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아저씨, 이거 하나에 얼마 씩이예요? 여기 화장실은 어디 있나요?” 내일부터 옷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과도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예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헤어스타일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몰상식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다면 분명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인 채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 주인공의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입는 예복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인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함’이란 예복입니다.
또한 예복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안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말씀하시길, 예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사람들이란 ‘거짓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임금으로부터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잔치에 올 때 예복을 제대로 입지 않고 온 사람은 한량없는 사랑을 베푼 임금에게 거짓 사랑으로 응답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었던 사람이 한 분 계신데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온 생애를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천상잔치에 무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티켓 비용도 받지 않으시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은혜로운 초대, 도에 넘치는 과분한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죄가 많다하더라도,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를 당신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이토록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기쁜 마음으로 잔치에 참석하는 일입니다. 정성껏 준비한 예복으로 갈아입는 일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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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오 22,1-14)
<오래 머물 수 있는 힘, 감사>
초록색 옷자락을 휘날리며 신나는 모험을 찾아 날아다니는 영원한 어린이 피터 팬,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이며,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어린이로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인공이 탄생하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피터 팬>은 7살 되던 해 스케이트를 타던 중 사고로 사망한 형의 죽음을 계기로 마음이 성장을 멈추어버린 작가 제임스 배리가 탄생시킨 작품입니다.
그가 창조해 낸 피터 팬의 내면에는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과정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사회 부적응의 심리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장하면서도 아이로 머물러있기에 ‘어른 아이’라고도 하고 ‘피터 팬 신드롬’이라고도 부릅니다.
사회인으로서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감정적이며 아이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작가 제임스 배리의 형의 죽음은 어머니의 사랑까지 빼앗았습니다. 어머니가 배리의 형인 데이비드를 가장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형의 옷을 입고 형 행세까지 해 가며 어머니를 위로하려 했습니다.
배리는 종종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는데, 어느 날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 배리가 “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분노와 좌절을 넘어서지 못한 배리가 성장하여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몸만 컸지 마음은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피터 팬처럼 자신의 맘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또 책임지지도 않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하고도 아내와의 사이가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피터 팬의 모델이 된 피터 르웰린 데이비스는 성인이 된 뒤 알코올 중독과 의욕 상실에 빠져 절망의 나날을 보내다 지하철에 뛰어들어 63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합니다.
배리가 자신을 이용해 소설을 써 놓고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리의 상태로 볼 때는 피터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감사해야 하는 사람은 피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어른-아이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받아내야 하는 어린이입니다. 엄마가 아니면 받아줄 수 없는 그런 철부지 같은 마음까지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람은 당시 어머니에게 느꼈던 분노를 똑 같이 느낍니다.
어머니에게 빚진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 빚을 갚아주지 않는 모든 사람은 다 자신에게 빚을 갚아야하는 빚쟁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조: 김혜남(정신분석 전문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 중 ‘몸은 어른 마음은 아이인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위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초대는 받았지만 거부하고 초대하는 종까지 박해합니다. 그러니 임금은 그들을 쓸어버리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아무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초대받은 사람 가운데도 ‘혼인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의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고 성당을 나오는 우리는 적어도 초대에 응한 사람이니 의복을 입지 않아 쫓겨난 사람처럼만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혼인 의복을 입고 앉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기쁘게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 잔치를 매우 불편하게 느꼈을 것입니다.다만 구원받아야 하기 위해 억지로 앉아있는 것입니다.
