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루법문<2024년5월8일(수) (음4월1일>
신심명 07
遣有沒有 從空背空(견유몰유 종공배공)
多言多慮 轉不相應(다언다려 전불상응)
絶言絶慮 無處不通(절언절려 무처불통)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선원 앞 메타세쿼이어나무가 지난 가을 열매를 맺었다가 겨울엔 잎과 솔방울을 다 떨어뜨리고 봄에 싱그러운 새잎이 돋더니 이제는 짙은 초록이 되었습니다. 나무 한그루가 말없이 무상(無常)을 보여주고 있는 계절입니다.
우리들에게 5월은 바쁘기도 하고 즐겁고 신나는 달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비롯하여 아이를 잘 키워 빚을 갚고, 낳아주신 부모님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등 감사드릴 일이 많은 달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은 부처님께서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오셔서 ‘우리들이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오온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삶, 자비보살행을 실천하는 본래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가라고 깨우쳐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본래 부처로 깨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 고집대로 산다고 지독하게 말을 안 듣습니다.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씹어 보면서 정말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 달에 이어 신심명을 주제로 법문을 하겠습니다.
遣有沒有 從空背空 (견유몰유 종공배공)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을 따르면 공을 등지게 된다.
있음이 싫다고 해서 있음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는 생각이 더 붙어서 더욱 '있음'에 더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참 많이 범하는 잘못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빠지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욕심이라는 것이 생각으로 남아 있으므로 없어지지 않고 머무르거나 집착하게 됩니다. 또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므로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남자가 ‘연인을 생각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연인을 생각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연인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 연인에 대한 생각에 머물러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또한 미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내가 그 사람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 머물러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아시겠어요? 아셨으면 실천하셔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지’ 하면 이미 그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끄달려 다닙니다. 생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내버리면 되는데 보내버리지 않고 잡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느낌은 상(相)입니다. 우리를 본래 부처로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좋지 못한 것이 생각이에요. 상(相)은 분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은 분별심입니다. 분별심은 인과가 작동합니다. 그러기에 있음을 버리려고 하는 생각이 인(因)이 되어 ‘있음’에 빠지는 과보가 따르는 것입니다.
공(空)이 좋다고 공(空)에 집착하고 있는지, 공을 여의려고 하면서 공에 빠져 허덕거리는 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자칫 변견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없애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고통에 빠져 고통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셔서 생활속에서 하나하나 살펴 보면서 적용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우리한테 일어난 느낌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면서 좋다 나쁘다 느끼며 집착하죠? 12연기에서 보듯이 집착을 하게 되면 결국엔 고통이 따르는 무명에 들어가죠?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느낌에 집착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고통도 미워하는 마음도 모두 무상(無常)인 것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하다는게 뭡니까?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고 공(空)이라는 겁니다. 그게 본질이고 본래 마음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본래 마음에서 늘 깨어있는 삶이 이루어지면 여러분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을 살아갈 수 있거든요.
항상 마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알아차려서, 일어나는 것만 알지 말고 사라지는 것도 끝까지 알아차려 생멸하는 무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그것이 실체가 없는 자리인 줄 아셔야 합니다. 하면 됩니다. 어려운 게 없습니다. 붙잡고 머무르지만 않으면 됩니다.
‘공을 따르면 공을 등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공이라는 것 역시 있음(有)와 마찬가지로 공이라고 생각하면 이미 공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즉비논리에도 나오잖아요. ‘공이 공이 아니라 이름이 공이다. 바라밀이 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바라밀이다.’ ‘공을 따른다’는 말은 공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지를 만든다는 말입니다.
상을 하나 만든다는 겁니다. 공이라는 상을 만든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공이 좋으니까 ‘공을 실천해야지’라고 하면 공이라는 이미지가 하나 만들어지죠? 만든다는 뜻을 알아들으시겠지요? 상인줄 아셔야 합니다. 모르면 속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모든 상을 떠나라 했듯이 말뜻따라 가고 모양따라 가면 안됩니다.
공이라는 이미지(相)를 만들면 공이라는 상, 즉 대상이라는 객체와 대상(공)을 좋아하는 주체로 분리가 되어, 공을 좋아한다는 생각 자체가 공을 등지는 일이 됩니다. 공이란 부득이 말로 표현하자면 공을 따른다는 생각이 끊어진 상태, 시비분별이 끊어진 곳을 말합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대한 확신이 서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자꾸 말 따라가고 뜻을 따르는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이렇게 공을 따르게 되면 공을 등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아! 유(有)에 집착하면 안좋으니까 유를 버려야지. 있음을 버려야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있음을 버리고 공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공이 좋다 하니 공을 깨우쳐야지’ 하죠?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쁜 거니까 이 생각을 비워야지’ 하고 생각하잖아요. 아니면 ‘생각을 붙잡고 있으면 힘드니 놓아야지’ 이렇게 하죠?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싫어하면 언제나 그것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처럼, 버리고 피하면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됩니다. 싫어하는 것을 놓고 그 자체가 부처라는 사실에 눈이 확 열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싫은 것 좋은 것으로 나누는 분별에 떨어지기 때문에 안됩니다. 그래서 버릴려고 하면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되는 거에요. 우리가 하는 마음공부는 버리고 취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이미 있는 것이니 다시 취할 수가 없고, 마음은 곧 자기 자신이니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 그대로 수용할 줄 아셔야 합니다.
