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시학전통과 디카시
1. 동양시학과 디카시
동양시학의 전통에서도 디카시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것이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더구나 문학이라는 것은 고급예술로서 어느 날 이단아처럼 출현할 수는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는 언어예술이지만 시인들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추상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해 왔다. 작품 창작에 있어서 작가의 창작 의도가 그대로 작품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웜서트와 비어즐리의 논문 「의도의 오류(The Intentional Fallacy)」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문학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실제의 의미’와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로서의 의미'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표현론적 관점에서는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작품으로 그대로 실현된다는 개성론을 취하며, 작가의 의도를 중심으로 작품 해석을 하려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다. 「의도의 오류(The Intentional Fallacy)」에서는 작품 자체가 지니는 형식이나 구조를 중시하는 형식주의 비평방법으로서 작가의 의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의도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작가의 역량 부족 같은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언어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47)
『장자』의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제나라 환공과 수레바퀴 깎는 장인 윤편의 일화이다. 제나라 환공이 책을 읽고 있고, 대청 아래는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은 환공에게 물었다.
"왕께서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습니까?"
"성현의 말씀이다"
"그 성현이 지금 생존해 계십니까?"
"아니다.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합
니다."
환공은 화가 나서 말한다.
"네 이놈, 수레바퀴나 깎는 주제에 옛 성현의 말씀을 찌꺼기라고,네가 무엇을 알기에 함부로 그 따위 말을 지꺼리느냐. 만약 그 말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
윤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수레바퀴를 깎는 노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 일에 비추어 그 말을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수레바퀴 구멍을 깎을 때 망치질을 너무 느리게 하면 헐렁해서 살이 꼭 끼지 않고, 또 너무 재게 하면 빡빡해서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리지도 재지도 않고 알맞게 깎는 이 기술은 손에 익고 마음으로 아는 것이어서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묘한 기술이 있지만, 저는 자식에게 가르칠 수가 없고 자식도 그것을 제게서 배울 수가 없으니, 나이 70이 되도록 이렇게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저의 이 기술은 죽으면 저와 함께 무덤으로 갑니다. 옛 성현도 저와 마찬가지니, 그 깨달은 바를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성현과 함께 무덤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 성현이 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없었던 것을 글로 써 놓았을 것이니, 그 책은 성현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책이 성현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면 시가 언어예술이라고 하지만 시인이 표현하고자는 시적 의도를 어찌 문자로 다 드러낼 수 있겠는가. 시인은 언어로 표현해 놓고 보면,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서 고치고 또 고치고 비유와 상징의 옷을 덧입히기도 하지만 ‘의도의 오류’가 어찌 발생하지 않겠는가.
선종에서도 경론의 문자와 교설만을 주된 것으로 강조하는 교학을 거부하고 진정한 정법, 진리는 문자에만 의거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혹은 물고기나 토끼를 잡는 통발, 올무와 같아서 정작 달과 고기나 토끼는 놓칠 수 있다는 불립문자다.
동양에서 문사적 전통은 시, 서, 화를 함께 즐기며 이 셋이 모두 뛰어난 사람을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렀다. 오늘날 예술가는 시인이면 시, 서예가는 서예, 화가는 그림에 각기 하나에 정통하지만 동양적 전통에서는 문사가 시와 서예와 그림에 모두 능한 것이 낯설지가 않다.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에 의시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사들은 언어만을 고집하지 않고 그림이나 서예 같은 것을 함께 곁들이지 않았을까.
예술적 대상을 보고 마음의 감흥을 노래하면 시가 되고, 먹으로 종이에 문자로 표현하면 서예가 되고, 그 형상을 직접 화면에 그리면 그림이 된다고 생각했다. 시와 그림의 일체를 말하는 시화일체론도 동양시학에서는 너무 익숙한 개념이다.48) 소동파가 왕유의 시와 그림을 평가하여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한 것은 시와 그림은 본래하나라는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적 전통에서는 예술가가 시로서 자신의 감정을 읊거나 그림으로 그려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둘을 결합시켜 표현하는 것도 역시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것이 바로 ‘제화시’(題畵詩)이다.49)
제화시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림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작가의 정신세계까지 표현하는 경우도 있어, 그림과 시의 시화일체를 넘어 상보적 관계로까지 나간다. 제화시의 경우 그림과 시의 만남은 다양하다. 화외제시(畵外題詩)와 화내제시(畵內題詩)가 있는바, 전자는 그림 밖에 시를 쓰는 것이고, 후자는 그림 안에 시를 쓰는 것이다. 또한 자제시(自題詩)와 타제시(他題詩)가 있는데 전자는 그림과 시를 쓴 사람이 동일인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신윤복의 「미인도」50)의 제화시는 주목할 만하다. “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언물전신(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 즉 “화가의 마음속에 만 가지 봄기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준다”라는 제화시는 화가의 의도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림으로 다 말하지 못한 작가 정신이 이 제화시로서 드러난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그림과 시의 이상적인 만남을 엿볼 수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
주47) 이상옥의 부산디카시인협회 세미나 주제발표문 「국제도시 부산, 글로벌 생활문학으로서의 디카시의 허브 도시로」 (2023. 12. 22, 경남정보대 IT빌딩)에서도 ‘언어의 불완전성’의 사례로 윤편 일화 인용함.
주48) 정민, 『한시미학산책』(솔, 1966), pp.27∼48 참조.
주49) 윤범모, 「현대미술과 시화 일률(詩畵一律), 『유심』 2015년 11월호 참조.
주50) 세로 74센티, 가로 45.2센티의 비단바탕 수묵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첫댓글 의도의 오류는
디카시에서 이미지 오독으로 등장합니다.
새롭게 정리해주시니까 고맙습니다
학문적이라 다소 어려운 낱말들이 있습니다만
읽고 다시 새겨보며 잘 배우고 있습니다.
교수님, 늘 감사합니다.
성현의 찌꺼기에 불과
의도의 오류
不立文字
그림과 시와 이상적인 만남 미인도
동양시학에서 디카시 근거
교수님 특강 배움합니다
감사합니다
불립문자이기에
시인, 화가, 소설가, 조각가, 작곡가......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을 시도하고,
모두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알기에
독자가 완성하고 , 표현자는 다만 전달자일 뿐이고,
절대자는 표현자에게 독자가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미지의 오독이 일어나는 것이 어쩌면 이미지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열어 둔 덧문일지도 모르니까요
예술이란 참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