저도 친구 생일잔치에 뚫어진 양말을 신고 갔다가 창피해서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만약 미사에 나와 즐겁지 않고 억지로 있다면 그런 사람은 미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미사가 행복하지 않다면 옷을 입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의복을 입지 않고 와서 그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그 잔치에 참여하여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에 임금에게 어떤 일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예에서 사랑 받지 못한 불만을 가진 배리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은 어머니를 그 사람에게 덮씌워서 누구와 관계를 맺든 자신에게 더 해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상대에게서 점점 더 많은 불만사항을 찾아내며 그래도 만나주는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가 감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관계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관계를 유지시키는 힘이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혼인잔치에 나온 사람이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혼인의복이란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사의 상징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잔치인데 그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대한 얼마의 감사를 가지고 참여하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어쩌면 미사를 나와 주어 주님께 무언가 보답을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목숨을 내어주고 계신 주님 앞에서 아직 혼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영성지도 신부였고 고해신부였던 예수회 정일우 신부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빈자의 아버지, 판자촌의 성자라고 불렸던 그분은 미국에서 태어나 25살 때 한국에 와 3년 전 선종할 당시까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국가가 버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웃고 울며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그분이 서강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 가난을 체험해 보기 위해 판자촌에 들어가 한 달을 살고 나서부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이 너무 좋아 18년을 그들과 함께 살았고 이후에는 철거민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려 10년 이상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분이 판자촌에서 한 달을 살고 깨달은 것은 ‘나는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처럼 살고 싶은 꿈을 갖게 해 준 참 좋은 사람들을 평생 많이 만나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 신부님을 사람처럼 살게 해 주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기에 그분은 그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반면 저는 행려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에 2주 간 봉사를 하였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습니다. 2달 동안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했을 때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그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머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 머물 수 없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머물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내가 일방적으로 무언가 해 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을 때는 배우자에 대한 감사한 기억들을 떠올리십시오. 그러면 다시 머물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옷은 혼인 잔치 전에 입고 들어와야 합니다. 만나기 전에 먼저 감사해야합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평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빈틈없이 치장하고 초대 받은 구원의 미사에 나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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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초대에 올바른 응답>
혼인잔치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의 신학적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복음에서는 스스로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하느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호소와 복음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25,6-10a: 주님께서 잔치를 차려주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초대하시는 ‘잔치’를 베푸신다. 이 잔치는 기쁜 구원의 잔치이며 ‘메시아적’ 잔치에 대한 사상의 표현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다. 첫째로 무엇보다 초대의 ‘보편성’이 인상적이다. 모든 민족들이 초대되어 시온 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6-10절). 이제 시온산은 모든 민족들이 와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이사 2,2-6 참조). 바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 잔치는 잔치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초대받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지향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7절). ‘씌워진 너울’은 하느님께 대한 무지 내지는 영적인 눈멀음이다. 이것을 잔치를 통하여 진정한 친교를 통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잔치는 ‘기쁨’과 생명력, 평온과 안정감을 고취시킨다.
즉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 ‘눈물’이 닦아질 것이다(8절). 이사야는 이 잔치의 개념으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종말론적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9절)라고 초대한다.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해 오너라
예수께서도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더 나아가 임금의 관대한 초대에 대한 초대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즉 임금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루가복음(14,16-24)에도 전해지나 차이점이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준비한 ‘잔치’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마태오복음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는 ‘임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루가에는 초대할 때 종들을 한 번만 보내고 있지만 마태오는 두 번 보낸다. 또한 마태오는 자기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파괴시키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참조) 어떻게 길거리에서(8절 참조) 한가로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혼란스럽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 ‘동네’의 불은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며, 그것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종들을 ‘잡아 죽이거나’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한다. 여기서의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견하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특히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의 식탁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적’ 요구에도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12절)있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인예복’이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잔치의 식탁에 “악한 사람 선한 사람”(10절) 모두 모였다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나쁜 사람의 부류에 속할 것이며, 이는 좋은 씨앗 가운데서 가라지가 번성하는 교회의 신비를 말한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4절). 이는 신앙에의 ‘불림’이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혼인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꺾여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결실’을 내야할 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무거울 것이다.
즉 루가복음에서처럼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예복’까지도 요구하는 “아들의 혼인잔치”(2절)의 초대라는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12-14.19-20: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이 베풀어준 경제적 도움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어떤 외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13-14.19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을 큰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로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되이 자신을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그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행동적인 결실을 맺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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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태도>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실 것입니다.”(이사 25,6)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써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성대한 ‘혼인’ 잔치, 곧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가 잘 말해주듯이, 유대인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여 영광의 표징인 예루살렘은 물론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임금은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을 부르러 두 번이나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심을 끈 채’ 자기 할 일만 하였으며, 종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이에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마태 22,7). 그리고는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하며,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하지요. 결국 잔칫방은 손님으로 가득 찹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새롭고 아름다운 창조와 풍요가 넘치게 된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죄 중에 있든 은총 중에 있든, 잘 살든 못 살든, 신분이 어떻든 늘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 먼저 ‘초대받았으나 거절한 이들’처럼 구원의 잔치에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현세의 자기 일에만 몰두하여 살아갑니다. 매순간이 놀라운 풍요와 행복으로의 초대임에도 자신에 몰두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보다 자기 뜻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늘 앞서곤 합니다. 늘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느라 너무 바빠 하느님과 차 한 잔 나누며 ‘구원의 정담’을 나눌 여유가 없습니다. 머리로는 주님이 가장 중요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실제 행동할 때는 주님을 첫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보다 그분의 사랑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이유를 더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몰라서 응하지 못했고, 알지만 바빠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으며, 잊어버려서 초대에 응하지 못했고, 누구 때문에 기도시간을 놓쳤다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모른 척 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까지도 있지요.
