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강호야우(江湖夜雨)
옥천산(玉泉山)에는 가을이 빨리 다가선다. 산악이 험준하기에, 다른 지역
에 비할 수 없이 계절이 빠르게 변화되는 것이다.
피로 만든 계단처럼, 단풍은 옥천산 정봉(頂峰)으로 가는 길을 뒤덮고 있
다.
옥천산은 연환마교의 총단이 세워진 곳이다.
사륵이 함백의 후계자로 발돋움한 이후… 연환마교의 세력은 불에 기름
을 끼얹듯이 확대되었으며, 강호육백주(江湖六百州)의 무림세력들은 연환
마교로 인해 강호가 통일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다만 북육성을 피로 물들인 괴인 집단만은 연환마교로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흑살마녀(黑煞魔女).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한다. 그녀는 한 송이 꽃을 들고 나타난다.
꽃은 생과 사를 가름하는 생명화(生命花)!
꽃을 받는 자는 살며, 받기를 거부하는 자는 죽는다.>
벌써 천사백 명이 생명화 아래 피를 흘렸다.
그리고 거의 매일 강호의 효웅패웅(梟雄覇雄)들이 생명화 아래 목숨을 바
치고 있었다.
'생명화를 받는 자, 죽음을 택하거나 복종을 택해야 한다'라는 말이 공공
연히 떠돌기 시작하였으며… 흑살마녀가 일으키는 공포의 회오리는 수만
명의 신풍인자들이 일으키고 있는 피의 전율보다 오히려 전율스럽게 느
끼어졌다.
짙붉은 단풍의 옥천산, 어디를 봐도 피(血)다.
마치 만 명의 무사가 난도질당해 드러누운 듯, 산은 온통 붉게 잠들어 있
었다.
흑살마녀의 출현 이후, 연환마교로 접어드는 모든 길은 세 겹의 호위망에
차단이 되었다.
지난 겨울 이후 옥천산은 금지로 화하였으며, 사륵이 인정한 영패(令牌)
를 지니지 않은 자는 옥천산 총단으로 접어들 수 없었다.
거폭(巨瀑) 근처, 석옥이 서 있다.
그 곳은 연환마교에서도 핵심이 되는 장소.
바로 연환마교의 순찰부(巡察府)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순찰부는 하루
십이 시진 내내 불이 켜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폭포수 소리는 장룡음(長龍吟)이었으며, 가을에 물들지 않는 낙락장송(落
落長松)이 폭포수 아래쪽에 드넓은 숲을 형성하고 있다.
물소리가 우레 소리보다 더한지라, 꽤 크게 소리친다 하더라도 들리지 않
을 정도였다.
숲 안, 암울한 눈빛이 번들거린다.
누군가 나뭇가지를 디디고 서서 순찰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궁(禁宮)도 비었고, 존검문(尊劍門)도 비었다. 전에 비해 무사들의 숫
자가 오분지일도 되지 않는다.'
그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맥박이 뛰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귀식대법(龜息大法)을 능가하는 잠식귀원공(潛息歸元功)을 쓰고 있
는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천하에서 가장 고독한 기질을 가진 자, 그는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웃
음을 흘릴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천하의 두 사람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수미랑(素手美娘),
함백(涵伯).
두 사람은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었다.
쓰으으- 쓰으으-!
허공 가득히 물보라가 퍼지고 있다.
폭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물줄기가 워낙 거대하게 떨어지는
지라, 물보라가 이백 장 먼 곳까지 피어 오르는 것이다.
'일단 순찰부의 음월방에게 물어 보자.'
그는 백무영이었다. 그는 낙양을 떠난 즉시, 쉬지 않고 달려 옥천산에 이
르렀다.
본시 그는 함백의 거처로 잠입해 들어가 함백과 생사의 일전을 치룰 예
정이었다.
한데 함백의 거처는 텅 비었으며, 쑥대궁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
다. 이어 그는 백치부인이 머물러 있는 금궁에 잠입하였지만, 그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륵, 그 잡종에게 당할 함백이 아닌데…….'
백무영은 속으로 외치며 몸을 슬쩍 띄웠다.
그는 음월방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렸다.
음월방은 함백의 조카이며 의발전인(衣鉢傳人). 그녀라면 겨울부터 지금
까지 벌어진 일을 알고 있으리라.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다.'
백무영은 부유하듯 떠올랐다. 그가 시전하는 경공술은 전인미답의 경지에
도달한 허공부유(虛空浮遊)였다. 그가 시전하고 있는 절기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경공술이었다.
그는 한 자리에 머물며 무공을 익히기보다 십구만 리를 주유하며 무공을
익히었는 바, 저도 모르는 사이 경공술이 그의 무공 가운데 가장 발달하
게 된 것이다.
안개(霧)처럼 몸이 흐른다.
지키는 무사들이 무수한 바, 그 누구도 백무영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
지 못했다.
