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일인대전(一人大戰)
1장 뜻을 세우다[立志]
1
산서성(山西省) 대동관(大同關)은 장성 이남에 존재하는 작은 도
시로, 중원과 몽고를 잇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때문에 이곳에
는 항시 군대가 상주하면서 특히 국경의 방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
었다.
마을 전체가 요새화되어 있고,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얼굴이라 이
곳에 들어오는 타지인들은 금세 관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또
워낙 거친 북방이다 보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텃세가 드
셌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의 텃세에 기가 죽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짐을 싸서 나가는 곳이 바로 이곳 대동관이었다.
대동관의 방어를 책임지는 자는 대장군 양위명이었다. 양위명은
불과 마흔의 나이에 대장군이 된 군부의 주요 인사 중 하나로 대동
관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가 대동관을 맡은 지 벌
써 십여 년, 그동안 몽고의 숱한 침략을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아 맹
장 중의 맹장이라고까지 불렸다.
양위명은 자신의 처소에서 낯선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앉
은 의자 밑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흐음!"
양위명은 자신의 처분을 바라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그의 앞에
놓인 커다란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뚜껑이 살짝 열린 상자 틈으로
금은보화가 보였다.
양위명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허락만 하신다면 이 모든 금은보화가 대장군님의 것이 되옵니다.
그러니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길 빌겠습니다."
순간 양위명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어리석은...... 내가 이 정도의 보화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으로
보였더냐? 그리고 이곳은 거친 전장, 금은보화 따위는 필요 없다."
"물론 잘 알고 있사옵니다. 대장군께서 금은보화에 욕심을 내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
까? 그저 거둬만 주신다면 요긴하게 쓰실 날이 있을 겁니다."
양위명의 단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대답은 무척 여유로웠
고 표정 역시 급할 것이 없어 보였다.
남자의 태도에 양위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너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이만 물러가거라."
"한 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시는 일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내 물러가라 했다!"
"대장군!"
남자는 끈덕졌다. 그는 양위명의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촤ㅡ앙!
순간 양위명의 등 뒤에 대기하고 있던 부장들이 검을 뽑았다.
"대장군의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나가라고 하였느니라!"
"어서 나가지 않으면 네놈의 목을 참하리라!"
불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부장들. 그들에게는 십여 년간 양위명을
따라 거친 북방을 내달리던 기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만약 남자
가 나가지 않으면 정말 목을 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잠시 곤혹스런 얼굴을 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
로 품을 뒤졌다.
"정말 이것은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가 꺼내 든 것은 한 장의 서찰이 든 봉투였다. 봉투의 입구에
는 대나무 모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것이 누구의 인장인지 잘 아시겠지요?"
"음!"
양위명의 입에서 침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모르겠는가? 대
나무를 인장으로 쓰는 자는 대명(大明)에서 오직 한 명뿐이다. 양위
명은 그 인장이 진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만사익...... 그 고자 놈."
대명 최고의 권력 기간인 동창의 수장이 바로 만사익이었다. 그리
고 대장군 양위명이 지난 십 년의 세월 동안 변방을 지켜야 했던 가
장 큰 원인을 제공한 자가 바로 만사익이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저희가 어렵게 입수한 문건 중 하나입니다. 다른 모든 것
은 개봉했지만 이것은 아직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읽어 보시겠
습니까?"
남자의 말에 양위명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장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봉투를 받아 양위명에게 바쳤다. 양위명은 인장으로 봉인된
입구를 뜯고 서찰을 꺼내 읽었다.
푸들푸들!
그의 눈썹과 수염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사익,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양위명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노였다. 평소 전장에서도 무표정
으로 일관했던 그가 이리도 격렬하게 분노를 토해 내다니. 부장들은
서찰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감히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에서 났는가?"
"황궁에 있는 자에게 우연히 입수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구
미가 당기십니까?"
남자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양위명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 확실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양위명의 마
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대장군님, 도대체 그 서찰이 무엇이기에......"
참다못한 부장이 양위명에게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양위명이 서
찰을 부장에게 넘겼다. 급히 서찰을 읽던 부장의 얼굴도 양위명과 마
찬가지로 심하게 이지러졌다.
"만사익, 그 쥐새끼가 감히 이런 음모를 꾸미다니!"
서찰에는 만사익이 양위명을 제거하기 우해 지시를 내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양위명의 가문에서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를 위조하고 국경에서 양
위명이 그에 동조한 것처럼 꾸미라는 동창 내부의 기밀문서. 만약 이
대로 진행된다면 양위명은 고스란히 역적으로 몰릴 판국이었다.
변방으로 내친 것도 모자라 역적으로 몰아 구족을 멸할 계획을 세
우다니. 양위명이 이리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양위명의 분
노에 편승해 부장들 역시 노기를 토해 냈다.
간신히 노기를 다스리는 양위명에게 남자가 또다시 말을 건넸다.
"이래도 저희와 거래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 보화를 가지신다면
불알 없는 내시들과의 싸움에 많은 보탬이 될 겁니다. 아울러 이 정
보의 출처도 넘겨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너의 정체는 무엇이더냐?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극비
정보를 입수한 것이냐?"
"하하!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저
희가 황실에 위해가 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란 겁니다."
"음!"
양위명이 남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남자의 눈빛만으로는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양위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저희는 조용히 대동관을 통과하길 원합니다. 물론 이 사실은 대
장군과 저희만 아는 비밀입니다."
"대동관의 통과라....."
"대장군에게도 그리 해가 되지 않는 조건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직 만사익은 이 문건이 유출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
미하는 바를 대장군께서 모르지 않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남자의 말에 양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만사익을 경계하자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조정 인사를 끌어들이고 자기편으로 만들어
야 했다. 그래야만 만사익의 위협에서 벗어나 반격을 노릴 수 있었
다.
