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을 주목한다___유종인
갈라진 완성의 시학
──손현숙 작품론
유종인
1. 이격離隔하라, 그리하여 놀란 눈을 가져라
어디다 대고 눈을 부라릴까. 흡뜬 눈 속에 보름 가까운 달이 떠 있을라 치면, 그것 환난인가 환약인가. 나는 나의 삶에 대해, 아니 삶이 내게 제 살을 뜯어 먹이며 꾸역꾸역 살라는 느낌일 때, 조증躁症인가 울증鬱症인가. 가늠해보면 모든 게 가능해지는가, 삶은 나의 연출을, 아무려나 순순히 받아들여주려는가. 먼 훗날 나의 무덤에 평일에도 발소리 잦다면 그것은 영원한 팬들의 발길인가, 도시개발에 따른 이장移葬과 파묘破墓의 수순인가. 적어도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내 수중에 놀아나야 한다. 그렇다면 삶은 죽음에 놀아나는가 죽음이 삶에 와 그늘처럼 능놀고 있는가. 그러니, 떨어뜨려 놓고 봐야 할까, 샴siam처럼 한데 붙여놓고 몰아서 봐야 할까.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건너가는 일 밖에서 안으로 드는 거다 금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얼굴, 한 번도 다문 적 없는 입술 같다 등 뒤로 천 길 낭떠러지 나를 따라 올라오거나 말거나 손끝으로 짚어가는 불협화음처럼 북한산 만경대 피아놋길 치고 올라섰는데 협곡, 바위와 바위 사이로 하늘 시퍼렇게 쏟아진다 아차, 순간 발 빠뜨린다면 오늘이 내 길의 완성이겠다 다리를 멀리 뻗어 훌쩍, 날아야 할까 보다 누가 자꾸 뒷골 잡아당기는 여기! 최후의 결심인 듯 최초의 문장처럼 가볍게 남쪽으로 바람의 등을 타야 하는
──「매혹, 갈라진 바위」 전문
갈라진 길을 올라왔다. 시는, 여기서부터 불협화음을 관음觀淫한다. 길조차 갈라진 속내의 단단함이며 개척의 코드로 읽힌다. 그걸 밟고 올라서는 일이 새뜻하다. 그녀에겐 길은 갈라진 혹은 타개진 어떤 내막을 열어 보인 이미지로 활성화된다. 천년 허공의 칼을 돌올해진 지상을 가른 것이 길인 셈이다. 그것은 분열이라기보다는 분산分散이자 개도開道의 뉘앙스로 여사여사하다. 그리하여 어떤 길은 서로 봉합이 안 된 절연絶緣을 마주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길이 아래로 한없이 물러빠진, 협곡의 이미지일 게다. 이 협곡은 결국 길로 이미지화된 삶의 허방, 죽음의 대리청정이 낙차를 보이는 나락奈落의 대목으로 돌올해진다. 그리하여 가파른 이제까지의 길이 깊이 모를 협곡 아래로 발길을 내딛는다면, 삶은 급격이 “오늘이 내 길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갈라진다는 것은 새로운 길의 이미지와 함께 삶의 격변을 수용하는 지경을 담고 있다. “순간 발 빠뜨린다면” 그것은 갈라진 곳에서 영영 갈린 삶의 저편을 보는, 궂긴 일을 치를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갈라진 대상을 수용하는 방식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법적 모색을 불러온다. 이제껏 걸어왔다면 지금에는 “다리를 멀리 뻗어 훌쩍, 날아야 할까” 하고 방법적 변신들, 그러니 우리는 날개 없는 새처럼 자신의 병신을 다시금 확인하고 써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갈라진 곳에서 내가 어떻게 태생적으로 갈려 나왔는가 곱씹는 변별점, 그 변곡점變曲點에서 발돋음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손현숙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소리치는 게 아닌가. 이격離隔하라, 이제껏 내 몸(맘)은 내 몸(맘)이 아니었다. 달리 만나러 가야 한다, 놀란 눈으로 나를 다시 읽어야 한다. 스스로를 재우친다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계절에 딱 맞추어서/ 옷 갈아입었던 기억 없다 남들보다/ 이르거나 조금 늦게 털신을 벗거나 샌들을 신었다/ 사랑도 나 혼자 서둘러 빠져들었다/ 돌아다보면 이미 상처는 깊어서/ 혼자 돌아오는 길 캄캄했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문장들도/ 요리책 속의 소금 약간 설탕 약간/ 그것들 이해하기까지는 왕창, 왕창,/ 쓰고 단맛 뒤끝을 본 후였다/ 그러나 소나기 쏟아지고/ 무지개 발 물에 묻듯/ 겨울밤 홍매화 움틔우는 소리,/ 부정형의 엇박자로/ 경계를 넘어가는 꽃잎, 바람, 나비…,
