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과 영주
봄눈 속으로 떠난 답사
며칠 전 향기산우회를 따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서 시산제를 지내며 큰절을 올린 후, 단군 할아버님과 조상님께 한 마디 감사의 말씀을 올렸다. “이웃 나라에서는 국토가 통째로 흔들리고 쓰나미가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휩쓸어 가고 야단인데, 저희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편안한 터전을 마련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문학기행을 공지하는 글 앞머리에서는, “경북 영주에 온 봄을 꼭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해 옵시다.” 했더니 호위무사가 되겠다는 분도 계셨고 모두들 공감해 주시니 고마울 뿐이다. “비님이 오신다, 가신다.”라고 삼가 표현하며 자연에 대한 외경감을 표해야 할 판에 생포 압송이라니, 감히 무엄한 일이긴 하나 너무 오래도록 기다린 판에 투정 한번 부려 보았더니 어느 틈에 봄이 성큼 오고 말았다.
사전답사를 떠나기 하루 전날 밤 사이 중부지방에는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이천 여주를 지나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동안 차창 밖을 둘러보니 문자 그대로 눈경치의 연속이다. 간밤에는 바람도 없었는지 특히나 소나무 가지 위에 덮힌 눈꽃들은 떨어지지도 않고...... 그냥 꽃이 아니라 함박 눈꽃들이 온 천지에 가득 피어 있고, 일백 킬로의 쾌속으로 그 속을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사실은 눈 덮인 벌판, 눈꽃에 휘늘어진 소나무 밑을 천천히 소요하는 것이 그 중 제일경일 테지만, ‘달리는 신선도’가 그래도 초현대판 제2의 멋진 신선도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모두들 바쁜 중에 시간을 내어 나온 터라 시무룩히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는 눈경치와 함께 싹 가셔졌다.)
봄에 내리는 눈은 서설(瑞雪)이라 했고 그 해엔 풍년이 든다 하지 않았던가? 풍작에의 기대는 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평화롭고 풍요로운 해에 대한 희망은 어느 때보다 간절한가 보다. 왜냐하면 지난해에는 천안함 피침, 연평도 피폭, 끔찍했던 구제역 등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재난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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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원경
본 기행에 오를 때쯤이면 눈들은 다 녹고 없으리라. 그 대신 온 천지가 파릇파릇한 연두빛 새순으로 가득하고, 봄의 뜨거운 숨소리가 우선은 진달래 꽃잎을 타고 흘러 넘칠 것이다. 목련꽃은 우리나라 어느 위도쯤에서 그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까?
서울 어느 양지바른 골목길에도 개나리가 벙글고, 목련이 벌써 보얗게 젖니를 드러내고 있던데......바로 이 계절의 정감을 가장 잘 담아낸 박목월의 시가 있다. 김순애가 맑으면서도 애조 띤 곡을 붙이고 강화자가 불러서, 지난 날 마음 여리고 순결한 청춘남녀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다.
사월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풋풋한 들길을 걸으며 벗과 함께 흥얼거릴 수 있다면 아름다운 추억이 다시 살아나리라.. 삼봉의 생가-삼판사 고택에서
소백산맥은 우리나라의 동부를 횡단하는 태백산맥과 함께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한 줄기다. 태백산맥에서 남쪽으로 뻗어 소백산(1440m), 월악산 , 속리산 대덕산, 덕유산, 가야산을 지나 최고봉인 지리산 천왕봉(1925m)을 우뚝 세우고 바다쪽으로 내달려 여수에 이른다. 이 길이가 태백산에서 여수까지 350km나 된다. 영주는 소백산의 아랫자락에 1000미터 안팎의 높은 산들을 병풍 삼아 둘러치고 있다. 인삼의 고장 풍기읍이 서쪽으로 자리잡고, 유서 깊은 선비문화의 요람지 소수서원과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 무량수전의 부석사를 품에 안고 있는 먼 산들이 아직 잔설을 쓰고 있는 모습은 흡사 성현들의 아득히 높은 도(道)의 경지를 슬쩍 감추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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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판서 고택
먼저 들른 곳은 이번 문학기행의 첫 번째 주제인 삼봉 정도전의 생가인 삼판사 고택. 야트막한 동산 위에 자리잡은 한옥으로 향하는 길에 건너게 되는, 폭이 50미터가 훨씬 넘어 보이는 서천 냇물을 건너는 맛이 일품이다. 소백산맥 계곡 사이사이를 굽이굽이 흘러서, 속이 탁 트일 정도의 너른 물결 위를 가로 질러 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한 번 쯤 찬 물을 움켜 시름 찌꺼기 묻은 마음을 씻고 세속에 찌든 발도 씻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시원하고 깨끗한 냇물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박정희 장군이 새로 만든(1962. 3) 물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금은 딱딱해지는 느낌이지만 좌우간 고마운 일이다.대홍수로 인해 고택 동쪽으로 흐르던 냇물이 범람하여 마을과 고택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기 때문에, 이쪽으로 새로 방죽을 쌓아 물길을 내고 서천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인데, 고택 뒤쪽에 그 때 심은 전나무와 기념비가 다소 외로운 듯이 서 있다.
