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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유래 Gucci (구찌) 캔버스와 빨간색과 그린색 조화의 워브라인등을 발표하면서 19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 세가지는 명품이 지녀야할 필수 요소인 동시에'GUCCI'의 신화를 일으킨 원동력이기도 하다. 명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GUCCI'는 정통성을 기반으로 한 클래식한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의 일관성과 현대적 패션과 조화를 통해 'GUCCI'만의 스타일을통해 'GUCCI'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다. "최상의 전통을 최상의 품질로, 그리고 과거의 뛰어난 제품을 현대에 반영시킨 상품만들기"를 컨셉으로 한다.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고안한 자신의 이니셜을 모태로 한 더블G 의 모노그램은 매우 유명하다. 밀라노의'GUCCI'는 지금도 세계 트랜드의 센터이지만 구찌사는 지금 구찌가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태이다. 현재 구찌그룹 N.V.의 사장 겸 최고책임자는 'GUCCI' 재건의 입안자이기도한 도메니코 데 소레이다. 착각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남자이다.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에 의해 창업 되었다. 이후 자전거가 상류 사회에 보급되면서 핸드백과 같은 일반 가죽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부족한 가죽 제품을 대신해 만든 캔버스천 가방이 역사적인 디자인으로 자리잡으며 'GUCCI'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GUCCI' 제품은 'GUCCI' 만의 오리지널 컨셉트 속에서 명품의 품위를 지켜 나가고 있다. 최고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은 'GUCCI'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지키며, 세계 패션사에 아름다운 전통을 세우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짜넣은 캔버스를 사용한 제품이 'GUCCI'의 대표상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에 호스비트(horse bit : 말의 재갈을 두개 이은 모양의 금속구)를 붙인 스피폰 슈즈, 대략'GUCCI'의 로퍼를 가르킨다고 해도 무방하다. 모피 가게를 설립한 것이 펜디(Fendi) 브랜드의 시작이다. 아드레 카사그란디(adele casagrande)는 1925년도에 에도알도 펜디(edoardo fendi)와 결혼 을 한 후 상호를 펜디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사용해 오고 있다. 'FENDI'의 상점은 나날이 번창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되었고 점차 고급 제품으로 인식이 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되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되자 그둘 사이의 다섯 명의 딸인 paola, Anna, franca, carla, alda가 그들 부모님의 사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가죽제품등의 취급하기 시작하며, 1997년에는 '바케트'가 폭발적 히트상품이되지만, 가족의 불화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모던함을 강조하는 오토만(OTTOMAN)라인의 가방 및 소품들 100여 점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또한 모던하면서도 명품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유지해온 디자 인 컨셉은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 뛰어난 패션 마케팅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비싸고 뻣뻣하고 무거운 의류를 밝고 가볍고 입기 쉽게 바꾼 것이다. 가죽을 그슬리고 염색하고 처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으며 전에는 사용해본 일이 없는 가죽들을 패셔너블한 의류로 가공했다. 가죽제품에 대한 새로운 재 발견을 하게 했고, 새로운 제작기술을 시험하게 하였다. 가죽 이기기 제작법이나 안료를 쓰는 방법들이 시도되었고, 가죽이 제단되어 망사와 같이 만들어지거나 무늬를 새겨넣기도 하였다. 모피들을 프랑스의 Pallazzo ditti에게 가져갔다. 그곳에서는 외국 바이어들이 공식적으로 뉴 라인을 소개하였고,'FENDI'는 외국으로부터 받은 아이디어나 제안들을 소화하면서 새로운 외국시장 개척에 고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인해 FENDI는 미국 시장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가죽제품과 모피는 융화되어 졌으며,1977년 두번째 열리는 쁘레따 뽀르떼 컬렉션은 모피나 악세서리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이나 멋을 찾는 여성들에게 극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은 점차적으로 그들의 모피, 가방, 코트, 드레스에서 각각의 독특한 모양과 제작 기술을 나타내게 되었다. 블루밍데일의 대표인 Marvin Traub은 'FENDI'의 가죽 제품을 발견하고 이를 미국에 소개하였다. 이후에 FENDI의 여러 상점들이 생겨났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 5번가의 대형'FENDI' 부티끄가 생겼다. 낮은 가격의 환상적인 디자인의 모피를 선보였다. 이때까지 모피 안에 입을 옷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만의 기성복라인을 탄생시켰고 이 또한 큰 성공 을 거두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더욱 젊은 'FENDI'인 "Young"이 탄생하였으며 기타 향수나 라이센스등이 뒤를 따랐다. 페라가모 그가 구두를 처음으로 만든 계기는 여동생에게 구두를 직접 제작해 주면서 비롯됐다. 그의 나이 겨우 아홉 살 때 일어난 일이다. 나폴리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그가 단순한 구두 직공이 아닌 열정을 지닌 구두 예술가로의 자질을 부여해 주었다. 보니토의 한 작은 구두 점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이미 열한 살 때는 나폴리의 구두점 수련공으로 구두의 제작공정을 습득했다. 1911년,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여성 전용 맞춤 구두점을 오픈하였다. 'Ferragamo'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암울한 이탈리아를 떠나 돈을 많이 벌어 유명해져 고향으로 돌아오는 꿈을 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열 여섯 살 되던 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서부의 산타 바바라에 정착한 그는 형제들과 함께 영화 스튜디오(아메리칸 필름 컴퍼니) 옆에 작은 구두 가게를 열었다. 그의 구두는 당대 스타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며, 아메리칸 필름 컴퍼니의 성공과 더불어 그의 구두 사업도 날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메리칸 드림도 1929년에 닥친 경제 대공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Ferragamo'는 고국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 플로렌스(피렌체)에 정착한다. 의사의 딸인 완다와 결혼하였다. 'Ferragamo'가 생전에 창작한 구두 디자인은 1만 종류 이상이며, 코르크 통굽과 웨지 솔 등을 발명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새로운 신발을 연일 내놓았으며, 당시 국제적인 상류사회의 구두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1947년에는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니만 마커스'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창조성을 인정받았다. 최고의 품질과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그의 구두 사업은 산업 혁명을 통해 부를 쌓아온 미국 상류층의 욕구에 부합되어 날로 번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 소품으로 쓰일 수제화에 주력하면서 당대의 여배우인 오드리 헵번, 그레타 가르보, 소피아 로렌, 진 할로우, 로렌 바콜, 애바 가드너 등을 사로 잡았다.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영화 <칠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맛자락을 날린 마릴린 먼로의 섹시한 구두 역시 페라가모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페라가모 신발은 발바닥에 장심을 부착해 발바닥의 느낌을 좋게 하고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므로 뛰어난 착용감을 준다. 또한 페라가모 특유의 기술로 보행시 발이 앞으로 밀리는 현상을 방지한다. 그는 이러한 편안한 구두를 위해 UCLA대학에서 해부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공부하면서 발과 신발의 역학관계를 풀어냈으며 이러한 점을 반영하여 과학적인 신발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페라가모는 엄격한 품질 관리로 명성을 쌓아갔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공장도 기계 사용없이 최고의 숙련공의 기술로 가동되었다. 현재는 1백 34가지 신발 제조 공정 중 중요한 몇몇 단계는 아직도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단 신발의 뒷마무리는 기계 바느질에 의존하는데 이는 손보다 기계 바느질이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전문 기술자와 기계를 적절히 활용한 생산 방식은 페라가모의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페라가모는 1년에 1천 8백만 켤레를 생산하며 대부분이 여성용 구두이다. 페라가모 구두의 마지막 비밀 하나는 모든 공정을 마친 구두를 7일간에 걸쳐 굽는 것. 오븐에 있는 시간에 따라 구두 모양이 더욱 견고하게 보존되어 시간이 흘러도 그 모양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의 소재만 선별하여 사용함은 물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페라가모의 구두는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라(Vara) 모든 연령층의 여성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니켈 장식과 에나멜 소재로 제안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을 단추로 사용한 옷도 있다. 1996년 7월 샤벨로부터 웅가로 향수 사업권을 획득하였으며, 1997년 3월에는 세계적인 보석 업체인 불가리의 향수, 화장품에 대한 합작 계약을 맺었다. 3번째 대표주주가 되어, 가방 종류 뿐 아니라 슈즈, 의류 분야에도 진출하고, 1995년에는 맨스콜렉션을 발표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prada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역삼각형의 로고 플렛이 달린 나일론 가방을 대히트 시키고, 1999년 이후에는 질 샌더를 인수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새로움에 대한 강한 지적 호기심과 열정, 독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마리오 프라다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녔다. 여행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와 경험을 넓힌 마리오 프라다는 유럽과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탈리아 밀라노에 최고품질의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오픈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prada 신화를 만들어낸 진원지이다. 그때 오픈한 매장 중 그 유명한 갤러리아 아케이트에 위치한 매장은 현재까지도 계속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엄격한 퀄리티 콘트롤이다. prada의 옷은 "아름답게 소박하고, 소박하게 아름답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prada를 대표하는 그녀의 세계이다. 여성스럽게 보일수있는 옷이다. 당시만해도 가방의 소재로는 가죽이 일반적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미우치아는 틀을 깨고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던 나일론 소재로 만든 지퍼 백을 선보였다. 형태는 고전적이었던 이 가방은 나일론 소재로 제작되어 현대적인 멋과 장인 정신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튀는 멋도 없는 너무나 심플해서 단조롭기까지 한 디자인 탓에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확신이 뚜렷하면 끝까지 추진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미우치아다. 1978년부터 패션세계에 각광받게 되었다. 현재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시도가 아닐수 없었다. 1990년대 들어 차츰 차츰 이 나일론 백의 보유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유행과 더불어 패션도 바뀌었다. 울이나 면, 린넨 등과 같은 천연적인 소재 사용에서 벗어나 각종 합성 소재를 이용한 패션의 등장은 prada의 나일론 가방 판매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모더니티의 명품`이된 셈이다.