──「딱 덜어서?」 부분
경험이 주체를 새삼 일으킨다, 아니 일깨운다, 는 말이 맞다면 그녀는 생각이 사물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이제 “덜어”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생래적으로 그것은 모든 불가능한 영역들로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곧 하나의 문장들로 구성된 자신의 시간들을 체험의 후기後記 속에서 이뤄낸다. 선험先驗이 아닌 감각感覺의 절승絶勝에 오르기 위해 그녀는 “사랑도 나 혼자 서둘러 빠져”드는 혼신渾身을 가지려 한다. 그 사랑의 열도熱度를 따라 부화하듯 뒤미처 닿아오는 것들, 그것은 화자가 혼신의 “왕창, 왕창”과 “쓰고 단맛”의 “뒤끝”을 본 뒤에 열리는 정예精銳의 진수로서의 “약간”인 것이다. 이것은 부족의 의미소가 아니라 적확한 것으로써의 생의 과녁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 과녁에 가 닿기 위한 혼신의 일상이 그녀의 시에 두루 편재遍在한 바를 움직씨, 즉 무수한 동사형動詞形으로 열어 보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매번 과녁을 빗나가는 자신의 움직임, 즉 감각적 “엇박자”에 고무돼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영원한 “부정형의 엇박자”니 그녀는 매번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현상의 배후들에게 떠들릴 수밖에 없다. 그 들린 소리들을 그녀는 받아들이고 교정하고 다시 본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를 일으키고 나의 감각으로 수용된다. 즉, 나와 이격離隔된 “부정형不定形의 엇박자”들로 나를 “움 틔우는 소리”인 것이다. 갈라진, 갈린 상태로 나와 이별로 만나는 것들, 그 속에 새뜻하게 나는 “내가 제일 힘들었던 문장들”을 몸소 알아가게 된다. 나의 살과 피와 오장육부가 갈마든 문장들로 추수되는 바를 왕창 자신을 투척한 후에 “약간”의 정밀精密함으로 되돌려 받는, 손현숙은 그런 “경계를 넘어가는 꽃잎, 바람, 나비”들에 자신의 감각도 도져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것은 덧붙이는 바가 아니라 “덜어”내는 바로 모든 짐작과 예측을 가라앉히는 본질적인 소용所用 속에서 “캄캄”할 수밖에 없다. 이 캄캄함이야말로 모든 갈라진 상태와 갈린 현실 속에서 그녀가 마주하는 가장 정직한 감각의 잠재태潛在態가 아닐 수 없다. 협곡을 넘어가기 위한, 길을 횡단하기 위한 이런 도전은 그러기 때문에 그녀를 활성화시킬 수밖에 없다. 무수한 갈등의 외연外延들을 즐기는 그녀의 문장들은, 그래서 캄캄한 채로 더 활기와 열기를 동반하는 이상한 즐거움을 품어낸다. 제목처럼 덜어내지 못한 과오를 후회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그렇다면 앞으로 더욱 “덜어서?”라고 모든 사물들, 아니 무수한 행위의 주체인 자신에게 주문하듯 묻는다. 어찌할 것이냐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딱” 그만큼만 자신의 순도純度와 정밀精謐한 소용所用에 가닿을 수 있지 않느냐는, 이상한 희망을 가동시킨다. 후회가 막급한 상황이 아니라 후회가 다른 무언가로 전환되는, 그러기에 그것은 자연自然의 어순語順을 따르는 그녀의 문장으로 되새김질된다. “부정형”에다 “엇박자”지만 그게 오히려 “경계를 넘어가는” 보편의 움직씨를 가진 미적이들로 늡늡해진다.