때마침 향토사학자 김태환씨를 만나 고택과 수해에 얽힌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지키는 바로 이 분들이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 부족한 오늘의 우리 세태를 깨우쳐 주는 파수꾼이요, 진정한 문화지킴이인 것이다. 삼판서고택이란 삼봉의 아버지 정판서, 그의 사위 황유정, 황판서의 외손 김판서 이 세 사람이 대를 이어 이 집에서 살았다는 데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한다.
고택은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색창연한 맛은 없으나 철저한 고증으로 지은 한옥이라 규모 있고 정갈하다.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니 소쇄헌(掃灑軒)이란 당호와 집경루(集敬樓)라 쓴 현판이 보인다. ‘깨끗하고 맑은’ ‘존경의 뜻을 모아’ 선비의 높은 기개를 펼치고자 했던 선인들의 간절함이 배어난다. 대청마루 뒷문을 열면 후원에는 과거 대홍수 때 물에 쓸려 간 제민루(濟民樓)도 다시 지어 원래의 모습을 재현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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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판석 고택안 정도전 시
마루 위 회벽에는 삼봉이 젊었을 때 성균박사 예의정랑 등을 지내다가 조선 개국 직전, 정몽주 등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나주 유배 뒤 고향 봉화군으로 이배되어 내려와 있을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 한 수가 걸려 있다. 은둔자의 답답함과 무료함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한 그루 배꽃은 눈부시게 밝은데 (一樹梨花照眼明) 지저귀는 산새는 봄볕을 희롱하네 (數聲啼鳥弄新晴) 은둔하는 자 홀로 앉아 무심하니 (幽人獨坐心無事) 뜰에 자란 풀만 한가로이 바라보네(閒看庭除草自生) <삼봉집>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1342년 영주군 이산면 신암리에 있었던 삼판서 고택에서태어났다. 700여 년 후 홍수로 그 집터 자리가 소실된 뒤 현재는 남의 소유가 되는 바람에 이 자리로 옮겨 다시 짓게 된 것이다. 현재는 구학공원(龜鶴公園) 중턱에 자리 잡고 오른쪽으로는 서천을 내려다보며, 멀리 소백산맥 줄기가 바라다 보이는 시야가 훤히 트인 곳에 터를 잡고 앉았으니, 장차로도 명소가 되기에 충분할 듯하다.
정도전 그는 과연 누구인가
문학기행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대체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은 문학가다. 두 번째는 앞서 기행에서 다루었던 정몽주, 이항복, 조식, 이순신, 정약용처럼 문인으로서의 역할이 학자, 정치가, 군인으로서의 역할보다 약하다 하더라도 그의 영향력과 업적이 우리의 역사상에 크게 빛나는 경우에 그를 기꺼이 조명 대상으로 삼는다. 삼봉의 경우 후자가 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문학은 인간이 펼치는 모든 분야를 주제와 소재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의 문학기행도 물론 문학 분야 자체에 중심을 두겠지만, 위와 같은 구도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조선 전기 서거정, 노사신, 강희맹 등이 엮은 <동문선>은 모두 156권으로 된 방대한 문헌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을지문덕의 시로부터 시작해서 조선 중기까지 590명 문인들의 문, 사, 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작품의 양으로만 따져 본다면 가장 편수가 많은 문인은 단연 이규보(428편)이고, 다음은 이색(289편), 최치원(189편), 권근(167편) 순인데, 삼봉은 99편(문77, 辭1, 부1, 시20)으로 최상위권에 드는 문인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질이 아닌 양만으로야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서거정의 날카로운 비평 감식안으로 골라 뽑아서 후대에 길이 남긴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정도전 문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정도전에 관한 좀 더 소상한 유품들과 그의 민본사상이 담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그리고 유명한 그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의 목판 258개 등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경기도 평택시 은성리 소재의 삼봉기념관이다. 필자는 미처 가 보지는 못하였으나, 기념관 뒤쪽에는 그의 시호인 문헌사(文憲祠)란 현판을 단 사당과 이성계가 하사한 ‘유종공종(儒宗功種:유학의 으뜸이요, 개국공훈이 으뜸이다)’이란 사액이 있다 한다. 생가보다 평택 쪽에 기념관이 서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역모의 모함을 받은 삼봉이 이방원의 손에 죽게 되지만, 삼족이 멸하지는 않고 그의 자손들은 화를 피하여 평택으로 와 숨어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4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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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판서 고택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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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그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KBS1 TV ‘학자의 고향’에서는 그를 두고 ‘조선 건국의 주역인가? 실패한 개혁가인가?’라고 의문을 던짐으로써 조선 500년 역사의 비정함과 아이러니를 강하게 떠올린 바 있다. 삼봉의 부친은 병부시랑,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1305~1366)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상주목사, 전주목사, 시랑 등 벼슬길을 따라 그의 성장기는 경향 각지를 두루 옮겨 다녔으리라 짐작되는데, 소년기에는 주로 개경에서 자란 기록이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심하게 엇갈리고 있다.
