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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산행구간의 지도
노원역(07:00)
한국이란 조그만 나라, 내가 생각을 해도 정말 대단하다... 정치하는 사람만 빼고는
새벽 3시부터 시작된 런던 올림픽 축구 8강전에서 홈팀 영국과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끝에
승부차기에서 5-4로 이겼다. 무더위를 날려 버리는 통쾌한 승리를 보고 잠도 설친탓에
딱히 갈곳도 없고하여 서울근교에 있는 수락지맥을 마무리 하기로 하고 얼린 물1.8L
한통만 챙겨서 당고개로 향한다. 강남구청역에서 7호선을 타고 노원역에서 내려
당고개역 가는 4호선을 갈아탄다. 당고개역에 도착하여 노점상 할머니에게 샌드위치
에다가 우유로 아침을 대신하고 덕릉고개 가는 33번 버스에 오른다.
덕릉고개(07:40)
당고개 편의점에서 쥬스하나와 스포츠 음료 하나를 사서 베낭에 넣고 버스에 올라
5분만에 덕릉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마치고 불암산 올라가는 계단에 오른다.
덕릉고개 맞은편에 있는 예비군 동원사단의 모습
불암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참으로 오랫만에 와본다.
벌써 한 5년이 다되어 가는가 보다. 반달이 아우와 5산종주이후 처음이니...
이곳은 미끄러운 마사토와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암릉 조망대에서 로프를 타고 암릉을 내려간다.
돌산 약수터 갈림길(08:05)
수락산과 서울 외곽고속도로 그리고 당고개역이 있는 상계동의 모습
석장봉(08:15)
정상의 넓은 공터에는 노점상이 점령을 하고 있고 다람쥐 광장으로 가는 길이 있다.
벤치에는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람 한점없는 날씨탓인지 벌써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시원한 물한모금 마시고 정상으로 향한다.
석장봉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모습
예전에는 정상에 올라가려면 상당히 힘이 들었는데 오랫만에 와보니
데크목 계단으로 시설을 해놔서 상당히 편하게 정상으로 오른다.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과 서울 동북부 지역의 모습
정상아래에 있는 쥐바위의 모습
불암산의 웅비
불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퇴계원과 구리시의 모습
불암산 정상 삼각점(△성동 24 1994 재설)
불암산(佛岩山:508m:08:30)
서울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쳐 있으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산이다. 불암(佛岩)이란 이름은 산의 형태 즉
정상부분이 부처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고
송낙(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스님들이 쓰는 모자)을 쓴 부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었던 산이라고 한다.
어느날 불암산은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남산이 되고싶어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불암산 자리에 도착하여 보니 한양에는 이미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불암산은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었기에
금강산으로 되돌아 갈 돌아갈 작정으로 뒤돌아서서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한번 떠난 금강산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현재 보는것과 같이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이다.
불암산 남면은 치마를 두른 듯하다 하여 치마바위라고도 하며, 하늘에서 내린 보배라
하여 천보산(天寶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필암산(筆巖山) 이라고도한다
서울시 경계에 위치한 5개 산 가운데 가장 낮은 산이다. 상계동과 남양주시를 잇는
덕릉고개를 사이에 두고 수락산(638m)과 마주보고 있는데, 이 산이 갖는 이름 그대로 바위산을
이루고 있다. 또 산 이름이 불교적인 느낌을 주듯이 산자락 곳곳에 사찰이 많다.
불암산의 대표적인 사찰은 정상에서 동남쪽 산기슭에 있는 불암사다.
▲ 송낙(松蘿笠 송라립). 승려가 평상시에 납의와 함께 쓰는 모자,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좌). 단원풍속도첩 / 점괘(우) ⓒ자료사진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불암산은 재주남사십리(在州南四十里: 불곡산 아래 양주읍치에서 남쪽 40리에 있다)라고 했다.
지금은 노원구와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 있다. 불암산(佛岩山)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분명치 않은데
‘민족문화대백과’에는 정상의 모습이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 같아서 불암산이라 했다고 한다.
송낙이란 송라립(松蘿笠: 소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松蘿)로 만든 사갓(笠))의
일상적 표현어로 여승들이 주로 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불암산 정상바위는 송라립과 많이 닮았다.
옛사람들에게는 흔히 보던 일상의 물건이었으니 쉽게 그런 이름을 떠올렸으리라.
1구간에 지나온 수락지맥 능선들
불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불암사의 모습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인 봉선사의 말사로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위치하고 있다. 824년(신라 헌덕왕 16년)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조인
지선(智詵)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지선선사 출생연도가
824년이므로 지증대사 창건설이 더 믿을만하다.
도선(道詵 827~898)과 자초(自超1327~1405)대사가 중창을 하였으며
조선 세조(1450~1468 재위)가 한양 외부 사방에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사찰이었다
이러한 불암사는 조선 세조 때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원찰을 정할 때
서 진관(진관사), 남 삼막(삼막사), 북 승가(승가사)와 함께 동 불암(불암사)으로 꼽혔던 곳이다.
그만큼 불암사가 호국안민의 기도도량으로서의 사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3년전에 산사음악회에 초청을 받아서 가본적이 있다.
일면스님의 맏상좌이신 석봉스님이 한달에 한번씩 모임에 회원이라서
가봤는데 꽤나 규모가 큰 사찰이다.
일면이 회주로 계시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최근에
접한 소식으론 많이 좋아졌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가야할 422봉이 보이고...
정상에서 급경사의 데크목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거북바위(08:40)
청솔무 한놈이 재빨리 먹을것을 낚아채서 도망을 간다.