'만에 하나 어머니에게 위해가 닥쳤다면, 이 곳은 시산(屍山)으로 화한
다!'
백무영의 눈빛은 어두침침하다. 그는 살기를 안으로 깊이 갈무리하고 있
었다.
금단선공(金丹禪功)이 골수 속에 머물러 있다고는 하나, 그의 운명적인
살기는 억제할 수 없었다.
그에게 모든 운명을 맡기고 원적한 창궁법사의 마지막 우려대로 그는 대
살성(大煞星)으로 자라난 것이다.
그는 탄지지간에 오십 장을 가로질렀으며, 폭포수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폭포수의 물줄기가 몸을 휘어 감는 찰나.
'물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는 청연삼초수 신법으로 몸을 퉁겨 물줄기를 발로 걷어찼다.
물은 연(軟)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듯, 그는 물보라의 힘을 빌리어 몸을
까마득히 높은 허공으로 퉁기어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진기가 흐트러지고자 하는 찰나, 또다시 물줄기를 발로 걷어차며 몸
을 뒤집었다.
그렇게 하기 세 차례, 그는 사선으로 떠올라 순찰부의 처마 위로 납작 달
라붙을 수 있었다.
밀실(密室).
과거 백무영이 문초를 받은 방이다. 그 방은 기관장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무영은 사십여 명의 눈을 피해 밀실의 밀폐된 창에 접근하게 되었다.
'음월방… 후후, 날 보면 귀신을 본 듯 놀라겠지?'
백무영은 음월방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리며 또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했
다. 그는 고월(孤月)이었다.
'그는 음월방을 끔찍이 사랑했다. 솔직히 함백의 진정한 후계자감은 고월
이었다. 그가 어이해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되었는지…….'
고월은 강한 인상을 남긴 자다. 그의 칙칙하고 암울하던 눈빛은 백무영에
게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준 바 있다.
그와 더불어 술을 마셨던 날은 가끔 그를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게 한
바 있다.
'고월은 냉막한 성격이지.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정이 가득하다. 그는
음월방을 사랑하지. 그러하기에, 번뇌를 했었지.'
백무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했다.
밀실의 벽은 소음을 막도록 설계되어 있다. 안에서 화약이 터진다 하더라
도, 밖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백무영의 청력은 삼십 장 밖에서 낙엽이 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
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
그는 천이통을 시전한 즉시, 방 안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이럴 수가?'
그는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
방 안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충격적이었다.
"하아아……!"
가쁜 숨소리.
"으으, 널 죽일 테야!"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 온다.
밀실 안에서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은 칼을 쓰는 싸움이 아
니라, 육체를 쓰는 싸움이었다.
백무영의 뺨이 창백해졌다.
'추잡스럽군.'
그는 역겨운 마음에 휘어 감겼다.
남자와 여자가 정사를 나눈다는 건 죄악이 아니다. 그러나 음월방은 처녀
로 늙어 죽으며, 여인무사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처지가 아닌가?
'순찰부주의 밀실로 사내를 끌어들여 운우지락을 즐기다니? 이제까지 보
아 왔던 모습은 모두 위선이었단 말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는 고월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떠올렸다.
그가 이 소리를 들었더라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건물을 부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오지 않아야 할 곳에 온 것일까?'
백무영은 착잡한 마음에 휘어 감기며 그 곳을 떠나고자 했다.
솔직히 말해 음월방이 수많은 남자를 침실로 끌어들여 암캐처럼 행동한
다 하더라도,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유일한 친구이며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고월 때문
일 뿐이다.
그가 신형을 틀고자 할 때, 남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너, 너무 아파요."
"암캐 같은 년! 주물러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흐응, 총순찰 나으리의 힘이 이렇게 셀 줄 알았나요?"
"크크… 하긴."
"흐응, 이제 그만해요. 벌써 일곱 번이 넘었잖아요."
"네가 순찰부에서 당주 자리나마 차지하고자 한다면, 내 말을 순순히 듣
는 게 좋아. 녠녠, 난 사륵 교주님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이며 교주님이
새로운 총단으로 옮겨 가신 이상 이 곳에서는 제왕(帝王)이나 마찬가지니
까!"
"피이!"
계집의 숨소리는 더욱 응큼해진다.
'음월방이 아니다. 그리고 사내의 목소리는 낯이 익다. 바로 그 자의 목
소리이다.'
백무영은 떠나고자 하다가 몸을 멈춰 세웠다.
그의 입가에 예의 미소가 번진다.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음월방을 오해할 뻔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세웠다.
그의 손은 눈으로 뭉친 듯 희어졌고, 다섯 손가락 끝에서 오행강기(五行
氣) 가운데 경금강기(庚金强氣)가 흘러 나왔다.
경금강기는 오행강기 가운데 가장 강하다.
