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 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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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전개
구약성경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에 반해 본서는 이방 국가와 그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본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이 한 국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적용됨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1:1~2:10에는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바다에 던지는 요나,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회개하고 살아나는 요나의 모습과 그리고 3:1~4;11은 니느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또한 모든 이들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며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을 요나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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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핵심 사항
제목 :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저자의 이름을 반영하고 있다.
저자 : 요나서 속에는 언제, 누가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왕하 14:25)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그는 갈릴리 출신으로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45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던 가드헤벨에 살던 자로서 북왕국의 선지자로 활약했다.
기록연대 : 요나는 엘리사 시대 다음에, 그리고 아모스와 호세아 시대 직전, 곧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B.C.782~753)때 활동했다.
그리고 니느웨의 회개는 앗수르의 아슈르단 3(B.C.773~755)의 통치 때에 있었던 사건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본서의 기록 연대는 B.C.760년 경이다(요나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왕하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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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동기 :
이 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을 포함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본질에 관해 교훈하여 준다.
즉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편협한 배타적 민족주의가 그들의 눈을 가려 이방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함을 책망함으로서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하여 기록되어진 책이다. 특히 물고기 뱃속에서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요나가 이방 민족과 백성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은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그리스도가 3일 만에 부활을 통해 승리의 복음을 온 인류에게 전파한 사실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요나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적으로 증거 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1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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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특징: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종교적, 도덕적 우월감과 특권 의식이 잘나타나 있다.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메시야를 통해 세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스라엘의 특수한 사명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회개의 기도만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피 할 수 있음을 교훈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심판과 회개를 선포함으로서 이방 민족들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원 계획을 보여 주고 있는 본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1) 하나님 계획의 실현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통해 반드시 실현되어 진다. 따라서 어떤 인간적인 고집이나 변명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주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변경시키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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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한 국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다. 그분은 결코 어느 특정한 그룹에 의해 배타적으로 소유 당하기를 허락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한 것이라는 점이 이를 실증해 준다.
(3) 이방을 위한 선교 사역
하나님은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당신의 종들의 선교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의 사도행전을 통해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4) 보편적인 구원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해서 당신께 불순종한 요나마저도 용서하셨고 지금도 어떤 죄인이든지 회개하고 돌이키면 모두 용서해 받아들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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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용 분해
A. 요나의 불순종(1:1~2:10)
a. 소명 받은 요나 / 1:1,2
b. 요나의 도피 / 1:3~5
c. 요나에 대한 징벌 / 1:6~17
d. 요나의 회개 / 2:1~10
B. 요나의 각성(3:1~4:11)
a. 요나의 선교와 니느웨의 회개 / 3:1~10
b. 요나의 불평 / 4:1~3
c. 요나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 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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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요나서는 어떤 말씀인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1:1~3)
요나서는 구약 소선지서 중 다섯 번째 책으로, 다른 선지서에 비하면 니느웨성이 40일 만에 멸망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교훈이 주를 이루는 말씀이다. 즉 요나의 생애 중 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기록함으로서 예수의 모형을 제시하였고, 또 장래 이방 전도의 예표가 되기도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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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요나는 어떤 인물인가?
요나서의 저자는 요나 선지자로 그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이요 아밋대의 아들이다(1:1). 아밋대는 진실이라는 뜻으로 그는 가드헤벨 사람이었다(왕하14:25). 가드헤벨은 이스라엘이 기업지를 나눌 때 스불론 지파가 차지한 지역으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 지점의 곳이다.
요나 선지자에 대한 요나서 이외의 기록은 신약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의 모형으로 말씀하셨고(마12:39~40 ; 16:4 ; 눅11:29~30), 구약에서는 유일하게 왕하 14:25~27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 왕하 14:25~27 : 여기 나오는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2세로 B.C.793~753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다. 요나 선지자는 이 여로보암 2세 앞에서 이스라엘 영토가 하맛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확장될 것을 말했고, 이스라엘의 고난당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의 손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예언하였다. 여로보암이 비록 악행을 자행한 왕이었으나 요나를 통해 예언한대로 성취하셨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요나 선지자는 호세아, 아모스와 같은 시대에 북조 이스라엘에서 예언의 활동을 한 선지자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니느웨로 보냄을 받았고 요나서는 이러한 요나의 니느웨 사역을 다루고 있다.)
2.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부름을 받을 때의 연대와 기대적 상황
요나 선지자가 활약한 시대는 북조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793~753)의 치세 중엽이었다. 이때 북조 이스라엘은 황금시대였다. 그 영토가 하맛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되었으니 이는 솔로몬 시대의 판도와 같은 것이었다(왕하14:25 ; 왕상 8:65). 이 여로보암 2세는 그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다메섹도 완전히 속국으로 삼았고, 또 하사엘이 주관하던 트렌스 요르단 전체를 그 수중에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은 팔레스틴 영역을 넘어서 주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강국이 되었다(호13:1). 이스라엘이 이렇게 크게 강화된 이유는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다음과 같은 국제 정세가 전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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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을 늘 괴롭게 하던 하사엘의 요르단과 벤하닷 2세의 다메섹(아람)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심히 약해졌다.
(2) 또한 앗수르가 다메섹 공격 후 북방의 새로운 세력인 우라르트를 막기 위해 골몰했던 때이다(성경에서는 우라르트를 아라랏이라 칭함 : 왕하19:37 ; 사37:38 ; 렘51:27).
(3) 여로보암 2세는 여로보암 1세가 범한 악은 떠나지 못했으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던 유능한 지도자였다. 이렇게 번영을 누린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것인데, 오히려 나라가 점점 부패해지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 그들을 책망하고 깨우쳐 주셨다. 한편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성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지만, 역사적 배경은 우라르트의 공격과 기원전 765~759년 큰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763년 6월 15일 달이 완전히 없어지는 큰 월식이 있어 요나 선지자가 외친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에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입은 연대는 기원전 764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요나서를 기록한 연대를 자체 내에서는 측정할 수 없으나 요나가 니느웨에서 돌아온 즉시 기원전 76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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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나서의 해석상 문제들
구약의 모든 선지서들은 갈보리로 가는 길에 놓인 이정표이므로 선지서들은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한다.
요나서는 다른 선지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또 하나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끌어내는 형식을 지닌 독특한 예언서이다. 이런 독특성 중에서 요나가 사흘을 밤낮 물고기 뱃속에서 지낸 일은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부활의 예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선지서의 본래의 목적인 주님의 사역과 연관 지어 보면 별 문제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비 신앙인의 사고에서는 요나서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요나서를 해석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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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적 해석법
요나서를 실제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신화나 전설로 보며 요나 또한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전설적인 사람으로 보려는 것이다. 요나를 삼킨 물고기도 전설에 나오는 바다의 공룡 또는 바다의 괴물로 보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이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2) 풍유적 해석법
풍유란 수사법 중 비유법의 한가지로 원 관념을 숨기고 보조 관념만 드러내어 그 숨은 것을 넌지시 나타내는 표현법으로, 우리말에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라는 말과 같은 표현 방법이다.
풍유법으로 요나서를 보는 자들은 요나의 이름의 뜻이 비둘기라면 호세아의 글에는 어리석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비둘기(호세아 7:11 ; 11:11)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요나는 불순종한 어리석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그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풍유적 상징이라고 했다. “바렐론왕 느브갓네살이 용 같이 이스라엘을 삼켜....... 그 배를 채우리라”(렘51:34~35). 그러나 다시 “제 삼일에 일으키리라”(호6:2)고 하였기에, 요나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회복을 상징하는 풍유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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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유적 해석법
요나서의 특징은 포로기 이후 에스라, 느헤미야의 배타적 유대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니느웨성은 복음에 대한 각성을 기다리는 비유 대상적 세계를 나타낸다. 이 비유는 죄를 회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풍유와 비유적 해석법은 성경적인 것 같고 그럴듯하게 여겨지나 하나님의 근본적 의도에서 이탈하여 본말이 전도되는 위험성이 있는 해석법이다. 어떤 경우에는 신화적 해석 방법보다 더욱 위험성이 있다. 총회 신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따라야 한다.
(4) 역사적 해석 방법
요나서는 어떤 신화나 비유적으로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아밋대의 아들로 역사적 인물인 요나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다. 요나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A. 사람이 고기의 뱃속에서 밤낮 3일간 있을 수 없고, 또 그러한 큰 고기가 있을 없다.
B. 니느웨 성의 크기와(3:3), 인구들에 대한 의심(4:11)
C. 그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회개한 점이다.
D. 박 넝쿨이 너무 빨리 자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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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한 답변에는 본문을 주해하면서 차례에 따라 할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네 명의 선지자들을 주로 언급하셨으니 엘리야(마17:11~17), 엘리사(눅4:27), 이사야(마15:17), 요나(마12:41 ; 눅11:32)이다. 구약 성경에서 요나의 사역을 말하였고(왕하14:25~27), 주님께서 직접 그 이름을 부르시고 그 사역의 의미를 말씀하셨다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요나서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드릴 것이요, 요나를 역사적 인물로 믿어야 할 것이다.
4. 요나서의 주요 내용은 어떤 것인가?
요나서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선지자의 첫 소명과 그의 불순종(1~2장)
소명을 받고 도피했던 선지자가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이방인의 손에 의하여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 기록(1장)과, 깊은 바다의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바라는 기도와 감사의 노래가 있다(2장).
A. 소명, 도피(1:1~3).
B. 풍랑과 선지자의 고백, 바다에 던짐(1:4~17).
C. 물고기의 뱃속에서의 기도와 구원의 감사(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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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지자의 두 번째 소명과 그의 순종(3~4장)
선지자의 설교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3장), 니느웨 성의 구원을 본 선지자의 불평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있다(4장).
A. 선지자의 설교(3:1~4)
B.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3:5~10)
C. 선지자의 불평(4:1~8)
D. 하나님의 답변(4:9~11)
요나서의 사상적 전개를 보면 매우 체계적이다. 내용이 바뀔 때마다 큰 위기가 있고 또 그 위기의 해결이 뒤 따른다. 그 위기의 근원은 언제나 인간의 죄악과 불순종이며 그 위기의 해결은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폭풍 속에서 깊은 바다 속에서(2:6), 물고기 뱃속에서(2:10) 드디어 영원한 파멸 중에서(3:10)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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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나를 통해서 주신 메시지의 특징
요나서 메시지의 3대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을 각성시키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민족들에게도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시하는데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에게도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은혜와 그 구원의 복음은 이스라엘 영토를 넘어서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 되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요....... 모든 족속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하셨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복음을 자기 민족에게만 가두려 하였다. 요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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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함이다.
