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 3부작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영화음악과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덤에 올렸다. 마지막 작품 <석양에 돌아오다: 원제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는 한국에서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재탄생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시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한껏 폼 잡던 이스트우드는 1971년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 후 1988년 <버드>가 칸영화제에 초청받고, 이스트우드는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다. 관객은 이제 배우라기보다는 감독 이스트우드를 더 깊이 새기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매디슨 카운티 다리>와 <미스틱 리버>로 꾸준한 성가를 올리던 그는 2004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다시 한 번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다. 팔순 노령을 앞에 둔 이스트우드가 영화 <체인질링>으로 관객과 대면하고 있다. ‘changeling’은 요정이 앗아간 예쁜 아이 대신 두고 간 못 생긴 아이란 뜻으로 ‘은밀하게 뒤바뀐 아이’를 뜻한다.
<체인질링>은 인생의 황혼녘에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이스트우드의 시선과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요즘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이코패스’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계기를 가진다. 영화의 중심에는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있지만, 감독은 그와 같은 문제발생의 배후인 공권력까지 고려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아이의 실종과 경찰의 대응: 경찰은 누구인가
1928년 3월 10일 오후 로스앤젤레스. 젊은 여인이 귀가를 서두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때 직장상사가 그녀를 불러 세우고 승진문제를 말한다. 그녀 얼굴에 조바심과 초조함이 묻어난다. 전차를 타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운전수는 그녀를 외면한다. 마침내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돌아온 그녀. 그녀를 기다려야 마땅한 어린 아들은 집안 어디에도 없다.
영화는 아홉 살배기 아들 월터에게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홀어미 크리스틴 콜린스의 행적을 낱낱이 추적한다. 어둑한 집안은 물론, 거리와 놀이터에서도 월터는 행방이 묘연하다. 망연자실한 크리스틴. 그녀는 결국에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경찰관의 목소리는 사무적이고 건조하며 차갑기까지 하다.
“아이 실종사건은 24시간 이내에는 처리하지 않습니다. 집 나간 애들은 다음날이 되면 거의 다 돌아오기 때문이죠. 그런 데에 시간을 낼 만큼 경찰은 한가하지 않습니다.”
경찰은 월터에 대해 크리스틴보다 훨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지상에 남은 유일한 자식을 향한 어미의 심정 따위가 경찰에겐 고려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저 기계적으로 사건을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하는 경찰. 이스트우드는 경찰의 이런 태도로 인해 야기되는 어린이 실종과 유괴사건이 얼마나 많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한다.
개인과 공권력: 경찰과 개인이 만나면 무슨 일이?
대공황이 불어 닥치기 직전 로스앤젤레스는 부패하고 무능한 경찰들의 천국이었다. 부랑자와 범법자를 소탕한다는 이유로 인명살상 무기를 대량 배포하여 백주대낮에도 거리낌 없이 학살극을 연출하였다. 거리거리에 공포와 살풍경이 넘쳐났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시민은 없었다. 스멀스멀 다가서는 폭력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자 누구인가!
아이를 찾아 백방으로 애쓰던 크리스틴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다. 경찰이 월터를 찾았다는 것이다. 경찰에 비판적인 브리그랩 목사로부터 연일 신랄한 공격을 받던 경찰은 대규모 기자단을 동반하고 정거장으로 나간다. 이미 월터와 크리스틴은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대면한 아이는 월터가 아닌 낯모를 소년이었다.
영화는 이 지점부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아들을 찾으려는 홀어미의 눈물겨운 분투가 존스 반장이 대표하는 경찰당국과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위신과 신망이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진 경찰은 급기야 크리스틴을 정신이상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수감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이야 독자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을 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세계 최고수준으로 보장되는 곳이라 여겨지는 아메리카의 80년 전 모습은 정말 가관이다. 흑인은 물론이고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는 백인여성에 대한 차별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던 사회. 성적인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되고, 최소한도의 인권마저 법과 공권력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유린되던 사회. 그런 사회가 1920년대 아메리카였다.
