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우미관 앞
주먹패들이 극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장도리와 이정재 등 이천패들이 무게 있게 그 곳을 빠져나오고, 신영균, 홍만길, 휘발유들이 나온다.
신영균 뭐 이런 회의가 다 있어? 완전히 지들 멋대로잖아.
홍만길 지켜보자구요.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영균 그래두 그렇지..
휘발유 가시죠, 형님.. 늦게 가면 자리도 없을 겁니다.
신영균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우들과 함께 어디론가로 향한다. 미와와 형사들이 자신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우미관으로 향한다. 마침 두한이 용식, 짝코들과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오고 있다.
미와 긴또깡..
두한 .................?
미와 우리가 조금 늦은 모양이구나.. 벌써 회합이 끝난 것이냐?
두한 또 무슨 일이오, 미와 경부?
짝코 미, 미와...?
미와 그 녀석.. 여전하구나..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나, 궁금해서 와 봤다. 각지의 불량배들을 불러모았다고 해서 말이야..
두한 당신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미와 뭐라? 허허 이거 섭섭한 말을 하는구나. 네가 하는 일은 무슨 일이 됐건 간에 이 미와와 상관이 있어.
두한 한가하게 당신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소. 좀 비켜주겠소?
미와 바쁘시다? 허허허.. 그렇겠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왜 아니 그렇겠느냐? 하지만 긴또깡,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어. 설마 총독부의 시책에 저항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두한 .....................
미와 징용에 나가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해라. 너희들 같은 사회의 쓰레기들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두한 그 따위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소. 가도 되겠소? (지나치려하면)
미와 긴또깡,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버텨왔지만 이번에는 안돼. 징용장이 발부된 순간 네 목숨은 국가의 것이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긴또깡. 그것은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길이야. 알겠나?
두한 .....................
굳은 표정으로 두한이 지나쳐간다. 그 뒤로 용식과 짝코들, 우미관 패들이 따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미와의 야비한 웃음에서.
# 2 종로회관 외경
# 3 동 안
주먹패들이 꽉 들어차 왁자지껄하다.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밀려드는 주먹패들의 주문에 정신없이 뛰어 다닌다. 술집 중앙, 긴 테이블에 두한을 비롯한 핵심 오야붕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용식 미와라고 했던가? 아까 그 사람 말일세.. 혹시 종로서의 악명 높은 그 미와 경부가 맞나?
두한 맞습니다.
용식 허허. 이거 참....쟁쟁한 인사들도 그 자 앞에선 벌벌 떤다던데, 아우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더군.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짝코 하야시도 한 수 접어주는 두한 아우님이 아닌가? 그깟 일개 형사 나부랭이쯤이야..
용식 아니야..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 미와라는 자가 얼마나 지독한 자인데...
그때 김영태가 두한의 뒤로 다가와 뭔가 귓속말을 전한다. 두한은 고개를 끄덕인다.
두한 다들 잠시만 조용히 해주십시오.
용식 거기, 조용히 좀 하지..
모두들 ...(조용해지면)...
두한 말씀 하십쇼.
김영태 김두한 큰형님을 모시고 있는 김영태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께 몇 가지 당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우선 지방에서 올라오신 오야붕들께서는 어떠한 결정이 날 때까지 당분간 경성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 우미관도 그렇게 하겠지만 경성지역 오야붕들께서는 지방에서 올라온 식구들을 나누어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용식 ....(끄덕인다).......
작두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김영태 그리고 지금 이 일대에는 종로서의 형사들이 깔려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사소한 일로 저들에게 책을 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모두들 ..................
용식 알겠네.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다들 한다하는 지역의 오야붕들인데 알아서들 잘 처신할 것일세... 자, 자.... 이렇게 모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인데.. 기념으로 건배 한 번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두한 좋습니다. 모두들 잔을 드십시오. 오늘은 좋은 기분으로 부담 없이 드십시오.
용식 자 건배!
그들 그렇게 술잔을 비운다. 말석의 신영균도 험상궂은 얼굴로 묵묵히 술잔을 드는데 맞은편에 앉은 문영철이 다분히 시비조로 말을 건네온다.
신영균 우미관패들은 영 예의가 없군.
김무옥 뭐여?
신영균 잘 들어 둬. 나는 오야붕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거다. 우미관의 꼬붕 따위가 지껄여대는 반말이나 들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란 말이야.
문영철 꼬붕? 지금 나에게 꼬붕 따위라고 했나?
용식 (나서며) 지금 무슨 짓들인가? (신영균을 보며) 그러고 보니 자넨 아까 우미관에서 한 마디했던 그 친구로군.
신영균 ...................
용식 그 친구 성질께나 있구먼. 너무 그러지들 말고 조금씩 참아.
두한 신영균이라고 했소? 아까는 분위기가 그래서 할 말을 다 못한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거리낌없이 말해보시오.
신영균 좋소. 솔직히 기분 드럽소. 하나부터 열까지 종로패하고 몇몇 경성패들 마음대로 하고 있지 않소. 우리가 당신들 들러리나 서려고 여기 온 줄 아시오?
두한 (끄덕이고) 일리가 있소. 앞으로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소. 영철아, 니가 먼저 사과해라.
문영철 ................?
김무옥 큰형님..?
두한 어서!
문영철 .........(하는 수 없이) 미안하게 됐소.
신영균 이거야 원... 엎드려서 절 받기구만.
문영철 (모욕감에 발끈하지만)
용식 자, 자 다들 자중하고.... 술이나 한 잔 하면서 풀어. 두 사람도 잔을 들게.