요나의 전도 사역은 이스라엘의 완악상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된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 한 사람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였으나,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를 보내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의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니라”고 하셨다(마12:41).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오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서는 이스라엘이 니느웨보다 더 완악함을 보여주는 교훈이요 경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요나를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만 위하여 보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보낸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여호와의 종교를 알게 되었기에 후에 이스라엘이 그들의 범죄의 결과로 그들에게 잡혀 갔을지라도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호2:14~15).
오늘날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포로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많은 성공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만일 니느웨가 요나의 설교를 듣지 못하여 회개치 않고 우상의 나라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이스라엘의 포로들은 더 많은 환난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앞서 애굽에 보내 후일에 이스라엘을 살게 했던 것 같이 요나를 니느웨로 먼저 보내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준비케 하셨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요나가 예표하려는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상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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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나 선지자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다.
구속사적 측면에서 선지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시하고 예고하는 이정표로 본다면, 요나 선지자의 체험은 장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방 모든 민족에게 큰 구원이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요나의 설교는 구속사의 위대한 사건 중 하나이다. 우리 주님께서 표적을 구한 바리새인들과 대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밝히셨으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1)고 하셨다.
요나는 선원들의 손에 의하여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그 소식을 들은 선원들과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죽은 자 가운데서 죄인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되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기적적으로 살았는지(사실은 살았지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온 사실 자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 같은 생명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을 선포한 것이다.
요나의 선교 행위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사실을 예언한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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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예표한 것으로 자기 백성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예언한 것이다.
B. 죄인을 위해 몸소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구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예언이다.
요나서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나가 스올(바다, 죽음) 깊은 곳에 던져졌으나 살아나온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의 예증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 손을 뻗히심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영광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베풀어지는 생명이요, 곧 영생이며, 신약에 와서 완전히 계시 속에서 볼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할렐루야!
6.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선지자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1)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신다. 지나간 역사의 한 시점에서 요나 한 개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대하면서 이 말씀이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는 인물은 이스라엘 역사상 존재했던 사람이요 그 사람의 행위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역대지략(궁중일기)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다. 기록된 말씀의 내용이 믿음 없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설화(전설이나 신화, 혹은 비유)로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이는 분명히 역사적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글이 쓰여진 연대와 쓴 사람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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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성읍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2). 우리는 2절 말씀을 먼저 선교적인 차원에서 살펴보자. “일어나”, “가서”, “외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주신 전도라는 지상명령을 가장 실감있게 묘사해 주고 있는 단어들이다. 오늘 안일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지금부터 여로보암 2세때 선지자 요나에게 임한 선교 명령을 살펴보자.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것이다. 이 명령이 임한 때의 상황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건국이래 가장 번영을 누리며, 국토를 확장하고 국력이 신장되어 있을 때요, 그 니느웨성은 정국이 가장 불안할 때이다. 선지자 요나가 앗수르 수도 니느웨 성보다 조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성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할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는 일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 성읍은 당대 가장 크고 강한 나라의 수도이며,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성의 둘레가 145Km정도요, 인구는 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유아가 12만명 정도가 되므로(4:11) 총 인구는 상당히 많은 지극히 큰 성읍이다(3:3).
이 도시를 요나의 선교지로 지정하시고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 악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멸망시킬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인간들의 기도와 호소만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말, 악한 행위까지도 상달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상달되었고(창13:10), 소돔과 고모라의 악한 행위도 상달되었을 뿐 아니라(창18:21), 인간의 악한 마음과 생각과 계획까지도 보신다고 하셨다(창6:5). 하나님 앞에는 그 누구의 죄악도 반드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심판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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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나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귀한 교훈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징벌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기에 앞서 자비의 하나님이시오 예고하신 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면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시는 데에 자신을 심부름꾼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순종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3)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는 생각은 요나의 심령이 어두워진 증거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 함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한다. 이것을 법률학에서는 불능법이라 한다. 범죄 행위에는 착수하였으나 실행이 전혀 불가능한 범죄이다. 시편 139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에 어디를 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니느웨로 가려면 육로로 북상해야 하나 남으로 내려와 욥바로 왔으며, 거기서 다시 다시스(스페인)로 가는 배를 만나 배삯을 주고 올라 탔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 할 수 있는 자가 왜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거칠게 거부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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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지식은 너무나도 편협하여 유대인들의 지방신으로 여겨 성전을 떠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시오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소유하시고 거기에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B.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판이 임박할 정도로 사악한 도시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나라요, 범죄의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종이 이스라엘에서는 대접을 받고 존경받는 직위이지만 그곳에서는 냉대를 받고 핍박을 받는 직업이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면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한다고 예언하면 핍박을 받는데, 어찌 적국의 수도에서 그러한 망국적인 말씀을 선포하다가 살아 남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C. 그 모든 것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이다. 그러기에 이 나라는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멸망시켜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에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그것을 전하라 말씀하시니 어찌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때가 차면 망하면 되지 그들에게 무슨 전도인가? 이것은 흔히 있는 성도들의 태도이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전도나 회개를 촉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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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자기 중심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기 유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니느웨성에 가서 멸시와 핍박을 받고 더 나아가 죽게 된다 하여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라면 제일 값진 일이 아닌가? 내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이상 그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너무 강했다.
b. 극단적인 국수주의자이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자기 민족을 통해서 온 천하 만민에게 영광을 받으시려고 그들을 택했으니 그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였다. 그래서 그 속마음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원수의 나라를 쳐부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주어라고 하시니 가당치 않은 말씀으로 알고 이를 거부하였다.
c.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에스겔서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고 하시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선지자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악인이 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마음은 정치인이나 검사같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선지자란 직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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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말씀의 교훈
a. 요나의 불순종은 그 사실 자체가 잘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지혜로운 결정이요 가장 애국적인 행동이다. 그 무엇을 걸고 넘어지지 말자. 결과는 오히려 의도한 바와 반대의 현당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b. 요나의 다시스로 가는 길은 형통하게 열렸었다.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이 매우 순조로울 때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돌리지 말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나 반드시 징계의 손을 높이 드신다. 좁은 길로 가면서 자신은 쇠하더라도 주님만 흥해야 한다는 신앙으로 나가야 한다. 그 때 나와 우리의 주변 모든 사람은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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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론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소위 신념이 굳은 사람으로 니느웨만은 결코 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까지도 자기의 철학이나 경험에 포함시키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편하고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의 뜻이라면 그 어떠한 경우도 제 생각을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준비하면서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인생을 결산할 때 후자가 자기 뜻을 가장 많이 펴고 산 사람이요, 전자는 계속 질질 끌려 사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쓰시기를 기뻐하시고 그 뜻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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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 어리석은 도피는 징계를 초래한다(1:4~10).
요나서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읽고, 듣고, 상고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를 보게 된다. 온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각각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각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존재들이기에 내가 귀한 만큼 다른 사람도 모두 귀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나서를 읽고 있노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넓은 구속의 목적을 요나로 하여금 그의 신앙을 모두에게 나누어 갖게 하고자 하시는 반면, 요나는 편협하고 복수심이 불타고 있으며, 민족주의적이고 극심하게 배타적인 사람이어서 이를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큰 이적을 베푸사 요나를 깨닫게 하시나 그의 온전한 답을 듣지 못한 채, 요나서가 끝이 난다. [요나서의 끝맺음은 선지 생들의 몫이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선지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경륜을 알리는 이정표라는 관점에서 요나서는 선지서 가운데 가장 신약에 가까운 말씀으로 주님께서 요나를 큰 물고기 속에 3일 동안 갇혀 있게 하심은 십자가에 달리심과 그 부활사이에 겪을 자신의 일을 예시하기 위한 것이다. 요나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과 비교했던 구약성경의 예언자였으며, 예수의 부활과 관련되어서 특히 그러하였다(마12:39~41 ; 눅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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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서를 주신 3대 목적
(1) 하나님 백성들을 각성시키는데 있다.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각성하고 회개하였다면, 요나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가버나움(마11:20~24) 사람들과 오늘날 우리들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만약 회개가 없다면 심판 때 그들이 우리를 정죄하게 된다.
(2)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요나에게 이방인 선교를 명령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웃과 주변 국가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3) 요나서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시하는 것이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 나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 것이요, 요나가 큰 물고기 속에서 나온 뒤에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서 전도하여 큰 구원을 이룬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방민족에게 큰 구원이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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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4~10절 말씀의 중심사상
(1)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자신의 죄를 깨우치도록 폭풍을 일으키셨다. 그 때 왜 동일한 위험 가운데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시는 것인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지혜로 측량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심판하심을 통해 다른 사람을 겸손케 하신다. 요나와 선원들에게 내려진 폭풍의 징계는 완전히 공의로우실 뿐 아니라 은혜와 사랑의 목적까지 드러내 주신 일이다.
(2) 거짓된 믿음과 마비된 양심은 일시적 평안을 줄 수 있고,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신을 찾으며 갑자기 종교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의 기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성도의 회개와 기도함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이 때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이방인을 통해서 바른 신앙을 촉구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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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죄를 지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드러나게 하신다. 그 때 자기 죄를 들추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며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고 부끄러운 위치에서라도 하나님을 바로 소개하게 된다. 사명지인 니느웨로 갔었다면 이런 낭패를 경험하지 않았겠으나, 사명을 떠나 다시스로 갔었기에 이러한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상과 같은 귀한 의미를 지닌 요나가 어리석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징계 받은 역사적 사실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상고하여 보자.
1. 하나님을 떠나면 태풍으로 추적해 오신다(4~6).
하나님의 사람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받고도 자기의 개성과 정의감에 도취되어 도망쳤다. 그는 고향 가드헤벨에서 욥바 항구까지 60마일을 걸어서 갔다. 욥바에 가자 니느웨와는 너무 먼 다시스(스페인)로 가는 배를 만나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다. 그리고 배가 출항하자 갑판 아래 조용한 장소를 찾아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요나는 멀리 떠났고 하나님께서는 가는 길을 막지 않으셨다. 그는 도망치는데 일단 성공하였고 멀리 갈 수록 좋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놓아두신 것을 비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출타하셨거나 잠드셔서 요나가 하나님의 감시망을 일단 벗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자신의 계획과 목적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시려고 잠깐 동안 방임하신 것뿐이다. 죄를 지은 것으로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비웃는 듯 살아가는 세월이 10년, 20년, 50년, 3대까지 이어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상 정의에 무관심하시다고 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롬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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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가 안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폭풍을 몰고 오시어 도망자를 저지하시고(4~6), 밝히 드러내시고(7~10), 그를 바다에 던져버리게 하시고(11~16),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시게 하신다(2:1~10).