오행강기는 묘가난 덕에 얻은 절기로, 백무영이 터득한 이백여 종 절학
가운데 위력에 있어 서열 오위 안에 끼일 수 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짐에 따라 한철(寒鐵)로 된 벽에는 보검으로 내리
그은 듯한 선이 패이기 시작했다.
"아아, 꼬집지 말아요."
"크읏… 더욱 괴롭혀 달랠 땐 언제고."
"그래도 너무 심해요. 흐응!"
"후후… 네 재주 가운데 제일 큰 재주는 그게 아니냐?"
음탕한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하다.
방 안은 상당히 너른 편이었다. 그리고 천축국(天竺國)의 즙기들이 즐비
하게 널리어 호사스러운 정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서등(書燈)으로 놓여 있는 봉귀등(鳳龜燈)이며, 자단으로 만들어진
문구갑(文具匣), 퇴광소칠(退光素漆)을 한 도서갑(圖書匣) 등이 제멋대로
널리어 있는 모습은 품위를 잃고 있었다.
장백산(長白山) 백웅피(白熊皮)가 너른 침상을 뒤덮고 있다.
그 위 희끄무레한 물체가 뒤엉키어 있었다.
체구가 당당한 사내와 궁둥이가 풍만한 계집이 뱀이 똬리를 틀 듯이 뒤
엉키어 있는 바, 계집과 사내는 비정상적인 체위로 뒤엉키어 있었다.
서른 안쪽으로 보이는 남자의 어깨에는 계집의 발이 올려져 있으며, 계집
의 몸뚱이는 반 가량 침상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여인은 격정의 정상에 올라선 듯, 자지러지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었다.
사내는 격정의 절정에 도달한 계집의 표정을 보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사실 그는 여체를 학대하는 것으로 성적인 쾌감을 얻는 자이며, 과거 그
러한 행동으로 인해 상위자에게 여러 번 문책을 당한 바 있다.
그는 나름대로의 처세로 인해 순찰부주 자리로 올라섰으며, 순찰부주의
지위를 악용해 마교 내부의 미녀들을 제멋대로 농락하고 있는 실정이었
다.
"더 괴롭혀 주지. 크크……!"
사내의 얼굴 가득 비지땀이 번들거렸다.
계집은 흐느끼는 듯, 노래하는 듯, 콧소리를 쉬지 않고 흘려 냈다.
그러던 한순간, 여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저, 저건……."
여인이 자지러지자…….
"애란화(愛蘭花), 즐거우냐?"
사내는 자신의 육체가 계집에게 쾌감을 주었다 여기고 키득거리기 시작
한다.
애란화라는 여인의 살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하였으며, 사내는 그녀의
몸뚱이가 차게 식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크크… 내가 너무 심했나? 하긴 네게 가죽채찍을 너무 세게 후려쳤단
말이야."
"으으… 유, 유령!"
애란화는 게거품을 뿜었으며, 정사한 상태에서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
았다.
그리고 사내의 입에서는 더러운 욕설 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그가 애란화의 몸뚱이를 내팽개쳐 버리고자 하는데, 순간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후후… 여자란 그렇게 거칠게 다루어서는 아니 되는 거야. 여자의 몸뚱
이는 잘 구어진 도자기와 같이 다루어야 하지. 여체를 거칠게 다루는 남
자는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에 불과해."
"누, 누구냐?"
사내는 그제야 자기 뒤에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기겁을 하며 뒤쪽에다가 다짜고짜 과산권(過山拳)을 휘둘러 댔다.
폭음이 일어나며 자단목 탁자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뭇조각이 퉁
기어 올랐다.
사내는 애란화의 몸뚱이를 내팽개치면서 몸을 퉁기어 올렸다.
웃음소리가 났던 곳에는 산산이 부서진 자단목 탁자 하나가 뒹굴고 있었
다.
"젠장, 내가 헛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사내의 이마 위, 지렁이 힘줄이 튀어올랐다.
그는 한순간 등줄기 가득 후줄근한 땀줄기를 흘렸기에, 마음을 가라앉히
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내가 마음을 냉정히 가다듬고 뒤돌아설 때, 그는 팔선탁 가의 의자에
걸터앉은 채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청수(淸水)를 한 잔 마시고 있었
다.
"오랜만이야. 후후, 자네 이름이… 고용영(古龍英)이었던가?"
미끈하게 생긴 미청년이다. 그는 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다음, 하이
얀 치열을 드러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하이얀 이빨이 공포스럽다.
"너… 너는……?"
사내의 머리카락이 창끝처럼 곤두섰다.
방 안으로 들어선 자는 찰나적으로 이형환위보(移形換位步)를 시전해 침
상 뒤쪽에서 탁자 뒤쪽으로 이동을 했던 것이다.
"자네가 신임 순찰부주라니 놀라운 일이야, 고용영."
"으으, 그, 그대는… 냉혈살흔."
사내는 고용영이었다. 그는 백무영을 뒤쫓아 다니던 바 있던 자였으며,
육 개월 전부터 연환마교의 순찰부를 이끌고 있었다.
