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흩뿌리는 1999년 9월 어느 날 이른 아침, 트롤 어선 로리종호의 선장 장-클로드 비앙코는 프랑스 마르세유 근처 지중해의 파도 치는 바다에 그물을 내렸다. 그는 동쪽으로 넓은 타원을 그리며 배를 앞으로 전진시키다 다시 리우섬 쪽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그물이 100m 아래 바다 바닥에 드리워져 그 안에 물고기와 그밖의 것들을 가두었다. 선원들은 윈치로 그물을 감아 올리면서 잡힌 물고기들을 분류하고 걸려 올라온 쓰레기들은 뱃전 너머로 집어던졌다.
1등항해사 하비드 베나머가 석회화된 거무스레한 침전물 덩어리를 바다로 던지려는 순간 무언가가 은빛으로 반짝 빛났다. 의아하게 생각한 그는 해머로 그 침전물의 덮개를 깨부수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신원이 적힌 팔찌가 나왔다. 팔찌는 긁히고 시커멓게 변해 있었지만 한쪽 가장자리는 아직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베나머는 자기가 발견한 것을 선장에게 보여주었다. 비앙코가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팔찌를 문질렀다. 대문자로 ANTOINE DE SAINT-EXUPERY(앙트완 드 생텍쥐베리)와 그 옆에 CONSUELO(콩쉬엘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비앙코는 로리종호의 그물이 20세기 문학의 가장 큰 수수께끼(불후의 명작 <어린 왕자>의 작가 앙트완 드 생텍쥐베리가 반세기 전에 실종된 사건)를 푸는 열쇠를 건져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족인 생텍쥐베리는 20세기와 함께 태어났다. 그는 12살 때 리옹 근처에 있는 앙베리외의 작은 시골비행장에서 조종사에게 털털거리고 삐걱거리는 작은 비행기에 태워달라고 졸랐고, 그후 평생 그 비행의 기쁨을 잊지 못했다. 21세에 비행 사관생도가 된 그는 26세에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라에로포스탈’에 배치되었다. ‘라에로포스탈’은 당시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모로코와 세네갈에 있는 두 도시 카사블랑카와 다카르 사이의 새로 생긴 항공우편 서비스였다.
일년도 안되어 그는 모로코 남부 사막 카프쥐비에 있던 중간기착지 겸 급유지의 책임자로 배치되었다. 이 중간기착지를 운영하며 우편비행을 하고 추락한 조종사들을 찾으려고 사막을 수색하면서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스릴 있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모로코에서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생텍쥐베리는 그의 첫 번째 소설인 <남방우편기>와 <야간비행>을 써냈고 그로 인해 유명인사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무렵 생텍쥐베리는 추락사고로 입원해 있었다. 그는 전투비행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당시 39세) 전투에 참가하겠다고 고집했고, 결국 프랑스 공군의 2/33 정찰비행단에서 위험한 사진촬영 임무를 맡게 되었다. 프랑스가 패전하자 그는 미국으로 가서 <어린 왕자>를 쓰고 이 소설의 수채화 삽화를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환상적인 소설은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25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문학사상 손꼽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발하고 매혹적인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자전적이다. 장미는 그와 관계가 평탄치 않았던 그의 아내 콩쉬엘로이며 끝없이 외부세계를 탐험하는 왕자는 자기 자신이다.
1943년 생텍쥐베리는 북아프리카에서 전에 복무했던 프랑스 공군의 2/33 정찰비행단에 복귀한 다음 코르시카의 새 기지로 이동했다. 44세였던 생텍쥐베리는 부대의 주력기인 초현대식 항공기 록히드 P-38(성능에 걸맞게 ‘번개’라는 이름이 붙은 쌍발기)을 타기에는 너무 늙고 몸집이 크고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명성과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서 적어도 5회 출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
두 번째 출격에서 돌아와 착륙하던 그는 활주로에서 벗어나 기체에 심한 손상을 입혔다. 이로 인해 그는 출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당시 생텍쥐베리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다. 아내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돈에도 쪼들렸으며 비행금지 조치로 우울해고 수치심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 항전 지도자인 샤를 드골의 지지자들은 그가 런던의 망명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심하게 비난했다.
이 베테랑 비행사는 자살충동을 암시하기도 했다.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고 동료 조종사들에게 점쟁이들이 자기는 바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서 그는 다시 비행요원으로 복귀했다. 1944년 7월 31일 월요일, 그는 최신 모델인 P-38 F-5B를 타고 스위스 국경 근처인 프랑스 동부지방의 지도를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러 코르시카의 포레타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가 실종된 후 60여 년 동안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작가 생텍쥐베리는 서서히 자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 외롭고 용감한 조종사로 미화되어갔다. 1993년 프랑스 국립은행은 그의 초상을 넣은 50프랑짜리 지폐를 내놓았다. 옆에는 그가 그린 어린 왕자의 삽화가 들어 있다. 프랑스인들, 특히 그의 가족들은 그의 실종을 어린 왕자가 동화의 말미에서 한 몽상적인 말과 연관시키고 싶어했다. “네가 밤에 하늘을 쳐다보면 모든 별들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그건 내가 그중 한 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거야. 내가 그중 한 별에서 웃고 있기 때문일거야.”