하나님이 섭리하신 역사를 보면,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4) 하나님께서는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신다(시104:4).
하나님께서는 죄인(그릇 행하는 자)을 회개시키기 위해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대리로 고용해 사용하신다. 여기에는 바람을 비롯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의 쓰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또 4절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세 가지 모습을 보게 된다.
(1) 요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의 출생, 성장과정, 지금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하는지 모르시는 것이 없다. 요나가 씨름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안다고 하실 때, 사람들이 귀찮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의 밤을 만나 본 사람, 고독한 밤을 지새워 본 사람에게는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것” 이상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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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다.
요나는 어리석게도 가라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스로 가면 여호와의 낯을 피할 줄 알았지만, 하늘과 음부와 바다 끝의 어디를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셔서 인도하신다(시 139:8~10).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줄 알게 될 때 범죄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지만, 그의 백성에게는 연약해질 때마다 주시는 큰 축복이요 영광이 된다.
(3)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태풍을 거느리고 오시어 도망하는 요나를 추적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자연의 주인이시오 그분의 바다에 숨어있는 것은 결국 그분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다. 불법한 자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두려움이 되지만 주안에 있는 자에게는 큰 힘이 된다.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5)는 말씀에서 어리석은 두 계층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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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공들
이들은 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였는데, 첫째 각각 그 신에게 기도하였으나 무지나 미신은 순수한 감정들 속에 스며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없는 사공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종교적으로 변하여 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던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경건 생활의 동기가 될 수 있고, 시작이 될 수 있으나 본질은 될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다. 둘째는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안에 있는 물건을 다 바다에 던졌다. 생명과 비교할 때 세상 소유물들은 얼마나 가치 없는 것들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의 항해의 목적은 배 안에 있는 물건을 사고 팔아 이득을 얻는데 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없는 바다에 던졌다. 사공들의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치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이 풍랑으로부터 구조 받기를 원했다.
* 태평스럽게 잠자는 요나
급히 도망친 요나는 심한 피곤으로 깊이 잠들 수 있었고 이제는 안전하다고 스스로 속은 거짓된 믿음으로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요나를 보고 있노라면 거짓된 평안과 마비된 양심도 때로는 잠시나마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때의 요나는 육신적인 잠뿐만 아니라 영적인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요나가 내려간 단계를 보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욥바로 내려갔고(1~3), 다시스로 내려가려고 배에 내려갔고(한국어 성경은 배에 올랐더라) 계속 배 밑층으로 내려갔다(1:5, 2:6).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자는 계속 내려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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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선장은 경험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폭풍이요 신이 돕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갈 가망성이 없는 폭풍으로 인식했다. 하나님은 선장을 사자로 삼아 요나의 영육간의 잠을 깨우시고 요나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요나에 비해 도덕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재난은 요나 때문에 왔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재난은 신자(요나)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도 어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이러한 잠은 죽음의 잠이다. 요나는 잠들기 전에 잠을 잘 수 없는 괴로움이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다시스로 출발할 때 가슴이 두근거려 양심을 마비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이 진정되고, 긴장이 풀리자 그 밖의 요란함도 의식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잠이 들었다. 양심을 마비시켜 놓고 잠을 청한 2,800년 전의 요나와 오늘날의 성도들의 평화는 진실로 거짓된 평화이다. 이 때 깊은 잠에 잠겨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선장의 입을 통해 외치고 계신다.
잠자는 학우들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며 하나님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가면서 잠자는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나)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끈질기게 추적하심은 하나님의 두려운 사역이 아니요 사랑과 은혜의 사역이다. 오늘도 주님이 찾아오시어 도망가는 자여, 자는 자여, 어찌된 일이냐고 하실 때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 앞에 나아와 나를 향하신 주의 뜻에 순종하는 사역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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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은 도망자를 발각되게 하신다(7~10).
그 당시 유대인 사회나 이방인 사회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이었던 제비뽑기를 통해 진부를 가리자고 제안하였다(7). 7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리적 사실을 확인하고 가자.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 데는 꿈이나 제비 뽑는 것 등이 쓰였다(수7:16~18 ; 삼상10:19~21). 신약에서도 한 번 사도를 보선 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때는 이 방법으로 결정되면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믿고 따라야 했다(잠16:33). 그러나 계시가 완성된 다음에는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성도들을 인도하신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를 드러내어 깨닫게 하신다. 요나는 제비를 뽑아, 발람은 나귀의 입으로, 다윗은 자식을 쳐서, 히스기야는 병으로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시켰다. 요나가 죄인으로 결정되자 무리가 요나를 추궁한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8) 이 질문은 선원들의 질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조직적이며, 요나의 아픈 곳을 찌르는 질문이다. 생업은 선지자, 고향은 가드 헤벨, 고국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히브리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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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답변하기를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9) 여기 히브리인으로 표현함은 이방인과 구별할 때 쓰는 용어로서 강을 건너왔다고 하므로(강을 건너는 사실 때문에 이방인들 사이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음) 자부심을 가지고 한 말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였으나 믿음을 사장시킨 것이 잘못된 선민사상이다(하나님은 자신들과 약속한 땅에서만 활동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음).
또한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그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답변을 통하여 깨닫게 되어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풍랑이나 선장, 선원들이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요나를 추격하여 붙잡고 그 죄를 심문하였으나, 요나는 답변하면서 선지자의 자리로 돌아오고, 선원들은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 받게 된다.
* 요나가 고백한 죄 : 10절에 고백하여 8절의 질문에 답할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고, 불순종자이고, 선교명령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보며, 그 명령을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다 호된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여러분까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함을 털어 놓았다.
* 선원의 반응 : 10절에 폭풍인 자연을 두려워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풍랑은 어떻게 손을 쓰겠으나, 하나님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기도했던 미신은 요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용서의 차원이 아니요 유죄의 성질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벌을 받도록 계속해서 논쟁케 하시고 죄 값을 반드시 받게 하셨다. 이제 요나는 큰 물고기 속에서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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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의 교훈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의 전능성과 사랑의 방법을 부인하고 도망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추격하여 붙잡으시고 죄를 묻고 회개케 하며(잠28:13),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내고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간 요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찾아지게 되었다. 찾아내신 분은 그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고통당하는 자, 구하지 아니하던 자, 찾지 않았던 자까지 찾아 구원해 주신다(사65:1). 요나서가 주신 교훈을 거듭 되새기며 주의 은혜 안에서 바르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제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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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드린 선지자(욘1:11~16).
* 본문 11~16절의 말씀의 중심사상
(1) 선지자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요나는 입술로만이 아니라 행위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돌이켰고,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신에게 내리시는 형벌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2) 요나는 바다의 흉용함이 자기 때문임을 알았다.
솔직한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깨닫도록 인도해 주었다. 이 때 그들은 요나를 죄인으로 볼 수 없고, 요나의 처벌을 주장할 수 없었다(한보 사건의 청문회 대의 부인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남의 죄를 처벌하는데 앞장설 수 없고, 가능한 그를 살리기를 힘쓰나,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처럼 자기 죄는 생각지 않고 남의 처벌만 외치고 남을 처벌하려 든다(눅23:21).
하나님의 뜻이 요나의 처벌임을 분명히 알게 된 그들은 요나의 연고로 고통이 왔다면 이 사람을 바다에 던져 죽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말라고 호소한 후 요나를 던지자 바다는 잔잔하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믿기로 소원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를 예배하는 것과 섬기는 것이 인생의 도리임을 깨닫고 실천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깊은 뜻이 있는 귀한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상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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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에 던지면 잔잔하리라(11,12).
요나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애매한 사람이 죽을 수 없다는 선지자적 양심의 표현이다.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자신의 죄 때문이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예표)이 된 인물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 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다(겔18:4 ; 롬6:23).
죄를 죽음보다 더 미워하고 자기는 죽어야 마땅한 자인 줄 아는데 까지 나아간 것이다. 우리는 요나의 회개 편을 택하였지만 요나도 인간인지라 자기가 죽는다면 니느웨의 죄인들인 원수들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예상할 수 있다.
진정한 회개는 환난과 재앙의 원인이 자기로 인한 것을 깨닫고 자기의 행위에 책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참으로 회개하였다면, 내가 참으로 새로워졌다면, 나의 잘못된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에 합당한 형벌을 달게 받기를 원해야 한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의 법칙을 믿는 성도라면 요나와 같이 자신이 범한 행위에 대해 오늘날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당연함을 깨닫고 그 벌을 달게 받으면서 다시는 그런 유형의 범죄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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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던지기를 두려워하는 사공들(13,14).
(1)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보여 주었다.
요나가 무시한 이방 출신인 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잠잠할 줄 알면서도 그러한 방법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육지에 닿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13절 ; 신19:5 ; 출21:28). 요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다. 그는 평소에 이방인의 생명쯤이야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방인으로부터 생명의 존엄에 대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사람은 그 생명이 개인의 것이라 생각하든지, 대중의 것이라 생각하든지, 언제나, 누구이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의 것임을 믿어야 한다.
특별히 믿는 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생명은 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며(마10:30),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 악한 자의 생명을 사용하시고(사43:4 ; 고전3:21,22 ; 고후4:15), 특히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삼상24:6, 10 ; 26:5, 11, 16, 26). 불순종한 요나이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았기에 바다에 던지기를 두려워하였다.
13절에서 요나가 자신을 던지라고 하면서 죄를 인정하고 희생의 제물이 되고자 취하는 태도가 훌륭하지만 인간 존중의 태도 역시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역행한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적 선행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할 수는 없다. “여호와를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14)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들은 각자가 자기의 신께 기도했지만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요나에게 니느웨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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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상의 이방인들의 태도
a. 사공들은 깊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간절히 “구하고 구하오니” 반복된 간절함은 그 분에게 능력이 있다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b. 하나님의 거룩을 의식하고 기도했다.