다른 테이블에서 이정재가 그 광경을 의미 있는 눈초리로 지켜본다. 이정재는 시선을 돌려 두한을 쳐다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한과 이정재의 시선이 마주친다. 이정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두한은 조금은 의아한 듯 이정재를 보다가 이내 술잔을 든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 4 혼마찌깡 외경
하야시 (E) 조선 각지의 주먹패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 5 동 거실
하야시가 미우라의 보고를 듣고 있다.
하야시 이유가 무엇인가?
미우라 확실한 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하야시 ..........?
미우라 징용 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야시 ........징용이라...
시바루 그 일로 인해 조선인 주먹들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우라 그렇습니다, 오야붕. 저희들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징용을 가게 된다면 십중팔구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야시 그래서.. 징용을 가지 못하겠다고 단체행동이라도 할 생각이란 말인가?
미우라 아직 거기까지는....
하야시 그것 참... 김두한이 또 일을 벌이려고 하는 모양이구만...
미우라 하지만 김두한 오야붕이 아무리 무모하다고 해도 총독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미관은 물론이고 모든 주먹패들이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하야시 언제 김두한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사고를 쳤던가? 그는 지옥 문 앞에서도 되돌아온 사람이야.
시바루 ....................
하야시 두고 보자. 김두한이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나가는지 말이야.
정진영 우리만 이렇게 돌아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보니까 영철이 형님하고 신영균이라는 사람하고 왠지 불안해 보이던데요. 혹시 우리가 없는 사이에 무슨 사고라도 생긴다면....
김영태 단단히 주의를 줬으니 괜찮을 걸세.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겨루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정진영 겨루어보다니요? 그러다 큰 싸움이라도 나는 날에는.......
김영태 하하하. 그게 바로 주먹들의 인사법이 아닌가? 그렇게 놔두면 오히려 더 시끄럽지. 서로 우열이 가려져야 그제야 조용해질 걸세.
정진영 ..................?
두한 (웃고) 전 마음에 들던데요. 그 신영균이라는 친구 말입니다. 배짱도 두둑해 보이고, 심지도 굳어 보였습니다.
김영태 자네도 그리 보았나? 허허허.. 내가 그 친구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놀랍게도 조선 극장 사장의 아들이라더구만..
두한 (놀라) 예? 아니 조선 극장이라면....
김영태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일세.. 그래서 지방으로 떠돈 모양이야..
두한 예......
김영태 주먹도 제법 매섭다고 하던데.. 주먹보다도 근성이 더 대단한 모양이야. 다들 독종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두르더군. 허허...
두한 영철이가 고생을 좀 하겠군요.
# 7 선술집(밤)
신영균이 부하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 신영균은 울화가 치미는 듯 계속 술잔을 비운다.
신영균 (술병을 들다가) 젠장, 다 떨어졌잖아. 야 술이나 더 시켜.
휘발유 예, 형님.
홍만길 형님이 참으십쇼. 여긴 우리 구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영균 건방진 새끼들.....정말 하는 짓거리들이 꼴사나워 못 보겠단 말야.
홍만길 ..................
신영균 감히 이 신영균이한테 이렇게 형편없는 대접을 하다니... 수틀리면 김두한이고 뭐고 다 엎어버리겠어..
휘발유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미관 놈들이 우릴 너무 얕잡아보구 있다구요.
홍만길 조용히 해라.
휘발유 형님은 배알이 꼴리지도 않습니까?
홍만길 조용히 하지 못해!
휘발유 ............(못마땅하지만)....
홍만길 (신영균을 향해)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까 형님 앞에 앉아있던 자는 문영철이라고 김두한의 오른팔 격이라고 합니다.
신영균 오른팔이건 가운데 다리건 상관없어. 날 우습게 여기는 놈들한텐 똑똑히 가르쳐 준다. 이 신영균이가 누군지 말이야.
홍만길 형님?
# 8 골목길
문영철이 김무옥, 양코, 삼수들과 함께 이를 악물고 오고 있다.
김무옥 영철아.... 아무래도 난 껄쩍찌근헌디...
문영철 뭐가?
김무옥 지금 가는 거 말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으떻겄냐?
문영철 됐어. 그렇게 건방진 자식은 혼을 좀 내줘야 돼.
김무옥 아 나도 그 쥐새끼 같은 자식이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아까 영태 형님이 사고치지 말라는 말씀도 있었고...
문영철 조용히 끝낼 테니 걱정 마라.
김무옥 그려도...
양코 아따.. 무옥이 성님답지 않게 왜 그러씨요? 조용히 손 쪼까 봐주는 것인디 뭐라고 하시겠어라우. 그런 싸가지 없는 자식은 그냥..
김무옥 아 자식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구만잉..
문영철 (삼수에게) 어디냐?
삼수 예... 바로 저 집입니다.
문영철은 거침없이 술집으로 향한다. 양코가 엉거주춤 따라붙고 김무옥과 삼수가 걱정스럽게 보다가 안으로 향한다.
# 9 선술집
문영철이 성큼성큼 들어와 신영균의 자리로 간다. 그리고 김무옥들도 들어온다. 신영균이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다가 눈이 찢어져라 흘겨본다.
신영균 뭐야.......?
문영철 좀 앉아도 될까? (신영균 옆에 있는 의자를 가져다 앉는다)
신영균 웬 개수작이야..? 너 이 새끼 미쳤어?