충격적 시도한 결과, 실용적이면서도 스포티한 스타일에서부터 우아한 이브닝 스타일의 의상까지 모두 커버 할 수 있는 다기능적이고도 정교한 디자인의 포코노 소재 핸드백과 액세서리가 완성되게 되었다. prada 실루엣은 특별히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거기에는 prada 특유의 '친숙함'이 있다. 이것이 prada의 성공비결이다. 토드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Tod's는 비로소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전세계 유명인사들의 애용하는 필수 소장품이 되었다. 이러한 Tod's만의 높은 퀄리티는 가방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손으로 제작된 모든 가방은 Tod's 만의 독창성과 현대적 감각, 그리고 실용성이 어우러져 모든 여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Tod's의 Miky Bag이다. Tod's를 아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소장해야 할 아이템 중 하나이다. 집 밖에서 필요한 모든 필수소품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가 특징이다. 조합이되어 유행을 타지않는 최고의 명품 아이템이 탄생된 것이다. 영화배우들과 유명인사들의 두터운 매니아층을 자랑한다. 가능한 진정한 퀄트상품이다. 디자인을 제공하는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첫 컬렉션을 가짐으로서 독립된 'Gianni Versace'라인을 열었게 되었다. 그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되어있고 보는 이들을 돌로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가 로고인 것처럼 오리지널 리티가 넘치는 철저한 화려함과 특유의 패널 무늬, 자수 고채도, 원색의 화려한 컬러 프린트가 특징으로 꼽힌다. 일깨워주고 삶에 대한 정열을 심어준 디자이너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의상은 "입는 사람의 도전을 기다리는 감각적인 옷" 또는 "바로크시대 의 예술가적 신화를 만들어가는 독특함이 있는 옷" 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입는 사람의 도전을 기다리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 매년 세계 패션계의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약간의 독기와 과장성, 스릴을 느낄 정도의 '사치스러움'이 지속되어 있고 컬트적 성격이 있어 소비자 연령층이 오히려 넓어지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Gianni Versace'는 특히 계층분류에 의한 집중적 고객 확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타겟에 따른 명확한 방향 설정으로 꾸뛰르 지향의 오리지널리티를 고수하고 있고, 이에 따라 경쟁력과 부가가치를 상승시키고 있다. 'Versace' 왕국은'Gianni Versace'와 모두 8개의 서브 브랜드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 귀족과 같은 최상류층을 겨냥한 오뜨꾸뛰르 라인 아틀리에 'Gianni Versace'가 상위 브랜드이다. 스타일(LIFE STYLE TOTAL LOOK) 'ETRO' 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독창적인 색상인 페이즐리 문양이 강조되었고, 곧 그 문양이 그 회사의 TRADE MARK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들로 하여금 사랑 받고 있다. 1990년대에는 의류사업 육성을 위해 디자이너들은 고품질의 수공작업으로 전통적인 프린트를 살리면서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컬렉션을 창조해냈다. 의류사업과 함께 다시 한 번 강조되었다. 이태리 국내시장을 지속적으로 발전 시켜감으로서 국제시장의 시장점유율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시장은 1993년 신라면세점으로부터 시작으로 지금까지 면세점, 백화점, 명품관 등에서 ETRO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소형 공장을 물려받아 'ermenegildo zegna'기업을 탄생시켰다. 다시 손자인 안젤로 제냐(anjelro zegna)로 이어졌다. 현재는 질도 제냐(jido zegna)와 파울로 제냐(paolo zegna), 안나 제냐(anna zegna), 라 우라 제냐(laura zegna), 베네데타 제냐(benededa zegna)등 제냐가의 4세대들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ermenegildo zegna'는 그의 아버지의 원단 사업을 시작으로 남성복을 위한 최고 품질의 원단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개발은 물론이고, 직원들의 훈련과 브랜드 프로모션 등을 통해 최상의 상품을 탄생시켰다. 모든 컬렉션을 유지하고 확대 강화한다. 이 라인에 주로 사용되는 원단은 매우 극히 소량만 생산되는 최상의 섬세한 울로 계절의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 '수 미주라'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이탈리아어로 '당신의 사이즈에 맞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기성복을 보완해 만드는 반 맞춤복 시스템을 가리킨다. 최상의 퀄리티를 창조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품질 검사는 손으로 직접하며 레이저 기술을 사용하여 직물의 흠집을 찾아낸다. 이 흠집의 수공, 역시 손으로 직접 하며, 가장 놀라운 점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야생하는 티슬(teasels:토끼풀의 일종)을 사용하여 캐시미어를 더욱 부드럽게 하기 위한 기모가공을 모두 수공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상의 제품들을 만들고자 하는 장인정신을 반영한다. ermenegildo zegna는 자신의 사업을 통해 그의 원단 생산지였던 산악 지대를 개조하는 그의 꿈을 실현했다. 수출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4000여명의 직원을 두고있다. 1946년 파리의 작은 부띠끄로 시작하여 1959년 신발 앞쪽에 금속장식이 있는 여성용 잉카 로퍼를 제작하게되어 명성을 얻는것을 시작으로 고객층을 어린이 에서 성인으로 넓히게 되었다. 출시하게 되면서 그명성을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1975년 세계시장으로 진출을 위해 세계 쇼핑의 중심가에 매장을 오픈한 당시의 성공은 'CELINE'의 모조 상품들이 극성을 부리고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모조상품 대책위원회를 설립한 역사가 대변하여 준다. 시장을 확대하였으며 그 결과로 1985년에는 아시아 지역의 매출이 'CELINE'의 전세계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CELINE' 로고의 탄생은 'CELINE'이 전세계적으로 매장을 확장할 때 선두에 서서 얼굴 역할을 해온 로고는 'CELINE'의 탄생보다 조금 더 뒤의 일이다. 여기에 'CELINE'의 앞글자인 C를 결합시켜 체인 모양의 'CELINE'의 로고 'C-Blason'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고는 가죽 제품과 신발에 사용되어왔으며 최근에는 로고 프린트의 열풍으로 루이비통(louis vuitton)이나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샤넬(chanel)등과 함께 명품브랜드를 대표하는 로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최근에는 라틴어 C와'C-Blason'을 혼합한 형태의 로고와 'CELINE'이라는 브랜드네임까지 다양하게 만나볼수있다. 사실 프랑스의 명품하우스 이미지의 'CELINE'을 뉴욕 근교의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FIT에서 공부를 한 미국적인 감성을 지닌 마이클 코스가 맡는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인상좋은 디자이너는 외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카리스마로 'CELINE'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그는 미국적인 실용주의를 스포티한 감각과 고급스러움으로 포장하는 그만의 스타일로 파리의 명품 하우스 'CELINE'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었고, 동시에 그 자신도 1998년 6월에 뉴욕 7번가의 동료들이 수여하는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것이 바로 마이클 코스가 이끄는 'CELINE'의 패션이다. 모자 가게를 오픈으로 시작이되었다. 1916년 오토크? 콜렉션을 발표후 당시 상복에만 사용되던 검은색을 사용해 화제가 되었으며, 또한 'CC'의 로고 마크와 '샤넬 슈츠' 는 꽤 유명해 졌다. 1983년부터 'Chanel'에 근무하게 되었다. 뒤로 묶은 은발의 헤어스타일, 검은 선그라스, 그리고 동양적 스타일인 부채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현대적 의복의 창조와 여성의 개성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하고 자유와 활동성을 추구하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보그지는 'Chanel'이 의상에서 액세서리까지 총 망라한 이 모든 작업을 "토탈룩"이라고 표현했다. 이 때부터 토탈 패션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Chanel' 은 'Chanel'의 상징이기도 한 금 체인의 누빈 핸드백, 검정 토우베이지샌달, 다리를 더욱 더 날씬하게 보이게 하는 'Chanel' 라인의 창조 등을 통한 토탈 룩을 실현해냈다. 즉, 여성의 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금 체인이 달린 핸드백을 창조해 냈고, 다리를 더 길어 보이게 하기 위해 베이지색을 이용한 슈즈를 고안해냈으며, 포켓은 손을 넣기 위해서 실용성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 그녀는'Chanel'의 근본 스타일을 잊지않고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을 선보여 브랜드의 명성에 걸맞는 독창성과 고급스러움을 만들어내어 'Chanel'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 몸에 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스목-프록이라는 옷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소재 개발과 연구를 거듭하여 '개버딘'이라는 혁신적인 원단을 개발했다.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 적합한 레인코트에 안성맞춤이었다.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Burberry'는 가장 영국적인 브랜드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며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왔다. 세계적으로 고품질의 전통적인 의류로 명성을 얻고 있다. 버버리가 곧 트랜치코트를 지칭하는 패션용어가 되어 버렸다.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하며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washed fabric과 overdyed fabric,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스트레치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1852년 루이비통 창립되었다.
