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는 본래 신라 6부의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경신보』 총록에 따르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지백호가 정씨(鄭氏)로 사성(賜姓)되어 경주를 본관으로 하다가 뒤에 동래로 분적(分籍)되었다고 한다.
동래 정씨의 시조 정회문(鄭繪文)은 동래군의 향직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연대와 자세한 사적 및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는 없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동래군의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중시조 1세로, 본관을 동래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중시조 3세인 정목(鄭穆)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고, 정목(鄭穆)의 네 아들인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 모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 상신(相臣)[2] 17명, 대제학(大提學) 2명, 호당(湖堂)[3]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한 명문 가문이다.
특히 효종조에서 현종조까지 5차례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집안이 특히 현달하였다. 그의 4대조가 중종 시절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며, 정광필의 손자이자 그의 증조부인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을 지냈다. 조부 정창연(鄭昌衍)도 광해군과 인조 시절 좌의정을 지냈으며, 아버지 정광성(鄭廣成)은 형조 판서, 숙부 정광경(鄭廣敬)은 이조 참판, 동생 정치화(鄭致和)는 좌의정, 다른 동생 정만화(鄭萬和)는 예조 참판, 숙부 정광경의 아들인 사촌 동생 정지화(鄭知和)는 좌의정을 지냈다. 후손의 관운도 뛰어나 차남 정재숭(鄭載嵩)은 우의정, 5남 정재륜(鄭載崙)은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장남 정재대의 손자 정석오(鄭錫五)는 정재륜의 외아들 정효선(鄭孝先)이 후사없이 일찍 죽자 효선의 양아들로 후사를 이었으며 좌의정까지 올랐다. 더 상세한 사항은 동래 정씨(東萊鄭氏) 18세부터 27세까지의 동래세가(東萊世家) 27인의 간찰첩인 「선세필적(先世筆蹟)」에 수록된 인물 소개에 나와 있다.
2. 관련 설화[편집]
동래 정씨 2대조인 정문도의 묘는 현재 부산에 남아있는데 이 묘에는 풍수지리적인 전설이 있다.
고려 초에 풍수에 일가견이 있는 고익공[4]이라는 사람이 동래 지역 호장으로 내려왔다. 그는 화지산 풍수를 볼 때마다 “좋기는 하나……”라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였는데 정문도와 아들 정목은 그 이유를 묻지 못 했다. 그 후 고익공은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개경으로 전출되었고 정문도가 세상을 뜨자 아들 정목은 고익공의 말이 생각나서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묘소에 가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다. 다시 목관을 묻고 감시하는데 밤에 도깨비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이에 정목이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날이 새자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었더니 이번에는 도깨비들이 “금관이야. 이제 됐다”라면서 사라졌다. 그 후로는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의 괴시암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셔졌다. 아버지의 묘소를 쓰고 난 후 정목은 개경에 있는 고익공을 찾아가 아버지를 화지산에 모셨다고 하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에 정목이 아버지의 묘를 쓰고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고익공은 그제야 안도하면서 “그 바위는 묘를 지내면 후손에서 역적을 낳을 역적바위인데 이제 그것이 깨졌으니 화근이 사라졌다”[5]면서 정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
실제로 고려 문종 대에 정목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네 아들 역시 모두 문과에 올랐다. 고려 초 풍수지리가 널리 퍼지고 동래 정씨가 관직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도 양반가였음을 나타내는 전설이다.[6]
이 묘는 현재에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1동 화지공원에 남아있다. 정묘사라는 이름으로 작은 야산에 묘지와 함께 사당이 조성되어 있다.
3. 집성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