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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수영 부문 22개 메달(18개는 금메달) 획득이라는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마이클 펠프스의 경력이라곤 열 살 때 세운 미국 국내 기록과 열다섯 살 때 2000년도 시드니올림픽 예선전에 출전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수많은 친구들이 즐기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수영이 훨씬 덜 흥미롭게 여겨지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실제로 수영을 그만두고 고등학교 골프 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지난 가을에야 펠프스는 마침내 수영을 그만두고 골프를 시작했고, 가까운 장래에 골프는 그가 가장 선호하는 종목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라이더컵에는 데이비스 러브 3세의 초대를 받아 참가했다. 그 다음주에는 폴 케이시와 스코틀랜드에서 알프레드던힐링크스챔피언십에 출전했다. 그 이전에 수많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그랬던 것처럼 펠프스도 스크래치 골퍼가 되고 싶어한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Q골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A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타이거의 샷인데, 아마 마스터즈였을까? 그 칩 샷은 정말 엄청났다. 아마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걸 100번은 봤을 것 같은데,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Q하지만 어릴 때는 한 번도 플레이를 해본 적이 없지 않나?
A골프를 하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두어 해 전에야 처음으로 볼을 쳐봤다. 하루는 그냥 무작정 몇몇 사람을 따라 연습장에 갔다. 제법 재미있었고, 나도 클럽을 빌려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면서 말했다. “클럽을 사러 가자.” 다음날 친구들과 우르르 플레이를 하러 나갔는데 ‘와, 여기에 빠질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Q당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영 선수이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올림픽 선수라고도 할 수 있다. 골퍼로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A형편없다. 나도 그걸 알고 있다. 평생 딱 두 번 레슨을 받았는데, 두 번 다 행크 해니에게서였다. 어쩌나 나오는 샷이 엄청나게 근사할 때도 있지만, 그걸 반복해서 재현해보라고 한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Q핸디캡은 어떻게 되나?
A최고가 얼마지? (웃음) 처음으로 18홀을 했을 때 106타를 기록했다. 그게 2년쯤 전이었다. 그 후로 최고 스코어는 롱뷰(지금은 폭스홀로우로 이름을 바꾼 곳, 볼티모어 외곽에 있다)에서 기록한 91타였다. 거기서는 어떤 페어웨이에도 볼을 올릴 수 있다.
Q행크가 첫 번째 레슨에서 가르쳐준 것은 무엇인가?
A두어 해 전에 내 재단에서 골프 행사를 개최했을 때였다. 그는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내 그립, 볼을 대하는 태도, 스윙. 그는 올바른 동작의 습관을 들이라고 했다. 연습장에 이어 우리는 몇 홀을 함께 플레이했는데, 나는 “더 이상 하기 싫어!” 이런 심정이었다. 하지만 행크는 봐주지 않았다. “다시! 다시! 티를 꽂고 볼을 올려!” 너무 버거운 경험이었다.
Q장점과 단점을 꼽는다면?
A3번 우드와 드라이버 샷은 비교적 곧은 편이다. 아이언 샷은 정말 힘든데, 100야드 미만의 거리에서는 자신 있게 스윙을 하지 못한다.
Q드라이버 샷의 비거리는?
A들쭉날쭉하지만 제대로 맞을 때면 아마 300야드에 가깝거나 어쩌면 그것보다 조금 더 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단 페어웨이에 볼을 올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Q혹시 코스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적이 있나?
A물론이다. 클럽을 던져버렸다. 7번 아이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게 나무에 박혔다.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승부욕이 강한지 알기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골프에서만큼은 내가 자신들을 이길 수 없다’며 놀리곤 한다.Q 가장 플레이를 자주하는 코스는 어디인가?
A아마 롱뷰 Longview 아니면 케이브스밸리 Caves Valley일 것이다. 나는 케이브스를 정말 좋아한다. 유일한 흠이라면 그곳에서는 걸어서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걷는 게 싫다.
Q 코스에서 가장 민망했던 순간은?
A친구랑 내가 카트에 타고 있었는데, 다른 카트에 탄 친구들이 아주 비좁은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미끄러졌다. 아주 심각했다. 대단히 깊은 벙커였다.
Q설마 그 카트에 맥주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
A물론 카트에 맥주 몇 캔이 있는 날도 있다. 코스에 나가서 세상 시름을 다 잊는 건 즐거운 일이다.
Q어떤 사람들은 골프를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고, 골퍼도 운동 선수라고 보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A어떻게 이걸 스포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타이거, 로리, 투어에서 활동하는 그 많은 선수를 보고도? 그들은 어느 모로 보나 강인한 운동 선수다.
Q많은 사람,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 앞에서 골프를 하는 것과 수영장 출발대 위에 오르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긴장되나?
A수영을 할 때는 전혀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 물로 뛰어드는 건 내가 20년 동안 해온 일이다. 하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골프를 하는 건 긴장된다. 너무 싫다. ‘포어! Fore’ 사람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많이 듣는다.