1854년 프랑스 파리에 루이비통 최초의 매장을 오픈하여 루이비통 제품이 처음 등장했다. 포장용 나무 상자를 만드는 견습생이었던 루이 비통은 자신의 이름인 루이비통을 브랜드명으로 내걸고 포장용 상자와 트렁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의 제품은 당시 배로 긴 여행을 다니던 귀족들의 여행용 가방으로 인기를 얻었고 5년 후엔 2백50명의 직원을 거느린 공장을 지을 만큼 성장했다. 루이 비통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은 가업을 이었다. 조르주 비통은 1885년 런던에 처음 루이비통 해외매장을 열었다. 루이비통 모조품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첫 번째 모조품은 1890년 대 말 등장한 가짜 루이비통 트렁크였다.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을 막기 위해 아버지 루이 비통의 머리글자인 LV와 별, 꽃 모양을 섞은 독특한 문양인 모노그램을 만들어 제품에 찍었다. 1959년 루이비통을 물려받은 창업자의 손자 가스통 비통은 아버지가 고안한 모노그램에 디자인을 덧붙여 새롭게 만들었으며 가방뿐 아니라 액세서리 등으로 생산 품목을 확대했다. 87년 루이비통은 주류 회사인 모에 헤네시와 합병을 통애 LVMH그룹으로 다시 태어났다. 두 회사의 합병을 주도한 LVMH그룹 총수 베르나르 아르노는 이후 크리스찬 디오르, 지방시, 겐조, 셀린 등 주요 명품 브랜드를 인수했다. 또 보석 브랜드인 쇼메, 제니스, 시계 브랜드 태그호이어 등도 LVMH 그룹 소속이 됐다. 면세점 DFS와 화장품 전문백화점 세포라도 운영중이다. 2002년 LVMH그룹의 매출은 1백26억 유로(약 15조원)에 이른다. 루이비통을 주축으로 하는 패션 그룹은 LVMH의 주력이다. 루이비통. 겐조. 지방시. 그리스찬 디오르. 셀린. 크리스찬 라크루와가 이 패션 그룹에 속해 있다. 루이비통 매출의 절반은 아시아 시장에서 일어난다. 현재 국내에 11개 매장이 있다. 1987년에는 최연소로 '페리 엘리스' 상을 수상한 천재이며,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거점을 두고 있다. 대표하는 'Luis Vuitton' 매장임을 알게 해준다. 모노캔버스 가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여행용 트렁크를 내놓았다. 당시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후로 모조품이 판을 치기 시작해 이를 막기위해 처음 고안한 것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빨간줄과 격자무늬 문양이었다. 이런 노력은 2세인 조르쥬 비통이 1896년 부친의 이름 첫 글자인 'LV'와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경향의 꽃과 별무늬를 결합해 모노그램 캔버스를 선보이면서 절정에 달한다. 1996년에는 마크 제이콥스를 디자이너로 영입해 프레타 포르테에 진출하여 '모노그램 베르니'를 시작으로, 엘레강스한 컨셉에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으로 현재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1997년 마크 제이콥스가 합류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뉴욕 출신의 마크 제이콥스는 전통적인 루이비통을 젊고 신선하고 발랄한 브랜드로 거듭나게 한것이다. 새롭게 선보이는 젊어진 루이비통의 변화에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것이다. 완벽한 기술까지 따라잡지는 못한다. 시작된'cartier'의 역사, 그때부터 1백 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찬사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팬과 노트를 늘상 지니고 다녔으며 평범함에서 찾아낸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은 노트와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마침내 보석 영역을 예술장르로 승화시켰다. 현재 전 세계 180개 부티크, 1만 2,000여개 샵을 가진 거대한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했다.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1913년,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피렌체에 고급피혁 제품점을 오픈하면서 더블 G 마크가 붙은
집요한 장인 정신, 일상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크리에이티브, 뛰어난 품질,
1953년 해외 매장의 성공적인 진입과 함께 'GUCCI'는 세계 유명 인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오늘날 'GUCCI'의 이름 뒤에는 1백년 전통이란 수식어와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찬사가 붙는데
구찌오 구찌(guccio gucci)는
품질 보증을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 이름을 넣어서 판매한 것이 브랜드 상품의 원조이다.
산로랑과 세루지오 로시를 매수하는등, 프라다(prada)의 패트릿시오 벨테리와 함께 패션업계를 독점한다는
'GUCCI'의 역사는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탈리아 중부 플로렌스에서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처음에는 세련된 세공 기술과 최상의 재질로 승마에 필요한 가죽 제품을 선보여 귀족 사회에서 인기를 누렸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혼란에 빠뜨린 2차 세계 대전에'GUCCI'는새로운 창조와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2000년 이후에는 수많은 브랜드를 흡수, 입생로랑(Yvessaint Laurent)등을 거느리게 됐다.
가방을 비롯해 신발, 의류, 시계와 안경 등의 각종 소품과 보석, 향수, 홈 켈렉션에 이르기까지 실로
뿌리를 잃지 않는 정통성의 집념, 새로운 정통성에대한 집념, 새로운 것을 더욱 새롭게 하는 유연함,
더블 G (Double G)
'GG 마크'라고도 한다.
창시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의 이니셜을 배열한 'GUCCI'의 심볼마크로써 1940년대부터 사용된이 로고를
재키 백 (Jackey Bag)
미국 대통령 부인이고 1950, 1960년대의 패션 리더였던 재키 케네디가 애용했던 'GUCCI'의 메인 백이다.
클래식하고 모던한 실루엣이 특징이며,1999년 재 등장하고서 다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제품이다.
'J 백'이라고도 한다.
비트 모카싱 (bit moccasin) 발등 부분이 V자형 가죽조각으로 봉제 된 구두를 모카싱이라 한다.
'FENDI'
피혁제품을 다루고 있던 아드레 카사그란디(adele casagrande)는 1918년 로마중심가의 Via del Plebiscito에 작은 가죽과
디자인은 1962년이래 칼 라가필드가 담당하고 1969년 모피 프레타 포르테 개시와 동시에 가방,
2000년부터는 경영권을 프라다 그룹과 LVMH의 합병회 사 LVP에 위탁하고 있다.
이태리 남녀 토탈 패션브랜드 'FENDI'는 로고 이니셜인 `F'를 이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철저한 브랜드 이미지를 상품화 하는데 성공하여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중 적인 명품중에 하나이다.
Dobble `F'이니셜이 돋보이는 쥬카(ZUCCA)라인과 천 재질로 만들어진 페퀸(PEQUIN)라인, 세련된 블랙으로
'FENDI'는 대중들의 모피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귀하면서 딱딱하고 무거운 의류를 가볍고 부드럽고 입기에 편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모피제품은 합리적인 비용과 소비자가가 매겨졌고, 또한 'FENDI'는 그의 쁘레따 뽀르떼
1966년에는 Lagerfeld의 디자인으로 첫번째 모피 컬렉션을 가졌다. 이는 외국바이어들 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가져왔는데
1969년에 Florence에서 첫번째 기성복 모피 컬렉션을 가졌는데 여기서 끊임없는 개발로 품질의 저하 없이
주카(Zucca)
'FENDI'의 메인 테마.
모피코트의 내피에 사용되던 로고 패턴을 백의 외피에 사용한것이 그 시작.
이니셜인 F 를 두개 조합한 로고, '더블 F'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는 나폴리 근교 작은 마을 보니토에서 1898년 태어났다.
"구두방에 없는 구두"로 승부를 걸었던 어린 'Ferragamo'의 '전략'은 마을 여성들에게 놀라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1914년 이탈리아는 참으로 가난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그는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계속 노력했으며 1940년 그의 고향 보니토의 시장이자
또한 끊임없이 새매장을 오픈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무수한 상을 수상했다.
