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규 목사
핀란드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추앙 받는 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왕에게는 한 가지 말못할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왕은 왕위를 이을 사윗감을 찾는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단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시험을 통과한 10명에게 왕이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하나로 이어주는 나무를 일주일 이내에 구해오너라"
일주일 후, 청년들은 저마다 웅장하고 괴상한 나무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존 페로라는 청년은 왕 앞에 십자가를 내밀었습니다.
"폐하, 십자가의 세로막대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지요. 가로막대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왕은 존 페로의 설명을 듣고 감동을 받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그는 '십자가정신'을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십자가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속에는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 개의 십자가가 보입니까?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우리의 눈앞에 세 개의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돌려 갈보리 산으로 가봅시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곳으로 나오셨습니다.
(요 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처럼 무서운 죽음은 없습니다. 로마인들까지도 전율로 몸을 떨지 않고는 그것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키케로는 "가장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사형"이라고 단언하였고, 터키터스는 "비열한 사형"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원래 페르시아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땅이 신성한 것이어서 죄인과 악인들의 시체로서 땅을 모독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곳에 방치된 채 죽었습니다. 그후에는 독수리나 까마귀가 그 나머지 일을 해치웠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형벌 방법은 페르시아에서 칼타고로 칼타고에서 로마로 이어졌습니다. 로마인들은 본국인들에게는 십자가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노예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식민지 사람이었던 예수님이나, 베드로는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되었고,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이 죽게될 십자가 형틀을 직접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진 죄인은 가능한 가장 먼 거리를 행진하여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것을 보고 범죄를 저지르면 이런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경고하기 위함이요. 지금도 북한이나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흔히 공개처형을 많이 실시합니다. 경고의 목적이 큰 것입니다.
2) 자비의 이유도 있었습니다.
죄상이 적힌 프랭카드를 죄인보다 앞서서 들고 긴 거리를 택해서 행진하는데 그러는 중간에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앞으로 나가서 그것을 아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행진은 중지되고 소송을 재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해골이라는 곳으로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요, 라틴어로는 "갈보리"입니다. 해골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아담의 두개골이 묻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담이 묻힌 곳에서 제 2의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사망을 물려준 제 1 아담과는 달리 부활과 생명을 물려주시는 제 2 아담이므로 장소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들의 해골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어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법에는 시체는 해가 지면 내려서 묻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유대 사형장에 해골이 여기 저기 있다고 볼 수 없다.
또는 그 장소가 해골 모양을 한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들에게도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519)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36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왜 주님께서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그 십자가에 못박기 위함입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세 개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양편에 강도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을 극단적인 죄인으로 몰기 위해, 즉 강도 같은 죄인으로 합리화하기 위하여 강도와 함께 못박았습니다. 과거 정권들이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로 사용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북풍이었습니다. 간첩이 아닌 사람도 완전한 간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좌우간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는 전 인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1) 우편의 십자가-회개하고 구원받은 인류를 대표합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우편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마 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런 강도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 강도가 되었을까요?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면서 처음에는 좌편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욕하고 비방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믿습니다. 우편 강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비교하여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래서 우편 강도가 좌편 강도를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우편 강도는 자신들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앙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그의 행위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편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을 봅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훌륭한 기도가 아닙니까! 그 동안 모든 잘못과 죄가 이 한 마디의 기도 때문에 사함을 받고 천국백성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편 강도는 그 즉석에서 낙원을 허락 받는 구원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경건한 생활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갔다거나 세례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혹시 우편 강도처럼 구원받고 싶은 분은 안 계십니까? '바로 이거야!' 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우편 강도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시간이 바로 십자가 위에 있을 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기회를 뒤로 미루다가 임종직전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려는 얄팍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할 자리입니다. 믿습니까?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후가 언제일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2) 좌편의 십자가-끝까지 믿지 않고 멸망당하는 인류를 대표합니다.