Q200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를 획득하고, 스피도 Speedo에서 받은 100만달러의 보너스로 마이클펠프스재단을 세웠다. 이유가 뭔가?
A예전부터 내가 받은 걸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교육계에 오래 종사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활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돕고, 인생의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꿈이다.
Q당신의 ‘아이앰 im’ 프로그램의 1단계는 ‘아이앰 세이프 im safe’인데, ‘나는 물놀이에 안전하다’라는 뜻인가?
A익사 사고가 전 세계적으로 14세 미만 아동 사망 원인 1~2위를 다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수영하는 법과 물에서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겁 먹고, 어떤 부모는 아예 아이를 물 근처에 보내지 않으려 한다. 브롱크 Bronx에서 온 한 꼬마는 몇 번을 시도했는데도 좀처럼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그 다음 해에 다시 왔는데도 여전히 배우지 못했다. 마침내 세 번째 해에 수영하는 법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도 편안해하고 물놀이를 즐긴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 무엇도 나를 막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Q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스크래치 골퍼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A나는 많은 것을 너무나 쉽게 익히고 터득할 수 있었는데, 골프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골프가 좋다. 나는 다만 친구와 승부를 겨루고, 그들을 전부 이길 수 있게 되기만을 원한다. 쉬웠다면 누구나 스크래치 골퍼가 됐을 것이다. _ 크레이그 베스트롬 Craig Bestrom
민주당의 전국 전당대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뉴저지 저지시티에 있는 리버티내셔널 Liberty National에서 똑같은 카리스마와 더불어 뛰어난 골프 실력을 선보였다. 유명 셰프인 마리오 바탈의 연례 자선대회에 참가한 그는 여섯 시간에 걸쳐 ‘대략 85타’를 쳤다.
열두 살 때 삼촌에게서 처음 배웠다는 이 게임에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푹 빠져 있는 클린턴은 골프 얘기라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미국프로골프 PGA투어의 휴매너챌린지와 클린턴재단이 주체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클린턴재단은 건강컨퍼런스 Health Matters Conference를 통해 투어와 협력을 맺고서 예전의 봅호프데저트클래식을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프로 대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Q골프가 다시 한 번 당신의 삶에서 1순위가 된 것 같다.
A올해 들어 실력을 되찾으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올해 대략 25번쯤 라운드를 한 것 같다.
Q가장 기억에 남는 라운드라면?
A올 여름에 친구인 지미 던과 시네콕 Shinnecock에서 플레이를 했었다. 내가 무척 아끼는 곳이다. 움푹 파인 형태의 처음 일곱 홀은 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우주의 고요 같아서 골프의 사원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거기서 90타의 벽을 깼다.
Q지금까지 기록한 최고의 18홀 라운드 스코어는?
A캠프데이비드 아래쪽의 어느 작은 코스에서 76타를 기록했던 적이 한 번 있는 것 같다. 그곳의 후반 나인에는 거의 600야드에 달하는 파5 홀이 있다. 한 번은 대통령 재임 중에 두 타만에 볼을 홀컵 5야드 거리까지 보낸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캘거리의 한 코스에서 플레이를 하던 중이었는데, 16번 홀에서 9미터 버디 퍼팅을 성공한 후 보기로만 전부 마무리하더라도 78이나 79타를 기록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연설 시간이 촉박해서 중간에 그만둬야 했다.
Q언젠가 열다섯살 때 파3 홀에서 홀컵 2~3센티미터 앞에 멈춘 5번 아이언 샷 때문에 골프에 빠지게 됐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골프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게 해준 순간이 있었다면?
A내 골프 인생 최고의 시기는 백악관에서 나온 첫 해였다. 아직 건강했던 터라 비거리는 길었고, 핸디캡을 10까지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티 Haiti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다른 건 아무 것도 중단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한 번만 제외하면 2년 동안은 플레이를 그만두다시피 했다. 지금도 두 번째 심장 수술 절차를 밟고 있어서 식단도 바꿨고, 몸이 쇠약해져서 플레이를 잘 못한다. 한 번은 나갔다가 85타도 깨고 볼도 멀리 날아가기에 ‘그래 나 아직 안 죽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무렴 그래야지. 거의 포기할 마음이 들었을 때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Q지금 당신의 가방에는 어떤 클럽이 들어 있나?
A가장 최근에 나온 테일러메이드 드라이버, 3번 우드, 그리고 5번 우드를 사용한다. 지난 몇 해 동안은 3번 우드 샷을 일관되게 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이걸로는 샷을 잘 할 수 있다. 오래된, 로프트 23도 캘러웨이 하이브리드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테일러메이드의 아이언 몇 개는 최신판은 아니지만, 그걸로 제법 좋은 플레이를 한다. 집에 있을 때는 캘러웨이의 오래된 아이언으로도 플레이를 한다. 그리고 흰색이 아닌 검은색 인서트가 들어간 오래된 오딧세이 투볼 퍼터가 있다. 내가 말렛 헤드를 좋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걸로는 그린 밖에서도 상당히 좋은 퍼팅을 할 수 있고, 거리 판단도 정확하다. 둘째, 마흔이 된 후로 시력이 썩 좋지 않은데, 여기에는 줄이 세 개 들어가 있어서 퍼팅 라인 읽기가 쉽다. 3~4번 아이언은 대체로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로브웨지를 하나 구입할 예정인데 벙커에 많이 빠지기 때문에 거기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도 받고, 그린을 넘어가는 일을 줄이고 싶어서다.