헐리우드가 없었다면 페라가모의 성공이 다소 어려웠거나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배우들과 함께 그가 창조해낸 스타일의 구두는 시대의 유행을 창조와 함께 페라가모 신화를 이루는 데
페라가모는 단순히 멋진 디자인의 구두만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성공적인 사업 비밀은 '착용감 좋은 구두'였다.
뛰어난 디자인의 고급 구두를 만들기 위해 독창적인 디자인과 전 생산 과정 자체를 수작업화시키는 등
오븐이 단지 과자와 케이크를 굽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낮은 굽의 막힌 구두로 그러스그레인 리본과 금장식으로 여성들을 사로잡은 페라가모를 대표하는 구두.
1978년에 발표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으며 소녀에서 중년 부인에 이르기까지
너무 스포티하지도 지나치게 우아하지도 않은 스타일의 '바라'는 다양한 색상과 아이디어로 제작되며
간치니
salvatore ferragamo 구두, 가방의 메인 테마. 이탈리아어로 '고리'란 뜻으로,가방의 잠금쇠로 쓰인 것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와 웅가로
페라가모는 단지 페라가모 외에도 관련 기타 패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프라다
1913년에 마리오 프라다와 그의 피혁제품의 import! shop을 오픈, 1978년에 마리오의 손녀딸인 미우쳐 프라다가
현재 prada 그룹은 거대한 브랜드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
최고의 기술과 정성,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prada의 가죽 전문 매장 두 곳을 밀라노에 열게 된다.
무엇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특별한 분위기가 우러나는 prada 패션이 지닌 최고의 강점은 미세한 색상 배합, 섬세한 소재,
연약함과 성적 매력대신 자신감을 내보일수있는 옷을 찾는 여성들을 위한 옷이며, 여성의 아름다움이 상품화되지않으면서
미우치프라다 그는 할아버지가 트렁크를 감싸 보호하는데 썼던 포코노 나일론으로 1978년 그 유명한 TOTE 를 내놓았다.
그녀는 뜻을 굽힐 줄 모른 채 불확실한 제품을 계속 생산한 탓에 시즌이나 스타일에 관계없이 애용할 수 있는 이상적 소재로
그만큼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나일론 가방은 현대적인 멋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표에 시원스런 답을 안겨준 현대적인 우아함과 견고함, 특히 행동파 여성들이 좋아하는 나일론가방이 바로 문제의
Tod's의 역사는 1917년, Diego Della Valle의 조부인 Filippo Della Valle가 작은 제화점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Filippo의 아들인 Dorino에 이르러 Tod's는 점점 번창하기 시작하였으며, 손자인 Diego Della Valle가 회사를
오늘날 Tod's는 최상의 품질을 지닌 Urban-chic의 심볼이 되었고, 탁월한 디자인과 실용성으로 Tod's는
명품과 실용성의 Miky bag은 Tod's의 새로운 성공작이다.
그 독특한 개성과 섬세한 제작기술로 이 시대 여성들에게 최고의 명품 아이템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상에서나, 직장에서, 그리고 여행할 때에도 언제나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제품이
토드 디백 (Tod's D-bag)
D-bag은 현대적인 미, 그리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단연 최고의 아이템이다.
Tod's가 2년여에 걸친 실험과 테스트를 통하여 실용성과 멋의 완벽한 배합으로 세상에 선보인 이 가방은 여성들이
섬세한 수공기술과 최상의 품질의 가죽을 이용하여 제작된 D-bag은 명품의 가치와 실용성이 완벽한 비율로
토드 슈즈 (Tod's Shoes)
미끄럼을 방지하는 고무로 만든 독특한 pebble sole(자갈무늬 밑창)을 심볼로 내세운 Tod's의 신발은 세계 최고의 명품이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라면 누구나 한 켤레이상은 Tod's의 신발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세계의
시간과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우아하고 심플함이 돋보이며, 정장이나 캐쥬얼 어느 쪽과도 코디가
베르사체
'Gianni Versace'는 1946년 이탈리아 남부 카리브리에서 태어난 그는 건축을 전공 했지만 이탈리아 인기브랜드에
26살에 밀라노에 디자이너로 입성한 'Gianni Versace'는 1978년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독특한 패션세계를 구축,
그 후 81년에 'Gianni Versace'를 설립과 이탈리아의 맥니베르사체를 설립하고, 이탈리아의 최고의 디자이너로
'Gianni Versace'의 심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 '메두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머리카락이 뱀으로
패션가 사람들은 'Gianni Versace'라하면 조각을 연상케 하는 드라마틱한 분위기와 이를 통해 신체의 아름다움을
이런 'Gianni Versace'의 의상들은 과감하게 신체부위를 노출시킨 디자인이면서 하늘하늘한 실루엣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정확한 고객 타겟층 분석에 바탕을 둔 다양한 서브 브랜드를 창출함으로써 항상 톱브랜드의 중심의 되었으며,
에트로
1968년 원단사업으로 시작한 짐모 에트로(gimmo etro)는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의 고유명사로 적용한뒤 자신만의
지금까지도 ETRO고유의 페이즐리 문양을 다양화한 디자인과 칼라로 현대감각에 맞게 표현하여 많은
백 라인의 주류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 이불, 담요, 소파등 집안을 우아하게 장식할수는 홈 컬렉션을 시작하였고,
잡화에서 시작된 'ETRO'는 숄, 스카프, 타이등의 라인은 독특한 재질 뿐 만아니라 정교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상업적인 면으로 'ETRO'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 전지역에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ETRO'는 70%이상을 수출에 의존하는 편이다.
본사는 이태리 밀라노의 역사적 지역인 "VIA SPARTACO"에 쇼룸과 함께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의 계획은
1996년부터 뉴욕으로부터 시작된 세계화로 1997년 런던, 1998년 베를린, 1998년에는 중국시장으로의 진출하고,
제냐
창업주 'ermenegildo zegna'는 1892년 이탈리아 북부 산간 지방인 트리베로에서 출생하여, 20세 때 아버지가 경영하던
1966년 'ermenegildo zegna'가 세상을 떠난 뒤 'zegna'기업은 그의 아들인 알도 제냐(aldo zegna)가,
'ermenegildo zegna'는 1910년 비엘라알프스의 작은 지역인 트리베로에서 'ermenegildo zegna'에 의해 창립되었다.
살토리얼 라인은 전통적 품위가 느껴지는 정장 라인으로 다양한 도시적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셔츠와 타이를 포함한
특히 'ermenegildo zegna'는 고객의 체형에 맞도록 기성복을 보완해 만드는 반 맞춤복 시스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수와 체형에 맞게 커팅된 원단으로 호주 산 메리노 울, 내몽고 산 캐시미어, 중국산 실크 원사 등을 사용해
옷 안쪽에는 Taglio Exclusive라는 문구를 새기며, 원하면 착용자의 이름을 새길 수도 있다.
창업자인 ermenegildo zegna의 이름을 딴 이탈리아 남성복 'ermenegildo zegna'의 반 맞춤복 라인인 '수 미주라'는
양복 한벌에 200 ~ 300만원대의 전 세계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 시장의 30%를 점유하면서 전체 매출의80%이상을
셀린느
어린이의 구두에서부터 시작된 세계 유명브랜드인 'CELINE'은 작은 상점에서 일약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이후, 포니백으로 그명성을 더해가자 'CELINE'은 의류 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으며, 1969년 첫의류 콜렉션을
특히 아시아 시징에서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1984년까지 28개의 매장이 일본에서 오픈하고 동남아시아까지
착실하게 프랑스의 명품브랜드로서의 발자국을 내디뎌온 'CELINE'은 1971년에 파리 개선문 안의 장식 문에서 영감을 얻고
처음에 'CELINE'에서 볼수 있었던 로고는'C-Blason'을 연결시킨 모양이었지만,
'CELINE'은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디자이너의 영입으로 과거의 이미지와의 탈피를 시도하게 된다.
글래머러스하면서도 편안한 것, 매니시한 동시에 페미닌한 것, 스포티하면서도 럭셔리한 것,
샤넬
'Chanel'이라는 브랜드의 탄생은 가브리엘 코코샤넬(gabrielle "coco" chanel)이 1941년 파리에
Chanel 자신도 사교계에 몸을 담고 화려한 생활로 행동 반경을 넓혀 갔으며, 현 디자이너 칼라가 필트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주 타겟으로 하고 있으며 'Chanel'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담성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의복의 역사에 혁신을 일으킨 샤넬은 또한 액세서리와 보석을 디자인하여 패셔너블한 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는데
'Chanel'의 토탈룩은 무엇보다 여성을 위한 실용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Chanel'의 창조정신은 지난 1983년부터 'Chanel'의 패션 디자인을 맡은 칼 라거펠트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Chanel'은 파리 패션의 자존심으로 오뜨 꾸뛰르의 주역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여성들의 선망을
샤넬 백 (Chanel Bag)
1955년에 등장한 'Chanel' 의 메인가방. 덮개 잠금쇠 부분에 코코 마크가 특징이다.
