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락검극천미명 月落劍極天未明/사마달 7 ![새글](https://t1.daumcdn.net/cafe_image/cf_img2/img_blank2.gif)
제 26장 酒樓의 殺風
천륭객점(天隆客店), 주루의 삼층은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일이층은 저녁시간이라 한창 북적대고 있었으나 삼층은 음식과
술값이 비싼 특별석이므로 손님이 한가했다.
장천린과 원계묵은 창가에 앉아 술을 대작하고 있었다. 원계묵
은 연거푸 석 잔을 마신 다음 불만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시큰둥하
게 물었다.
"형님, 대체 태진왕이 형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이십만 황실친위대에 필요한 군비를 조달해 달라는 것이네."
"왜 하필 형님에게 그걸 부탁한단 말입니까?"
원계묵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자칫하면 자신의 일이
뒤로 미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의 외조부님이 대명의 충신이었던 양응
시 대감이기 때문이네. 즉 나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지."
원계묵은 계속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그를 정시했다.
"형님은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태진왕의 말이 떠 올랐다.
'탁일비는 엄청나게 많은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그 분량이 어
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라네. 허나 그는 지금 나이가
칠십이 넘어 수명이 다해가고 있지. 게다가 그에게는 일점혈육도
없네. 얼마 전 그는 황실의 금의위로 서찰을 보내왔었네. 그가 누
군가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네. 허허허, 그것
을 해결해주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황금의 삼분지 일을 주겠다
고 제의해 왔네. 백군(白君),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바로 그 삼
분지 일의 자금을 이용하여 사업을 벌여 군비를 조달해 달라는
것이네. 매년 필요한 자금만 보태면 되네. 그외에 남는 것은 모두
자네가 가지게. 황금 또한 마찬가지네.'
장천린은 그 말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삼분지 일
의 황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 분명 엄청날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 부탁을 받아들이기에는 한 가지 난점
이 있었다. 그것은 취옥교 때문이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그는 취
옥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결과 그는 그녀가 북해(北海) 사태청
에 있음을 알아냈다. 허나 황금의 손이라는 탁일비가 있는 곳은
해남(海南)이었다. 실로 남과 북으로 이만리(二萬里)의 거리가 떨
어져 있는 곳이었다. 장천린으로서는 그 결정이 어려웠다. 대의를
택할것인가, 여인을 택할 것인가?
원계묵은 왠지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술만 퍼마셔
대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불만이 꽉 차오르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장천린에게로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속이 부글
부글 끓고 있었다.
이때, 주루의 삼층으로 오 인이 올라왔다. 그들은 눈길을 끄는
차림새였다. 머리에 하나같이 죽립(竹笠)을 눌러쓰고 얼굴에는 면
사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장천린과 원계묵에
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더니 식사를 주문했다. 그들은
죽립을 탁자에 벗어 놓은 후 거리낌없이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천린의 전음이 원계묵의 귓전에 들렸다..
'아우, 죽립을 쓰면 머리에 죽립이 눌린 자리가 어느 정도 생기
는가?"
원계묵은 흠칫했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오 인의 머리 부분
을 응시했다. 과연 그들의 죽립 중앙 뚫린 부분이 닿았던 머리카
락은 깊이 눌린 자국이 있었다. 그는 의혹이 치밀었다.
'가벼운 죽립에 저 정도의 자국이 날 리가 없다.'
원계묵은 문득 점원을 불렀다.
"이봐!"
"부르셨습니까, 나으리?"
점원이 달려왔다.
"자네 조그만 거울 가진 것 있나?"
"거울요?"
점원은 원계묵의 엉뚱한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계
묵은 미소지었다.
"조금 있다가 여자를 만나러 가는데 얼굴 좀 보려고 말이야."
그 말에 점원은 히죽 웃었다.
"알겠습니다. 곧 갖다드립죠."
하나 그는 몸을 돌리며 내심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미친 놈, 그 독사 같은 상판에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봐야 그 얼
굴이 그 얼굴이지.'
그는 비웃으며 거울을 갖다주었다.
"고맙네."
원계묵은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음산하고 비정하게 생긴 마른
얼굴을 그것도 남자가 거울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실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원계묵의 의도는 딴 데 있었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 보는 척하며 창가로 들어오는 석양의 빛을 오 인이 앉아
있는 탁자로 반사시켰다.
반짝! 다섯 개의 죽립으로 거울빛이 스칠 때마다 빛이 반짝거
렸다.
'으음.'
원계묵은 내심 신음을 흘리며 거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대체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때 다시 삼층으로 또 한명이 올라왔다. 뜻밖에도 십 오륙세
가량의 귀여운 소녀였다. 양볼에 보조개가 매력적으로 패이는 아
름다운 소녀였는데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그녀가
꽃파는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장천린이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걸
어왔다.
"공자님, 꽃 한송이만 팔아주세요."
그녀는 몹시 가련해 보였다.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애원하는 그
녀의 큰 눈망울은 가련한 빛이 흘렀다. 입고 있는 옷도 허름한 마
의(麻衣)여서 더욱 연민지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원계묵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필요없다. 다른 곳으로 가봐라."
하나 장천린이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우, 오늘 가인(佳人)을 만나러 가는데 꽃이 한 송이 있는 것
이 좋지 않겠나?"
이어 그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 꽃 얼마냐?"
그러자 소녀는 생긋 웃으며 백합을 내밀었다.
"동전 한 냥이에요."
장처린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동전을 주는 척하며 슬
쩍 소녀의 갸냘픈 손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
"어머!"
소녀는 화들짝 놀랐다.
"후후, 이 꽃보다는 네가 더 마음에 드는구나."
장천린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파렴치한이었다. 소녀는 그만 울
상이 되고 말았다.
"나... 나리. 이 손... 좀......."
원계묵은 의아했다. 그가 보기에 장천린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천린은 문득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원래 이 북경 천륭객점에는 추련(秋蓮)이 늘 꽃을 팔
러 오는데 그녀가 안오고 네가 온 것을 보니 추련의 몸이 어디 아
픈가 보구나?"
"그... 그렇습니다."
소녀의 얼굴이 왠일인지 창백해져 중얼거렸다.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가 보아라."
그는 손을 놓아주었다. 소녀는 살았다는 듯이 황급히 물러났다.
하나 소녀는 장사의 미련을 떨구지 못하는 듯 주춤주춤 이번에
는 오 인의 죽립인들에게 다가갔다.
"나으리들, 꽃 한송이만 팔아주세요."
그러자 죽립인중 한 명이 말했다.
"얼마냐?"
"동전 한 냥... 이에요."
"허어. 굉장히 싸구나."
죽립인은 쾌히 말했다.
"좋아, 좋아. 내가 사 주지."
헌데 그는 말하자마자 덥석 소녀를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어머!"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나으리!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나 죽립인은 어디까지나 능글능글했다.
"흐흐... 동전 한 냥만 주면 될 것 아니냐? 아니지, 아니야. 너무
싸니까 오늘 밤에 잘만 모시면 은자 열 냥까지도 쳐주마."
"하하핫!"
"훗훗훗!"
"킬킬킬!"
죽립인들은 모두 대소를 터뜨렸다. 소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죽립인은 응큼하게 지껄여댔다.
"힘겹겠지만 우리 다섯 사람을 모두 모시면 오십 냥이다. 으하
하하하핫!"
이어 그는 마구 떡 주무르듯 소녀의 가슴을 주무르지 않는가?
어느새 그의 투박한 손은 마의를 뚫고 소녀의 가슴 속으로 들어
갔다.
"아앗!"
소녀는 갸냘픈 비명을 질러대며 몸부림을 쳤으나 막무가내였
다. 죽립인은 소녀의 채 익지도 않은 유방을 마구 주무르며 음소
를 흘리고 있었다. 나며지 네 죽립인들도 그 광경을 재미 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점원이 달려왔다.
"나으리들, 제발 좀..." 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꺼져."
펑! 죽립인이 발로 걷어차자 점원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
졌다. 그 순간 죽립인은 소녀의 옷을 찢었다.
찌 --- 익!
"악!"
소녀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가슴 옷이 길게 찢
어지고 조그마하나 소담스런 소녀의 유방이 드러났다.
"흐흐흐흐!"
"킬킬킬. 아직 다 익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달겠는걸?"
죽립의 사나이들의 눈빛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들은 소녀
가 비명을 질러대건 말건 손장난을 계속했다. 소녀는 여러 개의 손
에 유린되고 있었다.
주점에서 벌어진 이 횡포에 많지 않았던 손님들은 그만 슬금슬
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립인들의 험한 말투
에서 그들이 무림인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악 놓아주세요! 제발... 으흐흑......."
"흐흐, 왜 이리 앙탈이냐? 즐겁게 해주겠다는데?"
"흐흐, 그것 참 퍼덕이니까 더욱 감칠 맛이 나는데?"
죽립인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어느새 소녀는 반라가 되고
있었다. 꽃바구니는 저맡큼 떨어져 나뒹굴고 바야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원계묵이 천천히 탁자 옆에 세워 두었던 장도를 잡고 있
었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며 담담히 물었다.
"참견할 것인가, 아우?"
원계묵의 눈이 야수처럼 번들거렸다.
"저들의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놈들은 지금 나를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저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장천린의 질문에 원계묵은 차갑게 말했다.
"조화성 제삼신마전(第三神魔殿)의 웅이오괴(熊耳五怪)라는 작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호탕하고 영웅인 척하나 죽음의 이빨을 숨
기고 있다는 살인전문가들입니다."
원계묵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이켰다.
"참견하겠다면 해보게. 하나 구태여 이쪽에서 살기를 먼저 들
어낼 필요는 없네. 그리고 이곳 객점에서 꽃을 파는 추련이란 소
녀는 없어."
원계묵의 얼굴에 흠칫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저 소녀의 손바닥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네."
원계묵은 섬뜩함을 느꼈다.
'대체 형님은.......'
그는 새삼 장천린에 대해서 기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원계묵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다섯 사나이들 앞에 우뚝 선 채 차갑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소?"
순간 소녀의 둔부를 쓰다듬고 있던 사나이가 음침하게 말했다.
"뭐야, 네 놈은?"
