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이 글은 3월24일자 <박흥식 감독과 박해일이 말하는 ‘인어공주’> 제하의 기사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인어공주'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 (사진제공=한국영상자료원) |
이동진=‘인어공주’는 촬영 당시에 확실히 날씨 때문에 감독님이나 배우들이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박해일=도시에서 촬영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그중 가장 힘들었던 것이 말씀하신 제주도의 날씨였죠. 하루에 눈만 빼고 다 오니까요. 비 오지, 바람 불지, 그러다 갑자기 해가 떨어지기도 하죠. 사실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은 저를 포함해서 그 작품만 하고 있었던 상황이기에 시간적 여유가 많았어요. 저희 배우나 스태프들은 솔직히 초반엔 그런 게 즐거움으로 다가왔어요. 날씨가 안 좋으면, ‘아, 오늘도 쉬는구나’ 싶은 게 피서 온 느낌이었으니까요.(웃음) 하지만 감독님은 계속 발을 동동 구르셨죠. 날이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지셨고요. 영화에서 보기엔 맑고 푸른 분위기가 제대로 나오는데 참 춥기도 했죠. 감독님, 저희가 우도에 몇 개월 있었죠?
박흥식=4개월 정도 있었죠. 10월부터 1월까지였으니까, 대부분 겨울이었어요. 화면에선 완전 여름으로 보이죠?(웃음) 영화 속에서 벌판이 푸르게 보였던 이유는 저희가 일일이 보리를 뿌렸기 때문이에요. 보리는 심은 지 보름쯤 지나면 싹이 파릇파릇 올라와요. 다른 방법이 없었죠.
박해일=고생이 많았어요. 그런데 간혹 낚시도 했는데, 거기가 또 어종이 특급이에요.(웃음) 아예 회칼을 들고 다녔죠. 그러면 감독님 낯빛이 더 안 좋아지시고.(웃음)
박흥식=영화를 찍으면서 박해일씨가 참 머리가 좋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대표적인 게 연순에게 진국이 “연꽃 연자에 순할 순자 쓰시죠?”라고 묻는 장면이었어요.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그냥 “이름이 뭐에요?”라고 진국이 물으면, 연순이가 “연순인디요”라고 답하는 평범한 장면이었죠. 그런데 그 장면 찍기 전에 박해일씨가 제게 오더니 “감독님, 어머님 성함을 주인공 이름으로 쓰신 거라면서요? 한자로 뭐라고 써요?”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연꽃 연자에 순할 순자”라고 했더니, “아, 지금 말씀하신 것 그대로 대사에 쓰면 안될까요?”라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러자 저도 그 뒤에 이어질 수 있는 연순의 대사가 바로 떠올랐어요. 그래서 “아, 그렇게 진국이 물어보면 연순이가 ‘그냥 연순인디요’라고 하면 되겠다”고 말했죠. 영화에 그 대사가 그대로 들어갔어요.
박해일=그게 초반에 찍은 장면이었죠? 초반에 촬영장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감독님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느낌이었는데, 저로선 재미있었던 기억 밖에 없어요.
이동진=초반엔 참 좋았다고 하시니까 중반 이후엔 어땠는지가 궁금해지네요.(웃음) 왜냐하면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이 영화 촬영 횟수가 결국 80회 가까이 되셨잖습니까.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바다 장면의 상당 부분은 태풍 때문에 결국 필리핀에서 찍으셨고요. 당시 필리핀에서 찍을 때 해녀 역할을 하기 위해서 동원됐던 필리핀 보조 출연자들이 대부분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이어서 감독님이 황당해하셨다는 이야기도 떠오릅니다.(웃음)
박해일=네, 그랬죠. 그리고 결국 편집됐지만 마지막 장면은 원래 저와 전도연씨가 함께 물 속에 들어가서 인어공주 동화책을 함께 읽는 장면이었어요.
박흥식=진국이 마지막 선물로 영화 속에서 연순에게 준 게 인어공주 동화책이었잖아요? 그걸 함께 읽는 장면이었죠.
박해일=30초 넘게 물 속에서 숨을 참아가면서 연기를 했지요. 하다 보면 책이 자꾸 떠요.(웃음) 그렇게 고생하면서 찍었던 기억도 지금 나네요. 실제로 극중 해녀로 등장하신 분들 중에선 남자들도 계세요.
박흥식=거의 다 남자였어요. 원경에 등장한 해녀들은 다 남자죠. 필리핀 사람들은 여자들이 수영을 잘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서 데려간 수영 선수 출신 보조 출연자 5명 정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키 작은 필리핀 남자 엑스트라들을 썼어요.
