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대한제국 말...
국운이 쇠퇴해진 구한말의 한반도는 일본, 청국(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의 외세가 판을 치고, 왕실과 조정은 권력다툼에 백성들의 민생고를 외면했으며, 여기에 여러해 동안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살림은 피폐하기만 했다.
매년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은 먹을 것 없는 것은 물론이요, 관리들이 세금을 뜯어가는 압박과 폭정 속에 그것에 해방되고 싶어 조국을 등지고 떠나고 싶어하였다. 물론 자녀들의 교육 걱정은 그 시절도 지금과 다름 없었다고 한다.
내 새끼 잘 가르쳐 출세시키고 훗날 남 보란 듯 그 덕도 보아야지... 이제 세상은 개화 세상인데...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하여 조선 땅에서 만주 벌판으로 떠나는 사람이 늘어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인기를 끄는 사업이었다. 농장이 잘될수록 일할 사람이 모자라는 현상이 생기자 중국인, 일본인 등 부지런하고 양순한 동양 사람들을 농장 일군으로 데려왔고 거기에 한국에서도 데려 오기로 계획을 세워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 협회에서는 1902년 존 데쉴러를 파견하였다.
한국 주재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렌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을 찾아가 이민사업의 중요성을 설득하였고 고종황제는 이민사업과 신문화 교류라는 업무를 맡을 수민원이라는 새로운 부서를 설립하였다.
외국 물정을 잘 아는 민영환을 총재로 임명하여 이민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수민원에서는 이민자들에게 당시 집조라는, 지금의 여권 같은 것을 발급하여 주고 힘들게 120여명을 모집하여 첫배에 태웠다.
(집조)
(제물포항)
첫 이민선이 떠난 제물포항에는 3개의 바다가 생겼다고 한다.
하나는 땅에서 환송하는 사람들의 눈물 바다요, 또 하나는 배위에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의 눈물 바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제물포 앞바다였다.
드디어 1902년 12월22일 수민원의 민영환 총재는 제물포항에 나가 떠나가는 첫 이민선을 환송하였다.
(첫 이민선 겔릭호)
이민자들은 일본 고베에 도착하여 120명이 신체 검사를 받고 그 중에서 20명은 신체 검사 불합격 판정으로 다시 제물포로 돌아갔다. 하와이에 들어가기 전 또 신체검사를 하여 20여일 간 배에서 멀미로 시달려 몰골이 앙상해진 4명이 입국이 안 되었다.
그리고 2진 63명, 3진 62명... 모두 10척의 상선이 투입되어 모두 1,133명이 1903년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4년에는 33척의 배로 3,434명이
1905년에는 16척의 배로 2,659명이 하와이로 이민자들을 날랐다.
1903년부터 일본에게 외교권이 박탈된 3년간, 65척의 배가 이민자들을 태워 날랐고 남자 6,048명, 여자 637명, 어린아이 541명이 사탕수수밭 노동 이민이 태어난 것이다.
(사탕수수 밭)
초기 개척자들은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이면 집도 아닌 움막을 치고 생활하며 하루 온종일 중노동을 하는 댓가로 하루 69센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 그들이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었고 병이 들어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그런 고통스런 날들이 계속되어 가는 동안 약 1,000명의 이민자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였고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LA등 본토로 가는 용기 있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1905년이 되자 우려 하였던 대한제국의 운은 을사보호 조약으로 끝나 버렸다. 미주 교포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속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하였다고 한다.
나라일이 예사롭지 않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덕수궁 별관 정동에 있는 중명전에서 나라를 송두리 채 넘겨주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중명전)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국치일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국치일을 기억하는 지금의 한국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다. 내 스스로 찾은 나라도 아니고 제삼국들의 싸움에 의하여 해방된 광복절은 1945년 8월15일이라고 기억하여도 내 스스로 나라를 빼앗긴 부끄러운 국치일은 알고 싶지 않아서일까
부끄러운 그날 이후...
조국을 등지고 새 터전을 찾아 떠난 그들에게도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인회비를 내었다고 한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반 노예생활을 하는 그들이나, 본토로 넘어가 캘리포니아 오랜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한국인이면 누구나 벌어드린 월급에 10 퍼센트는 한인회비로 꼭 내었다고 한다.
비록 나라는 없지만 그것마저 내지 않으면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인 한인 회비는 나라를 찾겠다는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의 활동비로 쓰여졌다고 한다.
나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의 딸 수잔을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80이 훨씬 넘은 그녀는
“나에게는 좋은 아버지는 없었어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버려두고 나라를 찾겠다고 돌아 다녀 난 아버지를 본적이 별로 없고 아버지의 대한 추억도 없어요. 나는 세계2차 대전 때 미 해군 장교로 근무 한적도 있었어요”
그녀는 서투른 한국어로 이야기하였다.
“그때 우리에게는 나라가 없었잖아요”
“한국말을 잘 못해서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한국말은 그녀가 걱정하는 만큼 못 알아 들을 정도의 한국어 실력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국적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나라가 없던 시절 나라를 되찾겠다고 갖은 고난을 겪으며 독립자금을 내었던 선조들과 그들을 이끌며 광복과 독립의 꿈을 실현하고자 목숨을 내던졌던 선각자들은 땅 속에서 무어라고 이야기 할까 추측하여 본다.
나라 사정이 그때와 다르니 어쩌겠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 있다면 국적이 뭐 상관이 있겠니...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국적이 뭐 상관 있겠니...
먹고 살기 힘들어 조국을 등졌으면 어떠니...
나라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국적이 뭐 상관 있겠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