깔닥고개(08:45)
깔닥고개에서 곧바로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422봉(H:08:55)
정상에는 헬기장과 함께 구급약품통이 있고 이곳도 어김없이 노점상이 있다.
바로 아래에는 불암산성 터의 흔적이 있으며 휴게용 벤치가 있다.
이곳에서 가운데 길인 공릉동 방향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상당히 헷갈린다.
이곳에서 가운데 길로 내려가야 한다.
불암산성 터
불암산성은 불암산 주봉(높이 507m)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위의 제2주봉(높이 422m)
꼭대기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산성(山城)으로서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산97번지․
산104번지와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산101-1번지에 접해 있다.
성(城)은 평탄한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자연지형을 따라 쌓였으며 전체적으로 원형에
가까운 5각형 형태로 되어 있고 성의 전체 둘레는 약 236m,성 내부 면적은 약 5,321.8㎡이다.
현재 성벽은 등산로로 사용되면서 곳곳이 허물어졌지만 성벽 서쪽과 동쪽 부분은
10단(段) 이상이 비교적 양호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불암산성은 2004년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고 인근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 일대 보루군’과는 축성기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벽석은 세로가 긴 편이고, 면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후 줄을 맞추어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으며, 뒷 채움돌은 길쭉한 돌을 길이 방향으로 놓아 면석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했으며 이와 같은 방식은 신라 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성문 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정상부 북동쪽
아랫단에는 우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축 구조물이 있다.
또한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는 성 안의 북동쪽에는 집수시설(集水施設)로
추정되는 직경 8m 정도의 원형 함몰부가 있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곳과 경사면 일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무문토기류(無紋土器類 : 무늬없는 토기류)와
삼국시대~통일신라 시기의 토기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적의 성격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이나, 성이 위치한 입지환경과
축성기법,성 안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이 산성은 7C께 신라가 당시
서울 지역으로 진출했을때 한강유역 방어를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산성 축성 이전인 청동기시대부터
주거유적이나 간단한 방어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병 약수터 갈림길(09:00)
이곳에서 직진으로 내려서는 공릉동 방향으로 3.5km를 계속 내려간다.
잠시후에 천보사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마사토의 미끄러운 길은 계속되고
주위에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많은 등산객들로 인해서 뿌리들이 노출되어 있다
멋진 바위도 보인다. 더운 날씨탓인지 아니면 휴가철이라 그런지
등산객은 그리 많지않아 보인다. 띠엄띠엄 사람들을 만난다.
학도암 갈림길(09:15)
공릉동 방향으로 계속 지맥길을 이어간다.
247봉 정자(09:18)
노원고개(09:20)
효성APT 3km← 방향으로 계속해서 길을 이어간다.
노원고개를 지나니 맨발길이란 표지판이 붙어있고 이곳부터는
사람들이 아예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중게동 방향으로 많이 다니는 모양이다.
삼육대 갈림길(09:23)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삼육대학교 1.2km← 방향으로 내려간다.
데크목 목책으로 따라 내려가니 초록색 펜스가 나오고...
불암산 둘레길 이정목 지나니...
좌측으로 지나온 불암산이 보인다.
한참을 내려가니 등산로가 막혀 버렸고 펜스의 문이 열린 삼육대 생태, 경관지역으로
들어서니 우측 이동식 화장실이 있고 계속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삼육대 생태. 경관 보전지역 안내판
계속해서 길을 따라 내려가니 제명호가 나온다.
삼육대 제명호(09:40)
제명호 표시석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제명은 이재명(james M Lee) 목사의 한국어 이름이다.
그는 1912년 부친이 선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평안남도 순안 의명학교에서 태어났다.
평생 한국의 재림교회 교육을 위해 봉사한 그는1947년 현재의 삼육대학교
부지를 마련하는 일을 비롯하여 당시 삼육신학원 원장을 역임하며 학교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특별히 1953년 그의 교섭으로 미군장비가 동원되어 이 호수가 만들어졌으므로
이 호수는 그의 이름을 따서 제명호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호수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호수안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많다.
호수의 좌측을 돌아서 삼육대 교정으로 향한다. 이 대학 한가운데로
수락지맥길이 관통을 하고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조건 막는게 아니라
개방을 하여 산꾼을 다니게 한 점이 다른곳과는 다르다.
호숫가 산책길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부부가 걷는다.
부인이 중풍을 맞았는지 다리가 부자연스러운데 남편이
계속해서 왕복으로 걷게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표시석을 끼고 좌측으로 내려온다. 조금을 걸으니 삼육대 교정이 나온다.
삼육대학교 교정(09:50)
삼육대학교는 1906년 10월 10일에 현재의 평안 순안국제비행장터인
평안남도 순안에서 의명학교(義明學校)란 교명으로 출발했다.
이 이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라"라
(말 4:2)는 성경말씀의 "의로운 해(태양)"(義明)에서 유래했다. 성경에서 "의로운 해"는 그
리스도를 상징하고 삼육교육의 기독교적 사명과 이상을 가리킨다.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1906년 10월 10일에 개교한 이래 본 대학은 일제 강점의
민족수난, 동족상잔, 그리고 산업화의 긴 세월동안 민족계몽과 교육 근대화의 횃불이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기도 했고 학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던 최태현 목사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순교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전 캠퍼스 절대 금주와 금연, 지.덕(영).체의 전인교육, 그리고 청교도적
정신을 가르치는 작고도 알찬 고유한 대학이다.(삼육대학교 설립 이념에서 발췌)
교정에서 5분정도의 휴식을 취한후에 좌측의 도로를 따라서
사회교육원을 거쳐서 후문으로 향한다.