1929년이후 가브리엘 코코 샤넬 (gabrielle "coco" Chanel) 자신이 계속해서 사용해왔던 백이 제품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코 마크 (Coco Mark)
'Chanel'의 심벌 마크.
창시자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의 이니셜을 겹쳐서 만든 것이다.
버버리
패션 명품 'burberry'의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r burberry)는 원래 포목상으로 당시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었던
이 소재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입고 난 후 세탁이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이처럼 우수한 품질과 실용성 덕분에 개버딘 버버리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으며
영국여왕으로부터 여섯 번에 걸쳐서 수출상을 수상하는 등 영국의 타의류 회사와는 필적할수 없는 성과를 거두면서
국왕이 코마스 버버리의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 라고 말한 것이 널리 퍼져,
많은 스포츠 광들과 탐험가들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남극 탐험가 아문젠과 최초의 대서양 횡단자 알콕경과 같은 모험가들의
'burberry' 남성의류 컬렉션은 클래식한 버버리에 스포티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새로운 라인을 더한다.
fabric은 부드럽고 유연하며 풍부하다. 가죽제품과 shearling이 선보이며, 은은하고 연한 체크가 돋보이는
또한 Prorsum collection에서 영향을 받은 지퍼와 포켓의 디테일링은 클래식한 'burberry'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는다.
Luis Vuitton (루이뷔통)
현재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담당하는 마크 제이콥은 1963년 뉴욕 출신이며, 파슨즈 재학 중부터 디자인을 시작하여
연한 참나무 빛깔의 가구와 베이지의 카펫,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조명은 한눈에 150년 전통으로 귀족풍을
멋을 아는 이들 가운데 진한 고동색 배경에 반복되는 꽃과 별무늬, 그리고 `LV자'가 겹쳐진 'Luis Vuitton'
가장 프랑스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명품으로 통하는 'Luis Vuitton', 150여년 역사가 만들어낸 철저한 귀족성은
1854년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파리중심가 루데브데 "까푸 신느"에 첫 매장을 열고 혁신적인 디자인의
1854년 파리에 여행가방 전문점으로 오픈하여, '다미에', '모노그램', '에피', '타이거' 등 차례로 인기상품을 내놓았으며,
1987년에는 모헤 헤네시사와 합병, 산하 브랜드로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등을 거느린 최고의 브랜드 제국이 되었다.
고가품, 전통적인 클래식에 디자인의 중점을 둔 전통을 자랑하는 품위와 명품의 상징 루이비통에
과거 고가품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중후하고 클래식한 디자인에만 촛점을 맞췄던 것에서 탈피하여 캐쥬얼 라인을
모노그램 캔버스 (Monogram Canvas)
브랜드 로고 등을 반복 패턴으로 짜나간 캔버스 원단을 말한다.
'Luis vuitton'의 가방 등에 사용되는 원단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캔버스란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굵은 실을 빽빽하게 짜서 만든 원단을 가리킨다.
베르니 (Vernis)
전통적인 'Luis Vuitton'의 모노그램 패턴을 마치 진주를 생각나게 하듯이 컬러플한 소재에 새겨넣은 새로운 시리즈이다.
베르니는 '광택이 있는' 이란 뜻이다.
클러치 백 (Clutch bag)
어깨에 매기도 하고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백의 총칭한다.
Cartier (까르띠에)
"보석상의 왕, 왕의 보석상" - Cartier
1백 50여 년 역사를 통해 명품의 자리를 지켜 온 'cartier', 이를 흉내낸 가짜 상품들은 'cartier'의 정교하고
시계줄이나 부품, 가죽등 진짜 상품과는 어딘가 한 군데씩 다르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1847년 아돌프 피카드(Adolphe Picard)의 견습생이었던 루이-프랑수아 까르띠에가 한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영감 등에서 상상력의 소재를 찾았다.
왕가와 유명인사들에 의해 특별한 지지를 받고 분별력있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들의 보석가'인'cartier'는
이러한 노력으로 'cartier'는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보석상중의 왕'이라는 칭소을 받을 정도로
파샤 C (Pasha C)
1985년에 출시한'cartier'의 인기 손목시계.
기능성이 뛰어난 스포츠 타입으로 크고 둥근 숫자판이 돋보이는 감각적 디자인으로 소매 없는 옷에
어울린다.
탱크 (Tank)
'cartier'사의 최고 인기모델 시계.
탱크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 견고함을 느낄 수 있다. 사각의 문자판이 특징이다.
감각과 패션의 상징, 구두 - 페라가모, 프라다
필리핀의 이멜다와 <섹스&시티> 캐리의 공통점은? 바로 명품 구두에 집착이라 할 만큼 강한 애정을 보였다는 점이다.
구두만큼 여성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아이템이 또 있을까?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명품 구두는 영화 속에서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영화 속 구두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있는 브랜드가 바로 페라가모.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내 생애, 이 구두 외에는 신지 않겠다" 라고까지 하며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영화에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등장했다.
<7년만의 외출>의 그 유명한 지하철 통풍구 신에서 마릴린 먼로가 신은 구두도 바로 페라가모.
영화 속 여성들의 발을 아름답게 감싼 페라가모는 <에버 애프터>의 드류 배리모어를 위해
'신데렐라 슈즈'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8년 페라가모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함께 지니는 이 신데렐라 슈즈는 18세기 르네상스 스타일의
실크 슬리퍼이다.
은색 레이스와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이 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굽은 유리구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크릴로 제작되었다.
그 외에도 명품 구두는 영화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러브 어페어>에서 아네트 베닝이 신은
에르메스의 에스파드류(끈으로 묶는 샌들)은 우아하면서도 편안하 영화 속 주인공을 대변하고,
<레지던트 이블>에서 밀라 요요비치가 신은 프라다 부츠는 활동적이면서도 섹시한 주인공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때로는 영화 속에서 사건을 유발하는 결정적 장치로 구두가 등장하기도 한다.
<웨딩 플래너>에서 제니퍼로페즈와 매튜 맥커너히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구찌의 구두 한짝.
또한 <금발이 너무해>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변호사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게이 남자와의
수다였는데, 이 수다의 주제가 바로 프라다 구두에 관한 것이었다.
구찌
'피렌체의 전통과 뉴욕의 섹시함.'고전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가장 변화에
민감한 명품 브랜드가 구찌다.캔버스 천(이탈리아 피렌체 지방 특산물)을 이용하고,
창업자 구찌오 구찌의 이니셜인 두 개의 G가 마주 보며 뒤집힌 문양의 핸드백은 80여년 가까이
구찌가 지켜온 전통이다.
반면 미국풍의 섹시한 가죽 샌들, 11㎝가 넘는 스파이크(대못) 힐 등으로 나타난 1990년대의 파격은
'73살 구찌가 23살로 젊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할리우드 영화 배우 브래드 피트의 지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카리스마는 구찌 애호가로서 그가 즐겨 입는
블랙 점퍼의 이미지와 어울린다는 평가를받고 있다.
새로운 것에 끝없이 도전하는 모험정신,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구찌는명품의 반열에서 저만치 멀어졌을 것이다.
20년대 가죽 수공예점으로 등장해 창업자의 네 아들들로 사업이 이어지면서 구찌는 60년대 전성기를 맞는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가 애용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재키 백'은 60~70년대
여성들이 선망하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80년대 들면서 구찌가의 내분과 매너리즘에 빠진 디자인으로
구찌의 '특별함'은 사라져 갔다.
90년에 구찌는 중대한 모험을 한다.
29살의 뉴욕 출신 디자이너 톰 포드를영입한 것. 그를 통해 뉴욕의 거리와 나이트클럽 등에서 영감을 얻은
섹시함과 실용성으로 구찌의 전통은 승화됐다.
TV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들고 다니던 가죽 핸드백이 바로 구찌의 '뱀부 백'이다.
가죽에 대나무를 접목시킨 독창성은 구두 뒷굽에도 적용되면서 세계 패션계를 열광시켰다.
입생로랑 같은 유명 브랜드를 인수해 남성의류, 시계 등 토털 패션업체로입지를 굳히고 있는 구찌는
총매출의 30%를 일본 등 아시아에서 올리고 있다.
구찌-편안함과 단순함의 패션 철학
1904년 이탈리아 중부 플로렌스에서 창업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에 의해
만들어진 구찌는 당시 세련된 세공 기술과 최상의 재질로 승마에 필요한 가죽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귀족 사회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상류 계급의 스포츠인 자전거가 실용화됨에 따라 구찌는 핸드백과 같은
일반 가죽 제품으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된다.
