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댁 시(枾) 씨
고 성 의
“누가 마당 댁에게 돌을 던지랴.”
옥황상제의 음성에 잠이 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밤새 남몰래 내린 눈은 왜 이렇게 경이로울까. 하얀 눈, 눈사람, 눈싸움, 어렸을때의 그겨울풍경이 아른거린다.어른이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잃어버린 그 동심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마당과 울타리 정원수들이 설국의 무대를 장식해 놓았으니 우리 집 늙은 감나무도 한몫, 산타로 분장했지 싶다.나목이된채,그시린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토종 감들, 자두 크기만한 작은 감들이지만 함박눈의 털모자를 썼으니 영락없이 노란 방울들을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다.
나뭇가지사이에서 포롱포롱 날아다니는,연두색 연미복을 입고 하얀 뿔테안경을 쓴 동박새, 쉴 새 없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는 그 몸짓, 흡사 3박자의 왈츠 율동인 양 정겹다. 어느 사이에 몸집이 좀 더 큰 직박구리가 나타나면 무대는 금세 소란스러워진다. 나는 겨울 무대의 이 광경을 놓칠세라 동영상으로 담아내기에 바쁘다.
이 찬스, 내가 함박눈이 올 때까지 짐짓 익은 감을 따지 않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한 편의 ‘겨울 동화’를 가슴에 품는다.
이웃 삼촌은 굶주린 겨울 새들에게 보시하는 우리 집의 이 늙은 감나무를 가리키면서 ‘만덕 감나무’라 칭한다. 충북 보은의 정2품 소나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싫지는 않다.
의녀 김만덕(1739-1812). 200여 년 전, 제주도에 대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아사 상태에 빠졌을 때, 평생 모은 재산을 몽땅 털어 구휼(救恤)식량을 베푼 거상 김만덕, 조실부모하여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정을 겪은 제주의 여인. 만석꾼도 아닌, 평민 아녀자로서 전 재산을 털어 구휼사업을펼친김만덕의선행은,비로소정조임금에게까지전해진다.
사내도 아닌 여인으로서, 특히나 제주 사람들이 육지부로 이탈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출륙 금지령’이 내려진 당시 상황에서, 정조임금님을 알현하고,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칭호와 함께 평생소원이었던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도록 베풀었다는 것은 조정에서도 그선행에 얼마나 감복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1720-1799)은 그 선행을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고자 「만덕전」을 일흔여덟의 노구를 무릅쓰고 집필했으며,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길이 빛나리)’라는 편액을 써서 그녀의 양손(김종수)에게 전하여 찬양했으니 그 공을 기리는 시대정신에 가슴이 뜨끔거린다. 오늘날 제주지방화폐(5만원권)의 인물에 오른 김만덕, 한국은행 오만원권의 신사임당처럼 충분히 추앙받을 만한 여성이지 싶다. 그런 미담을 새들이야 알 리 없지만 배고픈 겨울새들이 해마다 성지 순례하듯 찾아드는 걸 보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러면서 나를 되돌아본다. 여태 남을 위해 얼마나 주머니를열었는지, 자못 부끄러워진다.
우연찮게도 낮에 절친 김이 찾아왔다. 아마 함박눈의 겨울 정취에 이끌렸나 보다. 옳거니 이참에 폰에 저장해둔 〈겨울 동화〉 동영상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웃 삼촌이 붙여준 ‘만덕 감나무’라는 별칭도 덧붙여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참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주인 호칭보다 높지 않게, 정원수 키도 지붕보다 높지 않게, 그래야 집안에 분란이 생기지 않고 화평해지는 법, 나름의 명리론을 펼치며 내 눈치를 본다. 그러면서 이왕 호칭을 붙인다면 이웃 새댁을 정겹게 부르듯이, 그냥 ‘마당댁 시(枾, 감) 씨’로 하는 게 좋겠다며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작명 대가? 그 눈치 모르랴. 이심전심 동네 단골 민속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벽난로 옆 탁자에 앉았다. 녹두 파전에 막걸리 주전자가 올라왔다. 두어 순배 잔을 부딪쳤더니 그는 호탕한 성격대로 우리 집 감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청상과부마나님으로 의인화시켜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닌가. 말인즉슨, 꽃 피는 봄날에 어지간히 바람을 피웠을 것이라며껄껄웃는다.생각해보니그말도일리가있다싶어맞장구를 치면서우화적 각설이타령을 주고받으며 막걸릿잔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그 봄바람 불 때 수상했어. 동네방네 소문이 났었지. 봉(蜂,벌)씨와 접(蝶,나비)씨 양반호사들이 기웃거리며 들락거렸지.그때 사랑의 씨앗으로 들어찬 것이 틀림없어. 서로 좋아서 맺은 정은 하늘도 막지 못하는 법이지. 날이 가고 달이 차더니 겉옷 사이로도 봉긋봉긋 그 징조가 나타났지. 풍수 사상에 순응하는 그들인지라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며 아무도 돌팔매질을 하지않았어. 오히려 그낌새를 재빠르게 눈치챈 일(日) 씨, 풍(風) 씨, 우(雨) 씨도 옥황상제의 명을 받았는지 보살펴주었지. 그러니까 ‘마당댁 시 씨’ 마나님은 성은을 입었다며 기뻐했었지.