이어 그는 면사 사이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 계집이 탐나는 모양이군?"
그는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그의 한 손은 호통치면서도 소녀의 젖가슴을 터질 듯이 움켜쥐
고 있었다. 원계묵은 차갑게 말했다.
"미친 척하지 마라. 웅이(熊耳)의 다섯 귀신들!"
"음?"
오인의 죽립인들의 몸이 굳어졌다. 하나 그것은 극히 일순간일
뿐이었다.
"아악!"
소녀는 죽립 사나이가 내던진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원계묵 앞
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사나이들은 탁자 위의
죽립을 잡더니 전광석화처럼 원계묵을 공격했다.
파츠츳! 죽립이 스치자 탁자는 마치 예리한 칼을 맞은 듯 두 동
강이가 났다. 원계묵은 뒤로 물러섰다. 소녀가 걸리자 그는 소녀
를 잡은 채 옆으로 미끄러지며 장도를 후려쳤다.
쨍!
죽립과 장도가 부딪친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동시에
죽립이 찢어졌다. 그리고 그속에 시퍼런 광채의 철륜(鐵輪)이 나
타나는 것이 아닌가?
"뒈져랏!"
"차 --- 앗!"
위잉! 쌔애애앵!
다섯 개의 철륜이 상중하와 좌우로 원계묵을 공격했다. 원계묵
의 두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뿜어 나왔다.
"흐흐흐흣!"
그는 이빨을 들어내며 괴소를 흘리더니 장도를 선풍처럼 흔들
었다.
위 --- 잉!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상대의 공격은 아예 완
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웅이오괴는 흠칫했다. 그들은 설마 원계묵이 이토록 무섭게 공
격할 줄은 몰랐다.
카카캉! 쩌정! 쩌정! 불꽃이 퉁겼다.
"아악!"
"켁!"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삼인이 허공에서 두 동강이 나며 떨어졌
다. 그들의 철륜도 동강난 채였다. 하나 원계묵도 무사하진 못했
다. 그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풀거렸다. 철륜에 당한 것
이었다. 하나 놀랍게도 피는 한방울도 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살결은 철륜에 스친 자리가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네 놈이 벌써 현문강기(玄門 氣)를 익혔단 말
이냐?"
나머지 두 명은 이를 갈더니 다시 공격했다.
츠츠츠츳! 위이이잉!
두 개의 철륜이 가공할 기류를 뿌리며 원계묵의 옆구리와 목을
양단할 듯 공격해 왔다.
원계묵의 눈은 비정했다. 그는 냉소를 터뜨렸다.
"가거라! 수라구류도 중 일초(一招)인 수라초현(修羅初現)이다!"
순간, 우우우웅! 무서운 도기(刀氣)가 시커먼 아수라의 환영을
일으키며 뒤덮였다. 실로 믿을 수 없는 패도적인 도세(刀勢)였다.
한순간 두명의 모습은 도세에 파묻혔다.
"으아악!"
"크아아!"
처절한 비명이 아수라의 도형 속에서 들렸다. 그들은 즉사한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도법이었다.
원계묵은 장도를 내렸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던 점원은 안색이 퍼렇게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한편, 꽃팔이 소녀의 안색도 창백해져 있었다. 원계묵은 그녀를
응시했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원계묵의 눈이
괴이하게 변했다.
"음!"
허나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넓은 등이 소녀에게 그대
로 노출되었다. 손만 뻗으면 명문혈에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소
녀의 눈동자에 새파란 독기가 빛났다.
"죽엇!"
슉! 믿을 수 없는 빠르기였다. 어느 틈에 소녀의 손에는 독비
(毒匕)가 쥐어져 있었고 몸과 비수가 하나가 된 채 원계묵의 등을
찔렀다.
"악!"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비수가 명문혈에 적중된 순간 박히기는
커녕 상상도 못할 반탄력으로 비수가 퉁겨나간 것이 아닌가? 소
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을 크게 뜨며 순간적으로 입을 벌렸
다.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쿵!
그녀는 눈동자가 경직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로소 그녀의
목이 몸체에서 분리되며 떼구르르 굴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원계묵은 거의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도를 휘둘러
소녀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그 광경에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잔인하군. 놔줘도 될 것을 일부러 틈을 보여 상대에게 공격하
게끔 유도한 뒤 죽여버리다니!'
이때 원계묵이 다가왔다. 그는 장천린의 표정에서 그의 심중을
눈치챈 듯했다.
"잔인하다고 여기십니까?"
"부인하지 않겠네."
장천린의 대답에 원계묵은 입술을 씰룩였다.
"흐흐, 나는 사부와는 좀 다릅니다. 그 분은 천하 그 누구에게
도 헛점을 보이지 않았지만 결국은 허(虛)를 보여 돌아가셨습니
다."
원계묵의 음성은 스산하기만 했다.
"나는 나를 노린 놈들을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
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한데 그때였다. 문득 기이한 웃음이
들려왔다.
"후훗, 이번에야 말로 현장에서 걸렸군."
장천린과 원계묵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삼층 계단 어귀에
한명의 관복을 입은 초로의 청수한 인물이 서 있었다. 짧은 수염
과 혜지가 어린 눈빛에 그는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범선에서 만남 제형안찰사사의 형부도독 단위제였다. 장
천린은 몸을 일으읔켰다.
"이 곳에서 또 만났군요. 우리는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헉, 그런 것 같습니다."
이어 그는 주루에 쓰러져 있는 여섯 구의 참혹한 시신을 쓸어
보며 원계묵을 향해 말했다.
"원대협의 도법은 실로 대단합니다. 본인의 눈이 놀라다 못해
찢어질 뻔했소이다."
원계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위제는 시체를 다시 바라
보며 혀를 찼다.
"허허, 참. 참혹하군."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도독께서 직접 보셨다시피 이번 상황은 내 아우의 죄가 아님
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단위제는 그를 향해 돌아서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정당방위란 말씀이시구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신 그대로입니다."
"헛헛,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제까지 공력을 끌어올리며 여차하면 손을 쓰려했던
원계묵의 눈이 차츰 부드럽게 풀렸다.
이때 계단으로 몇 명의 무사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주루의 살
인극에 대한 손님들의 신고를 받고 몰려온 북경성의 관인들이었
다.
점원이 그들이 올라오자 반색을 했다.
"바로 저자가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자 관인들은 눈을 번뜩이며 점원이 가리킨 원계묵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 중 한 중년관인이 원계묵을 노려보며 말했다.
"실례지만 관청까지 좀 가주시겠소?"
원계묵의 눈이 꿈틀거렸다.
"관청?"
그는 냉소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다시 예의 야수 같은 빛이
발해졌다. 원계묵은 애당초 관청 따위는 경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비록 관과 충돌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관이나 왕법을 두
려워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때였다.
"하하핫 잠깐만!"
단위제가 나섰다. 관인들은 그제서야 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단위제는 품 속에서 하나의 영패를 꺼내더니 그들에게 보여주었
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관인들은 기겁을 하고 놀라더니
모두 무릅을 꿇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영반(大領盤)께 인사드립니다!"
순간 장천린은 흠칫했다.
'대영반?"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그가 알기로 단위제는 산동성 제
형안찰사사 소속의 형부도독이었다. 그 신분은 비록 산동성 내에
서는 막강한 권력이었으나 황도 북경성의 관인들까지 부복케 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는 심중에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단위제, 저 사람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단 말인가?'
이때 단위제는 영패를 거두며 관인들에게 지시했다.
"이번 사건은 내가 처리하겠다. 너희들은 어서 이곳의 시체나
옮겨라."
"넷!"
관인들은 즉시 바닥에 쓰러진 여섯 구의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
했다. 그들의 단위제를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신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단위제는 몸을 돌리며 장천린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용대인,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술 한잔 하시겠소이까?"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관청만 아니라면 아무 곳이나 상관 없습니다."
"하하하하! 원 농담도!"
단위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원계묵을 바라보
며 말했다.
"자 원대협께서도 같이 가십시다."
원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장천린이 몸을 일으켜 그의
청에 따르자 그도 역시 말없이 뒤를 따랐다. 단위제는 뭐가 그리
기분이 유쾌한지 계속 껄껄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삼 인은 아래로 내려갔다.
第 27 章 두 怪物
그는 어릴 적부터 밝은 것을 싫어했다. 그는 유난히도 어두움
을 좋아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아니 조용하
다 못해 숨막히는 적막을 좋아했다.
그는 평생 행복이란 말을 가장 증오했다. 따라서 행복해 보이
는 인간들을 보면 무조건 살심(殺心)을 느꼈다. 허나 그러면서도
그는 살인(殺人) 그 자체는 별로 즐기지는 않았다. 그가 살고 있
는 곳은 어두운 침묵의 숲이었다.
고송(古松)들만이 빽빽이 우거져 있는 곳, 하루 종일 가야
했빛 한 올 스며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육십 년 이상
을 살아왔다.
현재 그의 나이 구십팔 세,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귀
송자(鬼松子)라고 불렀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赫連瑙侯),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그가 평생 동안 틀어박혀 살아온
이 침묵의 숲에서 보내려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음울한
성격을 지닌 괴인, 그는 아무래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렇게 침
묵의 숲에서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 × ×
조그만 호수(湖水), 배 한 척이 떠 있다.
그리고 그 배 위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나란히 다정한 모습
으로 타고 있었다. 남자는 미서생(美書生)이었다. 너무나도 섬세하
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였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남자는 없을 것이다.
유려하고 섬세한 용모의 얼굴은 마치 조각의 신(神)이 새긴 듯
미려했다.
그 앞, 젊디 젊은 미녀(美女)였다. 이제 이십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은 아름답고 청수했다. 또한 그녀에게서는 완숙
한 느낌이 들었다.
미서생은 옥선(玉扇)을 가볍게 부치고 있었다. 서늘한 가을 바
람이 불고 있었다.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미남미녀가 앉아 그 풍
취를 즐기는 광경은 누가 보더라도 경탄과 부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미녀는 살짝살짝 미서생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났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는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 그리고 가장 멋진 분.......'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보랏빛 꿈에 젖었다. 그녀는 지난 보름
간이 마치 꿈결 같기만 했다. 그것은 그녀의 일평생을 통해 가장
행복하고 달콤한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경랑(京娘), 그녀는 명문(名門)의 규수였다.