문영철 입에 걸레를 쳐 물었나.. 왜 이렇게 입이 더러워?
신영균 (발끈하며) 뭐야?
문영철 나하고 형씨 사이에 아직 용무가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신영균 그래서.. (피식 웃고) 한 번 해보자는 거냐?
문영철 위아래는 가려야 하지 않겠냐?
신영균 새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문영철 누가 죽을지는 나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신영균 건방진 새끼.. 좋다. 그렇지 않아도 근질거리던 참에 아주 잘 됐어.
홍만길 형님?
신영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놓으며) 술값 치르고 천천히 와라. 나가자..
신영균이 일어서면 문영철도 천천히 일어선다. 신영균이 비웃듯 문영철을 한 번 노려보고 거침없이 밖으로 나간다. 문영철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지으며 도리질을 친다.
# 10 어느 공터(밤)
서로 마주 선 신영균과 문영철. 각각 그 뒤에는 동료들이 포진해 있다. 신영균이 외투를 벗어 휘발유에게 건넨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먼저 신영균이 비호처럼 몸을 날리며 공격을 시작한다. 두 사내 사이에 일대 접전이 펼쳐진다. 팽팽한 승부다. 김무옥도, 홍만길도 놀라는 눈치다.
김무옥 인자본께 맹물은 아닌디...
양코 ....................?
어느새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싸움은 좀처럼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팽팽하게 전개된다. 한참동안 그렇게 싸우던 문영철과 신영균이 잠시 떨어지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신영균 너 이 새끼... 제법이구나..
문영철 너두.. 입만 살아 나불대는 놈인 줄 알았는데 실력도 쓸만하군.
신영균 하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야..
신영균이 다시 달려들며 또다시 접전이 펼쳐진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 11 우미관 앞(밤)
두한과 김영태가 우미관을 나서려는데, 극장 앞에 서있는 기도들이 서로 소곤대며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김영태 뭔들 하는 거냐?
기도1 (놀라며) 형님들 나오셨습니까?
김영태 관철여관으로 들어갈 테니.. 그렇게들 알고 있어라.
기도1 예, 형님.. 저 그런데...
김영태 ...............?
기도1 영철이 형님이 지방에서 올라온 어떤 오야붕하고 한 판 붙고 있다는데요.
김영태 그래..?
두한 (미소) 형님 말씀대로 신영균이란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군요.
김영태 가보겠나?
두한 제가 가면 자리가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영철이가 알아서 손님대접 잘 하겠지요.
김영태 그럼 그렇게 하게.. 아마 큰 사고는 없을 걸세..
두한 가시죠. (기도들에게) 그럼 수고들 해라.
기도들 예, 형님..
기도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두한과 김영태가 그렇게 사라져간다. 기도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 12 공터
구경꾼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아슬아슬한 결투가 계속되고 있다. 언제 왔는지 이천패와 이정재가 지켜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싸움이 계속되면서 서서히 균형의 추는 문영철에게로 기울기 시작한다. 문영철의 연타가 신영균의 복부와 안면에 연거푸 꽂히면서 신영균이 나가떨어진다. 문영철이 미소를 지으며 덤비라는 시늉을 한다. 신영균이 서서히 일어서는데 눈빛이 이전보다 더욱 매섭다.
신영균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신영균이 반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문영철이 이리저리 피하며 또다시 신영균을 가격한다. 신영균이 충격을 받고 다시 나가떨어진다. 홍만길과 휘발유가 부축을 한다.
홍만길 괜찮겠습니까, 형님?
신영균 ....걱정마.. 난 지지 않아... 절대..!
다시 일어선다.
문영철 웬만하면 이쯤에서 손을 드는 게 어때? 더 싸워봤자 형씨만 다쳐.
신영균 닥쳐, 이 새꺄..
신영균이 멧돼지처럼 돌진하며 문영철의 허리를 붙잡고 구른다. 이후로는 그야말로 막싸움이다. 두 사내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며 처절한 승부를 연출한다.
김무옥 뭐여? 동네 애새끼들 싸움도 아니고... 나 참..
그러나 이미 두 차례나 다운(?)이 됐던 신영균이 힘에서 밀리며.. 문영철이 신영균 위에 올라타 주먹으로 신영균의 면상을 가격한다. 신영균이 축 늘어지자 문영철이 힘겹게 일어난다. 그리고 돌아서 김무옥들에게 다가간다.
신영균 아직 안 끝났어.. 덤벼.. 덤비란 말이야..
문영철 이제 그만 하자. 나두 더 싸울 힘도 없다.
신영균 잔소리 말고 덤벼.. 니가 죽나, 내가 죽나 끝까지 가보는 거야..
문영철 뭐라구?
한쪽에 서 있던 홍만길이 못 말리겠다는 듯 헛웃음 지으며 도리질을 친다. 신영균이 주먹을 휘두르며 문영철을 공격한다. 문영철이 피하며 신영균을 만류한다.
문영철 자 자 그만 하자.. 아 그만 하자니까..
그러는 사이에도 신영균의 주먹질은 계속된다.
문영철 아, 알았어.. 내가 졌다. 내가 졌다구.. 이제 됐냐?
신영균 .....(히죽 웃으며) 짜식.. 진작 그럴 것이지.. 기분이다. 내가 술 한 잔 사마..
문영철 ...? 술을 사겠다고?
신영균 그래, 임마.. 너 정말 세다. 문영철이라고 그랬냐?
문영철 그래...