"이게 술병인가? 후훗, 신임 순찰부주님께 술 한 잔 올려야 예의겠는데…
…."
백무영은 금병에 가득한 여아홍(女兒紅)을 찾아 내어 번쩍 쳐들었다.
고용영은 정사를 돕기 위해 술병을 항시 비치하고 있었다.
'사갈 같은 놈! 죽었다고 여겼는데, 살아오다니…….'
고용영의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상대는 공포의 살수, 냉혈살흔이 아니던가?
그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고용영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긴급신호를…….'
고용영은 힐끗 머리 위쪽을 바라봤다.
가는 금줄 하나가 천장에서 내려져 있었다.
금줄은 종(鐘)에 연결되어 있는 바, 금줄을 당긴다면 종소리가 울려 퍼지
고 이백여 명의 호법들이 몰려들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헤헤… 정말 오랜만입니다요."
고용영은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넙죽 숙였다.
"훗훗… 상급자가 되어서도 이전의 상전을 깍듯이 모실 줄 아니, 역시 자
네는 출세할 만한 재목이야. 과거부터 그것을 알아봤었지."
백무영은 히죽 웃으며 물잔에다가 여아홍을 가득히 담았다.
그가 잔을 쳐들어 입가에 갖고 가려 할 때, 고용영은 재빨리 뛰어올라 금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순간 고용영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으며, 그의 손에는 금줄이 끊어진
상태로 붙잡히게 되었다.
'빌어먹을! 어느 새 금줄을 끊었단 말인가!'
고용영의 낯색은 밀랍처럼 핼쓱해졌다.
백무영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옷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아 냈다.
"능숙한 살수는 잠입하기 이전, 방 안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후훗,
모든 사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목숨이 오직 하나에 불과하단 말이야. 목
숨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니만큼 소중히 지켜야 한단 말이야."
백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잔에 힘을 가했다.
잔은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고용영은 벌거벗은 가슴으로 열기가 다가섬을 느꼈으며, 붉게 달
아오른 잔은 백무영의 말끔한 손바닥 안에서 용암처럼 녹아 버렸다.
'사람도 아니야.'
고용영은 너무나도 겁을 낸 나머지, 저도 모르게 사타구니 사이를 오줌발
로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또 하나의 잔을 쳐들며 히죽 웃었다.
"난 궁금한 게 많아."
"무, 무엇을 알고 싶으신지요?"
고용영은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
"함백은 어디 갔지?"
"그, 그분은… 제거되었소."
"제거?"
백무영의 눈이 파랗게 반들거렸다.
고용영은 하얗게 질린 채 말을 더듬더듬 이어 나갔다.
"납일에 제거극이 벌어졌소. 신풍도 인자들 사천(四千)이 환영마궁(幻影
魔宮)의 살수 삼천육백과 더불어 존검부(尊劍府)를 쳤소."
"사륵… 결국……!"
백무영의 숨결이 보다 나직해졌다.
고용영은 사지를 덜덜 떨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시, 함백 나으리는 사륵공자가 바친 술 속에 타인 독배(毒杯)를 마셨
는지라……."
"으음……."
백무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고용영은 백무영의 눈치를 살펴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분이 잡혔는지라, 태상교주는 저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소."
"그분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냐?"
"백치부인."
"백치부인은 어찌 되었느냐?"
백무영은 오랜만에 고개를 쳐들었다.
고용영은 그의 눈빛을 보고 눈길을 내리고 말았다.
백무영의 눈과 마주치는 찰나, 눈알이 빠지는 듯한 고통에 휘어 감겼기에
눈길을 제대로 던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분은… 제거극 직전에 피납되었소. 바로 산호부인(珊瑚夫人)에 의해."
"으으, 산호부인이!"
백무영의 눈빛은 활화산이 터져 오를 때의 빛깔처럼 짙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연환마교로 잠입한 첫째 이유는, 백치부인을 구하기 위함이다. 한데,
백치부인이 지난 겨울 함백과 더불어 제거되었단 말인가?
"그분은 쉽게 잡혔으며, 함백 태상교주는 독배를 마시고도 괴력을 발휘해
무사 천사백 명을 쳐 죽였으되, 백치부인이 잡혀 오자… 순순히 검을 버
렸으며, 그 이후 모든 게 마무리지어졌소. 함백 태상교주는 백치부인이
안전한 장소로 옮겨지는 경우에 한하여 대권(大權)을 전하겠다고 하였고,
사륵공자는 그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소. 결국 백치부인은 총순찰의 보
호를 받으며 떠나갔고, 함백 태상교주는 은마삭(銀魔索)으로 양 손이 묶
인 채 모처로 이동이 되었소. 그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하오."
고용영은 말을 마친 다음에 고개를 힐끔 쳐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
에서 가장 무서운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눈은 화룡(火龍)의 눈이었다.
