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현재 공연중인 작품 <환타스틱스>에 대한 해설을
이 작품의 드라마트루그로서 쓴 것인데
새로 만드는 팜플렛에 실을 내용의 초안입니다.
-----------------------------------------------------------------------------
뮤지컬 ‘환상의 철부지들(The Fantasticks)" 작품해설
드라마트루그 양 윤석
42년 동안 공연되어온 소극장 뮤지컬
뮤지컬 <환타스틱스>를 보러온 관객들은 우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빈약한 무대를 보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대세트라고는 검은 장막, 사다리 하나 또는 작은 계단형 단 하나 그리고 상자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혹시 학예회 수준의 형편없는 공연이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들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관객들이 흔히 뮤지컬하면 미국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연상하면서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무대, 대규모의 출연진, 그리고 현란한 노래와 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 뮤지컬은 뮤지컬의 여러 종류에서 <스펙타클 쇼(Spectacle Show)>라고 하는 상업적인 뮤지컬이지만, <환타스틱스>는 뮤지컬의 여러 종류 중에서 극적구성이 노래나 춤의 요소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북쇼(Book show) 적인 성격도 지니면서 소규모의 예산과 인원, 단순한 세트로 앙상블을 이루어가는 앙상블 쇼(Ensemble Show)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작품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브로드웨이의 상업적인 <스텍타클 쇼>에 비해 한없이 빈약한 무대를 가지고도 1960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100석도 안 되는 초라한 작은 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무려 42년간 17,162회나 공연해오면서 단일극장 최장기공연이라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열린 연극>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선 이 극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을 쓴 톰 존스는 이 극의 양식을 <Open theatre(열린 무대)>라고 부르면서, 3면이 관객으로 둘러싸인 무대를 생각하고 썼고, 최대한 관객과 밀착해서 공연되어야하며, 많은 부분의 대사를 관객에게 직접 하도록 되어있다고 말한다. <앙상블 쇼>인 이 작품은 배우들 간의 앙상블도 중요하지만 배우와 관객과의 앙상블과 호흡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 작품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이 작품은 무대가 사실인 것처럼 환상(illusion)을 갖게 하는 무대가 아니듯이, 연기 또한 사실적인(realistic) 연기와 양식화된(stylized) 연기가 혼재되어 있다. 관객은 테크놀로지와 무대장치에 의한 <눈속임>에 의존해서 환상을 주입받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배우들과 함께 교류하는 가운데 극적환상을 함께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관객들은 땀을 흘리며 열연하는 배우들을 바로 코앞에서 또는 바로 옆에서 체감하면서, 배우들의 연기에 맞춰서 극의 배경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자신이 직접 소품이 되기도 상대역이 되기도 하면서 극에 참여하는 원초적인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은 우리나라의 마당극과 너무도 흡사하다. 이 작품은 그렇게 서양극적 요소와 동양극적 요소가 절묘하게 한데 어우러져있는 작품이다. 즉 극에 대한 감정이입을 심화시키는 스타니슬라프스키적인 요소와 극에 대한 환상을 깨고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브레히트적인 요소(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동양극에서 착안한 것이다)가 미국적인 뮤지컬의 풍토에 맞게 잘 융합되어 있는 작품인 것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정서를 담은 연극
이렇게 이 작품은 눈속임과 환상(Illusion)에 의한 호화로운 뮤지컬 쇼가 아니라, 그런 환상적 요소를 깨면서, 순수한 극적 재미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담은 이야기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극은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고매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언제나 느끼고 체감하고 있는 이웃 사람들이나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마트와 루이자는 모든 인간이 그러듯이 어린 시절 환상 속에 살면서 꿈꾸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슬픔과 아픔을 겪어가며 성장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전형이다. 관객들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미소를 짓게 된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은 그들을 자신들의 모습과 동일시하게 되고, 어른들은 지난날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허클비와 벨로미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을 전형적으로 대변하는 존재이다. 두 부모의 모습에서 어른들은 나뭇가지를 치고 물을 주어 채소를 키우듯 자식을 키우는 자신들의 심정을 거울처럼 보고 공감하게 된다. 이렇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즐길 수 있는 전세대 공감연극이라 할 말한 이 작품은 오늘날 대중의 삶과 괴리되지 않는 대중연극을 지향해야할 우리 연극인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쁘고 재미있는 멜로드라마, 성장드라마
전 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지니면서 쉬운 언어와 단순한 극구조로 되어있는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볼 때,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로미오와 줄리엣>류의 멜로드라마이자, 철없는 사춘기 청소년들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드라마로서, 코믹 요소가 많은 헤피엔딩으로 끝나는 희극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 작품은 공주병이나 왕자병에 걸려 철없는 사랑(Puppy love)의 환상에 빠져있는 철부지 청소년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아픔을 통해 성숙한 사랑을 알아가는 멜로드라마이자 성장드라마이며 그런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그렇게 예쁘고 재미있는 멜로드라마 및 성장드라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이 작품의 보다 깊은 묘미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이 작품의 보다 깊은 묘미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한번 살펴보자.
