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인들을 만나다 1> 주간 한국문학신문 연재용
쿠바의 헤밍웨이 ①
―『노인과 바다』의 무대 코히마르에서 ―
신 길 우 (본명 신경철, 수필가, 국어학자, 문학박사)
본지는, 문학의 국제적 관심과 문학관광의 정보를 제공하는 뜻으로, <세계 문인들을 만나다>를 신설하여
연재한다. 집필은 국어학자요 국정 국어교과서 수록 수필가인 신길우(본명 신경철) 문학박사가 맡았다.
국제학술대회와 해외문학활동을 하며 10여권의 수필집을 냈고, 현재 우수한 한국문학의 국내외 보급을
목표로 국제적인 종합문학지 계간 <문학의강>을 발행하여 각국에 보내고 있다.
남다른 안목과 관조로 의미 깊은 내용을 기대한다. 주간 한국문학신문 편집자 씀
헤밍웨이와의 첫 만남
헤밍웨이는 중학생일 때 만났다. 1954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알게 되고, 수상작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매료되었다.
“삶은 고독하고 힘든 것이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은 삶의 원동력이다.”
“인생은 결과보다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것은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 때 받은 느낌이다.
6·25사변 직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사춘기로 막연해하던 나에게 이런 인식은 매우 큰 의미로 다가왔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면서 헤밍웨이는 내 가슴에 더 크게 자리를 잡았다. 사흘이란 짧은 시간에도 사랑은 이렇게 위대할 수 있구나. 인생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래서, 쿠바 기행은 헤밍웨이를 만난다는 사실로 가슴을 들뜨게 하였다. 헤밍웨이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던 쿠바, 아직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지 않은 국가, 거기를 가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Miller, 1899~1961)는 『노인과 바다』를 1952년에 발표하였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거대한 물고기를 밤낮 3일간 피나는 사투를 치르면서 잡아내는 불굴의 정신과 성실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끝내는 상어들에게 뜯겨 뱃전에 매달아놓은 대어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돌아오는 데에서 인생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1953년에 퓰리처상을 받고,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
2008년 1월 22일, 『노인과 바다』의 실제 무대였던 쿠바의 어촌을 찾아갔다. 버스는 언덕길을 가다가 작은 시골길로 내려선다. 포장도 안 되어 울퉁불퉁한 길을 조심스럽게 간다. 주변에는 주로 허름한 단층집들이 제각기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마치 우리의 옛 시골마을 같다.
9시에 코히마르(Cojimar)에 도착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작은 어촌이다. 차에서 내리니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널따랗게 펼쳐져 온다. 오른쪽에 포구가 있고 집들이 보인다.
앞쪽 바다에는 밤마다 어선들을 이끌어 주는 자그마한 등대 하나가 편편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눈앞 11시 방향 가까운 바닷가에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작은 성채 하나가 낡아가고 있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무대인
쿠바의 코히마르 포구>
해안 둔덕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주변에 돌기둥들이 원통 모양의 테두리 벽을 받치고 있는 4~5m 정도의 흰색 건축물이다. 이오니아식 기둥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에 헤밍웨이의 흉상이 서 있다. 중키 높이의 돌 좌대 위에서 짙은 눈썹에 콧수염과 구레나룻, 턱수염을 하고서 빙긋이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흔히 보아온 사진 그대로의 특유의 모습이어선지 마치 시골 노인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이 동상은 마을 어부들이 폐선의 프로펠러를 모아 녹여서 우정과 존경의 뜻을 담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우정과 존경은 위대한 작가여서, 자기네 마을을 작품무대로 썼대서만이 아니다.
헤밍웨이는 낚시를 할 때 이 코히마르 포구를 통해 카리브해로 오갔고, 항구의 카페 <테라자>에 자주 들러 주민들과 술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며 친하게 지냈다.
특히, <노인과 바다>를 영화로 촬영할 때에는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물면서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 그리고 가난한 마을사람들을 엑스트라로 많이 출연시키게 하고,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필요한 어촌의 여러 가지 도구나 기구들을 사고 빌리는 것까지 주민들을 동원하게 하였다. 유명 작가로서 거만스럽게 지낸 것이 아니라, 주민들과 자주 만나 함께 지내고 주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코히마르 헤밍웨이 공원의 헤밍웨이 동상과 필자>
영화 속의 술집 장면은 인근에 세운 세트에서 촬영한 것이라 이 <테라자>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세트는 없어지고 이 술집은 그대로 남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헤밍웨이가 자주 들러 앉았던 창가 자리를 보노라면 금방이라고 호탕한 헤밍웨이의 목소리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영화 속 가식보다 실제의 카페 <테라자>의 모습을 찾아 오는 뜻을 알 만하다.
지금도 마을에는 소설 속의 마놀린 또래의 소년들이 뛰놀고, 산티아고 같은 노인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코히마르 마을은 소설 속의 모습 그대로 이곳에 그냥 남아 있다.
<헤밍웨이가 자주 이용한 쿠바 코히마르의 카페 ‘라 테라자’>
헤밍웨이의 코히마르 생활
헤밍웨이는 이곳의 삶을 명작 『노인과 바다』로 남기고, 이곳 주민들은 헤밍웨이 동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세웠다. 언제 어디에 가든지 서로 정겹게 살고, 서로 도우며 감사해하는 마음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다.
헤밍웨이는 갔으나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파도는 끊임없이 일렁인다. 작가는 없어도 그가 즐겨 찾았던 술집 <테라자>는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있다. 그런 것들을 구경하며 사람들은 위대한 작가를 기억하고 작품을 가슴에 담는다.
위대한 작가 헤밍웨이, 그의 삶은 비록 굴곡이 많고 가정적으로도 많았지만, 작은 어촌 코히마르 주민들을 돕고 더불어 살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존경을 받을 만하다. 주민들이 헤밍웨이 공원을 세운 뜻을 통해 명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헤밍웨이가 살던 곳을 찾아보고 유물 유품들을 보려고 몰려오는 것은 그의 훌륭한 작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작품과 함께 삶도 오래 기억하게 한다는 생각이 이곳 코히마르에 오면 더욱 실감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