신영균 (손을 척 내밀며) 나 신영균이다. 만나서 반갑다.
문영철 ................?
신영균 임마, 정식으로 인사하는 거야.
문영철 (미소) 짜식.. 그래 반갑다. 나 문영철이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한 채 서로를 보며 웃는다. 군중들이 어리둥절하며 흩어진다. 이천패와 이정재도 미소를 지으며 돌아선다. 악수를 하고 서 있는 두 사내의 모습에서..
# 13 신불출의 사무실
정진영과 신불출이 마주해 있다. 김해숙도 함께 있다.
신불출 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말일세..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할 것 같네..
정진영 그게 무슨....?
신불출 (탁자에 있는 신문을 가리키며) 이 기사를 좀 보게..
정진영 ..............? (신문을 보는데)
김해숙 구주탄광에서 일어났던 폭발사건 기사예요. 징용자들이 폭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일어난 사건이지요.
정진영 그렇군요. 그런데 왜?
신불출 그 기사를 보면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나? 마구잡이로 징용을 보낸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이 기사는 잘 보여주고 있네.
정진영 .................?
신불출 자네들 대부분은 까막눈에다가 툭하면 사로를 치는 다혈질들이지. 그런 상태로 무작정 징용을 가보게. 제2, 제3의 구주탄광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가 아닌가?
정진영 그래서요?
신불출 그래서라니.. 자네들은 교육을 받아야 하네..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말이야..
정진영 ...............?
신불출 그렇게 총독부에 자청을 하게. 성전을 수행하는 것은 황국 신민의 도리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아서는 오히려 성전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이야..
정진영 .........(끄덕인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두한이가 그렇게 하려고 할지...
신불출 어렵다는 건 나도 잘 아네. 하지만 이건 자네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야.. 지금이라도 난 개별적으로 도망을 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네만..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니 다소나마 저들에게 굽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떠오르지가 않는구만.
정진영 예..잘 알았습니다. 제가 두한이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신불출 (끄덕인다).......
정진영 ....................
# 14 어느 술집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신영균과 우미관패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어울려 흥겹게 술을 마시고 있다.
신영균 하루 이틀 볼 것도 아닌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
문영철 그래. 안 좋았던 일은 다 잊자구.
신영균 (김무옥들에게) 서로 통성명이나 하십시다. 이쪽은 우리 식구들이오. 인사들 해라.
홍만길 홍만길이라고 합니다.
휘발유 휘발윱니다.
문영철 너희들도 인사해라..
삼수 삼수하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양코 (눈치를 보다가) 난 양코..
김무옥 김무옥이여. 영철이하고는 둘도 없는 단짝인께 서로 말 놓고 지내자고..
신영균 두말하면 잔소리지. 반갑다, 김무옥.. 한 잔 하자.
김무옥 그려...
신영균과 김무옥이 잔을 부딪치고 술을 마신다.
신영균 그런데 말이야. 영철이 너한테 궁금한 게 있다.
문영철 뭐가?
신영균 너 같은 대단한 싸움꾼이 왜 김두한이 같은 애송이 밑에 있는 거냐?
문영철 뭐야? 말조심해, 임마. 큰형님한테 애송이라니........
신영균 아니 나는 뭐.. 기분 나빴다면 내가 사과할게..
김무옥 그려. 모르고 한 소리니께 영철이 니가 이해혀라.
문영철 두한이.... 아니 우리 큰형님은 진정한 오야붕이다. 너 소문도 못 들어본 모양이구나..
신영균 소문이야 원래 과장되고 그러는 거 아니냐.
문영철 내가 상대도 안 된다면 믿겠냐?
신영균 정말이야?
문영철 여기 무옥이도 내노라하는 싸움꾼인데 우리 큰형님한테 박살이 났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신영균 그래...? 그저 떠도는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문영철 기라성 같은 경성의 오야붕들이 왜 우리 큰형님한테 그렇게 깍듯한지 이해하겠어?
신영균 네가 그 지경이 되었다면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영철 영균이 너, 우리 큰형님 앞에서 큰소리치고 무사한 걸 다행으로 알어. 잘못했으면 너도 개망신 당했다구. 그래도 큰형님이 널 귀엽게 본 것 같더라........
신영균 날.... 귀엽게 봐? 이 신영균이를.........
신영균과 홍만길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 15 우미관 외경(낮)
웃음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 16 동 사무실
두한과 김영태, 정진영, 김무옥, 문영철, 양코, 삼수, 털보들이 모여 있다.
두한 그래서 싸움에 이기고도 져줬단 말이야?
양코 그 자식 딱 본께 이 양코랑 배짱이 맞더라고.. 한 번 콱 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 말이여..
문영철 어쨌든 이야기를 해보니까 괜찮은 친구더라. 앞으로는 딴지 걸지 않고 고분고분 할 거다.
두한 (끄덕인다).......
김영태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논을 해보세.. 사람들을 불러모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뭔가 일을 시작해야 할 터인데 말이야..
정진영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모두가 사분 오열이 되고 말 겁니다. 제 생각엔 총독부의 책임자와 담판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두한 ......? 담판을 짓다니..? 어떻게.......?
정진영 얼마 전 구주탄광이란 곳에서 징용자들이 폭발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어. 아무런 준비 없이 끌려갔으니 그런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건 너무도 당연했지.
두한 그래서...?
정진영 우리는 그것을 핑계 삼아 부하들을 훈련시킬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생각해 보자는 거야.
두한 시간을 번다...? 최동열 아저씨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라고 하시긴 했다만...