막다른 골목이다 굵은 가지 끝 꽃눈 매달았다 꼬깃꼬깃 속고갱이 까맣게 불탄 자리 물 흠뻑 빨기도 전 피딱지처럼 반이 말랐다 꽃 필까, 말까, 엉거주춤 부푼 중심 왼발 오른발 뒷간처럼 척, 걸쳤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때, 저녁 노을이 집어삼킨 신호등 불빛 같다 무심코 들고 나지 못하겠다 자기 체온으로 자기 몸을 덥히는 듯 멀쩡하게 꽃눈 달고 꽃망울 왜 터트리지 못하나 뒤태 단정하게 저버리지도 못하면서 목젖까지 물올라 입술 꼭 다물어버린// 저, 꽃년! 아흐~ 수령 오십 넘었다
──「꽃년」 전문
“막다른”이란 구절은 결국 무수히 갈라진 것들을 수습하듯 한 길로 몰아가는 전위前衛의 마중물 같은 것일 게다. 흩어진, 아니 무수한 선택적 상황을 한 곳으로 몰아야 가능해진 저 “꽃눈” 매단 “굵은 가지”는 그래서 “속고갱이 까맣게 불탄 자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것이 바로 ‘고통의 자연自然’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연은 염세厭世를 가질 수가 없다. 천연天然에게 몰락조차 하나의 변화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죽음도 그러하기에 따로 무덤을 쓰지 않는 바가 있고, 따로이 꽃을 수식하는 꽃나무는 없음이다. 그저 “꽃필까, 말까”라는 생태적인 과정이 있을 뿐, 그것은 무수한 자연의 갈래에 배어있는 숨결 같은 것으로 오롯할 따름이다. 그것은 “자기 체온으로 자기 몸을 덥히는 듯” 여기까지 온 갈래길의 도정道程일 수밖에 없음이니, 거기에 어서 꽃 터져라! 애달퍼 하는 것도 저 꽃나무에 갈마든 제 몸이 꽃가지를 어느 새 들고 있음이 아닌가. 그러니, 호칭이 다시 갈린다. 꽃나무의 꽃가지가 아니라, 그저 저 “꽃년!”으로 팔을 들고 있음이다. 이렇게 갈린 호칭 아래서 그 꽃나무는 손현숙 꽃나무 꽃년으로 “목젖까지 물올라 입술 꼭 다물어” 버리고 스스로를 불러 마지 않는다. “아흐~” 이 감탄사에는 목젖까지 물이 올라 있음이다.
동물과의 대화 책 276쪽을 넘기다/ 호랑이 한 마리 커다란 나무 틈새로/ 날카로운 발톱을 박고 섰다 자기 냄새를/ 깊이 박아 넣고 있는 거다// 다빈치도 모나리자의 어깨 너머로/ 동맥처럼 굵고 시퍼런 강줄기를 굽이치게 그렸다/ 나다르의 사진관이 떼돈을 벌었던 이유도/ 인물 뒤에 호화저택을 배경으로 깔았기 때문이다// 산책길 장군이가 담벼락에 오줌 눈다/ 아무 때나 제 뒷다리 드는 수작?/ 한강 둔치 뚝섬 벤치에서 먹고 자면서/ 저 남자, 트렁크를 달팽이집처럼 끌고 다닌다/ 한강을 자기 집 연못이라 왜, 자꾸 우긴다
──「영역표시」 부분
선택적 상황으로 우리는 갈려있다. 그 갈려짐이 우리를 두루 편재遍在하며 산재散在하며 살게 한다. 어떠한 선택도 자기가 맞아들이는 새로운 시간이다. 공통의 삶임에도 별이別異의 공간이며 이채로운 시간일 수밖에 없다. 부화뇌동으로써의 동이불화同而不和는 결코 갈래나 갈려진 완성으로 치달을 수가 없다. 다빈치가 “모나리자의 어깨 너머로/ 동맥처럼 굵고 시퍼런 강줄기를 굽이치게 그”린 것도 “나다르의 사진관이” “인물 뒤에 호화저택을 배경으로 깔았”던 것도 갈려짐, 즉 선택의 공포를 이겨낸 몰아沒我의 확신과 청신한 고집에 있지 않았을까. 그 갈림, 갈라짐의 기로에서 우리는 나와 다르게 사는 삶의 풍채를 보게 된다. 결국 서로 다른 시간의 풍경을 연출하는 이런 나름의 “영역표시”야말로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줄 수 없는 절체절명의 푸른 고집으로써의 예술의 길과도 맞닿아 있다.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넘어선 곳에 삶이 천연天然의 고유한 빛깔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과연 좋은가, 살만한가, 내게 맞는가, 가만히 즐거운가, 에 맞춰진 포인트에 따라 우리는 “한강 둔치 뚝섬 벤치에서 먹고 자면서”도 그리 궁색하다 할 수가 없지 않을까. “트렁크를 달팽이집처럼 끌고 다니”면서도 “한강을 자기 집 연못이라” 우기는 그 사내의 삶에 우리는 그저 선처善處가 들어앉았다 하면 되지 않을까. 그걸 그럴 수 있구나, 라고 볼 때, 내 삶도 하나의 개연성蓋然性의 한 여줄가리로 보여지지 않을까. 그러함에 모든 삶은 우기는 바가 아니라 서로를 우려내는, 가만히 웃기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난장이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삶은 늘 생각했던 대로 간동하거나 간정되지 않는다.
