하면서 강경과 군산의 지리적 관계는
마치 서울과 인천, 평양과 남포처럼 밀접하였으며 군산항의 수입화물 80%가 강경시장에서 판매, 유통되었으며
당시의 상권은 충청도와 전라북도, 경기도 남부에 이르도록 광대하였습니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청주와 공주지역이 강경상권에서 벗어나고,
내륙의 교통이 발달하면서 금강수운이 쇠퇴하고 군산이 국제항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상권은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1912년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어류집산지로서의 기능도 상실하고,
이어서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자 강경시장의 상권은 더욱 축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청을 논산으로 이전하고 인근 연무대에 육군훈련소가 설립되며,
특히 대전과 이리(익산)의 상권이 점차 커지면서 강경시장은 옛 세력을 잃고 말았지요.
일제강점기까지도 재래시장의 기능과 면모를 잘 유지해 왔던 강경시장은
6·25전쟁 때 대부분 완파되고 현대적 유통기구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제는 극히 제한된 소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젓갈류하면 강경젓갈시장이 전국 최고의 상권이며,
이 지역에 역사가 깊은 강경상고 졸업생들은 지금도 금융권 곳곳에서 그 인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논산군이 강경읍, 논산읍, 연무대읍을 포함하여 논산시로 승격된 이후에도
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과 강경경찰서가 논산경찰서로 개명되어
아직도 강경에 남아있어 옛날 번성했던 시절을 회고하게 합니다.
작고하신 아버지께선 한 때 비육우 농장을 하셨었지요
비육우는 어린 송아지나 200kg 안밖의 작은 소를 매입해서 살을 찌워 보통 500-600kg 이상이 되면
판매하는 방식의 축산업인데요, 제법 많은 숫자의 비육우를 생산하는 농장을 운영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겨울철에 사용할 사료용 볏집이 다량으로 필요하게 되어
추수가 끝난 겨울 들판으로 볏집을 구하러 다녀야 했는데 주로 다녔던 곳이 이쪽 논산-강경평야 부근이었구요
그땐 그일이 참 고역이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하니 겨울방학이나 휴일이면 호출이 떨어졌고 한겨울 깜깜한 새벽 5시면
눈 비비고 타이탄 트럭(2.5t)에 올라 강경뜰을 누비고 다녔으니 스무살 이쪽 저쪽 나이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지요
2.5t 트럭에 차곡차곡 쌓으면 다섯마지기(1,000평)의 볏집을 집채만하게 올리는데
볏집이 가볍다 보니 쌓는 일도 이동중에 무너지지 않도록 속을 박아가며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겨울철이면 이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하는 용달기사님들이 있었구요
한낮이 되면 얼었던 논바닥이 녹아 바퀴가 빠지고 미끄러지니 이른 새벽에 출발해야 했던 거지요
그렇게 꼭두새벽부터 서둘러야 두 번 정도 운반이 가능했습니다.
1,000평정도에서 나온 볏집을 트럭위로 던져주면 차량 위에선 용달기사가 빼곡하게 쌓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어렵지 않던 단순노동이 점점 화물의 부피가 커지고 높아지면서 힘이 들기 시작합니다.
조금만 요령을 피우면 중간에 부딪쳐서 떨어지고 반복해서 하다보면 허리의 통증과 함께
볏집을 움켜잡는 손끝의 손톱부분이 아파 오고.....
한번은,
그렇게 한 차 가득 볏집을 쌓아 단단히 고정하고는 한번 더 올테니 기다리라고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겁니다.
다시 올려면 3시간 이상은 걸리는 거리이니 겨울 찬 논바닦에서 뭐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슬금슬금 강경읍내 쪽으로 기웃거리다 대포집이라고 쓰인 선술집에 들어갔지요.
이쪽 지방은 먹는 인심이 후해서 막걸리 한사발(1되) 시키면 안주를 10가지 정도는 그냥 내어 줍니다.
술값만 받고 그냥 주는 안주거리 였으니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그 시절엔 정말 그랬어요.
하긴 뭐 막걸리 한사발에 뭔 안주가 대수겠어요
생고구마 깍아 썰어 놓은 모양으로 매콤 들적지근한 배추뿌리 안주삼아 두어 사발 마시고
작업하던 현장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다시 오기로 한 트럭은 도착을 하지 않았고,
술기운에 나른하게 졸음이 쏟아져 근처에 쌓아둔 볏집가리에 누워
따사로은 겨울햇볕 듬뿍 받으며 그만 잠이 들었네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둥벼락치는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안보여서 한참을 찾았다고 호통을 치시는데
주변에 지게작대기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다리몽둥이 부러질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뒤론 어쩌다 그쪽 지방을 여행하거나 찬 겨울 따사로운 햇살 한쪼가리만 내리 쪼여도
문득 그날의 기억에 미소가 머물며 그리워 지는 건
이젠 떠나고 세상엔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더 어릴 적 기억도 있네요....
불과 몇 십전 전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쪼르르륵 나가서 찬거리를 사거나
SSM(Super Supermarket)에서 일주일치 장을 보는 원스톱 쇼핑이 불가능 했지요.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손바닥만큼 빼꼼하게 하늘만 보였던 어린 시절의 산골 외딴집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 시절에 한 달에 한번이나 두 번쯤 들리던 생선장사 아주머니도 바로 이곳 강경 분이었습니다.
강경댁이라고 불리던 이분은 투박한 사투리에서도 비릿한 생선냄새가 풍겼는데
그 먼데서 커다란 양은다라에 이것저것 생선들을 담아 강경에서 대전으로 올라오는 기차를 타고
중간쯤에서 내려 비포장 신작로는 버스를 갈아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생선이 담긴 다라를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가가호호 발품을 팔아 방문판매를 하던 일종의 방물장수였지요.
파는 물건만 화장품이나 분첩, 빗이나 거울 같은 장식구들이 아니라 생선이었다는 것만 다를 뿐.....
머리위에 둥그런 똬리를 올리고 그 위에 생선다라를 이고 다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여성이 머리위에 올리고 다닐 수 있는 생선의 양이 얼마나 되었겠어요?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면 졸졸졸 따라 다니며 신기해하던 사람의 발길이 그립기만 한 외딴집이다 보니
어린 내 눈에 생선장사 아주머니는 신기한 것들을 가득 가지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아주 특별하게 반가운 사람이 되었고 생선다라의 보자기를 치우면 온통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지요.
황새기(밥을 뜸들일 때 쯤 접시에 담아 가마솥에 넣고 쪄 먹던 알배기 황석어를 그렇게 불렀어요), 고등어, 꽁치, 아지,
임연수, 갈치, 오징어, 조기, 새우젓에 조개젓까지 없는 게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가지고 다녔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리집 하나 보고 20여분 산길을 거친 숨을 고르며 걸어서 올라왔을 터이니
워낙 생선이 귀한 산골이기도 하였지만 그 수고로움이 미안해서 어머닌 주섬주섬 필요한 생선들을 옮겨 담으셨구요.
지니고 있던 현찰이 없을 땐 외상도 하고 어떤 때는 쌀이나 잡곡으로도 셈을 해서 받았으니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가볍지는 않았을 듯싶습니다.
어쩌다 생선구이라도 먹다보면
어린 날, 마루에 걸치고 둘러 앉아 생선다라를 뒤적이며 골짜기 가득 퍼지던 비릿한 냄새가 아련하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 그 강경댁 아주머니의 영향으로
강경이라는 지명만 떠올리면
짙은 생선 비린내와 함께 입 안 가득 군침이 고인답니다.
그래서 '음식은 추억을 먹는거다' 라고 말들 하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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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