실록에는 1865년(고종 2년)에 복권이 되기까지 그의 사후 450여 년 간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태조실록은 ‘자기보다 나은 인물을 제거한 사람으로서 도량이 좁다.’고 했으며, 후일에는 홍길동전의 작가이자 비운의 혁명가였던 허균이 그를 흠모했다 하여 역적의 부류로 취급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말의 목은 이색은 제자인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고, 포은 정몽주는 그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했으며, 신숙주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견줄 만한 인물이 없다고까지 했다. 여기서 삼봉의 스승 이색의 오언절구 한 수를 감상해 보자.
한포농월(漢浦弄月:한강가 포구에서 달을 구경함) 저녁놀에 모래는 더욱 희게 보이고 / 구름 걷히니 물빛이 한결 맑구나. 달과 더불어 노니는 이 밤에 / 피리소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꼬. <목은집>
달빛 비치는 한강의 밤물결을 바라보며 한 가락 피리소리를 구하는 모습은 선비의 망중한인가? 아니면 세월의 검은 구름 걷히고 평안의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인가? 수학기에 심취한 맹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
수학기에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1337~1392), 이존오 등과 교유하며 유학의 기초를 닦고 성리학의 개념을 익혔다. 잘 알려진 대로 특히 정몽주와는, 나중엔 정치적 선택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으나 서로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는 가운데 돈독한 친교를 이루었다. 당시 고려말은 무신정권 이후 혼란을 극한 상황이었다. 귀족세력의 부정부패, 기울어가는 원나라의 간섭, 신흥국가 명나라의 압력, 홍건적의 난, 대규모 왜구들의 침략 등으로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즈음, 14세 연상의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통한 사회 개혁의 논리를 깨우쳤으나, 개혁의 방법론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장차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 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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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판서 고택
이색은 현실 개혁의 방향을 인간의 도덕성 회복에서 찾으려 하였고, 정도전은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법을 제정을 통해 제도의 모순을 개혁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21세에 과거급제하여 정8품 말단직책을 수행할 무렵 연이은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가 3년간 시묘살이를 할 때, 다섯 살 연상의 정몽주가 <맹자> 한 질을 보내 주었다.
이 책을 받고 그는 한 장 한 장을 열심히 정독하여 맹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을 익힘으로써 후일 조선 개국의 혁명이론으로성숙시켜 나갔을 것이라고 사가들은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인심(仁心)에 의한 정치이므로, 군주는 백성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실현해야 하며,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야[易姓] 한다는 이론이기에 젊은 유학도인 그를 매료시켰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싹튼 민본사상(民本思想) 29세 무렵에 잠시 성균박사에 복직되었으나 뿌리째 흔들리는 정치 상황은 계속되었다. 무너져가는 원나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보수 세력들의 친원정책을 반대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미움을 받다가, 끝내는 34세에 나주로 유배되어 두 평짜리 초막을 짓고 궁핍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당시에 쓴 유배시 두 편을 소개한다.
나라 떠난 몸 빌붙어 사는 것 같아 / 누에 오르니 별안간 졸음이 달아나네. 큰 산과 숲이 많고 바다가 가까운데 / 사람 사는 동네는 거의 없구나. 정월이라 설도 이미 지나가고 / 입춘도 어느 새 다가오련만 추위는 아직도 유세를 부려 / 으스스 살갗에 스며드누나. 이역에 묶여 있는 오랜 나그네 / 헤어진 옷에 실오리가 뭉쳤네. <삼봉집>
적막한 유배지에서 외로움과 헐벗음의 고통이 어떠했으랴? 이 때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극도의 굶주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삼봉은 ‘민본사상’을 잉태하게 된다. 유배가 풀린 후 한양으로 올라가 삼각산 아래 집을 짓고 공부와 강론을 시작했다. 이 때 친우들이 삼각산의 삼봉을 닮아 웅지를 펼치라는 뜻으로 삼봉(三峰)이라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호가 말해 주는 대로 삼각산 주봉 아래로 수도를 옮겨 오는 일생일대의 조선 개국 과업을 숙명처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권문세력들의 횡포로 인해 9년 동안이나 부평으로 김포로 집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으며, 연명 수단인 훈장 노릇도 못하게 방해를 받는 철저한 야인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그는 친우들에게 음식을 구걸하기도 하고 밭갈이 품을 팔기도 했다고 전한다.