김영태 좋은 이야기는 하네만 저들이 순순히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는가?
정진영 어렵겠지요. 우리가 총독부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자세를 저들에게 보여줘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두한 .................
정진영 어려운 거 알아, 두한아. 하지만 너도 변해야만 해. 이건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야. 때로는 그들을 속이기도 하고 타협도 필요하다구.
두한 ...........(여전히 대답이 없다).......
김영태 할 수 있겠나, 두한이?
정진영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야. 네 자존심보다는 수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생각해봐.
두한 ........(무겁게) 저들이 우릴 만나줄까?
정진영 하야시 오야붕에게 부탁을 하면 그건 어렵지 않을 거야.
두한 하야시?
김영태 그 정도는 별로 어려운 부탁이 아니니 쉽게 들어줄 걸세.
두한 ........좋습니다. 일단 한 번 밀어붙여 보지요.
생각이 많은 두한의 그 모습에서.
# 17 종로서 정문
미와와 오무라가 들어오고 있다.
미와 거리가 이렇게 썰렁할 수가 있나. 도무지 생기가 없구만..
오무라 조센징들이 몸을 사리는 분위깁니다. 징용이나 노력봉사에 어떡하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고 합니다. 물자징발에도 도무지 협조를 하지 않고 있구요.
미와 하여간 조센징들이란..........그게 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일인가. 대일본제국의 영광이 자신들의 것임을 모르다니... 어리석은 조센징들 같으니라구.
오무라 헌데 경부님....긴또깡 그 놈 말입니다.
미와 ..............?
오무라 왜 그놈을 그냥 놔두십니까? 어떡하든 꼬투리를 잡아 한 번 혼쭐을 내버리십시오.
미와 놈이 그러는 것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언젠가 긴또깡은 제 스스로 걸려들게 되어 있어. 나는 지금 그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놈이 아주 높이 날고 있을 때 떨어뜨려야 더욱 즐겁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미와와 오무라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 18 동 고등계 사무실
미와가 들어서자 김태서와 문달영이 일어선다.
미와 일찍들 나왔구만.. 별일 없었나?
문달영 경무부에서 급한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지금 당장 조선어학회라는 단체의 회원들을 잡아들이라고 합니다.
미와 조선어학회? 이유가 뭔가?
문달영 함흥 경찰서에서 불온한 언동을 한 여학생 하나를 체포했는데, 배후를 캐다보니 조선어학회라는 단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와 그래? 어쩐지 수상하더니만 그예 걸려들었군. 지금 당장 일선 경찰서에 명단을 배포하고 한 놈도 빠짐없이 체포하라고 지시를 내려라.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연구를 빌미로 독립을 꾀하려는 불온한 단체다.
형사들 하이, 경부님.
미와 경성은 우리가 맡는다. 우리 종로서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직접 체포한다. 어서 출동 준비해!
미와의 그 모습 위로.......
[해설] 조선어학회 사건.
# 19 몽타주
- 한복을 입고 집필을 하고 있는 최현배의 서재로 미와와 경찰들이 밀어닥친다. 그는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되어 끌려간다.
- 어느 건물 앞, 경찰들이 조선어 학회원들 끌고 나오고 있다.
그 모습들 위로 해설은 계속된다.
[해설]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어 학습을 단계적으로 폐지시킨 일제는 마침내 조선어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학술단체였던 조선어학회에까지 탄압의 손길을 뻗쳤다. 당시 조선어학회가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조선어사전'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일로 일제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어온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그에 굴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조선어사전 원고는 결국 해방과 더불어 옥중에서 풀려난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손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으로 완성되게 된다.
# 20 비너스
최동열이 어두운 표정으로 김이수, 임동호와 마주해 있다.
김이수 우리 글로 된 신문을 모두 없애더니 이제는 조선어 학자들까지 모두 잡아넣는구만..
임동호 큰일이네. 말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 땅을 빼앗긴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네. 이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아예 말살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최동열 ...............
임동호 이렇게 한 세대, 두 세대가 지나가게 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물론이고 그 실체까지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 무서운 일이네.
김이수 그러기 전에 독립을 해야지. 독립 말이야.
임동호 소릴 낮추게 이 사람아.
김이수 젠장.........들을 테면 들으라지.
임동호 동열이.... 자네 잡지사는 어떤가?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나?
최동열 글쎄... 하는 데까지 해봐야겠지.
김이수 망할 놈의 세상.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술이나 마시세.. 안 마시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구만..
최동열 그만 마시게..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일제가 벌인 전쟁 때문에 굶어 죽어가고 있네. 이런 상황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그야말로 사치일세..
김이수 알아... 안다구.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네 말을 들으니 내 운명이 저주스럽구만. 이렇게 퍼 마셔야만 견딜 수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저주스럽다구...
최동열 ......................
# 21 혼마찌 거리 외경(낮)
# 22 동 사무실
두한과 하야시가 독대를하고 있다.
하야시 자네가 나를 다 찾아주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로구만.. 허허허...
두한 긴히 부탁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야시 부탁? 내게 부탁이 있다? 허허허... 말해보게..
두한 총독부 경무국장을 만나봤으면 합니다. 하야시 오야붕께서 좀 도와주십쇼.
하야시 경무국장이라... 징용 문제 때문인가?
두한 그렇습니다.
하야시 ......(끄덕이며) 알았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세.. 헌데 그들을 만나서 어쩔 셈인가?
