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좋아하는 옥봉의 저자 장정희 소설가님의 글 그대로입니다.]
차례차례 피는 꽃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은 되었지만 제대로 청탁 한번 받아보지 못하다가 그로부터 10여년 후에야,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문예 잡지로 등단하게 된 것은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였다.(박완서 작가도 나이 마흔에 등단했다는데... 라며 위안 삼다가 세월 다 감.ㅜ)
등단이 늦은 이유야 재능 없음이 가장 크겠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맞닥뜨린 5.18. 그로 인한 방황과 무기력, 채무감, 지독한 자기 검열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던 탓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겨우겨우 80년대를 보내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지만, 육아와 맞벌이에 기진해진 몸으로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쓴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함께 공부하던 동인들이 하나둘 세상에 제 이름을 걸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듭된 낙선으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던 나는 밤마다 눈물로 베갯머리를 적시는 날이 늘어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있기 일쑤였다. 잠들지 않는 아이를 등에 업고 밤새 서성거리다 출근한 새벽부터 심야 야근까지 마치고 귀가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등이 휘도록 자판을 두들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불 빨래를 하려고 베갯잇을 벗겨내다 나는 손으로 황망히 두 눈을 가리고 말았다. 하얀 천으로 싸인 베갯속이 온통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던 까닭이었다. 밤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피로를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반듯이 눕기조차 힘들었던 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내 안에 열망은 무엇이었을까. 그즈음 불안과 초조로 방황하던 나를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는 글귀를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꽃은 없습니다. 어떤 꽃이든 오랫동안 끊임없이 준비하면서 핍니다…… 진달래가 피었다고 해서 철쭉도 같이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꽃을 피웁니다……
조팝나무꽃이 피었다고 싸리나무가 몸살을 앓거나 안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을 게으르고 못난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제가 꽃을 피워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피워야 할 때 피우는 꽃들이 모여 이 나라 산천을 꽃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
남들보다 늦게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꽃 한번 피우지 못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천천히 들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세요. 찔레꽃은 언제 피고 국화꽃은 언제 피는지, 그리고 그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 도종환의 산문 <차례차례 피는 꽃> 중에서
첫댓글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 맞아요. 그런데 기다리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잖아요.ㅠㅠ
친구가 다른 동창생의 근황을 알려줬어요. 대학 재수하면서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었는데, 지금은 대학교수님이래요.
친구들 중에 제일 잘 나간다고요.ㅎ 시작이 조금 다를 지언정 꾸준히 준비하면 되는데 저부터도 당장 눈 앞의 것만 보고 있어요.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욱 중요함을 압니다. 반성합니다.
이래도저래도 어려워서 난 그저 더디고 느리게라도 묵묵히 가 볼 참이야
차근차근 때를 기다려 준비된 꽃들만이 차례차례 활짝 피어나는 자연의 진실이 내게도 적용되리라 생각하며.. 오늘 맞이할 햇볕과 수분을 정성껏 사모하는 열정으로.. 폭풍이 휘몰아치듯 즐겁게 글쓰는 행복을.. 베갯잇을 적시는 고뇌의 순간을..
제게도 그런 찬란한 눈물과 통증의 열매를 위해, 늦꽃이 피기를 지치지 않고 정진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