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글은 변기태선생님~의 산책이야기에 올리신글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접하기 쉽지 않은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이번 한국산서회 회보 19호에 실은 글입니다. 오늘 인쇄가 끝나고 저녁에 회보가 배포되는 데 다시 읽어보니 수정사항이 많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수정하여 우리 익스트림라이더 동문들에게 먼저 공개합니다. 앞으로 더 자료를 수집해서 보완하겠습니다.
특히 내가 선구적인 여성등반가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분 계시면 꿈을 깨시길 바랍니다.ㅎㅎㅎ 제가 한시대를 풍미했던 여성산악인의 계보를 만들어보면 김금원(1800년대) -> 진유명(1970년대) -> 진미화(1980년대) 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국산서회보 19호의 글
회보 18호에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있는 안대회 교수님이 쓰신 글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정란」 을 옮겨 게재한 이후 나는 전문산악인, 산악인이란 무엇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후 어떤 모임에서 ‘산악인 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광의의 산악인과 협의의 專門산악인, 정통파 산악인 등 개념을 두고 다소 우스깡스러운 얘기들이 나왔으나 결국 ‘산악인’이란 개념에는 나름대로 다양한 뜻이 있으며 ‘산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 불리워지는데 대한 극존칭이자 명예스러운 단어이므로 감히 자기 스스로 '산악인'이라 칭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단어이기때문에 스스로를 산악인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남이 즉, 제3자가 불러주는 3인칭이라는데 많은 공감을 하고 모임을 끝낸 적이 있었다. 히말라야와 해외 고산 거벽을 오르는 산악인, 무박산행에 몰두하고 목숨 거는 산악인, 백두대간 종주에 심취한 산악인등 모두 그쪽 세계에서는 서로를 산악인이라 불러주고 있다.
그러면 흔히 자타가 전문산악인들이라 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영국에서는 1857년 세계 최초로 산악회를 만들었고 일본은 영국산악회 회원이자 선교사인 웨스턴에 의해 1905년 일본산악회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탐험과 등반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등산의 역사와 새로운 등산의 역사를 정리하고 만들고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2008년도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얼마 전 벤프 마운틴페스티발 행사 중 하나인 산악도서 페스티발에서 입상한 책 중에 예일대학에서 출판 한 『Fallen Giants』라는 책이 있다. 8,000미터 히말라야봉 등반에 대해 기술한 방대한 분량의 책이었다. 동행한 일간지 기자는 이 책에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자기가 다니는 신문사가 후원했던 ‘77에베레스트 등반대 얘기가 없다는 사실에 적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77등반대가 세계 등반사 관점에서 획기적인 등반은 아니었지만 나름 국내외적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고 뛰어난 등반대였다는 것과 이 책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제외될 수 있다고 설명하여주니 위로가 되는 듯했다.
의미 있는 등반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많은 등반대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 등반을 하고 그 의미는 자의든 타의든 정리되고 있다.
그러면 1500년대 이후 행해지고 기록으로 남겨진 수많은 遊覽記들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할까. 지금 학계에서 불고 있는 遊山記 文學의 붐에 그냥 맡겨만 둘 일인가. 玉篇에서는 遊山을 「산에 노닒」으로, 遊覽은 「돌아다니며 구경함」으로 풀이 하고 있다.
주세붕의 청량산 유람기의 영향을 받은 이퇴계는 청량산유람기를 쓰고 “遊覽하는 자는 遊錄을 남겨야 한다”고 함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선비. 문인들은 유람을 하고 유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영국산악회나 일본산악회, 알프스의 초기개척자들은 모두 귀족과 엘리트 그룹이었다. 역시 우리 선현들도 그와 같은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찬바람 맞으며 밖에서 식사를 할 일이 없는 분 들이였던 것이고 그 정신은 유럽의 초기 개척자들과 같거나 더한 정신세계 속에서 유람을 하였던 것이다. 그 열악한 교통과 사회 환경 속에서 금강산을 가는데도 최소 40여일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면 지금 히말라야 원정을 가는 것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숍 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금강산을 유람한 사람은 여행자로서 확고부동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이미 우리나라도 산을 하늘과 인간이 교통하는 신성한 장소이자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상고시대를 제외 하고 신라시대 화랑정신 이래로 산은 유람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심신을 단련했던 일종의 탐구적이고 모험적인 등반이었던 것이다. 조선 선조 때 홍인우(洪仁祐)는 관동록에서 “낮은 데서부터 높은 이상으로 상승하고 지류를 소급하여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 배우는 사람의 일임에야, 그 일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산행의 가치는 새삼 다시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遊覽이 남성 특히 양반들의 놀이였지만 감히 조선 최초의 여성산악인이라 할 수 있는 김금원을 소개한다.