허깨비처럼 바지에 붙어있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렀다 뺐다 옥수수 알갱이나 입속에서 터트리면서 멍~ 모니터 속 ‘세상에 이런 일이’ 입술 사이로 피식 웃다가 깜빡 졸다가 화장실 들락거리면서 거품비누 손이나 열심히 씻어보지만 오늘은 애가 왜 더 수척해 보이더라 담담한 척, 멀리서부터 이미 시작된 슬픔 꾸역꾸역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와서 제 힘으로 일어섰다 무너지는 속수다 무책이다 여기까지냐 심장의 박동이나 겨우 붙들어서 다 왔다, 제 스스로 무섭게 몸을 깨뜨리는 딸아, 환자복 속으로 배를 쓸어주다가, 손톱이나 톡, 톡, 깎아주면서 듬성듬성 자라난 눈썹 산이나 밀어주면서…,
──「파도」 부분
아픔은 아픔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그저 “수척해”진 몸을 몸이 만났다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다. “제 스스로 무섭게 몸을 깨뜨리는 딸”을 아픔으로 열람할 수밖에 없다. 그저 “환자복 속으로 배를 쓸어주”거나 “손톱이나 톡, 톡, 깎아주면서” 아픔을 지극히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지만, 어떠한 고수련도 박명薄命을 화들짝 깨어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엄마와 딸이 갈린 몸이기 때문이다. 내 속에서 나왔지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갈린 몸들이 서로 아파하는 맘과 아픈 몸으로 이격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생적인 갈림의 몸, 갈라진 마음의 생태를 우리는 저주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극해진 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무상無償의 것을 마음 안에 둥두렷이 아픈 달처럼 띄운 다음에야, 우리가 아직도 갈라진 몸과 맘으로 서로를 잇고 있구나, 눈물로 축수祝手하게 된다. 그러니 더듬을 수 있고, 매만질 수 있으며 쓰다듬을 수 있고, 감정의 얼굴을 지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런 말, ‘신神, 하느님은 모든 곳에 자신을 보낼 수 없어 어머니를 있게 했다’는 전언 말이다. 천상의 직무유기와 태만에 대한 이런 직무대리며, 사랑의 수렴청정이야말로 누가 힐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건 아픔을 거느린 사랑의 파도로 전이된다. 갈리고 갈린 몸과 맘을 다시 잇고저 하는 연리지連理枝, 그 속수무책이야말로 사랑의 부정형不定形, 아니 모든 부정형不定形으로 완성되는 사랑의 갈래를 아우르게 한다. 만일 고정된 무엇으로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입석立石에 불과하다. 파도는 부정형不定形이 정형定形이다. 이걸 버리고서야 파도가 파도랄 수가 없다. 그것은 바다의 파산이며 적멸이다. 파도로 입사入射된 모정이야말로 수많은 움직씨, 서술적 행위의 연쇄를 낳는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수많은 아픔에의 대응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갈라진 것은 그래서 갈린 것의 고유함을 기꺼워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마음이 붙으니, 그 지극함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이 끼쳐들 수밖에 없다. 손현숙이 분주하게, 열심히, 무수하게 열어 보이는, 열어 보이고자 하는 눈길에는 결코 홀겹일 수 없는 삶의 도처가 있다. 무수히 갈라진 것들로 무수한 난산難産에도 불구하고 갈라진 맥락을 짚어나가게 하는, 그 갈등의 연옥불에서 그녀는 오히려 매혹을 본다. 어쩔 것인가, 이 소소하고 신산한 환난이야말로 그녀가 “너 꽃년!” 하고 불러서 내 편으로 만들 만한 새뜻한 지경이 아닌가. 작두를 타는 무녀는, 제 몸이 갈라지더라도 작두를 두려워할 수가 없다. 맘이 이미 든든히 작두를 타고 있으니, 갈리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미신迷信으로 갈린 마음을 다시 모으기 위해 무녀는 무수히 헛되이 갈리고 베일 것이란 통념의 날 위에 두 발을 얹는 것이다. 또 다른 신명으로 갈려나온 것, 그곳을 향해 무수히 자신을 갈리고 갈라내는 작업이야말로 손현숙이 자신을 세우는 생활무生活巫이자 시무詩巫의 몸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꽃년!”하고 부르면, 누구라도 한번 마음으로 비나리를 하며 버력이나 노숙자에게도 덩달아 ‘꽃년! 꽃놈!’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유종인 /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가 당선,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수수밭 전별기』, 『교우록』, 『아껴 먹는 슬픔』이 있고, 산문집 『염전』 『산책』이 있다.
출처: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