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내용 —해설사 해설 중심으로
돈암서원 둘러보기
문화관광재단에서 운용, 숙박비 10만원 논산 시민 도는 자매결연 도시 시민 5만원(결연하고 오세요)
계룡산 848m 천왕봉 밑에 계룡대 있음(육군 3군 본부)~대둔산(878m)이어 있기에 연산
1400년전 660년 백제 연산이 황산이었음 황산 밑에 황산벌에서 전투
그 후 신검과 왕건의 전투 고려 후삼국
왕건은 이긴 것이 하늘이 돕고
부처님이 도왔다.
천(하늘)호(도움)산 그리고 개국사찰 개태사를 지음 현개태사라는 절에서 계곡 쪽으로 400m 산 안으로 올라가면 개태사터가 나온다. 바로 그 자리
서원은 대략 3공간 제향(사당) 강학(강당) 교류(누)
산앙루 교제, 교류의 공간 휴식 공간
내삼문 , 외삼문 경상권과 다른 점 가운데 신문 높고(솟을 대문) 벽이 있다.
매년 음력 2월, 8월 중정날 제향 전사청에서 준비-현 교육기관으로 사용 부족하면 앞 마당 텐트에서 사용
초정일은 향교 제사 지내고 중정일은 서원 제사 지낸다.
이 쪽은 동입동출이다.
예를 숭상하다’는 의미의 숭례사(崇禮祠)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祠堂)으로서, 군자가 덕을 닦고 학문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는 현재 김장생을 주향하고, 김집·송시열·송준길의 위패(位牌)를 배향(配享)하고 있다. 4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전면 1열은 툇간이고, 후면 2열은 내부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측면의 3칸 가운데 전면 1칸은 통으로 된 퇴칸으로 구성하였으며, 띠살문 형태의 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防風板)을 설치하였다. 전체적인 건물의 구조와 형태, 처마의 기와 명문에 쓰인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崇禎六年癸酉二月日書院)’의 내용으로 보아 응도당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당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공간의 짜임새가 큰 건물 못지않으며, 세부적인 조각에 장식성이 강한 요소들을 응용한 것은 사당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경사는 선대의 현인(賢人) 네 분을 모신 위엄과 권위를 잘 보여주며, 돈암서원이 충청지역 각 사족들의 집결 장소로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된다.
3대가 이어 대작 부자가 배향된 것은 유일하다 위패는 좌측부터 송준길 중간에 김장생 그 옆에 김집 또 그 옆에 송시열 배치
국화, 연화, 나비 문양
망쇠에 스님 태선이가 만들다 숭정 병오년은 1786년으로 서원에 딸린 절 고운사 스님들이 기와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망쇠의 얼굴이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응도당, 양성당 옆에 있다.
강당이 3개 있는 이유 1.7km 너머 산이 끝나는 장소 산이 끝나지 않는데 철도(호남선)가 놓여 끊어진 장소 1911년 호남선 건설시 산 깎음
그 장소에 돈암(豚 巖 돼지바위) 옆에서 양성당 집 짓고 제자(아들 김집, 송준길, 송시열) 가르침.
둔(遯)달아날 둔, 원음은 돈 달아나다 피하다 속이다 은둔하다.
사액 내려올 시 돈암서원(遯巖)으로 내려 옴.
김장생은 본인을 둔옹(은둔해 있는 할아버지)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주역 63궤 중 33번째가 가둔 궤이다.
편액은 우암글씨로 생각한다.
모래 사 시내 계 사계천이 홍수로 이 쪽으로 옮김
188년간 대들로 8m 짜리 2개 90년간 돠두었다가 1971년 새마을 사업하며 길도 만들어지고 경운기 2대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가져오는데 놀 자리에 양성당이 있어 응도당은 사계선생님 사후에 제자들이 지은 집으로 측면에 배치 함.
북 계룡산, 남 대둔산 여기서 산은 계룡산이나 대둔산이 아니라 김장생을 뜻함.
입덕문~혹 잘못으로 팔덕문으로 읽는 사람도 있음
기둥 밑의 주춧돌이 앞에는 4각, 뒤는 8각 안에는 원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람도 다듬어 모나지 않게 되는 것을 뜻함.
