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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53코스(새창이 다리-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6. 8(토)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대야면·회현면·옥산면 일원
여행코스 : 새창이다리(서단)→금광교차로→옥성마을(실제 출발지)→광지산마을→회현면사무소→군산호수→백석마을→외당마을(거리/시간 : 19.6km, 실제는 11.8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3코스를 걷는다. 5개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만경강의 둔치를 따라가다 하구역 직전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강변의 갈대밭과 군산호수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개(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19km가 넘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 들머리는 새창이 다리(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712번 지방도를 타고 김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만경대교’ 직전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신촌마을(복교리)’이 나온다. 마을 앞에 ‘새창이 다리’가 있고, 서해랑길(군산 53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세워놓았다.
▼ 만경강 하류 ‘새창이 다리’에서 시작해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옥산면 당북리)’까지 19.6km를 걷는다. 만경강 하구의 둔치를 따라 걷다 드넓은 옥구들녘을 거쳐 군산 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로 옥성마을에서 시작했다. 첨부된 지도의 744번 지방도와 서해랑길의 붉은 선이 만나는 지점 오른쪽에 있는 삼거리이다.
▼ 10 : 44. 실제 출발지는 ‘신기촌 버스정류장(군산시 회현면 금광리)’으로 삼았다. 윗 이빨을 4개나 뽑고 인공 뼈까지 이식한 게 월요일이라서 무리한 운동을 삼가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를 꺾지 못한 의사선생님도 가능한 한 거리를 줄여야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트레킹을 허락해주셨다.
▼ 10 : 44. 수로(水路) 옆 둑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따라갈 수도 있었으나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수로를 가운데 두고 내놓은 둑길을 따르기로 했다.
▼ 10 : 48. 잠시 후 이른 ‘옥성마을’. 전봇대에 매달린 노랑·빨강 리본이 ‘서해랑길’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참고로 해파랑길은 빨강·파랑, 남파랑길은 노랑·파랑이다). ‘두리누비’에서 제공한 트랙은 53코스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8.13km로 찍고 있었다. 반면에 내 앱은 0.24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그러니 53코스는 정규 코스의 60%쯤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옥성마을’ 표지석. 법정 동리인 금광리(金光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월평·월평2구·원당·광지산·금당·신기촌·옥성·옥흥·옥삼)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만경강 하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에서 보리와 쌀 위주의 농업을 위주로 살아간다.
▼ 탐방로는 수로를 따라 조금 더 간다. 비가 오시려는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비가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들어맞는 것일까? 하지만 고맙게도 하늘은 우리 편이었다. 빗방울이 잠시 떨어지더니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 10 : 50. ‘남평 문씨(南平文氏)’ 제각
▼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가로질러 금광리(회현면)의 너른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 ‘우렁이 농법’은 한때 ‘친환경 벼 재배’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었다. 아니 요즘도 우렁이 방사에 대한 뉴스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화학 제초제 대신 물속의 풀을 먹는 데는 우렁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수로의 벽에 우렁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 들녘은 모내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곡식 낱알을 누렇게 매단 채로 남아있는 곳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채종포(採種圃)’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품종을 ‘하이스피드’로 적고 있었다. 경영비를 절감해보려는 축산농가에서 ‘하이스피드’라는 사료용 귀리를 심었고, 또 최고의 종자를 얻기 위해 수확시기를 맞추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이스피드’는 ‘고숙기(낱알이 완전히 익는 시기)’에 채종해야 발아율이 가장 높아진다니 말이다.
▼ 11 : 00. ‘광지산 마을’에 이른다. 아니 동구 밖에 있는 버스정류장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동서로 뻗어나가는 도로(‘회미로’, 회현면의 옛 이름이 ‘회미’였단다)를 따라 같은 금광리의 광지산, 금당, 원당, 월평 등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만경강유역의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수확한 쌀은 ‘옥토 진미’라는 브랜드로 시장에 나온다.