그녀는 한 달 전 결혼을 한 몸이다. 그리고 그녀는 행복했다.
헌데 보름 전, 그녀의 앞에 돌연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그녀의
일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지금 눈앞에 있
는 미서생이었다.
그녀는 미서생이 나타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애욕에 빠지
고 말았다. 미서생은 마치 사랑의 마법(魔法)이라도 가진 듯 그녀
와 미서생은 순식간에 깊은 관계에 빠지고 말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도, 거부하기도 싫은 사랑의 마약에 취해버린
것이었다. 경랑은 남편 몰래 미서생과 관계를 맺고 말았다. 그녀
의 가문이나 교양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조금
도 후회하지 않았다. 미서생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그런 사람이었
고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미서생은 항상 부드럽고 온화했다. 또한 박학다식했으며 그녀
에게 보내는 말이나 눈짓, 손짓 하나가 그지없이 달콤하여 경랑은
그만 넋을 빼앗길 지경이었다.
이제는 도저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그런 사이가 되어
버렸다. 경랑은 결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경랑?"
부드럽다. 이 세상 어떤 여인일지라도 그 달콤한 음성에는 녹
아버리리라.
경랑은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미서생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듣기 싫진 않군. 정말이요?"
"진심이예요. 정말이예요."
경랑은 꿈꾸듯 말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 생각을 하는 걸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심지어는 잘 때에도요......."
미서생은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는 그녀의 귓볼에 입술
을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만약에 말이오."
"......?"
"내가 당신에게서 떠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순간 경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미서생은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소?"
경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마치 자신에게 하듯 말했다.
"저는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아마... 죽어버릴 거예요."
미서생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남편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오?"
"......!"
경랑의 안색이 변했다. 허나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
했다.
"물론... 이예요."
미서생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다정하게 물었다.
"남편에게 떠난다는 편지를 쓰고 나왔소?"
"네......."
경랑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부정한 여인
이다.
허나 아직껏 너무도 사랑에 빠진 나머지 그런 것을 한 번도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 새삼 상기되자 그녀의 가슴에 찌
르는 듯한 양심의 가책이 전해져 왔다.
미서생은 중얼거렸다.
"남편이 보면 기절하겠군."
그렇다.
이제 결혼한 지 한 달, 경랑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비이며 성격이 너그러웠다. 그리고 경랑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
었다. 그런 그에게도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외간 사내와 떠나며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되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경랑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후후."
미서생은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문득 경랑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떠나야지요. 패물을 많이 가지고 나왔으니 이 정도면 아
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경랑의 눈에는 기대에 찬 빛이 일렁거렸다.
참다운 행복, 그녀는 그 행복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
하는 것이다. 이 전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녀는 현재의
사랑에 완전히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싶소?"
미서생의 질문에 경랑은 그의 가슴에 기대며 꿈꾸듯 말했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어디로든지."
미서생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전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소."
"......?"
경랑은 의아하며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미서생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과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오."
"......!"
경랑의 안색이 일순 핏기를 잃고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 당신... 무슨 농담을......?"
그러자 미서생의 두 눈이 갑자기 무감동해졌다. 예전에는 따스
한 관심과 유정(有情)으로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눈이었으나
한 순간 그 눈은 마치 돌처럼 무심해지고 말았다.
"나는 평생 농담을 한 적이 없다."
"당... 당신......."
경랑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경랑, 너라는 여자는 매우 이상해. 대체 너는 나에 대해 얼마
나 알고 있지?"
"......!"
미서생은 경멸의 눈빛으로 경랑을 바라보며 비정한 말을 계속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나가는 낭인에게 몸을 주고, 거기다 남편
까지 버리고 따라오겠다니 말이야."
경랑의 얼굴은 창백해지다 못해 잿빛이 되었다.
"누가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던가? 후후후, 모두 어리석은
말이야."
미서생의 무감동한 웃음이 조용한 호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의 두 눈은 마치 회색빛 하늘 처럼 공허해졌고 그토록 열정적이던
아름다운 얼굴은 음울하게 변했다. 이윽고 미서생은 몸을 일으겼
다.
"안 돼요!"
경랑은 갑자기 넋잃은 듯 외쳤다.
"헤어질 수 없어요! 저는 가문과 남편마저 버리고 당신을 따라
왔어요!"
그녀는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이 미서생을 잡고 매달렸다.
"지금 당신은 저와 농담을 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그렇죠?"
"......."
"제발...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얘기해 주세요. 네?"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배꽃처럼 처연해졌다. 허나 미서생이 그
녀에게 준 것은 냉혹한 말뿐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단지 네가 스스로 사랑했을 뿐이
야/"
"......!"
경랑은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넋이 빠진 듯했다.
"분명히... 저... 저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전신을 떨고 있었다.
"후후, 올해 만도 네가 열 아홉 명째로 내가 사랑한 여인이야."
"......!"
순간 경랑의 얼굴은 완전히 백짓장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손
이 힘없이 풀어졌다.
"안녕, 경랑!"
미서생은 무감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경랑은 망연히 그를 응시
했다. 완전히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고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
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득했다.
"저는... 어디로 가지요?"
미서생의 말은 잔인했다.
"내 길이 아닌 걸 어찌 알겠나? 하지만 아까 너는 대답했었지.
나와 헤어지면 어떻게 하겠다고 말이야."
슉! 순간 미서생은 배에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날렵한 신형은
수면을 스쳐 연못가로 날아갔다. 놀라운 신법이었다.
허나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때, 등 뒤에서 풍
덩!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미서생은 비로소 연못가에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연못의 수면 위에 포말이 솟고 있었다. 선연한
피가 수면에 번지고 있었다. 미서생은 조금도 표정의 변화없이 중
얼거렸다.
"그래, 맞았어. 그게 너의 길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최소한 이 모용초는 모든 여인이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지."
아! 들었는가? 모용초(慕容焦), 모용초라고 그랬는가?
그렇다면 그가 바로 만승금도 도담후를 죽인 무정도(無情刀) 모
용초 --- 그였단 말인가?
모용초는 연못가를 지나 그늘진 곳으로 걸어갔다. 숲은 울창한
송림(松林)이었다. 햇빛조차 스며들지 않을 정도의 밀림이었다. 이
때, 숲 안으로부터 문득 음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놈이야."
동시에 고송 사이로 한 명의 노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왜소한
늙은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헐렁한 갈의를 걸치고 있었고 피부는
메마르다 못해 푸석푸석해보였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었고 머
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퀭하니 들어간 것이 우울해 보였다.
그가 나타나자 모용초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노선배!"
갈의 괴노인은 징그럽다는 듯이 칼칼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얼음보다 차갑고 뱀보다 비정한 놈!"
그는 경멸하듯 뇌까렸다.
"나는 인간을 죽였지만 인간의 감정까지 죽이진 않았어. 타인
의 행복을 증오하지만 그것을 최소한 깨지는 않았어."
갈의 노인의 퀭한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의 빛이 흘러
나왔다.
"허나 네놈은 인간을 죽이면서 감정도 함께 죽이고 뿐만 아니
라 행복한 모든 것을 부수려 하고 있어!"
"모두 보셨습니까?"
모용초는 히죽 웃었다.
"그렇다. 못된 놈!"
"후후, 살아갈 가치가 없는 계집이었습니다."
"내가 너였다면 그냥 검으로 내리쳤을 것이다. 허나 네놈은 그
녀 스스로 죽게 했어. 완전히 갈 곳을 없게 만든 다음에 말이야."
"후후, 죽을 때가 되었는지 말씀이 많아지시는군요."
모용초의 말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네놈이 보기 싫어서라도 일찍 죽을 것이다."
"후후, 아무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모용초는 이어 궁금한 듯이 물었다.
"북경에서 어른의 표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째서 죽어
들어가실 관(棺)이나 만들지 않고 다시 나오셨습니까?"
갈의 노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염무는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
아."
"......!"
모용초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를 맡으셨습니까?"
"원계묵!"
갈의 노인의 말에 그는 흠칫했다.
"강적을 맡으셨군요."
"좀 아는가?"
"약간 알지요. 놈은 아주 무서운 놈입니다. 저와 부딪쳐 보지
않아서 모르겠읍니다만... 아마 거의 비슷한 경지일 것입니다."
"흐흐, 이미 악씨(岳氏) 삼형제와 웅이오괴(熊耳五怪)가 당했어.
아주 대단하다더군. 수라구류도란 정말 명불허전이야."
갈의노인은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늙은이도 위험할지 모르겠어."
갈의노인의 눈이 음울하게 젖었다.
"후후, 귀송자 혁련노후께서도 자신 없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상
하군요."
"녀석, 내 몸도 이젠 옛날 같지 않아.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이 너
무 늙어 버렸어."
모용초는 눈앞의 늙은이, 즉 귀송자를 바라보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수십 년 전, 한때 어둠 속의 제왕(帝王)이라
불리우던 공포의 상징이던 인물, 그런 인물이 저토록 나약한 말을
하다니. 그는 문득 가슴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이때 귀송자가 괴소를 터뜨렸다.
"훗훗... 놈, 내 나이도 이 년만 지나면 백 세야. 이제는 내가 태
어난 어둠의 숲에서 영원히 침묵에 빠지고 싶은 게야."
"......."
문득 귀송자는 생각난 듯 물었다.
"네놈은 이 북경에 웬일이냐?"
모용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지나던 중입니다."
귀송자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용초, 너는 언제나 그 빌어먹을 짓을 그만 둘 작정이냐? 벌
써 백 명 이상의 행복한 미녀들이 네놈 손에 저주를 받아 죽었
어."
모용초의 두 눈이 다시 회색의 무감동한 빛으로 돌아왔다. 그
는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도 역시 잿빛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하듯이 중얼거렸다.
"나의 생명이 끊어지든... 그녀... 취영이 죽든... 둘 중 하나가 이
루어질 때까지는... 계속할 것입니다."
귀송자는 징그럽다는 듯 내뱉았다.
"네놈은 그 언젠가 그 일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이
다."
