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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작은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智略)이 많았다. 진덕여왕 때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唐)나라에까지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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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에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이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의 연속이었다.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661) 옹산성(甕山城:지금의 大德郡 懷德面)과 우술성(雨述城)에 웅거하던 백제잔적(百濟殘賊)을 공파하여 항복을 받고 그곳에 웅현성(熊峴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에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지금의 居昌), 거물성(居勿城), 사평성(沙平城), 덕안성(德安城)의 백제잔적을 정벌하였다. 이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의 중심인물은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福信)과 승려인 도침(道琛)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周留城:지금의 韓山, 또는 扶安이라는 설이 있음.)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熊津城)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孫仁師)의 증원병과 연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任存城:지금의 大興)마저 정복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문무왕은 664년 백제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熊津都督)부여 융(扶餘隆)과 화맹(和盟)을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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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위하던 해 당나라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 한편,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金仁問), 진주(眞珠) 등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호응하였다. 대동강을 통하여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던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여 662년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군량까지 보급하게 하였으나 소정방은 당나라로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한림(漢林)과 삼광(三光)을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고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新城:지금의 奉天), 부여성(扶餘城) 등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파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공격하므로 문무왕도 6월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金欽純)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영(唐營)에 파견하여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9월 보장왕(寶臧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將士)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묘(先祖廟)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하여 평양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의 항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운동 중에서도 특히 수림성(水臨城)사람으로 대형(大兄)인 검모잠(劍牟岑)의 활동이 가장 두르러졌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맞이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다음 4천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므로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金馬渚:지금의 益山)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高句麗王:뒤의 報德王)에 봉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부흥운동도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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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이 옛 백제땅인 금마저에 안승을 맞아들인 것도 고구려부흥운동과 연결하여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웅진도독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편, 문무왕은 670년 품일(品日), 문충(文忠)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취하여 그곳의 인민을 신라의 내지로 옮기고, 천존(天存) 등은 7성을, 군관(軍官)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竹旨) 등이 가림성(加林城:지금의 林川)을 거쳐 석성(石城:지금의 林川 동쪽)전투에서 당군 3천5백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摠管)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하여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사비성(泗#비41城:지금의 扶餘)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척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온 당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이래로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해옴으로써 신라는 한강으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군과 여러 차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 大摠管)으로 삼아 침략해옴과 동시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여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장군 문훈(文訓)은 이를 격파하여 1천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근행(李謹行)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므로 신라군은 매초성(買肖城:지금의 楊州)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지벌포(伎伐浦)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결국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이와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증가한 중앙관부(中央官府)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하여 불가피한 조처였던 것이다.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잡19飡) 문왕(文王)을 비롯한 문훈, 진복(眞福), 지경(智鏡), 예원(禮元), 천광(天光), 춘장(春長),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지경, 예원과 같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671년과 672년에 걸쳐 병부(兵部), 창부(倉部), 예부(禮部), 사정부(司正府)와 같은 중앙관부의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史)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대에 이미 소경(小京)을 설치한 중원(中原)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통일한 후인 678년 북원소경(北原小京)을, 680년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어 왕경(王京)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小京制)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군사조직은 신라민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停)이었다. 여기에서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해인 672년에 백제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해 장창당(長槍幢)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었다. 이로써 보면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대에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문무왕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州誓)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문무왕의 체제정비작업은 675년 백사(百司)와 주군(州郡)의 동인(銅印)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호는 문무(文武)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甘浦)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海中王陵)인 대왕암(大王巖)이다 |
문무대왕릉 앞 바닷가의 거리모습
대왕릉 앞바닷가의 오징어 덕장
나들이 가족들
감은사지 석탑 - 문화재 보수공사중에 있다.
이견대 [利見臺]
경북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대본리(臺本里)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는 신라시대의 유적.
소재지 경북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대본리(臺本里) 감은사(感恩寺) 터
시대 신라시대
지정 사적 제159호
규모 지정면적 4,135㎡
이견대 / 경북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사적 제159호. 신라시대.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 무덤인 해중왕릉 대왕암이 보이는 감은사지 앞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감은사지 금당 뜰아래에 동쪽으로 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올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불렀다.
이견대란 《주역(周易)》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千利見大人)’에서 나온 것이다.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부왕인 문무왕의 해중능묘(海中陵墓)를 망배(望拜)하기 위해 지었다는 곳으로, 1970년 그 건물터를 발견하여 새로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곳은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죽은 문무왕의 화신(化身)이라는 용을 보았다고 전하는 곳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와도 유관한 유서깊은 유적이다.