삼육대학교 후문(10:00)
후문을 지나 상가에 들려서 시원한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고 다시 길을 걷는다.
상가를 거쳐 도로를 나오니 이곳은 예전에 비해 완전히 상전벽(桑田碧海) 된 느낌이다.
예전엔 이곳은 먹골배로 유명한 배밭이 전부이다시피한 곳이고 태능갈비로 유명하여
갈비집이 즐비한 곳이었건만 배밭은 온데간데 없고 별내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 정취는 전혀 느낄수가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간다.
이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서 구리시 갈매동의 경계이다.
조금을 올라가니 탐터 삼거리에 허참이네 갈비집이 나오고
이곳에서 신호등을 건너서 탐터 추어탕집 앞으로 간다.
담터고개(10:15)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과 구리시 갈매동 그리고 서울 노원구 공릉동이 맞닫는 곳이다.
바로 좌측 아래에 있는 구리시 갈매동에 있는 마을 이름이 담터마을인데 ‘담터’란
작은 야산이 담을 쌓은듯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기(墻基)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담터의 한문 표기로 부르는 말이다.
옛날에는 담터마을로 불리다가 일제시대에는 양주군 노원면 장기리로 불리웠고
해방이후에 다시 담터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건널목을 건너서 담터고개 추어탕집에 들려서 양해를 구하고 정수기에서
물 한통을 보충한다. 날씨가 덥기는 덥다. 이제 2시간 30분정도 산행을
했는데 1.8L짜리 생수를 한 통을 다 먹었으니... 그래도 중간중간 편의점이
있어서 오늘은 25L짜리 베낭을 메고 가볍게 산행을 한다.
추어탕 주인은 물을 주면서 다음엔 물 얻어러 오질말고 식사를 하러 오란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추어탕집 골목을 지나서 갈비집이 나오고
갈비집 마당을 거쳐서 담터마을로 내려간다.
이곳 담터마을은 시골마을이나 지금은 마을 주택보다도 중,소형공장과
물류창고들이 점령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곳은 길을 잘못들면 迷路처럼 힘든다.
그 와중에서도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지맥 시그널은 오늘 처음 본다.
대흥수츨포장이란 이정표를 따라 내려가니...
대흥수출포장과 (주) 제일경금속 공장을 지나 골목으로 내려간다.
페어유리 가공공장을 지나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쓰레기장을 지나니...
구 경춘선 철길(10:25)
유리공장을 지나 옛날 경춘선이 지나가는 철길이 나온다.
철길에는 레일과 침목은 철거되고 자갈만이 예전에 철길임을 알려준다.
철길을 건너니 넓은 개활지가 나타난다.
개활지를 지나니 가건물로 지은 주택이 나오고 좌측으로 한봉 벌통이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올라서니 태릉C.C 담장이 나오고 담장을 따라 걷는다.
정자에 모기장을 쳐놓은 곳을 지난다. 좌측에는 옥수수, 호박등을 심은 밭이 나오고...
철조망을 따라가는데 또다시 정자가 나타난다.
골프장도 더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라운딩하는 골퍼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골프장 철책선을 계속 따라가다가 좌측 비닐하우스를 보고 펜스와
이별을 하고 좌측으로 내려서니 토종닭과 개, 오리등을 키우는
농장이 나타나는데 사나운 개가 금방이라도 물듯이 달려든다.
비닐하우스를 지나서 나오니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과
서울 공릉동을 잇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2차선 도로(10:55)
2차선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가는데 아스팔트 복사열로 인해서 얼굴이 익는 느낌이다.
구리 갈매 우체국(11:03)
이 도로는 각종 건축자재상들과 가설재 자재 창고들이 많이 보인다.
구리 갈매농협이 보이고 이윽고 우체국이 나타나며 좌측으로는 꽤나
큰 규모인 137봉 아래에 보현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태릉 골프장 후문과 복지 주유소를 지나서 바다 장어탕 간판을 보면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태릉과 갈매동을 잇는 47번 국도가 나타난다.
중앙선 철길을 넘어서서 47번 국도를 만난다.
47번 국도에서 바라본 구리시 갈매동의 모습
새우개 고개(11:10)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자연마을인 새고개 마을에서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가 새우등처럼 굽어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새우골고개라 하였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도로를 건너서 우측 S.K 주유소 옆 우측 절개지로 올라선다.
절개지로 올라서면 배밭이 나타나고 좌측에는 보현사가 있다.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니 137봉 삼각점이 나타난다.
137봉 삼각점(11:20)
정상에 도착하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137봉 삼각점이 나타나고
삼거리가 나온다. 등로가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꽤나 많이 걸려있다. 무척이나 반갑다.
시그널을 따라 내려서니 내후동 안부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다시 고도를 높혀서 올라가니 또다른 삼각점이 나타난다.
171.5봉(11:35)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과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이 봉우리 아래에 동구릉이 있다고 했어 구능산(九陵山)이라고도 부른다.
정상에는 4등삼각점(△성동441 1994 재설)이 자리잡고 있다.
구능산 정상에서 조금 지나니 동구릉 펜스가 나오고 펜스를 따라 우측으로 진행한다.
조선왕릉은 2009년도 UNESCO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왕조는 유교라는 통치 이념하에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를 여겼던 왕조이다. 그러한 왕조 아래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가장 잘 드러낸 문화 양식이 바로 왕릉이다.
세계 어느나라에도 이렇듯 한 왕조의 왕과 왕비의 능이 훼손되지 않고 제자리에
온전하게 보전된 나라는 없다고 한다.