팔찌를 발견한 그 다음날 아침, 비앙코는 마르세유에 있는 다이빙회사 사장인 앙리제르멩 드로즈에게 그 팔찌를 가지고 갔다. 해저에 가라앉은 파편을 찾아 조사하는 전문가인 드로즈는 생텍쥐베리가 탔던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탐사선 미니벡스호를 타고 로라종호가 그물을 내렸던 해역으로 가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장비(수중음파탐지기, 케이블로 유도되는 로봇, 2인용 미니잠수함)를 가지고 수색을 시작했다. 100㎢ 이상의 해저를 뒤지는 수색은 2주일 동안 계속되었지만 비행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곧 소문이 퍼졌고 10월말 마르세유의 일간지 [라 프로방스]의 에르베 보드와 기자가 생텍쥐베리의 팔찌 발견에 대해 쓴 기사가 일면에 실렸다.
하지만 비행기는 어디 있는 것일까? 이 시점에 뤽 방렐이 등장했다. 마르세유에 다이빙 가게와 잠수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전문 잠수부인 그는 리우섬 부근에서 이상한 금속 잔해가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사진을 더 찍었다. 이번에는 그 사진들을 미국에 있는 미공군 재향군인단체들에 이메일로 보냈다. 제 367전투비행단의 P-38 조종사였던 잭 커티스가 그 사진을 받아보게 되었다. “커티스는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요. ‘우리에게 얘기의 결말을 꼭 알려줘야 해요.’라고 그는 말했지요.”
커티스의 격려에 힘을 얻은 방렐은 그후 2년 동안 P-38에 관련된 기술문헌들을 참고해 가며 파편이 널려 있는 곳으로 계속 잠수해서 녹슬고 조가비로 덮인 잔해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더디고 춥고 정교한 작업이었다. 항공기는 충격에 의해 폭발한 것이 분명했고 따라서 파편들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2005년 5월 그는 마르세유에 있는 문화부 수중유물관리국인 DRASSM에 자기가 발견한 것을 정식으로 신고했다. 이튿날 그는 비앙코와 드로즈를 만나서 그들에게 자기가 알아낸 비밀을 귀띔해주었다. 즉 자기가 찾아낸 모든 파편들이 P-38 F-5B의 부속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 기종의 비행기 4대가 추락했으며 그중 3대는 이미 잔해가 확인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이 파편들은 생텍쥐베리의 항공기 파편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가설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파편들을 육지로 끌어내 거기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련번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저에서 인공물을 건져올리는 것은 불법행위였다. 아마추어 잠수부들이 오래된 유물들이 건져올려 팔아먹는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갖게 된 프랑스는 나라의 고고학적 유산을 보호하는 엄격한 법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 모든 수색작업에 줄곧 반대해왔지요. 생텍쥐베리가 어린 왕자처럼 사라져버려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신성한 신화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라 프로방스]의 보드와 기자의 말이다.
DRASSM이 공식적인 확인작업에 동의하기까지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003년 9월, 드로즈는 다시 미니벡스호를 몰고 리우섬 근처로 갔고 방렐의 안내를 받아가며 랜딩기어와 과급기, 항공기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알루미늄 조각, 그리고 수압장치와 전기장치 부품 몇 개를 건져올렸다. 수차례 그곳을 더 찾은 끝에 그들은 항공기의 10% 가량을 건져냈다.
아마추어 역사가이며 잠수부, 그리고 2차대전중 추락한 항공기 잔해를 찾아내 확인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클럽인 아에로-레 LIC의 회장 필립 카스텔라노가 초빙되어 확인작업을 담당했다. “록히드사는 각 항공기에 4자리로 된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그 번호를 항공기의 몇 군데 부위에 찍었지요. 아마 추락해도 남을 가능성이 큰 곳에 찍었을겁니다. 내가 찾는 숫자는 2734였습니다.” 카스텔라노의 말이다.
그의 팀은 빌린 격납고의 콘크리트 바닥에 놓인 부서진 금속조각들 위로 허리를 굽힌 채 파편 하나하나를 참을성 있게 관찰했다. 엔진 과급기 덮개를 보자 카스텔라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거기 그 숫자가 있었던 것이다. 밑바닥 왼편에 해머와 금형을 이용해서 강철에 찍은 2734라는 숫자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생텍쥐베리는 리우섬에서 1km 쯤 떨어진 지중해에 추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독일 전투기에 의해 격추당했을지도 모르고 엔진이 고장났을지도 모르며 산소공급장치가 문제를 일으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독일 공군 기록에는 1944년 7월 31일에 P-38기를 격추시켰다는 주장이 나타나 있지 않다. 또 발견된 파편에도 탄환구멍이 나 있지 않다. 또한 P-38기는 엔진 하나만 온전해도 비행을 계속할 수 있는 기종이었다. 산소공급장치에 이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신빙성이 희박하다. 생텍쥐베리가 낮은 고도로 내려왔을 때는 숨쉴 공기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그리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니벡스호가 건져올린 파편들에 나타난 충격과 과급기 밸브의 위치를 보면 생텍쥐베리는 마지막 순간에 엔진을 풀가동한 채 거의 수직강하하는 비행을 했던 듯하다. 그것은 생텍쥐베리가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생텍쥐베리가 실종된 날로부터 꼭 60년이 지난 2004년 7월 31일, 선장 하비브 베나모가 모는 트롤어선 칼리파호가 리우섬에서 1km 떨어진 곳에 정박했다. 방렐과 드로즈, 카스텔라노, 비앙코, 보드와, 그리고 6년여에 걸친 수색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신부가 몇 마디 했고 <어린 왕자>를 비롯한 생텍쥐베리의 책들의 일부가 낭독된 다음 꽃다발이 바다에 던져졌다.
그가 펜으로 창조해낸 마법에 매혹된 전세계 생텍쥐베리의 팬들은 어린 왕자의 예언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넌 가슴 아파 하겠지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테니까.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