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장 혈야무림(血夜武林)
-1
①
초설(初雪).
첫눈은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 한껏 몸을 움츠리던 사람들에게 뜻
밖의 선물처럼 즐거움을 안겨준다.
첫눈을 맞으며 사람들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기대감을 갖게 마련
이다. 따라서 거리에 뛰어나와 첫눈을 맞으며 소원을 빌거나 콧노
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그러나 이 해의 첫눈은 전 무림에 가공할 혈풍(血風)을 동반하고
찾아왔다. 엄청난 대혈겁의 소용돌이가 초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까... 악! 까... 아... 옥!
까마귀(烏鳥),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섬칫하게 하는 불길한 흉조(兇
鳥).
수천 수만 마리의 까마귀가 산동성(山東省) 백골령(白骨嶺)을 바
위건 고목이건 가릴 것 없이 뒤덮고 있었다.
지옥도(地獄圖). 어찌 인간 세상에 이런 아수라계(阿修羅界)가 있
을 수 있을까?
하나의 거대한 흑암 옆, 그곳에 한 구의 처참하기 그지없는 시체
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그는 바로 대막(大漠)의 기인인 선기묘인(仙機妙人) 사도유였다.
그는 사지(四肢)가 절단된 채 간 곳이 없고, 복부마저 갈라져 내
장이 흘러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생전의 그답지 않게 공
포에 질린 듯 눈알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옆에 있는 한 구의 시신이었다.
중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인 중원신군 주청산이었다.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주청산. 그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나뒹
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청산의 은염은 온통 피로 물들어 혈염(血髥)으로 화해 있었다.
그의 채 감겨지지 않은 두 눈에는 처절한 통한이 배어 있었고 그
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밖에도 주위에는 오백여 구의 참혹무비한 시신들이 흩어져 까마
귀의 먹이가 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마종지문의 천형뢰를 탈
출했던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이 백골령에서 제천마검 방천극이 이끄는 삼천 명의
마종지문 고수들에 의해 처참히 도륙되고 만 것이었다.
이 처참한 광경을 덮어주려는 듯이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첫
눈과 함께 시작한 혈풍은 전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마라천황(魔羅天皇) 나이찰에 의해 중원무성(中原武城)의 백여 명
식솔이 모조리 전멸하고 그곳에 운집해 있던 정사고수 오백여 명
도 비참하게 죽었다.
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충천하는 화광 속
에 모든 것이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추혼사신대(追魂死神隊).
죽음의 피를 찾아 날뛰는 늑대들.......
추혼사신 음혼사가 이끄는 이 피에 굶주린 악마의 화신들로 이루
어진 공포의 마인들은 삽시간에 전 무림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들
이 스쳐가는 곳은 곧 지옥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 누구도 그들의
혈행(血行)을 막지 못했다. 오직 피가 튀고 혈육(血肉)이 난무할
뿐이었다.
첫눈이 내릴 때 광동성(廣東省)에서 시작된 이 죽음의 행진은 강
서(江西), 절강(浙江), 호남(湖南), 호북(湖北)을 거쳐 전 중원으
로...... 전 중원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실로 가공스런 공포의 대혈로(大血路)가 이어졌다.
소림사(少林寺).
마종지문과의 엄청난 대혈전은 천 년 역사의 소림사를 기둥째 뒤
흔들었다. 소림은 이제 옛날의 소림이 아니었다. 곳곳의 불전이
불타고 소림사의 절반가량이 잿더미가 되었다.
지객원(知客院). 과거의 지객원주는 현정(玄正)대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뒤를 이은 정항(丁恒) 대사로 그는 오십이 세였
으며 인자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객원의 한 선방에서 그는
하후성과 남장 차림의 호연연과 마주하고 있었다.
하후성은 막 이곳에 당도했다. 정항대사는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사숙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하후성은 합장 답례한 후 물었다.
"정항. 현정사형은 어디 계시오?"
그 말에 정항대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불호만 외울 뿐이었다.
"아미타불......."
"정항!"
하후성은 재촉에 그는 마지못한 듯 말했다.
"현정사백께서는... 원적하셨습니다."
하후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미 지객원에서 정
항이 맞는 것을 보았을 때 예견치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직
접 듣고 보니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탄식하며 물었다.
"마종지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소사숙."
정항대사는 합장하며 말했다.
"소사숙. 천심(天心) 사백조님께서는 소사숙이 오시면 불심각으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알겠소. 정항."
하후성은 몸을 일으켰다.
불심각(佛心閣).
선방에서 천심선사가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으며
눈빛도 역시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지금 그의 앞에는 하후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부님......."
천심은 자애롭게 말했다.
