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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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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탐사기획 스크랩 관룡사 觀龍寺
裕耕 박노철 추천 0 조회 33 11.04.15 06: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관룡사 觀龍寺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구룡산九龍山 중턱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찰로서,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사기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볼 관觀, 용 용龍>의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한다.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년(광해군 9) 영운靈雲이 재건했다.

1704년(숙종 30) 가을 대홍수로 금당이 유실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대웅전과 다른 당우들을 재건했다.

1749년 다시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대웅전, 약사전,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약사전석불좌상,  3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용선대 부처님은 한 가지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약사여래 부처님은 질병을 낫게 해 준다고 하여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출입문

관룡사의 일주문 역할을 대신하는 돌로 쌓아올린 작은 돌문.

돌을 쌓아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만들었다.

돌계단과 잘 어울린다.

사람 하나가 허리를 구부린 채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다.

누구라도 이곳을 지날 때는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 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


# 일주문

새로 생긴 일주문.

처마 아래에는 <火旺山觀龍寺> , 관룡사를 품고 있는 관룡산이 화왕산 줄기라서 인가 보다.

 

 

#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212호

관룡사 안에 있는 조선시대 목조건물.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다포多包계통의 건물로

정면 중앙 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준다.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高柱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다.

내외이출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제일 앞부분만 보아지의 형태로 변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네 개의 기둥이 처마쪽에 서 있다.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 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보아지 :

공포?包를 구성하는 부재 가운데 대들보와 종보를 떠받치는 받침으로, 양봉樑奉이라고도 한다.

건물을 가구架構할 때 기둥과 보는 항상 직각으로 만나므로 그 직각 되는 부분에 끼워 보나 기둥의 변형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화반花盤이나 동자주童子柱에 짜여 종보를 받거나 기둥·두공頭工·공포에 짜여 대들보를 받거나 하는데,

공포에 짜일 때에는 살미가 발달하여 보아지가 되는 경우도 있다.

종보를 받는 보아지는 따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보 배바닥 쪽은 당초무늬를 초각草刻한 형태이며, 보머리 쪽은 직절直絶하거나 간단한 형상이 되도록 의장意匠하는 것이 보통이다.

공포가 없는 건물일 경우에는 보통 간략하게 직각으로 잘라 끼운다.


@ 대웅전 수월관음도


# 원음각 圓音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인조 12년(1634)에 건립된 사원의 누각건물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대웅전 앞마당과 높이가 같아 마당에서 출입하기가 용이하다.

?도는 불구佛具를 보관하거나 설법장소로 쓰이고 있다.

예전에는 누각 아래 중앙칸을 통해 대웅전 마당으로 출입하였으나,

지금은 아래 기둥 사이 벽으로 막아 스민들의 공부방으로 쓰고 있다.


# 약사전藥師殿 : 제146호

관룡사에 있는 조선시대 목조건물.

 

앞면 1칸, 옆면 1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이고, 그 사이에는 구조물이 생략되어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이 건물의 특색은 집채와 지붕의 구성비례에 있는데, 기둥 사이의 간격에 비해 지붕의 폭이 약 2배나 된다.

이러한 예는 거의 없으며 곧고 단정한 외목도리外目道里들이 뻗어 나오면서 큰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당초무늬가 새겨진 창방의 뺄목이 소로를 받아 외목도리의 행공첨차를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의 구성은 15세기 건축기법에서 보이는 것이므로 15세기경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천장은 연등이고 바닥은 맨바닥으로 민무늬의 네모난 전을 깔았다.

단칸 법당 안에는 석조불좌상이 있으며 좌우 벽체에 벽화를 그려 장식했다.

약사전 앞마당에는 큼직한 대좌 위에 3층석탑이 있다.


@ 약사전석불좌상 : 보물 제519호

관룡사 약사전에 봉안된 고려시대 석조불좌상. 상높이 110cm. 대좌높이는 약 86cm이다.

삼단의 8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 위에 앉은 좌상으로 광배는 전하지 않는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편안히 내려놓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무엇인가를 받쳐 든 듯한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얼굴과 몸에 부드러운 양감표현이 두드러지며 옷주름의 표현도 유연하다.