Q부시 대통령은 우리의 병사가 해외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동안 골프를 한 게 부적절했다고 얘기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골프를 너무 자주 즐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통령이 골프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나는 어느 대통령이든 골프 코스에 있는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쉴 필요가 있다. 그들도 운동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그리고 그야말로 세상사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뭔가가 필요하다. 내가 오바마 대통령과 플레이를 했던 날, 잠을 세 시간밖에 못잔 탓에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전화해서 ‘골프를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가야 한다.
Q누가 이겼나?
A그날은 대통령이 한 타 차로 나를 이겼다. 보통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보다 비거리가 훨씬 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다운블로로 볼을 맞히기보다 떠올리는 경향이 있긴 했어도 대통령이 플레이를 아주 잘 했다. 농구 코트에서 발휘하던 실력에다가 큰 키의 강단 있는 체력에서 좋은 스윙이 나온다. 백악관에서 나오면 금방이라도 핸디캡을 한 자리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Q클린턴재단은 휴매너챌린지와 제휴를 맺고 사실상 폐지됐던 봅호프데저트클래식을 다시 살려냈다. 제휴 첫 해에 배운 것이 있다면?
A골퍼가 우리 사회에 관심이 많다는 것, 코미디언 봅 호프의 정신이 꾸준히 계승되길 원한다는 것, 그들이 사회에 많은 것을 나눠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골퍼가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태도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노타 비게이다. 그는 선수로서 매우 성공적인 활동을 했었지만, 미국 원주민 출신으로 자신의 부족과 그들의 건강이나 생활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덜 쏟았다면 아마 더 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골퍼가 돈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노력을 기울인다는 걸 알게 됐다.
Q젊은 세대의 건강과 복지 증진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나?
A지금 우리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건강 질환을 치료하는 데 1400억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 그중 많은 병이 당뇨 합병증이고, 심장질환과 뇌졸중을 비롯한 여러 가지가 있다. 질병 치료 비용을 낮추려면 자신을 더 잘 돌봐야 한다.
Q 골프가 건강에 도움이 될까?
A물론이다. 바람이 부는 날 코스를 걸으면서 18홀 플레이를 한다면 골프가 스포츠가 아니며 골퍼를 운동 선수로 볼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돌아가신 내 양아버지가 여든아홉까지 그렇게 정정하실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골프를 여한 없이 즐기셨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Q플레이를 할 때는 걷는 편인가,
카트를 타는 편인가?
A가능하면 걷는 걸 좋아한다. 절반만 걷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골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확실해진다. 그것도 골프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다. _CB
이번에 소개하는 ‘골프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골프 애호가’ 중에서도 마이클 J. 폭스는 가장 많은 것을 나눠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J. 폭스의 파킨슨연구재단에서는 12년 동안 이 질병 연구에 3억달러를 지원했다. “이 병의 치료 외에 다른 프로젝트는 없다.” 올해 쉰하나인 폭스는 말했다. <백 투 더 퓨처>를 통해 스타 반열에 오른 그는 1991년에 파킨슨 진단을 받았고, 98년에 그 사실을 공개했다.
폭스는 여전히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걸 좋아하고, 2000년대 중반에 처음 골프를 시작했을 당시를 떠올리면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때 그의 골프 삼촌들은 ‘제발 어드레스를 했을 때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어드레스에서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수프를 먹을 때도 몸이 저절로 떨리는 파킨슨 환자한테?”
Q진단을 받은 지도 20년이 지났다. 건강은 어떤가?
최근 들어 아주 상태가 좋고, 일을 조금 더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굿 와이프>라는 작품을 했고 <열정을 좀 참아요 Curb your Enthusiasm>라는 시트콤의 한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 그리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면서 <스핀 시티 Spin City>와 <백 투 터 퓨처>라는 영화, 그리고 <패밀리 타이 Family Ties> 이후로는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도 했다.
QNBC에서 방영될 시트콤은 당신의 삶을 어느 정도 참고했다던데?
A그리고 내 배역은 골프를 즐기고, 내용에 골프가 포함될 게 확실하다.
Q <열정을 좀 참아요>에서 래리 데이비드와 함께 파킨슨병의 증상을 기꺼이 드러낸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Q그리고 골프가 당신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Q캐나다에서 자랄 때는 하키와 라크로스를 했다고 들었는데, 왜 골프는 하지 않았던 건가?
A플레이를 할 돈이 없었다. 그때는 퍼스트 티도 등장하기 전이었고, 나는 부유한 집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취미로 운동을 하기 위해 모은 돈은 하키와 스키에 쏟아부었다. 그러다 20대 때 그 당시 활동하던 어느 배우가 골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골프를 할 시간은 충분하다. 죽고 나면.’