만약에 이 사람을 우리가 바다에 던져 그가 죽게 된다면 이 사람의 무죄의 피 값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의 기도는 빌라도의 마음과 같이 무서운 심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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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하나님의 주권에 호소한 기도이었다.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 이다”, 이는 두려운 일이지만 뜻을 따라서 결정하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실행하겠다는 간절한 기도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 경솔한 부분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죄송하고 부끄러운가? 생명을 경시여기는 풍토 속에서 있는 우리들, 불법과 불의라고 생각되는 일도 이익 앞에는 어쩔 수 없이 약한 우리들이지만 이제부터는 나 자신이 좀 더 노력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면, 영육이 사는 길에 들어선다면, 최선을 다해 감당해 나아가자. 사공들은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주권적 통치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하고 생명에 관한 일은 영육 간에 조심하여 행하였다. 요나는 자기가 무시했던 이방인들에게 대접을 받고 바다에 던져졌고 던진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그 배안은 복음화 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성공이나 실패나 예수님 안에 있으면 반드시 기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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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구조되고 구원을 받아서 찬양했다(15,16).
15절을 보면 사공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고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안 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다시스에 가서 선지자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요나이다.
사명이 짜증스럽게 귀찮아 멀리 가버리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추적을 받아 죄가 드러나자 개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의 손에 죽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면 이 세상의 파도에 밀려 시련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때에 요나처럼 자기를 던져야 할 것이다. 어디에 요나가 없는가? 찾지 말고 자기가 요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던져질 때 요나는 준비된 물고기에 들어가고 사공들의 배는 안정을 찾았다. 사공들은 해결을 위해 보물을 던져 보았지만 아무 효력이 없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면 던져 버리지만 그러나 무엇을 던져야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던져야 할 것이다. 요나가 자기를 던지듯이 우리도 문제 해결을 위하여 우리를 던질 때 하나님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요나는 표적을 남기고 사공들은 의심 없이 바다를 잔잔케 하며 종을 엄히 다스리시는 자를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감사제를 드렸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원하였다. 이들은 요나를 던질 때 자기들의 신과 잘못된 삶의 모두를 던져 버렸기 때문에 구원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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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의 뱃사람을 포함하여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섭리를 이루셨다. 십자가에 예수님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시작이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요나도 새로운 시작이요 선원들도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요나의 일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 만큼은 신중히 할 뿐 아니라 과감히 순종해야 할 것이다. 순종하는 사역만이 이 시대 하나님의 역사를 감동해 가는 능력 있는 구속사의 일꾼들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능력을 주시어 승리케 하실 것이다.
요나서 1장에 나타난 요나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되었다(신14:2 ; 겔20:5). 이스라엘도 요나처럼 사명을 받았고(사43:10~12 ; 44:8),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았다(출32:1~4 ; 삿2:11~19 ; 겔6:1~5 ; 막7:6~9).
요나가 이방사람들 사이에 처해 있던 것 같이 이스라엘이 열국에 흩어지게 되었다(신4:27 ; 겔12:5). 요나가 이방인들 사이에 거하였을 때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 같이 이스라엘이 열국 중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안 이방인들이 주님을 알게 된다(롬11:11).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처럼 이스라엘도 수세기에 걸쳐 추방과 유배를 당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았다(호3:3 ; 렘30:11). 이런 의미에서 요나서는 이스라엘의 축소판이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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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1:17~2:4).
이스라엘이 열국 중에 흩어져 시련과 고난을 받을 때에 기도하면 하나님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나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육지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때에 요나가 취한 3가지 행동을 보자.
보호하신 하나님과 기도하는 요나.
확신하며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요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알고 주권을 찬양하는 요나의 모습이다.
이는 기도와 찬양을 받으시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표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역사적 사건을 한 장면으로 보면서 상고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고 더욱 은혜스럽다.
(1) 요나 선지자의 생애가 전환되게 된 계기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극에 달할 때 찾아왔다. 만일 그가 바다에 던지우기 전에 회개치 않았다면 그는 바다 밑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2) 인간은 누구든지 긴박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 구조를 요청해야 하며, 하나님은 들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 하신다는 것이다. 선원들까지도 응답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다.
(3) 타락한 성도가 돌아오는 구체적인 증거는 성전을 바라보고 용서를 받고 예배하고 봉사하겠다는 행위로 시작된다. 오늘날도 예배의 위치를 지키고 몸 된 교회에서 봉사하되 모두를 섬기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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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에서 뱃속으로 이송되어 기도하는 선지자(1:17~2:1).
이는 인간이 주인공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신 구속의 사건이다. 사공들은 그 거친 파도가 잔잔하게 되는 굉장한 기적을 보았으나, 바다 깊은 곳에서는 더 큰 기적이 시작된다. 이 사실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끝까지 버리지 않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인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뿐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죄를 심판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도주 선에서 보호선으로 옮겨 놓으신 것이다. 보호선을 타는 비결은 요나처럼 형량의 감소 없이 그 죄의 대가를 다 치루는 것이다. 요나도 선장에게, 사공들에게, 물고기까지 동원하시어 값을 받으시고 보호도 하신 것이다. 요나는 고기 창자 속에서도 그 곳을 기도의 성전과 부활의 산실로 만들었다. 기도하는 장소는 성경을 보지 않더라도 만이 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그 자리도 기도하는 장소임을 알자.
요나는 위와 같이 기도하는 장소가 적합했고 다음은 시간이 적합했다. 기도란 진지하고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데 요나는 죽음 앞에서, 창자 속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기도는 순종하는 마음에서 해야 한다. 요나의 다시스의 거역과 불평은 기도자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 마음에 주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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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응답을 확신한 요나(2:2,3).
요나 선지자의 기도 내용을 통해 무엇을 가장 빨리 깨닫게 되는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선교를 원하여 명령하셨을 때 요나는 니느웨와 관계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그가 최소한 어느 한 부분, 특히 니느웨 선교라는 문제는 하나님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면서 그것이 깨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지당하신 말씀으로 시인하였고 더 나아가 모든 일이 하나님의 행위라고 고백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과 뜻을 확인하게 되었다. 3일 동안의 물고기 신학대학의 교육의 효과는 차츰 드러났고 요나의 신앙적 성숙도는 더 깊어만 갔다.
(1) 우리도 주변의 일어나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가?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우리의 지혜로운 생각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2) 베드로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앞에 있는 세찬 파도만 보았을 때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도 세상의 파도만 보면 겁이 나 빠지게 된다는 사실과, 어떤 파도가 나를 에워싸고 음부에까지 내려갈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하게 있다면 겁날 것이 없고 그곳에 가서 회복을 믿고 기도하며 찬양하게 된다. 이 믿음이 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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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한 요나(4).
(1)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했기 때문이요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움직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에게 실재화 되었다. 고기 창자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2)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이다. 성전은 희생제물이 드려지고 열납 되는 장소이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은 회개 하는 죄인을 용납하신다. 그가 성전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의 손길을 확인하면서, 성전에 속히 나아가 사죄의 은총을 구하고 공식적으로 용서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3)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기도는 하나님의 개입과 지시를 바란다는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집을 찾을 때마다 신탁을 의뢰하였으며, 인도하심을 간구하였고, 축복을 염원했다. 요나도 하나님의 거처로 마음을 옮겨 간섭을 바라게 되었고 지시를 원했다. 요나는 형편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이었지만 들어주시지 못할 깊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슬픔도, 아픔도, 질병도, 용서받지 못할 죄도 없는 것이다.
요나가 신앙의 사람으로 돌아올 때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성전이었다. 주님의 전을 사모하게 되고 성전의 제사와 교회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타락의 첫걸음이 성전 제사와 교회 예배를 평가절하 시켜 자기와 무관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탈한 부분이 있다면 속히 돌아와 예배하며 섬기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이며 그렇게 할 때에 성장하게 될 것이다. 요나 선지자의 중요한 전환점 앞에 우리 학우들은 무엇을 돌이켜야 할 문제를 찾자. 주의 손을 벗어났다면 속히 주의 사랑에 힘입어 돌아가야 한다. 요나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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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는다(2:5~10).
1. 생명을 보며 믿음으로 기도한 요나(5, 6)
바다에 던져진 뒷이야기는 인간사에서는 더 이상 거론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스 행의 배에서 또 하나의 배로 이송시키셨다. 요나는 하수도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두 개의 문이 있음을 알았다. 정죄로 인한 절망과 회개 기도로 성전을 바라보는 문이 있다. 사공들의 손에서 던져진 요나는 죽었어야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자신을 물고기 뱃속에 감금시키신 목적이 불신과 거역의 길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것이라 믿었다.
기도는 청구서가 아니고 영수증이라는 확신으로 기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육신이 고통을 당하면 남을 원망하나, 요나는 답답한 고기 뱃속을 기도실로 만들어 놓고 육적 고통 못지않게 영적인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을 찾았다. 필사적인 도피 길은 성공하지 못했고 그를 기다리는 곳이 필사의 현장이었다. 죽어야 산다는 진리(롬6:6, 7), 물에 빠진 자의 구조 운동도 익사직전이 가장 좋은 때이다. 영적 재창조도 무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독립을 꿈꾸던 요나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고 자신의 문제를 뜻대로 처리할 수 없다고 자기중심의 삶을 포기했을 때 구조 되었다.
오늘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그 낯을 피하여 자유롭게 다시스(하나님 없는 세상)를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는 자들, 그들도 멀지 않아 필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을 선택할 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요나서는 이를 자기의 길을 포기하도록 쓰여진 책이다. 자력본위의 삶을 살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 될 때 요나의 사건을 보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돌아오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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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며 찬양한 요나(7~9).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눈을 떠보면 동시에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이상을 실현하고 행복을 얻으려는 세상적인 생각이 왜 헛된 것일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밖에서 만족할 수 없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지혜롭고 똑똑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과는 무익한 발상이요 열매 없는 무익한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와 지내는 대신 술친구와 타락되고 창녀의 소굴에서 지냄과 같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좌우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위로를 주는 길이다.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고통의 선두주자가 되며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
이제 요나는 인간의 본연의 자리(자세)를 지키게 된다. 지금 요나의 상황은 9절의 고기 뱃속에 있고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의미로 보면 3일 동안 신학대학에 졸업할 수 있는 학점을 이수하고 있는 중이다. 요나는 평소에 감사가 없었다. 여로보암 2세에게 선지자 대우를 받을 때, 형식적인 제사는 드릴 수 있었으나 입술에는 감사의 언어가 없었고 그 가슴에는 참된 기쁨이 없었다. 그러나 물고기의 창자 속에서 감사의 노래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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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의 방향을 선택했지만 이제는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라고 기도한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선지자로서 그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는가? 이제부터 예배자의 위치를 바로 지키겠다는 고백이다. “사공들까지도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1:10)라고 반문할 정도로 명령을 거부했다. 1:9에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함은 머리에서 나오는 건조한 고백이었지만 이제는 가슴과 영혼으로, 그리고 체험에 찬 새로운 고백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이 자기가 빠져 있는 바다보다 더 깊고 넓은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체험에서 나오는 기도요, 감사와 간증과 찬송이었다. 요나는 이제 더 이상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요(딤전3:5), 이제 내면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능력의 메시지를 가진 선지자요, 탈선한 선지자가 아니다.