"좋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 보화는 모두 대장군의 것입니다."
"내일 자정에 문을 열겠다. 그때 통과하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가 보도록......"
"그럼!"
양위명의 손짓에 남자가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로써 사천성에 이어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셈인가?"
생각 외로 사천성의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남자가 대동관으로 파견되었고, 지금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
일을 위해 수많은 인력과 자금이 소요되었으며 그만큼의 대가를 얻
었다.
"재밌겠군. 천하의 이목이 모두 사천에 집중되어 있는 이때, 산서
성에 우리가 나타난다면...... 크하하핫!"
그가 광소를 터트렸다. 주위의 지나가는 병사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퍽! 퍽!
어두운 동혈 안, 누군가 신나게 얻어맞고 있었다.
퍽!
쇳덩이 같은 주먹이 온몸에 작렬할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
다.
'빌어먹을! 난 속은 거야. 뭐가 천하제일마로 만들어 준다는 거야?
크흑!"
매를 맞고 있는 남자, 철홍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철부쌍괴의 꼬임에 넘어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를 며칠, 그
러나 철홍은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이 늙은이들이 누굴 죽이려고...... 으아악!"
그의 마음속에서는 커다란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입 밖으로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한마디라도 내뱉었다가는 간신히 모은 내기가 산산이 흩어질 테고,
끝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이 모두가 철부쌍괴때문이었다.
그들이 철홍의 내력을 살리고 폐정대법에 의해 망가진 혈도를 원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을 그야말로 단순 무식했다.
외부에서 충격을 가해 철홍의 단전에 잠들어 있는 설삼의 약력을
일깨운다. 쉽게 말해서 일방적인 구타를 가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동안 이곳에서 죽어 간 수많은 거마들에 의해 연구되었지만 아직
까지 검증된 적이 없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철부쌍괴는
과감히 이 방법에 도전했다.
맞는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모진 구타를 당하면서 신음을 흘
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때문에 철홍은 그야
말로 죽을힘을 다해 입술을 질근 깨물고 있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그래도 죽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십자성과 철부쌍괴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젠장~! 다 낫기만 해 봐라. 철부쌍괴든 십자성이든 모조리 가만
안 둘 테니까. 으아아!"
결국 철홍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하고 말았다.
그제야 철부쌍괴의 구타가 끝났다.
관도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헉헉! 정말 쓸 만한 녀석이야. 솔직히 이 정도까지 견딜 줄은 미
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하아~! 동감입니다, 형님."
"이제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혔다. 조금만 더 하면 이곳의 마공을 익
힐 수 있는 기틀을 만들 수 있을 게야."
"그나저나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글쎄..... 하지만 우리가 죽기 전에 이곳에 있는 마공을 이 녀석
에게 전수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관도중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관사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핏보면 무작정 패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철홍을 패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했다.
이곳에 갇힌 거마들은 삼백 년 동안 자신들의 내력을 금제한 저주
받을 폐정대법을 풀기 위해 연구를 했고, 그 결과 이와 같이 무식한
수법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수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시전자의 본
연지기가 필요했다. 자신의 생명력을 대상자에게 주입해 약력과 동
조해 혈도를 타동시키는 방법으로 내공을 가질 수 없는 거마들이 선
택한 최후의 수법이었다. 때문에 철부쌍괴가 철홍을 두드리는 만큼
그들의 생명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철홍은 그 사실을 전
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 흑수담(黑水潭)으로 녀석을 데려가자."
관도중이 기절한 철홍을 등에 걸머지고 거대한 지하 공동 한쪽에
자리 잡은 조그만 연못으로 움직였다. 관사중 역시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첨벙!
기절한 철홍의 몸이 검은 연못으로 던져졌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빠졌음에도 철홍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관도중이 흉측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아, 기뻐해라. 이제까지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멋진
체험을 할 테니까."
"크흐흐~! 이놈은 알까. 지금 자신이 목욕하는 것이 천하에서 가
장 무거운 중수(重水)라는 것을?"
철부쌍괴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이 중수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었다. 얼마 전 지상
에서 있었던 커다란 폭발로 공동의 벽면 한쪽이 균열을 일으켰고, 그
갈라진 틈새에서 중수가 발견된 것이다. 사실 그때의 충격은 적무강
이 하가철방을 폭발시키면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날의 우연이 필연적으로 철
홍에게 엄청난 기연을 남겨 준 것인지도 몰랐다.
중수는 일반 물보다 무겁고 엄청난 압력이 존재해 한 방울이라도
인체에 들어가면 그 무게에 내장이 터질 정도였다. 그러나 중수에도
한 가지 효과가 있었으니, 만약 중수에서 목욕을 하고 백 일 이상을
견뎌 낸다면 몸 안의 불순물이 체외로 배출되고, 질기면서 부드러운
근육과 피부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구하기가 힘이 들
고 양이 적어 그 누구도 이렇게 많은 중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철홍은 분명이 행운아였다. 물론 그것은 철부
쌍괴의 생각이었지만.
사실 철홍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몸에 가해지는 지독한 압력
에 연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렇게 철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강력한 무인으로서의 기반을 닦고 있었다.
"흐흐! 절대의 무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저주받을 십자성을
지상에서 지워 버려라."
철부쌍괴가 중수에 잠긴 철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2
사람이 산 정상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적무강과 견오대사, 그들의 사이에는 십 장의 공간이 존재했다. 그
러나 두 사람에게는 십 장의 공간조차 너무나 비좁아 보였다. 그들
사이에 십 장이란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문득 견오대사가 웃었다.
"아이들이 구경을 나온 모양이구나."
"그렇군요."
