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궁에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54명의 철학자가 등장하는 ‘철학’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② 인간의 오랜 삶의 형식 ‘토론’
토론의 場이 애초에 불공정하다면 만장일치로 낸 잘못된 결론도 ‘진리’가 될까
말은 스스로를 타인의 심판대 앞에 세워 … 결국 성격·태도·교양 판정받고 비판 감수해야
아이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엄마에게 달려가듯, 어른들은 토론이나 대화에 호소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즉 ‘말을 하는 동물’이기에 말로밖에는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우리는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
이상적 합의라는 원대한 꿈을 갖고 회의는 시작되지만, 의견들은 꿰맨 누더기처럼 볼품없이 봉합되기 일쑤다. 내 마음에 드는 추리닝 입고, 네 마음에 드는 넥타이 매는 식으로.
수업에서도 학회에서도 열심히 토론하지만, 토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참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토론하고, 모두 동의하는 합의에 도달했다고 해보자. 이 합의된 것이 진리인가?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로 합의했지만 전원이 그르게 생각했다면 어쩔 것인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진리이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토론자들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좌초하는 일이 흔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토론은 고대 그리스 이래 역사를 통해 인간이 오래도록 시험해본 삶의 형식이다. 들뢰즈는 말한다. “그리스는 반도의 각 지점이 바다와 인접해 있고 해안들의 길이가 상당해서, 일종의 분열 가능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정임 외 역) 분열 가능하다는 것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언제든 바다로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분열 가능성은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주변 제국에 흡수되지 않고서, 제국의 벽에 붙어 제국의 문물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줬다. 도시국가들은 “동방의 경계에 접해 있는 일종의 국제적 장터”처럼 제국의 문물을 유통했다.
장터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계산이다. 장터에서의 계산이란 동등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의 경쟁이다. 이성의 계산, 이성의 말하는 기술을 가지고 이익에 보다 더 가까이 가려고 경쟁하는 이들이 장터의 사람들이다. 이런 경쟁은 ‘철학’이라는 그리스인들 특유의 사유 역시 만들어냈다. 철학도 장터의 거래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철학자들이란 너도 가지고 있고 나도 가지고 있는 이성의 능력으로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동등하지 않고 남보다 탁월한 혈통을 타고난 제왕의 말은 명령이다. 독점적으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제국의 제사장은, 진리를 백성들에게 무조건 전달하지, 진리의 근거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반면 철학자는 특권적으로 진리를 독점하는 자가 아니라, 동등한 이성을 지닌 자들의 공동체에 속하는 자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진리에 잘 접근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선 타인의 이성과 경쟁해야 한다. 우리는 저 동등한 이성을 지닌 자들의 공동체를 ‘평등’의 공동체라 부르고 그들이 서로 경쟁하는 방식을 ‘토론’이라 한다. 이 평등과 토론은 곧 의회 민주주의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철학’과 ‘민주주의’가 평등한 이성과 그들의 교류 수단인 대화를 통해 동시에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여전히 맞는 것일까? 과연 토론은 이성적 삶의 요람인가? 사실 소통에는 늘 악마가 끼어든다.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은 세계 대전을 향해 전진해 가는 유럽 정신을 해부하고 있는 작품인데, 서로 양극단에 위치하는 유럽의 두 지성,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화려한 토론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느 날 대화에 끼어들어 이들의 이성적인 논쟁을 잠재워버리는 페페코른이라는 이가 등장한다. 그는 조리 있는 말이라곤 한마디도 못하지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아주 의미심장하고, 표정과 몸짓이 힘차고, 박력이 있고, 인상적이어서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스 카스트로프도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을 의식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곽복록 역) 그가 하는 말은 빈말에 지나지 않지만, 현혹적으로 토론을 장악한다.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감성을 교란시키는 방식 속에서 토론자들은 마취된다. 그를 보면 히틀러 같은 악마적인 정치가의 말하기가 어른거리는 것 같다.