조선 왕조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 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루러진
공간으로 500년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왕릉이 아닌 조선 왕족의 무덤은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며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세자와 왕세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은 ‘원’ 그 외 왕족의 무덤은 ‘묘’라고 부른다.
이곳(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에는 9개의 왕릉이 있다.
건원릉(조선 제1대 태조의 능)
헌릉(조선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목릉(조선 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와 계비 인목왕후의 능)
휘릉(조선 제16대 인조와 게비 장렬왕후의 능)
숭릉(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혜릉(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능)
원릉(조선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경릉(조선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수릉(추존문조와 신정왕후의 능)
건원릉의 모습
건원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서 조선 왕릉의 제도의 표본이라고 볼수 있다.
기본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잔디를 심지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덮어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의 국왕과 왕비 등 왕실의 무덤은 ‘궁궐에서 백 리를 넘어서지 않게 한다’는 왕실의 규범집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모두 현재의 서울 외곽지역과 경기도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단, 폐왕되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 단종의 능인 장릉만이 강원도 영월에 자리한다).
서울의 북동 쪽에 위치한 동구릉은 이름 그대로 아홉 개의 왕릉이 모여 있는
최대 규모의 조선시대 왕릉 집단 군락이다.
검악산 자락의 명당에 위치하는 이곳은 조선의 1대 왕인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시작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
21대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 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신정왕후의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의 경릉까지 이어진다. 동구릉의 이름도 모셔지는 능의
개수에 따라 동오릉, 동칠릉으로 바뀌어오다 철종 대 익종의 수릉을 마지막으로
모시며 현재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世界文化遺産 朝鮮王陵의 10가지 秘密 | ||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들여다본다.
2. 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동아일보 윤완준 기자 2009.06.29 |
동구릉 펜스가 끝나자마자 57동원사단사령부 철조망을 타고 내려간다.
북부간선도로(11:50)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과 서울 중랑구 태릉을 잇는 북부간선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도로 양쪽으로 55사단과 57사단이 자리를 잡고 있고 이곳이 원래 망우리고개라고 한다.
도로가 가운데 광고판에 가려진 방호벽이 있고 지맥길이 도로로 인해 끊기는 바람에
군부대가 있는 좌측으로 이어간다.
옛 망우리 고개(?)
태조께서 동구릉 일대를 유택으로 정하고 근심을 잊었다는 뜻으로 망우(忘憂)고개라 부르게 되었고,임오군란때에 민비가 궁녀복으로 변장하여 이 길로 충주로 피난했다는 일화를 적고 있다. 아울러
옛 망우고개는 여기인데 나중에 1킬로 남쪽에 새 길을 내면서 그곳이 망우리고개로 불리웠다고 한다.
북부간선도로 건너 철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수락지맥길이다.
57사단 버스 정류소앞
이곳 버스 정류장에서 57사단 정문이 나오고 차량이 다니는 육교가 나온다
이곳에서 육교를 거너지 않고 우측으로 꺽어져 간선도로 갓길로 내려간다.
57사단 정문
원래 이 부대는 불암산 아래인 덕릉고개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
내가 제대하고 첫 동원훈련을 불암산 아래에 있을 때 57사단에서 받은 기억이 난다.
북부간선도로를 따라 갓길을 타고 걸어가는데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뭐가 아쉬워 이 더운데 이 짓거리를 하는지...
지난주 1대간 9정맥을 축하해주기 위해 보구곶리로 온 친구넘이 하는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다리를 건너면 우측 절개지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곳은 보금자리 아파트
짓느라고 가림막을 쳐놓아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는다.
겨우 틈을 찾아 들어가니 그 아래는 상당히 높은 콘크리트 옹벽으로 된
담이 나와서 다시 한참을 올라가서 겨우 바닥으로 내려선다
굴다리 아래로 들어가니 연세드신 어르신 3분이 시원한 곳에서 쉬시면서
이 더운데 왜 다니냐고 하면서 보냉병에 있는 시원한 물을 주는데 연거푸
3잔을 마시고 나니 조금은 살 것만 같다. 다시 절개지를 올라서 도로로 향한다.
도로로 올라오니 한강 수도물 정수장이 나오고 원래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철조망을 막아논데다가 돼지풀을 비롯한 잡풀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다.
하는 수없이 도로를 따라가다 정수장에서 우측으로 우회해서 올라간다.
정수장 헨스를 따라 올라가니 우측에 동래 정씨 묘지가 나오고 좌측으로 등로를 이어간다.
등로에 올라가니 용도페기된 구조물이 나오고 이곳에서 군부대 철책선을 따라간다.
군부대 철책선을 타고 올라가니 초소가 나타나고...
초소를 지나니 우측으로 잣나무들이 꽤나 많이 보이고 좌측에는 군법당도 보인다.
군부대 철책선이 끝나니 이번엔 사유지 철조망이 나타난다.
한동안 철조망을 계속 따라가니까 저 건너에 망우리 공동묘지가 보인다.
가야할 망우리 공동묘지와 망우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오니 수많은 묘지가 나타나고 NO 06이라는
특이한 삼각점이 들깨밭 가운데 있다.
삼각점을 지나와 우측으로 꺽어지니 극락사 가는 길이 나오고 도로가에느
커다란 화물차들이 많이 서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망우리 고개를 통과하는
6번 국도가 나타난다.