*** <참고> 신라시대 연대기(즉위순) ***
1
박혁거세 BC 57
기원전 오랫옛날 지금의 경주지방에 6개의 작은부락(진한6부)
나정이라는 우물옆에 커다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BC 57년 6부촌장에 의해 서라벌 나라 세움
즉위 21년에 수도에 금성을 쌓아.
서라벌 남쪽끝 다파나국 왕비가 낳은알이 아진포(영일만)에 도착
아진의선에 의해 거두어 석탈해가 태어나 자라면서 능력발휘
박혁거세 즉위 62년에 죽어
경주오릉 (박혁거세, 알영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2
남해왕 4년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
박,석,김 세부족이 번갈아가며 왕위에 오르다가 내물왕부터 김씨
중국호칭인 왕대신 거서간(밝은태양), 차차응(무당), 이사금(연장자) 마립간(우두머리로 훗날 OO마님 유래)
3
유리왕 24년
태평성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가악인 도솔가 울려퍼져.
행정구역 6부로 고치고 관리들에게 이,최,손,정,배,설씨 성을주고
6부의 아녀자들로 하여금 배짜기 대회 열어 오늘날 추석의 유래
가야국
42년 낙동강 유역 9개 마을에 하늘에서 내린 금궤짝에서 6개의알
김수로 9개마을 합쳐 가야라 칭하고 금관가야(김해) 맡고
동생들은 각각 대(고령), 소(고성), 아라(함안), 고령(진주),
성산가야(성주)를 다스려
가실왕때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 악기 만들게 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가야 멸망하고 진흥왕에게 귀화
신라 법흥왕에 의해 멸망, 진흥왕에 의해 대가야 멸망
4
탈해왕 57년
62세의 나이로 임금
탈해이사금 9년에 시림이라는 숲어서 닭이 울던자리(계림)에
금빛상자에서 아기가 태어나자 김알지라 지음.
5
파사왕 101년 유리왕의 둘째아들 외세 대비
6
지마왕 112년 박파사의 아들
왜국과 화친맺고, 백제 기루왕과 함께 말갈족 침입 물리쳐
7
일성왕 134년 유리왕의 손자
8
아달라 154년
연오랑과 세오녀 왜국으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되고
그무렵 서라벌에 빛을 읽었다가 세오녀의 비단띠를 가져와 회복
사람들은 빛을 다시 찾은 그곳을 영일현(영일만)이라 함
13
미추왕 김알지의 6대 자손 김씨 왕 시작
17
내물왕 356년 이사금호칭을 마립간(대장군)으로 바꾸어 김씨 세습
왜군물리치기 위해 토함산에 허수아비 만들어 지킴.
고구려광개토왕에게 왕족아들(대서지 아들 실성이) 볼모로 보내
402년 죽음
18
실성왕 402년
자신을 볼모로 보낸 선왕에 복수 둘째아들 고구려, 셋째 왜국볼모
큰아들 눌지마저 암살시키려다 실패
19
눌지왕 417년 실성왕 해치우고 왕이 됨
박제상으로 하여금 고구려 볼모로 간 둘째아들 구하고
왜국에간 셋째마저 구한뒤 왜국의 고문으로 죽음.
고구려 승려 묵호자에 의해 불교 전파
20
자비왕 서라벌에 태평성대
백결선생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소리 내어
왜국 수차례 침입으로 삼년산성쌓으며 국방력 키워
고구려 장수왕 백제침입하여 개로왕 죽음
21
소지왕 479년 고구려와 왜인의 잦은 공격 493년 백제 동성왕과 혼인동맹
22
지증왕 502년 농업장려책 우경법 시작 순장제도 금지
국호신라사용, 국왕이름 사용 (이사금 --> 마립간 --> 국왕)
512년 이사부 우산국(울릉도) 정벌
23
법흥왕 514년 520년 율령(형률과법령) 반포, 신하들의 옷색깔 구분
527년 불교싫어하는 신하들 설득위해 이차돈 순교로 불교인정
532년 금관가야 정복 (김무력 얻음)
24
진흥왕 537년 545년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 편찬
552년 백제성왕 공격하여 승리
553년 백제 재침입때 김무력에 의해 승리, 백제성왕 죽음
단양에 적성비 순수비(북한산,창녕,마운령,황초령)세워
562년 대가야 정복
576년 화랑제도 도입
25
진지왕 576년 진흥왕의 둘째아들
주색에 빠져 귀족들의 화백제도에서 폐위결정
26
진평왕 579년 화랑도 장려로 원광법사에 의한 세속5계
(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상유택)
김춘추(진지왕의 손자)와 김유신(김무력의 손자)
김서현(김유신 아버지)는 진흥왕 친동생의 딸인 만명과 사랑
-김서현이 진천태수로 임명되자 만명과 함께 떠나 김유신을 얻음
27
선덕여왕 (진평왕맏딸)
골품제도에 의해 성골이 아니면 왕이 될수 없으나 남자가 없어.