"현수. 노납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이상 말할 필요는 없
느니라."
하후성은 침음했다.
"아미타불.... 들었는지 모르지만 천기사제는 이미 원적했다."
하후성은 가슴이 쓰린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천심의 얼굴
에도 일대 고승답지 않게 짙은 고뇌가 어렸다. 천심선사는 백미를
미미하게 떨다가 입을 열었다.
"현수."
"네, 사부님."
"이곳을 나가는 즉시 조사동(祖師洞)으로 가보아라."
하후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뢰 사제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하후성은 이내 몸을 부르르 떨며 내심 부르짖었다.
'그럼... 천뢰사숙이... 돌아가시지 않았단 말인가?'
천심선사는 다시 부드럽고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현수."
"네, 사부님."
"곧 있으면 모든 혈겁(血劫)이 종식된다. 아미타불.... 노납은 너
에게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단지 한 마디만 하겠다."
현수는 숙연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원한은 원한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불존의 뜻을 항상 기
억하라. 자비... 언제나 마음속에 자비를 가져라."
천심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모두가 부처님의 뜻일 뿐......."
하후성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린 채
물었다.
"대사부님. 제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대사부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그러나 천심은 더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굳게 눈을 감은 채 입정
(入定)하고 있었다.
조사동(祖師洞) 안.
백팔 개의 황동 불상(佛像)과 아홉 개의 향로, 그리고 수백 개에
달하는 유골 항아리들 가운데 천뢰선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가슴에 시커
먼 마수(魔手)가 관통된 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치 시체처
럼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서 하후성은 너무도 큰 충격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을 바라보는 천뢰의 눈에는 격동의 빛이 어렸다. 고
리눈같은 그의 두 눈에서는 쉬지 않고 따뜻한 자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 사숙님... 이게... 이게 대체......."
하후성은 털썩 무릎을 꿇었으나 천뢰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너
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현수. 노납의 모습이 뜻밖이냐?"
"사숙님......."
"이리 가까이 다가와라."
하후성이 무릎을 꿇은 채 다가가자 천뢰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와
머리칼을 쓸었다.
"허허허.... 현수, 이 녀석! 완전히 성숙했구나. 이 사숙조차 이
제는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구나."
"사숙님......."
하후성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얼마 만에 만난 그들 사도지간이던
가?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비참하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상상
이나 했겠는가.
실상 하후성은 소림 삼성승 중에서도 이 천뢰선사에게 가장 큰 정
(情)을 받았고 또 느꼈다. 그것은 천뢰에게 대부분의 무공을 배웠
고 그와 같이 숱한 난관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천뢰선사는 만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수여, 슬퍼하지 말아라. 노납의 생명은 비록 얼마 남지 않았으
나 죽는 순간에 이르니 오히려 불존의 말씀 모두가 하나같이 새롭
구나. 이것은 노납 평생의 가장 큰 수확이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쏘냐?"
"사숙님......."
천뢰선사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현수, 반야밀다대승신공의 근본이 무엇인고?"
하후성은 흠칫했으나 곧 대답했다.
"불(佛)의 극원과도 같은 공(空)이옵니다."
"공(空).... 그렇다. 그것이다. 그러나 진리란 언제나 말하기는
쉬우나 깨달아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사숙님."
"노납은 불사지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이 조사동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진리를 깨달았다."
천뢰의 얼굴에는 갑자기 은은한 신광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의 음
성은 낮으나 무한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념무아무상무심(無念無我無常無心)이 되니 곧 우주(宇宙)가 일
체(一體)라, 천지인(天地人)이 합일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다."
하후성은 안색이 엄숙해졌다. 그것은 바로 일찌기 그가 깨달았던
반야밀다심경의 요결(要決)이었다.
"모든 것은 공(空)으로 돌아간다. 노납은 비로소 반야밀다대승신
공을 십이 성(十二成) 터득했다."
천뢰선사의 말에는 법열의 기쁨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천고의 기재 하후성을 벌모세수로부터 시작하여 소림사상 최
고기인으로 키워내었으되 그 자신은 막상 도달하지 못했던 극한의
경지에 마침내 이른 것이었다.
"사숙님. 축하드리옵니다."
하후성이 고개를 숙이며 읍했으나 천뢰는 갑자기 엄숙히 말했다.
"현수, 정좌하거라."
하후성은 그의 말대로 정좌했다. 그것은 천뢰와 더불어 요결을 논
(論)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뜻밖에도 하후성의 백회혈
(百會血)에 뜨거운 기운이 부어졌다.
'앗!'