Q그러다가 골프를 시작했다.
A타이거가 큰 영향을 미쳤고, 애니카 소렌스탐도 영향을 주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남자 대회에 출전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 근사하다. 이건 모험가의 스포츠구나.’
Q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A내가 ‘골프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팀 심슨, 캠 닐리, 그리고 내 친구인 테드 데이비스 등인데 처음에 테드를 따라 나갔을 땐 민망했다. 하지만 테드는 내가 1번 홀에서 티 샷을 하고 실제로 2온을 할 실력을 갖게 될 때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내인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골프 삼촌들이 잘하지도 못하는 내 플레이를 참아준 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어느 정도 플레이를 하게 됐으니 얼마나 근사해.” 그랬더니 아내가 말했다. “그래, 그 사람들은 마약 거래상이고 그래서 당신을 중독자로 만든 꼴이지!”
Q파킨슨병이라면 플레이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Q18홀을 걸어서 플레이하고 나면 얼마나 피곤한가?
A아, 그래서 피하주사를 꽂고 한다(웃음)! 너무 쉽게 피곤해지기 때문에 걷기가 힘들다. 그런데 지난 여름에 내셔널골프링크스오브아메리카에서 플레이를 해야 했고, 걸어서 플레이를 해야 했다. 18번 홀에서 내려왔을 땐 음료수 잔조차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Q 아들이나 딸도 골프를 하나?
Q골프 중계를 자주 본다던데,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인가?
Q당신의 재단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이라면?
A나는 파킨슨병에 걸린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이렇게 말한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누가 이 병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바로 우리가!” 정말 감동적인 건 이렇게 말하는 파킨슨병 환자를 만날 때다. “당신이 공개하기 전까지 나는 이 병을 숨겼지만 지금은 누가 ‘무슨 병이냐?’고 물어서 파킨슨병이라고 하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 ‘아, 마이클 폭스와 같은 병이군요.’” 이제야 혼자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어딘가에 속한 느낌이 든다.
Q구글의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그의 아내인 앤 워지츠키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A세르게이와 앤은 늘 대단히 너그러웠다. 세르게이는 집안에 파킨슨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유전자가 있고, 그래서 그와 앤은 올해 12월31일까지 우리가 새로 모금하는 기부금에 매칭 펀드를 제공하기로 했다. 나이키는 <백 투 더 퓨처 2>에서 매그가 신었던 신발을 이베이에서 경매에 붙였고, 400만달러를 넘게 모금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돈이 거의 1000만달러에 달한다. _CB
오래 전 십대 시절에 모건 프리먼은 캐디를 했고 ‘18홀 동안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다닌 대가’로 1달러를 벌었다. 그때 그의 꿈은 오로지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이제 레드퍼드, 뉴먼, 해크먼, 호프만, 이스트우드와 니콜슨 같은 쟁쟁한 거물과 두루 호흡을 맞춰봤고, 오스카와 골든글로브는 물론이고 얼마 전에는 연예계에 공헌한 기여를 인정받아 2012년 세실 B. 드밀 어워드까지 수상했지만, 지금 그의 꿈은 오로지 골프 실력을 쌓는 것이다.
프리먼은 당분간 한손에만 의존해야 하는 처지인데, 2008년의 자동차 사고로 인해 왼손이 손목부터 손톱까지 사실상 마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올해 일흔다섯인 프리먼은 골프에 푹 빠져 있기로 유명하다. 미시시피의 집에 있을 때는 바이유벤드에서 플레이를 하고, 주변의 그 누구보다 골프채널과 중계방송을 더 많이 시청한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좋아하지 않지만, 골프와 <골프 다이제스트>였기 때문에 마음을 연 그는 자신의 BMW 7 시리즈를 몰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멤피스까지 우리를 만나러 와주었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인터뷰가 모두 끝나고 자리를 떠날 때 그는 말했다.
Q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갑다. 8월에 인터넷에 ‘모건 프리먼이 죽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던 걸 알고 있나?
A그건 거짓 소문이라기보다 오해에 기초한 잘못된 정보였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인 하버드 대학 교수인 알 프리먼 주니어가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프리먼, 배우 뭐, 모든 사람의 귀에 들어갈 만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Q올해 일흔다섯인데도 일을 한다. 가장 최근에 한 작품은 무엇인가?
A올해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첫 번째는 <나우 유 씨 미 Now You See Me>라는 작품인데, 은행에서 돈이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톰 크루즈와는 미래를 다룬 SF영화인 <오블리비언 Oblivion>’을 함께 했다. 그리고 <올림푸스 해즈 폴른 Olympus Has Fallen>이라는 영화의 촬영을 막 끝냈는데, 백악관 탈취를 다룬 액션 영화다. 지금은 마이클 더글러스, 로버트 드니로, 그리고 케빈 클라인과 <라스트 베이거스 Last Vagas>라는 영화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이 네 명의 노인네가 그 중 한 친구의 총각 파티를 위해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는 내용이다.