▼ 11 : 06. 광지산마을의 북쪽 끝에는 ‘두릉 두씨(杜陵 杜氏)’ 문중 제각이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두릉두씨 시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낸 ‘두경령(杜慶寧)’이다. 타 세력에 밀린 그가 일족과 함께 고려의 궁지현(조선시대의 만경현)으로 이주했고, 이를 안 조정에서 만경지역 일부를 식읍으로 하사하며 ‘두릉군’으로 삼았단다. 두경령의 11세손인 두승손(杜承孫)이 만경에서 옥구로 이주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옥산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는데, 이곳 광지산마을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 금광리에서 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도 민가 몇 채가 들어섰다. 광지산마을의 ‘윗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본뜸보다도 더 오래된 듯 당산목으로 여겨지는 팽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 팽나무 뒤로 보이는 ‘지성어린이집’도 나그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궁전을 커다랗게 지어놓았다. 하지만 난 담벼락에 붙어있는 풍경화에 더 관심이 간다. 대체 어디에 있는 산이기에 저런 멋진 풍경을 보여줄까?
▼ 11 : 10. 고개를 넘으면 ‘대정리(大政里)’이다. 회현면의 소재지답게 건물의 등치부터가 달라진다. 2층은 기본. 3층짜리도 흔하고, 귀하지만 고층이랄 수 있는 4층 건물도 눈에 띈다.
▼ 탐방로는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711번 지방도(회현로)를 따라간다. 길가에 늘어선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농협 등 공공시설들이 이곳이 회현면의 행정 중심임을 알려준다. 음식점·편의점·상점은 물론이고 카페까지 들어서있는 게 면소재지치고는 제법 번화하다는 느낌을 준다.
▼ 회현면사무소. 회현면(澮縣面)의 옛 이름은 회미현(澮尾縣)이다. 백제의 ‘부부리현’이었던 것을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개칭했다. 고려 때까지 회현현(澮縣縣)으로 남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옥구군 ‘장면’과 ‘풍면’이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나누어진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이 통합되어 옥구군 회현면이 된다. 현재 8개 법정 동리(월연리·금광리·대정리·세장리·고사리·학당리·원우리·증석리)를 관할한다.
▼ 11 : 14. 회현사거리. 비석이 3개이니 ‘비석군’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문종철이라는 면장의 청직기념비를 가운데 놓고 양옆에 다른 이(인터넷에서도 조회가 되지 않는)의 영세불망비와 기념비를 세웠다.
▼ 건너편에는 ‘회현중학교’가 있다. 무작정 교정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 문지기 삼아 세워둔 장승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떴다. 아니 장승에 쓰인 ‘나를 무엇에 쓸까’, ‘어떤 세상을 만들까’의 의미를 가슴에 담아왔다. 그리고 그 뜻이 회현중학교 학생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빌어줬다.
▼ 11 : 20. 회현초등학교.
▼ 11 : 22. 회현초등학교의 담장 끝. 삼거리에서 711번 지방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서기길’을 따른다. 모퉁이의 ‘청암산 생태학습장(1km)’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 서기마을(대정리)은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담쟁이넝쿨을 뒤집어쓰고 있는 창고형 건물에 더 눈길이 갔다. 공생(共生)을 아는 놈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도 엉겨서 살아가지 진까지 빨아먹지는 않으며, 줄기를 움푹 패게 만들지만 죽이기까지는 않는 것이다. 벗하며 즐길 줄 안다고나 할까?
▼ 옥산저수지로 들어가는 1km 정도의 구간은 도로 확포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건 그렇고, 비 멎은 하늘은 언제 빗줄기를 뿌렸냐는 듯이 싱그러운 햇살을 내보낸다. 맑고 푸른 게 영락없는 ‘가을하늘’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공활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부작사부작 걸어보자. 마침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까지 빼어나지 않는가.