만일 그렇게 살아간다면 혼인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손발이 묶여 어둠 속으로 내쫓기듯 그런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면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나아가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잔치에 합당한 ‘삶의 예복’을 갖추며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잔치에 걸맞는 예복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행함, 아버지의 뜻을 행함, 의로움을 행함, 사랑의 이중계명을 행함, 자비를 행함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늘의 아버지의 뜻을 채운 사람만이 영원한 잔칫상에 참여할 준비를 함으로써 뽑힌 이들의 대열에 들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모두 그 어떤 차별 없이 매순간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잔치에 초대받고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22,14) 구원은 그렇게 하느님의 초대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부르심을 알아듣고 감사드리며 내 생의 가장 으뜸가는 소명으로 삼아 응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력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나, 우리의 협력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아우구스티누스)는 말을 기억하며, 합당한 삶의 예복을 갖춰 입고 하느님의 사랑의 초대에 온 힘을 다해 응답하는 ‘신자다운 신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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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성경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잔치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하늘 나라의 잔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온 교회와 온 세상이 함께 초대받아 어우러질 기쁨의 잔치이고, 구약에서부터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고대하시고 초대하시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나라에 먼저 초대받았으나, 그것이 그 자리에 대한 보증 수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내신 새로운 백성, 곧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기적을 통해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성령의 음성을 알아들음으로써 세계의 모든 백성이 하나 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도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점점 발전되어 가는 세상 안에서 교회는, 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넘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정의와 자유와 해방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아 큰 역할을 수행할 하느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복장 준비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모여들 많은 백성들을 안내할 책임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모으시지만, 하느님의 이 의지는 인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마치 하늘에서 번쩍 비추는 번갯불처럼 내려오지는 않을 것입니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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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마태 22,2-4)”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임금이 사람들에게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비유 전체의 뜻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자기들도 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했으면서도, 그래서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잔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요청하는 나라가 아니라,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쪽에서 아쉬워서 들어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간절하게 바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신의 나라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신 일이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흔히 ‘초대’로, 또는 ‘부르심’으로 표현하는데, 들어오라고 부탁하는 일도 아니고, 강요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간절한 희망을 들어주신 일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5-6).”
잔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면서도,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에는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쉬울 때에는 구해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했다가, 힘든 시기가 지나가면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던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급하고 아쉬울 때에는 하느님을 찾고, 편안해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마태 22,7).”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분풀이나 보복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앙갚음이나 분풀이나 보복이 아닙니다. 인간들 쪽에서 자초한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는데도 인간들이 그 길을 외면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8-10).”
처음에 초대받았지만 참석하기를 거절했던 사람들을 유대교로, 나중에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순서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대역도 아니고 대타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넘어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따라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순서대로 초대장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길거리에 서 있었던 사람들도, 잔치에 참석하기를 희망하고 간청하면서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가 갑자기 붙잡혀 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잔치 참석을 희망하고,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라는 말은, “잔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면서도 혼인 예복도 안 입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과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를 바라면서 혼인 예복을 입는 등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 모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이야기는(마태 22,11-13), 잔치에 참석하는 일과 잔치 음식을 먹는 일이 구분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받았는데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혼자서만 안 입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바라고 있다면 희망만 하지 말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라면서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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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라는 하느님의 꿈을 이루어드립시다>
이사야 25,6-10ㄱ 필리피 4,12-14.19-20 루카 22,1-14
오늘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으로 이어지는 주제는 ‘잔치’입니다. 벗님들께서는 ‘잔치’라고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라는 단어가 연상됩니다. ‘함께’ 나누기 위한 음식, ‘함께’ 하는 흥겨움, ‘함께’ 하기 위해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는 술, 이 모든 것이 ‘함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함께’는 ‘인간의 말’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람과 세상, 이 모두와 하나 되시기 위해서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곧 예수님의 이름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뜻인 ‘임마누엘’인 것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고 장엄한 계획이었습니다.
