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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예수닮기를 시리즈 설교]
제목 : 인내(忍耐)가 만든 인내(人臭), 친절!
본문 : 야고보서 5장 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개역개정>
혹시 ‘소원’이라는 곡의 원곡자로 잘 알려져 있는 CCM가수 한웅재 목사님을 아십니까? 목사님의 3집 <오늘, 은혜>라는 앨범에 수록된 ‘갈릴리 사람 예수’라는 곡이 있습니다. 잘 모르실 수도 있으니 이 곡의 가사를 짧게 소개하면서 오늘 설교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그의 말 속에서는 땀 냄새가 났어요 우리에게 흐르는 그 땀 말이죠
그의 말은 가깝고 우릴 닮아 있었죠 가난한 우리네 살결 같은 얘기
우리는 공생애 이후의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이후의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만 우리가 닮아야 할 점들을 찾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곡을 작사하신 한웅재 목사님은 오늘 10월의 문을 열면서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조금 다른 시선을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바로,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신 듯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 보내오신 그 30년이란 세월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딱히 특별한 기록도 없고, 특별할 것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예수님의 성품이 그 곳에 녹아져 있다는 것을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생애 이 전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마가복음 6장 3절, 새번역>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마태복음 13장 55절, 새번역>
물론 여기 구절에 등장하는 ‘목수’라고 하는 헬라어 ‘텍토노스’가 목수보다는 일반적인 건축 노동자로 보는 것이 옳다는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만 사실 중요한 사실은 목수인지, 건축 노동자인지보다 예수님은 당시 꽤나 험한 일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수의 아들’을 넘어 ‘목수’라고 불리신 것으로 보아 꽤 그 일을 잘 감당하고 계셨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수나 건축 노동자들의 업무 강도는 상당히 높고, 위험한 편입니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꽤 고생하는 직업이었기에 당시에 좋은 직업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돈이 되는 직업도 아니었고, 몸이 편한 직업도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3D(Difficult(어려운), Dirty(더러운), Dangerous(위험한)으로 기피업종)직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꽤나 거친 사람들이 가진 직업이기도 했는데 당시 제자들이 가졌었던 직업 중 어부와 함께 거칠기로는 손을 꼽을 정도의 직업이었습니다. 왠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면 가냘프고 여리실 것만 같은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다니 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청난 은혜가 숨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 ‘목수’라는 직업을 통해, 우리라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바닥에 해당하는 생활을 하시면서, 사람이 가진 본성과 삶과 눈물과 애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흙수저의 삶을 사셨기에, 온통 흙수저들로 가득한 우리네 인생을 이해하실 수 있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새번역>
왜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굳이 이런 삶을 사셔야 했을까요? 왜 충분히 금수저로 태어나서 살아가셔도 되는 분이 굳이 이런 눈물과 고통과 애환이 있는 흙수저의 집에 태어나서 흙수저의 삶을 사셨을까요?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이곳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웅재 목사님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갈릴리 사람, 목수였던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찬양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내’를 배우셨던 것입니다. 3년의 공생애를 살기 위해, 30년의 오래 참음을 경험하시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30년이란 긴 시간동안 이런 삶을 사셨던 이유에 대해서 아무리 이해하려 해봐도,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그냥 말뿐인 설명이 아니라, 30년이란 ‘인생’을 살면서 ‘인생’에서 ‘인내, 즉 오래 참음’을 배우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깊이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30년이란 시간동안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엇 때문에 힘든지, 왜 괴로워하는지, 그 가장 바닥에서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간에 대해서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더 큰 계획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마땅히 이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합쳐져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신 시간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은 준비되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셨던 것입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30년의 인내의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도 다시금 분명히 결단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배신이 난무하던 직업 현장에 계셨기에 배신도 이해할 수 있으셨던 예수님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흙수저였던 것을 감안하면 제자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으셨기에 제자들의 실수까지도 다 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아침을 맞이하고, 신성한 노동을 하며, 매일 매일을 땀 흘려 사는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인지 예수님은 아셨기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화평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수라는, 건축 노동자라는 현장에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었겠고, 알력다툼이 있었겠습니까?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고, 서로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고, 돈에 대한 욕심만 가득했던 그 곳에서 예수님은 왜 평화가 필요한지, 그리고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 이 모든 벽을 허무셔야 했던 것입니다. 화평이 필요 없는 곳에서 자랐다면, 결코 화평해야 할 이유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화평이 필요한 곳에서 일하시며, 어떻게 화평해야 하는지 몸으로 체득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忍耐), 오래 참음’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느껴지는 향기는 바로 ‘인내(人臭), 사람 냄새’였던 것입니다. 인내가 만든 인내, 오래 참음이 만든 사람 냄새를 통하여,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누가복음 2장 52절, 새번역>
우리는 이 구절의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닮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성품이 있는데, 그 성품이 바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성품, 성령의 열매 4번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갈라디아서 5장 22절A, 새번역>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인내, 오래 참음’의 시간을 통해 ‘인내, 사람 냄새’를 풍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이런 저런 시간, 많은 것들을 경험했기에, 이해의 범주가 넓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전해 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어떤 글을 보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딱 한 글자 차이인대, 단 하나도 닮지 않았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프면서도 현실을 콕 찝어 말한 것 같아 너무도 찔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인대, 그리스도인은 무관심입니다. 그리스도는 희망인대, 그리스도인은 절망입니다. 그리스도는 허용인대, 그리스도인은 불통입니다. 그리스도는 배타적인대, 그리스도인은 이기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내인대, 그리스도인은 조급하고 성급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는 향기가 나는대,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악취만 납니다. 혹시나 이것이 우리를, 나를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인내, 오래 참음’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용납의 인내가 필요하고,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눈물의 인내가 필요하며, 누군가와 발맞추기 위해 조화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그 인내의 광야를 통과하고 계신다면 불평의 시간이 아닌 오히려 감사의 시간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가장 좋은 본이 되어준 ‘욥’을 통해 우린 배워야 합니다. 욥의 이야기가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교훈이 정말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욥기를 진지하게 묵상한 이들은 ‘인내’가 왜 우리 인생에 이렇게 중요한 성품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욥의 이야기는 정말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비참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몸마저 아픕니다. 아내는 욕을 하고, 친구들은 정죄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잿더미 위에 앉아 옹기 조각으로 몸을 긁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욥기 2장 8절, 새번역>
