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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그리고 낙엽은 왜 아름다운가 / 이상국 바보같은 질문 하나 해볼까? 단풍은 왜 아름다울까. 하나 더 해볼까? 낙엽은 왜 아름다울까. 그럼 대답도 해볼까? 단풍은 빛깔 때문에 아름답지. 낙엽은 그게 덧없는 포즈로 떨어지고 바람에 날리기에 아름답지. 단풍은 여름 내내 진초록을 더해왔던 나뭇잎들이 한 순간 붉고 노란 빛으로 바뀌는 그 변색(變色)이 경탄을 부르고, 낙엽은 그토록 무성하게 나무를 덮었던 잎사귀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떨어져 내려앉는 장관(壯觀)을 보여주기에 놀라운 거지. 그렇게 대답하면 온전히 다 대답한 것일까. 아니 단풍이 아름답고 낙엽이 감미로운 건, 생의 권태에서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당(未堂)이 초록에 지쳐 단풍 든다고 할 때의 그 ‘지친 마음’이야 말로 가을의 초입에 감도는 기운이다. 봄날 초록은 얼마나 이쁘고 신기했던가. 그리고 그 초록이 무럭무럭 자라나 여름을 뒤덮을 때 그 또한 얼마나 싱그러웠던가. 그런데 그렇게 탄복하고 즐거워하는 동안, 마음 밑바닥에서 슬그머니 권태도 함께 자라났다. 사랑스럽던 초록을 죽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불현듯 일어나던 차에, 나무들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잎사귀의 빛깔을 불태우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예뻐도 늘 꽃의 들러리 밖에 되지 못하던, 잎사귀들이 감히 꽃보다 더 곱고 애잔한 빛깔을 내는 일도 심상찮다. 이제 곧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 동안 억눌린 아름다움을 토하기라도 하듯, 붉디붉은 피단풍, 노랗디노란 꾀꼬리단풍으로 화한다. 단풍은, 꽃들의 빛에 늘 서러웠던 잎사귀들의 반란이다. 산마다 봉화(烽火)를 올리고, 꽃세상을 뒤엎는 민중의 축제이다. 단풍이 좋은 건 이래서다. 이것이 없었다면 얼마나 싱거울 뻔 했는가. 이 붉고노란 광기(狂氣)마저 없었다면 나뭇잎들은 얼마나 초라할 뻔 했는가. 단풍에는 저물 무렵의 노을같이 처연한 기운이 있다. 이것은, 나뭇잎들이 피운 꽃이다. 죽어가는 자의 존재증명이며, 산등성이를 뒤트는 몸부림이다. 오랜 자부심이던 초록을 죽여, 마침내 자기를 다 소진(消盡)하는 비장한 열정. 단풍 행각(行脚)은, 사(死)의 찬미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죽어가는 것들의 마지막 빛은 저토록 아름답다. 생이 지겨울 때, 우린 저 죽음의 원색을 만난다. 돌이킬 수 없는 생의 판을 휘젓듯 단풍은 권태롭던 빛을 일거에 청산하고 스러진다 단풍은 빛이지만 낙엽은 움직임이다. 단풍은 초록 일색(一色)에 대한 분연한 항거이지만, 낙엽은 확고부동한 것에 대한 조롱이다. 한 시대 번성(繁盛)은 이렇게 덧없다. 나뭇잎 하나 하나를 돋우고 키울 때는 그 성장 만이 희망이었지만, 자랄 대로 자란 그들이 이젠 징그럽다. 한 줄기 가는 바람에도 떨어질 것 같던 잎들이 튼튼하게 자라나 이젠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 없는 잎들이 되었는데, 문득 인간은 그 잎들이 지겨워진다. 말은 안했지만, 이제 차라리 죽음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때 나무들은 그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제 팔뚝들을 서슴없이 전지(剪枝)한다. 때마침 찬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들은 일제히 사멸의 춤을 춘다.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다시 바람에 구르는 것들, 그것들을 밟을 때 내는 소리들, 죽음이 이렇게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한때 나무의 몸이었던 것들이 그 소용을 다한 뒤 저렇듯 아낌없이 내려앉아 다시 흙을 비옥하는 질료로 변하는 그 순환의 한 때. 나비처럼 파득파득 날리다가 마침내 제 동료들의 주검 위에 툭 떨어져 얹히는 낙엽 하나. 우린, 엽기적인 취향처럼 이 죽음의 전율을 받아들인다. 가을의 아름다움이란, 생의 그림자의 아름다움이다. 소진(消盡)과 몰락(沒落)의 슬픔이 남기는 암시와 여운. 그건 어떤 희망적인 아름다움보다도 더 각별하다. 가만히 슬픈 나무들을 바라보라. 자기를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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