옛날 숭산 스님이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고 견처를 드러내었으나, 은사이신 고봉 스님이 ‘아니다 잘못되었다’ 하며 인가를 하지 않으시자 나중에는 화가 나서 스승을 째려봤다고 해요. 그런데 그때 불현듯 숭산 스님은 ‘째려보는 모습 그대로 실상이구나’하는 안목이 열렸다고 합니다. 분별의 세계에서는 스승을 째려보는 행위를 부도덕하다 하겠지만 법의 세계에서는 째려보는 모습 그대로가 다 법입니다.
우리가 하는 마음공부는 절대 버리고 취하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마음은 이미 있는 것이니 다시 취할 수가 없어요. 원래 쓰고 있고 본래 충족되어 있는 걸 아시면 됩니다. 이미 마음이 진짜 나니까 버릴 수도 없는 거에요. 생멸도 없다고 하잖아요. 그게 본래 우리 마음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인데 우리는 ‘나고 죽는 육신’이 ‘나’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잘 보셔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착각에서 깨어나서 본래 부처로 살기를 바랍니다.
생각이 비록 시끄럽다고 하여도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마음은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거다, 마음은 이미 있는 것이니 다시 취할 수도 없다고 했지요? 또 마음은 곧 자기 자신이니까 버릴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생각이 시끄럽다고 해도 마음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생각은 취할 수도 버릴수도 없다 이렇게 하니 혼란스럽지요? 혼란스러운지 아닌지도 모르시겠어요? (웃음) 왜 그럴까요? 생각은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본성은 억지로 조작하여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흔히 물에 비유됩니다. 물은 정해진 모양이 없이 물이 담기는 모양에 따라 병에 담으면 병 모양을 하고 컵에 담으면 컵 모양을 나타내 보입니다. 또 물은 바람이라는 인연을 만나면 물결이 됩니다. 물결이 생각과 같은 것이거든요. 그러면 물결은 물일까요? 아닐까요? 우리의 시각이 물과 물결로 나누어 보는 입장이라면 생각은 안좋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없이 분별하지 않고 살 수가 없잖아요. 생각해야 되고 분별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생각하되 생각한 바 없이 생각하고 분별하되 분별하는 바 없이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일어난 분별 그 자체가 법인 줄 아셔야지 따로 떼어서 보면 안됩니다.
일어난 대상만 보고 대상이 발 딛고 있는 바탕을 안본다는 말입니다. 바탕을 같이 보게 되면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비유를 하고 색은 드러난 물질로 본다면 일체 사바세계 현상세계 다 펼쳐진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 거에요. 전부 연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연기의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우주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원리가 연기법입니다.
그 바탕은 항상 오고감이 없는 공, 마음, 본래부처라고 표현하잖아요. 부득이 제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니 말을 붙잡고 자기 견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아셨죠? 견해를 지으면 안된다는 걸 아시고 그 이치를 깨치셔서 이 자리가 늘 본래 우리 마음자리고, 보이는 이것마다 전부 깨달음이구나 그렇게 보셔야 합니다.
촉목보리(觸目菩提), 즉 눈에 닿이는 것마다 전부 깨달음이라고 하잖아요. 도재목전(道在目前), 도는 눈앞에 있다고도 하잖아요. 아셨죠?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은 마음의 물결입니다. 물결이 그대로 물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실개성불(悉皆成佛)이라고 조론(肇論)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다언다려 전불상응)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하지(통하지) 못한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을수록 번뇌가 많고 번뇌가 많다는 것은 분별을 많이 한다는 뜻이므로 도(道)하고는 더욱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상응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로 깨어나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의 세계[大道]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의 세계는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도하고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도(道)에 대해 확신이 서 있다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생각을 많이 하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을 하면 전부 다 걸려요. 생각에도 전부 속박되고 구속됩니다. 근데 이 자리가 분명하면 어떻습니까? 한 마디 한 마디가 이것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자리에 포섭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 세계 전부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 여기에서 나오는 거에요. 펼치면 다(多)고 돌아가면 하나(一)가 되는 거에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면 전부 하나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내세운 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이거 잖아요. 도가 뭡니까? 하니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이거 하나 내세우잖아요. 여기에는 말이 많든 적든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요. 옳고 그른 것도 이 자리에는 없어요.
