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최고봉은 대견봉(大見峰:1,084m)으로서 정상의 바위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슬(琵瑟)’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쪽으로 조화봉(照華峰:1,058m)·관기봉(觀機峰:990m)과 이어지며, 유가사(瑜伽寺) 쪽에서 올려다 보면 정상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역삼각형의 능선이 비상하는 자세로 우뚝 솟아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너른 현풍들을 휘 감고도는 낙동강이 도도하고, 봄철에는 철쭉·진달래, 가을에는 억새 군락이 볼 만하다.
이 비슬산에 새로운 명소가 생겨났다. 유가사를 바라보며 숨가프게 올라가다보면 유가면 양리 기슭에 전투기형태의 새로운 기념관이 지어진 것이다. 곧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이다.1300여평의 너른 대지위에 비행사 복장의 유장군께서 엄지손가락을 지켜든 늠름한 모습으로 동상을 세웠다. 그 아래로는 전공추모비와 빨간 마후라 노래비를 세워져있고 2대의 전투기(F-86, T-37C)가 동상을 옹위하듯 벌여서있다. 새하얀 기념관에는 전시실과 영상실, 전망공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영상실에는 빨간마후라가 상영되고 있다. 유장군의 역활을 맡고있는 신영균의 믿음직한 모습이 오래도록 시선을 사로 잡는다.
본래 유치곤장군(兪致坤, 1927∼1965)의 고향은 기념관이 서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쌍계리라고 한다. 이곳은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대대로 척박한 토지를 일구었으니 생활이 넉넉할리 없었겠지만,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하였으니 산수가 좋아야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 했다.비슬산의 웅장한 기상이 유장군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낳았나보다. 그의 경력에는 1944년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약관 17세 때의 일이다. 이때부터 벌써 남다른 기록을 기록보유자가 될 수 있었던 자질을 드러낸 셈이다. 광복 후 1949년 12월에 공군에 입대해 1951년 4월 10일 공군 소위로 현지 임관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장군의 현저한 수훈이라면, 무엇보다도 1952년 1월 15일에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서 고난도의 1500피트(457.2m) 초저공 비행으로 소정의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불멸의 전공을 세우게 된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UN 공군이 전략상의 승기를 잡는 핵심작전으로 설정하고 500여 차례 공격으로 폭파를 시도하였지만 끝내 파괴하지 못했던 난공의 요해처였던 것이다. 당시에 유장군이 감행했던 초저공 비행은 적의 대공망을 피하여 목표물에 접근하기위한 최선의 대책이었지만 성공할 수 있는 확율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최정예의 연합군 비행단에서도 속수무책의 미제(未濟)였다. 그러나 우리의 공군이 독자적으로 이러한 난제를 단번에 해결하였으니, 국군의 위상을 한껏 드높힌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승호리 출격에 앞서 작전 브리핑을 받고있는 유장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 의외로 긴장하는 빛이라곤 찾아볼 수없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쳐 여유롭게 웃고있는 모습이다. 그 의연한 모습에는 이미 임무수행 성공에 대한 확신이 차있음을 알 수있겠다. 과연 유장군의 출격으로 난공불락의 장애가 제거되면서 아군의 전세가 호전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유장군의 탁월한 비행술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만, 이러한 기적적인 전공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평소 목숨을 내건 투철한 호국정신으로 무장한 장군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근래 세간에는 독도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대한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해당 드라마에서는 왜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는 충무공의 신출귀몰한 전술을 단순한 테크닉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성실성을 바탕으로 구현할 수있는 충무공의 위대한 호국정신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유장군의 혁혁한 전공도 그러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후에도 평양 대폭격작전을 비롯하여 강원 고성지역의 351고지 탈환작전, 송림제철소 폭파작전 등 한국 공군이 출격한 주요 작전마다 빠짐없이 참전해 빛나는 전공을 세워나갔다. 이러한 6.25 전쟁 중에 혁혁한 전공을 쌓았던 탓에 을지무공 훈장과 충무무공 훈장을 각 3회, 미 공군 비행훈장 등을 받았다. 1951년 10월 11일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 조종사로 첫 출격을 시작한 이래 1953년 5월 30일 한국 공군 역사상 유일하게 최다 출격기록(203회)을 돌파한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기념행사는 성황을 이루었다. 연도의 일렬로 주차한 차량행렬이 족히 2Km는 되겠다. 공군의 삼성장군이 행사에 직접 참여하였고 축하비행도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니, 공군당국의 관심도를 짐작할만하다. 그리고 관할 관청에서는 지역출신의 유장군의 업적을 대외적으로 알리기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유장군 추모비는 동상의 좌측에는 까만 오석에 백색글씨로 정갈하게 새겨져있다.
"유박사께서 유장군 추모비를 직접 쓰셨으니, 이 기념관과 함께 영구히 후세에 전해질테지요"
이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내려오신 신임 대종회장님의 공치사에 유창균 박사님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신다.
"이러한 행사가 우리 문중이 나서서 주도한 것이 아니고, 온전히 지역민과 공군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더욱 값진 것이 아니겠어요?"
회장님의 말씀에는 은연중에 문중의 자긍심이 배어난다.
첫댓글 인당 부회장님 우리 역사에 남을 좋은 자료와 위치 감사합니다 여름 방학 때 한번 찾아 봐야 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예전에 올려졌던 자료를 통해 간략한 내용만 숙지했습니다만, 좀더 자세한 정보를 보니 유장군의 애국심을 절실하게 느낄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어 감사드립니다. 지난해부터 세운다던 기념관이 드뎌 완공되였군요. 영화 빨간마후라는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철원의 한탄강에 놓여저 있는 승일교를 대용으로 하여 촬영하였으며 주역은 신성일,이대엽,최무룡과 최은희였습니다. 이영화촬영하는 모습을 보려고 집에서 6km정도
되는 승일교다리까지 촬영때마다 따라다니곤 하였지요. 그 당시는 순전히 걸어서 다닐 때였습니다. 글,그림과 정보 대단히 감사합니다. 언젠가 한번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슬산에 2년전에 영재랑 산행다녀왔지요,한번더 영재랑 가봐야 하겠읍니다,유치곤장군님도 뵙고 산행도 하구요,좋은 자료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빨간마후라..인상적입니다..
작년 겨울에 비슬산을 다녀 왔는데 정말로 풍광이 그만이더군요 그러한 곳에 우리의 장군님의 기념관이 설립되었다니 한번 더 가서 인사드려야지...^0^
이글을보면서 머리털이 하늘로 치솟는듯한 충동을느낍니다 저는 월남전투를 해봐선지 이런훌륭한작전 성공에는 일가 장군님의 뼈를깍는 고뇌도 엿보이는듯합니다 아무튼 가문의 광영이라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유병화(1933炳 영광스런운행사에 참석도 못하고 훌륭한자료를접하게되니 한편으로는 쑥스러운생각마저드는군요! 좋은자료감사합니다.
늦게나마 좋은 자료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