망우리(忘憂里) 고개(12:40)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경계를 하는 고개로
서울과 강원도를 잇는 경강 6번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서울시립
망우리 공동묘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 역사의 애환의 한페이지를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망우리의 유래
조선의 태조가 나이가 들자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무척 고민을 많이하게 되었다
태조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왕가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묘지를 잘 골라야겠다고
생각하고 유명한 지관을 불러 명당을 찾으라고 명령했고 좋다는 곳은 자신이
직접 가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지관이 아차산의 기슭인 지금의 동구릉에
태조를 모시고 갔다. 태조는 기쁘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대궐로 돌아오다가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서 쉬었는데 멀리 명당자리인 아차산의 기슭을 내려다
보면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근심을 잊었다”는
뜻에서 망우리(忘憂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망우리 고개는 역사의 숱한 애환을 담고 있다. 태조의 장례행렬이 지나갔고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장지인 금곡까지 갈 때도 이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가 이 고개를 넘어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봉록미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민비를 시해하려고
창덕궁으로 몰려 들었을 때 민비는 상궁옷을 입고 상궁 가마에 올라 대궐을
빠져나와 동대문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난을 피했다.
광나루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도 가진 돈이없자 민비가 끼고있던 금반지를
빼주어서 배삯을 대신했다고 한다
도로에서 내려와 좌측 구리쪽으로 가다가 해태상이 있는 곳 도로 가운데
중앙분리대에 약간 틈이 있는곳을 보고 차량의 흐름을 파악한 후에
무단횡단을 감행한다.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해태상을
따라 서울쪽으로 내려가다가 좌측 망우리 공동묘지 입구로 들어선다.
6번도로에서 망우리 공동묘지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데 너무 더워서 정말 미치겠더라. 15분동안 이를 악물고 걸었다.
망우리 공동묘지 주차장(12:55)
오늘 벌써 물만 1.8L짜리 2통을 비운다. 아침에 집에서 가져온 물을 다 먹고
탐터고개 추어탕집에 보충한 물을 다 먹고 이곳에서 또 1.8L를 보충한 다음에
이곳에서 집에서 가져온 미숫가루와 주차장 자판기에서 뽑은 시원한 캔커피로
점심을 대신한다. 더워도 너무 더우니 먹는것 자체가 귀찮기만 하다
망우리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좌측으로 올라서다가 양쪽 포장도로를
벗어나서 공동묘지 가운데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이곳은 생각보다도 묘지관리는 엉망으로 되어있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고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소이다.
요즘 民草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오... 산다는 거 참으로 힘드오.
이곳도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묘지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가보다.
능선에 올라서니 한강너머로 남한산성과 검단산, 저멀리 예봉산이
시원스럽게 조망이 된다.
산불감시초소(13:30)
산불감시초소에서 둘레길을 따라서 편하게 걸어간다.
좌측으로는 한강을 비롯하여 남한산성 등이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서 둘레길을 걸어가는데 천재작가 이인성의 묘지가 나타난다.
망우산3보루(13:35)
보루(堡壘)란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쌓은 구축물을 말한다.
고구려는 삼국중 가장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고구려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길림성과 요녕성을 포함하는 요동지방(요하의 동쪽)및 한반도중남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영토화함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가진 제국을 완성하였다.
영토 확장 과정에서 고구려는 수, 당을 포함하는 중국의 여러 세력과 맞서
국토를 국건히 지켜냄으로써 '한반도 고대사의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을 포함하여 멀리 서여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과 교류를 통하여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호수'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호방한 고구려 문화는 백제와 신라에도 전해져 우리 문화의 원형을 이루었다.
고구려의 문화는 이웃 일본에도 전해졌으며 , 멸망 후 고구려의 문물과 제도는
한편으로 신라와 발해에 그대로 계승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의 여러 집단들에게도 전해져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호방한 문화를 창조하여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여 민족의 위상을 뽐냈던 고구려는 고려로,
그리고 지금의 코리아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고구려사는 주변국에 의해 왜곡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망우산(忘憂山:281m:13:38)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망우산 2보루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보루의 훼손이 심한 곳이다.
망우산의 유래는 1394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놓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을 물색하게 했다.
양주 검암산 기슭, 지금의 동구릉(東九陵) 내 건원릉(健元陵) 자리에 신후지지
(身後之地, 사후에 자신이 묻힐 명당)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고개에
이르러 멀리 자기의 능터를 굽어보던 태조가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於斯吾憂忘矣)” 했다
하여 이 고개를 망우(忘憂, 근심을 잊음) 고개, 또는 망우리 고개라 불렀다.
옛날 태조가 넘던 고개가 있는 망우산이 오늘날 묘지공원이 되었으니 예언이나 한 듯하다.
망우산에는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다. 총면적 60만여평에 33만여기의 분묘가 있다.
공동묘지 지정은 1933년 경기도 임야 일부를 경성부에서 양도받아 묘지로 사용하면서부터.
91년 서울시가 중랑구로부터 인수한 망우묘지는 이미 73년부터 포화상태로
더 이상 묘지 구하기가 어렵다
망우산 삼각점(△성동311 1994 복구)
망우산 2보루를 지나서 묘지사이로 난 등로를 따라 걸어간다.
묘지에서 내려서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사각정자가 나타난다.
사각정자(13:45)
사각정자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 비포장도로로 접어든다.
아차산일대 보루군 안내판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재난방송 대피 시스템 시설을 지나서 용마산 표시판 쪽으로 간다.
산불감시초소가 나타나고 약간의 그늘진 길을 걸으니 조금은 더위가 가시는 느낌이다.
잠시후에 데크목이 설치된 망우산 제1보루가 나타난다.