Q신을 연기하는 것과 만델라를 연기하는 것, 그리고 골프를 하는 것 중에서 뭐가 더 힘든가?
A신을 연기하는 게 그중 제일 쉽다. 만델라는 정말 대단히 편안한 사람이었고, 유머 감각도 아주 탁월했다. 골프가 어렵다. 너무, 너무 어렵다.
Q그런 일정을 소화하면서 플레이할 시간이 많나?
A올해 스물, 스물다섯 라운드는 너끈히 했다. 영화 촬영을 하다 보면 중간에 비는 시간이 많다.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을 찍는 날이다. 그러면 그런 날은 골프를 하는 날이 된다. 어느 도시에 가든 나는 골프 코스를 찾아간다. 뉴올리언스에 있을 때는 이틀에 한 번꼴로 플레이를 했다.
Q다른 배우와도 플레이를 하나? 크루즈, 아니면 영화 <버킷 리스트>에 함께 출연했던 니콜슨은 어떤가?
A아니, 두 사람 중 누구와도 플레이를 해본 적은 없다. 내 대역과 플레이를 한다. 그는 구력이 오래된 골퍼다. 내 운전기사도 플레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코스에 가면 플레이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늘 만날 수 있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는 아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우리는 토렌스 인근의 퍼블릭 코스에서 플레이 한다. 샌디에이고에서는 토리파인스 Torrey Pines에서 플레이를 했었다. 애리조나의 세븐캐년스 Seven Canyons도 좋았다.
Q지금은 한 손만으로 플레이 한다.
A맞다. 오른손만으로 스윙을 한다. 4년 전에 큰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내가 기절을 했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고속도로를 벗어나면서 차가 구르고, 구르고, 계속 굴러서 내 몸의 왼쪽이 거의 바스러졌다. 그 사고로 인해 왼손이 마비가 됐다. 이걸 쓰지 못한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Q그런데도 계속 골프를 하는 건가?
A두 손을 사용할 때에 비해 더 나빠진 줄은 모르겠다(웃음).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240야드나 260야드를 날리지는 못하지만, 시도하는 건 즐겁다.
Q모건 프리먼이 이렇게 골프를 사랑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언제부터 골프에 빠지게 됐나?
A미시시피주 그린우드에서 캐디를 하던 때가 기억난다. 나는 열셋, 아니면 열넷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골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10~12년 전에야 골프를 시작했다. 타이거 우즈가 나타난 후였다.
Q당신의 플랜잇나우재단 Plan it now Foundation에서는 올 초에 마이클 더글러스 & 친구들과 제휴 관계를 맺었는데, 골프를 통해 사회 환원을 하려는 시도는 그게 유일하다.
A 사회 환원을 한다고 내 등을 두드리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삶이 우리에게 너그러웠다면, 우리도 삶에 너그러워야 마땅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은 그랬다. 자선 대회에서 골프를 하는 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즐거운 방법이다.
Q모건프리먼재단도 있나?
A록리버 Rock River재단이라고 부른다. 그걸 설립한 이유는 세상에 나온 후에야 내가 그린우드에 있는 흑백분리 학교에서 정말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Q골프 코스에서 경험한 최고의 순간을 말해준다면?
A소우그라스의 17번과 18번 홀에서 파 세이브를 했던 때였던 것 같다. 비제이 싱이 다가와 팬이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래서 마지막 다섯 홀을 함께 플레이했고, 원 포인트 레슨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었다! 17번 홀에서 나는 호쾌한 샷을 그린에 올렸다. 아마도 9번 아이언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18번 홀에서는 좋은 드라이버 샷에 이어 좋은 어프로치 샷을 해서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Q 반면에 가장 민망한 순간이라면?
A1월에 열린 휴매너챌린지였나. 첫 번째 날에는 볼을 전혀 맞혀내지 못했다. 5센티미터 뒤를 맞히거나 토핑이 났다. 온갖 끔찍한 실수가 이어졌다.
Q그런데다가 한 손으로 했다. 그 대회에서 다시 플레이할 생각인가?
A당연하다. 자선의 의미가 더 크다. 골프를 하는 멋진 모습을 자랑하러 나가는 게 아니다. 내 말은, 그러면 좋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Q텔레비전에서는 주로 골프를 본다고 했고, 골프에 푹 빠져서 실력이 늘기를 바라고 있다. 골프를 이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뭔가?
A골프는 내가 어른이 되어 참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스포츠였다. 예전에는 볼링도 했고 롤러스케이트도 탔었지만, 그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골프는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지막 드라이버 샷을 하고 무릎이 꺾이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_ CB
2003년에 펌프킨리지에서 열린 US여자오픈을 마치고 캐나다여자오픈을 위해 차를 몰고 가던 중에 크리스티 커의 인생은 달라졌다.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 사실을 통보받은 건 두 주 전이었지만, 행여 내 플레이에 영향을 끼칠까봐 오픈이 끝나고서야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유방의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여덟 달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본 후 커는 2004년에 ‘유방암을 위한 버디’를 시작하고 버디 하나를 할 때마다 고 에블린 로더가 설립한 유방암연구재단에 50달러씩 기부했다. 그러자 커의 후원업체도 같은 금액을 내놓았다. 05년에는 기금 마련을 위해 처음으로 프로암을 개최했다. 그 후 8년에 걸쳐 200만달러 이상을 모았을 때 커의 어머니는 병의 진행이 완화되었고, 커의 BFBC유명인사프로암은 뉴저지의 저지시티에 있는 리버티내셔널에서 해마다 개최되었다.
