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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섬겨야 할 국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 시국법회 여는말씀
2008-07-04 오후 10:22:07
사부대중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함께 하시는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정진의 마당으로 삼고 있습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수호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온 생명의 무리가 바로 보살의 정토"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중생을 떠나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소리를 없애고 메아리를 구하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두 달이 넘도록 생명과 평화를 갈구하는 촛불이 타올랐던 곳인 동시에, 물리력으로 그것을 끄려는 국가의 폭력이 저질러졌던 곳입니다.
촛불과 물대포! 이 둘의 관계는 지금 한반도에 사는 우리네 삶의 실상을 비극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향해 국가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민주 국가에서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국민의 정당한 주권행사가 국가 권력의 폭력에 의한 공포 때문에 주저앉고 말면, 앞으로 우리 국민의 삶은 생존 자체가 굴욕이 됩니다. 인간적 자존이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불제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그냥 지켜본다는 것은 여러 부처님과 조사님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전에 이르기를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능히 지혜의 보배를 얻을 수 없다"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법회는 단순히 정부의 폭력과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을 성토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성찰하는 지혜와 자비의 마당이어야 합니다. 국가가 국민을 적으로 만드는 비극적 상황을 공업(共業)의 소산으로 인식하는 대승 보살의 마음으로 참회와 구세(救世)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옛 선사께서 이르시기를 "어디에서나 주인으로 살고, 지금 이곳을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해탈의 삶입니다. 해탈의 삶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뛰어넘어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10대 소녀들이 처음 밝히고 나선 2008년 오늘의 '촛불'은 인간 존엄의 몸짓이자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는 본능적 자각이었습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2008년의 100만 촛불은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을 뜨겁게 확인시켰습니다. 국가 권력의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촛불이 이룬 국민 승리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유모차를 탄 아기와 교복을 입은 소녀는 비폭력과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싸움을 전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이러한 촛불의 힘을 세계가 주목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나라에서 세대를 초월한 거대한 촛불 대중을 한국 사회의 역동성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표피적 해석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라 한없이 초라해지는 개인의 실존적 비애를 위로하는 인간 존엄의 메시지였습니다. 촛불은 인간 존엄과 생명에 대한 경외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언어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와 보수 언론은 촛불 대중을 '폭도'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옹색하게도 집시법을 들먹이며 범죄의 낙인을 찍으려 했습니다. 쇠고기 졸속 협상으로 비롯된 정당한 국민 저항에 따른 난국의 책임을 이른바 '촛불 세력'에 전가하려 했습니다. 참으로 초라한 발상입니다. 만일 정부가 앞으로도 집시법을 들먹인다면 그것은 현 정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현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둥인 3·1운동과 4·19, 그리고 6·10항쟁을 허물어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과 4·19와 6·10항쟁이 일제와 이승만 정부 그리고 5공 정부의 보호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까?
간곡히 바라건대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물리적 공권력과 보수 언론의 방패에 숨지 마시고 진솔한 인간의 모습으로 국민과 진정한 소통을 해야 합니다. 지금 국민이 절실히 바라는 소통의 형태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항복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과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국민들은 '감동'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두 번이나 사과를 했는데 또 사과냐고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강경 진압으로 의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감히 저는 이렇게 말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섰는데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나로서는 신념을 가지고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심(下心)만이 천심을 얻는 길인 것 같습니다.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함께 풀어 가십시다." 하고 말입니다. 물론 촛불 시위 과정에서 구속된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수배 해제를 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부디 창조적 발상으로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뛰어넘을 화합의 촛불을 들고 나오십시오. 물로 불을 끄려 들면 모두가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더 큰 불로 세상을 밝히자고 제안하십시오. 그러면 국민들은 믿음으로써 기회를 줄 것입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열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이 국가의 파탄을 바랄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IMF 때 금모으기에 나서고 얼마 전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때 자발적으로 현장에 달려가던 국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책임의 소재와 관계없이 먼저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던 그 국민과 현재의 촛불 대중이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섬겨야 할 국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세상을 있게 한 공업 중생으로서, 모든 허물을 나에게로 돌려 비추는 참회의 기도를 통해 하늘과 자연이 감응하여 우리 모두를 돕도록 하십시다. 마치 빗물이 온갖 초목을 가리지 않고 적셔서 자라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주인 노릇하는 삶이자 해탈의 삶일 것입니다.