'눈알이 탄다!'
고용영은 눈에 엄청난 자극을 받은 나머지, 한순간 시력을 상실하게 되었
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자위를 뒤덮으며 신음 소리를 내었으며, 순간 백무영
의 손가락에서 탄지신통(彈指神通)이 펼치어졌다.
팟-!
소리와 함께 고용영의 유문(幽門), 거궐(巨厥), 이대혈도가 마비되었으며
… 고용영은 그 순간, 모든 내공을 잃어버리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잔에 또 술이 따라진다. 술의 빛깔은 반투명한 호박색이었다.
백무영은 짙붉은 입술을 적셨다. 그는 술맛을 음미하듯 한 모금 한 모금
목젖을 축였다.
그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으며, 허공에는 그가 나직이 내뱉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그는 쉽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다. 사륵 따위는 그를 꺾지 못한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죽립을 기웃 내려 얼굴을 완전히 파묻은 다음에 조용히 자취를 감
췄다.
산호루(珊瑚樓) 근처는 삼엄히 경비되고 있었다.
야우(夜雨)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이 비는 가을을 앞당기는 빗줄기였
다. 꽤 많은 무사들이 산호루의 뜨락을 지키고 있었으나, 무사들의 규율
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나태했다.
넷만 모이면 마작(麻雀)이고, 셋만 모이면 여자 이야기이다.
과거 연환마교 안에서는 도저히 목격하지 못할 광경이 도처에서 벌어지
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 그만은 꽤나 독특한 처지로 지내고 있었다.
그는 낡은 흑포를 걸치고 있는 바, 잔기침 소리를 쿨룩쿨룩 내면서 주위
를 쓸어 보고 있었다.
녹이 붉게 슨 철검을 등에 메고 있는 자, 다른 무사들이 기껏해야 삼십대
전후인데 비해 그의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였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노검사(老劍士)가 장년층 무사들과 함께 어울려 있
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 보인다.
자욱한 비안개 속, 백무영은 잠무둔신(潛霧遁身)을 시전하여 신형을 짙은
안개에 감춘 채 노검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마검대교두(魔劍大敎頭) 관욱량(關旭亮)인데…….'
백무영은 노검사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검대교두 관욱량은 수천 명의 마도영재들을 길러 낸 바 있는 마교의
노교두이다.
그가 비천한 처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기존의 세력이 모조리 붕괴되었다
는 것을 뜻한다.
젊은 무사 하나가 바지춤에 손을 댄 채 관욱량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요의를 느끼고 있었으며, 화단에다가 술기 섞인 오줌발을 뿜어 대기
위해 비틀비틀 다가서는 것이다.
"관대교두, 재미 좋아 보이외다. 카카……!"
"……."
관욱량은 젊은 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고동색 장포를 걸친 젊은 무사의 나이는 기껏해야 열일곱 살 정도이다.
과거에는 감히 관욱량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을 처지인데, 지금은 관욱
량과 맞상대를 하는 것이다.
"괜히 체면 차리지 말고, 야화궁(夜花宮)에서 나온 계집 하나 끼고 몸보
신이나 하는 게 어떻소이까?"
그는 화단에 오줌발을 갈기어 댔다.
관욱량의 입가에 싱거운 웃음이 번졌다.
"다 늙은 처지에 여자는……."
"크녠… 늙을수록 계집 생각이 더 난다던데."
"사륵 신임 교주님 덕에 늙은 목숨줄 하나 겨우 연명한 처지인데, 이것저
것 밝힐 수 있겠는가."
"카카… 하긴 사륵교주께서 관노교두의 무공을 폐쇄하는 것만으로 목숨
을 살려 준 이유는, 관노교두가 사륵교주에게 죽음을 다한 충성을 맹세했
기 때문이지."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이다.
과거의 관욱량이라면 그러한 말투를 참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욱량은 젊은 무사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모조리 웃어넘기고 있
었다.
무사는 오줌을 다 눈 다음, 한기를 느끼는 듯 몸을 오싹 떨며 신형을 틀
었다.
"제길, 춥군. 벌써 가을인가?"
그는 가래침을 화단에 뱉어 내고, 동패들이 술타작을 벌이는 곳으로 뒤뚱
뒤뚱 걸어갔다.
순간, 관욱량의 눈에서는 무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일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눈빛을 발견한 사람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백무영 한 사람
에 불과했다.
'무공을 폐쇄당한 게 아니야. 무공을 감추고 있을 뿐이지.'
백무영은 그의 내공이 여전하다는 걸 먼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관욱량이 어떠한 작정으로 무공을 감춘 채 하인배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빗방울이 풀잎을 때리는 소리가 밤의 적요함을 깨뜨
린다.
뜨락에 떨어져 내린 빗물은 연잎 뒤덮인 호수로 흘러들었다.