저지시티의료원의 ‘크리스티 커 여성 건강 센터’는 그녀의 재단으로부터 부분적인 지원을 받으며 무료 유방암 검사와 조직검사, 남녀 모두를 위한 의료조언을 실시한다. 이 센터에서는 2년 동안 1만4000명의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 중 25퍼센트는 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뭔가에 자신의 이름을 걸어놓고 다른 사람이 그걸 컨트롤하게 방치할 경우 깊은 난관에 빠지게 될 수 있다. 나는 자질구레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내서 의논하고 토론하고 도움을 준다.” 올해 서른다섯인 커는 스물여덟 살 때부터 유방암 검사를 받아 왔고, 정기검사 때 종양이 발견되어 올 초에 센터에서 처음으로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실에 들어가니 부분 마취를 하고 유방에 바늘을 찔렀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겪는지 더 잘 알고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커의 종양은 섬유성 낭종이었지만, 앞으로는 6개월에 한 번씩 진행 상황을 점검할 예정이다. “당분간은 골프를 그만두고 은퇴할 계획이 없지만,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성자는 아니지만, 이건 내가 실현해야 하는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_ 스티나 스텐버그 Stina Sternberg
프로골프
Arnold Palmer
아놀드 파머
1980년대에 올랜도 지역 의료센터를 방문한 파머는 성인 병동 안에서 신생아 중환자실로 활용하는 아주 작은 방을 보게 됐다. “이런 상태로는 곤란하죠.” 병원 직원에게 말했고, 변화를 진두지휘했다. 89년에 그 자리에는 파머와 그의 팬이 낸, 자금이 종잣돈이 되어 아놀드파머아동여성병원이 들어섰고, 골프계의 전설은 기업 차원에서 자선을 펼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지금은 아놀드파머아동병원으로 이름을 바꾼, 그의 너그러움과 영향력으로 세워진(파머가 주최하는 베이힐인비테이셔널에서만 1700만달러 이상이 모금되었다) 그 시설 옆에는 2006년에 위니파머여성•신생아병원이 들어섰는데, 아놀드가 세상을 떠난 전 부인을 기념하여 세운 병원이다. 아놀드 파머 자선단체에서는 클럽 단위의 챌린지와 전립선암과 싸우는 아놀드 군단, 그리고 팜스프링스 인근에 있는 아놀드파머전립선암센터 등을 통해 전립선암의 위험 홍보와 진단, 그리고 치료에 힘쓰고 있다. 아놀드 파머 자선단체에서는 피츠버그 의대의 아놀드파머 병동에도 기금을 지원하고 있다.
Jack and Barbara Nicklaus
잭과 바버라 니클러스
골프의 아이콘인 잭은 부인인 바버라와 함께 니클러스아동건강보호재단을 통해 자신이 참가한 토너먼트와 연계해 2005년부터 모두 2200만달러가 넘는 돈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뮤어필드빌리지에서 열리는 메모리얼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있는 내이션와이드 아동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에 직접 기금을 지원하고, 부부가 사는 플로리다의 집 근처에서 열리는 혼다클래식은 팜비치카운티의 환자를 주로 돌보는 마이애미아동병원과 제휴를 맺은 니클러스케어센터를 지원한다.
그곳에 전시된 니클러스의 기념품을 꼼꼼히 선정하기도 한 바버라는 고마움을 표하는 부모에게서 오히려 감동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은 식료품점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녀에게 다가와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마이애미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픈 아이들과 참전군인을 생각하는 잭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는 그가 이런 곳을 개인적으로 대단히 자주 방문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Gary Player
게리 플레이어
골프의 ‘맨 인 블랙’으로 통하는 그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선을 펼치는 빅3이기도 하다. 남아공에 있는 자신의 농장 근처에 사는 빈곤 아동을 위해 1983년에 설립한 플레이어재단은 전세계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동을 돕기 위해 5000만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6년 전에는 중국의 윈난 雲南성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HIV-AIDS에 감염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오래 전부터 피트니스의 중요성을 홍보해온 플레이어는 골프 대회 기금 마련에도 적극적이다. 자신이 설립한 첫 번째 학교를 비롯해서 여러 학교를 방문할 뿐만 아니라 함께 축구도 하고 운동회에도 참가하며,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걸 좋아한다. 런던에서는 빈곤 지역의 학교에서 다우닝 10번지까지 자전거를 타고 학생의 곤궁한 상황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Tiger Woods
타이거 우즈
프로로 전향한 후 타이거는 돌아가신 아버지 얼 우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재단을 설립하고 개인 재산인 100만달러를 출연했다. 그 후로 자신이 주최한 대회의 수익금을 기부하고, 빈곤 지역의 아이들이 자신의 러닝센터와 얼우즈장학프로그램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도록 돕는 데도 사비를 털어 지원해왔다. 이런 청소년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의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는 동네 불량배와 어울리는 대신, 역경을 극복하고 최고의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의 심정을 완전히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친구들의 전언이다.