▼ 이때 ‘청암산(118.8m)’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산은 원래 ‘취암산(翠岩山)’이었다. 푸르다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에 ‘푸를 청(靑)’자를 써서 청암산으로 이름을 둔갑시켰다나? 아무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 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구슬처럼 예쁘다고 해서 ‘옥산’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옥산(玉山)’이란 지명은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옥구현의 다른 명칭인데, ‘대려골’ 북쪽, 꼭대기에 흰 돌이 있다는 작은 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 11 : 30. ‘죽동마을’에 이른다. 세장리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죽동·신성동·사오개·가운데뜸) 중 하나로 마을이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댓골’로 불리다가 ‘죽동’이 되었다.
▼ 이왕에 들렀으니 죽동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쯤 들어보면 어떨까? 주차장 옆에 마을의 유래를 담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마을은 한때 80여 세대 400여 명이 살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농촌 공동화현상을 피해가지 못해 한적한 시골마을로 전락했던 모양이다. 최근 은퇴자 및 자녀를 관내 초·중학교로 입학시키고자하는 학부모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옛 영화를 되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 ‘사오갯 샘’이라고 한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타 지역 사람들까지 물지게를 지고 찾아와서 물을 길어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는 소문난 우물이다. 해방 직후 콜레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죽동마을에서는 일절 해를 입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사오갯 샘’ 덕분으로 믿고 있다나?
▼ 11 : 37. 마을 뒤 고개(‘사오개’가 아닐까 싶다)는 온통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있다. 그 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 군산시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을 만나는 지점으로, 이와 관련된 안내판들을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세워놓았다.
▼ 군산호수를 도는 방법은 구슬뫼길(구불 4길), 수변길(13.8km), 청암산 등산로(약 7km) 등 세 가지가 있다. 이중 수변길이 등산로보다 두 배 가까이 긴데, 이는 리아스식 호숫가를 굽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게 될 ‘구슬뫼길(구불4길)’은 수변길과 청암산 등산로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나간다. 어느 구간에서는 그 길을 따르기도 한다.
▼ 이곳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눈길을 끈다. ‘사오개’는 옥산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회현면 대정리·월연리·세장리 사람들이 옥산이나 군산으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6척 이상의 큰 길이 시내까지 연결되어있었으나 1939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물속에 잠겨버렸단다.
▼ 이 사진은 군산시청을 나무라기 위해 게시했다. 서해랑길의 이정표이니 가장 필요한 것은 종점과 시점까지의 거리다. 그런데도 앞뒤 주요 포인트만 표시했다. 그러니 대체 얼마를 걸어왔고,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할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단의 지도라도 옳게 표시했으면 좋았으련만 시점 및 종점까지의 거리 대신 위 방향표지판에 적힌 거리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군산 지역에서 만난 이정표는 모두가 다 이러니 문제다. 30만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큰 도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다.
▼ 이후부터는 ‘구슬뫼길(구불4길)’을 따라간다. 어느 선답자는 청암산 등산로를 따르면 빠르긴 하나 호수의 그윽한 맛을 느끼기 어렵고, 수변길은 편하지만 호수의 다양한 표정을 엿볼 수 없다고 했다. ‘구슬뫼길’은 그런 두 길의 장점을 합쳐놓았다니 이를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나 더. 구슬뫼길의 길이는 수변길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난이도는 약간 더 높단다. 청암산 등산로와 만나려고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종종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탐방로에 들어서는 순간 서해랑길 표식은 사라져버린다. 대신 ‘구슬뫼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준다. 참고로 ‘구슬뫼길’은 쉬지 않고 걸어도 6시간 이상 걸리는 긴 코스다. 그래서 사람들은 옥산저수지 주변을 도는 3-4시간짜리 단축 코스를 선호한다. 옥산저수지 둘레만 그려놓은 저 안내도가 그 증거이다.
▼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아가는 산책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 호숫가 습지로도 길을 냈다. 다리를 놓듯 테크로드를 조성,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자연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 가끔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 전망대에 서자 발아래까지 다가온 호수가 살갑게 맞는다. 수면 위는 초록의 연꽃잎으로 한가득이다.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인 ‘가시연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군산호수는 가시연꽃의 주요 서식지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개화시기(7-8월)가 아니어선지 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시가 돋은 긴 꽃대와 자줏빛 꽃이 무척 아름답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호숫가 곳곳에는 쉼터를 배치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에 벤치는 기본, 심지어는 그네형의 의자까지 만들어놓은 곳도 보인다.