이렇게 기만하는 토론자만 끼어드는 게 아니다. 토론에서 사람들은 공정성을 기대하지만, 토론의 장 자체가 애초에 공정치 못하다면 어떨까? 리오타르는 말한다. “잘못은, 우리가 판단의 준거로 삼는 어떤 장르의 담론 규칙들이, 판단되는 담론들의 장르 또는 장르들의 규칙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진태원 역) 즉, 우리는 토론의 규칙이 토론자나 토론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부과돼 있는 다양한 경우와 마주한다. 간단한 예를 만들어 보자. 먹을 것을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받을 것인지, 반대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받을 것인지를 원숭이들에게 토론하라고 한다면, 음식의 수 자체를 늘리는 문제는 아예 토론의 장으로 끼어들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규칙 아래 논의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는 동물인 우리는 토론이라는 삶을, 즉 의회 민주주의적인 삶을 숙명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토론의 본성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말을 하는 동물이긴 하지만, 과연 공통의 이성을 지녔는가?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 구성원들이 이성일 따름인 사회는 사회로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전적으로 이성적인 한 존재가 전적으로 이성적인 다른 존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성은 여럿이 아닌데, 어떻게 무수한 이성이 구별되겠는가?” (김도형 외 역) 우리가 타인과 소통을 시도한다는 것은 그 타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숲속의 나뭇잎들이 서로 같지 않은 것처럼 서로 형제가 아니다.” (플로베르) 그러나 이성은 보편적인 것이다. 인간들이 이성적이라면 이미 그들은 보편성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보편적 이성은 이미 보편적이므로 이해관계의 차이를 좁히기 위한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성의 존재 자체가 독특성을 단념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성이 나 또는 타자일 수 있겠는가?” 이성은 하나이므로 이성의 대화란 불가능하다. 공통의 이성이 아니라, 취향과 욕구 등 감성과 신체의 삶에서 차이를 지닌 자들만이 나와 타자라는 이질적인 다수를 만들어내고, 다수만이 대화라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통의 장을 이성적 규범 위에 세워보려는 노력 역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소통에는 이성의 규범을 포함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어떤 규칙도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천부적으로 받은 권리, 즉 자기 이익을 취하고 자기 삶을 지키는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회 안에서도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고 말한다. 그 수단에는 ‘거짓말’도 속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기만, 간청 등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얻으려 한다. (‘신학정치론’) 그리고 기만, 거짓말은 규칙의 파괴에서 탄생하는 것이므로 거짓말의 규칙이란 있을 수조차 없다. 참된 것을 거짓 없이 전하는 선의지가 지배하는 곳이 토론이 아니라, 거짓말조차 동원될 수 있는 무서운 세계가 현실적인 토론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는가?
토론이 보편적 이성을 전제하지 않으며, 토론의 장에 규범이 있을 수 없는데도 토론이 필요할까? 오히려 토론은 가짜 규범을 깨트리는 싸움의 장으로서 환영받아야 할 것이다. 랑시에르는 말한다.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표시하는 목소리만을 가진 데 반해 인간은 정의와 불의를 공동으로 다루는 말을 소유하고 있다. 모든 문제는 결국 누가 말을 소유하며 누가 목소리만을 소유하는지 아는 것이다.” (주형일 역) 말을 소유한 사람만이 토론장에 들어가 정의와 불의를 논할 권리를 지닌다. 나머지는 동물처럼 소리만을 소유한 채 토론장 입장 자체가 거부된다. 노예는 말이 아닌 목소리만을 지녔기에 그리스 민주주의는 노예가 토론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거부했다. 여성 역시 소리를 내는 자에 불과했기에 오랫동안 ‘참정권을 통해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무시돼왔다. 결국 토론의 역사란 자신의 말이 그냥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아니라, 권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인정받기 위한 싸움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토론에서의 관건은 이미 주어진 규칙을 따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불공정한 장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규칙이 오히려 토론하려는 자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판에 부치면서, 자신의 말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러면 토론에는 말을 제재할 규범이 아예 없는 걸까? 만일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말하기 자체에 내재하리라. 우리는 모두 말하기를 두려워하는데, 말이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단 한마디의 말로도 말하는 자의 성격과 태도와 교양의 정도 등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말은 말하는 자의 모든 정보를 내준다. 어디에다 내주는가? 바로 타인의 심판대 앞에 내준다.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타인의 심판대 앞에 세운다는 뜻이다. 말한 내용은 판정을 받고 비판을 받으며 책임의 대상이 된다. 토론에 뛰어든다는 것, 타인에게 대답(respond)할 수 있다는 것(ability)은 곧 내뱉은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는 것(responsibility)을 뜻한다. 말하기 자체가 말 스스로를 위한 규범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마의 산’: 독일 작가 토마스 만(1875~1955)이 1924년에 발표한 소설로 ‘사회적 휴머니즘’이라는 토마스 만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폐렴 증세로 스위스 다보스 요양원에 치료 중이던 아내를 문병하러 간 3주 정도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 그 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집필 기간이 12년이나 걸렸고, 소설은 갖가지 생각들로 가득한 방대한 장편소설로 나아갔다. 10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의 주제는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소설 속 문장에 요약돼 있다. 작가는 이 문장만을 이탤릭체로 표기했을 정도로, 그 어떤 가혹한 현실 앞에서도 이상을 저버리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첫댓글 토론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합리적인 사고 입니다.독재나
강제적인 복종은 언젠가 토른에 의해 무너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