"후후후, 어쩌면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보다 강한 놈이
나타나 내 심장에 칼을 푹 꽃아 줄 날을 말입니다. 어차피 살 의
미가 없는 생이니까 말입니다."
그의 두 눈은 완전히 잿빛이었다.
귀송자는 탄식할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모용초를 아
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모용초를 손자처럼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모용초에게는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용초의 가슴 속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이해는 할지언정 그의 행위에 찬동을 할 수는 없었다.
왠지 모용초의 인생이 자신의 전철을 밟아가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귀송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언젠가 먼 훗날이 되어 내 나이 때가 되면 네놈은 반드시 후
회할 게야."
"하하하하!"
모용초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짐짓 활기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어른의 무덤에 술 한 잔을 뿌려 드리지요."
그는 앞장섰다.
"자 가시죠. 십 년 만에 뵈었는데 술 한 잔 해야지요. 시시껄렁
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말입니다."
귀송자는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좋아!"
두 괴인, 그렇다.
그들은 비록 나이는 다르고 생김새도 천지 차이였지만 괴인임엔
틀림없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
행한 과거를 가진 괴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그들은 거나하게 술 한잔을 걸치기 위해 어디론가
로 나란히 떠났다.
이곳은 북경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第 38 章 訣別
"백군(白君), 자네가 허락하니 내 마음 실로 기쁘구나."
태진궁(太眞宮) 깊은 밀전(密殿), 태진왕은 기쁜 듯 장천린의 손
을 잡았다. 장천린은 담담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나란히 밀전을 나와 태진궁의 후원을 거닐었
다. 일국의 친왕과 한낱 젊은 상인(商人)으로서는 파격적인 관계
랄 수 있었다. 하나 장천린과 함께 후원을 걷는 태진왕의 얼굴에
는 흡족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백군, 자네의 나이가 몇 살인가?"
"이십이 세 입니다."
"헛헛, 좋은 나이다."
"......."
"옥교라는 여인을 아직도 사랑하는가?"
"......!"
태진왕의 질문에 장천린은 잠시 침묵했다. 하나 곧 그는 담담
히 말했다.
"사랑합니다."
태진왕은 너그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자애스럽게 말했
다.
"자네의 일이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구나."
"......."
태진왕은 시선을 돌려 화원에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며 부드럽
게 말했다.
"부탁한 대로 자네의 과거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태진왕은 한 송이의 국화를 꺾더니 코 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
다.
"해남도(海南島)로는 언제 떠날 작정인가?"
장천린은 즉시 대답했다.
"내일 떠나겠습니다."
이어 그는 태진왕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조화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진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황실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처단할 힘이 없네."
태진왕은 국화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장천린은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다.
"노명 어른 말대로라면 전하를 노리는 자객이 있을 것입니다."
태진왕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오나......."
"허허......."
태진왕은 낮게 웃고 나서 그를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어제부터 금의위의 본부가 태진궁으로 이동하였네. 금의위의
영수인 엽대인이 항시 내곁에 있을 걸세."
"......."
장천린은 그 말을 듣고도 왠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담후 같은 고수도 그 철저한 방어 속에서 결국 쓰러뜨린 조
화성의 자객들이 아닌가? 그는 금의위의 막강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불안감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엽대인의 능력을 믿네."
태진왕은 자신있게 말했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누구보다도 무서운 인물이
네."
태진왕은 걸음을 멈추고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자네만 일고 있게."
"......?"
"엽대인의 사문은 바로 남해신궁(南海神宮)이네."
'남해신궁!'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해신궁(南海神宮)! 남해의 바다(海) 어디엔가 전설처럼 내려
오는 섬(島)에 있다는 신비문파(神秘門派)다. 그들이 쓰는 무공은
중원무학과 크게 다른 종류였으며 극히 신비무쌍하다는 풍문이
수 년 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엽천우란 이름은 가명일세. 그의 본 신분은 남해신궁의 제 십
삼대 궁주(宮主)인 축조망(竺祖望)이네."
"......!"
장천린의 놀라움은 가일층 더했다.
"그의 무공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네. 조화성주의 무공
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그의 무공도 결코 아래는 아닐 것이네."
장천린은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렇군. 태진왕이 이십만 황실친위대를 조직하려는 것도 결국
은 축조망의 도움이 있었기에 실현에 옮기려는 것이로구나.'
그는 문득 한가닥 의혹을 느꼈다.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신비의 남해신궁은 수백 년 간
중원과 내왕이 없었는데 어떻게 태진왕과 연결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태진왕은 그의 의중을 눈치챈 듯 빙그래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원래 나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네. 그래서 젊어서 한 분의
기인(奇人)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네."
"......!"
"그분이 바로 전대(前代)의 남해신궁의 궁주라네."
장천린은 흡칫했다.
"축조망은 결국 사문으로 보면 나에게 사형(師兄)뻘이 되는 셈
이네."
장천린은 이제야 태진왕이 그토록 축조망을 믿고 그에게 금의
위의 대권을 넘기고 또 그토록 신임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태진왕은 문득 돌아서며 그를 주시했다.
"백군,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이 모든 비밀을 자네에게 말해
주는 이유를 아는가?"
장천린은 의아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
"자네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자네에게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
할 강한 신뢰를 느꼈네."
"......!"
장천린은 왠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진
왕이 그의 손을 잡았다. 친왕의 손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자네가 이번에 해남에 가도록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갈등을 겪었
는지 이해할 수 있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별 말씀을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허허허."
태진왕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렸다. 후원에 낙엽이 지고 있었다.
조금은 철 이른 낙엽이었다. 태진왕은 문득 중얼거렸다.
"이제 곧 가을이 오겠군."
"......."
"백군 아니 천린(天 )."
"......?"
장천린은 문득 그의 음성이 이상함을 느꼈다.
"만약에 말일세. 내가 무슨 사고로 죽게 된다면 보광사(菩光寺)
의 해우(海宇) 스님을 만나보게."
"전하......!"
장천린은 흠칫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하
나 태진왕은 등을 돌리고 뒷짐을 진 체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올 겨울... 유난히 춥겠어......."
"전하......."
× × ×
구룡상선은 북경에서 조금 떨어진 대운하(大運河)의 하안(河岸)
에 정박하고 있었다. 배의 갑판 위, 두 청년이 서 있었다.
운하를 스치는 바람은 제법 찼다. 그 바람을 맞으며 원계묵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해남으로 가실 작정입니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일은 굳이 형님이 아니더라도 할 사람은 많습니다. 더욱이
형님이나 나는 관부(官府)의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이미... 결정했네."
"......!"
원계묵은 시선을 홱 돌려 대운하의 푸른 물결을 응시했다. 잠
시 후 그는 물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세월을 소모시킬지 아십니까?"
"......."
"형님, 현 대명의 황실이 이 모양이 된 것도 모두 그 잘난 황족
들 때문입니다. 나는... 천하게 자라와서 그런지 몰라도 그 비단
옷을 입은 작자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태진왕까
지도 말입니다."
"......."
장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면 원계묵은 계속 이야기 했
다.
"그들이 저지른 일은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형님은
그들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우가
돕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태진왕에게 거절의 뜻
을 전하십시오."
그의 어조는 강력했다. 장천린은 듣고 있다가 문득 담백하나
강한 의지가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우, 나는 지금 태진왕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돕는
것이다."
순간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 솟구쳤다. 이어 그는 음산한 웃음
을 흘렸다.
"흐흐, 형님이 무슨 신이오? 사업을 하고 대명황실을 돕고 또
조화성을 상대하려는 나를 도울 수가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는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장천린은 그의 말에 대
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시선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을 뿐이었
다. 문득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원제의 말이 맞다. 나는 인간이다. 그것도 가장 평범한 부류의
인간에 불과해. 내 마음을 진심으로 말하면 해남보다는 북해(北
海)쪽에 기울어져 있다. 옥교(玉嬌), 그녀를 만나고 싶은 거다. 하
나... 하나.......'
원계묵은 장천린을 노려보며 말하고 있었다.
"형님이 황실 일만 관여 안하면 나는 형님의 사업을 도우며 내
힘을 키울 수 있소. 조화성의 염무를 언제고 제거할 힘을 말이오.
하나 형님이 황실을 도우려 해남으로 간다면 나의 일은 언제 이
루어 질지 아득하기만 할 뿐이오."
장천린은 문득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우."
"말하십시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자네를 구속할 능력이 없다. 자네가 떠나고 싶다면 떠나
게."
장천린의 말에 원계묵은 흡칫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잠시후.......
그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는 시선을 운하로 향했다.
"진심...이오?"
"......."
장천린이 말이 없자 원계묵은 문득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는 아빨을 지그시 물었다.
"어차피 혼자였소. 외로운 한 마리 늑대처럼 말이오."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은 성난 야수의 그것이
되고 말았다.
"몸 건강하시오. 형님."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장천린은 저만큼 걸어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무운(武運)을 빌겠다."
원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해안으로 연결된 목교를 건너
땅으로 내려선 후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아우......."
장천린은 망연히 중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정이 들은 원계묵이었다. 그는 늑대처럼 고독하고 살모
사처럼 차가운 원계묵의 그 눈빛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정을
느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마치 피를 나눈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
이 지냈다.
그런데... 헤어졌다. 너무도 간단히 두 사람은 헤어졌다. 서로의
생각하는 바가 틀렸기에 융합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다. 막상 원
계묵이 떠나자 장천린은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바람에 등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었다. 장
천린은 한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서 있기만 했
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등 뒤에서 너털웃
음이 들려왔다.
"헛헛헛, 용대인, 여기서 웬 바람을 맞고 계시오?"
장천린은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는 흡칫했다. 두 명이 서 있었
다. 한 명은 형부도독 단위제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태진궁에서
본 적이 있던 백연연이었다.
"단 도독, 백 소저......."
그는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위제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
며 예의 그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헛헛, 뜻밖인 모양이군요. 용대인."
장천린은 비로소 물었다.
"어떤 일로 두 분께서 이곳에 오셨소이까?"
단위제는 껄껄 웃었다.
"그날 용대인과 먹은 술이 모자란 듯하여 더 마실까 해서이지
요."
장천린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실상 그는 지금 술을 마실
기분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곧 단위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
다.
"사실을 태진왕 전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온 것이오."