‘함께’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라는 하느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첫 장의 천지창조의 이야기는 ‘함께’라는 구원의 역사의 시작을 아름답고 그리고 있습니다. 하늘 땅 물 동식물 마침내 당신 모습을 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 정성껏 빚으신 모든 것들을 보시고 당신 스스로 ‘참 좋구나!’ 라고 감탄하시며 함께 하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더 이상 갈림 없는 완전한 ‘함께’를 이룰 새 하늘 새 땅을 희망으로 노래함으로써, ‘함께’라는 하느님의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리라 예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한 피조물과 벗하여 이루고자 시작하시고 마치실 ‘함께’라는 당신의 꿈에 특별히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순간 사람들은 이 초대를 거부합니다. ‘함께’가 아니라 ‘홀로’ 제 길을 걷습니다. 태초의 창조에 대한 감탄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과 갈라섰고,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함께’ 살아야 할 인간관계를 파괴했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제 배 채우기에 급급한 탐욕스런 사람들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하라고 외쳤건만,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함께’라는 하느님의 꿈은 ‘임마누엘’ 예수님께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온갖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허무시고, 오직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으시며 정의로 새 세상을 여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이 사랑과 정의 때문에, 깨지지 않는 단단한 이기심과 내려놓을 수 없는 탐욕스런 권력에 취한 이들에 의해서 무참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하시려는 하느님의 꿈을 무참히 짓밟는 갈라진 사람들의 극악무도함이 구원의 역사 곳곳을 피로 물들였고, 지금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꿈을 접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예언자는 환희 가득한 목소리로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이사야 25,6-7).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가진 자 없는 자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이, 높은 자 낮은 자 불평등 없이 모든 이들이 주님과 함께 잔치를 즐깁니다. 제 먹을 것만 챙기다 스스로를 굶주림에 몰아넣을 끝 모를 탐욕의 너울은 거두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맛난 삶의 양식이 되어줍니다. 다른 이를 억압함으로써 스스로 비인간으로 만드는 불의의 덮개는 치워지고 서로 섬김으로써 모두 귀한 사람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풍요로움이 모두에게 넘쳐납니다(필리피 4,19 참조)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함께, 벗들과 함께’ 하는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빼앗음으로써,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가함으로써, 짓눌린 사람들을 일으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권력자들에 빌붙어 함께 짓밟음으로써, 여리고 약한 생명들을 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살고자 죽임으로써 귀한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 이미 정성껏 차려진 잔치에 마땅하지 않는 초대받은 자들을(마태오 22,8 참조) 엄중히 심판하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고을 어귀로 나가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초대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이 잔치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 함께 하고 있는 우리 서로를 바라봅시다. 얼마나 곱고 아름답습니까? 참으로 소중한 잔치에 함께 한 벗들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함께’라는 하느님의 꿈을 이루는 삶이라는 잔치를 맘껏 즐깁시다. 하지만 이 잔치에 온전히 함께 하기 위해서,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혼인 예복을 곱게 갖춰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갖춰 입어야 할 예복은 ‘하느님과 함께’, ‘벗들과 함께’ 하기 위한 마음가짐과 믿음의 실천입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 벗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주위에서 우리의 사랑과 관심과 연대가 절실한 벗들, 곧 예수님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이들(마태 25,40 참조)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심한 병고에 신음하는 이들, 한 끼 식사와 한 겨울 추위가 부담스러운 가난한 벗들, 전쟁 같은 입시 지옥에 해맑고 어린 꿈을 희생당한 청소년들, 자아실현과 사회 기여의 기회를 갖지 못해 절망하는 청년들, 홀로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시는 어르신들, 자신의 탓 없이 일자리에서 쫓겨난 해고노동자들, 불안한 마음으로 일터를 지키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삶의 보금자리를 빼앗긴 이웃들, 인종차별과 편견을 이겨내고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 식구들, 여전히 피눈물 마르지 않는 세월호 가족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사드 배치로 신음하는 소성리 주민들, 강정과 밀양의 주민들, 죽어가는 4대강 인근 주민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우리의 사랑과 관심과 연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각자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우리는 ‘함께’라는 하느님의 꿈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라는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의 손발이 되어 ‘함께’라는 당신의 꿈을 이루어달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초대입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우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초대에 함께 응답하여 신명나게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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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은혜 받을 준비를... >
사제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영광 염산 성당에서 사목할 때, 약 8개월 정도 사제관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 적이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에... 가족들이 본당을 방문하여 함께 미사하고, 사목회 임원 몇 분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이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식사 자리에서 가족들이 어머니에게 고생하신다고 한 말씀을 하시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조 신부가 강론한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너무 너무 겁나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이 겁나고 무서운 말이 어찌 보면... 몇 년 동안 영적일기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제가 사제이기 전에, 신자로서 지킬 수 있는지?를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영적일기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시기 위하여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강력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한 임금이 종들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임금의 초대에 “왜, 귀찮게 구느냐?” 며 임금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들을 하러 떠나갑니다. 그 사실은 안 임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 길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 중에 아무나 데려 오라고 하여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왔다가, 잔치에 혼인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 던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에 왔지만,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세상일을 잠시 멈추고 잔치 초대에게 언제든지 응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일도, 장사하는 일도,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바쁜 일일지라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저희의 몸과 마음의 아픔을 치유해주시고, 그리고 저희의 어렵고 답답한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말씀에 혼인 잔치에서 손과 발이 묶어져 쫓겨난 사람이 있습니다. 혼인 잔치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느님 나라에 초대인 혼인 잔치에 참례하기 위해서 ‘평상시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는 것입니다.