두한 이대로 징용에 끌려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당분간 징용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해 볼 생각입니다.
하야시 경무국장에게 말인가?
두한 그렇습니다.
하야시 허허허. 이거야... 나로서는 말리고 싶구만.
두한 하야시 오야붕은 다리만 놓아주십시오. 그 후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야시 자네가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구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두한 .................
하야시 더구나 자넨 누구보다 일본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가? 말을 거는 것조차도 말일세. 그랬는데 그들에게 떼를 써보겠다니..... 어쩐지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구만.
두한 ..................
하야시 자넨 이미 조선 주먹패의 최고 오야붕이니 그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 하지만 두한 아우, 그 자리가 자네를 망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게. 조선인이지만 이제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처럼 말일세. 이건 자네를 위해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두한 ......................?
하야시 ...................
# 23 혼마찌 거리
두한과 김영태가 번화한 일본식 상가를 걷고 있다.
두한 지금 제가하는 일이 잘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영태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어.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나?
두한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썩 내키지가 않습니다.
김영태 하야시 오야붕과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두한 하야시 오야붕의 아픔을 봤습니다.
김영태 아픔.........?
두한 그렇습니다.
김영태 글쎄....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야시 오야붕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던가? 그저 강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두한 .....................
김영태 자네가 하야시 오야붕과 이야기를 하고있는 동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 우린 아주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언제 끊어질 지도 모르는 줄 위에서 말이야..
두한 답답한 노릇입니다.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 하겠지만 정말 이래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태 달리 방법이 없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일세..
두한 ................
김영태 가세..
김영태는 두한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일본인들이 즐비한 거리를 빠져나간다.
# 24 심우장
최동열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다. 만해는 이제는 많이 노쇠한 탓인지 허리가 구부정하다.
만해 허허허. 적적하던 차에 잘 왔다. 만공은 통 올라올 생각을 안하고 벽초는 낙향해서 칩거해버렸다. 말동무라도 해줄 벗조차 이 경성 땅에는 아무도 없구나. 허허허..
최동열 ..................
만해 그 동안 오라는 사람은 오지 않고 학병독려 연설회에 참여해 달라는 어리석은 인간들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데, 너라도 나를 찾아주니 반갑기 그지없구나.
최동열 바람도 쐬실 겸 저희 잡지사에라도 들리시지 그러셨습니까?
만해 나도 늙었는지 집을 나서는 것도 이제는 힘에 부치는구나.
최동열 아닙니다. 스님은 아직 정정하십니다. 청아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계시니, 사지육신만 멀쩡하고 정신이 병든 친일 인사들보다 훨씬 더 건강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해 객쩍은 소리일랑 그만두고.........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해다오. 풍문으로 한심해져가는 식자층들의 소식은 좀 듣기는 한다만 하나 같이 믿기 어려운 것들뿐이니....
최동열 이광수와 최남선과 같은 이들은 스님과는 달리 학병 독려 연설에 끌려 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만해 쯧쯧쯧. 얼마 가지 못할 하루살이들이라니.......안타까운 일이다. 그들 중에는 아까운 인재들도 많지만 그 재능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최동열 그래도 송진우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은 신병을 핑계로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만해 음........그래.........
최동열 그리고 노동자와 청년들에게도 징용장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두한이도 그 때문에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만해 죽일 놈들... 앞으로 독립된 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할 청년들을 모두 전쟁터로 내보내려 하다니......그것만은 막아야 할 터인데.... 그것만은.........
만해는 심한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최동열 스님.... 괜찮으십니까?
만해 걱..정... 말..거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나라의 독립을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까.....꼭 독립을.... 보고야... 말 것이야......허허허.
안타까워하는 최동열의 모습에서..........
# 25 다방
우미관패들과 신영균 패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 한쪽에 김무옥과 문영철, 신영균이 앉아 있고, 또 다른 자리에는 양코와 삼수, 홍만길, 휘발유가 앉아 있다. 양코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계속 떠들어댄다.
양코 상상을 해보랑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말이여, 그것도 시퍼런 니뽄도를 든 40여명의 사무라이들과 마주섰다고 생각을 해보란 말이여..
홍만길들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삼수는 피식 웃기만 한다.
양코 상대는 사십명인디 우리는 겨우 다섯 명이여.. 그란디 싸울 엄두가 나겄는가?
휘발유 그래서요? 다섯 명이서 붙은 겁니까?
양코 아 당연하제.. 참말로 그렇게 무시무시헌 싸움이 없었당께.. 사방에서 칼이 번쩍번쩍하고 피가 튀는디..
삼수 (피식 웃는다)........
양코 왜 웃냐?
삼수 아니요.. 직접 보지도 않았는데 너무 실감나게 말씀하셔서요.
양코 뭐여?
홍만길 아니 그럼, 양코 자네는 거기 있지 않았단 말인가?
양코 아 난 말이여.. 그 때, 그 전날 밤에 말이여.. 종로회관에 쳐들어온 아사히마찌 애들하고 싸움을 하느라고...
휘발유 에이.. 난 또..
양코 아따 이 자식은 성님 말씀허시는데 괜히 끼어들어가지고.. 여그 엽차 쪼까 더 주씨요.
홍만길과 휘발유가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는데, 다방 문이 열리며 이천패들과 이정재가 안으로 들어온다. 신영균이 먼저 그들을 보았다.
장도리 우미관 분들이시구만.. 나 이천에 장도리요. 그리고 이쪽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오. 자네도 인사하지.