요나서를 주신 목적은 우리 모두 요나 같은 경험을 거쳐야 된다는 것보다는 요나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승화시켜 요나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에 있다. 또 요나와 같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도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가슴 속 깊이 감사의 생활을 하면서 주어진 사명을 생동감있게 감당할 수 있는 성도가 되라는 것이다. 구원은 반드시 주께로 말미암아 오고, 믿는 그들은 버릴 수 없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이 시간 이 예배가(요나서를 상고하는 기간이) 요나의 경험을 대신하는 시간이 되어 새로운 요나 선지자의 모습을 주께로부터 받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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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롭게 태어난 사역자(10).
하나님께서 요나가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새로운 자세로 임하자 물고기 신학에 입학시키고 3일 동안 계속 훈련을 통과하여 졸업을 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
(1) 물고기를 명하시매 순종하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비이성적인 물고기는 자기 생활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물고기에게도 당신의 의지를 심으시고, 물고기는 그에 따라 순종하였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지(명령)를 심어 두셨지만 동시에 자유의지와 같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하되 모든 피조물을 보면서 귀감을 삼아야 한다.
(2) 공의를 저버리면 반드시 응징됨이 축복이다.
역사적으로 니느웨를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바르게 순종할 선지자는 요나가 적임자이었다. 그러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요나는 그 귀한 명령을 감당할 능력과 자격도 없었다. 이때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자 사형판결을 집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여 3일 후에 물고기 신학교에서 유자격자로 만드신 것이다. 모세도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고 이스라엘을 구출시키려 보냈다. 오는 우리가 이 지하실의 요나의 처지와 비슷하다. 제 2의 니느웨가 있기에 우리의 훈련이 있다는 영안이 열려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고쳐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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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나의 사건은 주님의 사역을 예표하는 표적이다(마12:38~41 ; 16:1~4 ; 눅11:9~32).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실 때 구약의 예언과, 말씀과 행동으로 보이시고 이적과 기적을 통하여 계시하셨지만 믿음이 없는 시대가 신비한 체험을 요구하자 요나의 표적 밖에(부활과 온성이 복음으로 하나 됨과 이스라엘 제사장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세계적으로 천국복음이 선포됨)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가 사공들의 손에 던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의 값이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은 것은 요나의 부활 뒤에 복음을 받은 것이요, 복음을 받은 사람도 회개치 않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들을 정죄하게 된다(마12:41). 이는 요나보다 더 큰이가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모세와 요나를 훈련시켜 한 시대를 밝히며 사용하심과 같이 오늘도 당신의 주권적인 역사를 위해 아름답게 쓰시고자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원컨대 우리는 쓰시고자 하실 때, 쓰임을 받는 목회자들이 되자. 그리고 요나보다 더 큰 비전을 가지자.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요, 증거가 있다.
복음을 선포하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과 재림을 확실하게 증거하므로 어느 한 지역을 성시화 시킬 수 있는 우리가 되자. 이를 위하여 우리가 신앙의 단순한 고백의 차원을 넘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차원의 신앙을 가지고 요나와 같이 자신이 변화를 받고 이웃도 변화 시키는 목회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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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 새 소명을 순종한 요나(3:1~4).
본문의 중심사상은 요나는 인간을 향하신 긍휼의 표적이요 하나님의 긍휼은 죄를 용서하심과 타락한 자들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하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시며, 도망자도 복직시킴은 인간을 향한 확고한 정의의 표적이다. 두려운 것은 실패가 무서워 불순종한 자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실패가 없어서 다시스 배가 필요 없고 물고기가 필요 없어서 니느웨와 같은 많은 불신자들이 돌이키지 않을까 상고해 보아야 한다. 요나는 육지로 올라온 후,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그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았다. 이방인이라는 휘장이 제거되고, 고난의 한 가운데 서서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다(출16:5,6 ; 사43:10,12). 비로소 요나는 전 세계의 회개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요나서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목적의 표적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지혜 가운데서 세워진다. 인간의 들뜬 기분에 예속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변명과 사과는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일 할 사람에게는 일을 주시며 그 일을 성취할 것을 기대하며 성취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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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나를 재임용한 하나님(1, 2).
요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자기처럼 도에 지나친 불순종한 사람을 복직시킬 것인지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 어떤 일에 큰 해를 끼치거나, 망치거나 실수를 하거나 태만히 하면 책임을 지고 그 직책에서 떠나는 것이 인간사회에서의 법칙이다.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삼 일간 있다가 생명을 부지한 것도 은혜이지만, 살려 주시고 선지자의 자격을 박탈시켰다면 얼마나 불명예스런 은퇴일까? 하나님은 복직해 주시고 같은 사명을 주셨다. 선지자의 반항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목적을 한 치도 움직이게 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시고 지시하신 바는 지금도 역시 변함이 없으시며 이후에도 없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신이 거부했던 곳에 자기 발로 그 위치에서 정확히 순종해야만 했고, 그가 하기 싫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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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살펴보면 “큰 성”이라고 전제한다. 요나가 이 성을 복음으로 점령하기에는 너무도 크기에 역부족이다. 이 성이 인구, 재산, 산업 등이 클 뿐 아니라 죄악도 많은 도시이다. 이 명령을 놓고 이성의 눈과 믿음의 눈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정도이다. 전능자의 눈으로 볼 때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선지자는 자기 능력으로 볼 때에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학우들에게 이 말씀이 임하면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실 때 말씀과 성령을 주시고 앞서 행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이다(하늘의 징조와 소문으로 기초 작업을 하시고 요나에게 선포하게 하심).
하나님은 처음 부르신 자를 끝까지 고쳐 쓰시고(눅15장의 탕자) 한 번 택하신 도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요나를 다시 들어 쓰신 하나님! 니느웨 성을 끝까지 추적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리석고 무익했던 우리들을 한번 부름으로 제한하지 않으시고 요나의 고백처럼 노가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신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신다. 우리의 능력이 모자란다 하여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이 때 우리의 태도는 신실함으로 단순하게 꾸준히 듣든지, 듣지 않든지 전해야 한다. 요나처럼 우리를 다시 쓰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연약하지만 성령님께 의지하여 말씀에 따라 바로 감당하는 목회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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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니느웨로 들어가 복음을 전한 요나(3, 4)
3절을 보면 “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는 말씀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이방나라요 적국의 수도인 니느웨를 위한 선지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실패의 가능성과 신체적인 위협과 이방인들로부터 당하게 될 조롱과 수치를 감수하면서 지체 없이 순종하였다. 요나는 예측할 수 없는 고난도 여호와의 말씀에 의탁한 채, 믿음의 발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얽매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투신한 일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동일하였지만 요나의 자세는 너무도 차이가 있었다. 어제 학교에 나오는 기분과 기대를 가지고 나오지 않는지 살펴보자.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3절下)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와 시작하기 전의 믿음은 별개의 것일 수 있다. 니느웨는 3일 길을 지나야 통과할 수 있는 대도시이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겠다는 믿음과 니느웨의 크기와 웅장함에 압도된 후 그 성에 들어가려는 믿음과는 별개일 수 있다. 우리들의 믿음과 순종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니느웨의 실체를 보기 전에는 그 크기나 깊이가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약속의 땅을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찾아 왔으나, 막상 보고나니 “우리는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자기 비하를 하고 말았다(민13:33). 이들은 큰 성읍만 보았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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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눈앞에 큰 성읍을 보여 주시기전 큰 바다 물결을 보여 주셨고, 자기를 생명의 지장 없이 3일간이나 삼키고 있을 큰 물고기를 보여주신 후 큰 도시를 보여주신 것은 어떤 대형 사물이나 사건보다 더 위대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이다. 이를 본 요나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가?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4)고 전파하였다.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담대히 들어간 것은 순종의 극치이며 믿음의 정상이다. 그는 순종과 믿음의 정상의 상태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외쳤다.
메시지의 내용은 세계 최대의 강국이 40일 후면 무너지리라 외친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따라서 요나의 신변에도 변화가 따른다. 약소국가의 종교인이 단신으로 와서 자신들과 관계가 없는 신의 이름으로 그것도 기분이 좋은 축복이 아니고 40일 후면 멸망한다는 저주를 하니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과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죄로 죽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의치 아니함은 그 모든 위험보다 더 어려운 일이요, 위기의 상황이었던 물고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누가 이러한 위기 중에도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가? 요나는 이번 사역만은 자신의 입장이나 사상을 생각하기 전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는 자세로 결단하고 온전히 투신하였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 그 반응이 좋다고 해서 자찬, 자만에 빠질 수 없고, 반응이 나쁘다고 해서 자책하며 자멸할 수도 없다. 그것은 자기 마음과 자기의 것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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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가? 영적 재수생인 요나에게 두 가지 명령이 있었고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 첫째 명령은 니느웨로 가라는 것이고, 둘째는 명한 바를 선포하라는 것이다. 요나는 이 두 가지 시험을 지난번 낙제한 것 같지 않게 우수하게 통과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각자 어디를 가라고 명령하셨으며, 그 명령을 받고 어디까지 갔으며 가서 무엇을 하라고 명하셨는가? 발이 갔으면 입도 따라 가야 한다.
바울은 분명히 둘 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승리하였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하며 갈 곳을 주저하지 않고 갔으며 전할 말을 서슴없이 핍박 중에도 생명을 걸고 전하였다. 4절에서 “무너지리라(멸하리라)”는 의미는 경고적인 것이나 단정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에 앞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심판의 하나님이시기에 앞서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진실한 회개는 이전에 거역했던 사명을 순종함으로 증명된다. 회개한 선지자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참된 회개를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고쳐야 할 잘못과 징계를 통해 고쳐 놓으신다. 이 때 하나님의 손길에 순종하면 이후 이러한 고통은 없어진다. 오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 말씀과 나의 반응을 통해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어,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점이 발견된다면 요나와 같은 징계 전에 고쳐가는 일꾼들이 되자.