스탠퍼드에서의 경험 덕분에 그는 이 아이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고등교육이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다. 타이거우즈재단의 사장이자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는 그렉 맥래플린에 따르면 ‘재단에서는 지난 16년 동안 청소년 프로그램과 장학금에 7000만달러 이상을 기부했다’고 한다.
블로킹과 태클이 경기장에서의 승부보다 더 큰 대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고 싶다고?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공격수였던 바튼은 팀 동료인 로니 로트에게서 영감을 받아 챔피언스 채리티를 설립하고, 1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앗아간 뇌종양 연구를 위해 기금 마련을 하고 있다. 바튼은 UC샌프란시스코의대의 치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250만달러의 기부금 약속을 이행했고 그밖에도 미국 전역에 있는 병원과 연구단체에 뇌와 관련된 기부를 해왔다.
수퍼볼 우승 반지를 3개나 챙긴 다음 NFL에서 은퇴한 바튼은 스탠퍼드골프코스에서 골프를 배웠다. 퍼스트 티 참가자와의 만남에서 감동을 받은 그는 스티브 영, 조 몬태나, 짐 플런켓, 톰 브레이디, 아론 로저스를 비롯한 동료를 한자리에 불러모아 샌프란시스코와 몬테레이 카운티, 실리콘 밸리의 퍼스트 티 지부를 위해 100만달러가 넘는 기금을 모았다. “골프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면 골프 대회를 여는 게 타당하지 않나.” 그래도 자신의 자선단체를 위해서는 극장 행사를 고수할 예정이다. “막이 오르면 우리가 할 일은 끝이 난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려갈 수도 있다.” _ 리사 펄롱
Ernie Els
어니 엘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어니가 거의 매주 프로암에 출전했던 20대 시절에는 그날의 자선 행사가 어떤 취지인지도 잘 알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의 역할은 포섬의 게스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니와 리즐 부부가 당시 네 살이던 아들 벤이 자폐아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골프와 자선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모호했던 것이 아주 현실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09년에 엘스는 리즐과 함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가족을 대신해서 이 문제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디지털을 통해 세계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고, 현장에서도 치료와 연구를 제공하는 ‘탁월한 센터’를 웨스트팜비치에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그들은 엘스포오티즘 Els for Autism을 출범했다.
엘스의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사를 한 것도 자폐증 때문인데,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이 다른 어디보다 앞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이나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미래에는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
엘스는 자폐증을 앓는 아이의 90퍼센트가 일반 학교에서 제대로 생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자신의 센터에서 그 아이들을 스물한 살까지 돌보고 그 이후에는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게 되길 기대하고 있다.
리즐은 재단의 일상적인 운영을 맡고 있다(엘스는 리즐에게 ‘당신이 내 상관’이라고 부른다) . 엘스는 자신의 인지도를 활용해서 미국 전역의 권위 있는 클럽에서 자금 모금 행사를 개최한다.
“우리가 여는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자랑스럽다. 니클러스와 리키 파울러, 더스틴 존슨, 그리고 사실상 모든 사람이. 그리고 그들은 벤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기 때문이다. 행사의 취지가 뭔지 하나도 몰랐던 스무 살 시절의 나와는 달리 그들은 ‘얘가 그의 아들’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 대회의 취지가 뭔지도 잘 안다.”
Betsy King
벳시 킹
미국여자프로 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킹은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에도 잠시 골프를 벗어나는 것(프로젝트를 진행하든, 국제해비타트와 함께 루마니아의 고아원을 방문하든)이 다시 코스로 돌아왔을 때 집중력을 더 예리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07년부터 그녀는 선수 시절의 성실했던 그 태도로 ‘골프포어아프리카 GolfForeAfrica.org’를 꾸려나가고 있는데, 그녀는 애리조나의 집에서 LPGA와 PGA, 그리고 챔피언스투어의 선수를 초청해 인종 청소와 빈곤으로 인해 질병의 파급력이 더 악화된 르완다에서 에이즈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킹이 일상적인 운영을 맡으면서 이 자선단체에서는 지금까지 100만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았다.
06년 방문 당시 에이즈 파급 실태를 현장에서 목격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경험이 되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빈곤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넘치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가진 능력을 아프리카에 쏟아야겠다고 느꼈다.”