성인군자
공자는 성인은 못 봤노라(세상에 없고) 군자는 있으면 만나보겠다.
응도당 뒤열이 방, 원래 온돌 있었음 서원철폐중 47개의 서원은 남아있었는데 그 중 하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잠재 목록 등재 당시 9개가 국가사적이었음. 그 후에 사적이 늘어남 논산에 있는 노강서원도 그 후에 사적이 된 사례
돈암-송시열
노강-윤증
응(응집할 읽힐) 사액 받은 편액 사액을 2번 받았다는 것은 틀리고 숭정경자년 1660년 현종 원년에 사액 받음
1559년 효종 10년에 결정 되었으나 효종 승하로 사액이 내려지지 않고 현종 원년에 내려져 2번 받은 것으로 잘못 전달 됨.
응도당-보물 화반이 조각품 대들보 흠집은 1971년 옮길 대 기께로 직접 옮겨 생긴 상처임
문4짝, 2짝 1짝 풍판 밑 눈썹 처마~안이 밝게 하며 빛 들어오게 하며 회랑 역할 함(비 안맞고 이동)
정회당(사계아버지) 고향에 와서 공부 시킨 장소
천호산에서 고운사에 정회당 짓고 가르침 그 후에 경상도 관찰사 나감 후
정회당 양성당 응도당
돈암서원의 정원은 30명으로 사계 아버님 때 원내 30명, 원외30명 그 중 10% 즉 3명은 다른 지역 사람을 받아 들임) 정회당 게양기에 나와 있음
정회당 편액 의성 김씨 예산 8세때 쓴다
의성김씨예산이 쓴 글
전북 능가산 개암사 왼쪽 월성재 요사체 편액 김예산 8세 경서
전주 교동 한벽당 편액 3개 중 문 열고 들어가면 안에 있는 것 9세때 씀
경서가 아니라 근서라 씀
전라도 소양면 전주 최씨 제실
부안 지방의 엄청난 갑부 김예산 집안, 후에 몰락했는지 내용 없음.
장판각 – 목판 보관했다가 충남역사박물관에 영구 기증
현재 명재고택, (종학당 윤증 문과, 무과 42명 합격한 집안) 한국유교문화진흥원 기획전에 전시
땅이 모든걸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걸 받아 들였다.
정경세는 딸을 혼인 시키기 위해 사위감을 찾아다닌다. 김장생을 찾아가 보니 “저쪽 방을 가보라”며 제자들이 공부하는 곳을 가리켰다. 정경세는 그 곳을 찾아가니 초려 이유태가 나와 공손히 인사한다. 송시열은 들어 누어 발가락만 까딱 까딱한다. 송준길은 반듯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올 때 문밖까지 배웅하는 이유태 그 중 정경세는 송준길을 사위감으로 택한다.
송시열‧이유태‧송준길 세 사람의 비유를 제가 재미있게 써 봤다.
퇴계학을 계승한 서애 류성룡의 제자 우복 정경세 영남학파, 남인
율곡 이이를 잇는 기호학파의 예학을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 서인
1623년 김장생의 제자 송준길이 영남학파 정경세의 둘째 사위가 된다.
회덕 출신 송준길은 처가 상주에서 10년을 보내며 제자까지 기른다. 송준길은 정경세를 통해 퇴계학을 접했다. 송준길은 장인이 세상을 뜨자 일대기에 가까운 장문의 행장(行狀)을 짓고, 또 연보를 만들었다. 송준길은 후일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다. 상주에는 그 뒤 노론 송준길을 기리는 흥암서원이 들어섰다. 흥암서원은 대원군 시절에도 훼철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료대, 관세대
원정비 화강석 대리석 우암이 짓고 동춘당이 쓰다. 장인 이름은 없다.
김관기 아기 4살 때 동생은 태중에 있었는데 김만중이다.