정녕 오늘 우리들의 기도는 촛불의 정신을 생명 평화의 기운으로 승화시켜 우리네 삶의 터전을 진리의 땅이 되게 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수경스님/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전문] 시국법어 현 시국을 두 눈으로 봅시다
우리는 80년대의 험한 산을 힘겹게 넘어 왔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이제 더 이상 넘을 산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돌연히 또 하나의 높은 산이 나타나 국민의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는 무슨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른바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하라고 요구하는 국민과 그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는 정부와의 강경 대결이 이런 예측 불허의 긴장된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차와 기차가 맞보고 달리면 그 결과는 공멸뿐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대결 상황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접근하면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어느 쪽이건 진다는 것은 명예의식이 용납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쇠고기 문제는 잘잘못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물론 그 성찰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위대합니다. 바로 그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아량과 겸허함과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다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잘못이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한 눈을 감았거나 아니면 대통령이라는 콩깍지가 씌어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로인해 한 가지만 보거나 한 쪽만 보는 잘못이 있습니다.
예컨대 쇠고기는 보면서 광우병을 보지 못하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보면서 한국의 국민들은 보지 못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촛불시위의 허물은 보지만 대통령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추가 협상까지는 보지만 재협상은 보지 못하고 뼈아픈 반성까지는 보지만 고쳐야 할 것은 보지 못합니다.
이런 눈 때문에 중고등 학생들도 아는 생명의 가치를 대통령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쇠고기 협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곧 30개월 이상의 쇠고기와 광우병 위험물질까지를 그것도 아주 쉽게 수입하기로 결정한 대통령의 태도에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광우병쯤은 감수하라는 주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중고등 학생이나 국민들은 경제만 살아난다면 광우병에 걸려도 좋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명박 대통령의 747공약대로 한국 경제가 연간 7%씩 성장하고, 국민소득이 4만 불이 되고, 그리고 세계 7대 선진국에 진입한다고 한들 광우병에 걸려서 죽는다고 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결국 경제라는 것은 사람이 폼 나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야 황금산을 가진들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명 위에 존재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계속해서 한국 경제를 위해서는 재협상을 할 수 없다고 뭉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공권력의 폭력을 합법화해서 촛불시위를 제압하려는 의도를 굳히고 있습니다. 최근의 공권력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을 보면 이명박 대통력이 과연 민선 대통령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왜냐면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이나 쓸 법한 후진국 수준의 낡은 방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좌시할 수 없어 종교계의 성직자들까지 거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에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는가. 이명박 정부는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지한 성찰을 통해서 이제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캄캄한 방에 촛불을 밝히면 일시에 어둠이 사라지듯, 잘못을 깨달으면 그 잘못의 허물도 금방 일소됩니다. 양쪽을 다 보지 못하고 한 쪽만 본 것 때문에 쇠고기 협상에 있어서 대통령으로서 막을 것을 막지 못하고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한 점, 그러면서 반대급부도 없이 오히려 주기만 하고 물러서기만 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시력은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따라서 두 눈으로 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것도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재협상의 당위성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의 뜻을 좇아 재협상을 선언하고 그로인해 부정적으로 보였던 모든 고정관념이 해소되어 다시금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대통령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한 눈으로 보면
촛불만 보이지만
두 눈으로 보면
촛불 속의 영혼까지 보입니다.
씽씽 바람이 되는 이여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있는 촛불은
폭풍도 끄지 못한다는 것을.
이 촛불 앞에서
두 눈으로 보면
안 보이던 종달새의
노래 소리도 다 보이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한 눈을 감고
두 뿔로 들이 받는 쇠귀신은 보지 못하면서
안 보이는 금송아지 꼬리만 보인다 합니까.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
[전문]
2008-07-04 오후 10:20:29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
1. 중생을 다 건지리라 고 서원을 하고서도 오로지 '나'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허물을 참회하며 첫 번째 절을 올립니다.
2. '번뇌를 다 끊으리라'고 서원을 하고서도 '나'의 이익만을 좇느라 세상의 번뇌를 키운 허물을 참회하며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3. '법문을 다 배우리라'고 서원을 하고서도 단 하나의 가르침조차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허물을참회하며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4. '불도를 다 이루리라'고 서원을 하고서도 오히려 부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허물을 참회하며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5. 세상 만물이 부처님의 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만물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 모든 생명에 부처님의 성품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면서도 나의 이웃을 부처님으로 여기지 않은허물을 참회하며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7. '탐욕'으로 허물어지는 세상을 개탄하면서도 나의 탐욕을 다스리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8. '분노'가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걸 보면서도 작은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9.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진 세상을 보면서도 나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 하나를 주고서 열 가지 생색을 내느라 오히려 탐심을 키운 허물을 참회하며 열 번째 절을 올립니다.