기록상 여성의 유람에 대한 흔적은 16C 황진이가 이정승의 아들과 함께 금강산을 간 이래 금강산을 종주했고 설악산의 수렴동 계곡까지 다녀 온 여성은 김금원 뿐이다.
김금원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상황을 헤치고 남장을 하고 5년간 설악과 금강산 등 전국을 유람하고 <호동서락기>를 남긴 최초의 여성 산악인이며 終遊를 선언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조선 최초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삼호정시사를 꾸려온 문인이다.
1. 김금원의 삶
김금원은 1817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보통 딸들은 그 시대 일반 여성상인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지만, 금원은 어머니와 동일시를 확연히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호를 금원(錦園)으로 정하고, 14살(1830년)에 이미 남장을 하고 이 땅을 두루 여행했다.
소위 ‘세상을 보고 싶다’ 지금 ‘세상이 궁금한 여자’라고 외치는 여자 오지여행가 노소남 씨를 떠올리게 한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설악산을 모두 둘러보고 서울로 가서 도시의 번화함을 구경한다.
시유경성 서울에 와서
詩遊京城
春雨春風未暫開 춘우춘풍미잠개
봄바람은 봄비 섞어 불어오는데
居然春事水聲間 거연춘사수성간
어느덧 좋은 봄철 오고 가누나
擧目何論非我土 거목하논비아토
내 고향이 아니라고 탓할 것 없고
萍遊到處是鄕關 평유도처시향관
부평초처럼 어디나 살면 고향
2. 「삼호정사시단」의 결성과 활동
김금원의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시단을 만들어 활약한 것이다. 살구꽃이 피면 새해의 첫 모임을 갖는다. 복숭아꽃이 피면 꽃앞에 앉아 봄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인다. 한 여름 참외가 익으면 여름을 즐기기 위해 한 차례의 모임이 이루어진다. 그것도 잠시, 서늘해지기 시작하여 蓮池(영지)에 연꽃을 완상하기 위해 또 모인다. 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게 되면 서로 만나 얼굴을 보고자 모이고, 겨울에 들어 큰 눈이 내리면 다시 만난다. 한해가 기울 무렵, 분에 심어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릴 때 쯤, 또 모인다.
비록 절친했던 친구 박죽서가 죽고 금원의 남편 김덕희가 다른 곳으로 간 후 흐지부지 되었지만 시단의 회원 다섯 명으로 구성된 조선최초의 여자들만의 詩모임이 탄생한 것이다. 다른 남자들의 시회처럼 사대부 문인들의 발문을 싣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만의 글을 남기고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했던 자주적인 여성들의 모임이었다.
부윤(府尹)이 된 김덕희를 따라 의주로 간 금원은 김덕희가 벼슬을 물러 날 때 함께 한양으로 돌아와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렀다. 이때 나이 서른한 살(1847년)이었다. 삼호정(지금 원효로 성당 자리)은 한강을 바라보는 용산언덕에 자리한 김덕희 소유의 정자다.
그 당시 한강 부근은 풍광이 좋아 사대부들의 정자나 별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도 강가의 삼호정(三湖亭)은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날씨가 좋을 때면 금원은 동생인 경춘(瓊春), 고향친구인 죽서(竹西), 기녀로 있을 때 종종 어울리던 운초(雲楚), 이웃에 사는 경산(璟山)등 마음에 맞는 네 친구를 부르곤 했다.