김만중의 아호가 선생(배선 날생) 호는 서포 아마도 강화도에 피난 갓다가 돌아오는 길에 출산을 했는데 강화와 서울의 중간 지점인 서포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그리고 장희빈
오늘 오후 2시(2022.11.20.) 한옥마을 개관식
11:58 ~ 12:11 : 김장생선생묘,
김장생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던 동네
김장생 할머니 정려각
숭덕사
국방대 4년전 논산으로 이사
가운데 정면이 7대조 할머니 허씨
그 뒤가 김장생 묘 할머니가 손자 업어 키우는 풍수상 아주 좋은 자리.
김장생 묘 좌측으로 사촌형 김선생 김철산 김철산 부인
김장생 작은 아버지
왼쪽 김철산 3아들
장남 김국광
차남 김경광 그 앞 김경광 신도비 옛날에 그 앞으로 큰 길이 있었다.
허씨 할머니 재묘들어가는 입구에 새로 신도비 세움
김장생은 계룡시 은농재 사계 고택에서 돌아가심
10년 후 이곳으로 이장
사당, 재실 김장생 신도비
김경광 새로 세운 신도비
17살에 허씨 할머니 남편 죽음
고정산 터널 지나 탑정호 나타남
12:24 : 버스 내에서 해설
계백장군 유적 둘러 보기,
탑정호 2.2km 떨어진 곳에서 좌회전
황산벌 전투도 전시실 보수공사로 휴관
1관 삼국시대 역사와 문화
2관 삼국시대 무기
3관 논산지역의 문화재, 유물 특히 개태사의 청동 금고 전시
딸기 농촌 테마 공원,
딸기 우리나라 전체 유통량의 15%, 주로 ㄱ소상재배(50%)
local food 지역상품
설향 품종 king’s berry 품종 비타 베리 일본에 로얄티 안주기 위해 개량 품종 개발
156억 부지 나무테크길(탑정호 소풍길) 3km
봄 순녹색이 예쁨 버드나무
탑정호 데크길걷기
넓고 파아란 탑정호수에 세워진 탑정호출렁다리
대인 3000원(2000원 상품권) 소인 2000원(1000원 상품권)
조례 고쳐서 입장료 받지 않을 계획
탑정호는 충남에서 예당호에 이어 2번째로 큰 저수지이다.(우리나라에서 농업용 저수리로 2번째 큰 호수) 예당호에도 약 400m의 출렁다리. 그에 못지 않게 탑정호에도 길이 600m(폭 2m) 출렁다리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현수교 형태의 출렁다리. 4개의 주차장이 있고 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제4주차장에 주차 후 다리를 다녀오면 된다. 승용차로 방문시 300m 가서 다시 돌아오면 된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무표 셔틀 버스가 다닌다. 다리 건너편에는 전망이 좋은 분위기 있는 커피집도 있다. 주위에는 수변생태공원, 음악분수, 딸기향농촌테마공원, 힐링수변데크산책로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도보로도 가능한 거리에 계백 장군 무덤이 있는 곳에는 백제군사박물관도 있다.
논산저수지라고도 부르는 탑정호가 있는 논산은 금강과 논산천이 억겁의 세월 동안에 만들어 놓은 논산평야, 백제시대에는 황산벌이라 부르는 끝이 보이지 않은 드넓은 논에 물을 공급하기위에 만들어진 농업용 저수지이다. 지금은 수력 발전을 한다. 1944년도 지을 때는 수문이 없었음 볏가마로 쌓아서 수위를 높이고 했었음. 지금 수문 6개 음악분수 60억들여 만ㅁ듬 140m 물 올라가는 높이가 100m. 430개의 LED 등 370개의 노즐 저녁 8시 보면 호나성적임 낮에 보다 훨씬 멋있음. 미디어 파사드가 연출됨. 제이혼 호텔에서 보면 탑정호가잘 보임 예당호 유역면적은 37,360ha이며 탑정호는 21,880ha이다.
매몰된 곳에 절이 어린사 있었는데 그 탑을 제방 위에 올려놓아 탑정호라 불리움. 탑 모양이 정같다 해서 탑정호
어린사는 백제 군인 주둔 사찰
12:37 ~ 13:30 : 중식 점심식사 ( 은진 쭈구미 백반 예정)
13:30 ~ 14:28 : 관촉사 은진미륵 관람
표진강이 흐르고 있고 이 바위에서 다이빙 하며 놀던 어린시절 다이빙 바위 뒤에 큰 바위에다 배를 대었다는(묶었다는) 배바위가 변해서 대바위가 되었다.