김유신의 여동생 꿈(소변)으로 김춘추와 인연맺어 결혼한뒤
후에 삼국통일을 하는 문무왕을 낳는다.
첨성대 , 황룡사 9층탑
642년 백제의자왕의 침입 -> 김춘추 고구려(연개소문)에 지원요청
고구려 거절하자 당나라에 지원요청(당태종 안시성전투 애꾸눈)
28
진덕여왕 647년
648년 당나라와 친교(나당동맹)
백제의 잦은 공격에 김유신 활약
29
무열왕 654년 진골에서 첫 왕이 된 김춘추
660년 당나라 소정방 13만대군과 함께 백제 의자왕 침공
백제 계백장군과의 황산벌전투에서 관창활약으로 승리 백제멸망
661년 즉위 8면만에 죽음
30
문무왕 671년
661년 원효대사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가다 해골물에서 깨우침
- 모든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철학서<금강삼매경론>저술
- 의상은 당에서 불교연구 화엄종 일으키고 부석사 세워.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나당연합군 고구려 침공
668년 고구려 멸망 (주몽~보장왕 705년)
- 당나라 평샹성에 안동도호부(설인귀)
673년 당나라와 전투벌어지던 시기에 김유신 죽음
- (42대 흥덕왕은 흥무왕 칭호 하사)
- 첫전투 패배후 22번의 싸움에서 승리
675년 매소성전투 20만 당나라대군 물리쳐
- 기벌포(금강하구)에서의 마지막 전투후 당나라 물러남
- 평양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을 밀어내
676년 삼국통일
31
신문왕 (문무왕아들)
통일된 나라 다스리기 위해 9주(도독)5소경 행정구역 정리
단나라와의 교역 시작하여 산둥반도에 신라방이라는 마을생겨
35
경덕왕 751년 751년 김대성의 불국사
- 재상 김문량의 꿈속에 모량이에 살던 김대성이 환생할것이다.
- 모량리에서 가난하게 살던 대성이는 전재산인 땅을 부처에
시주하고 죽음
- 다시태어난 아기의 손바닥에 김대성이라는 이름새겨져.
- 전생의 부모위해 석굴암, 현생의 부모위해 불국사 세워
771년 성덕대왕 신종 주조
42
흥덕왕 828년 802년 가야산 해인사 창건
장보고
-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무예뛰어나 당나라에서 무령군소장 벼슬
- 828년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에서 해적소탕
- 836년 흥덕왕 죽자 왕권위한 권력싸움 심해
43
희강왕 874년
왕의 조카인 제륭이 사촌형제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2년만에 김명에게 피살
44
민애왕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
45
신무왕 균정의 아들, 장보고의 도움으로 민애왕 몰아내고 왕위 4개월만에 죽음
46
문성왕 신무왕의 아들 장보고 시기하던 귀족들에 의해 암살.
51
진성여왕 887년 골품제도에 의한 내부 균열심해
궁예와 견훤의 반란을 막지못해 국력 약화
6두품인 최치원 등용
<삼대목> 신라의 향가를 모은 책
52
효공왕 897년 900년 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 궁예 송악에서 후고구려 건국
후삼국시대(발해, 후고구려, 수백제, 신라)
918년 왕건 궁예 몰아내고 고려 건국
55
경애왕 927년 견훤공격으로 경애왕 자결
56
경순왕 927년 왕건 공산(팔공산)에서의 전투에서 패배 - 신숭겸, 김락 죽음.
928년 왕건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
930년 고려 유금필장군 활약으로 견훤 크게 이김
견훤 금강을 태자로 삼자 신검형제가 금강을 죽이고 반란.
-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어. → 탈출하여 고려에 항복
935년 신라경순왕 고려에 항복하여 56왕 992년만에 무너져
- 마의태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절개지킴(용문사 은행나무 심어)
936년 후백제 항복. 고려건국 18년만에 후삼국 통일
sunset
첫댓글 문무대왕 추모대제가 있었나 보네요.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
감사히 잘읽고갑니다..오랫동안 잊고잇었던 신라역사를 다시보는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