장천린은 문득 태진왕이 그와 헤어지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내일 안으로 내가 자네에게 유능한 두명을 보내주겠네. 분명
자네의 일에 도움이 될 걸세'
장천린은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두 사람을.......'
단위제는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전하의 서찰이 있소이다."
장천린은 서찰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읽어 보았다. 틀림없는 태
진왕의 친필(親筆)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백군(白君), 단위제(檀韋帝)와 백연연(白娟娟)을 자네에게 보내
네. 그 두 명은 자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네. 단위제
는 신분이 산동성(山東省) 형부도독이나 실제는 동창(東廠:황실
비밀첩보조직)의 대영반(大領盤)이라는 이중 신분을 가지고 있네.
그는 심기가 깊고 사물(事物)을 관찰하는 시야가 예리할 뿐더러 또
한 무공이 대단히 높네. 백연연은 여인의 몸이나 남들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能力)이 있네. 그들 두 명은 나의 수족과 같은 인물
이니 믿고 함께 일해 주기 바라네.
태진왕(太眞王)'
"......."
장천린은 서찰에서 눈을 떼었다. 이어 그는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헛헛헛."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쳤다.
"동감이오이다. 나는 평생 머리 하나 굴리는 것만으로 먹고 산
몸인데 이번 기회에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 용대인을 만나게 되
었으니 용대인 곁에서 분석을 좀 해야겠습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백연연이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소녀에게도 여자라고 봐주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세요. 신명
을 다해 돕겠습니다."
장천린은 문득 그녀를 응시하며 기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 여인, 태진왕을 사랑하는 것 같았고 태진왕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는데 어찌 태진왕이 이 여인을 떠내 보냈을까?'
그는 잠시 깜빡 잊고 있었다. 태진왕이 서찰 중에 적은 부분
을.......
'남들에게는 없는 특이한 능력(能力)이 있네!'
단위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그 무시무시한 원대협은 어디에 있오이까?"
장천린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나 곧 그는 담담히 말했다.
"떠났소."
"......?"
단위제의 표정이 흠칫했다. 동시에 그의 예지에 찬 눈빛이 번
쩍 빛났으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좀 더 세게 불고 있었다. 대운하의 물은 파도를 치고 있
었다.
第 29 章 鬼林의 術法者들
북경(北京)에서 남(南)으로 오십여 리 떨어진 산촌(山村), 기울
어져 가는 주막이 하나 있어 나그네의 심사를 달랜다. 화려한 북
경성과 이곳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가까운 곳의 북
경성에 비해 그지없이 쓸쓸한 곳이었다.
주막의 한 구석에서 원계묵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탁자
위에는 벌써 빈 술병이 수십 개나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폭음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의 얼굴은 취기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아예 귀찮다는 듯이 술병째로 마시
고 있었다.
벌컥벌컥! 목구멍에 쑤셔박다시피 마셔대던 원계묵은 문득 짜
증스럽게 술병을 탕! 하고 내리며 외쳤다.
"주인장! 여기 한 병 더!"
그러자 한쪽에서 눈치보고 있던 초로의 주막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으리, 이제 취하신 듯한데 웬만하면......."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원계목의 눈이 무시무시한 빛
을 발하며 그를 노려보기 때문이었다. 주막주인은 소름이 쫙 끼쳤
다. 그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급히 술을 갖다 주었
다. 원계묵은 다시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어 손등으로 입
가를 쓱 문지른 후 내뱉았다.
"빌어먹을......."
왠지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문득, 꽝! 그는 주먹으로 탁자
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늘어서 있던 술병들이 튀어올라 와장창
깨졌다.
"나는 분명히 먼저 떠난다고 얘기하지 않았소! 당신이 먼저 말
을 꺼낸 거야!"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흐, 수많은 돈이 굴러 들어오니까 내 말은 눈에 차지도 않는
거야."
그는 손으로 와락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
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형님, 내 평생 가장 좋아했던 삼인(三人)이 있었소. 나를 키워
주고 가르쳐 주신 사부(師父) 그리고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형님 당신이오. 하나 사부는 죽고 여인은
나를 배반했소.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당신뿐이오.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친형님 같았소. 짧은 기간이었읍니다만 무척 정이
들었소. 늑대처럼 잡초처럼 자라온 나지만 의리는 있소. 당신에게
약속했듯이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셈이었소. 한데.......'
'바보 같은 원계묵, 겨우 한 마디 서운한 말에 그냥 그의 곁을
떠나다니.'
원계묵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나 이제 끝난 일 오늘 해가 지면 구룡상선은 떠난다.'
원계묵의 마음 속에는 갈등이 일어났다. 아직도 해가 지려면
두 시진 이상이 남았다. 그는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쾅! 그는 다시 술병을 탁자가 부서져라 내려 놓았다.
또 술이 떨어진 것이다. 그는 힐끗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문득 경멸의 웃음이 들려왔다.
"이 친구 아까부터 보아하니 이 집 전세를 냈나? 혼자 기분 다
내는군!"
"흐흐흐, 계집한테 바람이라도 맞았나?"
원계묵의 이글거리는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두명의 장한이 그
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 힘깨나 쓸 듯한 험상궂은 장한이었
다. 그들 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손으로 원계묵의 턱을 치켜들었
다.
"임마! 너만 감정 있고 우리는 감정도 없냐?"
원계묵의 두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솟아났다.
"쥐새끼 같은 놈들!"
"음?"
장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장한은 솥뚜껑만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막 주먹을 날리려는 순
간.
"헉!"
"헉!"
그들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 위가 선뜻 하는 듯하더니
상투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언제 장도를 뽑아 상투를 날
렸는지 그들은 아예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원계묵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내뱉았다.
"사라지지 않으면 이번에는 목을 날려 버리겠다."
순간 두 장한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
들은 후다닥 걸음아 나 살려라는 듯이 꽁무니를 빼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원계묵은 다시 술을 시켰다. 하나, 아무리 불러도 주방
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주인장!"
목청을 높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나 이때, 탁! 문득 그의 눈앞에 술병이 세 개나 뻗어오더니
탁자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이 집 술은 이게 끝이오."
"음?"
그는 고개를 들었다. 탁자 앞에 한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십
오륙 세쯤 되었을까? 몹시 아름답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붉은 입술과 초롱한 눈망울이 미녀를 방불케 하는 미소년이 눈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소년은 한 손에 장남감 같은 예쁜
소도(小刀)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너는... 뭐냐?"
소년은 혀를 찼다.
"쯧! 상대하기가 상당히 거북한 양반이군."
이어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술 세 병의 주인이오. 이 주점에 마지막 남은 술을 내
가 산 것이오. 당신이 술을 원해도 이제는 없소. 당신이 이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나와 함께 마시는 수밖에 없소."
소년은 굉장히 빠르게 말했다. 한 마디밖에 하지 않은 것 같았
는데 할 말은 모두 다 한 것이었다. 원계묵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어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극히 드물게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이마에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다소 퇴폐적인 느낌을
갖게 했으나 두 눈동자는 우수에 젖어 기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
다. 원계묵은 갑자기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앉아라."
소년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고맙소."
그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이어 소년은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나는 부금진(符錦眞)이라 합니다. 그냥 약칭으로 소진(消盡)이
라 불러도 돼요."
"나는 원계묵이다."
부금진이란 소년은 실소했다.
"당신은 무척 오만하군요. 처음 보는 나에게 반말이라니?"
원계묵은 무섭게 말했다.
"네가 존댓말을 듣고 싶으면 엄마 젖좀 더 먹고 오면 된다."
"......!"
부금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약이 오른 듯 원계목을 노려
보았다. 하나 반면 원계목은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술 하나를 잡아서 부금진에게 전해 주었다. 이어 자신도 한 병을
잡고는 말했다.
"자! 소진, 건배하자."
그는 즉시 술병째 술을 들이켰다. 부금진은 그 모습에 그만 혀
를 내둘렀다.
"당신은 내가 두 번째로 본 술고래요."
"음?"
원계목은 궁금한 듯 물었다.
"첫 번째는 누구냐?"
부금진은 키득키득 웃어댔다.
'괴상한 웃음이군.'
원계묵은 그렇게 생각할 때 부금진은 술병을 거꾸로 들더니 단
숨에 모조리 마셔버렸다. 이어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첫 번째 주당은 우리 아버지요."
"......!"
원계묵은 약간 멍해졌다. 하나 곧 대소를 터뜨렸다.
"좋군, 너의 부친이 술고래라면 너도 웬만큼은 하겠군."
그는 남은 술병 하나를 손에 들고는 흔쾌하게 말했다.
"자, 이것만 마시고 나가자. 꼬마 친구, 내가 한잔 사마."
그는 술병을 들어 다시 입에 댔다. 하나 그때 부금진은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당신이 그 술마저 모두 마신다면 칼 잡은 손에 기(氣)가 빠질
것이오."
"음!"
흠칫한 원계묵은 부금진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냐?"
부금진은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가 지금 당신을 노리고 있소."
원계묵의 안색이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
"나는 소진이오."
부금진은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원계묵의 눈썹이 끔틀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귀에 미세한 소리가 들
렸기 때문이었다. 부금진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시작이군."
바로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펑! 돌연 창문이 부서지며 세 줄기 빛살 같은 인영이 전광석화
처럼 원계묵을 공격했다. 극히 순간적인 찰나였다. 원계묵은 탁자
옆에 세워둔 장도를 뽑았다.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세
줄기 인영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섬전 같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원계묵은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피 묻은 장도를 내려보고 있었다. 부금진은 탄성을
발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하나 이때 원계묵은 시선을 들어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분명히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나 기
이한 것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오후
의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으
나 여전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 럴 수가......."
원계묵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때 부금진이 안색을 변화시
키며 중얼거렸다.
"귀림(鬼林)의 술법자들이오."
그 순간 발자국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주점 어딘가에서 음산
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군, 꼬마."
원계묵은 예리한 살기를 느꼈다. 갑자기 등줄기에 면도날이 파
고드는 듯한 살기에 그는 옆으로 피했다.
순간, 파악! 그가 앉아 있던 탁자가 두 동강 났다. 긴발의 차이
였다.
'이놈들... 형체가 없는 놈들인가?'
