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에 시조의 종가는 단시조랬다
허랑방탕, 여기까지는 왔다
주석이 필요없는 단시조에 걸맞는 인사였다
오승철 시인의 시조집 '길 하나 돌려세우고' 표지.
김길호 작가.
그렇지 않아도 인적 왕래가 적다고 항공편의 중지로 제주도와 일본의 하늘길이 막혀버렸었는데 코로나19로 더욱 꽉 막혀버렸다. 제주에서 오는 보통 항공 우편물이 예전에는 오사카에 일주일이면 오는데 지금은 한달 이상 걸린다.
지도상으로 제주도와 서울 오사카를 일직선으로 그어서 연결하면 반듯한 이등변 삼각형 꼴이다. 지금 제주에서 일본으로 오는 우편물은 모두 서울 경유로 들어온다. 제주와 오사카가 직선 거리로 오고갈 형편이 아니다.
제주에서 2월 초순에 보내온 오승철 시조집 '길 하나 돌려세우고'를 필자가 받은것은 3월 초순이었다. 봉투를 열고 시조집을 보는 순간 장정이 참 좋았다. 제주 출신 홍진숙 화가가 그린 '길-떠남과 설레임'이 표지 그림이었다.
시조집은 5부로 나눠진 구성 속에 67편의 시조가 실려 있었다.'한국단시조 시인선 1'이라고 표지에 명기된 것처럼 전부 짧은 시조였다. 67편 중에 필자가 13편을 골라서 소개한다. 필자는 평론가도 아니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 필자가 읽어서 선택한 것뿐이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제주에는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디어들이 제주 출신, 아니면 제주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시집을 소개할 때 너무 인색하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이나 수필은 내용이 길어서 해설 형식의 소개 밖에 할 수 없지만 시의 경우는 다르다. 시 한두 편은 얼마든지 전문을 게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을 소개하지 않고 마치 무우 자르 듯 앞뒤를 자르고서 몇 행만을 개재해서 그 시집을 소개한다. 그렇게 소개한 시집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으니까, 필자는 언제나 한두 편은 전문을 게재하라고 한다.
필자는 소설을 쓰고 있다. 제주 문인들이 쓴 소설이나 수필은 전문을 게재할 수 없어서 해설만을 써서 소개를 해도 독자들이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소개를 안하지만 시의 경우에는 전문을 써서 나름대로의 감상도 곁들이고 있다. 시집일 때는 더욱 많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 연재를 시작한 것도 가끔 고향 제주 문인들의 작품을 외국에서 읽었을 때, 다른 각도에서의 느낌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전하는 것도 문인으로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두가 좀 길어졌다.
오승철 시조집 '길 하나 돌려세우고'의 '시인의 말'에, 시조의 종가는 단시조랬다. 허랑방탕. 여기까지는 왔다. 2021년 1월 오승철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처음 필자는 책의 '차례'인줄 알고 페이지 번호를 찾으려고 해도 없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인사말 전부인 것을 알고 놀랬지만. 주석이 필요 없는 단시조에 걸맞는 인사였다.
첫 소개는 시조 <차마고도>이다.
차마고도
매일 아침 알약 몇 알 넘겨내는 내 식도
하늘에 내맡긴 일.
차마고도 같은 그 길
어디로 나를 이끄나 천형의 그리움아
차마고도가 어떤 길인가. 삶과 영혼이 같이 가는 길이라고 한다. 알약 몇 알로 사람의 내장과 같이 꾸불꾸불한 그 험한 길을 극복해야 한다. '천형의 그리움아'는 역설에 역설의 반전을 낳고 있는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어느 은퇴 장로>이다.
어느 은퇴 장로
강냉이떡 하나에
교회로
이끌렸다고?
돌아서서,
홧김에 도둑장가
들었다고?
징하게 살다 간 아내, 여든에도
그립다고?
어느 날의 돌연변이 일상이 인생을 결정 지울 때가 있다. 오 시인 특유의 해학과 풍자 속에 사랑이 메아리치고 있다.
다음은 <하얗게 웃다>이다.
하얗게 웃다
'술술 풀리는 하루'
조간신문 오늘의 운세
느닷없는 부음 문자
참 쉽게 사람이 가네
국화꽃 혼자 웃는 밤
술로 푸는 이 하루
운세는 살아가는 인생의 진행형이다. 부음은 그 인생의 종말을 의미한다. 살아가는 인생과 죽음 사이의 객관적 관점에서 하루를 아니, 인생을 되돌아보는 밤에 반려처럼 하얀 국화꽃은 쓸쓸히 혼자 웃고 있다.
