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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❺ 대학♡청년부 스크랩 펌) 석유왕 록펠러
승우아빠(김용수) 추천 0 조회 132 11.05.17 14:1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록펠러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접한 록펠러센터 일본 매각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80년대 미국경제의 암흑기, 일본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미국에게는 이를 견제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버거웠던 것인지.

 

한 나라의 경제와 문화 두 가지는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할수 있는 매우 비중있는 척도가 된다.

그런데 미국 문화의 대표라 할수 있는 헐리웃 영화, 그 중심에 서 있는 콜롬비아 영화사가 일본에 넘어갔다.

 

미국인들은 한국인은 이해하기 힘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화 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 예를들어, 스타워즈의 에피소드 시리즈 개봉시 첫 상영을 보기위해 이틀전에 극장앞에 가서 텐트를 치고 기다린다던가, 애플의 아이폰이 처음 출시될 때도 몇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최초의 구매자가 된 사람이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고 신문에 실리는 일은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 미국인들이 매우 중요시여기는 미국의 상징 두가지가 성조기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던가. 콜롬비아 영화사 자체도 세계를 평정한 미국의 대표 문화산업인 헐리웃 영화의 핵심 아이콘이며, 그 콜롬비아 영화사의 마크가 바로 성조기를 두른 여신상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때 이보다 더 복합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수 있는 상징물이 또 있을까 싶다.

 

바로 그 성조기를 두른 자유의 여신상의 모습이 기모노로 바뀌게 된 순간, 미국인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을것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입아프다.

 

 

 

또 하나는 록펠러 센터다.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자부심이 드높은 미국의 경제의 핵심 도시가 바로 뉴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 뉴욕의 중심가가 맨해튼이며 맨해튼의 심장부는 바로 월 스트리트이고, 월 스트리트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수 있는 것이 바로 록펠러센터가 아니던가 말이다.

쉽게 말해 세계 경제대국 미국의 상징이 바로 록펠러센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록펠러센터가 85년 2000억엔에 일본 미쓰비시 부동산에 매각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물론 후에 다시 되찾아오긴 했다.)

 

물론 여기서 포스팅하고자 하는 것은, 콜롬비아 영화사나 록펠러센터가 아니다.

그 위대한 상징물이 된 록펠러센터를 세운 인물 '존 데이비스 록펠러' 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되었고, 그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다. 과연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라는 평가를 받는 록펠러는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지 않을수 없었다고나 할까..

 

183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가정환경속에서 자라났다.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설교에 철강왕 카네기와 함께 대표적으로 차용하는 인물이다.

우리나이로는 중학교 2학년인 16살에 이미 첫 직장에 출근하였고(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후 첫 취직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나이와는 상당한 갭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나이인 20살에는 첫 부하직원을 두었으며, 신참 사회인으로 바짝 긴장하며 살아갈 30대의 나이에 이미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50대에는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기에 이른다.

 

그의 재물관과 관련해 재미있는 기록들이 몇가지 있다.

 

우선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써 철저히 십일조를 떼었다. 어릴때 어머니로부터 정확한 십일조의 교육을 받은 그는, 사업 수익의 십일조 계산에만 무려 40명의 인원을 두었다고 한다.

 

사실 많은 크리스천 직장인들이 십일조 부분을 정확하게 실천하기 어렵다고 한다. 특히 많이 벌면 벌수록 더욱 그러하다.

월급 100만원에서 십일조 10만원 내는 것은 할수 있어도, 월급이 1000만원이면 100만원이 된다. 아까워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 부호 록펠러는 자기 일생의 모든 수입에서 10분의 1을 떼어낸 셈이니 감히 예상컨데,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중 가장 많은 십일조를 낸 사람일 것이다.

 

두번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하면 먼저 떠오르는 대표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

요즘 문근영의 기부때문에 화제다. 그의 기부를 비판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지만, 이땅의 많은 재벌들은 문근영에게 기부 1위의 자리를 빼앗긴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록펠러는 십일조뿐 아니라 기부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계 최고의 갑부였던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거나 사회에 환원했다. 이는 기부문화가 잘 발달된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이라며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변명하는 이유가 될수 있을까?

 

어린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사람사귀기를 좋아하고 밖으로 나도는 전형적인 한량 스타일? 이다. 성격은 좋으나 책임감이 없는 가장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의한 반발심도 있었겠지만, 검소하고 철저한 성격으로 록펠러를 교육시켰다. 세상에 무엇하나 공짜로 되는 법이 없음을 이미 어렸을때 부터 깨닫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숫자적인 사람이었는데, 누구를 만나면 그의 가치를 숫자로 계산하곤 했다고 한다. "저 사람은 7만 5000 달러의 가치가 있어보이는군." 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리 기분좋지는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사업가다운 기질이 외적으로 발산되었다고 볼수 있겠다.
참고로, 어린 시절 록펠러는 "나는 10만달러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고 말했다고 한다.