앞에서 예시한 ‘학자의 고향 1부’에서는 두 왕조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며 선택한 길에 대하여, ‘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택하다’라는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1383년 야인 생활 9년째 되던 어느 날 그는 정몽주의 소개로 함경도 함주에서 동북면도지휘사를 맡고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서 시 한 수를 넌지시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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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 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다시 뵐 수 있으리까 / 인생이란 잠깐의 묵은 자취일 뿐
장차 역성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울 두 주인공의 짧은 만남, 이 순간에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역사가 이루어지고 꿈틀대는 찰나에 그 시대 영웅들의 뇌리 속에서 문학은 어떤 효험을 가지고 그들의 정서를 사로잡고 의지를 움직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적인 전제(田制) 개혁과 조선 개국 그 후 1387년(45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388년에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로 이때에 맞춰 정도전은 조준, 윤소종과 함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전제법(田制法)인 계민수전(計民收田)을 주장하여 3년 후에는 과전법(科田法)의 결실을 보게 된다. 삼봉집에 기록된 당시 토지제도의 상황을 보면 한 사람의 농부가 경작하는 땅에 지주가 7~8명씩이었다 하니 양민 수탈의 폐단이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계민수전’이라는 과전법은 이렇듯 당시 귀족과 토호들이 독차지하다시피 한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식구수대로 토지를 분배하려는 과감한 정책으로서, 토지대장을 불태울 때 양반 보수파들이 깊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렇지만 훗날 태조로부터는 극구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 또한 태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1391년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부상당하자 개혁파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온다. 과거의 친구 정몽주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영주, 나주로 귀양을 가게 되고, 김진양 등은 상소를 올려 그의 극형을 주장했다. 그의 두 아들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는다.
같은 스승 아래 함께 수학한 정몽주와는 선연과 악연이 수없이 교차하는 기구한 운명적 관계가 아닌가 싶어, 정치 현실의 비정함과 현세적 삶의 무상함을 절로 느끼게 한다. 그는 처형 직전의 위기일발에서 극적으로 구원 받는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 그는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게 되는 것이다. 조선 개국 직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린다. 1393년에는 악장인 <문덕곡(文德曲)>, <납씨가(納氏歌)>, <몽금척(夢金尺)> 등을 지어 개국을 축하하고,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게 했다.
신도(新都) 한양에 심혼을 담다 신도가 정 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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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국문학 장르상으로 조선 초기에 국한하여 지어졌던 악장(송축가)으로, 예를 들면 정인지 등이 지은 <용비어천가가>,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이 여기 속한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로 시작되는 <서울의 찬가>가 600여 년 전에도 불리었다고 생각하면 아주 쉽다. 앞부분에서는 한양의 빼어난 모습을 찬양하고 있으며, 중간 부분에서는 태조의 성덕과 한양이 도성다움을 칭송하고 있고, 끝부분에서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터에서 태조의 공덕을 기리며,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
형식면에서 후렴구가 있는 고려가요의 가락을 바탕으로 지은 노래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홍보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찬양 내용과 왕들에 대한 송축으로 인하여 문학적인 의미를 상당 부분 상실함으로써, 국문학사상 생명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런 점은 인간의 보편 정서보다 사회적 이념이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는 문학이 갖는 일반적인 한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2세가 되는 1394년에는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 구조를 세운 <조선경국대전>을 찬진(撰進)했다. 같은 해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권문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수도의 행정 분할도 결정한다. 삼봉이 디자인했던 한양의 기본 구성도를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각산(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백악산(주산, 북;현무) 인왕산(우;백호) 숙정문 낙산(좌;청룡)
비원 흥화문 창의문 사직단 경복궁(법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종묘 돈의문 보신각 흥인문 소덕문 경운궁(덕수궁) 광희문 숭례문 남산(안산, 남;주작) 삼봉은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비롯한 각 궁궐, 전각들의 이름, 사대문 팔대문의 이름을 짓고,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계획하고 세워 나갔다. 특히 보신각(普信閣)을 가운데 놓고 사대문 이름에 仁, 義, 禮, 智자를 가운데 넣어 배치함으로써, 유학의 기본 이념을 이 도읍의 터전 위에서 성취하려 했던 그의 정신은, 조선에 이어 현대에까지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동정벌 계획과 신권(臣權) 강화 주장 이성계가 수행하려다 위화도회군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요동정벌 계획은 삼봉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397년(55세) 중국에 갔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가리켜 ‘화(禍)의 근원’이라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동북면도순무순찰사가 되어 성을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지어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어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계속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으로 합쳤으며, 왕자들과 공신들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들은 <조선경국전>에 담긴 그의 민본사상과 신권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삼봉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이 옳다고 하나 그른 것이 있으니, 신하가 그른 것을 말해 옳은 것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나 옳은 것이 있으니, 신하가 바로잡아야 한다. 하민(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폭력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얕은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이방원 등 서슬 퍼런 왕권 강화의 거센 흐름 앞에서, 참으로 명쾌하고도 용기 있는 착상이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감히 목숨을 걸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민본주의 혁신가의 비극적 최후 삼봉의 민본주의는 현재 한국의 헌법정신과도 일맥상통하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백성이 임금보다 위에 있고 정부가 이를 담보해야 한다는 논리는 시대를 뛰어넘는 탁견임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개혁을 위험시한 보수 세력의 경계심과 고려를 버리고 새 왕조를 택한 불충의 역성혁명 주역에 대한 배타와 질시의 결과, 오래도록 그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는 1398년에 이르러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이방원에 대한 정면 도전에 최후의 승부를 걸었다. 이방원 등 왕자들과 세가에서 가진 사병(私兵)들을 혁파하여 요동정벌에 동원하고자 했으며,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한 것이 끝내 결정적인 자충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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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판서 고택 옆에 있는 제민루
이방원은 자신의 집에 몰래 사병을 은둔시키고 있었고, 같은 해 8월 현재 한국일보사 근처 친우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그의 일파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방번, 방석,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처형됨으로써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으며 현재 가묘만 전하고 있다. 태조의 가호 때문인지 삼족 멸문지화는 면했지만 아들 넷 중 둘은 죽게 되고, 당시 태조를 따라 사냥을 나갔던 그의 큰아들이 요행히도 살아남아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기도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또 한 명의 위대한 혁신가를 비명에 잃게 되는 조선 초, 소용돌이 역사의 숨 막히는 장막 속을 엿보았다.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허균, 조광조, 남이장군, 정조임금, 전봉준, 김옥균, 김구 등 셀 수 없이 많은 역사적 풍운아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현세에 들면서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위험한 혁신가라는 죄목으로 질시 받으며 고통 받고 비명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가?