예)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성인께서 천당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밖에 누구요?”라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너무 기뻐서 “주님, 접니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모질게도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 이상해서 몇 번이곤 “주님, 저 프란치스코입니다.”라고 외쳐 보았지만,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주님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성인은 속이 상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은 믿고 따랐지만 “주님은 나를 모른다.”하지 않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성인은 고민하다가 달 속에서 토끼가 방아를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뭐가 있을까? 맞다.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다.” 성인은 다시 뛰어가 문을 두드리자 “밖에 누구요?”, 그러자 성인께서 “주님,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때서야 주님께서 문을 여시며 성인에게 “내가 너를 안다.”하시면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 바로 당신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이 말씀이 참으로 은혜로운 것은... 저희가 구원의 잔칫상인 미사에 참례할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된 은총이 장맛비처럼 쏟아질 것을 믿고 믿음의 큰 그릇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07편 9절에 보면...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목마른 이에게 물을 먹이시고 배고픈 이를 좋은 것으로 채우셨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항상 영적으로 기쁘게 살아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도록...항상 은혜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시며 살아가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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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마태오.22,8-10)
주님의 잔칫방에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아무나 누구나 모두가 갈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주님의 잔칫방은 우리 마음의 방입니다. 항상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 마음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잔칫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뿐 만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열려 있는 영혼의 방입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마음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고’ 사랑과 자비의 ‘혼인 예복’을 입고 신랑이신 주님의 잔칫방에 가야합니다. 주님의 혼인 잔치는 사랑과 자비의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잔칫방은 인류 가정의 잔칫방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으로 모시고 신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인생이라는 잔칫상을 우리는 선물로 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차려진 잔칫상은 사랑과 자비의 향기가 퍼지는 삶의 축제입니다.
인류 가정의 잔칫상은 인류가 ‘함께’ 즐기는 음식입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따로 차리는 상이 아니라 ‘함께’ 차리는 상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잔칫상은 ‘함께’ 즐기는 것이 그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고을 어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과 자비, 화해와 경청의 잔칫상을 우리가 차려 주어야 할 때입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힘이 있거나 힘이 없거나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잔칫상을 우리가 마련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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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3년 미국 뉴욕에 갔을 때입니다. 유학을 가있던 동창 신부님의 배려로 뮤지컬 ‘아이다’를 보았습니다. 1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음악이 있습니다. ‘Fortune favors the Brave!'입니다. 번역을 하면 ’행운은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시련과 아픔을 디딤돌로 여길 수 있기에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갈 수 있고, 그곳에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실패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둥지에서 처음 세상으로 뛰어 내리는 어린 새는 용기가 있기에 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갇혀있다면 결코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없을 것입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용기가 있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씨앗 안에만 갇혀있다면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Fortune favors the Brave.'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용기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용기가 있기에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남들이 쉽게 가지 않으려는 길을 선택하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여러분보다 조금 일찍 이 길을 선택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여러분들의 용기 있는 선택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영어 이야기를 하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 2012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성전의 입구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If you enter as a touris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as a pilgrim,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입니다. 번역을 하면 ‘만일 여러분이 이곳에 여행객으로 오셨다면 이곳을 나갈 때는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곳에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면 좋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많이 하였지만 저는 저의 눈으로만 보았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저 자신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여행객으로 좋은 것을 보고, 색다른 음식을 먹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성지순례의 진정한 목적은 순례자가 되는 것이고, 순례자가 되었다면 주님을 따르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비신학생 모임에 오셨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신학교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오셨는지요? 여러분들은 예비신학생 모임을 통해서 어떻게 변하셨는지요? 여러분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신학교에 들어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곳에 온 목적과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신학교의 문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활짝 열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것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나눔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인내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용서의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감사의 옷을, 인내의 옷을, 나눔의 옷을, 사랑의 옷을 입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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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축제祝祭다.”> -축제인생을 삽시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시편이 은혜로웠습니다. ‘오래오래 주님 궁에 살으오리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 주님 궁에서 살기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미 천상축제의 삶을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고해인생이 아니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 가을도 중턱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로 가득한 가을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단 거두는 영적 수확의 계절 가을입니다. 나이에 불문하고 가을에는 우리 인생 가을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준비도 염두에 둬보는 계절입니다. 죽음은 무無에로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요 ‘기도의 계절’입니다. 더욱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는 성경독서에 힘쓰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영적 풍요를 누려야 하는 축복의 계절 가을입니다. 하여 교회 전례력도 9월 순교자 성월에 이어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로 더욱 기도생활에 정진할 것을 권합니다.