망우산 제1보루(280.3m:13:55)
망우산 보루중에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망우산 끝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용마산 보루와 시루봉 보루가 조망된다.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 여러개가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로 추정된다
제1보루에서 내려오니 등로 아래에 막걸리 파는 노점이 있다
이곳에서 막걸리 한사발을 시켜 마시는데 너무 맛이 좋아서
연거푸 2잔을 마시고 또 한잔을 더 시키는데 아~글씨 벌 한마리가
막걸리 사발에 빠진다. 살생하지 말지어다... 건져내니 금방 날아가 버린다.
아치울 갈림길(14:20)
막걸리 3잔을 연거푸 마시고나니 허기진 배가 든든하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아치울 갈림길이 나온다.
←아치울 마을 →사가정역 이정표에서 용마산 방향으로 향한다
안부에는 ‘둘레길’과 ‘보루연결로’를 설명하는 표식이 있고
용마산 5보루를 향한 데크목 계단길이 이어지는데 좀 지루한 느낌이다.
데크목 중간 중간에 조망처를 만들어 놨는데 저 멀리 축령산과 천마산과
팔당과 덕소 적갑산과 예봉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루한 데크목 계단길은 이어지고...총 계단수가 343개란다.
우측으로는 서울의 상징인 남산과 관악산, 구룡산,
그리고 범여 동네의 뒷산인 대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계단위로 올라서니 편안한 능선 안부가 나타난다.
용마산 5보루(316m:14:40)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분포
서울과 고구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차산은 용마봉과 망우산 주변 산지를
포함하고 있다.
아차산 동쪽으로 왕숙현 , 서쪽으로 중량천이 남쪽의 한강으로 흘러 들고 있어 육로
교통은 물론, 수로 교통에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한다.
또한 해발 285m의 아차산은 그리 높은 산지는 아니지만, 충적 평야지대와
한강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어 주변 지역을 살피는데 있어서 최상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차산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입지도
이러한 지리적,지형적 이 점을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차산 일원에는 모두 21개소의 보루가 분포하고 있는데, 이중 7개의 보루가
발굴되었거나 조사 진행중이며 , 2004년에는 17개소의 보루가 국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입지에 따라
한강변의 보루와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로 구분된다.
한강변 보루들은 한강 이남과 한강의 수로를 감시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배치된 것이며,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는 중량천의 왕숙천변을 방어하기 위하여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을 더 지나가니 돌탑봉이 나타난다.
용마산 2헬기장(316m)
이곳 용마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너무 많은 느낌이다.
보루의 흔적이 있는 곳마다 헬기장을 만들어 논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헬기가 마을버스로 착각을 하시나... 봉우리마다 내리게.
H - 3지점(14:50)
이곳에서 수락지맥은 이 이정표에서 좌측 아차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용마산을 보지않고 갈 수 없어서 500m 정도
떨어진 용마산으로 향한다. 난 서울에 40여년을 살았지만 아차산,
용마산은 난생 처음으로 와보는 곳이다
이곳 산에는 헬기장보다도 더 많은게 막걸리 장사이다.
봉우리마다 막걸리와 칡즙 장사들이 진을 치고있어
이곳은 지갑만 가져와도 될듯한 산이지만 유적지인 이곳에
너무 심한 느낌이다. 술취한 등산객들이 꽤나많아서 보기엔 좀 그렇다.
용마산 가는길에 또다시 헬기장을 만나고...
망우리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거라곤 묘지와 막걸리 장수, 헬기장 뿐이다.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에 있는 긴고랑길 사이로 서울시내가 보이고...
용마산 제3헬기장을 지나니 운동시설이 있는 광장이 나오고 좌측으로
아차산 능선을 바라보면서 용마산 정상으로 오른다.
용마산(龍馬山:348m:15:05)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중곡동에 걸쳐 있는 산이며,높이는 348m이고 장군봉이라고도 한다.
아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아차산과 함께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한북정맥의 끝을 이룬다.
예전에는 아차산을 포함해 남행산이라고도 불렀다.
예로부터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 유적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아차산과 용마봉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
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다.
산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버렸으며 그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용마산 정상에는 1등 대삼각점이 있다. 이곳에 들린 다음에 다시 긴고랑갈림길을
가기 위해서 500m정도 되돌아가 H-3지점까지를 가야 한다.
용마산 정상의 모습
용마산에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하면서 주위를 조망하고 다시 아차산을
가기 위하여 H -3 이정표까지 되돌아 간다. 내려오는 길에 아까 데크목
계단에서부터 쫄랑쫄랑 따라오던 여인이 의자에 누워 자기 자신을 셀카로 찍고있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헬기장이 또다시 나오고...
가야할 아차산 능선이 보이고 그 너머로 길동 뒷산인 일자산과 남한산성도 조망된다.
Again H - 3지점(15:40)
이곳에서 우측 갈림길로 내려선다. 주위에는 예쁜 소나무가 있다.
아차산 정상인 아차산 4보루가 보인다.
데크목을 따라서 편안하게 내려서니 긴고랑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부터는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긴고랑 갈림길(15:50)
용마산과 아차산 사이에 있는 계곡이 상당히 깊고 길게 보인다
그래서 긴고랑길이라 이름이 붙혀진 모양이다. 중곡동으로 가는 길이다.
수락지맥길은 아차산4보루 쪽으로 향한다.
직진을 하여 올라서니 41번 송전탑이 나오고 아차산 4보루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다른 보루에서는 볼 수없는 성곽처럼 쌓아서 복원을 해놨다. 이곳이 아차산 정상이란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阿且山 一帶 堡壘群] : 서울특별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및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유적지. 2004년 10월 27일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보루성이라고도 불리는 보루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을 말한다.