구찌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캔버스 천을
이용하여 만든 백이 인기를 모으면서부터다. 부족한 가죽의 대체품이었지만,
캔버스 소재의 백(창업자 구찌오 구찌의 이니셜인 GG를 프린트하여 판매)은
오늘날까지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구찌 패션의 새로운 세기를 연 인물은 미국 출신의 디자이너인 톰 포드(Tom Ford)이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광고, 홍보, 매장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구찌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컨트롤하고 있는
톰 포드는 구찌의 오리지널 컨셉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접목시키면서 명품의 새로운 조건들을 만들었다.
"모든 화려한 것들을 표현하는 최우선의 요소는 편안함과 단순함이다"라는 톰 포드의 패션 철학은
구찌의 모든 켈렉션에 철저하게 반영되어 통일감 있는 구찌의 이미지를 실현하고 있다.
구찌가 선보이는 제품은 핸드백을 비롯하여 신발, 의류, 시계와 안경 등 각종 소품과 보석, 향수, 홈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로 망라되어 있다.
또한 전세계 2백여 개 매장은 대부분 직영으로 운영하며 구찌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뿌리를 잃지 않는 정통성에의 집념, 새로운 것을 더욱 새롭게 하는 유연함, 최고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은
세계 패션사에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고 있다.
<목공소 아들, 세계적 명품 창조하다> -루이비통
루이비통은 앙쉐의 한 작은 마을, 대대로 목공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무일푼의 처지로 걸어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견습공으로 귀족들의 여행짐을 꾸려주는 일을 했다.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패티코트 위에 수십미터나 되는 천을 늘어뜨리는
드레스가 유행했다. 때문에 여행을 할 때는 수십 개의 트렁크를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다.
루이 비통은 그들의 의상이 구김이 가지 않도록 꾸렸고, 곧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제니 왕후의 총애를 받아
유명해졌다. 1895년엔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그때까지의 트렁크는 뚜껑이 반원형이었으나,
루이 비통은 몇 개라도 쌓아 올릴 수 있도록 이를 평평하게 만들어 대단한인기를 모았다.
모조품이 유행하자 이를 방지하도록 그레이 트레아농, 빨간 스트라이프 무늬, 격자무늬 등을 고안해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었다.
1896년 루이 비통의 아들 죠르쥬 비통은 그의 아버지 이름의 머릿글자인 LV를 결합시키고,
꽃과 별의 무늬가 만복되는 모노그램 캔바스를 창조했다.
모노그램 캔바스의 발명은 곧 캔바스의 유연성을 이용해 접을 수 있는 가방의 탄생까지 이어졌다.
현재 루이 비통은 여행가방 뿐 아니라 여성들의 시티백, 각종 여행 액세서리, 스카프나 다이어리와 같은
소품도 생산하고 있으며, 1999년 봄품부터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여 새로운 남녀 기성복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샤 넬
미국의 희곡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명의 여성'으로 퀴리부인과 함께 꼽았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1883년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아가 됐고 수녀원에서 자랐다.
18살이 되면서 낮에는 의상실 견습공, 밤에는 클럽 가수로 일했다.
이때 그녀가 불렀던 '코코를 아시나요'라는 노래제목이 영원한 그녀의 별칭이 됐다.
그녀의 카리스마적 미모와 자신감 넘치는 재능은 부유한 남성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들을 통해 상류사회를 경험하게 됐다. 몸을 꼭 조여매는 코르셋과 의상으로 부자연스런
상류층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심플한 투피스나 승마바지, 남성용 재킷을 입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최고의 디자이너로 자리 잡게 됐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사랑에 빠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줬지만
오히려 그녀의 삶에 신비감을 더해주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아름다움보다 기능이 우선한다'는 그녀의 스타일은 새로운 시대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었다.
20세기 여성에게 그녀는 '자유'를 선물한 것이다.
이런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옷 외에도 금색로고가 들어간 누빈 가방, 화려한 모조보석, 마릴린 먼로가
'내가 잘 때 유일하게 입는 것'이라고 말해 더욱 유명해진 향수 CHANEL No.5 등 명작들을 남겼다.
1971년 샤넬이 세상을 떠나면서 CHANEL사는 잠시 빛을 잃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패션계의 신동 '칼 라거펠트'를 영입해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CHANEL의 모토를 되살리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녀의 스타일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패션.가방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로고하나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다... 펜디
펜디(FENDI)는 1925년 로마 플레비실토라는 지역에 에도아르도와 아델 펜디 부부가
가죽제품과 모피를 취급하는 상점을 낸 데서 시작된 다.
파올라, 안나, 프랜샤, 칼라, 앤디 다섯자매에 의해 운영되면서 패션기업 체제를 갖춘다.
소규모 가족회사에서 펜디가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오르게 된 데는 칼 라거펠드라는 걸출한 디자이너와의
환상적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기도 한 칼 라거펠드는 펜디를 지금의 펜디로 만 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모피에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는 펜디의 특성을 살려 모피에 승 부수를 걸었다.
당시만 해도 무겁고 구식인 모피와는 완전 차별되는 새로운 디자인을 전개했던 것.
그는 모피를 훨씬 가볍고 입기 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피에 천 개의 작은 구멍을 냈으며,
작고 길쭉 한 조각으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을 도입했다.
또 파격적인 꽃잎 모양의 밍크 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모피코트의 성공은 기성복과 가죽 제품 등 아이템을 늘려 사업을 키 우는 역할을 한다.
일례로 가죽 핸드백의 경우 섞어짜기, 염색, 태닝 등 모피 제작기법을 도입해 큰 인기를 누린다.
모피에 국한되었던 펜디가 토털 패션브랜드로 거듭난 데에는 로고가 한몫 거들었다.
'F'자를 두 개 겹친 로고는 그 자체가 문양처럼 의류 와 가방, 머플러, 시계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펜디를 유명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지난 85년 펜디는 회사 설립 60주년과 칼 라거펠드와의 합작 20년을 축하하기 위해 펜디 향수를 출시했고
이어 새 브랜드 '펜디시메'와 스포츠상품을 내면서 사세를 넓혀나갔다.
펜디의 다섯자매는 끈끈한 가족애를 과시하며 펜디를 빅브랜드로 만드는 데 전력 투구한다.
다섯자매 중 안나 펜디의 딸인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가 바케트 빵처 럼 길죽하게 생겼다고 이름 붙여진
'바케트'백으로 펜디 대박행진의 결정타를 날린다.
어깨 밑으로 바짝 매어 들 수 있는 작은 백의 탄생 은 즉각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몇 시즌 만에 500종류 의 바케트 백이 소개되면서 없어서는 안될 대표적인 펜디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펜디는 지난해 큰 변화를 맞았다.
프랑스 LVMH그룹이 지분 51%를 인 수해 경영권이 넘어갔고, 다섯자매는 디자인과 기획 부문에 참여해
펜디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국내에선 루이비통을 판매중인 LVMH 코리아가 올 초부터 펜디를 직영체체로 운영한다.
까르띠에 (Cartier) "보석상의 왕, 왕의 보석상"
보석과 시계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그 역사는
1847년 아돌프 피카드의 견습생이었던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가 파리의 몽토르고이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1859년 까르띠에는 황제의 사촌이었던 마틸드 공주의 후원으로 사업을 옮기면서 위제니 황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899년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이었던 귀 드라빼 13번지로 옮기면서 보석의 명가 '까르띠에'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왕가와 유명인사들에 의해 특별한 지지를 받고 분별력 있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들의 보석가'인 까르띠에는
현재 전 세계 180개 부티크, 1만 2,000여개 샵을 가진 거대한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했다.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영감 등에서 상상력의 소재를 찾았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펜과 노트를 늘상 지니고 다녔으며 평범함에서 찾아낸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은 노트와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마침내 보석 영역을 예술장르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까르띠에는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보석상중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까르띠에의 대표 상품은 3색 보석과 탱크 시계, 가죽제품, 펜, 라이터, 안경 등으로 정교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시계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명품인 '탱크시계'는 1917년 제2차 세계 대전때 등장한 르노 탱크에서 영감을 얻어
루이 까르띠에가 고안한 디자인이다.
탱크의 무한 궤도를 연상시키는 프레임과 탱크의 사각 몸체를 표현한 시계 케이스, 문자판은 탱크 프랑세즈,
탱크 아메리카, 그리고 사각의 탱크 반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스타일로 변모해 왔다.
탱크 시계는 지금도 전 세계 유명인사와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의 명품 시계다.
1985년에 출시한 'Cartier'의 인기 손목시계.
기능성이 뛰어난 스포츠 타입으로 크고 둥근 숫자판이 돋보이는 감각적 디자인으로 소매 없는 옷에 어울린다.