삶은 축제입니다.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축제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늘 하늘나라 체험 은총을 추구하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천상체험은총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닫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 천상잔치에 초대받아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저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고 비관하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하느님이 바로 미래이며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하느님을 항구히 희망하고 믿고 사랑하는 자들은 원망은 물론이고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할래야 절망할 수 없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제가 여기 30여년을 살면서도 가끔 답답하거나 막막한 때는 있었지만 원망하거나 절망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답답하거나 막막할 때마다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노래한 시편이 바로 121장 1-2절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
하느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희망이자 비전이요 꿈입니다. 바로 우리 영성생활이 추구하는 목표도 이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로 3,1-2).
이렇게 살 때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하늘나라, 하느님의 체험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보여주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비전이 바로 하늘나라 잔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연중 앞당겨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웠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주님 친히 무지의 너울과 탐욕과 교만의 덮개를 없애 주실 때 환히 보이는 주님의 얼굴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없애시고 우리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와 치유의 주님을 미리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천상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사야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고백합시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둘째,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천상체험은총이, 미사은총이,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샘솟는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샘’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구속하거나 좌절시킬 수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런 것입니다.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과 만나 하나되었기에 이런 용기와 자유자재한 삶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자랑이 아니라 모두 이렇게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렇게 살 때 진정 내적자유를 누리는 영적부자의 삶입니다. 바로 영원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이런 자유와 영적풍요로움입니다. 바로 불가의 다음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수주작처 입처개진 隨主作處 立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들어서는 곳마다 진리가 되라, 얼마나 당당하고 자유롭게 하는 말씀인지요.
셋째,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베푸시는 ‘삶의 축제’의 초대에 자발적 기쁨으로 참여하십시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잔치입니다. 이런 천상체험이 없었기에, 이로 인한 내적자유와 영적풍요로움의 맛을 몰랐기에 복음의 초대받은 이들은 하늘나라 잔치 초대를 거부했고 실패인생을 살았습니다.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이 상징하는바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 잔치이기에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참석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처럼 천상잔치의 기쁨을 미리 맛보지 못했기에 복음의 사람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때 즈카르야 노래 후렴이 생각납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잔치에 오라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전하여라.”
바로 여러분은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이 거룩한 하늘나라 잔치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하늘나라 잔치의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 이게 인간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들은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고, 또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와 탐욕, 악행의 인류역사입니다. 참으로 영적 삶의 부재를 말해 줍니다.
분명 ‘말씀공부와 끊임없는 기도’라는 영적수행에 문외한인 육적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에는 생각없이, 영혼없이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영적 식물인간植物人間도 참 많을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은총의 선물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끊임없는 영적수행의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래야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침내 하늘나라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찼다 합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했다하니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뜻합니다.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 잔칫방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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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성적표에는 ‘수, 우, 미, 양, 가’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한자의 글자로 성적표에 표시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중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 이상은 맞아야 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마 대부분 ‘우’ 이상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 양, 가’는 좋지 않은 점수로 아주 나쁜 말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성적을 나타내는 이 한자는 모두 좋은 말이지요.
빼어날 수(秀), 넉넉할 우(優), 아름다울 미(美), 양호한 양(良), 가능할 가(可). 이렇게 모두 좋은 뜻이 있는 평가방식입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는 이유로 지금은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이 평가를 보면서 문득 우리 성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더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면 그만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미, 양, 가’를 맞았다고 해서, “이 돌대가리야. 나가 버려!”라고 혼내시지 않습니다. 문제를 틀렸다고 단죄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일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를 원하실 따름입니다. 세상의 점수는 이 세상 안에서만 해당할 뿐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점수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슬픔보다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촉구하실 뿐입니다.