근처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시선, 아마 숲 속에서 누군가 그들의
대치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놔두자꾸나.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될지니......"
"알겠습니다."
견오대사의 말에 적무강이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시 그는 누군가 자신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
지 않았으나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견오대사가 말했다.
"약속대로라면 달마삼검을 익힌 사람이 상대해 줘야 하나 너도 아
다시피 소림에서 달마삼검을 익힌 땡중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때문에 나는달마삼검을 제외한 칠십이
종 절기를 쓸 것이로다."
"아시다시피 저의 절기는 생사구류도입니다. 제가 아는 절기는 이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시작해 보자꾸나. 더 이상 질질 끌면 구경
하는 아이들이 지루해 할지도 모르니."
"그럼......"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사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구룡소에서 원래의 도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새로 만들었다. 하
나의 도집에 두 개의 도를 꽂을 수 있게 만든 것은 그가 소림에서 만
든 또 하나의 도를 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깨달음을 얻으면서 만든 도였기에 애착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릉!
마침내 적무강이 생사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정련된 살기가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견오대사의 동공이 커졌다.
지난 세월을 청정가람에서 지내 온 그에게 생사도의 살기는 그의
신경을 아프게 자극했다.
'저것은 소림의 원죄, 소림에 대한 증오가 낳은 마물이다.'
속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험해 보고 싶었다.
과연 생사도가 소림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마음이 일자 그의 지고한 공력이 움직였다.
부처의 후광처럼 그의 등 뒤로 은은한 빛이 일었다. 그와 함께 여
래불상처럼 손 모양을 했다.
적무강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생사도의 손잡이를 더욱 힘주어 잡
았다.
파팟!
그들 사이에 날려 온 낙엽이 막강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
다.
숨 막히는 대치.
쉬익!
적무강이 먼저 움직였다. 대치하면서 허점을 노리는 것은 그의 성
미에 맞지 않았다.
적무강이 빗살처럼 쇄도하며 생사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부챗살
같은 기운이 일어나며 견오대사를 압박해 왔다.
순간 견오대사가 눈을 반개하며 손을 내저었다. 기이하게 휘어진
손가락 문양, 그것은 소림의 비전 중 하나인 사자모니인(獅子牟尼引)
을 펼칠 때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퍼버벙!
단천혈의 기운이 사자모니인의 경력과 부딪치며 폭음이 터져 나왔
다.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견오대사의 손에는 만근 경력
이 숨겨져 있었다. 본시 사자모니인은 절대 악인을 제어하기 위해 소
림에서 만든 잔혹한 수법이었으나, 익히기에 쉽지 않고 펼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언제부턴가 사장된 수법이었다. 그런 사자모니인을 견
오대사는 너무나 수월하게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적무강은 사자모니인의 경력을 모두 파훼하며 견오대사에
게 근접했다. 이내 견오대사의 손 모양이 바뀌더니 지풍이 쏟아져 나
왔다.
퍼버버벅!
마치 수십 줄기의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희
미한 빛줄기가 적무강을 향해 날아왔다. 이것이 바로 칠십이종 절기
중 하나인 미공십팔류(彌孔十八流)였다.
미공십팔류는 같은 칠십이종 절기 중 하나인 탄지신통과 위력은 비
슷하면서도 효율 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뛰어났다. 탄지신통이 단 하
나의 지력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것에 비해 미공십팔류는 같은 힘
으로 광범위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공력이
약한 자는 지력을 몇 개밖에 발휘할 수 없었지만, 견오대사는 무한대
에 가까운 공력으로 열여덟 줄기에 이르는 지력을 만들어 냈다.
"이번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견오대사가 외쳤다.
전신 요혈을 노리고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지풍의 물결에 적무
강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지풍우(指風雨) 속에 숨겨진 가공할 만
한 경력을 알아보았기 때무니다. 그러나 적무강은 망설이거나 물러
서지 않고 생사도를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러자 지옥랑의 초식이
펼쳐지며 미공십팔류와 격돌했다.
콰콰콰ㅡ쾅!
그들 사이에서 커다란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슈우!
적무강이 바람을 헤치며 견오대사의 코앞에 나타났다.
견오대사는 추호의 당황도 없이 손을 들어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
러자 투명한 강기의 벽이 나타나며 적무강의 진행을 막았다.
견오대사의 얼굴에 인자한 웃음이 어렸다.
적무강의 입가에도 비슷한 웃음이 떠올랐다.
콰콰ㅡ쾅!
그들 사이에 연신 폭음이 울려 퍼졌다.
꾸욱!
무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 사이로 흥건하
게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동공은 쉼없이 그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고, 그의 이빨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설마..... 이 정도였단 말인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영약과 개정대법을 받아 넘치는 공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장경각에 드나들면서 수많은 비급 절기를 익히고 견오대사
에게 가르침을 받아 큰 성취를 이룬 무비였다. 은연중에 자신이 당할
자는 세상에 얼마 없을 거란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눈앞에
서 벌어지는 대결에 그만 자신감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넘어 본 적이 없는, 아니 스스로 발밑에도 못 미
친다고 생각했던 견오 사조. 그런 견오 사조와 백중지세로 싸우고 있
는 적무강. 그들의 모습 앞에서 무비는 너무나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
꼈다.
"난 정녕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구나. 우물 안에서 내가 최고라
고 소리치고 있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방장인 원광대사에게 적무강과 겨루게 해 달라고 부탁할 때만 하
더라도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적무강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비
록 힘들긴 하겠지만 수십 년 동안 갈고닦은 무공이라면 그와 백중지
세를 이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외천의
대결은 그런 무비의 생각을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견오대사의 손에서는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가 술술 풀려 나오고,
적무강은 그것을 하나하나 파훼했다.