11. 남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 나의 잘못은 살피려고도 하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열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12. 작은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오히려 원망과 분노를 키운 허물을 참회하며 열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13. 작은 선행조차도 꾸준히 실천하지 못한 원인이 흐트러지고 게으른 내 마음에 있음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열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14. 보살은 온갖 악으로 물든 바로 이 세상을 정토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곳을 벗어나 삼매를 구하려 한 허물을 참회하며 열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15. 어리석음을 고치는 것이 지혜임을 알면서도 어리석음을 그대로 둔 채 지혜를 구하려 한 허물을 참회하며 열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6. 순간순간 인생의 무상을 보면서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삶에 집착하여 바른 견해를 놓쳐버린 허물을 참회하며 열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7. 행동에 앞서 바른 생각으로 몸을 가다듬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열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8. 바른 말로 바른 행동의 길잡이를 삼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열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19. 바른 행동이 바른 생각의 그릇임을 투철히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열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20.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모든 생명과 세상에 대한 공경임을 망각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무 번째 절을 올립니다.
21.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정진이라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22. 한 순간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 진리의 길이라는 걸 무겁게 받아 지니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23.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삶에서 마음의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진정한 닦음임을 사무치게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24.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에 기대고 빚지는 일임을 잊어버리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25. 합법적인 방법이어도 남의 몫을 남겨 두지 않는 탐욕이야말로 도둑질임을 자각하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26. 소중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딴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음행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27. 바른 말을 해야 할 때 바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큰 거짓말임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28. 몸의 즐거움에 탐착하여 술에 빠지고 감내해야 할 의무를 피하여 술잔 속에 숨어버린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29. 몸을 꾸미는 것으로 사특한 마음을 가리려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30.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를 내버려 둔 채 향락에 빠진 것을 풍류라고 착각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 번째 절을 올립니다.
31. 꾸민 행동과 그럴듯한 말로 타인으로부터 존경받으려 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32.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먹을 때 먹고 자야 할 때 자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33. 지나친 소비로 미래의 아들딸에게 고통을 짊어지게 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34. 이웃의 아픔에 눈 감은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35. 거친 말로 이웃에 상처를 준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36. 이웃에 베푸는 것이 진정 나를 돕는 일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37. 이웃의 슬픔을 나누지 않았으면서 보살행을 말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38. 강물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방생임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39. 덜 버리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생산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40. 덜 먹는 것이야말로 땅을 사랑하는 일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41. 내 몫이 작아질까 봐 전전긍긍해 하면서 상생을 말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42. 오만을 자존심이라고 오해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43. 강자의 횡포를 보고도 침묵하고는 인내했노라고 나를 속인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44. 작은 선행에 거드름을 피워 약자를 초라하게 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45. '예'라고 말해야 할 때 '예'라고 말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46. 신발 하나 가지런히 벗지 못하면서 사소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47. 열심히 벌어서 나중에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이웃을 굶주리게 한다는 걸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48. 내가 주인 노릇을 못하는 순간 독재자의 영토는 그만큼 넓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49. 한 생명이 깨치면 만 생명이 깨친다는 걸 알면서도, 한 생명이라도 폭력 앞에 무너지는 것은 만생명이 무너진 것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50. '자유'의 소중함을 망각하는 순간 노예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쉰 번째 절을 올립니다.
51. '책임'이 두려워 '자유'를 포기할 때 민주주의가 질식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쉰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52. 스스로 삶의 주인 노릇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양심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사는 일이라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53.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에서부터 내 삶의 자존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54. 스스로의 양심을 속일 때 위선과 기만의 정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사실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55. 만원 버스 속에서 바로 옆의 이웃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마음을 낼 때 비로소 인간다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56. 세상의 모든 법은 인권 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잊을 때, 법은 국가 폭력의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57. 국가의 존립 근거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58. 물과 바람과 햇빛과 같이 진정 소중한 것을 그저 얻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가 탐욕의 포로가 된 허물을 참회하며 쉰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59. 부처님께서 '나'를 부정하라고 하신 가르침은 나 아닌 다른 중생의 고통을 더욱 크게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었음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쉰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60.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 이것이야말로 방생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 번째 절을 올립니다.