오늘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계속해서 주십니다.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어떻게 참석할 것인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이 잔치에는 선한 손님 악한 손님 할 것 없이 모두 초대됩니다. 핑계를 대고 잔치에 오지 않은 이를 비롯해서 선한 사람만 초대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호의이며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 즉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함께 섞여 있는 현재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교회에 악한 사람이 왜 있는가 싶지만, 이 역시 하느님의 호의가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해 영원히 함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최후의 심판 때에 나뉘게 됩니다.
그래서 혼인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혼인예복은 세례 자체라기보다는 깨끗한 마음과 흠 없는 양심,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혼인예복을 돈 주고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평소에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들을 통해서 예복은 더욱 더 아름답고 화려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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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사람 좀 되세요}(‘따뜻한 하루’ 중에서)
중국 당나라 때 천재 시인인 '이태백'이 한 때 글이 잘 써지지 않아 붓을 꺾고 유랑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유랑하던 어느 날 산중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되었는데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노인이 아침부터 뭔가를 숫돌에 열심히 갈고 있었습니다.
이태백은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보니 노인은 큰 쇠절구를 숫돌에 열심히 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태백은 이상해서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갈고 계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네. 바늘을 만들기 위해서 갈고 있습니다."
이태백이 생각할 때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느 세월에 그 쇠절구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려는지... 이태백은 노인이 행동에 답답하고 미련해 보였지만, 계속해서 쇠절구를 열심히 갈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그 모습을 보던 이태백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와 다시 붓을 잡았고, 이후 유명한 문필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언제 지금보다 나은 내가 될 수 있냐고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결코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노력하는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사람 한 번 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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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난 일들 중 지극히 작은 부분을 알고 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일들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지극히 작은 일부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일은 그냥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산 이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며 나눕니다. 그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만큼, 그 이야기에는 인간 삶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은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공감한다면, 그분은 스승이라는 진리를 실천한 분입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은 스승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역사 안에 새로운 다른 스승들을 나타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고 믿었고, 그들은 그 믿음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고 믿은 초기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 공동체들 중 몇 개는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하던 이야기들을 담아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복음서」들입니다. 그 「복음서」들은 2000년 동안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존속시켰습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는 이가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또 하느님의 자녀되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베웁니다.
우리는 오늘「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왕이 잔칫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의 뜻을 전하러 온 종들을 때려주기도 하고, 더러는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옮기면서,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왕이 보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불손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입니다. 그것을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는 그들의 조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복음서」가 집필되기 불과 10여 년 전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거슬려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많은 고을이 불타고 참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비극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응징하신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다 비유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혜로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서 열립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즐기고 기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복음이 그들에게 베풀어졌고, 그것을 형제자매들과 나누면서 그들은 기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그렇게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우리는 그 잔치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복음서」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왔다가 쫓겨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실만이 중요하지 않고, 초대된 사람은 스스로 준비하는 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불행만 알아들으면, 우리 자신을 위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안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 곧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이야기는 예수님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결국은 그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유대교 안에서 권위(權威)를 누렸고, 그들은 그들의 신분(身分)과 권위를 빙자하여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행세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쉽게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자기들의 권위를 과시하려 하였습니다. 사람이 행세 하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도, 굶주리는 이도, 우는 이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섬기는 사람”(루가 22,27)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하신 일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내어주고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롭게 초대받은 생명들입니다.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도 주어졌습니다. 잔치는 베풀어졌습니다. 그 은혜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재물이나 권위에 집착하는 것은 그 초대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초대받은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혼자 욕심내고, 혼자 권위를 가졌다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습니다. 잔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배식(配食)이 아닙니다. 좀 더 누리는 생명이 있고, 적게 누리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베풀어진 은혜로움을 자유롭게 나누면서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나누면서 이웃도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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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마태오 21,28-32)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그대에게 오늘 아침 시인 천상병의 ‘귀천(歸天)’이라는 시(詩)를 같이 읽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 인생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한 방울의 이슬입니다. 한 방울의 이슬은 허무한 것 같지만 진주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서쪽 하늘에 노을 빛 물들 때까지 이승의 기슭에서 서로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다가 구름이 손짓하면 소풍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기뻐하며 하늘나라로 가면 됩니다. 거기 하느님께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행복했더라고, 허망하지도 허무하지도 않았더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승의 아름다운 삶을 선물 주셨습니다. 그 삶이 끝나는 순간 저승에서의 혼인잔치에도 초대하십니다. “예, 감사합니다.”하고 그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한 주님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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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모든 이 초대받은 혼인 잔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의 날을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이렇게 주님의 날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영원히 없애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보라, 이 분은 우리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이사 25,9)