하후성은 내심 경악성을 발했다. 설마 천뢰가 개정대법(開頂大法)
을 시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전신에 스며듬과 동시에 그의 귓전으로 천뢰의 음
성이 마치 불(佛)의 전성처럼 울려왔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만물(宇宙萬物) 색즉시공(色卽是空) 공
즉시색(空卽是色)... 법화일언(法華一言) 중부지처(中府之處) 공
요결람(空要訣覽)... 원체전동(元體全動) 무유지영(無有之
永)......."
천뢰가 읊는 요결은 모두가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십이 성 경지를
일컫는 요체로써 하후성은 더 이상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천뢰로부터 부어지는 뜨거운 진기를 받아들이며
전심전력으로 요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무아지념(無我之念 무상지경(無常之境)... 합원지공(合元之
空)......."
하후성은 머리 속이 수정(水晶)같이 맑아짐을 느꼈고 동시에 그의
정좌한 몸이 그 상태로 석 자 가량 떠올랐다. 부공삼매(浮空三
昧)! 마침내 전설의 경지에 들어선 그는 해탈의 희열감을 맛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확연히 밝아진 느낌을 받으며 그는 눈을 번쩍 떴다.
②
하후성의 눈에는 아무런 광채도 서려 있지 않았다. 단지 어린아이
처럼 맑을 뿐이었다.
그는 즉시 천뢰선사를 볼 수 있었는데 천뢰의 표정은 장엄하기 이
를 데 없이 마치 불존과도같은 후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뢰는 입을 열어 말했다.
"현수여, 노납이 백 팔십 년을 살아온 동안 가장 깊이 사귄 사람
이 세 명이니 바로 대사형 천심과 천기 사제, 그리고 너... 현수
다."
천뢰의 얼굴에 다시금 자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대사형은 노납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며 천기 사제는 가장 감탄
을 준 사람이다. 그러나 노납의 마음 속에 깊고 진정한 정(情)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너, 현수였다."
"사숙님!"
"노납은 기쁘기 한량없도다. 이제 유한(有恨)이 없다."
천뢰는 부드럽고 현기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자
신의 모든 내공력을 하후성에게 불어넣었으므로 지금 그의 몸은
껍데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의 몸에서 이토록 신태가
흐를 수 있는 것일까?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천뢰선사는 성불지체(成佛之
體)라도 되었단 말인가?
천뢰는 다시 말했다.
"현수. 너는 소림사상 첫 번째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극성인 십이
성에 도달한 기재다. 거기에 노납의 이승에서의 정화(精華)가 부
어졌으니 너는 이제 소림뿐 아니라 무림, 아니 고금을 통하여 전
무후무한 존재다."
말을 마치자 그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홀연히 그의 몸에서 신
태가 사라지고 있었다.
"아미타불.... 영(靈)이 떠나는 도다."
"사, 사숙님!"
하후성은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천뢰는 담담하고도 자애롭
게 말했다.
"현수, 모든 것은 공(空)이다. 불존의 말씀을 기억하라. 자비
를... 기억하라.... 나무아미타불.... 자비를......."
조용해졌다.
조사동 안에는 곧 태고(太古)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숙님!"
일대의 기승인 천뢰는 죽었다. 마침내 그는 해탈을 하여 불계(佛
界)에 들고 말았다. 현수 이전에 천 년 소림의 가장 강했던 고수
천뢰선사는 마침내 원적을 한 것이었다.
"사숙님......!"
하후성의 부르짖음이 조사동을 메아리치게 했다.
지객당(智客堂)에서 두 인물이 마주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격동어린 시선으로 눈 앞에 서 있는 흑의 중년문사, 즉
선풍마서생 위전풍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위전풍은 왼쪽 팔이 없었고 단지 빈 소매만 펄럭일 뿐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기 그지없었다.
"위형의 팔은?"
하후성이 묻자 위전풍은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하후형, 무림계(武林界)에 살다보면 이런 일은 비일
비재한 것이오. 신경 쓰지 마시오."
위전풍은 힐끗 빈 소맷자락을 바라보더니 고소를 지었다.
"중원무성에 있다가 마라천황(魔羅天皇)의 일격에 당했소. 후
후후... 마라천황 나이찰의 무공은 확실히 대단했소. 그러나.
놈 역시 한 쪽 팔을 잃었으니 결국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소.
후후후후......."
하후성의 안색이 심각한 변화를 일으켰다.
"주... 중원무성이 공격을 당했다는 말이오?"
위전풍은 의아한 듯이 그를 응시했다.
"아니, 하후형은 전혀 모르고 있었소?"
하후성은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으음......."
위전풍은 어두운 안색으로 나직이 침음했다.