이제것 소림의 그 누구도 익힌 적이 없다는 전설적인 소림의 신법
인 연대구품(蓮臺九品)이 견오대사의 몸을 빌려 세상에 초현했다. 마
치 아홉 송이의 연꽃이 피어나듯 적무강의 주위에 아홉 명의 견오대
사의 신형이 나타났다.
도저히 막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적무강의 신형이 흐릿한 환
영을 남기며 견오대사의 연대구품을 하나하나 분쇄했다.
무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비는 죽었다 깨도 알 수 없었다. 방금
전에 펼쳐진 절기가 적무강의 팔황보라는 것을. 팔황보는 결코 연대
구품에 뒤지는 절기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몸에 가속을 붙여 연대구품을 파훼한 적무강이 다시 생
사도를 휘둘렀다.
콰콰쾅!
연신 번쩍이는 섬광과 굉음이 터져 나와 눈과 귀를 괴롭게 만들었
다. 그러나 무비는 그들의 대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절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사라지고 오히려 오기가 치솟아 올랐
다.
"나와 비슷한 나이다. 그가 했는데 나라고 못 해낼쏘냐? 두고 보거
라. 내 반드시 저자를 능가하고 말리라."
무비의 눈에 전의가 활활 타올랐다.
'사형......'
그런 무비를 뒤에서 지켜보던 홍수희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떠올랐
다. 그녀는 이내 견오대사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적무강을 향해 시선
을 돌렸다.
'도마...... 저 정도였다니.....'
그녀의 자존심에 처음으로 상처를 준 남자,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 남자였다.
홍수희는 적무강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의 무공도, 세
상사에 무표정한 얼굴도, 그리고 그의 곁에 붙어 있는 여인도.
'서문아......'
뽀드득!
그녀를 생각하자 격렬한 증오심에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그
녀 자신도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
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견오대사가 허공에 흩날리는 자신의 회색 승복을 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수백여 초를 싸웠다. 자신은 나이가 들어 벌써 숨이 가빠 오
는데 적무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이것은 무공이나 내공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더 근원적인 체력과 노화의 문제였다. 같은 무공을 소유
하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체력이 강한 사람이 유리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견오대사는 적무강에 비해 불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견오대사는 한동안 수믈 고르다 적무강에게 말했다.
"너에게 일반적인 무공이나 초식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구나. 이
제 마지막 초식으로 승부를 내자꾸나."
"바라던 바입니다."
견오대사의 제안에 적무강이 흔쾌히 응했다.
이미 다른 초식은 모두 시험해 본 상태였다. 후삼식을 익히면서
전삼식과 중삼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에 견오대사의 공세 속에서도
능히 견딜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초식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견오대사는 왼손을 등 뒤로 가리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미신장(須彌神掌).
칠십이종 절기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기의 하나였다. 달마삼
검이 이제껏 미완성의 절기였듯 수미신장 역시 미완성의 절기였다.
일수(一手)에 세상의 마를 모두 정화하고, 불심으로
천하를 제도하리라.
견오대사가 펼치려는 것이 바로 수미신장이었다. 그의 손바닥에 혼
신의 공력이 몰려들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전면의 공간이 이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적무강은 생사도를
고쳐 쥐었다.
지옥혈(地獄血).
생사구류도의 칠초식인 지옥혈. 이제까지 단 한번도 펼쳐진 적이
없던 미지의 초식이 적무강의 손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
고 있었다.
단전에서 시작된 힘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온몸을 구석구석 데
운 따뜻한 기운이 다시 생사도로 몰려들었다.
쿠쿠쿠쿠!
두 사람의 몸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운 앞에 바람도 요동을 멈
추고, 이제껏 목청을 뽐내던 산새들도 노래를 멈추었다.
지독한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수미신장(須彌神掌) 여래만상(如來萬象)!"
견오대사가 힘차게 초식명을 외치며 손바닥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
다. 은은한 황금빛 광채와 함께 거대한 손바닥이 허공에 나타나며 적
무강을 향해 덮쳐 왔다.
쿠쿠쿠!
그제야 유동을 멈췄던 대기가 요동을 쳤다. 황금색 거대한 손바닥
앞에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침묵을 강요당했다.
적무강의 머리칼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매우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릉!
생사도가 전면을 향했다.
부르르!
적무강의 공력이 주입되며 생사도의 도신이 떨렸다. 동시에 그의
입이 열렸다.
"생사구류도(生死九流刀) 제칠초식 지옥혈(地獄血)!"
츄화학!
생사도에서 지옥의 어둠과 같은 검은 기운이 일어나며 전면을 향
해 폭출했다. 수많은 어둠이 뒤섞여 칠흑보다 더욱 깊은 어둠을 만들
어 내며 황금색 손바닥과 부딪쳤다.
콰아아ㅡ!
순간 대기가 잔뜩 뒤틀리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마치 폭발 직전의
공기가 오히려 수축되는 것처럼 그렇게 외부의 공기가 바람이 되어
두 기운이 충돌한 접점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콰ㅡ아앙!
기어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콰!
사방으로 거친 기운이 폭주를 했다. 아름드리 거목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집채만한 바위는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두 사람이 격돌했던 장소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형성돼 있었다.
과연 이것이 인간끼리 격돌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결과였
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견오대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미타불!"
견오대사는 반장을 하며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그의 모습은 낭
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색빛 가사는 걸레 조각처럼 짓이겨져 있었
고, 하얀 수염 곳곳은 불길에 그슬린 것처럼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견오대사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선혈을 닦아 니며 전면을 바
라봤다. 담담한 표정으로 생사도를 거두는 적무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 역시 견오대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미타불! 최선을 다한 것이 맞느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미타불!"
견오대사가 다시 불호를 외웠다.