둥근 얼굴에 반쯤 든 눈, 낮은 콧등, 작고 꼭 다문 입은 다소 어색하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짧은 목의 삼도三道는 가슴에도 새겨졌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이목구비가 얼굴 가운데에 몰려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 전기의 불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목에는 굵은 2줄의 선이 있으며, 목이 밭아 전체적으로 약간 위축된 느낌을 준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가 보인다.

법의法衣의 겹쳐진 부분은 선각線刻으로만 표현되어,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좌는 연꽃잎을 거북 등처럼 새긴 상좌, 팔각형의 중좌, 두 겹의 연꽃잎을 깐 사각형의 하좌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불상의 크기에 비해 높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8각연화대좌가 불상에 비해 폭이 좁아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단순한 형태의 연꽃이 저부조로 묘사되어 생략적인 의장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조각양식상 고려초 불상들과의 연관도 보이지만

실제 수인手印의 표현이 불분명하다든가 또는 생략적인 대좌의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팔각형의 중좌에는 4행의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772년(혜공왕8)에 대좌를 조서했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 남아 있는 대좌와 불상의 조성시기는 각각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 약사전 내부의 화조도花鳥圖...

 

 

@ 약사전앞 삼층석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약사전 앞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특히 아래받침대의 네 면에는 코끼리의 두 눈을 형상화한 안상眼象을 각각 두 개씩 조각하였는데,

이는 석탑의 장식적인 기능을 강조했던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석탑 표현 양식이다.

또한 사각형의 바탕돌은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석탑의 가장 밑바탕을 마련하는 것 역시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위 받침 각 면 모서리에는 모서리기둥[우주隅柱]을 새기고, 중앙에는 받침기둥[탱주撑柱]을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1층의 몸체돌과 그 위층의 몸체의 크기가 너무 현격한 차이를 보여 체감율과 조화미를 잃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주로 표현되던 5단의 지붕돌받침은 3단으로 줄어들었고, 지붕돌 역시 두툼하며 처마끝의 치켜올림이 약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신라석탑의 변형과정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크기가 축소되고 각 부분의 기법이 간략화 된 것으로 보아, 이 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범종루

@ 법고

 

 

@ 범종루 내의 가마모양

                      - 특이하게도 범종류에 가마모양의 탈 것이 놓여있다.

                      - 용도 : 생전예수제를 행할 때의 의식의 한 가지로,

                                  이 가마에 타고 절을 세 번을 돈다고 한다.

 

                      @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 란!

                               말 그대로 생전에 미리 수행과 공덕을 닦아두는 재齋를 뜻한다.

                               일명 예수십왕생칠재豫修十王生七齋라고도 하며 간략하게 예수재豫修齋라 일컫기도 한다.

                        생전예수제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성행하여 오늘날까지도 불자들의 여러 가지 복덕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행사이지만,

                        예수제의 참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생은 스스로 수행하여 그 공덕을 받는 게 기본이며, 불교는 스스로 노력하여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이, 그 어떤 도움도 없이 홀로 가는 길은 결코 아니고,  불보살의 보이지 않는 힘이 언제나 우리를 든든히 받쳐준다.

                        생전예수제는 이러한 불교 수행의 근본 성격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무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교만과 죄업에 대한 뼈저린 참회로,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업장을 소멸하고, 지계와 보시로써 스스로 내생의 복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가 자신의 사후 복락을 위해 행하는,

                        즉 죽음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함으로써 살아서의 행복과 죽어서의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생전예수재는 재가자가 현실에서 오염되지 않고 선업 공덕을 쌓아 나가는 중요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뒤에도 천도제를 다른 사람이 지내주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로 생전예수제이다.

                        제 스스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생전에 천도제를 미리 지내는 것이다.

                        49일간 중음계中陰界를 떠도는 고통을 면하게 한다는 뜻에서 예수재는 49일간 이뤄진다.


                        금강경을 베껴 쓰는 사경을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강경을 독경도 한다.

                        독경하면서 금강경을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이라도 이웃에게 전한다.

                        금강경이 아니라도, 알기 쉬운 한글 법구경도 좋고, 수타니파타도 좋다.

                        사경한 것을 모아 사경대寫經臺에 모셔둔다. 우란분재일에는 재 의식을 마치고 사경한 것을 함께 불사른다.

                        우란분재일은 음력은 7월15일로,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아서 고통을 받고 있던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위해 생긴 날이다.