원계묵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편 부금진도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다시 음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웃!"
원계묵은 즉시 피했으나 어깨가 화끈했다. 옷자락이 찢겨지고
어깨에 혈흔(血痕)이 그어졌다.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놈의 눈과 입! 용천(龍泉)과 명문(名文)만 노려라!"
원계묵은 섬뜩함을 느꼈다. 바로 자신의 급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다시 좌우측에서 얼음장 같은 기운이 밀려왔다. 그
는 다시 피했다.
꽝! 주점 한쪽 벽이 박살났다. 그러자 그 뚫린 구멍으로 한 가
닥 석양빛이 들어왔다. 어느 새 해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음!'
한 줄기 석양빛이 어둠침침한 주점 안으로 들어오니 주점 안에
자욱이 일어난 먼지가 보였다. 원계묵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때
다시 얼음장 같은 기운이 쇄도해 왔다. 원계묵은 다시 슬쩍 미끄
러지며 피했다.
펑! 이번에는 벽이 아예 무너져 내렸다. 석양빛이 주점 안의 자
욱한 흙먼지를 미세하게 멈추었다. 원계묵은 입술을 씰룩했다.
'살을주고 뼈를 깎는다.'
그는 칼 끝을 아래로 내렸다. 그 광경에 부금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 저런 무모한.......'
이때, 쇄... 애......!
원계묵은 다시 정체불명인들이 공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방에
서 동시에 들렸으므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 순간 주
점 안의 먼지가 파동쳤다.
'네 명!'
슉! 칼 끝이 치솟았다.
"으악!"
"캑!"
"끄......."
비명이 터졌다. 원계묵은 칼 끝에 무엇의 메마른 감각을 느꼈
다. 아니나 다를까?
피보라가 자욱이 뿌려지며 네 명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두 흑의
(黑衣)를 입고 있었다. 세 명은 이미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흑의노인은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의 독사눈에는
불신이 잔뜩 엉켜있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원계묵의 가슴 옷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상처가 약간 나
고 피도 내 배고 있었다. 그는 흑의노인을 노려보며 입을 움직였
다.
"아무리 빠르고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나도 먼지 사이로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
흑의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어 그는 괴소를 쿡쿡 흘렸다.
"대... 대단하다... 나 혁련궁(赫連宮)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
이야......."
쿵! 그는 앞으로 쓰러졌다. 이때 부금진이 원계묵 앞으로 다가
오며 손뼉을 쳤다.
"정말 대답합니다. 귀림(鬼林)의 둘째 주인이자 혁련노후의 동
생인 혁련궁을 단숨에 처단하다니 말이오."
원계묵은 부금진을 응시했다. 그는 술병을 집어 들어 마시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이 자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냈느냐?"
부금진은 씩 웃었다.
"강호 견문이 넓은 탓이지요."
하나 문득 그는 안색이 싹 변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야단났소! 밖을 보시오."
"......?"
원계묵은 시선을 돌리다 역시 안색이 굳어졌다.
주점 밖,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흐흣!, 아주 작정을 했나 보군."
원계묵은 냉소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부금진도 그의 뒤를 따
라 나갔다. 흑의인들은 사십여 명 가량 되었다. 그들 중 맨 앞에
는 왜소한 체격의 갈의노인이 서 있었다. 원계묵이 나오자 그도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귀송자(鬼松子) 혁력노후! 바로 그였다.
원계묵은 그를 대한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가 만난 자 중 가장 강한 자다.'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혁련노후는 천천히 걸
어왔다. 이어 주점 안에 쓰러져 있는 혁련궁의 시체를 바라보았
다. 그의 두 눈은 음울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석년의 도담후를 대하는 기분이군."
"......."
"자네가 바로 원계묵인가?"
"그렇소."
원계묵은 묵묵히 대답했다.
"나는 혁련노후다."
원계묵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나 그는 의외로 칼을 땅에 세
워 꽂더니 포권을 했다.
"혁련노선배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뵙게 되어 영광이오."
혁련노후의 입가엔 여전히 음울한 미소가 어렸다.
"노부가 무슨 이유로 자네를 찾았는지 이유를 알것이네."
원계묵은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신 뒤 던져버렸다.
"염무가 보냈으리라 짐작하고 있소이다."
혁력노후는 그의 행동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모용초 말마따나 대단한 놈이군. 마치 야수 같군.'
그는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 노부는 나이가 너무 많
아 자네를 제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원히 쉬고 싶구나."
원계묵의 살모사 같은 두 눈에서 야수의 빛이 번쩍였다.
"흐흐흐, 내가 칼을 쥐고 있는 이상 이 하늘 아래에서 나를 꺾
을 자가 있다고 믿지 않소. 혁련 노선배."
이어 그는 약간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쉬고 싶다면 아예 내가 영원히 쉬게 만들어 주겠소."
스르릉. 그는 장도를 서서히 잡아 뺐다.
바람이 분다. 황혼이 짙어지는 한 산촌의 다 부서져 나간 주막
앞, 바람은 일대의 노마왕(老魔王)과 새로이 떠오른 젊은 도(刀)의
제일인자 사이로 불기 시작했다.
第 30 章 檀韋帝의 過去
구룡상선(九龍商船), 선실(船室) 안,
"......."
장천린은 탁자에 앉아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양의 노
을 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조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비록 예전같
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없었지만 오히려 더욱 강렬한 느낌
을 주었다.
그의 앞, 단위제가 주사위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또르륵......!
그는 탁자 위에 주사위를 굴렸다. 그리고 다시 주워모아 탑(塔)
처럼 쌓았다.
"용대인께서는 사업을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습니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육 년."
단위제는 주사위 탑을 무너뜨렸다. 모두 육(六)자가 나왔다. 신
기한 일이었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관부에 투신한 지가 올해로 삼십 년째이오."
그는 놓여진 주사위를 다시 쌓았다.
"나는 용대인을 볼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
"후후, 용대인은 사람을 무척 강하게 이끄는 마력 같은 것을 지
니고 있습니다. 나 같은 능구렁이까지 말이오."
"......."
"용대인은 모르겠지만 내가 용대인을 처음 본 것은 일 년 전 산
동 안찰사의 저택에서였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 일 년 전 사업 관계로 산
동 안찰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실로 강렬했소이다. 그때부터 용대인
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었소. 한데 정말 이상한 일이오.
용대인의 외숙인 양익상 어른에게는 용씨 성을 가진 처남이 없다
는 점이 말이오."
장천린이 담담히 말했다.
"무척이나 나의 과거를 자세히 조사한 모양이구료."
단위제는 씩 웃었다. 그는 다시 주사위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두 삼(三)자가 나왔다. 그는 장천린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용대인의 얼굴의 상처는 언제 다친 것이오?"
장천린은 흠칫했으나 곧 담담히 대답했다.
"몇 년 전 마차 사고로 다친 것이오."
"아!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아름다운 얼굴에 흠이 가다니......."
단위제는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장천린이라고 아시오?"
장천린은 뜨끔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이오?"
"별 것 아니오. 장천린이라는 사람은 강서성의 아주 유능한 상
인(商人)으로서 혹시 아나 하고 물은 것이오."
"......."
장천린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
"이 년쯤 강서성에 남창부에서 몇 가지 사건이 있었지요."
"......."
"만금산장의 장주 금백만이 돌연히 급사하고 청하원의 장천린
역시 실종된 사건이지요."
단위제는 계속 이야기 했다.
"당시 강서성 안찰사에서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난해한 점이
너무 많아서인지 나에게 그 사건에 대한 의뢰를 청해 왔었지요."
장천린은 문득 흥미를 느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단위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두 가지 사건은 실로 미묘한 것이었소. 만금산장의 인물들
은 결코 금백만의 시신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소. 시신을 욕되게
한다고 말이오. 나는 그러던 중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지
요. 금백만이 죽는 날이 바로 그의 생일(生日)이었다는 점과 그의
생일에 초대된 사람들의 명단을 입수하게 된 것이오."
장천린은 단위제의 말에 점차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초대된 사람은 모두 네 명인데 그 중에는 장천린과 그의 정인
인 취랑이란 미녀, 그리고 용문전장의 상관홍과 제갈유풍이란 젊
은이였다는 것이오. 한데 그날밤 이후 묘하게도 장천린과 취랑이
같이 실종된 것이오. 더욱이 기묘한 것은 그날 밤 이후 금백만의
측근 호위 무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진 것이오."
장천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자가 무척이나 깊이 조사를 했구나.'
단위제를 다시 주사위를 허물어 뜨렸다. 이번에는 더욱 기이한 숫자가
나왔다.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오(五), 육(六), 여섯 개의 주사위
가 모두 틀린 숫자가 나왔던 것이다. 장천린은 탄성을 발했다.
"대단한 솜씨요."
단위제는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솔직이 나는 금백만과 장천린 등이 타살되었다고 믿고 있소이
다. 하나 만금산장에서 그 사건을 미궁으로 빠지게 만든 인물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증거를 없애버려 조금도 단서를 잡지 못했소.
실로 귀신이 곡할 정도로, 금백만은 자연 급사로 처리시키고 장천
린은 실종된 것으로 만든 것이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갈사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지.'
그는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결국 일 년 만에 나는 그 사건에서 손을 떼고 말았지요."
탁! 단위제는 손바닥으로 주사위를 덮쳤다. 그는 장천린을 보고
한 번 웃더니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없어졌다. 주사위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손바닥에도 물론 주사위는 없었다.
"허허허."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탁자 아래에 있던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속에 여섯 개의 주사위가 고스란히 쥐어져 있지 않은
가?
"굉장한 실력이오."
장천린이 재차 감탄하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정
색을 했다.
"한달 전에 나는 태진왕 전하께 북경으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소이다. 그래서 수하들과 함께 북경으로 올라오던 중 진무현
에서 다시 용대인을 만나게 되고 원대협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만
나게 된 것이오. 태진완 전하께서는 나에게 동창의 대영반 자리를
맡기셨지요. 나는 벼슬을 탐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황실의 더러움
을 씻어내려는 전하의 뜻에 감복하여 결국 승낙했지요."