죄를 범하였으나 사함을 받고, 고통을 당해야 했으나 구원을 받았고, 기도함으로 응받을 받아 전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잘 준비된 사람이 되었다. 이 때 그는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친교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도 요나와 같이 옛 것을 벗어버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지도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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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과 :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욘3:5~10).
요나가 기쁨으로 순종했다는 암시는 없으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자세로 임할 때 물고기 뱃속에서 일어났던 기적보다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니느웨 성읍이 얼마나 큰 성읍인가?
고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약 96Km이며, 성벽의 두께가 3대의 병거가 지나갈 정도이고, 1,500개의 망대를 세워 지켰던 성읍이요, 성문은 27개의 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웅장한 궁궐과 각종 시설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인구는 좌우를 분별치 못한 유아들의 숫자가 120,000명 정도요, 전체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리된다. 여기에는 수많은 짐승들과 같이 사는 거대한 도시였다(4:11)
이 큰 도시가 연약한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임금부터 시작하여 미물인 짐승까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를 3장은 가르쳐주고 있다.
* 3장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재차 파송되어 회개를 선포함(1~4).
(2)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남(5~9).
(3)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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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절 말씀의 두 사건을 하나로 상고해 보자.
회개란 성령님의 역사로(행11:18 ; 딤후2:25) 말미암아 기적으로 죄를 분별하고, 감정적으로 죄를 미워하며,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생활(고후7:10,11)이라는 이론을 사실화 시키며 이를 증명하는 말씀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요나의 설교를 듣고 참으로 회개다운 회개를 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면서 사죄의 은총을 간구할 때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죄인들의 회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고 사죄와 구원을 베푸시게 하는 조건의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죄와 구원의 의무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 행위이다. 그 이유는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회개하면서도 “혹시,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는 표현을 쓰는 것은 겸손한 태도요 의심이 섞인 것은 아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요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니느웨 성을 용서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하나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뻐하신다(겔18:23). 이방인들의 회개에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심판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려는 뜻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회개치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짧은 3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모두가 지녀야 할 욕구와 능력이다. 이상과 같은 놀라운 뜻이 담겨 있고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니느웨 성의 회개 운동과 결과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상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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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을 듣고 회개한 백성(5)
요나의 본격적인 전도활동이 시작되었다. 왕은 소문을 들었을 뿐, 왕에게 직접적인 전도 행위는 없었고(6) 주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너희가 지금까지 범한 그 악독(1:2) 특히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8), 때문에 40일이 지나면 멸망 받으리라”(4)고 선언하였다. 이때의 반응은 요나의 예견과는 빗나갔다. 요나와 같은 시대의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죄를 “들으라”로 시작한 4편의 설교와 “보라”로 시작한 5개의 환상으로 지적하며, 당시의 왕인 여로보암 2세는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어 그 땅에서 떠나면 아내들은 창기가 될 것이요,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리라고 예언하자, 거짓 선지자 아마샤가 앞장서서 “너는 유대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 떡이나 먹으며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암7:10~17)고 핍박했다.
이제 이방인이요 악독이 가득한 도시가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5)함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라는 말은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니느웨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며 오직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는 말이다. 그들이 이처럼 믿게 된 것은 요나가 기적적으로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이나 있다가 나온 것이 표적이 되었고(눅11:30), 이로 인해 요나를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믿었으며, 요나를 통해 전한 말씀은 하나님 말씀으로 믿었다.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큰 은혜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배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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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을 선포하고” 금식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고 울부짖는 목소리를 하나님께 상달케 하기 위함이다(사58:3~9). “굵은 베를 입은지라”함은 죄인이 회개할 때의 복장을 말해준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느 지역에 선언되면 첫째는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 얻는 길이 있고, 두 번째는 그 지역을 떠나 심판을 피하려는 자세가 있을 수 있으며, 세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오히려 더 날 뛰며 죄를 증가시키는 모습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므로 구원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진행된 은혜로운 사역이다. 이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을 보자.
(1)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40일의 제한이 있지만 그 기간 내에 회개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재고(유보, 취소) 될 수 있다는 암시를 받고 회개하였다.
(2) 요나가 죄를 범하였으나 그 진노 가운데서 용서 받았다면 자신들도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하고 그 분께로 돌이킬 경우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타락한 선지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회개한 성도도 사해 주실 수 있을 것으로 믿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멸망을 예고하자, 애굽으로 도망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렘4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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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절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회개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니느웨의 이방 백성들을 회개시키셨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체험과 마“금식을 선포하고” 금식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고 울부짖는 목소리를 하나님께 상달케 하기 위함이다(사58:3~9). “굵은 베를 입은지라”함은 죄인이 회개할 때의 복장을 말해준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느 지역에 선언되면 첫째는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 얻는 길이 있고, 두 번째는 그 지역을 떠나 심판을 피하려는 자세가 있을 수 있으며, 세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오히려 더 날 뛰며 죄를 증가시키는 모습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므로 구원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진행된 은혜로운 사역이다. 이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을 보자.
(1)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40일의 제한이 있지만 그 기간 내에 회개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재고(유보, 취소) 될 수 있다는 암시를 받고 회개하였다.
(2) 요나가 죄를 범하였으나 그 진노 가운데서 용서 받았다면 자신들도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하고 그 분께로 돌이킬 경우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타락한 선지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회개한 성도도 사해 주실 수 있을 것으로 믿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멸망을 예고하자, 애굽으로 도망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렘42:13~16).른 땅의 구속이 하나의 매듭으로 연결되었다.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투자가이시다. 주님이 손에 비쳐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5,000명을 풍성히 먹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신 것 같이 요나 한 사람의 재 헌신의 사역이 유아만 12만 명, 전체 인구를 추정해 보면 백만 여명이 되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다. 한 사람의 탈선한 종을 3일간 물고기 뱃속에 가두어 두셨다가 그 종을 새롭게 하여 해변에 토해 내게 하신 하나님, 수백 년간 어두운 스올(음부)의 뱃속에 갇혀 있던 불신 제국의 수도를 구원의 해변에 토해 내셨다. 오늘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자신을 드리면 반드시 많은 결실을 얻게 된다(요12:24). 오늘 나와 교회의 비극은 회개 없는 축복이 강요되고 있는데 있다.
성경은 언제나 축복 이전에 회개를 강조하며 또 교회사에서는 회개의 기반 위에 부흥을 가져왔다. 요나 선지자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성읍이 회개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요나서를 읽고 상고하므로 진정한 회개의 시간(기간)을 가져 보자. 그리하면 이 회개는 믿음 안에서 시작되고 죄로 인한 뉘우침과 고통에서 시작하여 그 파급효과는 그가 속한 공동체와 국가와 교회에까지 긍정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일에 능력 있는 일꾼들이 되자. 참으로 회개한 자가 제일 강한 능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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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앗수르 왕(신으로 대우받음)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다(6~9).
니느웨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요나는 그 큰 도시 어느 곳에서인가 전도를 시작하였다. 분명한 것은 왕궁 가까이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하루를 열심히 다니며 전도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반응은 5절에서처럼 좋았고 그 결과 그 소문이 왕궁까지 들리게 되었다.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6)
고대의 왕들은 백성들에게 신 대접을 받았다. 그러한 왕이 요나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멸망 받는다는 선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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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 니느웨의 왕은 심판의 메시지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세계 초강대국의 왕으로서 주변 약소국 종교 지도자의 충고를 듣고 합당하게 받아들여 그 즉시 자신의 보좌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 보좌에 앉아서 마음대로 다스렸지만 왕중 왕이 오시자 선뜻 그 자리를 비워드렸다. 니느웨 왕이 이때처럼 대 제국의 대왕다운 때는 없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대선자금을 밝히기 위해 담화문을 발표한 대통령은 아들이 사법처리 당함을 이용하면서 오래된 일이요 증거자료가 없어서 밝히지 못한다고 말하고 바로 야당의 공범성과 권력을 이용하여 중대한 결정을 하겠다고 두려움을 주었다. 한총련이 한양대학교에서 발대식을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인데, 참으로 국민을 무시하고(대선에 자신이 있다) 있으니 앗수르 왕이 더욱 커 보인다.
그가 지난날의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던 때나 노련한 행정수완을 발휘했던 때보다 한 없이 능력 있고 지혜롭게 보이는 때이었다.
그는 왕복 대신 베옷을 입었다. 그 찬란한 어의를 굵은 베로 대치하였고, 권위의 상징인 어좌 대신 잿더미 위에 앉게 되었다. 실로 왕은 제국의 왕권을 고스란히 넘겨준 것이다. 그가 굵은 베를 입은 것은 로마 교회 교황처럼 무오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말한 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행한 행동이다. 재에 앉은 것은 자신은 타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죄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왕관을 던질 때에 참된 구속주의 대관을 쓰신 것 같이, 그가 낮은 자리에 내려앉자 하나님의 의가 입혀질 수 있는 최적의 호기를 맞이할 수 있는 복이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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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의 명령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7)
앗수르 왕은 요나 선지자가 회개를 외치자 이에 상응한 선포를 하였다. 왕 자신뿐 아니라 모든 대신들, 그리고 온 백성들, 더 나아가서 짐승들에게까지 금식 령을 내렸다. 유대인들도 국가적으로 백성들에게 금식 령을 내린 적이 있었으나(대하20:3), 짐승에게까지 내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앗수르 왕이 짐승에게까지 금식 령을 내린 것은 사람들이 음식을 전폐하고 회개의 기도에 전념하니 짐승을 돌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니느웨 성안에 있는 짐승들도 성민들이 죽게 될 때 모두 죽게 되는 공동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욜1:17~20). 또한 니느웨가 죄악으로 모두 오염되었으므로(레18:22~28 ; 민35:33) 사람이 금식할 때 그들도 함께 금식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왕의 조서 내용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8)고 하였다. 이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회개란 어떤 것인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 회개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지적으로 죄를 분별하고, 감정적으로 죄를 미워하며,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생활이어야 한다(고후7:10~11). 즉 회개란 죄악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온다는 것이요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가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본문(7~9)은 특히 8절의 말씀은 회개의 보은 상태를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회개의 의식은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음이요, 또 악한 길의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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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에 나타난 회개자의 행동
회개는 울부짖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내가 환난 날에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18: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삿3:9) 라고 하여,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나 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회개는 울부짖음과 동시에 도덕적으로 변화된 삶으로 전환됨이 있어야 한다. 각자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 니느웨는 전체적으로 부패가 심한 도시(국가)였다. 현대어로 말하면 총체적인 부패가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국민) 전체가 선호하는 죄를 상습적으로 범하고 있었다. 어느 분야, 어느 집단을 보아도 의로운 집단이라고 내 세울 곳이 없었다. 이제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야 한다. 약한 자가 반드시 의로운 것은 아니며, 강한 자가 언제나 불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강한 국가나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은 잔인성이다. 여기서 손으로라는 표현은 손을 도구로 사용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그 결과를 움켜쥐는 것이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과 다윗은 내 손에 포악이 없다고 하였다(대상12:17 ; 욥16;17).
