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全鮮) 고보(高普) 대항 축구대회
1938년 6월에는 일본의 마이니치(每日)신문에서 주최하는 전선(全鮮) 고보(高普)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그 때 영생고보가 함흥대표로 뽑혀 서울에 축구원정을 갔다.
이 때 인솔교사가 바로 축구부를 담당했던 백석이었다.
이 때의 상황을 김희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숙소를 화신백화점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을지로 입구로 가는 도중에 있는 청계천의 삼화여관에서 머물고 있엇다. 그 곳에서 화신까지는 10여 분이 걸리는데
어느날 백석 선생은 최순화를 불렀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꽤나 멋을 한창 부리는 학생이었다. 백석 선생은 양말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좀 멋을 아는 학생을 골라 다녀오라고 했는데 최순화가 양말을 자기 나름대로 골라 사 오자 백석 선생은 자신의 마음에
안 들었던지 다른 것으로 바궈 오라고 다시 주문을 했다. 양말의 색깔과 줄무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면서……
최순화가 다시 가서 양말을 바궈 오자 또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며 이번에는 꼼꼼하게
색깔과 무늬를 지정해 주시면서 다시 다녀오게 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해도 마음에
안드시는지 다시 심부름을 시키자 최순화가 더 이상 심부름을 못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심부름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백석 선생님은 그 정도로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당시 축구시합에서는 배재고보와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배재고보 선수 중에 연령을 초과하는 부정학생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는 이를 항의하며 지적했다. 당시 일본신문에서 주최하는 축구경기에는 연령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항의를 하자 배재고보 학생들이 우리의 숙소인 삼화여관에 몰려와 싸움을 걸었다.
'나와라','고자질해서 나쁘다.' 그 때 축구부 주장을 한 내가 나가려고 하는데 백석 선생님은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사고가 나면 곤란하니 잠자코 있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나갔다. 맞으면 어떠냐 하는 심보로 나갔던 것인데 다행히 이야기는 잘 되어
불상사는 없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배재고보와의 경기에서 결국 우린 1 : 0 으로 졌다. 이 때 백석
선생님은 굉장히 서운해 하셨다."
자야는 이 때의 일을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에서 다름과 같이 기술했다.
『그 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보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 가량의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가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 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을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 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데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의 학생지도 합동단속반 교사에 적발이 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냐?" "함흥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어떻게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도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후론 다시 못 만난 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 하였고, 특히 고참 교사의 노여움은 대단했었다.』
이상과 같은 기록에 대해서 김희모는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즉 백석은 학생들과
거의 같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백석은 한 두 번의 잠자리외에는 학생들과 같이
있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또한 자야는 백석이 축구대회 이후 학교에서 미움을 받아 영생여고보에 전근갔다고 회고담이나 필자와의 대담에서 밝히고
있으나, 백석은 함흥의 영생여고보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이는 영생여고보 졸업생 수십명의 일치된 증언이었다.
☞ 시인 백석 일대기 2 - 남신의주 유동박시봉방 / 송준 / 도서출판지나 / PP.20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