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五十.
삼국사기 권 제 50
列傳第一{十}.
<弓裔>․<甄萱>.
열전 제 10
궁예. 견 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子{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及壯不拘檢僧律軒輊有膽氣. 嘗赴齋行次有烏鳥銜物落所持鉢中. 視之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頗自負. 見<新羅>衰季政荒民散. 王畿外州縣叛附相半遠近群盜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大順>二年辛亥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投<北原>賊<梁吉><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그가 장성하자 중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방종하였으며 뱃심이 있었다. 어느 때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리대에 떨어뜨렸다. 궁예가 그것을 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그것을 비밀에 부쳐 소문을 내지 않고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분산되어 왕기의 밖에 있는 주현 중에서 신라 조정을 반대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던가 개미같이 모여 들었다. 선종은 이를 보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 재위 5년, 대순 2년 신해에 그는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이 오만무례하므로 선종의 마음이 침울하여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훤의 휘하인 원회, 신헌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그는 경복 원년 임자에 북원의 반란군 양 길의 휘하로 들어갔다. 양 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은 치악산 석남사에 묵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現{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선종은 건녕 원년에 명주로 들어가 3천5백 명을 모집하여, 이를 14개 대오로 편성하였다. 그는 김 대검, 모 흔, 장 귀평, 장 일 등을 사상[사상은 부장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쳐부수니 군사의 성세가 대단하였으며, 패서에 있는 적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창건하고 스스로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湌之職.
우리 태조가 송악군으로부터 선종에게 가서 의탁하니, 단번에 철원군 태수를 제수하였다. 태조는 3년 병진에 승령, 임강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에는 인물현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 검포, 혈구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 길은 그 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 등 30여 성을 빼앗아 소유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 기미를 알아 차리고 먼저 양 길을 쳐서 대파하였다. 선종은 광화 원년 무오 봄 2월에 송악성을 수축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 대감으로 삼고, 양주와 견주를 쳤다. 겨울 11월에 팔관회를 시작하였다. 3년 경신에 다시 태조로 하여금 광주, 충주, 당성, 청주[혹은 청천이라고 한다.], 괴양 등의 고을을 공격하여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공으로 말미암아 선종은 태조에게 아찬의 위품을 주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拔}劒擊之, 其刃 {迹}猶在.<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沇}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壽春部[今禮部]․奉賓部[今禮賓省]․義刑臺[今刑部]․納貨府[今大府寺]․調位府[今三司]․內奉省[今都省]․禁書省[今秘書省]․南廂壇[今將作監]․水壇[今水部]․元鳳省[今翰林院]․飛龍省[今天僕寺{太僕寺}]․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植貨府{殖貨府}[掌栽植菓樹.]․障繕府[掌修理城隍.]․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單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신라에서 버림받은 일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젠가 남쪽 지방을 다니다가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있는 신라왕의 화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 원년 갑자에 나라를 창건하여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광평성을 설치하여 광치나[지금의 시중], 서사[지금의 시랑], 외서[지금의 원외랑]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또한 병부, 대룡부[창부를 이른 것], 수춘부[지금의 예부], 봉빈부[지금의 예빈성], 의형대[지금의 형부], 납화부[지금의 대부시], 조위부[지금의 삼사], 내봉성[지금의 도성], 금서성[지금의 비서성], 남상단[지금의 장작감], 수단[지금의 수부], 원봉성[지금의 한림원], 비룡성[지금의 태복시], 물장성[지금의 소부감] 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모든 외국어의 학습을 맡은 기관], 식화부[과수 재배를 맡은 기관], 장선부[성황 수리를 맡은 기관], 주도성[기물 제조를 맡은 기관] 등을 설치하고 또한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등의 직품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청주의 민가 1천 호를 철원성에 옮겨 살게하고, 이를 서울로 정하였다. 상주 등 30여 주를 쳐서 빼앗았다. 공주 장군 홍기가 항복해왔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湌將軍.
천우 2년 을축에 궁예는 새로운 서울로 가서 궁궐과 누대를 대단히 사치스럽게 수축하였다. 연호였던 무태를 고쳐 성책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 성주인 장군 검 용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적과 황의적 명귀 등이 항복하여 왔다. 선종은 자기의 강대한 기세를 믿고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주량 건화 원년 신미에 연호였던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 등지를 치게 하여,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湌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舡將軍.
선종은 미륵불이라고 자칭하여, 머리에 금고깔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 보살이라 하고 막내 아들을 신광 보살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탔는데,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동녀들로 하여금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였으며, 또한 비구 2백여 명으로 하여금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는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바르지 않았다. 선종은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다. 중 석총이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오, 괴이한 이야기로서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선종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어 그를 철퇴로 쳐 죽였다. 3년 계유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에 연호였던 수덕만세를 고쳐서 정개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 장군으로 삼았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迪{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啇{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정명 원년에 그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하여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녀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고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그가 의심이 많고 곧잘 갑자기 성을 내므로,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 창근이란 자가 당 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살았다. 정명 4년 무인에 그가 저자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생김새가 매우 크고 모발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을 입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었으며, 오른 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므로,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에 있는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후에는 간 곳이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가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은 것으로서,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을 것이며,
사(巳)년 중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㪍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 解之. <含弘>等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湌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湌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으나, 이를 발견한 뒤에는 심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해 찾게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다만 발삽사 불당에 진성 소상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한참 한탄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 함홍, 백 탁, 허 원 등으로 하여금 그 뜻을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말한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에 몸을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는 소나무를 말함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으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나니, 이는 지금의 파진찬 시중을 이른 것이다.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뜻하는 바,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빼앗고, 뒤에 압록강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湌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辭{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송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렇게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도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이 때문에 거짓말을 지어 보고하였다. 왕이 흉포한 일을 제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는 바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젊은 시절의 이름이었는데, 이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살육하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과 무왕의 일을 실행할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며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는 자신이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으므로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의 자리에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은 데 감히 은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라고 하였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 오지 않는 것으로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어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와 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 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 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한 필부의 손에 죽음을 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 부인 유씨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말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듣고 첩도 오히려 분노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였으니 천 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대문으로 나가면서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달아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모르다가 미천한 차림으로 산의 숲 속으로 들어 갔다. 그는 얼마 안가서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 나라 대순 2년에 일어나 주량 정명 4년까지 활동하였으니, 전후 28년 만에 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