61. 도가 무너지는 것보다 돈이 줄어드는 것을 더 걱정한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62. 세상의 폭력과 무질서가 우리들 내면의 반영이라는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두번째 절을 올립니다.
63.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기에는 법률과 제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64. '자비로움'이 열반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65. 중생의 행복을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보살의 책무임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6. 진정한 승리는 승리와 패배마저도 초월하는 데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7. 패자의 증오를 낳지 않는 승리,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폭력의 힘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68. 평화적 저항이라는 것은 압제자로 하여금 폭력을 사용하게 할 생각마저 내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69. 만일 사람 사이에 높낮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재산이나 신분이 아니라 사람의 품성에서 비롯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70. 큰 바다의 물이 똑 같이 짠 것처럼 부처님의 법은 무욕으로 그 맛을 삼는다는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71. 하루하루의 삶에 힘겨워하는 서민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땀이야말로 이 시대가 만들어 낸 '가난한 여인의 등불'임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72. '무소유'를 말하면서도 아직도 이 땅에 결식아동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73. 돈 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세상의 그늘이 넓고 짙어지는 데도 나만 그곳에서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74.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능히 지혜의 보물을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잊고 법당에서만 도를 구한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75. 청정국토를 버리고 분노와 다툼으로 가득한 세간을 즐겁게 여기는 것이 대승 보살의 삶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76. 오탁악세에 살면서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 대승 보살의 삶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77. 번뇌의 진흙탕에 깨달음의 연꽃을 피우는 것이 대승 보살의 삶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78. 탐욕으로 불타는 세간의 집을 벗어나 저 홀로 적멸의 기쁨을 탐착하지 않는 것이 대승 보살의 삶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79. 청하지 않아도 고통 받는 이웃을 찾아 능히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대승 보살의 삶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80. '모든 중생의 삶터가 보살의 정토'임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 번째 절을 올립니다.
81. '곧은 마음이 곧 보살의 정토'라고 배워 알면서도 불의에 침묵한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82. 목숨이라는 것이 뜬 구름 같은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몸을 위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한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83. 선지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서 마군의 무리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게 한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84. 위선과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 청정 도량임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85. '소리를 없애고 메아리를 구하려 하는 것'과 같이 중생의 고통을 껴안지 않고 안심을 얻으려한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86. '도'에는 명암이 없다는 것을 배워 알면서도 시비분별에 빠져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87. '산신각'에서 절은 하면서도 진정 초목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투철히 믿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88. '칠성신'에게 자손의 번성을 구하면서도 세상 모든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여기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89. '용왕신'에게 복을 구하면서도 함부로 물을 더럽힌 허물을 참회하며 여든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90. 즐겁게 뛰어놀며 공부할 나이의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도록 못난 나라로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91. 유모차를 탄 아이에게 물대포를 쏘는 정부를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92. 민주 국가에서 다시 피 흘리며 국민 주권을 외쳐야 하는 나라로 퇴행시킨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93. 수구 보수 세력을 자비로 끌어안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94.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지 않는 대통령이 탄생하도록 제대로 주인 노릇을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95.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경찰의 몽둥이와 방패로 국민이 맞는 폭력적 공권력이 되도록 국민 주권을 방치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96. 모두 부자 만들어 준다는 말에 속아서 온갖 탈법을 저지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97. '식탁의 안전'이 위협 받는 지경에서야 공동체의 안녕을 묻게 된 세상을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98. '촛불'이 곧 보살이요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자비한 공권력을 투입하게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99. 생명의 존엄을 위해 켜든 촛불을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아홉번째 절을 올립니다.
100. 이제는 우리들 일상의 삶이 촛불이 되어서 다시는 국민과 국민, 국민과 국가가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원하면서 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1. 참으로 불제자로 사는 것은 밝음과 어둠, 참과 거짓을 다 뛰어넘는 것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2. 인간은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서 자율적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존엄성이 인정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3. 인간중심주의가 지구 생명 공동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세번째 절을 올립니다.
104. 진정한 자유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5. 진정한 해탈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던져진 삶의 조건과 모순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계합시키는 것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6. 온 생명이 여래의 씨앗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7. 진정한 행복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한 세상 평화롭게 사는 데 있음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8. 물러섬이 없는 믿음으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의 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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