에트로
전통적인 프린트와 모티브를 살리면서도,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에트로는 1968년 Mr.짐모 에트로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고유 브랜드로 사용하며 고품질, 심미스러움을 바탕으로 회사내의 모든 생산라인의 모티브를
제공하면서 TOTAL LOOK을 창출하였다.
1968년 ETRO s.p.a를 설립해 의류 산업의 원단 컴버터로서 기업가적인 모험이 시작되었고, 짐모 에트로는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원래의 문양과 독특한 색상을 갖춘 캐시미어라든지, 실크, 린네, 면 등 고급스러운 천염섬유로부터 만들어진
독창적인 원단생산이 시작되었다. 1981년에는 원단 생산라인을 창조했고, 첫 Collection은 페이즐리 문양의 성격을 띄었고,
그 문양은 그 회사의 Trade Mark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에트로트는 잡화류에서 시작하였다.
- 숄, 스카프, 타이 등 이 라인은 독특한 재질뿐만 아니라 정교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다시한번 강조가 되었다.
원단 생산라인은 가죽제품 쪽으로 확장 됐으며, 가방과 여행용 가방의 독특한 재질 즉, 특수코팅 제작으로 처리된
페이즐리 패턴의 쟈카드 문양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갑, 화장품 케이스, 소품용품과 같은 작은 사이즈
제품에도 적용이 되었다.
이 라인은 80년대의 에트로 주류를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에트로는 이불, 담요, 소파 등 집안을 우아하게
장식할 수 있는 홈 컬렉션을 시작하였다.
90년에 들어서면서 의류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으며, 디자이너들은 브랜드의 특수한 고품질의
수공예 작업을 살리면서,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남성복, 여성복 컬렉션을 창조시켰다.
지난 10년간 아시아 전지역에서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으며, 브랜드 특성은 세계화에 맞추어
전세계적으로 매장 어디서나 회사 로고를 발견할 수 있다.
본사는 MILAN의 역사적인 도시인 VIASPARTIQUE에 쇼룸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에트로(ETRO)는 동양적인 미를 바탕으로 유행을 창조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동양권의 문화를 응용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기업이다.
에트로의 유행창조에 대해 전문가들은 '모방적인 변형' (데포메이션 또는 메타모포저)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에트로를 이끌고 있는 지모 에트로는 틈만 나면 동양권의 옛 쓰레기를 뒤지는 여행을 즐긴다. 그리고 헝겊 쪼가리,
중국의 옛 인쇄기, 야구방망이, 선박모형, 치과 의사용 의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 모은다.
그는 혼란 속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카오스 이론을 신봉한다.
현재 에트로는 전세계의 주요 도시에 부티끄를 증진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프린트와 모티브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으로 에트로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 전지역에서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날 에트로는 7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고, 브랜드 특성은 세계화에 맞추어 전 세계적인 BOUTIQUE들
사이에 어디서나 ETRO 로고를 발견할 수 있다.
전 세계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티파니
노을빛처럼 침울한 날, 블루스처럼 비가 줄줄 오는 날엔 비참해지고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럴 때마다 티파니에 가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그 고요함과 고고함. 나쁜 일은 없을 것 같아진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주인공 할리의 독백이다.
이 영화로 인해 티파니는 일약 '꿈의 매장'이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 티파니의 블루박스는
그녀처럼 꿈많은 여성들이 연인 혹은 남편에게서 한번쯤 받고 싶어하는 선물상자가 되었다.
그 안에 단지 은반지 하나가 들었더라도, 오직 티파니이기 때문에 그것은 소중한 추억이 된다.
티파니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이는 비단 오드리 햅번만이 아니다.
재클린 케네디가 착용해서 이름까지 그녀의 이름을 본 딴 티파니의 '잭키 팔찌',
리처드 버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선물한 '돌핀 브로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부인 메리 여사에게 선물한 '티파니의 진주'.
이 외에도 많은 영화와 광고에서 생애 최고의 선물, 영원한 사랑의 고백, 프로포즈의 승낙 등
인생의 가장 설레이고 축복 되는 순간엔 언제나 티파니가 그 순간이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티파니가 탄생해서 성공하기 까지
보석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인 "티파니"는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에 의해 미국 브로드 웨이에서 설립되었다.
하지만, 티파니도 처음부터 보석상으로 시작한건 아니었다고 한다.
1837년 25살의 젊은 티파니가 친구와 함께 뉴욕에 문방구와 도자기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로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티파니의 모태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점차 보석상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티파니는 1845년 처음으로 거래에서 주문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은 보석점뿐 아니라 일반 소매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48년에 뉴욕 최고의 은 제조업자인 존 무어를 영입해 수입에 의존하던 사업방식에서 탈피하여
직접 장신구 제작을 시작하였고,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신구 전시회에서 은 공예부분
금메달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1858년에는 대서양의 해저 전선사업이 성공하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쓰다남은 케이블로
기념 문전을 제작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1878년 킴벌리 광산에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카나리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티파니는
즉시 이것을 사들였다.
128.51캐럿이나 되는 이 희귀 다이아몬드는 현재 뉴욕 5번가의 티파니 본점 특별실에 진열되어 있다.
일명 "티파니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카나리아 빛깔의 유명한 황색 다이아몬드가 뉴욕 본점 1층 홀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고 있다.
1902년 창업자 티파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1955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월터 호빙은 파리의 슈란바자, 이탈리아의 페레티 등
유명 디자이너를 초빙해 "티어 드롭(Tear Drop)", "다이아몬드 바이쟈아드"와 같은 명품들을 제작,
티파니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그후 파로마 피카소가 "오픈하트"를 제작해서 티파니의 대표 디자인으로
가세해 부유층뿐만 아니라 만인의 사랑을 두루 받을 수 있는 제품을 탄생시켰다.
미국 최고의 보석점 티파니는 시대적 추세를 타고 눈부시게 발전하여 1850년에는 파리에,
1968년에는 런던에 지점을 설치 세계의 티파니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국에는 지난 95년 첫 매장을 연 뒤 매년 1개씩 점포를 늘려가고 있다.
최근 20여 년 동안은 연속 흑자행진을 해왔으며, 매출은 2002년 기준 17억600만 달러, 순이익률 9%로
탄탄한 토대를 일궜다. 현재 전체 판매의 80% 정도가 보석이며, 시계, 스털링 실버 식기류, 문구류, 팬시용품 등이
나머지 매출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티파니 Mark라는 시계를 런칭해 시계 사업에 대해 적극적인 마케팅 처제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현재 티파니의 시계 비즈니스는 전체 판매의 3%를 차지할 정도지만 이것을 10%대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목표.
큰 굴곡 없이 160년 사를 질주해온 티파니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 클래시컬(classical) 스타일로 티파니만의 디자인과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티파니의 사명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최상의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며, 직원들을 아끼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기준이 된 세팅법
뭐니뭐니 해도 티파니가 전세계 여성들의 맘을 흔드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티파니의 다이아몬드 제품이다.
1880년대 창업주인 '찰스 루이스 티파니'의 지도 아래 개발되어 소개된 '티파니 세팅' 또는 '육지 세팅'은 밴드에서
분리한 다이아몬드를 6개의 발이 떠받들게 하여 다이아몬드를 통과하는 빛이 반사를 보다 완벽하게 구현하도록 하는
독특한 세팅법이다.
이는 다이아몬드를 통과하는 빛의 반사를 보다 완벽하게 구연해 광채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아나도록 하는 기법으로
이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전통적인 반지 스타일로 자리 잡혀 다이아몬드 제품 하면
가장 먼저 티파니가 떠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이 브랜드가 채용한 은순도는 925/1000은 미국의 법정 은순도가 됐고, 1878년 파리국제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얻은 최초의 미국디자인회사가 되면서 티파니의 명성은 정상에 이르렀다.
또 다른 상징, 포장
티파니 만의 전통적인 티파니 세팅 외에도 티파니를 소비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게 만든 것이 바로
'티파니 블루'로 불리 우는 포장 색상이다.
1880년대 말, 이 유명한 티파니의 블루는 쇼핑백과 포장 상자의 색상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연한하늘색 빛깔에 네모난 종이상자, 그리고 하얀색 리본은 티파니 세팅과 더불어 티파니의 또 다른 상징이며
자산으로 자리잡았다.
맑은 하늘색 박스 위에 십자로 묶여진 흰색 리본을 살며시 건네주며 애인이 프로포즈 해온다면 과연,
안 받아줄 여자가 있을까?
명물, 티파니 본점 시계 아틀라스 시계는 뉴욕 5번가 727번지 티파니 본점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다.
나무를 깎아 조각하여 그 위에 동(銅)을 씌워 만든 9피트 길이의 아틀라스 신이 약 지름 4피트의 둥근시계를
어깨에 짊어진 디자인의 시계다.