▼ 강의실을 연상시키는 의자 배열이 ‘생태학습장’이 아닐까 싶다. 안내도에 나와 있던 ‘습지관찰원’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오랜만에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로 했다. 6km 이상이나 코스를 단축해서 시간까지도 느긋한데 구태여 서두를 일이 없지 않겠는가. 덕분에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호수와 주변 숲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시야가 열리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 구슬뫼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나무 숲을 걷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 1930-1940년대, 만경강 하구에는 민물고기나 바닷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촌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죽동마을로 몰려왔고, 댓금 흥정이 끝나면 대나무 다발을 바리바리 실은 달구지를 몰고 흙먼지 폴폴거리는 길을 되돌아갔단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고기잡이 방식인 ‘쑤기놓기’에 대나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민들은 대나무를 잘라 팔면 논농사로 얻는 소득보다 대여섯 배나 더 많이 벌 수 있었다나? 당시 대나무 군락이 얼마나 넓게 분포되었을 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얘기라 할 수 있겠다.
▼ 그런 사연을 품은 대숲이니 무작정 통과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듯 작은 공간을 만들고 ‘청암정’이란 정자를 들어앉혔다. 빙 두른 판넬은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청암산과 옥산저수지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소개하고 있다.
▼ 청암산 둘레길의 지도는 큐알 코드로도 받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니 어슬렁어슬렁 걸어보란다.
▼ 문제는 ‘나 하나쯤이야’이다. 누군가 죽순에 손을 댔던 모양이고, 참다못한 지자체는 저런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나무껍질이나 식물을 무단채취 말라는...
▼ 잠시 후, 이번에는 ‘왕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물과의 친화력이 강한 나무라서 계곡의 하류나 호숫가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풍경이기도 하다. 깊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잘 자라는 특성 덕분이다.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나서 일부러 심는 경우도 있다.
▼ 그중에서도 호수가 품었을 때를 제일로 친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기다 아침 안개라도 피어오를라치면 그 풍경은 창조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된다.
▼ 다시 나타난 대나무 숲.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숲길. 깊은 호흡 두어 번이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진다. 이산화탄소를 몽땅 빨아들이고 산소를 품어내는 대나무 숲의 효능 때문일 것이다. 하나 더. 안내도는 이곳을 ‘죽림원’으로 적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나무 숲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담양의 ‘죽녹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 그 자신감은 안내판에서도 확인된다. 대나무의 음이온 샤워로 걱정과 긴장을 풀 수 있는 ‘청암산 죽향길’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마다 최고의 포토존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아까보다 더 울창해진 대숲은 ‘비밀의 숲’이란 밀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는 이 숲을 ‘정돈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었다. 담양 ‘죽녹원’이나 울산의 ‘십리대숲’ 등 잘 가꿔진 대숲들의 조형미에 견주지 못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외려 그 덕에 한결 자연스럽고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가 섞인 풍경이 이채롭기 짝이 없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나는 또 하나의 전망대. 안내도는 이곳을 수변생태관찰장으로 적고 있다. 습지가 잘 발달된 곳으로 곤충과 야생화, 새들이 공생하는 체험학습장이다.
▼ 안내판은 호수와 접한 어림을 ‘연못’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청암산에서 유일하게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 습지를 이용한 생태연못으로, 군산호수에 서식하는 수생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단다.
▼ 맨발로 걷고 있는 여행자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만큼 길이 곱다는 증거일 것이다.
▼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 포토존도 만들어 놓았다. 구슬뫼길을 다녀간 여행자들의 앨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소이다.
▼ 사랑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냉큼 사랑마크부터 만들고 본다. 그걸 본 나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채로 카메라에 주워 담는다.