상상만으로 얼마나 처절한 모습입니까? 이런 것이 인내의 시간이기에 겪어야 한다면 누가 겪고 싶다고 말하고 싶겠습니까? 설상가상 그 와중에 하나님마저도 욥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욥은 너무도 화가 나서 하나님께 따졌다가 하나님께 호된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 때문 아니었습니까? 제 3자가 볼 때, 욥은 너무도 불쌍하고, 하나님은 너무도 이기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욥에게 이런 인내의 시간을 보내게 하신 것일까요? 답은 의외로 너무 간단합니다. 욥은 금수저였던 자신의 삶이 흙수저로 돌아선 이후에야 처음으로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기 42장 5~6절, 새번역>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겉치레를 중시한 신앙이었습니다. 그저 착한 사람이었고, 신중한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주변에 사람은 많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가족들만 신경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식들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교육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저마다 생일이 되면, 돌아가면서 저희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세 누이들도 오라고 해서 함께 음식을 먹곤 하였다. 잔치가 끝난 다음날이면, 욥은 으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자식의 수대로 일일이 번제를 드렸다. 자식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죄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잔치가 끝나고 난 뒤에는 늘 그렇게 하였다. 욥은 모든 일에 늘 이렇게 신중하였다. <욥기 1장 4~5절, 새번역>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하나님을 높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반대의 길에 서 있었다는 것을 욥은 부자일 때 차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저 귀로만 하나님을 들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욥이 안타까우셨고, 정말 의인다운 의인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욥과 같은 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섬뜩해 보이는 말씀이 욥에게 베푸신 인내의 시간을 보면서 더욱 더 강력한 경고를 담은 의미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마태복음 5장 30절, 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이 없는 부자 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가난한 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해답을 내려 주십니다. 설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허락하시는 시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간이 바로 ‘인내, 오래참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내를 통과한 사람에게서는 ‘인내, 사람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져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사람다운 사람냄새를 내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이 회개하고 나서 하나님은 욥에게 가장 먼저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자신을 정죄했던 친구들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용서야말로 사람냄새 나는 사람의 가장 큰 용기와 결단이 있는 행동입니다.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욥기 42장 10절A, 새번역>
그러자 하나님은 욥의 환경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리는 제자리인대 곱절의 제자리로 돌려놓으십니다.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욥기 42장 10절B, 새번역>
하지만 더 이상 욥은 그 부귀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베풀었던 잔치를 이제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 냄새’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금반지를 끼워 주기도 하였다. <욥기 42장 11절, 새번역>
욥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욥에게 그 모든 환란과 고통의 시간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인내의 시간이었다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장 11절, 개역개정>
욥의 인내에 대한 결과를 들은 이라면, 이렇게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결말이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말도 충분히 해피엔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이 인내의 홍해를 건너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기쁨으로 도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너무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 ‘인내, 오래참음’이 만든 ‘인내, 사람냄새’는 바로 ‘친절’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친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다섯 번째 성품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인내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친절’입니다. 인내의 시간을 거친 이들은, 인생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은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친절함이 바로 그 사람이 가진 내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인내의 시간을 통해 바로 이 말씀을 가장 깊이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 새번역>
인내의 시간을 거치기 전에는 내가 대접을 받을 것에만 신경을 썼기에 그 어떤 대접도 받을 수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그저 받기만을 원했지 먼저 대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내의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합니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내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내가 먼저 섬겨야 하고, 내가 먼저 고개 숙여야 한다는 것을!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받고 싶었던 그 대접이 따라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친절’을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의 시간을 거친 이들에게 ‘친절’이란 사람 냄새, 향수가 장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부러라도 이 인내의 시간을 거쳐 ‘친절’이라는 아이템을 성취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이 인내의 시간을 가르쳐 주셔서 ‘친절’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성품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인내를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인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실 시간에 나를 맡기고, 마음껏 나를 빚으시도록 진흙이 되고, 빚어진 이후에는 깨지지 않고 단단해 지도록 가마에 넣어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인내, 오래 참음’을 통해 ‘인내, 사람냄새’가 나는 ‘친절’을 소유하게 되어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존중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능력 많은 그리스도인보다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하며, 냉철한 그리스도인보다 명철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구해 봅니다.
우리 힘들겠지만 그 인내의 시간을 반드시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각 자 다르기에, 각 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을 잘 통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 ‘인내, 사람냄새’인 ‘친절’을 성품으로 소유하게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 닮기를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여러분, 인내(忍耐)가 만든 인내(人臭), 친절을 이 땅에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 쉬운성경>
결단 찬양 - 광야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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