이 자리가 손가락에 있을까요? 손가락이 드러내고 있는 전체, 보고 있는 여러분들 마음에는 이거다 저거다 하는 것이 나오지 않잖아요. 나누면 벌써 분리가 되어 버려요. 분리가 되면 나누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잘못되어 버리는 거에요. 나누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범부중생이 되는 겁니다. 맨날 시비 분별하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絶言絶慮 無處不通 (절언절려 무처불통)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앞에서 말씀드린 ‘다언다려 전불상응’과는 반대되는 구절입니다.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분별함이 없으므로 어느 때 어느 곳이든 걸림이 없어 자유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두루두루 통하여 막히는 데가 없습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부 분별이다라고 말씀드렸죠?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선지식들은 (손가락을 세우며) 이것뿐이라고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는 도가 뭡니까? 하면 간시궐!(乾屎厥) 하든지 무!(無) 하면서 드러내는데 우리가 분별하며 보기 때문에 막힘이 있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라 두루두루 통해서 막히는 데가 없습니다. 막힌다는 것은 곧 차별된다는 것입니다. 차별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벽이 있으니 안과 밖이 나누어져 버렸죠? 안과 밖이 차별되죠? 경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계가 하나 생기면 나누어지잖아요. 분별이 되죠? 둘로 쪼개어지는 거에요.
통하지 않으면 막히는 거잖아요. 막히면 차별되는 것이고 차별된다는 것은 곧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것은 곧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 줄 아셔야 합니다. “말을 해도 말이 없고 생각을 해도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끊어져서 없는 것하고 하지 않는 것 하고는 의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의도가 들어간다는 것은 나와 분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말해도 말 한 바 없이 쪼개지지 않으면 되는데 분리가 일어나면 범부중생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이 자유롭게 된다고 하니 ‘내가 말을 끊고 생각이 끊어지기’를 바라면 결코 끊을 수 없고 통할 수도 없습니다. 말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는 생각 자체가 무념이 되었다는 이야기지 끊어질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무념으로 종(宗)을 삼으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無相爲體(무상위체) 無念爲宗(무념위종) 無住爲本(무주위본)
무상을 체로 삼고 무념을 으뜸으로 삼고 무주를 근본으로 삼아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생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난 생각에 해석을 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오류가 범해진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일어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데 말 한마디 들으면 의미를 갖다 붙여 허황된 소설을 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짓는 것은 업(業)밖에 더 있겠습니까? 맞죠? 스스로 지은 업 때문에 받는 과보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고통에 화가 나면 본인 잘못은 보지 않고 남탓을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게 살고 있습니다.
무념에 대해 육조 스님의 말씀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니, 스스로 생각 위에 경계를 여의어 법에 대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다.”
생각 위 경계를 허물어버리라는 말입니다. 일어난 모든 생각에 해석, 분별하지 않고 의미를 더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대로 들을 뿐, 볼 뿐, 느낄 뿐이면 되는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니까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거에요. 그리고선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일로 갑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 말에 상처받지 마시고 처처가 법문이니 뜻을 잘 살려 새기시길 바랍니다.
“미혹한 사람이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그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긴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위에 있다 없다 생각을 일으키게 되고 경계를 세우니 둘로 쪼개지잖아요.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시비분별이 일어나죠. 삿된 견해가 일어나서 무명에 떨어지는 겁니다. 본래 부처로 가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생각 위에 삿된 견해를 일으킵니다. 집착하는 것이 삿된 견해입니다.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생각함이 없으면 그 무념도 또한 서지 않는다.”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부여하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하고 두 번째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번 일어난 생각에 다시 해석을 넣어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의미부여를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없다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자기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반드시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이 마음인줄 즉, 색이 곧 공인줄 알면 되는데 대상을 분리해서 보니 분별된 삶으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본래 작용하는 그 마음을 통해 본래 부처로 깨어나라 하지요. 그래서 선지식들이 주장자를 들어보이거나, 손가락을 들어보이거나, 소리를 내거나, 때리는 등 느끼는 것 아는 것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는 이 자리를 나타냅니다.
본래자리는 우리가 알 수가 없잖아요. 알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부처의 작용을 통해 그 자리를 확인해야 되는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투명인간이 있는 곳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있다면 물감을 뿌려 물감이 묻은 자리를 확인하면 되겠죠? 도를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듣는 이 자리에서 도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매사에 늘 깨어 알아차려서 일체 모든 대상 경계나 느낌, 색수상행식 오온도 모두 생겨나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좋다 나쁘다는 느낌, 몸이 아프다는 것도 그대로 알아차려 그 자리에서 무상을 절절히 깨우쳐서 그대로 법인줄 아시면 됩니다.
틱낫한 스님께서도 예전에 맨발걷기명상을 하시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상태를 지켜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방법을 알려주셨잖아요.
생활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활용될 수 있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고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삶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마음 다스림 법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