호숫가에 세워진 회랑의 아름다운 건물의 그림자가 호수의 파문에 따라
울렁울렁거리는 모습은, 해면 위로 부유하는 해파리의 모습이었다.
문득 회랑 안에서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호호호… 술 더 가져오란 말이야!"
그리고 그릇 깨어지는 소리.
"까르르르… 내가 누구냐? 난 천하에서 가장 지고한 신분에 있는 여인이
란 말이다. 나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세 명의 대장부를 섬긴 여인이란
말이다. 호호호! 너희들이 감히 날 무시하다니……."
창문 안에서 흘러 나오는 요사한 목소리가 무사들의 주의를 끌었다.
마작에 열중하고 있던 무사 하나가 큰소리로 욕설을 토했다.
"젠장, 또 발작이군."
"녠녠… 하루라도 술 없이는 견디지 못하니……."
"사내 품이 그리워서 발작하는 게 아니야?"
"제길,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다간 목줄이 남아 나질 않아. 관심 갖지 않
는 게 좋아."
무사들은 궁등(宮燈) 불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는 창을 보며 마른침
을 삼켰다.
너른 방, 화려한 주단이 깔리어 있는데… 심하게 어질러진 상태이다.
술병이 깨어진 파편이 되어 이 곳 저 곳에 널리어 있으며, 안주 접시가
뒤집어져서 홍소육(紅燒肉)이며 계란탕의 국물이 주단을 더럽히고 있다.
거대한 탁자 가, 등나무 의자가 놓여 있는데… 그 위, 머리카락을 풀어
흩트린 여인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술! 술 더 갖다 달란 말이야!"
여인의 손에는 금으로 만든 술잔이 쥐어져 있었다.
여인의 동공은 초점이 흐려진 상태였다.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차 오를
정도로 마셔 대면 이렇게 될는지. 얼굴색이 빨갛게 물들다 못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였으며, 화려한 궁장에서는 역겨운 술 내음이 풍겨 나왔다.
"제발… 술을… 술을 갖다 주면, 내가 갖고 있는 흑진주(黑眞珠) 귀걸이
를 주겠다."
그녀는 술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술이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수족이 떨리게 되며 정신상태가 혼미해진다.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마셔 댄 술은 마차 열 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분량이다.
"난… 이 곳의 안주인이란 말이다. 사륵이란 놈에게 속아 모든 걸 망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곳의 안주인이란 말이야."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사지를 경련시키며 욕설을 토했다.
"강호(江湖)의 남자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야!"
그녀가 욕설을 토할 때, 키가 헌칠한 청년 하나가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
가섰다.
"술 가져왔느냐? 호호호! 내게 술을 갖다 주는 사람에게는 보석을 무한정
주겠다. 난 부자란 말이야. 내 아버님은 효웅(梟雄) 가운데 지존(至尊)으
로 불렸던 분이지. 호호호! 내게 술을 갖다 주면 아버님이 내게 물려주신
재물을 주겠다."
"……."
청년은 조금 더 다가섰다. 그는 꽤 큰 키였으며, 얼굴을 죽립으로 가리고
있었다.
"네놈은 꽤 건방져 보이는군. 으음, 네놈의 모습이 내가 찢어 죽이고 싶
은 그 놈을 닮았다. 기분이 나빠!"
"……."
"난 모든 남자를 증오하지. 특히 무림계의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증오한다. 사내 놈들은 날 애완동물이나 장난감처럼 취급한단 말
이야."
취한 여인은 술을 달라는 듯 빈 잔을 내밀었다.
그 때, 청년이 입술을 떼었다.
"주독(酒毒)이 골수까지 스며들었소. 더 이상 술을 마시다간 미쳐 버리고
말지도."
"호호… 미치는 건 무섭지 않아. 난 미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
다. 호호호……!"
여인은 까르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옷자락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기에, 걸음을 내디딜 때마
다 보석알 부딪치는 소리가 영롱히 들려 왔다.
그녀는 세 걸음도 걷지 못하고 푹 고꾸라졌고, 청년은 손을 내밀어 그녀
의 가냘픈 몸뚱이를 안아 들었다.
"취했소. 푹 쉬어야 하오."
"닥쳐! 네놈이 뭔데, 참견이냐?"
취한 여인은 소리치다가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다. 이목구비의 조화가 극치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남자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
한 번 보기만 하더라도 혼백을 빼앗겨 버릴 정도로 준미한 용모이다. 특
히 두 눈의 어둡고 고독해 보이는 분위기는 강호의 모든 여인을 유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넌… 그를 몹시 닮았군."
"……."
"입매만 일그러졌다면, 그와 똑같다. 으음, 내가 정말 취했나 보군. 그 자
의 얼굴이 생각나다니……."
취한 여인은 손을 내밀었다. 수전증에 의해 달달 떨리는 손가락이 청년의
얼굴에 닿았다. 술기운이 뜨겁게 달아오른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매만지
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인의 손가락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너, 너군? 악… 악마!"