개인과 세계: 누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
<체인질링>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개인에 대한 방점이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경찰의 부패와 무능과 방종을 끈질기게 고발하는 구스타프 브리그랩 목사. 그는 크리스틴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그녀에게 함께 투쟁할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세상과 권력구조 그리고 그것의 집행과정에 무관심한 크리스틴은 개인으로 남고자 한다.
인간과 세계를 변혁하려면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브리그랩 목사와 그에게 설득되지 않으려는 소박한 여인이자 엄마인 크리스틴. 이들 사이의 긴장과 대립 또한 영화의 볼거리다. 여기 더하여 자기가 월터라고 우기는 소년과 그런 아이를 내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여성 크리스틴의 대결구도 역시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들의 실종이 장기화되고, 경찰이 자신을 냉담한 이중인격자로 몰고 가자 크리스틴도 투사가 된다. 관객은 개인이 어떻게 사회와 맞장 뜨는지 목도한다. 상부지시도 거부하면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바라 형사 역시 조직에서 일탈하는 영웅적인 개인을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답게 이스트우드는 개인과 사회의 정면대결에서 개인에게 방점을 둔다.
개인의 결단과 행동으로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진 노령의 공화주의자 이스트우드. 따라서 그는 영화에서 여러 번 되풀이되는 어휘 ‘책임’과 함께 하나의 구호를 내세운다. 구호가 얼마나 관철되었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무리는 내가 한다.”
사이코패스와 영화 <체인질링>
어떤 보이지 않는 끈이 크리스틴을 강력하게 옥죄고 있는 듯하다. 노련한 이스트우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반전과 결말을 준비한다. 사이코패스 고든 노스컷이 사건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관객은 지금까지 진행된 사건과는 아주 다른 사건과 대면하면서 충격과 공포에 전율한다. 아들을 찾으려는 모성과 어눌한 사이코패스의 연결고리.
이스트우드 영화가 관심을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이코패스 문제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발생한 용산참사도 미룬 채 시민들은 사이코패스 강호순 사건에 넋을 빼고 있다. ‘사이코패스’란 뇌의 전두엽 이상으로 인한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을 뜻하며,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거짓말에 능하며, 충동적이고 책임감이 없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다.
영화 후반부에서 고든 노스컷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21세기 사이코패스의 원형으로 등장한다. 다수의 어린 영혼을 무참하게 학살한 흉악범인 그는 죽음에 임박한 시점에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문제는 사이코패스가 출몰하는 배후에 권력과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곤권력을 대표하는 무능하고 부패한 경찰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는 경찰의 추적조차 받지 않는 사이코패스가 암약하고, 다른 한편에는 죄 없는 젊은 엄마가 정신병원 쇠창살에 갇히는 기막힌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체인질링>. 노감독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자랑스러운 미제국의 과거였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는 듯하다. “그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거요? 예전보다 나아진 게 확실히 맞소?”
짧은 맺음말: <체인질링>의 가르침
월터로 행세하던 소년이 종당에 진실을 말하는 장면이 잠시 나온다. 소년은 왜 월터를 자처했으며,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온다. ‘은밀하게 뒤바뀐 아이’를 제조한 당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시간이 아무리 바뀌어도 국가권력의 대행자를 자처하는 공권력의 횡포는 어디서도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국가가 이해관계에 함몰될수록 공권력은 공공의 이익이란 명분을 내세워 더욱 견고하게 인간과 인권을 짓밟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지, 공공의 핵심에 누가 자리하고 있는지 묻는 일은 참 허망한 노릇인지 모른다. 그래서 용산 철거민을 한겨울에 사지로 몰아넣은 경찰이란 공권력의 실체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을 1월의 한겨울 냉기 속으로 내몰고 공사를 강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확실하게 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 같은 야만적인 공권력 행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도의 인권과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근거를 단단히 마련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