당시로는 남성들의 시회는 많았지만 이렇게 여성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뒤에 사람들은 이 모임이 금원(錦園)이 살던 삼호정(三湖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 부르기로 했다.
<세기를 넘나든 조선의 사랑. 현문미디어. 2007> 저자 권현정은 이들 다섯 회원을 “다섯 여자들의 비밀결사“ 라 칭하고 이들의 우정을 소개하며 이들 시회에 큰 의미를 두기도 했다.
3. 「삼호정시사」의 회원
삼호정 동인들은 모두 소실의 신분인데다 詩才가 뛰어나고 풍류를 즐길줄 안다는 동병상련의 심정적 동질감과 동료애로 인하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보다 깊이 있는 교우가 가능하였다.
• 김금원(金錦園) : 김덕희(金德喜)의 소실
14살 때 부모를 설득해 금강산과 관동팔경, 설악산을 넘어 한양 땅까지 두루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이 여행은 세상을 가슴에 품는 과정이었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호동서락기>에는 여행 중 그녀가 쓴 시와 문 58쪽 분량과 그녀의 친구들이 쓴 시문 8쪽이 함께 실려 있다. 그녀가 세상여행에서 돌아 온 것은 5년 뒤인 열아홉 살 때였고 김덕희의 소실이 된 것은 1845년 스물아홉 때였다.
세상의 모든 물줄기 동쪽으로 흘러드니
아득히 깊고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구나
이제야 알겠노라 하늘과 땅이 아무리 커도
내 가슴속에는 도저히 담을수 없다는 것을(호동서락기 중 김금원의 시)
• 김운초(金雲楚) : 연천 김이양(金履陽, 1755 - 1845)의 소실, 기녀 때 만남
평남 성천출신의 기생으로 평양의 기방으로 뽑혀와 기명을 날렸고 기녀생활을 청산 한 후 유일한 사랑이었던 김이양에게 의탁,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300여 편의 여장부다운 시를 남겼다.
꿈에 만나 그대
이십년 세월 그리던 님 이제야 꿈에서 만나
서로를 바라보니 백발이 새로 났네
이제라도 헤어진다 해도 서러워하지 말고
술 한잔 들어 이야기를 나누며 봄을 보내소서
무심하게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봄바람 가을 달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
이 밤이 다하도록 마음을 풀고 싶지만
저 등불 깜박깜박 거리는 모습이 얄궂기만 하구나
• 김경산(金瓊山) : 花史 이정신(李鼎臣)의 소실, 이웃
문화 사람으로 아는 것이 많고 견문이 넓었으며 특히 시를 읊는데 뛰어 나다.
내가 진작부터 ‘금원’이라는 이름을 듣고 선망하고 사모하였는데, 마침 강가 이웃에 살게 되었다. 뜻을 함께 한 이들이 모이니 회원이 다섯 명이 되었다. 모두들 생강이 드넓고 풍류가 넘쳐흘렀다. 아름다운 정자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조리니, 그 즐거움이 도도하고 끝이 없었다.<호동서락기) 중 김경산의 글
• 박죽서(朴竹西) : 호를 반아당(半啞堂, 반벙어리의 뜻), 서기보(徐箕輔,1785 -11870)의 소실 : 고향 친구
김금원과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고 한유와 소동파를 사모하였으며 10세 때 창밖에 우는 새를 보고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으나 일생동안 병약했다. 시 160여 수를 남겼으며 박죽서가 죽은 뒤 남편 서기보는 그녀의 유고를 모아 <죽서시집>을 펴냈다. 조선 철종 때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앓고 난 뒤
상자 안에 있는 시들은 누구와 화답할까
거울 속에 마른 내 모습, 오히려 가엽기만 하네
스물셋 내 인생 무엇을 해왔던가
절반은 바느질, 또 절반은 시를 쓰며 보냈으니