아차산(阿嵯山:287m:15:35)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아끼산·아키산·에께산·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기지(京畿誌)》 '양주조'에
보면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그밖에 산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 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온달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오는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짜리 공기돌바위와
온달샘 등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아차산은 예로부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려 때는 광나루와 함께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으며, 은석사(銀石寺)·범굴사(梵窟寺)·영화사(永華寺)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일대가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하였으며,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임금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근대 이후 산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고, 뛰어난 조망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세워졌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고, 산자락에 주택가와 쉐라톤워커힐호텔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는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250여 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아차산성(사적 234), 아차산 봉수대지(서울기념물 15),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화사(永華寺) 등이 있다. 그밖에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보루 유적이 있고,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 외에 석곽분, 다비터, 강신샘 등 유적이 많다. 구리시 아치울에서는 해마다
온달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아차산 정상에서 바라본 구리시
구리(九里)라는 명칭은 1914년 3월 1일 부, 군, 면 페합 때 부령(府令) 제 111호로
당시에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과 구지면(九旨面) 그리고 노해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구지면의 ‘구’자와 망우리면의 ‘리’자를 합하여 구리면(九里面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현 구리시의 옛 명칭은 구지(龜旨,九旨)였다. 그 구지(龜旨)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1530년
조선 중기인데 그 이전의 책에서는 구지라는 명칭을 찾을 수 없다.
한편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는 '구지(九旨)'라 표기되어 있다. 즉 '구지'의
한자 표기는 '구지(龜旨)'가 일반적이었지만 '구지(九旨)'라는 표기도 아울러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구지'의 어원을 살펴보면 육지가 강이나 바다로 돌출한 지역을
'곶'이라 하는데 구리지역은 한강과 왕산내로 둘러싸인 곶으로 볼 수 있다. 곶이 고지로, 고지가
구지로 변하여 이에 해당하는 소리를 한자로 '구지(龜旨)', '구지(九旨)'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울 강동구의 모습
아차산 정상인 아차산 4보루는 유적지를 완전히 유원지처럼 해놨다
이곳에서는 한강을 비롯하여 주위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외부의 성관과 건물을 비롯한 내부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의 성벽은 주변에서 구하기 용이한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는데,
아차산 4보루처럼 치석을 하여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비교적 정교하게
축조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치석되지 않은 석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보루내부의 시설물로는 지상 건물과 저수지 시설, 배수 시설등이 일반적이나
그 외에도 보루의 특징에 따라 여러가지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아차산 4보루와 용마루 2보루의 경우 건물지 외곽에 간이 대장간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철기류에 대한 간단한 수리 정도는 직접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유물들
고구려 초소 요즘에 내무반에 해당하는 건물지 유적
우연히 발견된 평지의 가매장 흔적, 주거 흔적 등을 통해 백제 유적이겠거니 했다가
산에서 유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며 전형적인 고구려 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색이 붉고 고구려 형식의 토기들, 그리고 그릇보다 더 많이 나오는 창, 화살촉, 칼 도끼 철퇴,
투구(투구 정수리 부분의 복발) 등의 무기류가 많이 나옴으로써 이곳이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군사 관련 시설, 그것도 능선을 따라 산성을 지키는 초소의 흔적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등자나 갑옷 등이 나오면서 중무장 기병들 즉 고구려 최정예부대를 포함한 고구려군이
이 보루성에서 근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아차산 보루의 고구려군들은 소대, 중대, 대대의 부대 체제를 갖추고 운영되고 있었으며
보병, 기병, 궁병 등이 전술적으로 소대를 이루고 그 위에 중대 그 위에 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는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초소안에 물을 길어다 놓고 썼으며 쓰고 남은 오폐수는 별도의 배수구를 만들어 배출했다.
그리고 식량은 거의 자급 자족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간단한 농기구로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아차산성 보루들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따로 방을 만들고 온돌 시설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그 당시에도 지휘관은
예우를 해주었던 것을 알 수 있고 각 보루마다 취사장이 있고 끼니마다 밥을 지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 산성 등에는 가끔 탄화미라고 해서 산능선의 유적에서
불탄 볍씨들이 발견되어서 이런 추측에 사실감을 더한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한강
고구려군의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장군이었을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이라는 허울 좋은
지위보다 대장군으로서 존경을 받았을 테고 그가 이렇게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다 전사한 것은 고구려 군의 사기를 많이 꺾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온달은 평온왕, 그리고 온달이 죽은 해 왕이 된 영양왕 등에게 큰 죄를 지은 몸이니
사실 그 시체를 가지고 평양성으로 가져 오기엔 뭐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단양의 온달산성에
그를 묻었다느니, 아단성에서 죽은 그의 주검을 옮기는데 너무 억울한 마음이 남아 있던지 관이
움직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길에 무덤을 썼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단양영춘면에서 발견된 적석유구지는 무덤은 아니었던 것으로 발굴 결과가 나왔다.
과연 온달은 이 아차산 어디 아니 산 아래 저 북쪽 어디쯤에 묻혀 있는 것일까?
이곳은 남한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구려 유적지의 寶庫이다.
그런데 이 지역의 지자체는 안내 표지판은 열심히 잘해놨건만
관리수준은 완전히 낙제이다. 이곳 아차산 3보루에는 문화재
조사할 예정이라 이렇게 철제 울타리를 쳐놨건만 아무도 우회길을
가지 않고 철조망을 넘어서 다니건만 누구하나 제재하는 사람이 없다.
제3보루 능선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길이 반질반질하다.