"그렇소, 나요."
"냉, 냉혈살흔… 악마!"
취한 여인의 손이 휘둘러졌다.
그녀의 손바닥이 청년의 뺨에 닿았다.
짝-!
소리가 나며 청년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왜… 피하지 않지?"
"한 대는 맞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기에……."
산호루 안으로 잠입한 청년은 냉혈살흔으로 행동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찾은 백무영이었다.
그리고 그를 알아보고 뺨을 후려친 여인은 산호부인이었다.
함백에게 강제로 진상이 된 채, 거의 십 년 간 독수공방을 해 왔던 불행
한 여인.
그녀는 함백에 의해 백무영에게 내려졌으며, 백무영과 강제로 정사를 치
룬 바 있다.
그녀는 백무영에게 몸을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자신과 가문에 대한 철저
한 모독이라 여기고 사륵과 함께 함백을 쳤던 것이다.
사륵은 그녀를 태상교모(太上敎母)로 섬기는 척하며 철저하게 무시를 해
왔다.
그녀는 엄밀한 보호 가운데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상태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 그녀는 매일 스무 병의 술을 마셔야만 잠을 이룰 수 있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과거의 아름다움은 형편없이 손상되었다.
피부빛은 까칠하고 윤택이 없었다. 눈은 쑤욱 들어가 보기 끔찍할 정도이
다. 통통히 살쪘던 팔뚝은 마를 대로 마른 데다가 푸른 핏줄이 드러나 보
인다.
가히 야차(夜叉) 같은 모습.
산호부인은 백무영을 알아보고 이를 빠득 갈았다.
"넌… 내 손에 죽어야 해. 넌 나를 유린한 악마야!"
산호부인은 두 손으로 백무영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그녀에 대해 감정적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산
호부인이 아무리 힘을 쓴다 하더라도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는 실
정인 것이다.
"부인에게 죄를 지었다고 할 수도 있소. 하지만… 난 죽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오."
"악마! 아수라(阿修羅)!"
"그렇소. 난 아수라요. 난 운명적으로 살성이 되어야 할 녀석이오. 부인과
묘하게 얽힌 건, 서로 피하지 못한 악마의 인연이었던 것이오."
"널… 널 증오한다!"
산호부인은 울부짖으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녀는 격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혼절하고 만 것이다.
백무영은 두 팔로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가벼워진 몸뚱이이다.
백무영은 산호부인을 침상 위에 눕힌 다음,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약병 안에는 공청석유(孔淸石油)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남아 있는 모든 공청석유를 산호부인의 입에 흘려 넣어 준 다음에
추궁과혈하기 시작했다.
일각(一刻)의 시간이 지났을까?
백무영의 손가락에서 요상(療傷) 회혼진력(廻魂眞力)이 일어나서 산호부
인의 허해진 기경팔맥을 바로잡아 나가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한무
(寒霧)가 피어 올랐다.
누군가 등 뒤에 나타난 것이다.
추궁과혈은 이각 넘게 진행이 되었다.
백무영은 이마에 잔잔한 땀방울을 매달았으며, 무표정히 손을 내렸다.
그는 눈길을 내리깐 채 나직이 입술을 떼었다.
"왜 손을 쓰지 않았소, 마검대교두?"
"으음, 노부가 나타난 것을 알고 계시다니……."
침상 뒤쪽 허리가 구부정한 노검사가 서 있었다.
그는 하인배 사이에 끼여 있었던 마검대교두 관욱량이었다.
백무영은 양의심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추궁과혈하는 가운데에도 주위를
살피고 있었으며, 마검대교두가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뒤에 내
려섰다는 것을 구리 거울을 통해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가 여기 머문 이유는, 삼공자(三公子)를 기다리기 위함이오."
삼공자라 함은 백무영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륵과 고월, 그리고 백무영은 함백의 후계자 서열에 끼인 바 있지 아니
한가?
"나를 기다리시다니?"
백무영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마검대교두는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날, 태상교주께서 노복에게 친히 명하신 바가 있었소. 그러하기에, 기
다리고 있었던 것이오. 태상교주는 만에 하나, 삼공자가 복귀하신다면 이
것을 전하라고……."
마검대교두는 머리에 손을 댔다. 상투처럼 틀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밀랍 단환이 나타났다.
마검대교두는 밀랍 덩어리를 백무영에게 전했다.
밀랍 덩어리 안에는 종이 뭉치가 들어 있었다.
'함백이 내게 밀지를……?'
백무영은 긴장감에 휘어 감기며 밀랍 덩어리를 깨뜨렸다.
종이에는 피로 쓴 글이 적혀 있었다.
어지럽게 휘갈려 쓴 글인데, 내용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네가 돌아와 이 글을 본다면, 너희 백가(白家)의 혼(魂)이 위대함을 믿
겠다!
너의 가문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사실 난 너를 이미 느끼고 있었다. 넌
네 아비와 너무나도 닮았다.