환상을 깨는 연극 Fantasticks
이 작품의 원제명은 <The Fantasticks>다. 언뜻 영어의 Fantastic이란 단어가 연상될 것이다. Fantastic이란 말은 <환상적인, 멋진, 허황된, 기발한> 등의 뜻을 지닌 말이지만, 원제는 사전에도 없는 Fantasticks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환상, 공상을 뜻하는 Fanta라는 말과 Sticks를 합친 합성어다. 무슨 뜻일까? 환상의 막대기? Stick이라면 명사로 <막대기, 회초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동사로 <고착되다. 고정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환타스틱스>는 환상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들, 즉 환상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고, 환상이 만드는 막대기(벽) 또는 환상을 깨는 막대기 즉 회초리로 해석할 수도 있는 중의적인 뜻이 담긴 말이다.
극중인물 중에서 환상에 빠져있는 사람들로 우선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은 물론 철없는 사춘기 아이들인 루이자와 마트다.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까풀이 쓰인다고 했던가? 그런 아이들이 세상의 쓴맛을 경험하면서 사춘기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진짜 환상에 빠진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부모인 허클비와 벨로미다. 그들은 자식들이 <무 심은데 무가 나듯> 자신들의 뜻대로 자라주기를 바라며, 아이들이 자신들이 뜻하는 대로 조종될 수 있고,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한 것만 보게 하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려는 환상에 빠진 부모들인 것이다. 이 작품은 극양식적으로 연극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illusion)을 깨는 연극임과 동시에 내용적으로도 그런 환상에 빠진 인물들의 환상(fantasy)을 깨는 연극이며, 또한 그런 등장인물들과 동일시하며 재미있게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의 환상까지도 깨는 회초리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부지들의 변화를 화두로 삼는 극
뮤지컬 <환타스틱스>는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극단 가교에서 초연된 이래로 <철부지들>이란 이름으로 자주 공연되어 왔다. <철부지들>라는 말은 철을 모르는(不知) 사람들이라는 말로 작품의 내용적 측면에서 볼 때 <환상에 빠진 사람들>에 상응하는 대단히 적합한 번역이다. 철이란 계절을 뜻하는 말이며, 철이 든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가 몸속에 체득되는 것이고, 철을 모른다는 것은 때를 모르고, 계절의 변화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 뮤지컬의 오프닝과 엔딩 부분에 나와 전세계적인 명곡이 된 <Try to remember>에도 나오듯이, 이 작품은 9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끝난다. 1년 중 가장 풍요로운 계절인 가을에 시작해서 가장 빈곤한 겨울에 끝나는 것이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철이 들어야하며 철의 변화에 따라 인식의 변화가 뒤따라야한다. <철든다>는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면 <know better>가 된다. 즉 인식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위대한 희극은 바로 그런 인식의 변화를 주제로 삼는다. 이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작품의 중요한 화두는 바로 변화(transformation)다. 변화가 없이는 풋사랑에서 성숙한 사랑으로,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변화를 핵심코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연출에 따라 중간과정에서 슬랩스틱적인 요소든 어떤 요소를 활용해서 관객을 웃기더라도, 결코 저급한 코미디나 개그콘서트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위대한 희극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주로 변화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풍자하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희극을 생각해보라. <수전노>, <상상병 환자>등과 같은 작품은 모두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풍자하는 희극이다. 