 

때문에 록펠러는 CEO가 되지 않았으면 수학자나, 회계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숫자에 관한한 병적일 정도로 철저하며, 학생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보다는 혼자 책상에 앉아 숫자계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하니 이 역시 사업가다운 기질이라 할수 있다.

경리 시절에도, 회사의 장부를 들여다 보며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장부상의 오류를 쉽게 찾아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그의 한 지인은 "숫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고 고백했을 정도다.

 

그러한 그가 심취한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석유사업 이었다.
당구에 빠지면 교실 칠판이 당구다이로 보인다. 천정을 봐도 당구 각도가 생각이 나고, 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큐질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농구에 빠지면 길거리의 모든 표지판, 이정표, 간판들 마다 가상의 농구골대가 달린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슛 모션을 취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록펠러는 석유에 관해서 그러했다.
늘 석유에 심취해서 살았으며, 때로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석유에 젖은 옷을 입고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진동하는 석유냄새로 인해 다른 손님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긴 뭘 해도 그렇게 미쳐야 성공할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은 매우 고귀한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매정하고 냉혹한 모습으로 악행을 저지른 사건들은 지워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 몇가지를 쓰자면,
철도회사와 리베이트 계약으 맺어, 자사의 석유를 수송하게 해주는 대신, 다른 회사의 석유를 수송할 때는 높은 요금을 물리도록 했다.
또 경쟁사 스물 여섯개 가운데 스물 두 개를 헐값에 인수해 정유 산업을 평정했는데, 그 과정에는 협박과 직원 매수, 압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유출, 주가 조작 등 그야말로 악덕 기업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짓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씻을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이 바로 1913년 러드로의 학살 사건이다.
록펠러가 인수한 콜로라도 석탄, 철강에서 노동쟁의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당 1달러 68센트의 낮은 임금을 받았고 그나마 현금이 아닌 회사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형태로 받았다.
그는 매년 2만달러를 쓰며 탐정, 프락치 등을 고용, 노조설립을 막았다고 한다.

 

노동쟁의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40명이 숨지고 지하실에서 여자 2명, 어린아이 11명의 시체가 발견되자 더욱 커져버린 사태진압을 위해 연방군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때의 록펠러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치 않는 냉혹한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

 

작금의 현대차 노조 사태들을 보면 현대가 에도 록펠러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는 하나, 과거 그의 노조탄압 방식은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기부를 하며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인물로 변할수 있었을까?

그가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이는 방식으로 그의 마음에 평화가 있을리 없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수 있다.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10년 후인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또 10년 후인 53세에는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역시 돈이 중요하긴 하나, 돈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이보다 쉽게 설명할수 있는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는 석유사업을 불법으로 독과점하여 무수한 중소기업을 희생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다가 결국 미국정부에서 행해진 국가 재판에서 불법으로 판정받아 그의 모든 사업은 파산하여 사라지게 된다. 그가 저지른 불법과 악행에 대한 댓가인 것이다.

결국 사업도 접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그는 55세에 불치병을 얻게 된다.

어릴때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교육을 받아 철저히 십일조를 하고 주일성수를 한 그였으나, 그것 역시 십일조를 통해 재물의 축복을 받으려는 욕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즉, 진정한 크리스천의 신앙은 갖지 않았던것 같다.

하지만 인생을 55년이나 산 후에 불치병을 얻어 1년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그는 진짜 크리스천으로 변하게 된다.

 

그가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주는 자가 받는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무슨생각을 했는지 알수 없으나, 그 순간 그의 인생의 전환점 맞이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해 볼수 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다.

 

얼마 후 그가 은밀히 도운 소녀는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어 건강해 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후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는 진실한 기도를 드렸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 엎드렸으며, 신기하게도 불치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다시 건강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장수하며 남을 돕고 기부하고,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짓는 일에 힘썼다.
록펠러는 그의 생에,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재단을 비롯해서 시카고대학 등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 단과대학, 그리고 4,928개의 교회를 지어 사회에 바쳤다.

 

그가 록펠러재단을 통해 죽을때까지 사회에 기부한 금액은 5억달러에 달하며 그의 아들과 함께한 기부액까지 합하면 총 25억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또한 페니실린은 그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의약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페니실린의 혜택을 보았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돈을 벌때도 의롭게 벌었다면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죽음을 선고당한 뒤, 다시 얻은 인생을 남을 위해 살았던 록펠러는, 매번 기부를 할 때마다, 매번 학교를 지을 때마다, 그리고 매번 교회를 세울 때 마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죄를 씻는 마음으로 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빌게이츠보다 당시 시세로 세배 이상의 부를 축적했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교훈을 남긴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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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5.17 14:19

    첫댓글 주일 설교 말씀에 나온 석유왕 록 펠러 이야기입니다.

  • 11.05.17 19:23

    와우 진짜 예수쟁이빵긋 본받고 싶어요...므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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