물론 넌 내 상대가 아니다. 넌 나의 일초지적도 아니며, 널 죽이고 싶지
않았기에 떠나 보낸 것이다.
네가 나의 적이 되기 위해선 절대구류(絶代九流)의 검(劍)을 익혀야 한다.
그 비급은 소림(少林)에 있다. 소림의 노승이 네 아비의 시신을 거두어
갔고, 시신에 비급이 있었던 것이다.
난 절대구류를 겁내지 않기에, 소림에 가서 비급을 찾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치부인은 음월방과 더불어 떠나갔다. 아마도 군산(君山)의 등룡사(登龍
寺)에 머무르리라.
난 일단 무림을 떠난다. 솔직히 난 고독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
요한 입장이다.
멍청한 사륵녀석 덕에 절대고독에 처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솔직히 무서운 녀석은 사륵이 아니라, 고월이다. 그 놈은 기린아(麒麟兒)
이다.
그 놈이 돌아온다면, 그 놈으로 인해 모든 것이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
놈을 만나면 무조건 베어 버려라!
과거 그 놈을 베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난 잔골혈시단(殘骨血屍丹)에 당
했다. 매우 지독한 독이나, 내공으로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녹이지 못
한다면, 내 몸이 녹아 버릴 것이다.>
말미의 글은 도끼로 등판을 내려쪼개는 듯한 충격을 전했다.
"내가 후계자라고?"
백무영의 얼굴이 추악히 일그러졌다.
그는 밀지를 구겨 쥐며 볼을 실룩거렸다.
"과거에도 나를 철저히 조롱하더니, 아직도 날 무참히 모욕하는군. 녠녠,
그대는 절대자다운 인물. 한 명의 무사로 그대를 존경한다. 그대는 강자
(强者)기에! 그러나 결국 그대는 내 손에 죽는다!"
함백은 초라하게 몰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세를 정확히 읽는 인물. 그는 사륵이 반역을 꾀한다는 걸 미리 간
파해 둔 바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연환마교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았기에,
사륵에게 제거당하는 듯하며 조용히 모습을 감춘 것이다.
백무영은 밀지가 가루가 되도록 세게 거머쥐었다.
'함백은 무림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인물이었는데, 이렇듯 허무하게 종
적을 감출 수 있단 말인가? 분명 흑막(黑幕)이 있다.'
마검대교두가 그의 눈치를 힐끗 살피며 말했다.
"그분은 삼공자를 제이의 지존으로 섬기라 하셨소이다. 누구도 삼공자가
돌아오지 못한다 여겼는데, 삼공자는 당당히 돌아오셨군요."
"……."
백무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함백을 불공대천의 원수로 여
기고 있기에, 함백의 후계자로 선택되었다는 말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교의 힘은 건재합니다. 금비이십팔숙(金臂二十八宿)이 삼천마룡검위
(三千魔龍劍衛)와 구천사망검사(九千死亡劍士)를 이끈 채 지하기관에 숨
어 있소이다. 지존의 명만 떨어진다면, 단 한 시진 안에 질서가 회복될
것이외다!"
"한 시진?"
"그렇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명령이 없기에 쭉
기다려 왔을 뿐입니다. 이 곳을 차지하고 있는 버러지들은 한 시진 안에
초토화됩니다. 사실, 그분은 무너지는 척하며 실세를 감추고자 하신 겁니
다."
"실세를 감추다니, 누구에게?"
"백도는 적이 아닙니다. 백도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라면 세력을 감출 필
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북의 신몽고왕부(新蒙古王府)를 상대로 하는 싸
움에 있어서는, 실세를 감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신몽고왕부… 그렇다면 철목선풍(鐵木旋風)?"
백무영이 어이없어 하자…….
"모르시는군요. 철목선풍이 바로… 고월의 화신이라는 것을!"
"고월? 그, 그가 철목선풍이라니?"
"그는 숙부에게 추방되어 천하를 떠돌며 마공을 익혔습니다. 그의 진실된
무공은 누구도 모릅니다. 그가 철목선풍이라는 건 그가 떠나고 난 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를 죽였을 겁니다. 그를 살려
준 것은, 중원천하에 엄청난 위험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
각(馬脚)을 드러내어 중원을 얻고자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고월… 그가 그였던가?"
백무영은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게 거꾸로였던 것이다.
머릿속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듯 어지럽다.
그는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고 내쉬고도 냉철한 마음을 회복하기 힘들었
다.
"고월, 난 놈이라 여기기는 했지만… 그가 철목선풍이었을 줄이야!"
그는 변황에서 돌아왔기에, 변황의 정세를 잘 알고 있다.
철목선풍이 얼마나 무자비한 인물인지 그는 알고 있다.
한데, 철목선풍이 그와 한순간이나마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고월의 화신
이라니!
드디어 운명의 회오리가 시작되는 것인가?
드디어…….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