삼봉 정도전 그는 실패한 개혁가인가? 비록 그의 위대한 민본사상이 줄기찬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번영과 자유의 한 구석에서 아니 한 복판에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면 결코 실패한 개혁가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삼봉의 문학과 행적 탐방을 마감하면서 그가 만년에 고려의 옛 수도 개경을 돌아보며 읊은 시조 한 수를 여기에 옮겨 놓고자 한다. 두 왕조를 섬기는 일이 얼마나 고뇌에 찬 일이었을까? 선택과 결단을 통하여 정치 이상을 실현하는 일조차 무상한 것이기는 하나, 굳이 물어서 무엇하느냐고, 이 시조는 은근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해 주고 있다.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흐르니 반 천 년 지내 온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古國興亡)을 물어 무엇하리오 <삼봉집>
*선인교: 개성 자하동에 있는 다리 이름 *자하동: 송악산 기슭에 있는 경치 좋은 골짜기 화창한 봄날의 전통혼례식
이제 오늘 기행의 두 번째 주제인 소수서원-백운동서원을 방문할 차례다. 때마침 이날 오시(午時)에는 이곳 서원 바로 옆에 마련된 선비촌에서 전통혼례식이 치러진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우리들의 문학기행 장면 속으로 봄꽃다운 신랑 신부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나귀 타고 가마 타고 입장하는 혼례식은 평소에 접해 보기 어려운 데다가, 절차가 낯설기도 할 것이기에 간략하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옛 사람들은 혼례를 일컬어 ‘인륜 도덕의 시원(始原)이며 만복의 근원’이라고 했다. 전통혼례는 원래 서로 혼인 의사를 타진하는 의혼(議婚), 혼인 날짜를 정하는 납채(納采),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 혼례식을 올리는 친영(親迎)의 네 가지 의례로 이루어지는데, 요즘에는 친영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통 혼례 방식으로 치르고 있다.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고 단령포(團領袍)에 단학(單鶴) 수를 놓은 흉배와 흑각대를 띠고 말 또는 나귀를 타고 앞에 선다. 가마를 타고 뒤 따르는 신부는 궁중에서 왕비가 입던 대례복 형상의 붉은 활옷[闊衣]을 입고 속에는 청색 안을 받쳤다. 적색은 남, 청색은 여를 상징한다. 머리에는 칠보화관을 쓰고 이마와 양 볼에는 악귀를 쫓는 붉은 색 곤지, 입술에는 역시 붉은 연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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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 행렬
행렬 맨 앞장에는 청사초롱이 길을 밝히고, 그 뒤에 금슬 좋기로 소문난 기러기[木雁] 혹은 오리(또는 산 닭)를 든 기럭아비가 길을 안내하고, 뒤로는 동네 아낙네들, 신랑 신부를 몰래 짝사랑하던 총각 처녀를 포함한 구경꾼이며 동네 조무래기들이 희희낙락 따른다. 친영은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주례자가 홀기(笏記)에 따라 식을 진행한다. 순서에 따라 간략히 정리하면,
ㅇ전안례 : 신랑이 기럭아비와 함께 신부 집에 도착하여 신부의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바치는 예이다. 신랑이 백년해로 서약의 징표로서 장모에게 드리고 두 번 절한다.
ㅇ교배례 : 전안례 후 신랑 신부가 초례청에서 상대방을 상견하게 된다. 신랑은 초례청 동쪽에, 신부는 시중드는 수모(手母) 두 사람에게 이끌려 서쪽에 선다. 신랑 신부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뜻으로 손을 씻고 난 다음, 초례상을 마주 하여 놓고 신랑은 한 번 신부는 두 번 상견례를 올린다. 둘은 양쪽에 각각 꿇어앉는다. ㅇ합근례 : 처음으로 술을 마심으로써 부부로서 하나가 됨을 의미하며, 둘로 나뉜 표주박은 이 세상에 각각 하나밖에 없을 것이므로 둘이 합쳐서 온전한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하객에게 큰절을 올린다.
