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李稷)
이직[李稷, 공민왕 11년(1362)∼세종 13년(1431)], 성주이씨,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 시호는 문경(文景),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자, 아버지는 이인민(李仁敏)이다.
우왕 3년(1377) 문과에 급제, 1392년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과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정종 1년(1399)에 중추원사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하여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을 도와 태종 1년(1401) 좌명공신 4등이 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2년(1402)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하여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태종 5년(1405) 육조의 관제가 정하여지자 최초의 이조판서가 되었다. 태종 12년(1412) 성산부원군이 되고, 태종 14년(1414) 우의정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4년(1422) 귀양에서 풀려나, 세종 6년(1424) 영의정으로 등극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현재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51-1(월촌마을) 도로변에 있다.
이계전(李季甸)
이계전[李季甸, 태종 4년(1404)∼세조 5년(1459)], 한산이씨, 자는 병보(屛甫), 호는 존양재(存養齋), 시호는 문열(文烈),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 아버지는 이종선(李種善),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따님 안동권씨, 배위는 군수 진호(秦浩 : 서거정의 고모부)의 따님 풍기진씨, 권람(權擥)은 외사촌 동생, 서거정(徐居正)은 이종사촌 동생인 동시에 부인과는 고종사촌 간이고, 사육신의 한 분인 이개(李塏)의 숙부이고, 생육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제자이다.
세종 9년(1427)에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학사가 되고, 도승지를 거쳐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인지(鄭麟趾) 등과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사육신 사건의 공로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좌익공신에 녹훈되었다. 세조 1년(1455) 이조판서, 다음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카 이개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다 과음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
선정전에 나아가서 하동군 정인지(鄭麟趾)·봉원군 정창손(鄭昌孫)·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인산군 홍윤성(洪允成)·좌의정 김질(金礩)과 육조참판 이상과 승지 등을 불러 보고, 천릉할 땅을 의논하여 정하였다. 또 상지관 안효례(安孝禮) 등을 불러서 각각 여흥성산(驪興城山)의 이계전(李季甸) 분묘와 강금산(剛金山)과 용인의 금령산(金嶺山)의 길흉을 각각 진달하게 하고, 이계전(李季甸)의 분묘의 땅으로써 정하였다.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다.
《출전 : 예종실록 2권, 즉위년(1468) 12월 27일》
현재 묘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사곡리 371(가래울)에 있다.
이인손(李仁孫)
이인손[李仁孫, 태조 4년(1395)∼세조 9년(1463)], 광주이씨,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 시호는 충희(忠僖), 둔촌(屯村) 이집(李集)의 손자, 아버지는 참의 이지직(李之直)이다.
태종 17년(1417)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세종 11년(1429)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단종 1년(1453)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단종 2년(1454) 호조판서, 1455년 세조 즉위의 공로로 원종공신 2등에 봉하여졌다. 세조 5년(1459) 우의정에 오른 뒤 곧 치사(致仕)하였다.
아들은 5형제로 첫째 영의정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 둘째 형조판서 광성군 이극감(李克堪), 셋째 성균관동지사 광천군 이극증(李克增), 넷째 좌찬성 광원군 이극돈(李克墩), 다섯째 좌의정 광남군 이극균(李克均)이다.
[명나라 사신이 근시일 내로 오기 때문에 이극배의 부모묘의 이장을 늦추다]
권감에게 명하여 일찍이 정승을 지낸 사람들에게 전지하기를,
“부모를 천장(遷葬)하는 것은 인정에 있어 매우 애절한 일이니, 평안도 관찰사 이극배(李克培)를 체대(遞代)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고령군 신숙주(申叔舟) 등이 아뢰기를,
“지금 명나라 사신이 오는 것이 이미 가까이 다가왔고,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은 원릉(園陵)의 청룡(靑龍, 주산에서 갈리어 나간 왼쪽 산맥) 북쪽에 있으니, 마땅히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당도하기를 기다려서 체임하고 천장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극배 에게 치서(馳書)하게 하기를,
“경의 부모의 무덤이 천장하게 되었으므로, 저번에 경에게 유시하여 속히 돌아오게 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이 또한 이를 것이니 경은 그 곳에 우선 머무르며 여러 가지 일들을 조처하고 판비(辦備)하며, 사신에 대한 제반사를 지대(支待)하도록 하라.”
하였다.
《출전 : 예종실록 3권, 1년(1469) 1월 1일》
현재 묘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1리 도로변에서 약 200m 들어간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