이 작품에서 그런 측면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바로 1막에서 2막으로 전환될 때 루이자와 마트, 허클비와 벨로미가 헤피엔딩으로 끝난 1막의 마지막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계속 유지하려고 버티는 장면이다. 우리는 그렇게 변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보고 웃는다. 우리는 바로 그런 인간들을 <환상에 빠진 사람들>이나 <철부지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악마, 엘갈로
극중의 마트, 루이자, 허클비, 벨로미는 분명 환상에 빠져있는 철부지들이며, 그런 철부지들의 환상을 깨는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로는 엘갈로와 두 늙은 배우, 헨리와 머티머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행동은 극의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극의 의미를 한층 더 심화시키고 있다. 그들은 연극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우선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을 하고 있는 엘갈로부터 한번 살펴보자. 엘갈로가 맡고 있는 역할은 매우 다양하다. 그는 극의 해설자면서 동시에 극중 사건에 개입해서 납치극을 의뢰받고 겁탈극을 연출하는 사업가이자 악당 역을 직접 연기하는 배우이며, 루이자를 유혹하고 목걸이를 훔치는 사기꾼이자 도둑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변신의 폭은 아주 크다. 그는 작품 속에서 ‘매력적인 악마’로 묘사된다. 그는 때로는 감미롭게, 때로는 능청맞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어리숙하게 보이면서도, 늘 교활하고 사악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종종 우리에게 아주 냉철한 교훈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현세적인 인물로 극에 개입하면서도 세상만사를 다 알고 있고 조화를 부리기도 하는 신적인 존재다. 그런 그의 이미지는 우선 사탄에 비유할 수 있다. 사탄은 사악한 마력을 지닌 악의 화신이지만, 원래 인간에게 지혜를 깨우쳐주는 지혜의 신이다. 그러나 엘갈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친숙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와 짓궂은 장난을 하며 인간을 일깨워준다는 면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탄의 이미지와는 약간 달리, 우리나라의 도깨비와 같은 트릭스터(Trickster), 즉 장난꾸러기 신과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헤르메스적인 존재, 엘갈로
엘갈로(El Gallo)라는 말은 영어의 rooster에 해당하는 스페인어로 수탉 또는 새의 수컷을 이란 뜻을 지니며, 매력있게 생긴 남자나 잘 난체 하는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새는 하늘과 땅을 동시에 오갈 수 있는 존재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메신저이자 지혜를 주관하는 신적 존재의 상징으로 곧잘 쓰인다. 우리나라 고구려 신화에 나오는 까마귀(삼족오)가 그렇고, 따오기의 모습을 한 이집트의 토트 신이 또한 그렇다. 매력있는 남성이자, 짓궂은 장난꾸러기이자, 신의 사신(使神)이며, 지혜를 주관하는 트릭스터라는 점에서 엘갈로와 가장 맞아 떨어지는 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es)다. 이집트의 토트 신은 그리스에서 헤르메스가 된다. 날개와 뱀의 머리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는 헤르메스는 악기를 잘 다루고 도둑질을 잘 하는 바람둥이이자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신으로, 저승사자의 역할도 하며, 통변(通辯)의 신, 통행의 신, 상업의 신, 과학의 신, 지혜의 신, 도둑의 신, 도박의 신, 놀이의 신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지닌 트릭스터다.