"보름 전 마라천황이 이천여 명의 고수를 끌고 중원무성을 공격했
는데 실로 끔찍한 대혈전이었소. 중원무성에 있던 무림인들은 이
를 악물고 대항했지만 워낙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거의 전멸
을 면치 못했소."
"아!"
"휴우! 더군다나 중원신군 주 노선배 역시 백골령(白骨嶺)에서 제
천마검 방천극에 의해 분사(憤死)하셨으니......."
하후성의 얼굴은 아예 잿빛이 되었다.
'외증조부님마저... 외증조부님마저.......'
정신이 아득해지고 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의 정력(定力)은 가히 초인간적이었다.
그는 양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잡으며 위전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중원무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위전풍은 더욱 의아해졌다.
'하후형이 왜 이토록 중원무성에 신경을 쓸까?'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음, 나를 포함해서 근 십 여 명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했소이다."
하후성이 다그치듯 물었다.
"혹시 주청산 노선배의 손녀를 아십니까?"
"아! 주설란(朱雪蘭) 여협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위전풍은 길게 탄식했다.
"주여협 역시 중원무성을 빠져나오지 못했소이다."
하후성의 전신이 무섭게 떨리다 못해 모든 혈맥들이 터질 듯이 팽
창되었다. 평생 오직 정인(情人) 하후연 만을 기다리던 외로운 여
인, 그러면서도 자신이 낳은 자식마저도 보지 못한 채 언제나 한
(恨)을 안고 살아온 여인......
그녀 주설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지 않는가?
'어머니... 어머니.......'
하후성은 다만 가슴 속으로, 가슴 속으로 뜨겁게 통곡했다.
'어머니!'
위전풍은 하후성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무서운 자제력(自制力)이
그의 비통을 억누르고 있어 위전풍이 보기에 그는 단지 고개를 떨
구고 있을 뿐이었다.
"실로 엄청난 피바람이 강호 전역을 휩쓸고 있소. 추혼사신 음혼
사, 제천마검 방천극, 마라천왕 나이찰 등 마종지문의 육천여 고
수들은 모두 세 방향으로 나뉘어서 전 무림에 죽음의 비를 뿌리고
있소. 이미 남칠성(南七省)의 수많은 문파가 혈우(血雨)에 물들었
고 특히 추혼사신 음혼사가 이끄는 일천 명의 추혼사신대(追魂死
신隊)는 피에 굶주린 악마(惡魔)처럼 날뛰고 있소."
위천풍의 격앙된 어조가 하후성의 귀를 때렸다.
"하후형! 지금 이 무서운 혈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천하에서 오
직 대소림사(大少林寺)와 하후형밖에 없소. 이미 소실봉 밑에는
전 무림의 고수 일만여 명이 집결해 있소."
위전풍은 하후성의 양 손을 꽉 잡았다.
"하후형, 당신의 한 마디면 모든 고수들이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
오. 하후형!"
하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누가 알겠는가? 그의 찢어질 듯한
마음을.......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하후성은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황(皇).......'
"소림의 땡초중놈들아, 어서 나와라! 당장 하후성인지 뭔지 하는
어린 놈을 끌고 나와라!"
소림사 산문(山門)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노인이
있었다.
봉두난발에다가 두 눈에 시퍼런 광기(狂氣)가 흐르는 괴 노인, 그
는 바로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이었다.
"천심(天心), 이 늙은 중놈아! 어서 나와라!"
그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완전히 광인이었다. 보다 못한 소림의
사대금강(四大金剛)이 뛰쳐나와 저지하려 했으나 광검절심은 악을
쓰며 수중의 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파... 파... 팍!
그의 광검오마식(狂劍五魔式)은 가히 하늘조차 뒤집을 지경이었
다.
그러나 사대금강이 누구인가?
광검절심의 검이 제아무리 무서워도 사대금강의 합공(合功)을 당
해내기는 힘들었다. 다만 사대금강은 광검절심에게 차마 손을 쓰
지 못하고 그의 공격만을 차단하고 있었다.
결국 광검절심은 노화가 하늘을 찔렀지만 현자(玄字) 돌림의 사대
금강을 자신의 뜻대로 물리칠 수는 없었다.
"사형들, 잠시 물러나 주십시오."
하후성이 바람같이 나타나자 사대금강은 반색을 하며 뒤로 몸을
뺐다.
"오! 소사제, 어서 오게."
"저 노시주가 아까부터 계속 소사제를 찾는데 워낙 성격이 기이하
여 종잡을 수가 없었네."
하후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광검절심에게 옮겼
다. 그의 두 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데 광검절심은 하후성을 발견하자마자 벼락같이 다가오며 노
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오! 너 이 놈, 잘 왔다. 이놈아! 어서 당장 손녀딸을 내놔라!