현대 서양식 혼례에서처럼 주례의 일장훈시는 없어도, 근엄하고 정성스런 여러 절차를 통해 부부일심동체의 굳은 약속을 마음에 새기며 일단 예식은 끝을 맺는다. 다음으로는 신랑 신부 일가친척 친구들을 접대하는 연석(宴席)이 왁자지껄하게 펼쳐지고이윽고 해가 저물면, 방합례(房合禮)가 치러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방 엿보기라 하여 창호지문을 침 묻은 손가락으로 뚫고 신방을 엿보는 풍습이 있었다.
혼례식을 보기 위해 오전 일곱 시 출발을 했으니 시장이 반찬이라 외쳐 볼 만한 때다. 신랑 신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모두들 옛날 자신들이 치렀던 혼례식 그 날의 정경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으리라. 그래서인지 이 날 점심식사의 막걸리 맛이 유별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비문화의 원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서 영주시에서 20여 분을 달려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는 순흥면에 이르면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훨씬 가까이서 우람한 산세를 드러낸다. 소수서원에 들기 바로 전 왼쪽에 홍살문이 우뚝 하니 높직이 서 있고 금성단(錦城壇)이란 현판이 보인다.
금성대군(1426~1457)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세조1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후 이에 연루되어 이곳 순흥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시 역모를 꾀한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된 인물이다. 충절의 고장임을 더욱 올곧게 일러 주는 제단이련만 시간에 쫓겨 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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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전경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길 건너에는 사사(賜死)된 충절이 잠들고, 길 이쪽엔 사액(賜額)된 서원이 자리잡고 있으니 참으로 역사와 인걸들이 엮어 가는 인연이란 기묘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542년(중종 37년)에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사묘(祠墓)를 세우고 다음해에 학사(學舍)를 짓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사림 자제들의 교육기관과 강론의 장으로 출발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였다. 그 후 1550년(명종5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과 사서삼경, 성리대전(性理大全), 토지, 노비, 면역 특권까지 하사받으면서 사설 교육기관으로 첫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세붕이 지은 잘 알려진 시조 한 수를 감상하고 가자.
아버님 날 나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부모님곧 아니시면 이 몸이 업스샷다 이 덕을 갑흐려 하니 하늘 가이 업스샷다
당쟁에 휘말린 서원 문화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제사 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사액서원의 수가 점차 늘어감에 따라(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는 300여 개소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900여 개소에 이르렀다 함) 여러 가지 부작용도 함께 늘어나게 되었다. 당쟁의 심화와 함께 혈연, 지연, 학벌, 사제 등의 파벌이 조성되어 지방 양반층이 이익집단화하게 되었고,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면세 특권의 남용으로 인한 국고 수입의 감퇴, 서원 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가 심하였다.
더욱이 유생들은 관학인 향교(鄕校)를 외면하며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참여하는 등 극심한 폐단을 보이자, 인조 때부터 논란이 되었으나 정비하지 못하고 내려오다 1738년(영조14년)에는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전국에서 200여 곳을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곳이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1864년(고종1년)에 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서원의 정비가 단행되어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만 남겨 두게 되었는데, 이때 소수서원은 당연히 남겨지게 되며 고유한 명성과 역할을 되찾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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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경렴정
이 대목에서, 감정을 가라앉히고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신중하게 서원 정리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태운 서적 중에 헐어버린 서원 중에 참으로 귀중한 보배들도 많았을 텐데, 혹여나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까?
1970년대 초반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의 타임지 표지에 동양인 한 사람이 등장한다. 희색이 만면인 채로 라디오 카세트를 번쩍 들고 독자에게로 튀어나올 듯한 모습으로 희화화한 캐리커쳐였다. 제목은 “한국인들이 몰려온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엄살이다.’ ‘아니다 한국을 주목해야 한다’로 평가는 엇갈렸다. 그 후로 한국이 꾸준하게 발전을 거듭하자, 국내외 곳곳에서는 한국의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고 답하는 일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외국 석학들의 여러 진단 중 가장 수가 많고 납득할 만한 것이, “수 백 년 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선비정신’이요 ‘유학이념’”때문이라는 답이었는데, 막상 장본인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우리의 발전 원동력은, 서양에서 출발한 근대화 물결이 일본을 통해 가공되어 건너옴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인 줄로만 알고, ‘양반의 유학’, ‘봉건의 조선’을 타도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괄시로 일관했는데 너무도 뜻밖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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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일신재와 직방재
선비 정신은 과연 오늘에 살아날 것인가?
선비정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선비’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니, [1. 옛날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 2. 학덕을 갖춘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단 21세기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인데, 단지 화석과도 같이 박제된 채 박물관 안에 밀납으로만 존재해야 한단 말인가? 붓끝이 예리하기로 소문났던 저널리스트 이규태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선비 사상의 본질은 윤리적인 것이며, 지조와 청빈의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다.(중략) 만약 오늘날 지조와 청빈을 말한다면 ”그런 건 이제 쓸모없는 도덕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뭘 다 아시면서......’라는 뜻의 미묘한 미소를 보낼 것이다. 샤르트르의 말을 빌면 ‘이 시대는 거짓 믿음의 시대요, 의혹의 시대’ 이다. 사회학의 분석에 의하면, 현대는 그 물량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부(富)와 사회적 지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고 즉 자기중심사고를 가치체계의 본질적인 자리에 놓음으로써 ‘거짓 믿음’과 ‘의혹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과 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노골적인 권력지향성, 약육강식의 원리 수용이야말로 국가 사회와 개인을 나락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옛 선비시대의 교육 목표가 지식보다는 올바른 행동규범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하는가?“ 다음에는 국문학자이자 시인이고 수필가였던 일석 이희승(1896~1989)의 수필 <딸깍발이>에 대한 어느 진솔한 독후 감상을 들어 보자.