단위제는 손가락 사이로 주사위를 굴렸다. 주사위는 손가락 사
이 사이로 마치 요술을 부리듯 없어졌다 나타났다 하고 있었다. 그
는 장천린을 응시했다. 정천린의 눈빛은 여전히 별빛처럼 차가울
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단위제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어
렸다.
"나의 부친은 하급관리였소. 극히 옹색하고 성격이 편협했지만
조금도 더러움을 타지 않은 분이었소."
장천린은 묵묵히 그의 과거를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이 년 전 나의 부친은 엄청난 누명을 쓰고
상급관부에 의해 오체분시(五體分屍)라는 처참한 형벌을 받고 대
로(大路)에서 사지가 찢겨진 채 돌아오셨소."
단위제는 비참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그이 표정은 다만 쓰
디써 보일 뿐 그다지 격동하지 않고 있었다. 장천린은 의외라고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얘기를 나에게......?'
"어머니와 누이는 노예가 되었소. 어머니는 그후 목을 매어 자
살을 하셨소. 능욕당했기 때문이오. 누이는 어디에 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소."
"......!"
너무도 비참한 얘기에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
다. 단위제는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아버님이 돌아가시더 날 그 날 나는 무엇을 했는지 아시오.
흐흐, 도박장에서 사흘 내내 도박을 하고 있었소."
단위제의 얼굴에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랐다.
"내 탁자에 산처럼 쌓인 은자를 보며 최고로 득의양양해져 있
었소. 내가 은자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대로에 하나
의 목이 효수(梟首)되어 있었소. 재수 없다고 침을 뱉고 보니까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고 곧 그 머리가 나의 아버님임을 알았소."
"......!"
장천린은 절로 눈썹을 떨었다. 실상 그 말은 그가 듣던 중 가장
비극적인 얘기였다. 장천린은 단위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자신
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위제는 문득 씩 웃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훗! 사흘 후 관청에서는 아버님이 무죄였음을 알아 냈소. 하나
그때 이미 아버님의 시신은 썩었고 까마귀 밥이 되어 있었소. 어
머니는 자결을 했고 누이는 실종이 되었소, 그때 나는 관리가 되
기로 결심을 했소. 그리고 관리가 되었소. 사건을 만날 때마다 끝
가지 파고 들어 기필코 해결을 했소. 범인의 배경이 아무리 든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의 죄명을 밝혀 처형을 시켰소."
단위제는 더 이상 주사위를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상급관부의 명으로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을 하달받은 적
도 많았소. 하나 그렇게 되면 아예 범인의 목을 내 칼로 날려버린
후에 보고서만 작성하여 상급관부에 올렸소."
장천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게 되었다.
'단위제, 당신은 능히 그럴만한 사람이오.'
"후후, 상급관부에서 나를 보면 나는 눈 안의 가시 같은 존재였
을 것이오. 그들은 틈난 나면 나를 얽아매어 삭탈관직시키려고 하
였소. 하나 나는 조금도 그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소. 조금도 말
이오......."
단위제는 문득 말 끝을 흐리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너절한 과거 이야기로 주접을 떤 것 같아 미안하오,
용대인."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별말씀......."
단위제는 주사위를 움켜쥐었다.
"내 평성 처음으로 남에게 과거 이야기를 한 것이오. 내가 왜 용
대인에게 나의 과거를 이야기 했는지 아시오?"
단위제의 눈이 정면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
장천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용대인은 내 평생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기 때
문이오. 솔직히 말하겠소. 나는 용대인과 격의없이 지내고 싶소."
그 말에 장천린은 문득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내 과거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구료, 대영반."
단위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단도독이라 불러주시오, 갑자기 출세(出世)하니 몸이 근
질근질하고 어색합니다."
단위제의 두 눈은 부드러워졌다. 장천린은 문득 창가를 응시했
다. 운하의 수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석양이 마지막 빛을 뿌리
며 떨어지고 있었다. 장천린의 모습은 우울해 보였다. 단위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원대협 때문에 마음이 아프신 모양이구료?"
장천린은 씁쓸하게 말했다.
"친 아우 같았지요.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모양입니다."
단위제는 짧은 수염을 꼬며 말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는 반드시 언젠가 돌아올 것이오."
그의 손안에 있던 주사위가 하나 하나씩 소매 속으로 빨려 들
어가고 있었다.
"글쎄요......."
장천린은 넘어가는 해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第 31 章 血戰, 그리고 暴風의 百殺隊
"......!"
부금진(符錦眞), 그는 지금 두 눈에 경이의 빛을 띄운 채 눈앞
의 싸움을 보고 있었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와 원계묵의 싸
움은 벌써 백초(百招)가 넘고 있었다. 원계묵의 수중의 칼은 가공
할 도광(刀光)을 뿌리고 있었다.
슈파파파팟!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의 정수가 그의 손에서 유감없이 폭출
되고 있었다. 반면 혁련노후는 장각찬(長脚讚)이란 끝이 두 갈래
로 갈라진 창(槍) 비슷한 기형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시무시
한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격렬히 접전을 벌여 그 와중으
로는 누구도 끼어들래야 끼어둘 수가 없었다.
부금진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전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
다.
'내공이나 노련함은 귀송자가 월등하다. 하나 밀어붙이는 힘이
나 도법(刀法)의 패도적 기세는 원계묵이 위다.'
부금진의 얼굴에 찬탄이 어렸다.
'칠 년 전 아버님과 숙야염이 싸울 때 만큼이나 대단하구
나.......'
부금진은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굳게 움켜잡은
손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는 잔뜩 긴장하여 싸움을 지켜보고 있
었다.
한편 원계묵은 싸울수록 경이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다. 혁련노후, 이정도면 천하(天下)에 당적할 고수
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전세를 가늠했다.
'이렇게 싸우다간 오늘 밤이 새도록 승부가 나지 않겠다. 더욱
이 혁련노후를 이긴다 해도 사십여 명이나 되는 저놈들을 무슨
수로 제거한단 말인가?'
고수의 싸움에는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다. 원계묵이 신경을 다
른 곳에 나누자 금시 자세에 빈틈이 생겼다.
슥! 장각찬의 예리한 끝이 그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윽!"
웃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하나 약간의 외상 정도였다.
한편 혁련노후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단한 놈, 보통 놈 같았으면 팔이 날아갔을 텐데도 겨우 약간의
상처를 낼 뿐이라니.......'
그의 움푹 꺼진 눈에 기괴한 빛이 흘렀다.
'현문강기(玄門 氣)가 저놈 몸을 에워싸고 있는 이상 급소를
적중시키지 않고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군.'
이때였다.
"혁련노선배, 각오하시오!"
원계묵의 굵직한 음성과 함께,
윙......, 갑자기 칼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무시무시한 환청이 일
어났다.
휘류류류류, 우우우우... 웅......! 아수라의 호곡성이 전후좌우에
서 들리며 가공할 도기(刀氣)가 쇄도했다. 수라구류도의 제 칠초
(七招)인 혈해수라(血海修羅)였다.
파츠츠... 츳츳츳! 도기가 그물처럼 에워쌌다.
수라구류도의 제 칠초, 팔초, 구초 등 삼 초식은 내공(內功)을
극심하게 소모시킨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사용치 않는 것이다.
허나 원계묵은 승부를 걸었다.
'......!'
혁련노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순간 그는 장각찬을 무섭게 돌렸
다. 장각찬이 수없는 환영을 이루며 사방으로 뻗었다. 하나 그 순
간 원계묵의 가공할 괘도에서 나오는 백삼십육변(百三十六變)의
변화가 장각찬의 모든 공세를 차단시켰다.
"흣!"
혁련노후는 헛바람을 토했다. 가슴이 화끈했다. 어느 새 삼도
(三刀)가 스친 것이었다. 원계묵은 틈을 주지 않았다.
"천일수라(天逸修羅)!"
수라구류도의 제 팔초(八招)!
'흐윽.......'
혁련노후는 찬바람을 들이켰다. 도저히 공격방향을 짐작할 수
가 없었다. 원계묵의 도(刀)가 사면팔방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다.'
순간 그는 장각찬을 곤추세우고 좌수(佐手)를 비스듬히 뻗어나
갔다. 그때 관전하던 부금진이 외쳤다.
"조심하시오! 흑마장(黑馬場)이오."
순간, 카캉! 무겁고도 파괴적인 음향이 들렸다. 부금진이 경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음......."
"흑......."
두 마디 신음성이 들렸다. 원계묵이 칼로 땅을 짚고 신형을 간
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반면 혁련노후의 장각찬은 부러져 있었다. 그는 입
가에 선혈을 흘리고 있었고 심장 부근에는 구멍이 뚫려 있을 뿐
만 아니라 두 눈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두눈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랍게
도 그의 두 동공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후... 훌륭하다.... 아주 훌륭......."
원계묵은 울컥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흐흐... 노 선배의 흑마장은 정확히 나의 가슴에 적중되었소. 하
나... 안타깝게도 노 선배의 장력은 나의 현운강기를 깨지 못한 것
같구료."
혁련노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퀭한 두 눈에 피를 흘리며 그
는 중얼거렸다.
"어쨌든... 자네가 이겼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모든 것이 끝났으니... 어두
운... 침묵의 숲...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군......."
이때, 원계묵의 주위로 사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아무도 혁련노후를 부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흘리며 원계묵을 포위해 오고 있었다. 이때 혁련노
후는 피를 울컥 토했다. 핏속에는 부스러진 내장토막들이 잔뜩 섞
여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원계묵... 저들은... 나의 수하들이... 아니라... 조화성 제... 삼신
마전(第三神魔殿)의... 천강삼십육검수(天 三十六檢水)들... 조심...
하는 게 좋을 것......."
이때, 스스스스... 문득 혁련노후의 곁으로 기이한 파공성이 들
리더니 흑의인 한 명이 내려섰다. 유령 같은 신법이었다. 원계묵은
흠칫했다.
'귀림의 술법자.'
이때 흑의인이 비통하게 외쳤다.
"주군!"
혁련노후의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더듬거리며 물었다.
"귀... 귀림의... 제자냐......?"
"그렇습니다. 주군."
"나... 나의 시신을... 귀림으로... 데려가 다오."
혁련노후의 몸이 서서히 경직되어 갔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나를 묻어다오."