대체 섬화(閃花)를 소림사 어느 구석에다 쳐박아 놨느냐?"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유노선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광검절심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 놈아! 네 놈이 모르면 누가 알겠느냐? 섬화 그 년이 너를 찾
겠다고 나간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는 두 눈에서 시퍼런 광기를 뿜어내며 이를 다시 갈았다.
"육십 년 전에 천기(天氣)인지 뭔지 하는 그 늙은 중놈에게 속아
서 그 바람에 육십 년 동안 대홍산 천화곡(天火谷)에 묻혀 산 것
만 해도 분통이 터져 죽겠는데, 거기에 또 손녀까지 납치해? 내
이 놈의 소림사를 뿌리째 뽑아 놓겠다!"
그의 광기는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하후성은 내심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으음. 유섬화란 소녀가 천화곡을 떠난 모양이군.'
광검절심 유무심이 폭갈을 터뜨렸다.
"이 놈! 네 놈부터 족치겠다!"
이때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와 그를 제지했다.
"광옹(狂翁), 그만 두게. 그게 무슨 추태인가?"
휘익!
수중에 한 자루의 호미를 들고 있는 노인이 나타났다. 그를 본 하
후성은 흠칫했다.
'월옹(月翁)?'
그 노인은 바로 하후성이 대홍산 기슭에서 만난 적이 있는 자칭
월옹이란 노인이었다.
"어? 네... 네가 이곳에 웬일이냐?"
"광옹. 섬화는 잘 있으니 염려 말게."
유무심은 어리둥절해 했다.
"네... 네가 어찌 아느냐?"
월옹은 탄식하며 말했다.
"섬화야, 숨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이제 나오너라."
그러자 장내에 한 쌍의 젊은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는 젊고 영준한 검사(劍士)로 그의 왼쪽 어깨에는 한 마리의
비응(飛鷹)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무척 아름답고 현숙해
보였는데 그녀는 바로 지난 날 천화곡의 망나니 소녀였던 유섬화
였다.
그녀는 지난날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듯 완전히 변해 있었다.
광검절심 유무심은 그녀를 보자 노화를 터뜨렸다.
"네 이 년, 섬화!"
유섬화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용서하세요."
"이... 이... 년을 그냥......."
유무심은 실제로 주먹을 치켜 들었다.
"노선배님, 모든 죄는 소생에게 있습니다."
낭랑한 말과 함께 젊은 검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자 비로소 유
무심도 흠칫했다.
"네 놈은 누구냐?"
"소생은 천산비검옹(天山飛劍翁)의 제자인 비응공자(飛鷹公子) 표
화운입니다."
유무심은 안색이 급변했다. 비응공자 표화운이라면 당금 사룡(四
龍)의 한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유무심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그게 아니었다. 그는 유섬화
와 표화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렇지, 섬화 너도 이젠 다 컸구나. 이제 나 만의 손녀는 아니구
나......."
그의 옆으로 월옹이 다가왔다.
"광옹, 천화곡으로 돌아가세. 자네가 앞으로 살면 얼마를 살겠는
가? 노부와 같이 바둑이나 두며 여생을 보내세."
유무심의 안색이 몇 번이나 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는 미친 듯
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핫핫핫핫......!"
중인들은 한결같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으나 그것은 단
지 기우였다.
"가세, 월옹!"
웃음을 뚝 그친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휙 날렸다. 월옹
도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할아버지!"
유섬화는 크게 부르며 유무심을 따라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옷자락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섬화."
그는 바로 표화운이었다. 유섬화는 멈칫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에는 갈등이 여러 번 교차 되었으나 그녀는 결국 그 자리를 떠나
지 못한 채 고개를 뚝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행동에 중인들은 모두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인간
사(人間事)란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③
그믐의 밤을 칠야(漆夜)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자고로 그믐밤이 칠흑같이 어둡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었다.
섣달그믐. 이 해가 가고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해가 중원에 뜰
것인가? 온통 악몽과 혈겁, 음모와 피보라로 점철되었던 무서운
한 해가 가면 과연 새로운 평화가 도래할 것인가?
칠야의 어둠을 타고 오백인의 검은 그림자가 숭산(嵩山)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일기당천의 절정고수들임이 분명했다.
앞장을 선 인물은 흑의에 검은 머리, 검은 수염, 그리고 손에는
검은 섭선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현천교의 총호법인 귀곡자였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 오
백 명의 고수들은 현천교의 인물들이리라.
섣달그믐. 이 날이 바로 하후성과 약속하여 소림에 집결하기로
그 날이었던 것이었다.
휘... 이... 잉.......