이 역사적인 명물은 1853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브로도웨이 550번지에 위치한 매장에 설치함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 후 반세기에 걸쳐 언제나 변함없이 뉴욕의 시간을 정확하게 알리는 상징물이 되어 왔다.
이 시계가 한 차례 멈춘 적이 있는데, 바로 1865년 4월 15일 아침 7시 22분, 링컨 대통령이 서거한 순간이다.
어디서든지 아틀라스 시계는 정확한 시각의 상징으로 티파니의 세계적인 품질과 혁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뛰어난 디자인의 명성을 대변해 왔습니다.
티파니 제품
시계
스위스에서 만들어지는 티파니 클래식(Classics) 시계의 본체는 18K 금이나 스테인레스 스틸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플한 디자인, 세련된 취향, 내재된 우아함이 한데 잘 어우러져 있다.
각각 남녀 별로 다른 사이즈가 있으며, 여러 색상과 다른 소재의 가죽끈도 준비되어 있다.
1987년 티파니는 창립 150주년을 맞아 테소로(Tesoro) 컬렉션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모양과 기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진 우아한 디자인의 제품이다.
남성과 여성을 위한 고급 시계인 테소로는 뛰어난 디자인과 장인정신이 잘 조화되어 18K금, 18K금과 스테인레스
스틸의 콤비, 진주모패(Mother Of Pearl) 시계 다이알 위에 다이아몬드가 엑센트로 장식된 디자인이 있으며,
광택 혹은 무광택 등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모두 스위스에서 제작된 테소로 시계는 활동적인 남성을 위해서 캐쥬얼이나 양복 어떠한 복장에도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게 제작된다.
이 밖에 Tiffany&Co는 우아한 디자인에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새로운 코디스(Cordis) 시계 컬렉션도 선보였다.
시계 가장자리 여백을 수평으로 정교하게 계곡 모양으로 조각한 듯한 디자인은 매우 깔끔하고, 그래픽적이며,
작은 디테일까지도 완벽을 기울여 세공한 것이 특징. 또한 이 시계는 도마뱀 가죽 줄에 18K 금이나 백금에 세공된
사각형과 라운드의 2가지 형태가 있어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루시다
티파니가 육지 세팅을 소개한 이후, 114년만에 독창적인 컷과 세팅의 새로운 반지 루시다를 최근 선보였다.
독창적인 세팅법으로 새로운 다이아몬드 반지 '루시다'는 "별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뜻한다.
루시다는 그동안 티파니가 소개해온 유명한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서 완벽한 우아함, 정교함,
그리고 현대적인 매력을 이어갈 디자인이다. 루시다의 새로운 커팅은 다이아몬드 원석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에
참신하고 현대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감각을 불어 넣도록 설계되었다.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이 반지는, 높은 계단 형태로 커팅된 크라운 면과 넓은 단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새로운 컷은 다이아몬드만이 갖고 있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루시다 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한층 빛나 보이도록 독창적으로 제작하였다.
진주 1837년 회사가 세워진 이래 Tiffany&Co는 고급 진주의 조달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려왔다.
티파니 창업자인 Charles Lewis Tiffany는 높은 수준의 티파니 고객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진주를 제공하기 위해
수석 보석 학자였던 쿤즈 박사와 함께 세계를 두루 여행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티파니는 보석 디자인에 여러 종류의 진주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일본 조개로부터 나온
고전적인 함수 양식진주들이 있는데, 진주들은 크기가 2mm에서 10mm까지 다양하며,
백장미색, 금색, 은 푸른색 등 모양과 크기에 있어 다양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 80여개국까지… 불가리
패션 쇼 쁘레따 뽀르테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영화 '쁘레따 포르테'를 보셨나요?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수퍼모델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영화였죠?
영화에서 이들 배우가 모두 참석했던 런칭 쇼 기억나세요? 그 장면이 바로 "불가리"의 신제품 쇼였답니다.
불가리? 유제품 이름도 아니고…. "불가리"는 도대체 어떤 브랜드일까요?
"BVLGARI" 약간 어색한 철자의 브랜드. 이탈리아 어로 "불가리"라고 읽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은세공업자에서부터 시작된 불가리는 1884년 소티리오 불가리( otirio Bvlgari)가
로마의 시스티나 거리에 최초의 상점을 오픈하면서 브랜드로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1905년, 값진 원석과 보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두 아들 콘스탄티노와 조르지오는
두 번째 상점을 로마의 콘도티 거리에 위치에 오픈합니다.
바로 이 상점이 오늘날의 불가리 본점으로 남아있답니다. 로마로 여행가시면 한번 들려보세요.
제 2차 세계대전이 이후, 전환점을 맞이한 불가리는 197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뉴욕에서 최초의 부띠끄를 오픈한 이후, 파리, 제네바, 몬테카를로에 숍을 오픈하면서
지금은 세계 80여개국에 불가리의 샵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아시아 시장에도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
불륨이 있는 디자인, 불가리!
불가리 스타일! 액세서리 점에 가면 '불가리 스타일'이라는 제품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불가리 스타일'이란 뭘까요?
굵고 큼직큼직한 선으로 디자인 된 주얼리에선 여성미보다는 중성적인 미가 느껴집니다.
보기만해도 느껴지는 묵직한 양감. White Gold 로만 이루어진 제품들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기도 했지요.
대담한 디자인, 다양한 컬러의 보석의 컴비네컴비네이션! 이것이 바로 불가리 스타일 입니다.
단색으로만 이루어진 White Gold 분명히 찍힌 BVLGARI라는 로고. 이제는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심플한 디자인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심벌이 되었습니다.
원칙에서 벗어난 화려함과 심플함
불가리만의 개성이 살아나기 시작한 1940년대, 보석계의 주류는 프렌치 스쿨의 엄격한 원칙주의적 기법이었습니다.
보석은 화려하고, 현란하게… 그러나, 불가리는 이에 벗어나 볼륨감과 양감이 느껴지는 고유의 스타일을
주얼리에 적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디자인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주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그리고 19세기 금 세공의 대표격인
로만 스쿨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죠.
아마도 오늘날의 불가리의 크리에이티브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아이웨어, 러더웨어, 그리고 테이블웨어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주얼리 메카로서의
명성을 펼쳐나가고 있는 불가리.
이러한 주얼리 리더로써 불가리의 끊이지 않는 행보는, 불가리를 좋아하는 매니아뿐 아니라
아름다운에 가슴 설레이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편한구두 만들자" -스위스 '발리'
스위스의 대표제품으로 시계와 함께 발리구두가 꼽힌다.
발리구두는 300달러~500달러(약35만~60만원선)에 이르는 고가제품이지만 편안한 착용감으로 즐겨 찾는 사람이 많다.
1851년 칼 프란츠 발리가 설립했으며 구두 가방 시계 등 각종 액세서리 소품을 생산하다 최근에는 의류까지 생산하는
토탈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발리구두가 태어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람은 발리의 아내였다.
남자용 멜빵과 고무줄을 만들던 오스트리아 이민자 출신 칼 프란츠 발리가 멜빵고리를 구하려고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갔다.
아내는 출장길에 구두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발 사이즈를 몰랐던 그는 여러 구두 가게에서 무려 열두 켤레의 구두를 사왔다.
그는 여기에다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고무밴드를 달아 신기 편하게 만들어 줬다.
신기 편한 구두생산의 가능성을 발견한 발리는 편한 구두를 대량 생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20명 남짓한 제화공들과 함께 가내수공업 형태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발리구두의 출발이다.
이는 맞춤구두시대에서 기성구두시대로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리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창업후 30년이나 지난 1880년대가 돼서야 발리구두는 고급품으로 인정받았다.
발리는 당시 막대한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함으로써 '세계화'를 가속했다.
그후 1, 2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 1970년대와 90년대의 기업인수와 합병 등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발리는 제품생산에 대한 열정과 스위스인 특유의 근면성으로 성장을 계속했다.
일화에서도 나타나듯이 창업자 발리는 발 사이즈를 모르는 아내의 구두를 열두 켤레나 사올 만큼 세심한 배려가
있었던 사람이다.
발리구두에서 느껴지는 스위스의 주도면밀함과 꼼꼼함은 이태리의 패션지향성이나
프랑스의 감성적 조화와 사뭇 다르다.
발리는 150년이 지난 지금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전세계 70여개국에 470여개의 전문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명품의 범위
GUCCI, PRADA, VERSACE, CHANEL, DOIR, M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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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오래전에 일주에 한번이상을 김포공항의 면세점을 드나들고 서울시내 면세점을 집보다 더 많이 드나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명품에 관심도 없었고 이런 유래를 몰랐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명품에 눈이 가는것이 속물이라기 보다 나이 먹을 수로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의 변화인것 같습니다....오늘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