다음은 <낙화>이다.
낙화
그냥 슬쩍 왔으면
그냥 슬쩍 갈 일이지
납작집 개복숭아
어쩌다 꽃은 피워
산마을
어느 잔칫날
윷판에
도는 꽃잎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는 살고 있는 의미가 있다. 슬쩍 가면 안된다. 납작집 개복숭아가 어느 봄날 산마을 잔칫날 윷판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운치스러운가. 그게 바로 슬쩍 와서 슬쩍 못 가는 삶의 의미이다.
다음은 <가을 하늘>이다.
가을 하늘
운동장 한복판에 하얀 선을 그리듯
저렇게 제트기가 가을 하늘 긋고 가면
오늘 밤 북두칠성도 반쪽으로 잘리겠다.
텅빈 쓸쓸한 가을 운동장에 운동회를 위한 새하얀 선과 새파란 하늘을 나르는 제트기가 남기고 간 하얀 선은 그 쓸쓸함을 더해 준다. 그 현실 속에 북두칠성의 반쪽 잘림까지 기상천외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다음은 <닐모리동동>이다.
닐모리동동
바다에서 돌아와
숨비소리
널고나면
물마루 몰래 건너
어깨를 툭 치는 달
헛제사
차리다 말고
가지깽이 댕글랑
<닐모리동동>은 제주 사투리로 <내일 모레>라는 의미에 간절하게 동동 기다린다는 뜻이다. 시인은 다른 곳에는 제주 사투리면 그 설명도 부언했는데 여기에는 없었다. 그 만큼 시민권을 얻은 의미인지 모르겠다. 해녀의 숨비소리도 그렇다. 물질 속에 흥건히 젖은 숨비소리를 빨래처럼 널었단다.
숨비소리 널고 시간이 지나면 동편 바다 건너에서 달이 떠오르는 밤, 언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를 혈육의 삶의 미완성을 애달픈 마음으로 헛제사를 치르는 경건한 달밤, 그 엄숙하고 조용한 제사 시간의 흐름 속에 '가지깽이 댕글랑'하고 그 시간의 흐름을 깨트린다. 가지깽이(밥주발 뚜껑) 댕글랑은 기원(祈願) 속에 울려퍼지는종소리이다. 가슴 찡하게 남는다.
다음은 <주전자>이다.
주전자
기차처럼 떠나네
그리움 다 내뿜고
달강달강 온몸으로 감당해낸 끌탕의 세월
가을볕 아래서 보면
아,
저 금빛 관음불상!
주전자 속에서 물이 펄펄 끓여서 김을 내뿜는 것을 보고 의인화 시키는가 했더니 마지막 한 구절에서 그것이 아니고 아, 모든 고통에서 해탈한 금빛 관음불상. 의불화(擬佛化)였다. 신선하고 충격적인 직시(直視)였다.
다음은 <고추잠자리 13>이다.
고추잠자리 13
광목천에 감물 먹여 양철처럼 빳빳해진
폐교된 명월초등학교 그 중산간 팔월 하늘
저물녘 갈색의 공습 피해가질 못하겠네
고즈넉한 중산간 마을의 페교된 교정 가을 하늘 구름 한점 없다. 무대 장치처럼 펼쳐지는 감물 들이는 광목천들의 나열. 바람은 물론 시간까지 정지해버린 곳에 난데없이 나타난 잠자리들 한폭의 풍경화이다.
다음은 <고추잠자리 15>이다.
고추잠자리 15
절도 교회도 없는 대성마을 가을은
누구에게 기도할까 고향언덕 조랑말
벌초날 경운기 뒷모습 아득 놓친
저 금빛!
성경 마태복음 6장 5절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라'는 구절이 있다. 그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절도 교회가 없드라도 네 골방과 같은 은밀한 곳은 아니지만 드넓은 대자연 속에 고고이 단 혼자이다. 이 속에서 네 골방의 혼자처럼 큰 목소리로 기도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밀레의 만종(저녁종)도 땅거미가 질 때에 부부가 밭농사를 마친 대지 위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조상을 위한 벌초를 마치고 달성감에 젖었을 때, 그 순간의 감사가 바로기도이다. 절과 교회가 없지만 기도하는 그 마음에 있다.
다음은 <고추잠자리 21>이다.
