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는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
한양에서 멀리도 내려왔으며 그만큼 이곳이 명당이라는곳이다.
위성지도의 세종과 단종 태실지
순조 32년(1832)경에 완성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곤양군조에 '소곡산은 군의 북쪽 25리 되는 지리산 남쪽에 있다. 진주의 옥산이 동쪽으로 와서 주맥을 삼았는데, 세종과 단종의 양묘태실이 봉안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사람 신체 가운데 근원이라고 생각한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였다. 특히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자나 왕세손 등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그 후 조선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1929년에 태실의 소유자인 경복궁이 태실임야를 모두 민간인에게 팔고, 태실은 경기도 양주(揚州)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땅은 개인에게 팔았습니다.
현재 세종의(전주 이씨) 태실이 있던 봉우리에는 대기업과 관련이 있는 대구시 허모씨가(許某氏家)의 묘 3기가 들어선 사유지이며, 석재(石材)는 사방 계곡에 매몰 파손되어 있던 것을 태실비와 태실 석재 일부를 도로 옆 조금 높은 곳에 모아서 보호하고 있다.
세종 태실지와 가까운 곳에 단종 태실지가 있습니다. 단종 태실지가 있는 곳은 세종 태실지가 있는 큰태봉산의 서남쪽 논 가운데에 있는 작은 태봉산입니다. 세종 태실지와는 직선 거리로 600 여미터 떨어져 있으며,
이곳 형세는 큰태봉산의 산줄기가 이어져 '복치(伏雉)'라 하여 꿩이 앉아 있는 형세의 길지(吉地)라고 합니다.
일제시대때 조선 왕가의 맥을 끊기 위해 농지개혁이란 핑계로 산줄기의 맥을 끊어 논과 밭을 만들어 지금처럼 형세가 바뀌었다고 한다.
단종(전주 이씨) 태실지에도 또한 일반 묘소와 비석이 있다.
무덤의 주인은 삭녕최씨 최연국(1885~1951)으로 1990년대 말에 세워진 묘비에는 민족교육에 앞장서는 등 지역과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 그의 아들은 경기도지사와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사위는 검사를 지냈으며, 조카는 국회의원과 KBS 사장, 문화공보부 차관 등을 지냈다고 기록되어있다.
1951년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으며, 그후 1996년 12월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는 일제시대 때 경남평의원과 조선전람회 평의원, (중주원) 칙임 참의 등을 지내고, 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국 각지의 태실지를 일반인에게 매각할때 당시 명당으로 손꼽히는 이곳을 매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은 단종 태실이 있던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단종의 태실이 사천(소곡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사천의 태실을 일제가 서삼릉으로 이봉할때 인성대군의 태라는 것이 확인 되었으며, 그래서 서삼릉에 옮겨진 인성대군의 태실비 후면에 경남 사천군 곤명면에서 이장했다고 새겨있다는 것이다.
정여립은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어 "천하(임금)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며,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의 통론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왕통(王統)에 따르는 계승이 아니라 누구든 능력이 있는 자에게 왕위가 전해져야 한다는 요순우(堯舜禹)의 선양방식을 이상적인 왕위계승 방식이라 하였으며,
그의 인물됨은 그가 율곡과 성혼의 각별한 우호와 촉망을 받았던 데서도 나타난다. 바른말을 잘하고 강직했던 까닭에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고향 전주로 낙향했지만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을 만큼 인망과 영향력이 높았던 인물이다.
또한 일찍부터 왜구의 내침을 예상하여 향리의 장정들에게 활 쏘고 창 쓰는 연습을 시키고,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하였을 때에는 전주 부윤의 요청에 따라 대동계원을 동원하여 일거에 왜구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또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한것은 왕촉이 죽을 때에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해(柳下惠)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의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가 제나라, 양나라의 임금에게 천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정여립의 이와 같은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은 약 230년 후 다산 정약용에 의해 '탕론(蕩論)'으로 이어진다. 다산은 이 글에서 군주는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근대적 선거사상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후일 신채호는 정여립의 혁명사상이 "4백 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 평한 바 있다.
고려의 개성 왕씨 조선의 전주이씨가 왕이 되어 전국의 명당을 차지하다가 근대에는 여러 성씨들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으며,
정여립의 말처럼 "천하(임금)는 공물인데 어찌 우리 청주정문에서는 왕이 되어 천하의 주인이 없다는게 가슴 아프며 언젠가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