• 김경춘(金瓊春) : 주천 홍태수(洪太守)의 소실, 금원의 동생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경서와 사서에 능통하였으며 시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4. 김금원의 금강산 기행문
“중향의 구역으로 방향 바꿔 들어가니 경지가 더욱 새롭다”
『표훈사로 향하니, 오른쪽에는 중향성이 끼고 있고, 왼쪽에는 지장봉이 솟구쳐 있어, 그윽하고 아득하며 깊고 으슥하다. 오른쪽 길은 아주 험하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절에 이르렀다. 문루는 능파루라 한다. 법당과 여러 암자를 구경하고 백운대에 올랐다. 팔뚝만한 굵기의 쇠줄을 붙잡고 오르는데, 마치 하늘에 오르기라도 하듯 벌벌 떨렸다. 1만 인(仞)의 깊은 골짝을 내려다보니, 사찰이 운무 사이에 은은히 비쳐서 마치 그림 속 경치 같다. 보덕굴로 가서 구경하였는데, 굴은 무갈봉 아래 있고, 작은 암자가 그 위에 있다. 한쪽은 산 모서리의 뾰족한 바위에 의지 하였고, 한쪽은 봉우리 아래에 수백 인(㲽) 높이로 바위를 포개었다. 구리 기둥을 세워 허공에 얽고 걸쳐서 서너 칸 암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리 기둥에 쇠줄을 칭칭 동여매고 그 한끝을 사람들로 하여금 붙잡고 오르게 해두었는데, 흔들흔들해서 아주 위험하다. 담이 떨리고 허벅지가 후들후들해서 감히 아래를 굽어 내려다 볼 수가 없다. 옥 부처 하나를 안치하였고, 그 앞에는 대야만한 크기의 금향로를 두었는데, 무거워서 들수가 없다. 전하는 말에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시주한 부처라고 한다. 암자는 크지 않았으나 생각건데 그 재물을 거만금 허비하였을 듯하다. 승려의 말에, 옛날에 한 비구니가 이 굴속에서 수도하다가 그대로 좌하(坐化)하였으므로 무리들이 서로 상의하여 암자를 쌓아 예불을 하게 되었다. 고 하며 그래서 암자와굴을 모두 보덕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곁에는 폭포가 하나 있는데, 넓게 깔리듯 흘러 평평하고 너른하며, 바위 면에 쏟아져 내린다. 절벽이 두층을 이루어서, 담(潭)이 하나는 둥글고 하나는 모나다. 격하게 여울을 이루고 포말을 날려, 차가워서 가까이 다가 갈수가 없다. 곁에 백천동이 있고, 동구에는 와폭(臥瀑)이 있어, 바위 구멍사이로 쏟아져 뚫고 나와, 물이 깊은 담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명연(鳴淵)이다.
그러나 내(川) 는 볼만하지 않다. 백천이란 이름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서너 리를 가서, 벽하담과 비파담이 지척 사이에 이어져 있다. 옥이 바서지고 비단 폭이 옆으로 펼쳐진 듯하여, 갈수록 기이하고 장대하다. 냇가에 엎어진 바위는 위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샘이 저절로 솟아 나온다. 길가에 궁륭(穹窿)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마치 빈집 같아, 비 올 때 들어가 피신 할 수가 있으니, 볼 만한 곳이 아님이 없다. 조금 위로 올라가자 한 작은 못에 마주쳤다. 이름을 백룡담이라 하여, 그 백색의 뜻을 취하였으나, 팔담(八潭)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수십 걸음을 가니, 바위 위에 비폭(飛瀑)이 쏘아서 내리는데, 물빛이 청흑색이다. 이름을 흑룡담이라 한다. 가고 가서 앞으로 나아가자, 반석이 마치 절구처럼 파인 것이 있어서, 물이 그 안에 저장되어 있다. 이름을 세수분이라 한다. 수십 걸음을 지나자 폭포가 있어, 물빛이 자못 푸르다. 이름을 청룡담이라 한다. 이것이 팔담의 원두(源頭)이다. 종일 폭포 속을 가니,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골짝이 갈라지는 듯하다.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들, 날짐승들이 기기괴괴하여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다. 오선봉. 