연극의 신 엘갈로
헤르메스의 복잡한 성격을 쉽게 단순화하면 그는 매개의 신이자 놀이의 신이다. 놀이라는 매개행위를 통해 신의 뜻, 자연의 섭리, 세상의 이치를 전달하는 즉 지혜를 깨우치도록 인도하는 신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헤르메스는 다름 아닌 연극의 신이다. 연극이란 이질적인 요소들을 짓궂게도 한데 얽어 모순과 갈등을 일으켜놓고 그 가운데서 지혜를 깨우치게 하는 재미있는 놀이행위이며 그것이 연극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엘갈로는 바로 관객과 배우들을 매개하고, 신(또는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면서 놀이를 통해 서로 소통하게 하면서 우리의 환상을 깨고 우리의 인식능력을 높여주는 그런 헤르메스적인 연극의 신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헤르메스 같은 신적 존재 중의 하나는 도깨비다. 우리나라의 도깨비는 원래 <돋아난다>의 <돗>과 권위적 존재라는 뜻의 <아비>가 합쳐진 말(돗가비)로 생명력(활기)과 생각(지혜)이 돋아나게 하는 존재다. 그런 도깨비는 장난(놀이)을 좋아하고 그런 장난을 통해 사람을 깨우치게 한다. 다시 말하면 도깨비는 놀이를 통해 도(道)를 깨우치게 하는 아비, 즉 도(道)깨비다. 그런 의미에서 엘갈로는 수하에 헨리와 머티머라는 도깨비들을 거느리는 도깨비 대왕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깨비 같은 배우들, 헨리와 머티머
엘갈로가 도깨비 대왕이고 연극의 신이라면 헨리와 머티머는 그런 엘갈로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도깨비들이자, 연극배우들이다. 그들은 극중에서 도깨비 상자 같은 상자에서 나오는 ‘엘갈로의 깡패 같은 부하들’로 묘사된다. 실제로 그들은 1막에서 헨리는 대사로, 머티머는 동작연기로 일가견을 보여주는 늙은 배우들로 나온다. 두 등장인물은 극중에서 3번밖에 등장하지 않는(원작에서는 엘갈로가 루이자에게 가면을 씌우며 세상을 보여줄 때, 마트를 괴롭히는 역할로 한 번 더 등장한다) 역할이지만, ‘양념’이자 ‘감초’역할로 나오고, 헨리도 ‘엑스트라 배우는 없는 거야. 다만 맡은 역할이 시시할 뿐이지’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결코 시시하지 않으며 어느 극단에서 연출을 하든, 가장 기억에 남는 등장인물이 되는데, 그들의 역할이 가장 시시한 것처럼 같아 보이면서도 극의 활력을 높이는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이 작품의 묘미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연극의 본질을 보여주는 상징
헨리는 서양에서 왕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듯이, 왕으로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는 연극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연극의 지존’이다. 비록 남루한 옷을 입고, 거의 해체된 극단을 이끌고 있는 그이지만, 그가 셰익스피어 대사를 읊을 때 그는 연극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결코 잃지 않는 연극의 지존이 된다. 머티머는 영어로 mortimer 즉 죽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어리숙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늙은이지만 죽는 동작 연기하나로 관객들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으며 살아나는 배우로 극의 생명력을 더해준다.
1막에서 그들은 눈으로 보기에 가장 초라해 보이는 늙은이들이지만, 그들은 그 어떤 인물들보다 가장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2막에서 젊은이 역을 할 때와 대비된다. 1막에서 그들은 가장 초라해 보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가난한 두 늙은이 역을 하면서 희망과 용기가 무엇인지를 역설하고, 절망과 죽음 속에서 삶이 뭔가를 보여주는 존재라면, 2막에서 그들은 화려한 외모에 풍요를 만끽하며 황제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지체 높은 젊은이들이지만 그들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는 타락의 상징으로 나온다. 그것은 마치 이 작품이 빈약한 무대에서 이뤄지는 가난한 오프브로드웨이의 앙상블쇼이지만, 화려함을 자랑하는 상업적인 브로드웨이의 스펙터클 쇼보다 더 연극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체감하게 하는 작품이란 점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헨리와 머티머는 연극의 신 엘갈로를 추종하는 수하들, 즉 연극의 이념에 따라 각각 대사와 몸짓으로 연극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인간을 깨우치게 하는 연극배우의 상징적 존재들이다.