이정재 이정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무옥 이정재라.. 거 이름 한 번 쎄련됐는데..
장도리 하하하. 이름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 제법 경력도 화려하다오. 전국씨름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오.
김무옥 아 그려요? 보아하니 힘께나 쓰시겠구만..
이정재 .............
장도리 그건 그렇고... 우미관 아우님들이 있으니 물어 봅시다. 도무지 언제까지 경성에 있어야 하는 것이오. 어떻게 되어가는지 답답해서 말이오.
문영철 저희들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저희 김두한 큰형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믿고 계십시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장도리 .................
이정재는 눈빛을 번득이며 뭔가를 생각한다.
김무옥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 친구를 저렇게 세워 둘 수도 읎는 일이고.. 어디 가서 간단하게 목이나 축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영균 그래.. 그렇게 하자고.. 형님, 일어서시죠.
장도리 그러지 뭐...
그들 자리에서 일어서면
# 26 종로서 외경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 27 동 고등계
미와 옆에서 전화를 받는 오무라의 표정이 극도로 경직된다.
오무라 하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수화기를 막고) 경부님....... 전화 받아보십시오.
미와 어디에서 걸려온 건가?
오무라 경무국장실입니다.
미와 그래? (수화기를 건네 받으며 자세를 바로 한다) 하이, 미와 경붑니다. (사이) 예? 긴또깡 말씀입니까? 그 자는 저희 고등계 특별 관리 대상입니다만......... (사이) 하이, 곧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미와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문달영 갑자기 경무국에서 무슨 일입니까?
미와 급히 긴또깡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라는 명령이다.
문달영 긴또깡에 관해서요?
미와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형사들 ................?
미와 오무라.
오무라 하이.
미와 자네가 그 일을 맡도록 하게. 오늘 내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해.
오무라 알겠습니다.
미와 그리고 긴또깡과 우미관 패거리들을 철저히 감시하라. 모두들 알겠나?
형사들 하이.
미와 경무국에서 특별 지시가 내려왔으니 정신들 바짝 차리란 말이다.
형사들 하이.
# 28 종로회관
그들 모두가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모두 장도리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장도리 물론 자존심이 없는 주먹들이 어디 있겠소만은 북쪽의 주먹들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지. 그들은 우미관이나 경성의 주먹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게 맞을 거요.
모두들 ..................
장도리 이번 오야붕 회의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이유라고 해야할 것이오.
문영철 그들 중에 제일 센 사람이 누굽니까?
장도리 허허허. 글쎄.....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고.. 사실 그들보다는 지금 중국에 있다는 시라소니라는 사람이 아마 제일 셀 거요.
김무옥 시라소니라고라...?
장도리 못난 호랑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별명이라고 하는데 소문만 들어보아도 엄청난 싸움꾼이오. 안주의 거물 박두성을 찾아가 박치기 한방으로 보내버린 일화는 북쪽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요.
신영균 박두성이라면 이화룡, 아오끼와 더불어 평안도 일대를 잡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장도리 그렇지. 그 싸움으로 인해 시라소니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네.
문영철 그렇다면 그 자가 북쪽을 휘어잡고 있겠군요?
장도리 글쎄.....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소. 오히려 거느린 식구들로 치자면 이화룡이 가장 큰 세력일거요. 시라소니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해서 늘 혼자 떠돌아다닌다고 들었소.
신영균 거 참 재미있는 자로군요.
이정재 김두한 오야붕과 붙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장도리 글쎄... (문영철들의 눈치를 보며) 난처한 질문이군.
김무옥 아따 그거야 당연히 두한이..... 아니 우리 큰형님이 이기제.. 싸움으로는 우리 큰형님을 당할 사람이 없당께..
이정재 과연 그럴까요? 제가 알기로는 시라소니 역시 맞짱을 떠서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김무옥 그려서? 이형은 시라소니가 이길 거라 이 말이요?
이정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무옥 뭐여?
김무옥과 이정재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기싸움을 한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장도리 하하하. 아우님들 왜 이러시나?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신영균 (이정재와 김무옥을 보고는) 볼만하겠는데요? 둘이 붙으면 정말 볼만하겠어요.
장도리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두한 오야붕이 중국에 가지 않는 한 말일세..
신영균 그게 아니라요, 무옥이하고 정재 말입니다. 한쪽은 씨름을 했고, 또 한 쪽은 유도를 했습니다. 누가 더 셀까요?
문영철 야, 영균아.. 어제 우리 둘이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젠 다른 사람들 싸움을 붙이는 거냐?
신영균 아니 뭐... 굳이 싸울 필요까지 있겠어? 팔씨름 같은 걸로 겨뤄볼 수도 있는 거잖아..
장도리 팔씨름이라.. 거 재미있겠구만.. (이정재에게) 한 번 해보겠나?
이정재 아닙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신영균 아니 왜..........? 천하장사 출신이면 악력도 자신이 있을 텐데..........
김무옥 냅둬라. 예전에 신마적이나 구마적쯤 되믄 모를까....... 나도 억지로 힘자랑을하고 싶진 않으니께.
이정재 ...................
장도리 싸움도 아니니까 부담 가질 거 없이 한 번 겨루어보게.
이정재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이정재는 먼저 탁자 위로 팔씨름 자세를 취한다. 김무옥은 슬쩍 코웃음을 치는가 싶더니 그 팔을 맞잡는다. 문영철과 장도리가 흥미롭게 주시한다.
신영균 그럼 심판은 공평하게 내가 봐야겠구만.. 자 힘들 단단히 주라구.