우편 강도가 이렇게 극적인 구원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좌편 강도는 끝까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건은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을 통과하여 행진하였더라면 코스가 쉬었는데 에돔 왕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길을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스가 난코스였습니다. 길이 험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그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셔서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찾아와서 잘못을 말하고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불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불뱀에 물렸다 할지라도 놋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왜 놋뱀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두라고 하셨을까요?
누구든지 사방팔방에서 쳐다보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이 사는 길은 한 가지로 정해져있습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뱀에 물린 자들이 다 쳐다보았을까요?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쳐다 본 사람은 죽지 않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 끝까지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모세가 만들어서 장대에 매단 뱀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이 있습니다. 좌편 강도는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더라면 우편 강도같이 그도 역시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합니까? 자신이 지은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낫게 하는 최고의 치료제입니다.
3) 가운데 십자가-인류 역사상 한 번만 나타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구속자.
하나는 사람 보기에는 죄인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벌써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하나는 하나님 보시기에나 사람 보기에도 죄인인 사람이었으며, 또 하나는 사람 보기에는 아무 죄도 없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만고에 없는 대 죄인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서 어떤 예언을 하였습니까? 그분은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는 궤사가 없었으나 라는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좌우 편에 달린 강도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만한 잘못이 없으십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였지만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대신 바라바라는 죄인을 석방하여 주었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당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을 성자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하시는 방법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가 무거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희롱, 구타를 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달리셨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던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러러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며 절규하셨습니다. 이 때 천지가 슬퍼하며 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혹시 그 때 그 무리들처럼 십자가를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측정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잘못하면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어떤 댁에 예수님을 잘 믿는 자부가 들어왔습니다.
자부가 열심히 전도해서 시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례를 받을 때가 됐습니다. 세례 문답을 하는 날이 가까이 와서 이 자부는 어머니에게 예비 공부를 열심히 시켜 드렸습니다. “∼질문하면 ∼하세요” 등 가상 질문을 만들어 놓고 공부를 열심히 시켜 드렸습니다. 문답식에 참석한 시어머니 차례가 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예수님은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때 시어머니는 공부한 문제가 나오니까 신이 나서 “예, 우리 집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고생하셨고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느냐?”는 문제에 “그 옆에 있던 못된 살인 강도 때문에”, “바라바 때문에”, “로마 군병들 때문에”, “대제사장들 때문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해서는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때문이에요”, “저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셔야 속죄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오고 또 실제로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고통의 깊이는 바로 나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올바르게 마음속에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나의 모든 죄악을 온전히 내어놓고 회개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품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로부터도 그리고 심지어 아끼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아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어 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죄의 무게와 더불어 그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거듭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기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시면서 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 이사야 53 장 5절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되었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우리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제사 제도에 따르면 희생양이나 염소에게 사람의 죄를 담당시켜서, 그들이 그 죄를 짊어지고 죽어서 제물이 됨으로 제주(祭主)의 죄가 해결된다는 대속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셔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대속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 주께서 드리신 대속 제사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죽을 사람이 살아나게 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혼자 고통받고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는 아들을 부둥켜안으시고 함께 고통 당하셨습니다 .
우리는 사람들의 죄악을, 아니 바로 나 자신의 죄악을 감싸안으시고 사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되새기며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임에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가슴 깊은 곳에 품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롬 8 :32).
3) 우리는 우리의 크나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빚진 자의 마음으로 거저 받은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거저 사하여 주셨는데 우리는 거저 받은 그 사랑에 얼마나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 저나 여러분이나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 어느 누군가가 우리가 할 일을 대신 감당함으로써 ,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평안을 누리고 이렇게 복된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거저 받은 것들을 돌려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드려 수많은 생명을 살리신 한 알의 밀 알이 되셨으므로 우리들도 거저 얻은 이 생명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보존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내어놓기를 절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루터포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거우나 감미로운 것이다. 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짐 되나 그것 때문에 간다. 신자는 그 십자가가 짐 되나 그것이 그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여 전진케 한다."
이제 우리도 각자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