분명 적무강이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개운
치 않았다. 양패구상의 결과였고 동등하다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그
의 마음에는 한 줄기 먹장구름이 낀 듯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견오대사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미타불! 생사구류도는 이름 그대로 아홉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
진 도법. 그러나 그가 펼친 초식은 칠초식에 불과하다. 방금 전의 초
식보다 강한 초식이 두 개나 더 있다는 말인가? 아미타불! 그는 정말
괴물을 세상에 내보냈구나. 아미타불!'
소림의 과오로 만들어진 생사구류도. 소림에 대한 증오와 집념이
만들어 낸 괴물은 그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공포스런 모습
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3
기기긱!
거대한 문이 열렸다.
군부가 출동하기 전에는 결코 열리지 않던 거대한 문이 열리자 장
성 밖의 황량한 풍경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러한 풍경보다도 사람들
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은 장성 밖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거친 피풍의를 입고 있는 수천의 무인들, 황야의 늑대처럼 흉흉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던져 주었다.
꽤 먼 길을 온 듯 그들의 피풍의에는 누런 흙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장성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양위명의 눈빛은 차갑게 가
라앉아 있었다. 그런 양위명을 보며 부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문
을 열었다.
"이대로 저들을 통과시켜도 괜찮겠습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중앙에서 문책이 내려올 겁니다. 그리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에겐 지금 자금이 필요하고, 중앙의 정
보가 필요하다.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니다."
양위명이라고 해서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저들을 통화시키
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사소한 문제들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 순간에도 경사에서는 만사익이 자신과
가문을 역적으로 몰기 위해 착실하게 준비를 해 나가고 있을 테니까.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명제였다.
"강호의 일은 강호인들끼리 해결할 것이다. 그것이 강호의 율법이
니까. 우리는 우리 일만 걱정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대장군."
양위명의 말에 부장이 수긍했다. 그러나 얼굴 한편에 떠오른 불안
감은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저들은 천왕성의 무인들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
리는 정말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제 모든 공과는 강호인들에게 넘어갔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대
장군과 군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양위명과 부장의 발밑으로 그들과 협상을 진행했던 남자가 지나갔
다. 순간 그의 눈이 양위명과 마주쳤다.
씨ㅡ익!
입가에 떠오른 웃음과 서늘한 눈빛. 그것은 사자로 왔던 당시와 너
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음!"
양위명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남자가 양위명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뒤에 서 있는 무인들을 향
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를 선두로 수천의 무인들이 성문을 통
해 대동관으로 꾸역꾸역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 그의 얼
굴은 마치 며칠은 굶은 늑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따.
"크흐흐! 이제야 중원으로 들어왔군. 정말 오랜만에 돌아왔어. 이
풍요로운 땅에......"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저 몇 걸음 차이일 뿐인데 장성 밖
의 공기와 장성 안의 공기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삼백 년 만의 귀향, 그러나 아직 세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세인들
의 시선은 사천에서 벌어지는 혈사에만 집중되어 있으니까.
"하남성만 지나면 십자성이 있는 호북까지는 금방이군. 비록 먼 거
리를 돌아왔지만 충분히 시간을 아꼈어."
남자의 눈이 장성 밖으로 향했다.
장성의 문을 열어 준 양위명은 모르겠지만 지금 장성 밖에서는 천
왕성의 무인들이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사천성의 혈사로 천하의 눈을 돌리고 멀리 내몽고를 돌아 중원의
산서성을 통해 십자성의 뒤를 친다. 간단하지만 사실 엄청난 인내심
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열사와 혹한이 지배하는 내몽고를
지나는 것은 무공을 익힌 자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었다.
한밤의 혹한이나 대낮의 열기 따위는 그들의 몸에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큭큭큭! 성주, 당신의 뜻대로 이 내가 중원으로 직접 왔소이다.
하지만 이번 한 번은 참아 주지. 낭혈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사실 나도 피가 그리웠거든."
남자가 웃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있는 무인들도 키득거렸다.
그들은 마도육문 중 낭혈문(狼血門)의 고수들, 그리고 남자는 낭
혈문의 문주 천랑도(天狼刀) 좌천기였다.
좌천기의 웃음 속에 본격적인 천왕성의 중원 침공이 시작되려 하
고 있었다.
불사가 끝난 후 각파의 장로들이 하나 둘 자파로 돌아갔다.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이번 불사 중에 있었던 회합에서 가장 큰 소득을 얻은 곳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라 할 수 있었다.
장차 태동할 구파 연합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남궁세가.
만약 이번 환란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구파와 더불어 찬란한 위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만큼 남궁성은 기뻐했고, 한편으로는 커다란 중압감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그리고 서문아 역시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구파 연합
에서 새로 발족하는 조직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십자성과 천왕성에서 파견된 간자들은 모두 은밀히 제거되었다.
그들은 불사가 벌어지는 틈을 타서 소림사 경내로 잠입하려 했지만
은밀히 움직인 적무강에 의해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세상
을 하직해야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소림에서 간자들이 실종된 사실
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심지어 소림승들까지도.
바쁘게 돌아가는 소림 경내에 유일하게 동떨어진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적무강이었다.
소림에 잠입한 간자들을 처리한 후 적무강은 소실봉 정상에 자리
잡고 면벽에 들어갔다. 심득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정리
하기 위함이었다.
"지옥혈이라...... 그만큼 원한이 컸던가?"
견오대사는 홀로 눈을 감고 서 있는 적무강을 멀리서 바라보며 염
주를 굴렸다.
생사구류도의 초식들은 모두 하나같이 섬뜩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
다. 그것은 생사구류도를 만들었던 적무강의 시조가 얼마나 소림에
커다란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나마 그
가 마음을 돌린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림은 이미 삼백
년 전에 세상에서 지워졌을지도 몰랐다.