신약에서는 회개자의 바른 모습을 보여 줄 때에 삭개오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눅19:18)라고 하였다. 그 후 사도들은 이를 강요하였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의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26:20),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라고 권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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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정으로 회개한 니느웨의 모습
왕이 겸손하고 솔직하게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청하는 모습은 그가 참된 회개자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9) 하나님을 아는 자 자기 주제를 파악한 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자기 나름대로 공식을 세워놓고 거기에 맞추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조정하려는 매우 잘못된 자세이다. 니느웨 왕은 자신과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자세를 취하고 이제는 용서 받을 줄 믿습니다. 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나님께 대할 때 혁명군의 지휘관이 국군 통수권자에게 결재하라고 협박하는 자세가 아니라, 혹은 누가 알겠느냐? 라는 겸손한 자세로 회개하였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아들 역시 자신이 아들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감히 바라지 못하고 품군의 한 사람으로 고용되어도 감사하는 겸손한 마음과 태도로 찾아 왔다.
참된 회개는 변화 된 행실 속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를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소망을 거는 것이다. 이 때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잘 한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목적을 두고 행하시는 일이며(겔2:13),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의무에 불과하기에(눅17:10), 우리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상적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눅17:9).
니느웨 도성은 변화되어가고 있었다. 호화로운 잔치대신 금식이, 사치스런 치장대신 베옷을 호언장담하는 명령대신 기도가, 방종과 무질서 대신 근신과 단련이 있는 생활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런 생활로 돌아간 것은 사람으로 마땅히 할 기본적인 일이기에 하나님께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근거를 마련한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권적 은혜를 사모하며 간곡한 기도로 소원을 올린 것이다. “혹시 누가 알겠느냐”는 참된 회개를 겸비한 표현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대한 솔직한 의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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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말씀의 교훈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 일어난 3일간이 기도도 기적도 놀라운 일이나, 인간 문화의 바벨탑이라 할 수 있는 그 큰 니느웨 도성이 요나의 짤막한 설교를 통해 무너진 것이 구원의 역사가 하나의 매듭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시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이 나라의 총체적 부패와 폭발한 악이 어찌 깨어질 수 있다고 보겠는가?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삶에 요나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때, 구원의 역사는 이 나라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나는 이 구원 사역의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자기의 업적을 아로새긴 자아의 용상인가? 아니면 참회의 잿더미인가? 나는 지금 무슨 옷을 입었는가? 자신의 더러움을 가린 화려한 가식의 왕복인가, 아니면 자기 잘못을 통회하는 호곡(소리를 높이 내어 소리 내어 울음)의 베옷인가? 하나님은 낮아진 자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높여 주신다.
니느웨성의 회개는 왕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그것이 왕궁에까지 파급효과를 보게 되었다. 오늘 우리나라의 사정 작업도 청와대에서 시작하여 국민들에게 미치는 것 보다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부터 강력히 시작하여 청와대까지 미쳐야 할 것이요 마무리는 대통령이 정책을 통해 실현해야 됨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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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돌이키사 니느웨 성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10)
하나님께서 요나를 건져주셨던 그 손으로 이제는 니느웨를 건져주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여기서 그들의 행한 것이란 금식이나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어 회개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셨기 때문에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저렇게 변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언제나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변함없는 것은 그의 자비하심과 인애로우심이며 영원하신 사랑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그에게 내리시기로 생각했던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신다(렘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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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의 선포는 어느 경우라도 확정적인 것이 아니요 경고적, 조건적 선포이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은혜시대에 국한 된 말씀이요, 심판이 임하면 다시 변경될 수 없다. 만약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일반적 법칙에 따라 멸망했을 것이나, 경고를 받자 선지자의 말을 믿어 회개하고 돌이키자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할 점은 행위가 구원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참 된 회개의 증거이다(약2:24~26).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실 분이다. 입만 움직이는 신앙 고백이나, 몸으로만 행하는 금식이나, 형식적인 베옷 등에 감동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한 외적 표현들은 변화도니 마음과 연결되지 않으면 하나의 종교적 행사에 그치고 만다.
종교적인 삶과 신앙적인 삶은 표면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종교적인 삶은 교회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살면서도 자신의 사고나 생활 방식에는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러나 신앙적인 삶은 자기 삶에 혁신적인 변화가 따르게 된다. 악에 대한 마음은 선에 대한 사랑으로 변증된다. 그러나 우리는 니느웨의 한 번 회개가 영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 회개했던 그들은 다시 죄악에 빠졌고, 그로 인해 약 150년이 지난 주전 612년 니느웨성은 멸망하고 말았다. 10절 말씀은 십자가의 사랑이 강하게 나타나 있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시고,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돌이키시는가를 보여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돌이키심은 인간의 회개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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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절 말씀의 교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은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다. 상하여 통회하는 심령은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깊어짐과 동시에 소망에 의한 기쁨도 깊어지게 한다. 또 회개는 과거에 대한 비탄과 함께 미래를 향한 개혁도 포함한다. 2,800년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것 같이 오늘 우리도 그들이 한 참 된 회개를 본받고 실천하여 이 시대를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자.
* 결 론
요나의 설교를 처음 들은 사람들의 회개는 매우 귀중했다. 그들의 회개가 귀족들과 왕까지 변화시켜 나라 전체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오늘 우리가 가질 것은 무엇인가? 삶의 방식이 다양하고 가는 길이 각기 다를 지라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공동의 욕구와 회개가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받아 이 놀라운 역사가 나의 가정, 이웃, 국가 전체에 확산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축복을 누리는 일에 주역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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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 :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못한 요나(욘 4:1~5)
누구든지 한 번 상처를 받았던 곳은 그 후유증 때문에 늘 불안함과 같이 사람이 한 번 지은 죄는 그 부분이 약점이 되어 다시 죄를 범하기 쉽다. 인간에게 완전과 성결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오직 완전과 성화를 향하여 전전할 뿐이다. 재생된 선지자 요나도 똑 같은 결점이 나타난다. 우리들의 신앙도 신학생으로 목회자의 길에 진입하고 있지만 바다의 물결 같이 기복이 심함을 볼 수 있다. 성경의 나타난 인물의 예를 들면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도 “주를 알지 못하노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통회하여 갱신된 후에도 주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로 나아가서 바다의 여부 생활을 꿈꾸었으며, 부활의 신앙이 정립된 오순절 이후 성령 충만하여 한 번 설교에 3,000명을 회개시키고도 핍박에 못 이겨 도피하려고 하였다.
사람은 중생한 후 큰 일을 성취하더라도 불안전하고 불원만하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목욕한 자도 발을 매일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만일 씻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큰 성읍 니느웨를 책망하여 회개시킨 주역이 된 요나도 그들의 회개를 보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자기의 죽음을 호소했으니, 주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였다. 이는 타락했던 근성이 중생 후에도 때때로 발로됨을 알 수 있다.
* 4장의 내용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사랑의 조치에 대한 요나의 분노를 통해 인간성의 강퍅함을 보여준다(1~5).
(2) 하나님은 박 넝쿨로 편협한 요나를 훈계하신다(6~11).
이 귀한 말씀을 함께 상고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고 은혜스러우나 학사일정에 의하여 생략하여 두 편(1~5, 6~11)으로 상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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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말씀의 중심사상
불완전한 요나(오늘의 나)를 소개한 말씀으로 본문이 소개한 요나는 다음과 같다.
(1) 너무 편협하였다.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보면서도, 인간의 도덕적 자각은 악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 이 때 범법자와 이단자를 처벌해 달라는 기도를 하므로 관대한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편협성의 결과는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를 낳을 뿐이다.
(2) 그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자기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중심, 자기주장, 자기 명예에 더 열중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다른 성도들이 자기보다 더 열심히 믿고 기도하며 권능을 행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평가절하하고, 공격하여 자기 명예만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 고치고자 하시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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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약 중 신약의 내용이다.
요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당하다고 편협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 이방인들을 구원하려고 그들을 택하셨고 요나를 그 일에 앞장 세우셨다. 그러나 그 일을 감당하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였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자기가 범죄하고 죽은 사람은 죄 값에 죽거니와 분간 못하는 유아 12만 명은 어떠하겠는가?”라고 물으셨다. 은혜와 용서가 없다면 엄한 징계도 의미가 없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감사 찬양을 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상과 같은 깊은 뜻이 있고 주께서 친히 베푸신 역사적 사건인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상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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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나의 민족적 편협성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1).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났다면, 요나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 재 소명을 받고 크게 쓰임 받는 착한 인물로 후대에 모범 된 종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4장에서 요나 선지자의 추한 내면이 낱낱이 들추어지고 말았다. 4장은 2, 3장과 비교할 때 너무나 다른 면이 있다. 2장의 요나는 바다 속에서의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였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4장에서는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불평하였다. 물속에서는 머리를 숙인 겸손한 죄인의 자세로 자기 생명을 보존해 달라고 간구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하는 감사 예배와 서원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고개를 쳐들고, 바리새인과 같은 기도를 하였다. 자기 생명을 끊어 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자신의 하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기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3장은 니느웨성의 회개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는 장면에서 끝났다. 요나의 선교사역은 완전히 성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거두어졌으며, 3장은 니느웨 성읍의 주민들이 재앙에서 벗어났으므로 기쁨으로 끝났다. 그런데 3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니까 4장에서는 요나 선지자의 진노가 시작된다. 요나서가 3장에서 종결되었더라면 요나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훨씬 나았을 듯하다. 그랬더라면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 재 소명을 받고 크게 쓰임을 받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요 많은 사람들에게 모델로서 칭찬을 받고 후세에까지도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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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악한 속사람이 폭로된 요나 선지자의 모습을 보자.