미스테리에 쌓인 배우, 무언배우
작품에 나오는 8명의 등장인물들 중,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은 무언배우는 이 작품에서 가장 미스테리에 쌓인 인물이다. 무언배우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하는 일이라고는 소품을 들고 있거나 가져다주거나 치우는 정도뿐으로 표정과 마임으로만 연기를 한다. 이 극을 본 많은 관객들은 무언배우의 목소리가 궁금할 것이다. 무언배우는 다른 7명의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는 극에 개입한다면, 이 인물은 전혀 극에 개입하지 않는다. 극의 표층적 내용전개와는 연관되지 않는 것이다. 극에 개입하는 바도 없고, 소품의 전달과 이동이라면 다른 스텦이나 장치를 사용해도 될 텐데, 작가는 왜 굳이 그런 인물을 무대에 등장시키고 계속 무대상에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일까?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이 만약 그 의문을 해결한다면, 이 작품이 던져주는 의미는 훨씬 더 깊어진다. 무언배우는 이 극의 심층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관객들이 이 작품을 지금까지 언급한 표층의미들을 파악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함께 즐길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관극경험을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배우와 관련된 심층의미를 파악한다면, 그런 유쾌한 관극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시 곱씹어볼만한 거리들은 훨씬 더 깊고 풍부해진다. 헨리, 머티머처럼 잠깐 등장하는 단역배우들이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대사가 한 마디도 없고 역할도 거의 없어 보이는 무언배우가 작품의 의미를 훨씬 더 깊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지니는 대단한 묘미중의 하나다.
그럼 무언배우가 던져주는 이 극의 심층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무언배우는 원작에서 The Mute라고 쓰여 있다. ‘무언자(無言者)’ ‘말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무언배우가 하는 몇 안 되는 구체적인 역할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달을 들고 나오거나 해를 들고 나오기도 하고, 천둥을 치고, 눈을 내리기도 한다. 또 마트가 꽃을 필요로 하거나 칼을 찾을 때, 꽃과 칼을 내준다. 또 담벽을 상징하는 막대기를 들고 있거나, 담벽을 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극중에서 보편적인 인간이 하는 무언배우에 대한 언급은 단 두 마디 밖에 없다. ‘말을 안 하기로 돼있지’라는 말과 ‘참 좋은 친구야’ 라는 말이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그런 역할과 말에 어울리는 존재는 무엇일까?
‘자연’이나 ‘하느님’의 상징
그런 존재는 우선 무신론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연’을 생각할 수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해와 달과, 비와 눈을 주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꽃이든 칼이든 담벽이든 모든 것을 말없이 내어주면서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존재다. 자연은 인간이 이용하고 부리는 존재다. 그렇게 볼 때 무언배우는 ‘대자연’이나 ‘자연의 섭리’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존재를 종교적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무언배우를 바로 ‘하느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불교적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 계신 관세음(觀世音)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할 때 하느님은 조물주이자 천지신명으로서 자연의 모든 섭리를 주관하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내어주시면서 항상 말없이 우리 곁에 임재(臨齋)해 계신 분이다. 이번 작품 <환상의 철부지들>의 연출에서, 원작과는 달리 무언배우가 사탕을 나눠주거나, 마술 쇼를 펼치는 것은 무언배우에 대한 이런 해석에 따라 우리에게 베풀어주고, 조화를 부리는 자연이나 하느님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엘갈로와 대비되는 무언배우
이 작품이 미국, 즉 서구의 작품인 만큼, 기독교적으로 해석해본다면, ‘하느님’으로서의 무언배우는, ‘악마(사탄)’적 존재인 엘갈로와 여러 모로 대비된다. 이 작품에서 엘갈로의 대사는 가장 많다. 말이 많은 악마와 말없는 하느님이 대비되고, 늘 인간사에 개입해서 인간이 원치 않는 것을 던져주는 사탄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시되 인간사에 개입하시지는 않는 하느님이 대비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는 그런 양면적 요소들의 대비가 많이 드러나 있다. 엘갈로와 무언배우의 대비와 그들의 상호 관계 속에 내재된 의미는 이 작품에 담겨있는 그 밖의 여러 가지 양면요소들의 대비와 함께 고려하면서 그 심층적인 철학적 신학적 의미를 고찰해보도록 하자.