"소림의 실수로 아수라가 탄생한 것 역시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
도...... 삼백 년의 시공을 초월해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어지러
운 세상을 정리하라는 부처의 뜻일지도 모르겠구나. 아미타불!"
견오대사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온통 주름으로 뒤덮인 손. 이
손 안에는 세상을 뒤집을 만한 거력이 꿈틀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을 쓸 생각이 없었다.
무공을 익힌 것만으로 죄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한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익힌 무공이 어느새 거대한 힘이 되어 자리 잡았다. 힘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
하고 있었다.
세상의 흐름을 몸으로 깨닫고 하늘의 뜻이 어떠한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여전히 일신의 힘은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몸을 아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늙는다는 것
이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몸을 사리게 된다. 그래서 세상
은 젊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그렇다 하더라도 저 젊은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
주었구나. 그 무거운 짐을 오직 홀로 감당해야 한다니, 그에게 면목
이 없구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조용히 불호를 외우며 염주를 굴렸다.
불심 깊은 고승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로 반
짝이는 야공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도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십자성(十字星)과 별무리를 덮
어 오는 거대한 검은 기운.
"아미타불!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려는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
꼬. 중생들이 가여워서 어쩔꼬."
그는 염주를 굴리고 또 굴렸다. 그렇게 해서 겁난이 해소된다면
그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이 자리에서 염주를 굴릴 것이다.
적무강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견오대사가 본 것과 같은 검은
하늘이었다.
그는 천기를 읽을 줄 모른다. 하지만 하늘에 엄습하는 불길한 기
운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북쪽에서 밀려오는 불길한 기운.
적무강은 북쪽을 바라봤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생사도를 이어받는 순간부터 그에게 던져진 피의 숙명. 이제 그
처절한 피의 숙명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적무강은 소실봉에서 내려왔다.
그를 서문아가 맞이했다.
"당신, 야위었군요."
"누구라도 벽곡단과 솔잎만 먹다 보면 이렇게 될 거예요. 고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조그만 더 벽곡단을 먹었다면 난 정
말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택했을 거예요."
적무강이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을 건넸다. 서문아가 피식 웃었다.
"정말, 당신은 농담을 잘 못하는군요."
"후후! 미안해요."
"성취는 있었나요?"
"조금요."
"그런가요......"
적무강의 대답에 서문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잠시 적무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에 적무강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말
했다.
"왜요? 뭐 묻기라도 했나요?"
"당신, 내려갈 생각인가요?"
서문아의 말에 적무강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
다. 서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은 이곳에서, 그리고 나는 밖에서......"
"당신......!"
"십자성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자격이 필요해요. 그 옛날
무신 마광도가 홀로 수많은 사투를 치른 후 십자성을 세웠듯 나 역시
그와 같은 계기가 필요해요. 나의 최종 목표는 십자성, 그러기 위해
서는 반드시 천왕성을 먼저 처리해야 해요. 내가 천왕성을 처리하는
동안 당신이 십자성을 맡아 줘요. 힘겨운 싸움이지만 그렇게 해줘
요."
"그래요. 그럴게요."
서문아는 힘겹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남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 웃으며 보내지 못할망정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가
에 한 방울의 눈물이 어렸다 사라졌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당신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거예요."
적무강의 말에 서문아가 다시 한번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의 눈동자가 점차 붉게 물들어 갔다.
"당신은 여기에서 싸워요. 그리고 난......"
적무강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친 바람이 그를 부르고 있었
다.
"돌아올 거죠?"
"반드시!"
서문아의 말에 적무강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러자 서문아가 인심을
쓴다는 듯이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그러면 보내 줄게요."
"고마워요."
"당신 말대로 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니까. 죽지 않
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 난 그 점을 깨달았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그들은 같이 경내를 거닐었다. 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
았다.
적무강의 손과 서문아의 손이 맞닿았다. 손등이 스칠 때마다 그들
은 교감을 나누었다.
그때였다.
"형님!"
남궁성의 목소리가 그들의 분위기를 깨트렸다.
"씁~!"
적무강이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남궁성을 바라봤다.
"형님, 언제 내려오셨습니까?"
"풋!"
그러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남궁성을 보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언제나 밝은 남궁성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정말 오랜만입니다, 형님. 아니, 그동안 혼자서만 무공을 익히고
도대체 얼마나 강해지려고 그러는 겁니까?"
남궁성이 적무강의 곁에 착 붙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 서문아
가 약간 샐쭉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적무강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남궁세가가 이번 구파 연합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하하! 형님 덕분입니다. 덕분에 아버지의 염원이 이루어졌습니
다."
남궁성이 활짝 웃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조만간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어차피 소림에서의 일은 이
제 모두 끝났습니다. 무비 스님과 형수님을 모시고 안휘성으로 내려
가려고 합니다. 아직 각파의 인재들이 남아 있으니 그들도 같이 움직
일 겁니다."
"잘 되었구나."
"예!"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던 남궁세가였으나 지금 이 순간 제이의 도
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니 남궁성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
가?
한편 적무강은 서문아가 남궁세가로 간다는 말에 안도를 했다.
'남궁세가라면 충분히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좋은 도
약의 기회가 될 것이다.'
더구나 안휘성은 그녀의 본가인 강소성의 양주서가와 그리 멀리
않은 곳이다. 남궁세가에 머물면 그녀가 식구들과 같이 지낼 수도 있
을 것이다.
적무강은 진심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안심하고 전장으
로 향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천하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의 도전을 위해......'
4
산서성(山西省) 산음(山陰).
산음현은 산서성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현으로 무척이나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사람들은 기질이 거칠었다. 보통 북
방의 남자들이 그렇듯 이곳의 남자들은 거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
엇다. 그러한 기질 덕분에 산음의 남자라면 인동 어디를 가도 대접
을 받았다.