부르르 탁자가 떨리며 대치전이 시작된다. 곧 신영균이 손을 놓아주자 두 사람은 팔씨름을 시작한다. 모두의 얼굴에 결과를 놓고 긴장이 감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김무옥 쪽이다. 문영철도 그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가로젓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정재가 맥없이 힘을 풀어버린다.
이정재 제가 졌습니다.
김무옥 ..............?
이정재 힘이 빠져서 더 이상은 무리일 듯 싶습니다.
장도리 (만족한 듯) 자.. 자.. 정재 아우가 졌으니 술값은 우리 쪽에서 내겠소.
그러나 김무옥은 승자의 표정이 아니다. 문영철이 의아한 듯 이정재를 넘겨본다.
# 29 종로 거리(밤)
이천패와 신영균들과 헤어진 듯 김무옥과 문영철이 오고 있다.
김무옥 이상한 놈이여. 왜 져줬을까?
문영철 정말 그랬냐?
김무옥 잉.. 나가 힘이 딸리더라고...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네. 어찌 보면 음흉한 것 같기두하고...
문영철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니 체면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걸 거다. 어쨌든 아주 영리한 자인 것만은 분명해.
김무옥 그런 바윗덩어리 같은 놈은 처음이여. 싸움도 보통 이상일 거구만.
문영철 .................
# 30 우미관 사무실
한 마디 말도 없이 두한과 김영태, 정진영이 앉아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정진영 지금쯤이면 무슨 소식이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혼마찌에 연락을 해볼까요?
김영태 아닐세..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두한 ...............(생각이 많다).......
# 31 혼마찌 사무실
하야시가 전화를 받고 있다.
하야시 아 내일 오전에 말입니까? 하하하.. 감사합니다. 직접 찾아 뵙고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국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미우라가 하야시에게서 수화기를 받아 내려놓는다.
시바루 김두한 오야붕의 면담 요청을 받아준 겁니까?
하야시 그렇다. 멍석은 내가 깔아줬으니 이제 김두한이 재주를 부리는 일만 남은 것 같구나.
시바루 ...............
하야시 미우라..
미우라 하이.
하야시 우미관에 전화를 넣어주도록 해라. 내일 오전 중으로 경무국장실로 찾아가라고 말이야.
미우라 하이..
하야시 .................
하야시는 생각이 많다.
# 32 우미관 외경(낮)
# 33 동 사무실
두한을 비롯해 우미관패들이 전부 모여 있다. 모두들 긴장해 있는 표정이다.
김영태 경무국장은 내무와 경찰을 총괄하는 사람일세... 총독부에서 총독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일세..
두한 ...................
김영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할걸세.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고... 진영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정진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김영태 지금 출발하도록 하세.
그러나 두한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김영태 두한이..........?
두한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천천히 가시죠.
김영태 하지만..............
김영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뭔가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사무실 안을 흐른다. 두한은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김좌진으로부터 받은 회중시계다. 두한은 덮개를 열어 시간을 본다.
# 34 종로서 고등계
미와는 말채찍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
미와 이상한 일이구만.. 국장 각하께서 긴또깡과 같은 자를 무엇 때문에 만나신단 말인가?
오무라 얼마 전 경무국에서 긴또깡에 대해 물어온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미와 음...............
오무라 어떤 식이로든 하야시가 개입되어 있을 겁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미와 하야시라면 그럴 능력이 있지.
김태서 이건 그저 제 추측입니다만..... 긴또깡이 각지의 주먹패들을 불러들여 설쳐댄 것은 바로 징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징용에 관련된 뭔가를 요구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와 그럴 수도 있겠지.. 정말 궁금해 미치겠구만. 그렇다고 국장실에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고..... 긴또깡이 경무국에서 나오는 대로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게.
오무라 하이, 경부님.
미와 .....................
# 35 종로 거리
두한과 정진영, 김영태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오고 있다.
# 36 경무국장 비서실
문이 열리고 두한들이 정복 경찰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온다. 비서가 일어나 그들을 맞는다.
비서 어서 오시오. 김두한 씨가 누구요?
두한 내가 김두한이오.
비서 잠시 기다리시오.
비서가 국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두한은 다소 상기된 표정이다. 잠시 후 비서가 나온다.
비서 들어오시오.
두한이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 37 동 경무국장실
두한이 비서의 안내를 받아 국장실로 들어선다. 국장실은 보기에도 화려한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다. 커다란 창문 앞으로 작은 키의 단게 국장이 등을 보인 채 서있다.
단게 (여전히 등을 보이고) 네가 김두한인가?
두한 그렇소.
단게 청산리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의 위대한 황군을 몰살시킨 김좌진이 네 아버지라지...?
두한 그렇소. 내가 그 분의 아들이오.
단게 하야시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너 같은 놈 따윈 만나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한 ... (주먹을 불끈 쥔다)
단게 (돌아서며) 내게 건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빨리 말하고 사라져라.
두한 ......................
단게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두한이 징용장을 꺼내 안게 앞으로 내민다.
단게 이게 뭔가?
두한 당신들이 일방적으로 발부한 징용장이오.
단게 징용장?
두한 그렇소. 이것을 돌려주려고 온 것이오.
단게 ...................?
두한 나를 포함한 전 조선의 주먹들은 징용을 가지 않을 것이오.
단게 뭐라?
두한 징용을 가지 않겠다고 했소. 당신들은 절대 우리를 징용에 보낼 수 없을 것이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