오늘 복음 역시 주님의 날을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마태오는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날, 곧 혼인 잔치가 이미 준비되었다고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준비하신 뒤 사람들을 초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이고, 그 신부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새 계약으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먹게 하고, 풍성한 포도주를 마시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임금이신 하느님은 종들을 보내어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을 불러오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보내어진 종들은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고, 초대받은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로 대표되는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임금의 초대가 전해지지만 그들은 종들이 전하는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두 번째로 다른 종들을 보내어서 그들을 초대합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임금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이미지에서 우리는 주님의 날을 선포하던 예언자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들마저도 거부하고 죽이던 유다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 임금은 진노를 터트리고 맙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없애고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축제의 날, 구원의 날이 진노의 날로 돌변하는 순간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임금은 종들에게 말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에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종들은 임금의 명에 따라 길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데려옵니다. 그렇게 해서 잔칫방은 손님으로 가득 찹니다. 이제 유다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로 불리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받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누구나 하느님의 초대를 받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임금은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만나자마자 그를 질책합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을 시켜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누구든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지만, 악인이든 선인이든 준비를 갖추어 잔치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잔칫상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유다인들과 같이 올바른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는다면 혼인 잔칫상에서 결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른 예복을 갖추어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이런 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일의 미사성제를 거행하면서 영원한 혼인 잔치에 맞갖은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오가 이야기하듯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되는 이들은 적을 것입니다.(마태 22,14) 그러니 각자 혼인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 하느님의 영원한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준비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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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규하 다니엘 신부님]
<구원 잔치에 초대 받은 우리>
왜 하필 이스라엘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한 번씩들 가져보셨음 직합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 수많은 민족 가운데 왜 하느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콕 집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을까요?
하느님이 분명 ‘어디 오늘의 운세를 시험해볼까?’ 하며 무작위로 추첨한 끝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을 텐데요.
얕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느님이 왜, 어떤 의도로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셨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당신만의 뜻이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특별히 잘난 민족이라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 너희를 구해 내셨다.”(신명 7,7-8)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 뒤, 선민의식에 빠져 겸손함을 잊고 자신들이 특별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의 영광에 도취 되었으며, 그렇게 제 잘난 맛에 취해자신의 안위와 번영만 도모하다가 정작 참 하느님은 잊고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일차적으로는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리움을 받았으면서도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지는 구원의 잔치에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집스럽게 당신을 거부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선언하셨듯이, 이제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거부한 구원의 잔치에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 곧 모든 민족들이 초대를 받습니다.
선한 이든 악한 이든,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느님 구원의 잔치에 초대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초대된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런 무차별적인 초대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는, 우리 또한 무슨 자격이 있어 하느님께 불리움을 받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그야말로 “아무나 만나는 대로잔치에 불러 오너라”고 명하였고, 그렇게 불리움을 받은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하고 그에 안주하기보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 입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봉헌하는 기도와 자선, 희생이야말로 우리가 초대받은 구원의 잔치에 합당한 참된 예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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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영삼 요셉 신부님]
<사랑의 예복>
인류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 당신의 백성을 부르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모든 이를 부르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맺으시기를 얼마나 바라고 계시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 모든 민족, 모든 형태의 사람들이 기꺼이 다 초대를 받습니다. 교회의 가르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가 구원에로 불림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먼저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할 만한 의향도 없었고 그럴만한 자격도 없었기에,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세대를 이어 초대될 것이라고 전하지요.
이제 이렇게 모든 이에게 초대의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오늘 복음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기에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이에 대해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오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되고, 그 사람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게 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종류의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까? 교회에 모인 모든 이가 세례의 새 옷을 받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이 밖에 어떤 혼인 예복을 더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교황께서는 이에 대해 정답은 ‘사랑의 옷’이라고 대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혼인 예복, 곧 사랑을 입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세례 받은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죄를 피하고, 때로는 선행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기에 하는 선행인지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깨뜨리고, 사랑을 파괴하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인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에서도 이 점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는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
몸으로만 교회의 품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 안에 그 사랑이 늘 가득하다면, 나는 늘 하늘 나라 혼인잔치의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