워낙 척박한 환경 때문에 산서성에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처럼 커
다란 규모의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중소 문파가 산서
성의 맹주가 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용화산장(龍華山莊)은 산음현의 용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잇는 전
통의 명가였다. 장주인 화룡신검(火龍神劍) 장마혁과 삼백의 무인들
을 구성원으로 산음현을 비롯해 인근에서 세력이 가장 크고 방대했
다.
명실상부한 산음현의 지배자가 바로 용화산장이었다.
"크하핫! 어서 마셔라."
"좋구나. 다들 잔을 들어라."
"와하핫!"
용화산장 내에서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용화산장의 주인인 장마혁의 첫째 딸 장아현이 혼인을 치
르는 날이었다. 장아현의 신랑이 될 사람은 몇 달 전에 과거에 급제
한 자로 곧 중앙으로 불려 가게 될 조문수라는 남자였다.
전통적인 무가로 산음현을 비롯한 인근을 지배하는 용화산장이었
지만 불행히도 이곳에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장마혁
은 머리가 좋은 사위를 맞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그 결
과 조문수를 사위로 맞이할 수 있었다.
장마혁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크하핫! 좋구나. 모두 잔을 채웠으면 높이 들어라."
그가 순금으로 만든 잔을 거칠게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를 따라 용
화산장의 무인들이 일제히 잔을 치켜 올렸다.
"장주님, 축하드립니다."
"와하하핫! 이제 용화산장은 발전일로를 걷게 될 겁니다."
"장아현 소저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장마혁은 흐뭇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즐겨라."
"장 소저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무인들이 서로 잔을 부딪쳤다.
"크하하핫!"
장마혁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그의 생애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이제 자신의 사위
가 중앙으로 진출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면 용화산장의 앞날을 막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인
가.
오늘만큼은 용화산장의 모든 구성원들이 술을 마시며 질펀하게 즐
겼다. 최소한의 경비 무사들만 빼고 이렇게 술을 질펀하게 마시는 것
은 아마 용화산장의 역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장마혁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쯤 합궁을 하고 있겠군."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용화산장의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문수와 장아현의 신혼방이 있었다. 신혼방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있었다.
"자, 술독을 더 가져와라. 오늘은 내 산음에 존재하는 모든 술을
동내리라."
"역시 화끈하십니다, 장주님. 와하하!"
장마혁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었다.
조문수는 황홀한 눈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
이 떠올라 있었다.
과거를 급제하고 용화산장의 사위가 된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피땀으로 힘들게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제 힘겨운 나날은 모두 안녕이었다. 자신은 용화산장
의 사위가 되었고, 부모님들의 고생 역시 이젠 끝이다. 그야말로 탄
탄대로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가......"
장아현이 조문수를 수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문수가 더욱 바
짝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장아현을 어루만
졌다.
초야를 치르려는 것이다.
굳이 장마혁의 말이라서가 아니라 장아현은 인근에서 제일가는 미
인이었다. 신부 복장을 하고 있는 장아현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조문수의 손에 의해 장아현의 옷이 하나 둘 벗겨져 나갔다. 그리
고 마침내 드러난 장아현의 눈부신 알몸. 조문수의 눈이 몽롱해졌다.
"눈이 부시구려, 장 매."
"가가."
두 사람이 부둥켜 안았다.
"사랑하오, 장 매. 영원토록......"
"저두요, 가가."
조문수와 장아현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없이 동시에 침상 위로 쓰러졌다.
"아......!"
장아현의 손가락이 조문수의 등을 파고들었다.
"사랑하오, 장 매! 영원토록......"
"가가!"
"크크크! 정말 못 봐 주겠군. 영원한 사랑이라니."
그때 두 사람의 목소리에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치 쇳덩이
를 굴리는 듯한 목소리에 조문수와 장아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 누구냐?"
조문수가 서둘러 일어나며 외쳤다. 그러자 바로 코앞에 낯선 남자
의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서생 같은데 계집은 어울리지 않게 예쁘군. 좋아! 계집
은 내가 갖는다."
"뭐?"
남자의 말에 조문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네놈은 누군데 남의 신혼방에 들어온 거냐?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여기는......"
"어딘데?"
"이곳이 바로 산음현의 패자인 용화산장이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치도곤을 면치 못하리라."
"크크크! 좋지,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어디 한번 해 봐."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조문수는 남자의 얼굴에서 섬
뜩한 기운을 느꼈다.
"어, 어서 나가지 못하겠느냐! 감히 이곳에 들어오다니."
장아현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앙칼지게 외쳤다. 그러자 남자가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밤, 네 서방이 바로 나다, 계집."
"뭐?"
조문수와 장아현은 기가 막혔다. 그들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도저
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저자가 이
곳에 들어올 때까지 산장의 무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
인가? 난생처음 보는 얼굴로 미루어 보아 산장의 무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외인이 분명한데 아무리 연회를 벌이고 있다지만 낯선 이
들의 방문을 허락할 만큼 용화산장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챙챙챙!
그때 그들의 귓가에 미약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신경을 더
욱 집중시켜 청력을 끌어올리자 쇳소리에 섞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
다.
"살려줘."
"으아악!"
두 사람의 낯빛이 변했다.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침입자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쉬익!
"으아악!"
그 순간 남자의 도가 조문수의 가슴팍을 뚫고 벽에 박혔다. 조문수
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엄청난 고통이 척추를 타고 뇌리로 올
라왔다. 조문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가슴에 박힌 도를 뽑으려
했지만 도는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ㅡ악!"
순간 장아현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가 장아현을 덮친 것
이다. 장아현은 손톱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남자의 힘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아악! 가가! 조 가가!"