“딸깍발이 선비는 찢어지게 가난한 주제에 체면만은 살아 있다. 춥고 추운 엄동설한에 삼척 냉골 구들방에 앉아서도 ‘요 괘씸한 추위란 놈 내년 여름에 두고 보자‘며 큰소리치더란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들려준다. 이 대목을 읽으면 구차한 인간의 비애를 본다.
마치 현대의 고등룸펜을 보는 듯하다. 그래도 자존심은 살아서 남에게 구차한 소리도 못하고 더군다나 어쭙지않은 꼴은 죽어도 보이기 싫어한다. 제법 배운 것은 많아서 바른말도 할 줄 아는, 그래서 제 뜻을 굽히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고집쟁이다.
딸깍발이 선비에 대한 작가의 경멸어린 시선도 중반 이후에 이르면 사뭇 달라진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 구차할망정 그는 대쪽 같은 자존심을 지닌 인물이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를 지니고 있다.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도 딸깍발이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국사의 통탄한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살기를 마다하고 직언으로써 상소한 것도 이 샌님-선비의 족속인 유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딸깍발이 선비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의기로써 충절로써 나라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찡하는 감동이 전해진다. 작가 이희승도 국문학자로서 당대의 선비로서 이 딸깍발이의 전형이 아니었을까? 아니 작가 자신이 딸깍발이 선비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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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 전경
P세대는 선비정신의 적통(嫡統)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딸깍발이>란 제목의 수필은,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로부터 ‘도대체 교과서 편찬위원들은 요즘 학생들의 정서를 이렇게 모르나?’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가르치기가 매우 힘들었던 단원이었다는 기억 때문이다. 몇몇 학생을 빼 놓고는 이미 물신주의의 신도가 되어 버린 듯 맹숭맹숭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 동안의 혹독한 시련과 성숙의 세월 속에서, 40대 중반이 된 지금쯤은 선비정신의 오롯함과 꿋꿋함을 스스로 깨우쳐 삶의 지표로 삼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때 뿌려진 <딱깍발이>의 씨가 싹트고 자라나 이제는 20년이 넘는 거목으로 자라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최근의 신문에 유달리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천안함 P세대’란 제목이었다. P란, Patriotism(애국심, 북한 위협 실감), Pleasant(유쾌, 군대도 즐겁게 가는 현빈 세대), Power & Peace(평화, 힘이 있어야 평화 지킴을 각성), Pragmatism(실용, 진보 보수 이분법 거부), Personality(개성, SNS 적극 세대)의 이니셜이라 했다. 다섯 가지의 덕목을 한 알파벳으로 역어낸 착상도 기발하지만, 그 덕목들이 한결같이 생소하지 않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여러 세대들을 편의상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자.일제강점기 악랄한 식민사관에 찌들어 가치관이 마비된 세대, 6.25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처뿐인 세대, 가난을 벗어나느라 눈치만 보고 살아온 세대, 독재에 시달리며 민주투쟁에 나서다 악만 남은 세대, 공부에만 몰두하느라 근시안이 된 세대가 한데 어울려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달리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각 세대들은 일부 결함들은 가지고 있지만, 그 시대가 준 고통스런 짐을 마다않고 짐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완수한 자랑스런 세대들이다. 관점이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 이 세대들의 힘의 총화에 의해서 우리들의 행복지수가 오르내리고, 국제 사회에서의 대한민국 위상이 결정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들 대견스러워 하는 ‘P세대’란 어디서 출현한 것인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 물론 절대 아니다. 가까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어제 오늘의 우리 기성세대가 낳은 정실 자식이요,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낸 변증법적 산물이다. 영락없는 현대판 젊은 선비의 모습이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긍정적으로 껴안는 사관의 한복판에 선비정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홍익이념과 화랑도, 호국불교와 대승이념, 대인과 군자를 숭앙한 나머지 우리 토양에 맞게 자라난 조선 고유의 딸깍발이 그 선비정신이 낳은 적통의 존재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죽계천 맑은 물을 타고 흐르는 솔향
기와집이 즐비한 선비촌 뒤로는 현대식으로 정성들여 지은 소수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2010년 11월부터 2011년 8월 말까지 ‘과거(科擧), 몸을 일으켜 이름을 떨치다!’라는 주제로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풀이한 제목이겠는데, 과거시험의 전모를 밝혀 주는 보기 드문 전시회라 소중한 안복(眼福)을 누리게 될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우리 국토 영역 속에 그려진 대마도가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께시마의 망령이 더욱 강력히 살아나오는 이때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봄꽃들이 난만한 숲길을 걷는다. 냇물 이름은 죽계천(竹溪川)이다. 어딘가에서 혹독한 겨울 이겨낸 대나무숲이 바람을 타고 맑고 곧은 선비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으리라. 냇물 너머에는 좀 전에 지나온 소수서원의 묵은 기와집들이 무게 중심을 잡고 곳곳에 벌여 있고, 기품 있게 자라난 굵직굵직한 적송들이 마치 수호신인 양 한결같이 서원을 감싸고 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했는데, 이 곳 소수서원 솔숲의 소나무들은 유달리 곧게 자란 동량지재들인데도 베어지지 않고, 조선 선비들의 선산이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 뜨락을 잘도 지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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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
기왕에 나무 얘기가 나왔으니 은행나무 얘기 하나 덧붙여야겠다. 이곳 순흥땅 ‘금성대군 신단’ 서북쪽에 충신수로 불리는 압각수(鴨脚樹-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가 있다 한다.
