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곳에 있는 일곱 여덟의 초가집에서 안식교인들이 생식을 하면서 기도원을 지을
것이라는 기대에 터까지 닦아놓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원 뒤에는 단군성전을 지어놓고 백공선사와 제자들이라 칭하는 이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도량에 맑은 기운이 있는데다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절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안식교인과 단군성전이 미리 땅을 매입하고 교회 터를 닦
아놓고 기도를 하고 있는 실정이라 절을 창건(創建)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마을에서 이장을 지내던 김경환이라는 안식교인이 스스로 자기
집을 사줄 것을 요청해왔고 통점마을의 집을 매입함으로써 통점부락 절 골에 작은 움막집
을 마련할 수 가 있었다.
여여정사가 창건도량(創建道場)으로서 불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89년 범어사 금강암
에서 기도를 하던 정여 스님이 관음기도 중에 우연히 꿈속에서 서기가 어린 맑은 도량을
보고는 그곳에 절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같은 꿈을 거듭 꾸고는 우연히 삼랑진 땅고개에 있는 선주원이라는 양로원 위문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꿈속에서 본 도량을 발견하게 되어 마음에 감화를 받고 이곳에 절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대웅전 건립 발원을 하고 터를 닦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도
본 도량을 발견하게 되어 마음에 감화(感化)를 받고 이 곳에 절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대웅전 건립 발원을 하고 터를 닦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도 신도님과 함께 장비로 터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이 솟구쳐 오르고
솟구치는 물 속에 거북과 자라가 수없이 나오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일을 하는 인부가 터를 닦는 곳에서 물줄기가 터져 나와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대웅전 건립을 잠시 중단하고 물이 터져 나오고 거북과 자라가 쏟아져 나온 곳
에 약사전과 용왕단(龍王壇)을 건립하게 된것이다.
630M 높이의 시원한 청청수랍니다.
약사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자연동굴법당-
연꽃에 소원을 담아 띄워봅니다.
이런 까닭으로 약사전을 먼저 건립한 다음에 대웅전 불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웅전은 150평.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건립, 1층은 요사채로, 지하를 공양간으로
두었다. 법당을 크게 짓게 된 이유는 당시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회장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어린이들이 부담없이 법회나 수련대회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법당규모가 크기 때문에 삼여래 사대보살을 모셨다. 법당 안에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세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게
된 것이다.
여여정사 약사여래부처님
법당 뒤편에는 철근골조로 약 108평 규모의 약사전을 건립하고 약사여래불을 모셨는데,
중국과 미얀마에서 조성해서 여여정사로 모시도록 준비한 뒤 대웅전 법당 봉불식과 함께
봉행 하였다.
약사전에는 금정석재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황정 화강암 약사여래불을 중앙에 모셨는데
크기는 경주 석굴암부처님 규모이다. 경주 석굴암 부처님은 신도님들이 친견하고 싶어도
문화재이기 때문에 실제로 친견하지 못하고 밖에서만 참배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안타가움을 덜기 위해 신도님들의 염원을 담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크기
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좌우에는 거북석상 위에 감로병을 들고 계시는
관세음보살님 세분을 모셨다.
그리고 그 동안 여여정사에 인연이 있어 미리 모셨던 16나한과 마애삼존불상을 입구에 모셨다.
그리고 지장보살님의 석상을 모시고 물을 상징하여 용왕단을 두게 되었다.
첫댓글 으랏차차 천진한 동자승기합소리가 들리는 듯 하는 풍경이 정겹습니다.산의 모양이 두손으로 품은 모습 같네요. 잘 보았습니다.건강 하세요.
여여정사의 멋진곳 가보고 싶군요.사진과 더불어 좋은설명 감사 합니다.날씨가 무척 덥군요.건강 조심 하세요_()_
_()_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