고추잠자리 21
깊을 대로 깊은 가을
티 없이 맑고 맑네
오름과 무덤 사이
억새 물결 철썩이면
잠자리 싹 지운 가을 하늘
천지간에 말간 슬픔
잠자리를 싹 지운 고추잠자리의 작품이다. 더 이상 파랄 수 없는 호수 같은 하늘 속의 늦가을, 오름과 무덤과 억새,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무대이다. 잠자리를 등장 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될터인데, 시인은 일부러 광고처럼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을 은근 살짝 내비침으로서 작품의 극대화를 지향하고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없어진 고추잠자리. '천지간에 말간 슬픔'은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연작시를 쓸 때에 같은 제목으로 번호를 붙인다. 필자는 이것이 약간 불만이다. 그 연작 시 중에 마음에 든 작품이 있을 때, 예를 들면 <고추잠자리 21>이 좋다고 해야 한다. 읽은 독자들은 다른 번호들의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하고 헷갈린다. 그리고 좋은 작품이라도 연번호가 있으면 그 우수성이 독자성(獨自性)을 잃고 희석될 경우도 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연작시를 읽을 때의 느낌을 이 기회에 솔직히 지적하고 싶다.
다음은 <풍장>이다.
풍장
어느 바람결에
누이 배가 불렀는지
자배봉 앞자락에
세를 든 봉분 하나
그 곁에 비석도 없이
풍장 치른 꽃바구니
몽골 대평원에서나 치르던 장례의식의 하나로만 인식해 왔던 '풍장'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도 한 많은 사연 속에서 일어나고 있단다. 몽골의 '풍장'과는 그 차원이 다르지만 우리들의 장례의식 습관상 새로운 각도로 '풍장'을 클로즈업하고 조명하고 있다. '애기무덤'의 슬픈 사연이다.
다음은 <쓸데없이>이다.
쓸데없이
쓸데없이
하, 쓸데없이
봄볕에나 겨워서
녹슨 양철문이
삐꺽이는 수산리
왕벚꽃
혼자 타는 걸
쓸데없이 바라보네
'녹슨 양철문이 삐꺽이는 수산리' 무료한 시간의 흐름을 녹슨 양철물 삐꺽(시간이 무료하면 그 소리나는 양철문 고쳐도 될터인데)으로 대입 시켜서, 그저 멍하니 쳐다보는 모습. '쓸데 있는' 시간만으로 인생을 채운다면 겹치는 스트레스로 그 인생은 백세시대라는 오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도중 하차해야 할 것이다. '쓸데없는' 시간이야말로 '쓸데 있는' 시간을 재충전 시키고 있다.
끝으로 <본전>이다.
본전
모처럼 세상에 와 혼자만 다 털렸다고?
복채 따라 펄럭이는
오일장 보살집처럼
인생은
벌어도 본전
밑져봐야 그도 본전
복권처럼 맞췄는지 모르지만 복채가 펄럭이는 오일장 보살집은 마치 인생의 도박판처럼 상징적이다. 그래서 도박에서 땄는냐, 졌는냐. 본전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으로 인생은 계속된다. 그런데 인생은 본전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태생 때부터의 금수저, 흙수저 논리가 대단하다. 그 사이에 은수저도 있다. 필자는 금수저, 흙수저, 은수저가 아니라 '손수저'라고 한다. 손수저로 태어나서 손수저로 끝나는 것. '그래서 인생은 벌어도 본전 밑져봐야 그도 본전'이 아닐까.
오승철 시인에게는 일반적으로 시어로서 아름답다는 형용사나 부사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투박스럽고 한줄의 행과 연들이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기도 해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러나 그 투박스러움과 럭비공처럼 튀는(갈팡질팡 튀는 것 같지만 잡아 당기는 인력(引力)이 작용하고 있다.) 작품에 치밀한 수학 공식처럼 짜여진 울림이 있다
그 속에는 정겹고 따뜻한 정이 넘치고 향토색 짙은 그리움이 진하게 베어 있다. 이 시조집 '길 하나 돌려세우고'에도 제주도 마을 이름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구태여 그 마을 이름이 아니어도 되는데도 주석도 달지 않고 쓰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을 제주 여기저기로 안내하고 있다.
오승철 시인은 1957년 서귀포 위미에서 태어나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겨울귤밭>으로 등단. 시조집 <오키나와 화살표> <터무니 있다> <누구라 종일 흘리나> <개닦이> 등이 있다. 한국시조작품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고산문학상. 한국예술상 등을 수상.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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