박해일=주연 배우나 보조 출연자 가릴 것 없이 수중 촬영하느라 다들 고생했죠. 전도연씨도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박흥식=사실 바다 속에서 동화책을 함께 읽는 장면은 제가 완성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날씨 때문에 계속 촬영이 지체되다가 결국 제작비가 많이 초과되어 포기하게 됐죠. 그런데 박해일씨는 정말 연기의 스펙트럼 폭이 굉장히 넓은 배우입니다. ‘인어공주’ 이후에 찍어온 ‘연애의 목적’이나 ‘극락도 살인 사건’ 같은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죠. 개봉 예정인 ‘모던 보이’도 굉장히 좋은 연기가 나올 것 같아요. 보통 배우들이 연기의 폭을 넓히는 게 정말 쉽지 않은데, 박해일씨는 참 대단하죠.
박해일=오늘 정말 감사합니다.(웃음)
이동진=영화 ‘인어공주’가 정말로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연순이가 극중에서 꿈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했던 남자와의 결혼에 결국 성공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꿈의 대상이었던 남자가 시간이 흐른 뒤 현실 속에서 연순의 삶을 너무나 힘들게 만들잖습니까. 감독님은 이런 지점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십니까.
박흥식=제가 이 영화를 만든 동기가 바로 거기에 포함되는 거죠. 저는 시간이라는 게 굉장히 무섭습니다. 그 파괴력이 엄청난 듯 해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변해요. 젊었을 때 이상적으로 가졌던 생각도 현실적으로 많은 타협이 이뤄지면서 극단적인 지점까지 가는 일도 생기게 됩니다. 과거에 아름다웠던 모습이 안타까울 만큼 달라지게 되죠. 부모님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요. 젊었을 때는 분명히 서로 좋아하셨겠죠. 지금 저희 어머님이 나이 든 연순처럼 욕을 잘 하세요. 침도 잘 뱉고 상스럽죠. 그런데 저는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그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거죠. 저는 어머니가 순수했던 시절이나 사랑스러웠던 과거를 강조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에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이해를 하자는 거죠. 관객들은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현실 속 연순의 껍데기를 봤잖아요? 그 이후 중반부엔 판타지인 과거로 들어가서 그 연순의 안을 들여다본 거에요. 저는 이 영화를 통해 겉으로 상스럽고 돈에만 집착하는 것 같은 여자의 안을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셈입니다. 사람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그 둘을 다 봐야만 하죠.
이동진=박해일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하고 관객들께 질문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원래 어린 시절에는 음악을 하고 싶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연극을 하시게 됐고, 연극 무대에서의 박해일씨 모습을 보고 임순례 박찬옥 봉준호 감독님이 연이어 캐스팅하셔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하시게 됐는데, 이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한국영화의 기둥 같은 배우가 되셨습니다. 최근 원더걸스의 안소희양이 어느 영화에 출연했을 때 했던 인터뷰에서 “전도연 박해일 선배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밝힌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후배 여배우가 남자인 박해일씨를 거론할 정도로 롤 모델이 되셨는데.(웃음)
박해일-안소희양이 아마 ‘인어공주’를 재미있게 보신 것 같네요.(웃음)
이동진=지금 시점에서 중간 결산의 의미로 지난 10여 년의 연기 생활을 돌아보시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박해일=임순례 감독님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현재까지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여전히 계속 배우고 있는 느낌입니다. 매번의 연기 경험이 제게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고 있고요. 캐릭터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대선배들 모습을 보며, 내게 있는 것은 어떤 것이고 내가 그릴 수 있는 캐릭터는 어떤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가장 힘있게 그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시기가 아직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현재는 그런 점들을 찾아내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시간이 가져다주는 변화들을 저도 느끼겠더라고요.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도 있고, 연기적으로 느끼는 것도 있는데,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어찌 됐든, 지난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계속 열심히 해나가야겠죠.
관객1=박해일씨는 결혼하신 이후에 ‘극락도 살인사건’ ‘모던 보이’ 같은 영화에서 연기를 하셨습니다. 결혼이 배우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연기가 어떻게 달라지셨는지요.