원래 관족사-물이 흘러 발을 적셨다. 부처가 물 위에 담겨있다 해서 관족사 후에 관촉사로 변함.
남무 나무-귀의한다, 믿는다
선정비
논산에 제7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시 14000명의 포로를 미군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불을 끄고 탈출 시킴 주변에 이웃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라고 지시 그 포로들이 주변에 정착해 살며 고마워서 이승만 공덕비 세움
사적비에 보면 광종에서 목종에 이르기 까지 36년간 미륵불 세움 나라에서 부담 개태사 미륵전 후백제마지막 그림에 왕이 면류관 쓰고 참여 면류관 처음나옴 미륵에 대한 예배 경배, 미륵을 왕과 동일 시
머리 부분 거칠은 면 옛날에 철 장식 장엄하던 부분 1960. 12 시멘트를 기계로 긁은 흔적 옛날 구멍 나옴
백호 자리 조성 초기의 천연 수정 떨어져서 3조각 남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 515년전에 구리로 만든 백호 녹물이 콧등으로 흘러 내림
백호에 기록이 나옴 지금 인조수정 박아 놓음
어깨 다른 돌 붙임 연결 장치 추정 호국 불상 오랑캐가 압록강 건널 때 스님이 걸어가서 그 부위가 물이 얕은 줄 알고 병력들에게 그리로 가라고 해쓴ㄴ데 깊어서 바져 죽음 화가난 적장이 스님에게 따라가서 뒤에서 칼로 내리 치니 스님 갓은 떨어졌는데 스님은 간데 없고 그 때 이 관촉사의 미륵불 관이 떨어졌다.불 상 뒤에 금이 간 자리 사적비에 써 있고 나라가 좋으면 얼굴이 웃고 나라가 어려우면 얼굴이 찡그려 보인다. 사적비를 새로 알기 수비게 한글로 써서 세운 비석
사찰의 석등 중 가장 큰 것이 각황전 석등(신라시대, 팔각)
2번째로 큰 것이 관촉사 석등(고려시대, 사각) 1, 2등 사이에 하나 더 있었을 것이다.
배례석
이 곳에 성이 쌓여있고 그 흔적은 남문만 남아있다. 조선 시대 배례석이 제물 올려놓고 경배 들임
버스에서건양대 관련 설립자에 고나한 이야기 전개 영등포건양병원 온 재산 털어 대학 설립 me too에 걸려 퇴진 27년생, 28년생
14:50 ~ 15:35 : 강경산 소금문학관, 옥녀봉, 강경문화지도
산 이름은 강경산 , 소금문학관 – 2021년 개관
산넘어 소금집, 박범신 작가 40번째 작품 소금,
1층 강경지역 역사 사진
2층 박범신 작품
3층 논산 지역 작가들
논산문화관광재단에서 운용
논산 놀뫼, 논산에 11개 등록문화재가 있는데 논산에는 연산역 1개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강경에 있음
서대전~강경간 철도 1911년11월 11일 그 이후 강경역에서 목포까지 1914년 호남선이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도록 연결 정미소 6개 강경 인구 현 4300명 24년전 12000명 젓갈 시장은 13개 였는데 현재 130개 젓갈 상인이 있음
1931년 군에서 읍이 될 때 대전하고 강경이 같이 읍이 됨
소금집 박범신 학교 다님 중학교 까지 강경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익산 다님 장편소설 소금 탑정호 반대편 집필관
옥녀봉 이곳에 일본 신사
일본 신사 관리하는 집이 현재 구멍가게로 남아있음.
이 곳 광장에서 3/10500명이 모였고 3/11 1000명이 모여 만세 시위 아우내 보다 20일 먼저 임. 본정통으로 행진
필경소
15:38 ~ 16:05(16:10계획) : 강경 젓갈 시장
평양, 대구에 이어 중요한 시장
1포 원산 2포 강경 내륙항
강경제1교회 근대전시관
19:11 : 인천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