소향로봉의 두 산 사이에서부터 첩첩 시내가 돌아 나오고 굽어 나와 합해서 하나의 큰 물 흐름을 이룬다. 곧 이름을 만폭동이라고 한다. 담가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크게 적혀 있다. 전하는 말에 선인(仙人) 양봉래(楊蓬萊, 양사언)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은 갈고리 같고 쇠줄 같으며 용과 뱀이 날고 튀어 오르는 듯 한 글씨체다. 그 위에는 작은 병풍석이 있고, 또 김곡운(金谷雲)이 팔분(八分)의 글씨체로 쓴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선봉에서 청학대가 끼고 있으면서 2개의 궁륭석이 서로 덮어 문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금강문이다. 청학봉은 믓 돌들을 겹겹이 포개어 마치 항아리 같기도 하고 대고리 같기도 하다. 뾰족한 바위위에 곧 네모난 바위를 덮어 두어서, 마치 돌로 만든 불감(佛龕)같은 것도 있고, 마치 모자나 목두를 쓴 것 같은 것도 있다. 정말로 선학(仙鶴)이 서식할 만한 곳이다. 전하는 말에 옛날에는 청학이 둥지를 깃들여서 이 봉우리에서 부하하여 태어났으나, 양봉래의 원화(元化)라는 큰 글자에 기운을 빼앗겨서 날아가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그 곁에 이름을 새겼다. 시는 이러하다.
轉入香區境益新 중향의 구역으로 방향 돌아드니 경지가 더욱 새로운데
落花芳草悵前塵 낙화와 방초는 진세의 지난 모습을 연상시켜 슬프구나
七分樹色春如畵 칠분의 나무 빛은 그림 같은 봄 풍경이고
萬斛泉聲洞不貧 1만 휘 옥이 쏟아지는 샘 소리에 동구는 가난하지 않아라
得月纔經三五夜 달이 떠서 삼오야가 갓 지난 때이니
望鄕難化億千身 망향의 마음 일어도 몸뚱이를 천, 억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워라
深山落日翩翩鶴 깊은 산 해가 질 때 훌훌 학이 나니
俱是前宵夢襄人 이 곧 지난밤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이려니
*칠분: 막 무르익음, 삼오야: 보름달
방향을 바꾸어 수미탑으로 갔다. 탑은 수미봉 아래에 있어, 완연히 백색의 능단과 흑색의 능단이 골고루 섞여서 허공 속에 퇴적하여 높이 꽂혀 있는 듯하다. 앞에는 암석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폭포 물이 그 위를 흐르는데, 빙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대부 여성 김금원金錦園,1817~1851?의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가운데 금강산 유람기의 일부이다.
김금원은 경인년 곧 1830년 순조30 춘삼월에 제천 의림지를 방문하고, 단양으로 가서
사인암을 보았으며, 영춘으로 향하여 금화굴(金華窟)과 남화굴(南華窟)을 구경하였다. 다시 청풍으로 가서 옥순봉(玉筍峯)을 구경하였고, 이렇게 사군(四郡)의 명승을 다 본 후에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금강산에서는 단발령. 장안사. 표훈사. 수미탑. 정양사. 마하연암. 안문령. 청련암. 원통곡. 사자봉. 수렴동의 팔담八潭. 유점사를 거치거나 돌아보고 구령狗嶺을 넘어 금강산을 벗어났다.
김금원은 금강산에 대한 총평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이 산의 명호名號는 아주 많다. 금강. 기달(怾怛). 중향성(衆香城). 열반(涅槃). 개골(皆骨). 풍악(楓岳). 봉래(蓬萊)라고 하는데, 단칭하면 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내산과 외산은 어느 봉우리도 기이한 벽이 아닌 것이 없고 어느 내도 이름난 폭포가 아닌 것이 없다. 내산은 아스라하게 높아 뛰어나면서 백색이 많고 청색이 적다. 외산은 온자穩藉로 뛰어나면서 청색 이 많고 백색이 적다. 봉우리로 말하면 비로(毘盧). 중향(衆香). 대향로(大香爐). 소향로(小香爐).청학(靑鶴). 관음(觀音). 석가(釋迦). 오선(五仙). 망고(望孤). 혈망(穴望)이 가장 기이하다.