양면적 요소들의 대조
이 작품은 1막과 2막이 밤과 낮, 달과 해, 가을과 겨울이라는 형상적 테마로 크게 대비되면서, 극중에서 풍요와 빈곤,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시련, 환상과 현실, 가짜와 진짜,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늙은이와 젊은이, 너와 나, 미숙함과 노련함, 대사와 몸짓, 선과 악, 다변과 무언, 사랑과 미움, 친구와 원수, 화합과 싸움, 하느님과 악마 등 세상사와 인생사의 모든 양면적인 요소들이 계속 대조를 이루며 나타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사의 모든 면을 그렇게 서로 다른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그런 양면이 각각 장단점이 있고 상호보완적이며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여 어느 한쪽을 더 좋다고 보고 다른 한쪽을 도외시하기 쉽다.
이분법적 사고를 깨는 연극
우리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한쪽만을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의 마음, 관념 속에 세워진 환상의 막대기(fantasticks)다. 그 환상의 막대기는 담벽처럼 세상을 양분시키고 한 쪽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극중의 허클비는 ‘단순하게 살 것(simplicity)'를 주장하지만, 우리가 단순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루이자처럼 눈에 가면을 쓰고 세상의 한쪽 면만을 보고, 가짜 보석 목걸이를 진짜로 알고 허상에 빠져있어 진실을 보지못하는 것과 같다. 이 작품은 근대 서구사회의 그런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반성을 그 기저에 깔고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깨고자 하는 의도를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서구사회는 20세기 전반까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선과 악, 미와 추, 진리와 거짓으로 구별하면서 그 중 하나를 추구하는 이원론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세계다. 허클비처럼 나쁜 것은 가위로 잘라내고, 벨로미처럼 좋은 것은 물로 키워서, 자신들의 판단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세상을 고착시키고 절대화화하며 ‘무 심은데 무가 나듯’ 모든 것이 인과적이고 단선적인 논리로 체계화되는 세계를 이루고자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관은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많은 철학자, 사회학자, 신학자들에 의해 크게 변모되면서 다면가치적이고 상대적이며 일원론적인 세계관으로 회귀한다. 이 작품은 그런 서구적 세계관의 변화가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대비와 갈등, 모순과 역설의 세계
이 작품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런 이원적 세계들의 대비와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여러 가지 모순과 역설을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자와 남자, 공주병과 영웅 심리로 대비되는 루이자와 마트는 담벽을 허물고 대낮에도 자유롭고 떳떳하게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길 원했지만, 정작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서로 싸운다. 허클비와 벨로미는 식물을 키우는데 한 사람은 물기를 없애야 잘 자란다고 생각하고 한 사람은 물을 많이 줘야 잘 자란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담벽을 쌓았을 때가 가장 꿍짝이 잘 맞는 친구사이였지만, 정작 그들의 원대로 두 집 정원이 하나가 됐을 때 진짜 원수지간이 된다. 헨리와 머티머는 대사와 몸짓 연기를 하는 배우로 대비되는데, 1막에서는 늙은 배우들로 나와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척하면서 그들을 돕고, 2막에서는 젊은이들로 나와 마트를 돕는 척하면서 그를 파멸로 이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늙은이들로 나올 때 그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고, 화려한 젊은이들로 나올 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래 그런 대비와 갈등, 모순과 역설로 이루어진 세계다.
