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2시간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174화 ; 구미 금오산
정지용 시인의 '향수'
나는 2004년 귀촌 후, 거의 매일 평균 7~8 시간 이상 노트 북 자판을 두들긴다. 그때마다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이다. 즐겨 듣는 음악은 동서고금이 없다. 하지만 이즈음은 '향수'를 주제로 하는 노래를 자주 듣는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고사처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위는 정지용 시인 '향수'의 한 구절로 고향을 잃어버리거나, 떠나온 많은 사람들이 즐겨 흥얼거리는 노래일 게다. 나도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고, 그 노래 말에 감동하여, 일부러 시간을 들여 정지용 고향 충북 옥천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며칠 전, 여행 작가인 이종원 씨가 고향 사진 몇 점을 보내왔다. 그는 국내외 유명 관광지를 두루 섭렵한 뒤 강연으로, 또는 여행 책자로 우리들에게 친숙한 분이다. 그는 이즈음 나의 고향 구미를 방문, 강연을 한 다음 금오산을 탐방 했단다. 그러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내 생각을 많이 했다는 곰살맞은 군말까지 보태 사진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가 보낸 사진들을 클릭하는 순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노래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그와 동시에 흐릿한 내 눈이 순간 번쩍 밝아짐을 느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금오산
내 어린 시절의 집은 당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원평동 115번지'로, 집 마당에서 금오산이 남쪽 하늘 정 중앙에 우뚝 솟아있었다. 그래서 날마다 그 금오산을 바라보면서 살았다.
어린 시절 한 밤 중에 오줌이 마려워 마당가 거름 터에 갈 때면 별들이 총총한 은하수 아래 금오산은 나를 지긋이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유소년 시절 내내 밤낮으로 금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며 자랐다. 마치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그리하여 금오산은 내 마음 속 깊이 어머니의 산으로 각인됐다..
금오산은 지난날 가난했던 구미 일대 사람들에게 땔감과 산나물 등 먹을거리를 주고, 난리 때는 피란처였다. 그리하여 아침저녁이면 나무꾼들과 나물 뜯는 아낙네들이 줄지어 금오산을 오르내렸다.
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그 9년 동안 봄 가을 18번의 소풍 가운데 16번은 매번 금오산으로 갔다(초등학교 6학년 봄은 김천 직지사로, 중3 가을은 경주 불국사로 갔음).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구미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금오산 저수지 아래 시냇가로, 2학년 때는 저수지 둑, 3학년 때는 저수지 바로 위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는 '채미정' 정자로 갔고, 4학년 때는 바로 그 위 작은 폭포, 5, 6학년 때는 큰폭포(현, 대혜폭포)와 도선굴로 소풍을 갔다. 구미 중학생 때는 곧장 큰폭포까지 간 뒤 중3 때는 금오산 정상에 있는 약사암까지도 올라 갔다.
이종원 작가가 보내준 금오산 사진을 보자 그때의 아련한 추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헤아려보니 60 여 년이 지났음에도.
구미 사람들에게 금오산은 어머니 품과 같다. 구미 시가지 어디에서나 금오산은 빤히 바라 보이지만 특히 남구미 쪽에서 바라보면 영판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양새다.
그런 탓인지 신라시대 도선 선사가 이 고을 지나면서 '군왕이 날 산'이라고 예언을 했단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인걸은 지령'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 소문에 많은 집안에서는 후손과 집안의 명예를 위하여 이 고장으로 이사를 왔다. 김해 허씨와 인동 장씨들은 금오산 기슭 임은동, 오태동에 세거지를 마련했다.
임은동 허씨 집안에서는 구한말 평리원 재판장, 의정원 참찬, 비서원 승을 역임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을 배출, 대한제국 시대는 일제에 항거한 13도 창의군 군사장을 역임한 의병 장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웃 오태동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를 배출하여 한때 영남 제일의 권문세도가였다.
이 고장 사람들의 술 안주 감 얘기다. 여러 집안이 후손을 위하여 이 금오산을 찾았다. 하지만 정작 그 집안에서 군왕은 나오지 않았고, 그 대신 이웃 성주 고을에서 괴나리봇짐으로 처가 수원 백씨 묘지기로 온 고령 박씨 박성빈 옹이 그 주인공이라는 얘기다.
그는 7남매 자식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단지 금오산 기슭 상모동을 찾았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의 막내아들이 자수성가 하여 육군 소장으로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최장수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로서 작품 속에 고향 얘기를 그린 바 있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에서는 작금 친일의 역사 속에 파묻혀 버린 한 항일 명장을 소개했다. 또.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에서는 낙동강 전선에서 만난 북의 인민군 전사와 남의 의용군 여간호 전사의 풋풋한 사랑과 그들 남녀가 후퇴 당시 이 금오산에서 보름 남짓 숨어서 지낸 얘기를 그렸다.
먼 후일 남북 통일이 되면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금오산을 보게 될지도.
이종원 여행 작가가 보내준 금오산 사진은 이즈음 잦아진 내 창작 욕구에 불을 지피는 불 쏘시개,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게 곡진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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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위- 구미 금오산 ⓒ 이종원
아래 왼쪽- 해질 무렵 남구미 쪽에서 바라본 금오산 모습
ⓒ 구미시청
아래 가운데- 금오산 도선굴 ⓒ 박도
아래 오른쪽- <허형식 장군> 표지 ⓒ 도서출판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