담(潭)은 만폭(萬瀑). 흑룡(黑龍). 벽하(碧霞). 분설(噴雪). 진주(眞珠). 구담(龜潭)이 뛰어나다. 암벽의 웅장함은 명경대(明鏡臺). 묘길상(妙吉祥)만한 것이 없다. 조망眺望의 광대함은 헐성루(歇惺樓). 백운대(白雲臺)만한 것이 없다. 동구(洞口)의 경관은 모두 장안사(長安寺)를 추대하되, 표훈(表訓), 보덕(普德), 마하(摩訶)는 모두 내산의 명찰이다. 칠보(七寶). 불정(佛頂)의 대(臺). 석문(石門)의 동(洞). 채하(彩霞). 집선(集仙)의 봉(峯)은 산의 기이한 것들이다. 선담(船潭)의 정류(渟流). 비봉(飛鳳)의 요대(裊帶). 옥류(玉流)의 갱장(鏗鏘)거리는 소리는 물의 아름다운 것들이다. 구룡연(九龍淵)의 장쾌한 격랑과 험괴한 형상은 일만이천봉 가운데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유점사(楡岾寺)의 유명한 기틀과 기이한 유적은 팔만 구암(八萬九庵) 안에서 으뜸이다. 이것이 외산에서 저명하여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대개 금강의 기이함은 천석(泉石)에 있지 않고, 오로지 산이 백색이라는 점이 가장 기이하므로, 외산(外山)은 명호의 안에 들어 있지 않다. 내봉(內峯)색이 분칠한 것과 같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수 없을 정도이고, 또 사물의 형상으로서 형형색색 하여 없는 것이 없되, 노석老釋과 종고(鐘鼓)의 형상을 한 것이 열 가운데 아홉이다. 내산이든 외산이든 관계없이 볼 만한 곳이라면 뚫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온갖 나무들이 뒤덮어 조밀하고 어지럽게 겹겹이 포개진 바위 속에 시냇물이 시끄럽게 흐르니, 마땅히 호랑이나 범 따위가 있을 법하거늘, 옛날부터 그런 환난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역시 지령(地靈)이 명산을 가호呵護하여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절의 고기(古記)는 중국의 신이한 승려 담무갈(曇無竭)이 나와서 중향성(衆香城)에 앉아, 일만이천 제자를 인솔하고 설법하여 성불하였고, 뭇 제자들은 일만이천 봉으로 변환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큰 바위 하나를 가리켜 담무갈의 화신이라고 한다.
어찌 허망하고 허탄한 말이 아니랴. 내산을 두루 돌아본 것이 아마 6,70리인 듯하고, 외산을 두루 돌아본 것이 아마 100여 리인 듯하다. 외산은 전적으로 고성(高城)을 근거로 하여 북쪽 가지가 뻗어서 통천(通川)으로 들어간다.
김금원은 금강산 유람을 마친 후 통천으로 가서 금란굴과 총석정을 구경하고, 고성으로 가서 삼일포. 사선정. 명사(鳴沙)를 돌아보고, 간성으로 가서 청간정에 올랐다. 양양의 낙산사와 의경대를 보고, 강릉의 경포대. 울진의 망양대. 평해의 월송정. 삼척의 죽서루에 올랐다.
관동팔경을 다 본 뒤에도 미련이 남아서 인제로 가서 설악산을 찾았다. 그리고 백담사(白潭
寺)와 수렴동(水簾洞)을 구경한 후 비로소 경성으로 향하였다.