악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하느님
작품 속에서 악당들로 묘사되는 엘갈로와 헨리, 머티머는 그런 갈등과 모순을 일으키거나 더 심화시키는 사탄과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혼란을 일으키며, 시련을 겪게 하고, 나쁜 길로 유혹한다. 사탄과 하느님, 선과 악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긴 하지만, 왜 전지전능하신 ‘참 좋은 친구’로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신 하느님은 그런 악을 묵인하며 그로 인한 모순과 역설을 방치하는 것일까?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엘갈로는 “여기 아무도 설명 못하는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 누가 알겠습니까? 곡식이 여물어가는 이치를. 그 누가 알겠습니까? 왜 봄이 그 쓰디쓴 겨울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지. 왜 우리는 왜 모두 죽어야만 다시 새 생명이 나올 수 있는지. 전 그 대답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뿐, 그래서 전 그들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저 자신도 약간 아픔을 맛보았구요.” 라는 대사를 하는데 바로 이 대사에 이 작품의 심층적인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모순과 역설의 자기발견적 해결
철이 든다는 것은 성숙해지는 것, 즉 익어가는 것이다. 과일과 곡식이 익어가려면 따가운 햇살도 필요하고 차디찬 서리도 필요하다. 철이 든다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더 성숙해지고 우리의 인식이 더 깊어지는 인식의 변화로, 그런 인식의 변화는 인생의 쓴맛과 단맛, 희노애락과 산전수전을 다 겪는 인생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간사의 모든 양면적인 요소들이 일으키는 갈등과 모순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그런 갈등과 모순을 스스로 해결해가면서 몸과 마음이 더 여물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시련과 아픔의 극복이 없이는 더 높은 수준으로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하느님과 자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준다. 결코 인간이 좋아하는 것만 주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 고통과 기쁨, 희망과 절망을 다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 그 모순과 역설을 해결해가기를 기다린다. 그런 면에서 사탄이나 엘갈로와 같은 악마적 존재는 우리에게 고통과 유혹을 통해 스스로 자기발견을 통해 지혜를 깨우치게 하는 지혜의 신이자, 하느님과 서로 통하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면서 서로 통하는 세계
우리의 인식의 그렇게 성숙해졌을 때, 우리는 세계를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는다. 세상의 양면적인 요소들이 서로 다름을 알되, 그 양자의 모순과 역설을 자기발견적으로 해결하고, 그 양자가 서로 통함 또한 알게 된다. 극중에서 벨로미가 서로를 미워할 때 쌓아가던 담벽을 허물자고 할 때, 엘갈로는 그 담벽을 그대로 두게 한다. 우리는 너와 나라는 존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하지만, 너와 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터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서로가 다름을 알고,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포용하면서 서로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며, 다르면서 서로 통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다.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색(色)은 색(色)이요, 공(空)은 공(空)이면서도,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되는 경지이며,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다면가치적으로 포괄하는 일원론적 세계관이다.
모순과 역설의 자기발견적 해결은 연극의 본질
우리는 그런 식으로 철이 들어가고, 인생의 지혜를 알아간다. 우리의 인생에 만약 갈등과 모순과 문제가 없다면 평탄한 인생이 될지는 몰라도 재미없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어린 시절 놀이를 통해 지혜를 발전시켜간다. 갈등과 모순을 일으켜놓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것이 놀이의 재미이며, 연극의 재미 또한 갈등과 모순에 있다. 이 작품에서 엘갈로는 그런 갈등과 모순을 일으키고 심화시키는 헤르메스적인 존재다. 갈등과 모순을 통해 재미를 느끼며, 그 해법을 찾아 고정관념과 허상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헤르메스적인 연극의 본질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호흡하며 재미를 느끼게 하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적인 요소와 함께, 관객들의 인식을 깨우치는 교육(Education)적인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적인 뮤지컬이다. 뮤지컬 <환타스틱스>는 이렇게 많은 상업적인 뮤지컬이 연극외적인 환상의 창조해내는데 막대한 자본을 들이는 것과 달리, 정말 연극적인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재치 있게 활용해서 연극의 본질을 대단히 충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