살을 에일 듯한 삭풍이 휘몰아쳤고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켜켜로
떠 있었다. 그리고 삭풍에 실려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숭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하남성의 서북쪽 귀운산(鬼雲
山) 마운협(馬雲峽)이었다.
협곡 양 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무너질듯 위태롭게 기울어
있는 이곳은 언제나 안개가 서려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로
일명 혈무곡(血霧谷)이라고도 부른다.
혈무곡의 절벽 위에는 삭풍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눈보라에 백의를 표표히 날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휘... 이... 잉!
눈 실은 삭풍이 그의 머리칼을 휘날렸는데 유난히 검은 머리는 허
리까지 늘어져 있으며 또한 흰 띠로 묶여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
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휘... 이... 잉!
기분 탓인가? 바람조차도 왠지 울컥하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듯
했다.
두! 두... 두... 두...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뒤이
어 혈무곡으로 향하는 천여 필의 말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흑마(黑馬)였고 마상에 앉은 인물들도 모두 흑의에
검은 복면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등 뒤에 한결같이 섬뜩한
빛이 감도는 일월쌍극(日月雙戟)을 교차하여 메고 있었고 흑마 또
한 모두 철갑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장 선 자는 이들 대열과는 반대로 전신을 유령같이 흰
천으로 칭칭 감은 자였다.
무림인들은 그를 일컬어 추혼사신(追魂死神)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가 이끄는 군마들이야말로 현 강호를 피로 쓸고 있는
추혼사신대(追魂死神隊)가 아닌가? 바로 죽음의 피를 부르는 악마
의 사신들이었다.
두... 두... 두... 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가운데 천지에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혈무곡을 뒤덮고 있는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안개조차 그들이 두려운 듯 거센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때 절벽 위에 서 있던 하후성의 두 눈에 살기가 일어났다. 그는
추혼사신대가 혈무곡 안으로 모두 들어서자 손을 번쩍 치켜 들었
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절벽 위의 능선을 따라 무수한 인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실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인영들이 점점이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숫자는 수백(數百), 아니 수천(數千)이
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영도를 따르는 무림인들이었다.
두... 두... 두... 두......!
드디어 추혼사신대는 완전히 혈무곡 중심으로 들어왔다. 하후성의
입에서 죽음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공격하라---!"
꽝-- 꽈-- 르- 릉---!
절벽 위에서 무엇인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집채만 한
바위로부터 거대한 고목 둥치, 엄청난 양의 바윗덩이들로 마치 혈
무곡을 메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지옥도(地獄圖)이련가? 혈무곡 안은 암석 등의 낙하로 인해 창졸
지간 피와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철갑흑마들, 그러나 떨어져 내리는
바윗덩이는 철갑흑마들의 허리를 부러뜨렸고 말에서 굴러떨어진
흑의무사들은 말발굽에 짓밟히는가 하면 신형을 날리다 고목둥치
나 바위에 깔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즉사하고 있었다.
인마(人馬)가 뒤엉킨 채 몰사하는 참경은 혈무곡을 일시에 지옥곡
(地獄谷)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추혼사신대는 순식간에 절반 이
상이 처참하게 궤멸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 보고 있던 하후성은 몸을 번쩍 날리며
두 번째 외침을 발했다.
"공격---!"
그러자 이번에는 바윗덩이가 아닌 수천 명의 군웅들이 협곡 밑으
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손에 손에 무기를 쥔 채 그들은 지는
꽃잎처럼 분분이 낙하했다.
이윽고 대혈전이 벌어졌으나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백
명의 추혼사신대는 미처 운신하기도 전에 전신에 수십 자루의 칼
을 맞고 난자되어 고꾸라졌다.
특히 하후성의 양 손이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피가 튀었고 그것은
처참무비한 대살륙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추혼사신대. 죽음을 부르던 그들은 마침내 스스로가 죽음으로 빠
져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참고 참았던 군웅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마라천황(魔羅天皇) 나이찰(那異刹).
그는 왼팔이 어깨서부터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선풍마서생 위전풍과의 일전에서 얻은 전과
(戰果)로써 그로 인해 그는 몸 전체에 큰 타격을 받았으나 심후한
내공으로 간신히 체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가 쓰는 무기는 한 자루의 핏빛 옥으로 된 혈옥마도(血玉魔刀)
였다.
밤.
나이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상처 부근에 심한 격통을 느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
다.
"뇌파(雷破)!"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부르셨습니까?"
문을 열고 한 인물이 들어섰는데 그는 붉은 옷을 입은 중년장한으
로 나이찰의 첫 번째 제자이자 마라혈교 내에서 서열 두 번째의
고수이기도 했다.
"가서 제세활불(濟世活佛)을 데려와라."