김금원은 산수 유람을 떠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관동 봉래 사람이다. 스스로 호를 금원(錦園)이라 하였다. 아이 적부터 병치레를 잘하여 부모님이 어여삐 여겨 바느질 등 여성이 해야 할 일에 종사하게 하지 않고 문자를 가르쳐 나날이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한 해도 되지 않아서, 대략 경전과 역사서를 통해, 고금의 문장을 본받고자 생각하여, 때때로 흥을 타서 꽃과 달을 소재로 시를 읊고 지었다. 가만히 나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금수가 아니라 인간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머리를 빡빡 깎아 불승이 되는 그런 이방의 지역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 동방의 문명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되었으니 불행하다. 부귀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불행이다. 하지만 하늘이 이미 내게 인지(仁知)의 성(性)과 이목(耳目)의 육신을 부여하였거늘, 어찌 산수 자연을 즐겨서 보고 들음을 넓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이미 내게 총명한 재주를 부여하였거늘, 문명한 나라에서 무언가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미 여자가 되었으므로 장차 규방에 깊이 처박혀 문을 굳게 닫아걸고 경법(經法)을 근실하게 지킴이 옳겠는가? 이미 한미한 가문에 처하였으므로 자기 처지를 따라서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겨, 스르르 없어져서 이름이 들리지 않게 됨이 옳겠는가? 세상에 첨윤(詹尹)같이 뛰어나게 거북점을 치는 사람이 없으니 굴원(屈原)이 점친 일을 본받기 어렵다. 더구나 그 말에 “계책에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더라도 지혜에는 장점으로 삼을 바가 있으므로 자기 의지대로 결행하게 한다“고 하였기에,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아직 비녀 꽂은 성년의 나이에 강산의 경승을 두루 보아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舞雩)에서 바람 쐬고 음영하면서 돌아온 일을 본받는다면, 성인도 역시 나의 결정에 편들어 주실 것이다. 마음에 이미 계책을 정하고는 거듭해서 아버님께 간청을 드리자, 한참 뒤에야 할 수 없이 허락하여 주셨다. 이에 흉금이 드넓어져서, 마치 맹금이 새장에서 벗어나 곧바로 구층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세를 지니고, 훌륭한 천리마가 굴레를 벗어나 천 리의 땅을 곧바로 내달리는 듯이 하였다. 그날로 남자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행장을 꾸려 동쪽으로 향하여, 그 처음 목적지는 사군(四郡)으로 향하였다. 때는 경인(庚寅) 봄 3월로, 나는 바야흐로 이칠(二七)의 나이이므로 외간에 함부로 나다닐 나이가 아니다. 그래서 동자처럼 편발(編髮)을 하고 교자(轎子)안에 앉고, 청사(靑絲)의 장막을 빙 두르고는 앞면만 활짝 틔우고 제천(堤川) 의림지를 찾았다』
여성으로서 태어난 한계를 절감하되, 규방에 갇혀 있기보다 당당하게 산수를 유람하여 인(仁)과 지(知)의 본성을 기르겠다고 선전하였다. 이칠, 곧 14세의 나이에 이와 같이 선언한 것이 놀랍기만 하다. “동자처럼 편발(編髮)을 하고 교자(轎子) 안에 앉고, 청사(靑絲)의 장막을 빙 두르고는 앞면만 활짝 틔우고” 여행길에 오를 때의 호쾌한 태도를 상상할 수가 있다.
편집자 주)
摩訶(마하) : 원래 한자의 음은 “마가”이지만, 인도 산스크리트어에서 “위대한”의 뜻을 가지 고 있는 'maha'의 음차로 사용하기 때문에 “마하”로 읽는다
참고자료 : 1. 조선의 사랑, 권현정, 현문 미디어, 2007
2.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되어 날아가리, 정창권, 푸른숲, 2006
3. 산문기행, 심경호, 이가서, 2007
4. 국어문학회 제39집, 조선조 여성되기의 새로운 모색- 김금원의(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중심으로), 손앵화, 2004, pp. 164~186
5. 조선조여류시문전집(朝鮮朝女流詩文全集), 허미자, 태학사, 1989
6. 강원일보 강원문화 회고 기사(2008.7.15)
7. 강원일보 제3회 강원여성문인대회 기사(2008.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