▼ 숲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호숫가의 가장 큰 단점은 길이 질퍽거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들뫼길’에서는 그런 걱정은 놓아도 된다. 조금이라도 질퍽거릴라치면 맷돌모양의 석판을 징검다리처럼 놓았고, 그로도 안 될 경우에는 데크로드를 설치했다. 각종 편의시설도 눈길을 끈다. 노란색 안내판하며 둥근 통나무의자, 나이테가 선명한 널빤지 모양의 긴 의자, 녹색 화살표가 선명한 빨래판 모양의 이정표 등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 쉼터도 각양각색이다. 정자나 파고라는 기본. 특이하게도 대나무를 엮어 만든 곳도 눈에 띈다. 잠시나마 급할 것 없이 살아가던 원시인이 되어. 시간에 쫒기지 말고 푹 쉬다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12 : 41. 구불구불, 한없이 구불대던 숲길을 빠져나와 둑으로 올라선다. 초입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 ‘구불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구불길’은 군산시에서 조성한 둘레길이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여유·풍요·자유를 느끼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여행길’로 만들겠다는 게 조성 목적이다. 모두 11개 코스로 나뉘는데 비단강길·햇빛길·큰들길·구슬뫼길·물빛길·달밝음길·탁류길·고군산길 등 이름만으로도 정겹다. 그중 옥산저수지를 에둘러 돌아가는 구슬뫼길은 구불길의 정수 중 하나로 꼽힌다. 서해랑길은 이 구슬뫼길의 일부 구간을 따라 걷는다.
▼ 길이가 400m쯤 되는 저수지 제방을 따라간다. 군산호수(옛 옥산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성됐다. 공업용수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다. 1963년에는 군산의 제2수원지 노릇을 하느라 상수원보호구역에 지정됐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출입도 통제됐다. 그러다 2008년, 45년 만에 상수원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호수를 에둘러 아름다운 수변길이 조성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구슬뫼길(구불4길)’은 옥산저수지의 호숫가를 에돈다. 한자이름 ‘구슬 옥(玉)’과 ‘뫼 산(山)’을 순우리말로 바꿔 브랜드를 삼았다. 거리는 18.8km. 군산역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영춘 박사 고가와 옥산저수지 등을 지나 남내마을까지 간다.
▼ 둑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탐방객들을 위해 망원경까지 배치했으니 잠시 머무르며 조망을 즐겨보자.
▼ 난간에 서자 옥산저수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뒤로는 청암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가지런히 도열하고 있다. 저수지에 물이 차면서 산 중턱까지 물에 잠긴 산은 산봉우리들만 동글동글하게 남았다. 그걸 구슬이라고 본 사람들은 ‘옥산’이란 지명을 만들어냈고.,.
▼ 물억새 사이를 걸어볼 수도 있다. 둑 아래 억새밭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지금은 허리춤에도 못 미치지만 늦가을쯤이면 흐드러진 억새꽃이 장관을 이룰 게 분명하다.
▼ 12 : 52. 제방 끝(군산역에서 출발한 ‘구슬뫼길’로 봤을 때는 수변길의 초입이 된다)에는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청암산이 좋다’는 글자 조형물을 중심으로 대나무로 만든 대형 오리, 토끼와 거북이 등 여러 조형물을 배치했다. 가장 큰 볼거리로 꼽히는 가시연꽃은 아예 쉼터로 만들어놓았다.
▼ 전국은 요즘 맨발걷기 열풍으로 뜨겁다.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늘면서 각 지자체마다 각자의 특성에 맞는 맨발 길을 조성하느라 부지런을 떤다. 하긴 맨발 걷기가 발바닥의 신경을 자극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체내 독소배출이나 불면증 개선, 치매 예방 등에 도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싱족(earthing+族)’까지 등장할 정도이니 군산시라고 해서 별 수 있겠는가.