"크흐흐! 장 매......"
장아현이 울며 조문수를 바라봤다.
힘들게 손을 뻗는 조무수. 그러나 가슴에 박힌 도 때문에 그는 몸
을 움직일 수 없어다.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정혼녀가
겁탈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비켜! 저리 비켜! 가가!"
"흐흐! 계집, 가만히 있어라."
장아현을 겁탈하는 남자는 늑대들의 우두머리 좌천기였다.
투두둑!
마치 커다란 늑대 무리가 습격한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살육과
강간을 자행하는 습격자들. 이미 용화산장의 무인들 태반이 도륙을
당했다.
"이, 이놈들, 도대체 너희의 정체가 무엇이냐?'
장마혁이 눈앞의 침입자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침입자들이 담을 넘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눈 깜
짝할 사이였다.
장마혁은 급히 내공으로 취기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취해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용화산장에 침입한 자들이 거친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흐흐흐~! 오늘 하루 머물 곳을 찾아온 식객이다."
"그런!"
"크하하! 이곳이 무척 따뜻해 보이더군. 술과 음식, 계집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 어찌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화산장을 침범한 인물들은 낭혈문의 무인들이었다.
수많은 무인들 중 마치 얼음을 깎아서 만든 조각처럼 차가운 외모
의 소유자가 장마혁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다른 무인들이 길을 열어
줬다.
"용화산장에 유감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거
친 내몽고에서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쉴 곳이 필요하지. 마침 이곳
에서 잔치를 벌여 들어온 것뿐이다."
"그렇다면 부탁해도 되지 않았느냐? 무고한 제자들은 왜 죽인단
말이냐?'
장마혁이 절규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식구들은 뜨거운 피를 뿌리며 하나 둘 바
닥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것이 장마혁의 가슴에 피눈물을 흐르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용화산장의 집사로 지내 왔던 서 노인도, 조만간 내원으
로 들어올 어린 제자도...... 남자라면 예외 없이 이 악랄한 약탈자
들에 의해 피를 뿌리며 죽어 갔고, 여자들은 모두 끌려 갔다.
"네놈들을 기필코 용서치 않으리라."
쉭!
장마혁이 갑자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남자에게 던지고 대전 한쪽
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은 자신의 무기인 화룡검이 있는 방향이었다.
화룡검으로 이 악마들을 기필코 처단하고 말리라. 그는 필사적이었
다.
쉬릭!
순간 남자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어느새 장마혁의 등을 점
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마혁은 그런 낌새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의 검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어느새 장마혁의 머리가 그의 검
위에 놓여 있었다. 장마혁의 몸은 아직 머리를 잃은 사실도 모르고
한참을 날아가다 바닥에 고꾸라졌다.
자신의 죽음도 느끼지 못하게 할 만큼 엄청난 쾌검, 신경이 고통
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극쾌를 구사하는 남자, 그가 바로 낭혈문의
부문주인 혈사검(血蛇劍) 교사영이엇다.
교사영의 눈이 마치 뱀처럼 가늘어졌다. 그는 손을 털어 검신 위
에 놓여 있던 장마혁의 머리를 털어 내고 서쪽을 잠시 바라보다 자
신을 바라보는 부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문주께서 즐기고 나올 동안 너희들도 즐겨라."
"와ㅡ아아!"
"크하하!"
교사영의 말에 부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여자를 찾아 용
화산장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하들을 보며 교사영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천왕성의 규율은 엄격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백 년 동안 천왕성
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도육문의 문파들이 천왕성주의 명에
의해 엄격한 규율로 지내 왔으나 낭혈문은 달랐다.
낭인들이 모여 만든 문파, 황야의 늑대들만큼이나 거친 사내들이
뭉쳤기에 규율로 그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낭혈
문의 역대 문주들 역시 부하들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규
율에 몸이 얽매이면 더 이상 늑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낭혈문의 문주
는 정기적으로 약탈과 살인을 허용했다. 다른 마도육문이 그런 낭혈
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지만 상관없었다. 낭혈문의 규율은 오직
자유로움 뿐이었으니까.
용화산장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필 그들이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멸문한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교사영이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움직였다.
"흐흐흐! 그럼 나도 몸을 풀러 가 볼까?"
그의 입가에 음침한 웃음이 어렸다.
그날 용화산장은 산음현에서 사라졌다.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용화산장 역시 한 줌의 재로 변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연이어 수많은 문파들이 혈겁을 당했다.
콰ㅡ앙!
문수영이 자신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녀의 손에는 전서가 들려 있
었다 산서성에서 날아온 급보였다.
"용화산장을 비롯해 만검가(滿劍家)와 해검장(海劍壯)이 혈겁을 당
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천왕성의 짓이다."
설마 하던 최악의 가정이 들어맞고 말았다. 사천으로 천하의 이목
을 집중시킨 후 산서성을 통해 천왕성의 중원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사천성과 섬서성이라..... 도대체 놈들의 주력은 어느 쪽으로 올
까?"
양쪽 모두에 주력이 참가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한쪽
이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사이, 다른 한족으로 주력이 움직일 것이
다. 문제는 과연 주력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다.
"구파에 협조를 요청할까? 그들 역시 중원 땅에 마도 문파가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문수영은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머
리를 굴리던 그녀는 결국 답을 내놓았다.
"당문의 대공자, 그리고 당문의 정예들. 그들이라면......"
어차피 이럴 때를 위해 합작을 한 것이다. 당문의 대공자와 십자
성의 정예부대 중 하나를 보낸다면?
"그게 좋겠군. 그렇게 된다면 힘의 균형이 얼추 들어맞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천왕성과 십자성의 격돌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문제는 어
떻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당문의 대
공자는 참으로 매혹적인 전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