                        선망부모 천도제와 자기 생전예수재를 모신다.

                                                                                                        - 출처 : [불교신문 2535호/장흥 보림사 지묵 스님카페]에서 발췌


# 당간지주


# 나무구유

 


# 부도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관룡사에는 모두 7기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그 중 화왕산으로 오르는 길옆의 부도가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이 부도는 탑신에 비하여 지대석이 비교적 넓은 편이며, 3층 기단부로 받쳐져 있다.

그 중 하대석은 중심부의 방형 석괴와 장대석을 조립하여 만들었고, 한 돌로 다듬어 만든 중대석은 사방으로 연판蓮瓣 처리하였다.

상대석에는 앙연仰蓮을 이중으로 배치하였다.

구형의 탑신은 소박하고, 지붕돌은 단조로운 편이며, 상륜부는 없어졌다.

높이 205m, 조성시기는 고려말 조선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 다른 부도 

 

 

# 관룡사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 : 보물 제295호

관룡사 근처의 용선대에 있는 불상높이 188cm, 대좌높이 136cm의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

부처님이 관룡사를 향해 정좌해 있다.  (아래 사진은 동료가 망원렌즈로 찍은 것....)

 

얼굴이며 몸 전체에 흰 이끼가 많이 끼었다.

용선대 불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산 정상 쪽으로 20여m 위쪽에 바위에 올라야 한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으로 광배는 없어졌다.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좌상과 달리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상이다.  

나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가 있으며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다.

양감이 적당히 표현된 각이 진 얼굴은 단정한 인상을 준다.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썹과 눈, 오똑한 코의 표현 등 신라불상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불신佛身은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어깨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가 경직되게 표현되어 석굴암 본존상에서 보이던 당당함이 많이 감소되었다.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평행한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조성시기가 다소 내려감을 알 수 있다.

대좌는 3단으로 반구형半球形의 상대上臺에는 연꽃잎 안에 꽃무늬[花紋]가 있는 중판 연꽃무늬가 앙련仰蓮으로 새겨져 있다.

중대中臺는 8각이고, 하대下臺는 4각형의 받침 위에 복련覆蓮의 중판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후반 대좌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9세기로 추정된다.


@ 용선대龍船臺

반야용선般若龍船과 관련된 용어일까...?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용이 이끄는 배 반야용선.

온갖 번뇌를 떨치고 용이 이끄는 배를 타기 위해 가파른 길을 올라야만 한다.

* 용선대의 불상을 두고 이곳 토박이들은 [팥죽부처]라고 부른다.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며 동짓달이면 소원을 빌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는다.

 * 용선대 석불을 제대로 둘러보는 방법 :

관룡사 뒤편 병풍바위 쪽을 올라보는 것이다.

이곳은 전문산악인들이 암벽등반 교육을 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을 만큼 산세가 험하다.

그러나 관룡사 뒤쪽의 암자인 청룡암에 오르면 병풍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칠성각  : 

칠성각과 내부의 탱화

 

 

 

 

# 응진전과 산신각 : 

        그리고 응진전 내부의 모습...

 

 

 

# 돌장승 石長丞 : 경남도민속자료 제6호

절에 이르기 전에 왕방울 눈과 주먹코가 제주도 돌하루방을 닮은 듯 한 돌장승 한 쌍이 있다.

 

이 관룡사 돌장승은 한 쌍으로 조성되어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왼쪽이 남장승이고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장승은 상투와 같은 둥근 머리와 특 튀어 나온 왕방울 눈, 주먹 코 등이 투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두 장승은 모두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위상에 걸맞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간 예술이 갖는 소박함과 친밀함  잘 드러나 있다.

 

 

 

이 장승은 사찰 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식이외에도

사찰 토지 안에서의 사냥과 어로를 금지하는 호법護法, 절의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수호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을 보충해주는 비보裨補 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이 돌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관계를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장승에는 돌로 만든 돌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다.

장승의 기원은 고대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왔다거나 사찰 토지의 표식으로 이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장승을 지방에 따라 벅수, 법수, 당산할배 등으로도 불렀다.

장승은 소속과 위치에 따라 마을을 지키는 마을장승,

사찰의 입구나 사방 경계에 세워진 사찰장승,

지역간의 경계, 성문城門, 병영兵營, 해창海倉, 관로官路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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