나이찰의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뇌파는 알았다. 제세활불이란
천축 활교(活敎)의 교주로서 의술(醫術)에 능통한 자였다. 나이찰
은 그를 청해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교주님."
뇌파는 고개 숙여 절을 한 뒤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는 제세활불
을 만나러 가기 위해 회랑을 돌아갔다.
"켈켈켈켈......."
갑자기 괴이한 웃음소리가 옆에서 가깝게 들리자 그는 눈살을 찌
푸렸다.
"누... 누구냐? 으...헉!"
그러나 이내 그는 온 몸에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벽(壁). 그 속에서 웬 어린 소년의 얼굴이 가공할 사기(邪氣)가
어린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으......."
뇌파는 공포감이 전신을 응축시키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무엇인가에 등을 부딪쳤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릴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퍽!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만 것이었다. 그의
뒤에는 전신에 흑의를, 어깨에 까마귀를 얹고 있는 괴인이 음산하
게 서 있었다. 흑의괴인은 바로 현천교 사령의 한 명인 흑오존자
(黑烏尊子)였다.
흑오존자가 축 늘어진 뇌파의 시체를 옆구리에 끼자 벽 속에서 어
린아이가 튀어나왔다.
"켈켈켈! 마라천황, 다음 차례는 너다!"
그는 바로 마동(魔童)이었다.
④
방문 밖에서 늙은 음성이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침상에 누워있던 마라천황 나이찰은 희색을 띄며 물었다.
"오, 제세활불인가?"
"그렇습니다."
"들어오게!"
방 문이 열리고 방 안에 혈의를 입은 한 늙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손에 불장(佛杖)을 들고 있었는데 눈썹과 수염이 모두 허옇고 무
성했다.
노격(奴格). 이것이 제세활불의 이름이었다. 그는 활교의 교주로
서 무공보다는 의술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나이찰은 고통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잘려진 어깨
를 가리켰다.
"으음.... 상처가 여간 쑤시는 게 아니다. 좀 봐다오."
"네, 교주님!"
제세활불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다가왔다. 그는 나이찰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위험합니다. 상처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찰은 잔뜩 면상을 구겼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활교 전래의 금침파혈대법(金針破血大法)을 써야 합니다."
"금침파혈대법? 그게 무엇인가?"
제세활불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신묘무궁한 것입니다. 그 어떤 중상일지라도 단숨에 고칠 수가
있습니다."
나이찰은 대뜸 희색을 띄었다.
"좋다. 어서 시술해다오!"
활불은 만면에 득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상의를 벗으십시오."
"음......."
나이찰은 스스로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기름진 배가 노출되
더니 곧 시커멓게 피가 엉긴 채 뼈까지 검게 변색되어 있는 왼쪽
어깨가 드러났다.
활불은 품 속에서 근 반 자나 되는 금침을 하나 꺼냈고 그 긴 금
침을 본 나이찰은 깜짝 놀랐다.
"그... 그렇게 긴 침으로?"
"단 한 방이면 끝납니다."
활불이 씨익 웃으며 장침을 들어올리자 나이찰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이찰이 침 끝을 불안한 듯 쳐다보는 사이, 번뜩 하는가
싶자 장침은 뜻밖에도 그의 배꼽 밑 단전혈(丹田穴)에 깊숙이 꽂
혀 버리는 것이었다.
"크악!"
나이찰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그는 전신 내공이 산산조
각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이, 이럴 수가? 네 놈이......."
활불은 뒤로 물러나며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흐! 나이찰, 나는 노격이 아니다."
나이찰은 대경실색했다.
"너... 네가?"
활불이 얼굴을 쓱 문지르더니 한 장의 가죽을 벗겨내고 있었다.
"흐흐...! 이것은 단지 노격의 얼굴 가죽에 불과하다."
나타난 얼굴은 바로 현천교 사령 중 혈마불(血魔佛)이었다.
"너... 너는......."
나이찰의 두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헤헤헤헤!"
방 안을 진동하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벽에
서 마동이 툭 튀어나왔다.
"흑! 너... 너희들은......."
스스스스.......
이번에는 방 안에 각기 검고 붉은 기류가 모여지더니 흑오존자와
혈영마인이 나타났다.
"컬컬컬! 나이찰, 이것이 네 장난감이냐?"
마동은 키득거리며 오른손에 든 시뻘건 도(刀)를 흔들었는데 그것
은 마라천황의 무기인 혈옥마도였다. 그는 만면에 장난스런 웃음
을 흘리며 이마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나이찰에게 다가갔다.
"헤헤헤! 본 신의(神醫)가 네게 멋진 의술(醫術)을 베풀겠다."
혈왕마도가 무심히 기름진 나이찰의 배를 쭉 갈랐다.