박해일=상당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일례로 결혼하고 나서 ‘인어공주’의 김진국을 연기했더라면, 이유림(연애의 목적)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웃음) 어제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이동진=어제 밤에 부인과 함께 보시진 않으셨어요?(웃음)
박해일=혼자 봤어요. 절대 같이 못 보죠.(웃음) ‘인어공주’에서의 풋풋함을 지금 다시 하게 되면 현재의 제가 수긍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걸러내지 않을까 싶어요. 굳이 한다면 아름답고 예쁜 멜로의 기운 같은 것은 물론 거짓말을 해서라도 잘 보여줄 수 있겠지만, ‘진심을 다해서 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라는 물음표가 마음 속에서 생기는 것은 왜일까요. 내 님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누구를 새롭게 좋아하는 연애 같은 것의 느낌보다는 좀 다른 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더라고요. 일상의 부분이나 사회 전반의 요소 같은 것들이겠지요.
관객2=박흥식 감독님에겐 아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 자신의 아이도 커갈 텐데, 아이가 다 자랐을 때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길 원하시는지요.
박흥식=이거,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죠?(웃음) 부모님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싶기 마련이잖아요. 아이가 34개월 밖에 안 됐는데, 지금 저도 그래요. 그런데 부모가 아무리 잘해준다고 생각해도 아이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에요. 저는 나중에 우리 아이가 조금도 구속받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커서 ‘우리 엄마 아빠는 내게 이래라 저래라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흘러 아이가 말을 안 들을지도 모르고 공부를 못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그때 제가 어떻게 할지 알 순 없지만, 현재로선 아이의 삶을 구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듣고 싶습니다.
관객3=만일 누군가 이 영화에서처럼 감독님의 과거를 본다면, 그 사람이 누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과거 중 어떤 시절을 보여주고 싶으신지요.
박흥식=저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과거의 어떤 한 순간이 가장 의미있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게 과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줄리어스 시이저가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과거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데, 전 그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리고 누가 제 과거를 들여다봐주기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아요.
관객4=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니까 일인이역을 한 전도연씨의 대역 이름도 나오던데, 대역을 써서 촬영할 때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흥식=‘인어공주’는 컴퓨터그래픽을 최소한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많으면 이 영화의 미덕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얼굴이 같은 엄마와 딸이 실제로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여섯 장면 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관객들이 많다고 느끼는 것은 연순의 대역을 썼기 때문이죠. 카메라가 비출 때 눈이 안 보이는 옆모습과 뒷모습이 전도연씨와 비슷한 사람을 구하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대역임을 드러내지 않고 찍으려면 계산을 정말 많이 해야 되는데, 저로선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으니까 고민을 참 많이 했죠.
이동진=대역이 등장하는 장면도 있지만, 실제로 전도연씨가 같은 프레임에서 두 역할을 함께 해낸 경우도 있잖습니까. 두 인물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장면이 그럴 텐데, 그런 장면은 전도연씨가 어머니 역할과 딸의 역할을 각각 따로 연기한 후 합성해서 완성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장면에선 시선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관객 입장에서 미묘한 어색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점이 힘들진 않으셨어요?
박흥식=지금 말씀하신 바로 그 점에 포인트를 두었어요. 일반적으로 일인이역 장면을 찍으면 함께 등장한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선의 일치는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장면에서 서로 바라보며 대화할 때 시선이 일치하는 느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젠 한 배우의 두 모습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 자체가 특별히 신기한 볼거리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런 장면 연출에서 시선의 일치를 놓치는 경우를 많이 봐서, 저는 그러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어요. 정말로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시선을 교환해야 한다고 주문했는데, 전도연씨가 훌륭하게 잘했죠. 합성 후엔 극장에서 직접 틀어보면서 재차 확인했는데, 그 과정에서 재촬영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점은 영화 속에서 무리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관객5=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의 어머니께’라는 자막이 뜨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를 어떻게 투영시키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박흥식=제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단순한 동기는 몸으로 세상을 부딪쳐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배우지 못했고 상스럽고 돈 한 푼에 집착하시지만 직접 몸으로 세상과 부딪쳐서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런 분들이 좀더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어머니도 그런 분 중의 하나시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저희 어머니의 그런 점만 존중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도 함께 있으면 완전히 이해하지를 못해요. 저를 아주 피곤하게 만드시죠. 그런데 적어도 어머니가 세상을 허투루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라는 점에 대한 확신은 있어요. 내가 영화를 하고 있으니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그런 점에 대해 영화를 통해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인어공주’는 제 개인적으론 저희 어머니에게 드리는 선물이었습니다.
첫댓글 후배 여배우, ><
딱한줄이네
인어공주가 아니라 소희는 연애의목적 본거같은데
낄낄
히힝 여배우 ㅎㅎ
가볍게 넘어가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