▼ 12 : 57. 저수지 아래는 양수장관리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사무소 마당은 화장실까지 갖춘 대형주차장으로 꾸몄다. 시골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다소 생뚱맞게까지 보이지만, 이는 옥산저수지의 호반을 따라 내놓은 걷기 길이 그만큼 많이 입소문을 탔다는 증거이도 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우리가 걸어온 ‘구슬뫼길’이 ‘전북천리길’에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다. 군산시의 걷기 여행길 중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전북천리길’은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 가치, 이야기가 있는 길을 엄선해 선정한 명품 둘레길이이다. 14개 시·군에서 3-4개씩 선정했는데, 각 길들은 해안길·강변길·산들길·호수길로 구분되며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대여섯 시간을 걷는다. 현재 44개 노선 405km의 길이 개통되어 있다.
▼ 12 : 59. 서해랑길은 이제 ‘옥구평야’를 향해 달려간다. ‘새만금’이 아닌 기존의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옥산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른쪽에는 옥산면 소재지인 옥산리의 ‘여로마을’이 있다. 왼쪽은 같은 옥산리인 ‘대려마을’, 드넓게 펼쳐지는 석교들 너머에서는 군산시가지의 고층빌딩들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 눈에 들어오는 ‘석교들’도 무척 넓었다. 옥산저수지에서 시작 경암동에서 금강에 합류되는 ‘경포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이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대려마을 앞에서 잠시 차도로 올라서기도 하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농로로 내려서버린다. 그 길의 양옆으로 옥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평선으로 대변되던 김제들녘, 그 ‘징게 맹게 외배미들’ 만큼은 아니어도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눈이 모자라 다 볼 수 없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 평야지대에서 수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래선지 농로 옆에는 수로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다. 수로의 크기가 조금씩 다를 뿐...
▼ 이름도 생소한 ‘송엽국(松葉菊)’이란다. 솔잎 모양의 입에 꽃은 국화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꽃말은 나태 또는 태만. 연분홍(자주색과 흰색도 있다)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꽃이 너무 아름다워 꽃에 푹 빠져서 나태해진다나?
▼ 그제가 ‘망종(芒種)’ 수확한 보리가 밥상에 올라오고 보리를 베어낸 논에 모내기를 한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들녘은 이미 모내기가 끝나간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 ‘부지깽이도 나와서 돕는다’라는 속담까지 오가는 농번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니 지금이야 기계가 다 해주니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 이맘때는 들판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댔다. 어린 모를 찌고 모심기를 시작하면 한 손에 막걸리 주전자를, 머리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못밥을 이고 오던 우리네 어머니도 있었다. 이젠 그런 정다운 풍경들이 사라졌지만, 올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해 본다.
▼ 13 : 37. 길고도 길었던 농로는 ‘백서마을’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는다. 법정 동리인 당북리(堂北里)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부락(원당·백석·한림·석교·건니법·동숙·뒤미티·들랑뒤·새터·서숙·서원뜸·옥석) 중 하나다. 참! 걷다가 마주치는 상황, 즉 방향을 꺾는다던지, 옥구선 철도의 아래를 지난다던지 등 너절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 구간은 앱을 보거나, 서해랑길의 리본을 찾아가며 걷는 게 최상이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백석로’를 따라간다. 2차선에다 심심찮게 차량이 오가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 13 : 46. 국도 21호선(새만금북로)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면 ‘원당마을’이다. 당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에 불과하지만 역사는 모체인 ‘당북리’보다 더 오래됐다. ‘당북(堂北)’이란 지명이 ‘원당(元堂)’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 13 : 51. 당북초등학교.
▼ 13 : 58. 잠시 후 지곡동 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1.8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의사의 권유를 핑계 삼아 거리를 단축했고, 그로 인해 생긴 여유시간을 ‘느림의 미학’으로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보다 40분이나 먼저 도착했지만...
▼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삶은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항상 선택이 수반된다.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오늘 우리 부부가 함께 걸었던 여정도 그런 결정 중 하나였다. 그 여정에 배려와 사랑이 넘쳤기에 훗날 인생을 복기할 때 아름다운 추억만 새록새록 돋아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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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