고개가 떨어졌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부러진 장찬각으로 몸
을 의지한 채 그는 서서 죽은 것이었다.
"주군!"
귀림의 술법자는 비통하게 외쳤다. 이어 그는 혁련노후의 시신
을 눕히더니 무릎을 끓고 기이힌 울부짖음을 냈다.
"우우... 우......."
기것은 실로 처량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술법자는 눈물을 흘
리며 동(東)쪽을 향해 세 번 절하더니 혁련노후의 시신을 안고 일
어섰다.
스... 팟! 순간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
로 표홀무비한 시법이었다.
원계묵은 침묵하고 있었다. 부금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
다.
"어떻소?"
"견딜만하다."
부금진은 고소지었다.
"이제 문제는 저 천강삼십육검수들이오."
그는 걱정된다는 듯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저들은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인 태사독이 친히 키운 절세
의 고수들이오."
원계묵은 고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너까지도 위험하겠군."
부금진은 싱긋 웃었다.
"관계없소."
그는 정말 이상한 소년이었다. 비록 상황은 극히 위험한 국면
이었으나 오히려 원계묵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이때, 천강검수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원계묵, 네가 혁련노후까지 꺾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나 너
는 이미 극도의 상처를 입은 몸, 후후후, 이제 너의 생도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원계묵은 입가를 씰룩이며 웃었다.
"흐흐, 어찌되든 네놈들만은 모두 데려가주마."
"후후훗, 그대는 입만은 살았군."
그 자는 검을 쓱 뽑았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삼
십육 인은 모두 발검했다. 찌르는 듯한 살기가 장내에 가득
찼다. 실로 기세가 등등했으며 살기는 태산조차도 갈가리 찢어버
릴 듯했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쳐라!"
삼십육인(三十六人)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
시하고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위이이잉! 차차차차창!
서른 여섯 자루의 검(劍)이 일제히 하늘을 뒤덮으며 원계묵과
부금진을 도륙낼 듯 쏟아져 내렸다. 하나 원계묵은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신형을 지탱하고 있던 칼을 그대로 올려쳤다.
캉!
"크악!"
불꽃이 튀며 한 명이 검과 팔이 그대로 잘려 날아갔다. 하나 그
순간 원계묵도 등줄기가 화끈해졌다. 누군가 그의 등을 친 것이었
다. 하나 그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돌아섰다.
눈앞에 퉁겨나온 자신의 검을 잡고 비틀거리는 상대방이 보였
다. 그는 그대로 칼을 빙글 돌렸다.
"케-액!"
상대는 두 동강이가 나 피분수와 함께 쓰러졌다. 원계묵은 일
단 싸움에 임하면 야수가 된다. 그는 그 자를 벤 즉시 몸을 땅바
닥에 굴리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으-아-악!"
"허억!"
두 명이 아래로 위로 두 쪽나 쓰러졌다. 실로 살벌무비한 혈전
이었다. 원계묵도 이미 수 차례의 검을 맞고 만신창이가 되고 있
었다.
"......!"
부금진, 이 아름다운 소년도 혈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하
나 그는 손에 소도를 만지작거리며 지극히 태연했다. 한 명이 덤
벼들었다.
"쳇! 어쩔 수 없군."
번뜩!
"......?"
상대방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넘어갔다. 그의 이
마 한복판에는 소도가 꽂혀 있었다. 하나 그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부금진은 신형을 움직여 소도를 뽑은 후 다시 뒤로 던졌다.
"악!"
뒤로 달려들던 한 명도 이마에 소도가 꽂힌 채 벌렁 쓰러졌다.
"저 놈의 비도술(飛刀術)을 조심해라!"
그제서야 천강삼십육검수들은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십여 명이
원진을 그리며 부금진을 포위했다. 부금진의 얼굴이 떫은 감 씹은
꼴이 됐다.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비도술은 써먹지도 못하겠군.'
문득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 하나를 발 끝으로 차올렸다. 그는
검 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힐끗 원계묵 쪽을 돌아보다가 눈이 움찔
해졌다.
원계묵은 처참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검수들과 뒤엉켜 있었다.
부금진은 내심 혀를 찼다.
'쳇! 이럴 줄 알았다면 무공수련을 좀 더 하는 건데.'
이때였다. 그의 귓전에 원계묵의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진! 내 걱정 말고 어서 너만이라도 빠져 나가라!"
그 말에 부금진은 냉소했다.
"내가 도망가려 했을 것 같으면 벌써 갔을 것이오!"
이어 그는 검으로 눈앞에 달려드는 흑의인의 어깨를 베며 말했
다.
"아직 당신은 죽을 때가 아니오. 당신과 나는 술을 먹자고 약속
하지 않았소?"
원계묵은 그 말에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그래, 맞다. 그 약속을 깜빡 잊을 뻔했군. 그래!"
번쩍! 그의 칼이 원을 그리자 다시 한 명의 목이 튀어 올랐다.
그는 그 자의 피를 뒤집어 쓰고 다시 몸을 굴렸다. 천강삼십육검
수는 모두 십 이명이 죽었다.
하나 그래도 너무 많았다. 더욱이 원계묵의 상처는 극심했다.
또한 부금진은 검이 손에 맞지 않았다.
그는 소도를 한 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써먹기는 곤란했다. 검법(劍法)은 아직
그에게 익숙하지가 못했다.
"뒈져라!"
츳!
"흣!"
흑의인의 검이 부금진의 어깨를 스쳤다. 피가 솟구쳤다.
"빌어먹을!"
부금진은 비틀거리며 신형을 날려 다른 공격을 간신히 피했다.
이때 그의 눈에 원계묵이 다시 검을 맞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원계묵의 등 뒤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목을
찌르는 것도 보였다.
'......!'
부금진은 다급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슉! 그의 손에서 하나 뿐인 소도가 날아갔다.
"아악!"
흑의인의 이마에 소도가 박혔다. 그는 사지를 허위적거리며 쓰
러졌다. 원계묵은 힘겹게 신형을 유지하며 말했다.
"고맙다. 꼬마친구......!"
"꼬마 꼬마 하지 마시오! 살모사 나리!"
"흐흐......."
원계묵은 웃었다. 하나 그는 이미 기진맥진 하고 있었다. 두 눈
은 가물가물하여 초점이 맞지 않아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았고 팔
과 다리는 천근추를 단 듯 무겁기만 했다.
'결국... 이렇게 끝인가......?'
그는 하늘을 응시했다. 이미 사위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때 문득, 그의 눈에 번쩍 이채가 일어났다. 저 멀리 언덕을
본 때문이었다. 뽀오얀 황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두운 언덕의
능선을 따라 자욱한 황진을 구름같이 일으키며 백여 필의 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상(馬上) 뒤에는 백의인(白衣人)들이 타고 있었다. 원계묵의
두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이... 이 놈들......!'
순간 그는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소진, 힘을 내라. 우린 이제 살아 날 수 있다."
벌써 두 개 이상의 검을 스쳐 맞은 부금진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요?"
그도 역시 죽음 직전이었던 것이다.
"으하하하...! 나의 동료들이 왔다. 그들이 왔단 말이다?"
원계묵이 기쁨에 찬 광소를 터뜨렸을 때,
두두두두두-! 백여 필의 인마(人馬)가 마침내 가까이 돌진해 왔
다. 마상의 백의인들은 머리에 백건(白巾)을 두르고 허리에는 모
두 칼(刀)을 차고 있었다. 그들 개개인은 모두 한결같이 두 눈에
형형한 살광을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부금진은 내심 부르짖었다.
'백살대(百殺隊)!'
그렇다.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대주(隊主)를 구해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천
강삼십육검수들은 당황했다.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획! 획! 획! 백의인들이 흡사 탄환
처럼 마상에서 신형을 날려 도(刀)와 몸이 하나가 된 채 날아왔
다. 만승검도 도담후가 친히 키운 백인(百人)의 정예고수 백살대
(百殺隊)! 천강검수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숫자상으로도 훨씬 열세가 아닌가?
"크아-악!"
"아아악!"
"케에...엑!"
피, 피, 피....... 백살대의 무공은 개개인이 모두 한 지방을 주름
잡을 정도의 막강한 고수들이었다. 천강검수들은 허위적거리며
흡사 허수아비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변변히 저항도 못하고 몰살하고
말았다.
이윽고.......
"대주(隊主)!"
백의인 중 한 명이 원계묵에게 달려가 무릎 꿇었다. 원계묵은
웃었다.
"흐흐, 운표(雲票)... 네가 와 주었구나......."
운표라 불리운 이십대 가량의 백의 청년은 온통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원계묵은 입가가 씰룩였다.
"하지만 알아야 된다. 이것은 나의 최선이었다."
그 순간 그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기
적 같은 일이었다. 운표는 그를 급히 부축했다.
"우... 운표... 부탁이... 있다......."
"말씀하시오! 대주......!"
"나를 데리고... 가장 빠른 속도로... 대운하(大運河)로 가서... 구
룡상선의 주인... 용백군을 만나... 그리고...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원계묵은 혼절했다. 운표는 한숨을 쉬었다. 이
어 주위를 보았다. 천강검수들은 깨끗이 전멸되고 백살대의 백의
인들은 질서 있게 도열해 있었다. 운표는 힘차게 말했다.
"모두 말을 타라! 운하 어귀로 간다!"
이어 그는 한쪽에 역시 창백한 얼굴로 낭패하여 서 있는 부금
진을 보고 지시했다.
"이 분 소협에게 말 한 필을 드려라!"
부금진에게 한 필의 말이 건네졌다. 운표는 포권했다.
"소협도 같이 가십시다."
부금진은 힐끗 원계목을 보고는 잠시 생각했다. 하나 곧 그는
히죽 웃으며 승낙했다.
"좋소."
운표는 말에 뛰어올랐다.
"가자!"
그 말에 백살대는 일제히 지축을 뒤흔드는 굉을을 내며 출발했
다.
폭풍(暴風), 흡사 폭풍과 같은 기세였다. 나타날 때도 폭풍이었
고 사라질 때도 폭풍이었다. 그것이 바로 백살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았습니다.
즐감입니다 감사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
줄
줄독
즐감요.
감사 드립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