"으... 아... 악!"
그러나 복부가 갈라진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고 연이어 나이찰
의 팔, 다리, 목이 차례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실로 끔찍한 신술(神術)이었다.
- 만사(萬事)와 귀곡(鬼谷) 둘 중에 한 명만 있어도 천하(天下)를
취할 수 있다.
강호에 전해진 이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천궁혈극대라진(天弓血極大羅陣)이라 했다.
귀곡자는 호북성(湖北省) 대별산(大別山) 근처의 약 십만 평에 달
하는 광야에 이 가공할 공포의 대진(大陣)을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같은 날, 제천마검(制天魔劍) 방천극은 자신의 직계수하인
제천삼십육사와 함께 수하 마종지문 고수 삼천 명을 이끌고 대별
산으로 향했는데 결국 이는 죽음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비
신세를 자청한 행위가 되고 말았다.
방천극과 그의 수하들은 모조리 이 천고의 절진에 걸려들었고 천
궁혈극대라진의 사방 이백사십로에 설치된 죽음의 함정에서 그들
은 모조리 염라전(閻羅殿)으로 인도되고 만 것이었다.
"크-- 아-- 아-- 악----!"
처절한 비명이 장장 십 주야를 이어갔다.
그리고 무림사상 사검(邪劍)의 제일인자인 제천마검 방천극 또한
천궁혈극대라진 내에서 전신에 삼백육십 개의 혈전(血箭)이 꽂힌
채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죽고 말았다.
피를 쏟아내는 무림의 하늘(天)이여.......
휘... 이... 잉.......
바람이 불었다.
음산한 피바람은 한 언덕 위를 처절한 원귀의 호곡인 양 울부짖으
며 지나갔다. 그 언덕 위에서 귀곡자는 검은 섭선을 접어 가슴에
댄 채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노도(老道)가 낡은 마의 도포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서 있었다.
적봉우사(赤鳳羽士). 무림인들에 의해 이렇게 불리우는 그는 바로
일승일도일존(一僧一道一尊) 중의 일도(一道)로 공동파의 지도자
였다.
적봉우사는 수년 전 하란산에 나타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모
습이었다.
"무량수불.... 비극이로다, 비극이야. 앞으로 무림의 산하에는 방
황하는 원귀들의 통곡 소리가 드높겠도다."
적봉우사의 음성은 비감하기만 했고 귀곡자는 그에게 공손히 허리
를 숙였다.
"신도(神道)께서 방천극을 제거해 주신 덕분에 그래도 모든 일이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적봉우사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그는 음산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곡자. 이제 이 혈풍을 종식시켜야 하오."
"신도께서는 어떤 혜지를 갖고 계십니까?"
적봉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대마성이 모두 제거된다 해도 천혈성(天血星)은 아직 건재하
오. 또 마종지문도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천혈성의 마성(魔性)을 수그러지게 할 인물이 딱 한
명 있소."
귀곡자는 안색이 변하며 급히 물었다.
"그... 그가 누구입니까?"
적봉우사는 기이한 눈빛으로 귀곡자를 바라보았다.
"귀곡자, 그대의 제자인 종리유향이 바로 그 아이오."
귀곡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아이는 무척 총명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아이는 과거 불사지
존에게 납치되었는데......."
적봉우사는 담담히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애정이란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오."
그는 두 눈에서 기광을 흘려냈다.
"빈도에게 한 병의 만년학정혈(萬年鶴精血)이 있소이다. 어쩌면
이것으로 영원히 혈풍을 종식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오."
말하다 문득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 적봉우사의 눈에는 아련히
한 인물이 떠올랐다.
'하후성. 그 아이와 독고황이 부딪친다면... 오호라! 안 된다. 절
대로 안 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비극이다.'
적봉우사는 몸을 돌렸다.
"귀곡자, 빈도는 먼저 마종지문으로 가보겠소이다. 최선을 다하여
이 혈겁을 방지해 보겠소이다."
스스스스스.......
적봉우사의 인영이 흐려지더니 안개처럼 흩어져 갔다. 실로 신출
귀몰한 신법이었다. 귀곡자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탄식 했다.
"과연 대단한 분이시다. 천존(天尊)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
을 것이다."
귀곡자의 얼굴에 갑자기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는 죽은 적미천존
이 그리워진 것이었다. 호탕하고 솔직담백하며 기가 활달했던 현
천교의 대교주(大敎主)가 생각난 것이었다.
'후우.... 이 귀곡자도 이제 늙었는가?'
귀곡자의 청수한 얼굴에는 하나의 주름살이 잡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단지 음산한 바람만이 언덕을 거세게 휘몰아쳤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