유감스럽게도 요나서는 4장에서 요나 선지자의 내면을 낱낱이 들추어내고 만다. 4장은 요나를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며 사랑 없는 꼴불견의 표본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그에 비하여 하나님은 마음이 넓고 인자하시며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고 4장이 요나 개인의 안티(반) 클라이막스가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속성을 공포하는 대단원으로 내리는 종국이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한 백성들을 용서해 주셨고, 모질고, 급하고, 강퍅한 요나 선지자도 끝까지 참아 주셨다. 니느웨 백성들도 요나도 모두 지독한 죄인들이었음에도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신다. 구속의 은혜를 지닌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13:8). 그는 우리들의 많은 허물과 패역들도 인내와 자비로 넉넉히 용서해 줄 수 있는 구속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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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4장에 있는 말씀을 깊이 상고해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나 요나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악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의 허물과 패역함도 인내와 자비로 대해 주시며,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치 않으시는 구속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 요나의 선교 사역의 업적은 신약과 구약은 물론이요 역사상의 전례가 없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으니, 선교사 한 사람의 삼일간의 전도로 인하여 온 성, 국왕부터 시작하여 온 국민과 짐승까지 회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은, 은혜로 이성을 멸망시키려던 본래의 계획을 돌이켜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요나는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드리며, 자기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니느웨 사람들의 죄까지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함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에 대한 거부감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 격분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2장의 물고기 뱃속에서 겸손히 살려 달라 기도하던 요나가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던 3장의 요나도 아닌 다시스로 가던 1장의 배반한 선지자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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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는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행동을 왜 했을까에 대하여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민족적 이유 때문이다.
앗수르는 내부적으로 권력투쟁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같은 주변 국가들을 일일이 간섭할 수 없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의 통치하에 요나의 예언대로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여(왕하14:25), 민족적 사기가 충천된 시대이다. 그들은 주변 적국이 모두 망하고 이스라엘이 크게 흥왕하여 자신의 세대에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을 대망하였다(암5:18~20 ; 6:1). 그런데 이 열망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저해 요소가 앗수르였으므로 그들이 망하기를 원했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에 도달하여 망하게 되었으니 그들을 깨우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그 명령을 수행하였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이 회개하자 이방인의 구원보다 자기 조국의 번영을 더 바란 요나는 이를 심히 싫어하고 노여워하였다.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을 기쁘게 수납할 수 없는 애국심이나, 자기 나라 손익에 따라 조정되고 계획되는 설교는 요나의 폐쇄적 민족주의를 답습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개인, 어느 민족의 전매품이나 독점물이 아니요 하나님은 나와 민족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이웃과 이방 민족의 하나님도 되신다. 애국을 한다며 성경의 가르침이나 다른 나라를 증오하는 것은 죄악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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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적 이유 때문이다.
요나는 조국 이스라엘에 대해 좋은 예언을 왕에게 하여 그것이 적중되므로 인기가 올라가고 권위가 높아진 선지자였다(왕하14:25). 그런데 이번에 힘차게 외쳤던 니느웨의 멸망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타나자 요나는 자신의 체면과 위신(고국에서)이 손상된 것으로 보았다. 편협한 민족주의자로 이스라엘 자기 동족에게 할 말이 없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체면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니느웨의 수많은 영혼의 구원보다 자신의 위신을 더 크게 보았다면 선지자의 자격을 다시 잃어버린 증거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 일에 모범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3)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다.
요나 선지자는 잘못된 이스라엘의 전통에 얽매어 하나님의 자비와 구속은 이스라엘 선민에게만 국한 된 것이요, 이방인에게까지 주어진 것으로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에는 이방인의 항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도 계속 문제가 되자 예수님께서 오히려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먼저 은혜를 받은 사례를 들추어 이방인 구원을 주장하셨다(눅4:25~29). 이방인 선교는 초대교회에서 커다란 문제이었고(행10장 ; 11:1~18 ; 15:19~21)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증언하자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였다(행2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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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말씀의 교훈
잘못된 사상이 역사적으로 고정되어 내려와, 요나는 하나님께 큰 오류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여 복음의 장애(방해)가 되었다. 우리에게도 잘못된 신앙적 고정관념이 없나 살펴 이러한 오류를 재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다라 겸손히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자.
2.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정책에 대해 불평하였다(2,3).
우리의 잘못된 선입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요나는 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변화를 받았지만 그런 중에도 선입관(1)이 개선되지 않은 채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기 마음의 비루(행동이 천하고 마음이 지저분함)한 충돌을 털어 놓고 말았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 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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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나는 기도하는 선지자이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의 내용을 보면 요나는 성내기는 하였으나 기도는 멈추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아 있었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계획과는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2장에서 기도할 때는 “무릇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2)라고 하였으나 자신이 멸시하던 우상숭배자의 배은(은혜를 저버림)의 행위를 그대로 본받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2) 요나는 자신의 취한 태도가 지난날도 지금도 정당하다고 하나님께 항변한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 말씀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내가 고향 땅에 있을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이다 요나는 내가 니느웨에 가서 전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실 줄 내가 알고 하나님의 결정이 잘못 시행되기 전 내가 다시스로 빨리 도망하였습니다. 하나님! 니느웨에 대한 결정은 잘못하셨어도 엄청나게 잘못하셨습니다. 그렇게도 큰 능력이 있으신 분이 어쩌다가 이러한 실수 했습니까? 지내고 보니까 내가 다시스로 가려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는 잘못했다고 기도하였으나 결과가 이러고 보니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 항변의 기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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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싫습니다.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바로 고백하고 있고, 이는 모세 오경에 근거한 고백이다(출34;6, 7). 또 하나님은 “악에서 돌이키면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렘18:7~8)는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있기에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왜 저 이방인들에게까지 값싸게 베푸시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는 공의에 빠르고 사랑에 더디한 요나의 행동이다.
그는 계속하여 강하게 자기를 주장한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 하나님이 저를 살려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 이방인들도 동일한 용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나만을 사랑해 주세요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나는 니느웨를 살려줄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서 생명을 끊어달라는 발악을 하게 된다. 요나는 니느웨를 택하든지 자기를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취하라고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생명이 죽도록 충성하여도 부족할 뿐이나 감히 죽여 달라는 무엄하고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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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한 경거망동한 짓을 하였을까?
요나 뿐 아니라 선민이라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사람 저 사람을 다, 사람 같지 않은 것들까지 사랑하신다면 선민이 되었다고 좋은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 못한다면 선민의 특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앗수르를 더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이 나와 우리 민족을 이용이나 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앗수르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으나 심판은커녕 적국이 오히려 잘되게 되어 우리 민족에게 더 큰 위협만 가중 시켰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귀국하겠으며, 살아서 더 나쁜 꼴을 보기 전에 죽여 달라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을 느끼는가?
한 번의 회개나 물고기 체험으로 성자가 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좋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추악한 꼴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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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3절 말씀의 교훈
성도들의 중생을 체험하고 주께 바르게 헌신한 후에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씀 안에 살지 않는다면 언제나 다시 과거의 추한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요나를 보라, 이렇게 깊은 체험과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고도 구습에 젖은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얼마나 하나님께 몹쓸 짓을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구체적으로 성경말씀)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것이 지혜롭고 바른 길인 줄 알고 순종하는 지도자가 되자.
=>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스스로 박탈하는 자나, 죽고 싶다는 경솔한 언동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거역하는 행위를 하는 자이다. 그 어떠한 역경이 우리에게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경솔한 행동이나 생각과 말을 삼가야 한다. 결코 무슨 이유든지 옳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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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5)
요나는 하나님께 오만하고 무엄한 기도를 올렸다. 결코 자기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이해도 수납도 할 수 없다는 이 때 세상 권세 자나 이방신의 추종자 같으면 날벼락을 칠 것이나 하나님은 겸손히 다시 생각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 죄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리고 슬퍼해야 하는가? 기뻐해야 하는가? 요나의 행위가 합당한가 그릇된 것인가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이 때 요나는 2장의 회개 할 때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굽히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향하여 강하고 엄하게 꾸중하지 않으시고 4절에서 스스로 잘못을 깨우치라는 질문한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 옳을 수도 있다는 질문이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덯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5) 요나가 얼마나 사악한 언행을 하는가?
(1) 성 밖으로 나갔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 성에서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이제는 그 뜻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 것이지 사명지를 이탈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형들이 팔아서이지만,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알았고, 총리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가나안으로 탈출하여 나오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을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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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다.
조금 전에 죽겠다고 한 요나가 살기 위해 초막을 지었고 거기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가 취소되어 다시 멸망하기를 기다렸다. 경솔한 말은 얼마나 무책임한 행위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3) 니느웨의 성읍이 망하기를 기다렸다.
세상에 선지자란 자리에 있는 자가 남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추악한 일인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용서하신 사람들을 놓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잘못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이 망할 때 좋아하는 사람의 죄악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실 때 암몬 족속을 보여 주셨다(겔25;1~7).
요나의 모습을 살펴보자. 요나가 사명지를 떠나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고 성의 동편에 초막을 짓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가? 요나는 발걸음을 잘못 옮겼다고 행동을 잘못하였으니 그의 초막 생활은 다시스 생활이나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요나의 행위에서 다음과 같은 잘못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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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행위이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이름은 단 한 길 뿐이 없다는 사실이다(행4:12). 그러나 이스라엘만 구원을 하신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신 것뿐이다.
b. 하나님의 관용을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군중을 희생시키려는 발상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비난한 것은 주제 넘는 일이요, 자신과 자신의 집단의 정당(전통)성이 인정되는 길이라면 많은 사람의 목숨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것까지도 하나님을 이용하려 드는 것은 반드시 정죄 받는 일이다.
c. 경솔하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자제력을 잃고서 흥분하여 하는 말은 저들을 살려주려면 나를 죽여 달라고 하는 태도, 자기는 죽지 않고 원수가 망하는 쪽으로, 혹시 응답될 것처럼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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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통치권자의 행위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성도의 지혜요 회복과 번영의 바른 길이다. 다른 사람의 번영을 기뻐해야 할 우리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예수 믿어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편협한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아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 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롬8:18), 감사하는 선지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인도해야 한다.
역사상에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기고도 존경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혹은 대권을 잡은 뒤에도 은 팔지를 차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지냈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주변에는 존경받을 사람이 많이 있다. 월 백 만원의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수천억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추하고 편협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것은 요나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있는 악습이요 오늘 우리에게도 있는 생각이다. 우리는 저 불행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할 지라도,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분노하는 자가 되지 말자.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