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말씀: 요한복음 3:1-5】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말씀 나눔】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심지어는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성도는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면, 동일한 하루를 평생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도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변화 되었는데 또 다른 면에서는 변화되지 않았다면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은 변화에 대해 다시 태어남을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다시 태어난 다는 것은 죽음을 내포하는 말씀입니다.
유행가 가사에 보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조용필, 창밖의 여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가사를 이렇게 개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누가 믿음 생활이 쉽다고 했는가?
성도의 삶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다시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수많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이미지를 활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밤이라는 이미지와 빛이신 예수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밤은 죄악에 머물러 있는 상태, 또는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 무질서의 상태, 죽음 등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빛은 생명과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대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두워진 밤에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밤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시간 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12에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어둠에서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각종 표적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이며 이미 예언을 통해 말씀하신 메시야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의 모습이 정확히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밤 중에 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 예수님은 칭찬을 하거나 또는 인정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뜸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에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정도 되었다면 최소한 장년의 나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예수님께 ‘선생’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더라도 인격적으로 성숙된 사람이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시니, 니고데모는 두 번째 모태에 들어 갔나가 나와야 되는가? 되묻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철저히 육체적인 측면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설명해주십니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영적인 사고는 더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씀 중에
먼저 물로 나야 한다는 것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죄 씻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침례를 의미합니다.
장로교에서 시행하는 관수례는 근대에 와서 시행하게 된 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당시에는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회개의 표현입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에게 와서 침례를 받은 것을 통해서도 침례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씀 중에,
물로 나야 한다는 것에는 담긴 의미 두 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침례는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먼저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왜 죽어야 합니까?
로마서 6:6에 보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성도들이 죄의 몸에서 해방되려면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죽고 나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2:20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또한 거듭난 성도는 새 육신을 입게 됩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의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5:50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죄 아래 어둠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로 물든 육신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담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유리구슬을 비닐 봉투에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새 비닐 봉투, 두꺼운 비닐 봉투 어떤 비닐봉투도 이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열을 이겨낼 수 있는 재질로 바뀌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썩어질 육신으로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에 보면,
썩어질 육체를 가진 자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우상을 섬기며 음란함의 노예가 되고 포악한 어둠의 종이 되어서 다른 이들의 소유를 빼앗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나요?
이어지는 11절에 보면,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해결 방법이 무엇입니까? 물과 성령입니다.
침례를 받는다 할 지라도 성령으로 씻음을 받지 않으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씻음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어떻게 변화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어둠에 있었지만 다시 예수님을 만날 때는 빛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39에 보면,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두려워서 숨던 니고데모는 이제 당당히 빛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결과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13에서는 이 일을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빛에서 어둠으로 되돌아 간 사람도 등장합니다.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요한복음 13:26-30에 보면,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가룟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을 떠나 문을 열고 나가서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이후에 가룟유다는 어둠 속에서 무리들을 이끌고 예수님을잡으러 옵니다.
요한복음 18:3-5에 보면,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우리는 이 부분에서 어둠과 빛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군중들 앞에는 가룟 유다가 서있고 제자들 앞에는 예수님이 서계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잡고자 횃불을 들고 몰려든 군중들과 그들 앞에 서신 예수님이 클로즈업되어서 대조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함께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각 마을에 보내실 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이 주신 권능을 행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의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어둠으로 되돌아간 결과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의 삶도 비참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잠언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음녀의 유혹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여호수아 24:15) 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을 강요 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떠나 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이 막강한 적군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적들의 간담을 녹게 만든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거민들 앞에서 오히려그들의 간담이 녹아내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잘 못된 선택을 했을 때 마주하는 죽음과 어둠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된 전철을 밟아 세상을 선택합니다.
스스로를 광야에 가두고 유리방황하면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왜? 죽음의 선택을 하고,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까요?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짓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렇게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은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대적 마귀의 사거리 밖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선택은 죽음입니까? 아니면 연명입니까?
옛 사람의 죽음으로 새 사람을 입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영접기도 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이 아니고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옛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새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1970-80년대 드라마가 전자 제품 선전 문구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라는 카피 문구가 있었습니다.
72년 4월에 방영된 일일 드라마 여로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하여 TV에 대한 인기가 높아질 때 등장한 TV 광고 문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선택한 믿음의 길은 고작 10년 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접 받기 좋아하는 나를, 뒤로 물러나 숨으려는 나를 죽이고,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한 옛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성도인가?
아니면 여전히 혈기 왕성하여 내 자신을 앞세우는 옛 사람인가?
여전히 옛 사람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어둠의 권세에 속한 자입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만 여전히 소속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고서 거듭났다고 착각하는 것은 내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대적 마귀들의 술수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을 지나야 합니다.
거듭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거듭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길은 없습니다.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옛 사람과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완전히 우리들의 주인이 되시는 그 날까지 이 싸움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죽음과 주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부활을 다 누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찬양】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예수 늘 함께 하시네, 밀알, 나의 한 숨을 바꾸셨네,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생명나무,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421장 내가 예수 믿고서, //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세상 유혹 시험이,
【설교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