용마산 정상의 모습
광진구에서 조성한 명품소나무라는 이정표를 세워놓고 광진구에서
홍보를 하고 있는데 워낙 오지 산행을 한 범여로서는 이건 명품
소나무가 아니라 분재처럼 보인다. 울진이나 문경의 소나무를 봐야
명품 소나무가 어떤걸 알텐데 ㅋㅋㅋ
아차산5보루(16:15)
이곳 5보루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출토 되었다고 한다.
5보루 정상에는 돌탑이 있고 한강과 함께 서울동부지역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아차산 1보루(16:25)
이곳 아차산 1보루에는 고려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하며
아차산성이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아차산 1보루에서는 올림픽대교와 함께 강동구와 송파구가 시원하게 보인다.
해맞이 광장(16:30)
아차산의 유래 표지판
고구려정(16:35)
등로에서 약간 벗어난 고구려정에 들렸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
낙타고개(16:40)
대부분의 등산객은 이곳에서 아차산역이 있는 우측으로 내려간다.
수락지맥 길은 직진하여 아차산성으로 이어진다.
아차산성(16:45)
아단성·장한성·광장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아차산성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누가 축조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삼국시대 한강 일대를 빼앗기 위해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승패에 따라
이 성의 주인이 백제에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성이 축조된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등 두 문자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아차산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추억되는 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평강공주'와의 사랑으로 고구려의
'용장'이 된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전투 중 이곳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온달장군이 목을 축였다는 온달샘과 고구려의 '산성 안의 산성'인 '보루'의 흔적도 대부분 남아 있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까닭에 백제 초기부터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축조된
아차산성은 둘레의 길이가 약 1㎞, 평균 높이는 약 10m에 이른다. 험하지 않은 등산로를
오르면 서울시내와 멀리 성남의 남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고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광을 즐길 수 있어 걷기와 산행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475년 하남 위례성을 빼앗고 백제는 완전히 물러갔지만 고구려는 동맹 관계이던
신라와 이 한강 유역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 평온왕 때 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을 신라에게 빼앗긴 바 있는데 이를 되찾도록 온달 장군을 보냈는데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그가 아차성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온달 장군은 이 곳 아차성에서 죽었으며 온달 장군의 고토 회복 임무는
완수되지 못하고 신라군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게 된다.
백제가 475년까지 그리고 고구려가 590년까지 그리고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돌아가며
차지하고 한강을 차지한 나라가 5세기, 6세기, 7세기의 패자로 군림한다는 것은
한강 유역이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는가를 새삼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아차산성은 5세기말부터 6세기 후반까지 고구려 전성기의 패권국가로서 백제와 신라를
위압했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지나 더 남쪽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고 백제를 위축시키고
신라를 조공을 받으며 신라의 내정 간섭이나 왕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는
등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지나침을 모자람만 못한 법, 신라와 고구려는
사이가 안좋아지고 결국 아차산성의 보루가 무너지고 신라군이 아차산을 점령해 버린 후
668년 패망하기까지 한번도 다시는 이 한강 지역에 패권을 온전히 되찾지는 못한 듯하다
아차산성에서 생태공원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차산 생태공원(16:55)
생태공원을 빠져 나오니 영화사 가는 길이 나오고 도로에서 데크목
가운데 계단으로 내려가니 광장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
영화사 가는 길
영화사(永華寺)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인 아차산 영화사는
서기 672년(신라 31대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였으며 화양사(華陽寺)라 하였다.
그후 1395년 용마산 기슭 군자봉에 옮겼다가 190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영화사라 하였다.
현재의 사찰 모습을 갖춘 것은 중창의 원력을 세우신 태공월주 대화상에 의하여 1997년 완성되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일체중생의 고통을 대자대비로 구제하여
주시는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오른편에는 지옥중생을 구제하여 주시는 지장보살을 모셨다.
영화사가는 좌측 길 가운데로 내려간다.
광장초등학교(17:05)
광장초등학교를 지나 광장중학교, 광장동 천주교회를 지나 광나루역으로 향한다.
광나루역(17:20)
정말 무더워서 산행하기가 힘이들었다.
그래도 수락지맥을 2구간에 걸쳐서 마무리하고 이곳 광나루역에서 스틱을 접는다
역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시원한 콩국수 한그릇과 맥주 2병을 마신 다음에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대충 씻은 다음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광나루의 유래를 보면
광진(광나루, 너븐나루)은 광장동에 있던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으로 상고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조에는 이곳에 수참을 설치하여 한강의 조운로를 관리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좌수참을 두고 강원, 충청, 경기 등지에서 서울로 오는 세곡의 운송관리와
범죄자 등의 출입을 감시하였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집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도 많아져 더욱
번성하다가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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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휴,,생각만해도 끔직한 날씨에 그늘도 별로 없는 지맥길을 걸어시느라 고생 무지하게 하셨겠습니다,,옆에 분들이 하는말이 맞는것 같네요..ㅎㅎ 이제 고만. 좀 가벼운 산행하시면서 쉬세요..근데 수락지맥끝이 광나루역인가요??용마산옆으로 중랑천으로 떨어지는것 아닌가??ㅎㅎ
나도 용마산에서 떨어져 중랑천에 떨어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수락지맥지도나
선답자들의 산행기는 전부 광나루역까지로 되어 있어 그리 했습니다
그런데가 어디 한두군데인가요. 금남정맥길도 장항앞바다가 아닌 백마강 구드레 나루이고
한북정맥도 오두산을 거쳐 임진강으로 가지않고 장명산 곡릉천이죠.
또 낙남정맥은 어떤가요 용지봉에서 불모산을 거쳐 남해바다가 아닌 김해 신어산을
거쳐 낙동강 하구에 떨어지니... 돌쇠대장이 나서서 개혁을 함 해야겠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