순흥 압각수가 유명한 것은 1457년 정축지변(금성대군 등 살육사건)이 있을 때, 순흥도호부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가 1643년에야 싹이 돋아나 다시 살아났고, 1683년 순흥도호부가 다시 설치되자 잎이 무성해졌다는 신목(神木)인 것인데, 시간에 쫓겨 못 보니 서운할 뿐이다.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기둥을 찾아서
아쉬움을 뒤에 남겨 둔 채 몸은 부석사로 향했다. 소백산국립공원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부석사는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는 산 중턱에서, 서북쪽으로는 소백산맥 영봉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동남쪽으로는 봉화면 일대를 한 눈에 굽어보고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안동 봉정사(鳳停寺) 극락전의 중건기가 발견된 이후 그 자리를 내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통일신라시대의 건국 양식을 갖추고 있는, 고려시대 중기의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임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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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전경
전설에 의하면 부석사의 의상대사가 종이 봉황새를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서 닿은 곳에 봉정사(봉황이 정지한 곳)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석사의 창건 연대가 앞서는 것일 텐데,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중창했고, 무량수전은 공민왕 7년(1358년)에 왜구의 침범으로 불타서 우왕 2년(1376년)에 다시 지었으므로 학계에서는 그렇게 판단한다고 한다.
통일신라 석공들의 손때와 땀방울이 아직도 맺혀 있을 듯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높직한 이층 안양루 다락 위에 ‘봉황산부석사’란 현판이 속세의 방문객을 위엄으로 맞이한다. 다락 밑으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몇 걸음 올라간다. 앞에 나타나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기품 있고 아름다운 석등. 국보 제 17호다. 높이 2.97m에다 8각 기둥, 연꽃무늬 상륜부 아래에는 네 개의 창을 열어 놓았다. 단아하고 청초한 맵시가 깊은 산골 처녀 같은데, 이런 고이한 생각은 단단히 붙들어 매어 놓아야 한다.
석등을 지나 앞을 보니 드디어 국보 제 18호 무량수전이다. 이름 그대로 고색이 창연한 네 글자 현판이 정면으로 마주 우러러 보인다. 글씨는 웅건하고도 단정한 해서체로 썼는데, 구름무늬로 깎아 테를 두른 장방형이란 점이 남다르다. ‘무량수’란 아미타불과 그 백성의 목숨이 한량없다는 뜻인가 우주의 세월이 무궁하다는 뜻인가? 무상한 세월 위에 잠시 떠 있는 부초 같은 우리들의 인생살이가 한 줌에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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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1916~1984)선생의 <한국미의 산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한 대목을 감상해 보자.(배흘림기둥이란 기둥 아래와 위를 알맞은 비례로 깎아 가운데 배를 부르게 만든 형태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기둥과도 같은 멋지고 아름다운 기둥이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적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하였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柱心包)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무량수전에서 동북쪽으로 100m 정도를 오르면 국보 19호 조사당(祖師堂)이 있다. 의상대사의 진영(眞影)을 모신 이 건물은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지어졌으니, 최고(最古)로 말하면 무량수전과 난형난제임이 분명하다. 무량수전은 팔작(八作)지붕인데 비해 조사당은 맞배지붕이라 단순하면서도 근엄하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신목이라 할 만한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조사당 축대 밑에 1.8m 높이의 골담초다. 선비화(禪扉花)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의상조사(625~702)께서 당에서 귀국할 때 지팡이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열반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이 지팡이를 비와 이슬이 맞지 않는 곳에 꽂아 두어라.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문도들이 조사당 추녀 밑에 꽂아 두었더니, 사월 초파일에 꽃이 피었다 한다. 이 나무는 1300여년의 수령에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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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서 내려다 본 전경
지난겨울 기행 때보다 해는 꽤 길어져서 우리가 봉황산 중턱을 걸어 내려올 때에는, 소백산맥 위로 한두 뼘 남은 해가 선사하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더없이 맑고 아름다운 자연, 계절감을 마음껏 발산하는 숲의 자태, 역사의 그윽한 가르침 속에 더 머물고 싶지만, 우리가 가서 쉬어야 할 곳이 또 있으니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글/그림 윤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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