익살스런 그는 말끝에 막걸리를 버무려가며 제법 소리꾼 흉내를낸다. 맞아. 날이 가고 달이 지날수록 점점 부풀어 오르는 몸매를 감추느라 여름 내내 풍성한 진녹색 옷을 벗지 못했어. 그러다 가을이되어 만삭으로 달차 오르자 알록달록한 단풍 옷마저 벗어야만 했어. 출산할 날이 다가온 거야. 드디어 하늘이 점지한, 토실토실한 옥동자
가 고고의 울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 거야, 하!
서로 박장대소를 한 후, 한 템포 쉬고서 막걸리 주전자를 비웠다.그 애비 누구냐고, 감히 누가 마당댁에게 돌을 던지랴. 생명의 탄생은 옥황상제의 거룩한 뜻일지니! 그렇게 우리는 취기에 시간 가는 줄모르게 한바탕 사랑굿으로 흥을 돋우었다. 저 생명들, 하늘이 점지하지 않고서는 어찌 옥동자로 태어날 수 있으리. 하늘의 삼신할미가
봉 씨, 접 씨와 연을 맺도록 접신케 한 덕분임을.생명의 탄생, 유전자의 여행, 식물의 꽃과 꿀, 동물의 페르몬과 짝
짓기, 그 유구한 약육강식의 자연계에서 목숨들이 이어갈 수 있음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혹자는 신의 계시로, 혹은 진화로 그 수수께끼를 풀어 보고자 고군분투하지만, 그 신비의 세계를 어찌 알랴.
그러니 ‘나’라는 생명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그 수많은 세월의 난관을 뚫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유전자의 생명력이다. 이것을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주도면밀한 프로그래밍 덕분이라고 하는데. 그럴지라도 운이 나빴으면 생명 탄생의 기회조차 불가능했으므로 오늘의 ‘나’라는 존재는 애당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혹자는 어쩌다 태어난 일회성 생명이라 하지만 나는 불가사의한 연기론을 부정하지 못한다. 유구한 생명 시간의 파도를 헤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유전자 연속성의 신비, 유일무이한 생명의 존재,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아자!” 힘을 실어본다.
다시 막걸리 주전자가 올라왔다. 한때 불문에 심취했던 그가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꺼내 든다. 먼지 한 톨에도 우주와 연을 맺고 있으니 광대무변한 화엄의 세계를 소인들로서는 어찌 알겠냐마는 만물과 나와의 관계, 너와 나와 오늘의 삶, 모든 순환의 연결고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다고 설한다. 그렇게우리는민속주점에서개똥철학을지껄이고있는데,탁자 위 휴대폰이 울렸다. 집에서 찾는 전화다. 밖에나오니 함박눈이 길마중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감나무를 다시 올려다보니 하얀 솜옷으로 나목이 된 몸뚱어리를 감싼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우화적 우스갯소리가 무안했지만 늙은감나무의 풍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기에 들리는 환청인 듯, 내면의 음성인 듯, 한 말씀 듣는다. ‘누가 마당댁에게 돌을 던지랴. 모든 생명은 하늘의 뜻이니, 인간의 잣대로 생명의 경중을 함부로 저울질하지 마라.’ 아무튼 올겨울은 우리 집 만덕 감나무, 아니 ‘마당댁 시 씨’ 덕분에 한층 더 훈훈해질 것 같다.
jejukse@daum.net)
2006년 『에세이스트』 등단
올해의작품상(2023) 수상
수필집 『숨은 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