작년에는 무릎 수술로 인해 르완다에 갈 수 없었지만, 올 12월에는 여섯 번째로 르완다를 방문할 예정이다. 월드비전을 통해 후원하고 있는 찬탈과 만나고 역시 월드비전과 함께 설립한 골프포어아프리카 건강센터도 돌아보고, 그녀의 기구에서 가장 최근에 추진하고 있는 워시 프로젝트도 살펴볼 예정인데, 이건 깨끗한 물과 위생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킹의 노력은 르완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미국에서 프로젝트를 구축해온 그녀는 국제해비타트와 함께 아프리카 레소토에 45채의 집을 지었다. 2월에는 자신의 골프클럽인 스콧데일의 피너클클럽 회원과 함께 해비타트 프로젝트를 위해 코스타리카를 방문할 예정이며, 미국에서는 다양한 자선 대회에 참가해 기금마련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가까운 자선단체에 시간을 기울이고 돈을 기부하는 쪽을 선호한다. “어디서든 사람들을 돕는 건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마련한 집무실에서 단 한 명의 직원만을 둔 채 멀리 있는 곳의 가족을 도울 수 있는 기금 마련의 방법을 고민하고, 더 많은 골퍼가 이런 취지에 동참하게 되길 바라고 있다.
Erik Compton
에릭 콤튼
때론 돈보다 시간이 부족해서 남을 돕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프로 골프에서 유일하게 두 번이나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그런 경험을 이용해서 장기 기증 약속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나눠주자고 촉구한다. 미국생명기부재단의 홍보대사인 콤튼은 이 일에 전념한 후 2000만명의 미국인이 장기 기증을 약속했고, 최근에는 그 수가 1억명을 돌파했다.
콤튼은 최근에 이식 수술을 기다리는 부모와 만났으며, 기자회견을 열고 라디오 인터뷰를 하는 등 장기 이식을 받지 못하면 생명을 잃고 말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콤튼은 또한 한 가족의 아이나 부모형제가 장기를 받는 것이 비통한 슬픔을 겪은 다른 가족의 결단 덕분이며, 자신에게 장기를 기증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가 오하이오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바로 그 주에 자신의 장기 기증자 가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취리히보험그룹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직후인 05년에 PGA투어를 후원하기 시작한 뉴올리언스 일대에서 취리히의 CEO는 일년 내내 이 대회가 후원하는 자선 행사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세인트버나드패리시의 주택 건축 프로젝트에서는 직원은 물론 시민과 함께 땀을 흘리고, 성미카엘특수학교에서는 자사의 미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는 연극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등, 센은 단지 악수하며 미소 짓는 사진을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기업이 고객과 직원과 주주가 어우러지는 지역 공동체와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좋은 일을 위한 발판으로 골프를 활용하고 있다. 20대 시절에 골프를 시작했다는 그는 핸디캡이 18이며, 스위스에 둔 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세계 전역의 코스에서 플레이를 해봤지만 브리티시오픈의 개최지 여덟 곳을 포함해서 모두 아홉 개 코스를 방문한 최근의 영국 여행 일주일이 특히 즐거웠다고 한다.
학교 연극에서는 그의 부인이 관객을 전부 울리고, 아이들은 전부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줬을 때에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연설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우리가 구축한 관계가 자랑스럽다. 이건 단지 기부금을 내기 위해 수표를 쓰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그건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일이기 때문이다.”
프로스포츠
unior Bridgeman
주니어 브리지먼
30여 년 전에 밀워키 벅스에서 활약할 무렵, 주니어 브리지먼은 한 골프 대회에 초청받았다. ‘소아암과 싸우는 중서부 스포츠맨’이라는 이름의 대회였다. 골프백을 들고 1번 홀의 티 박스에 올라간 그는 이런 질문을 해서 같은 조 동반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뭘로 시작해야 하죠? 여기 1번이라고 찍힌 클럽인가요?”
그 후로 브리지먼은 로우 핸디캐퍼(쉬운 과정은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가 됐고, 그 대회를 비롯하여 몇몇 지역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핵심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위스콘신의 ‘아이들을 위한 영웅’을 포함하여 해마다 대여섯 개에 달하는 자선 대회에 참가한다. NBA에서 장래의 재정 상태를 걱정하는 사람은 브리지먼과 마주앉아 비결을 받아 적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웬디스와 칠리스 매장 수백 개를 소유하고 있어서 ‘포브스’에서 선정한 미국 흑인 가운데 최고 갑부 순위에도 이름을 올린 브리지먼이니, 냅킨 정도는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Warrick Dunn
워릭 던
미식축구 팀 탬파베이버카니어스의 러닝백을 지낸 던은 열여덟 살 때 경찰이던 홀어머니가 총격 사건으로 숨을 거뒀고, 97년에 프로로 전향한 직후 자기 집 소유라는 꿈을 실현한 외부모 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국제해비타트를 후원하고 인테리어 일체를 지원하고 있는 워릭던채리티 WDC에서는 지금까지 100여 가족에게 도움을 주었다.
WDC는 루이지애나의 배턴루지, 플로리다의 탤러해시, 템파, 그리고 던이 팔콘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조지아골프클럽의 회원이기도 한 애틀랜타에서 도움을 제공한다. 이 클럽에서는 그가 05년에 템파에서 시작했던 기금 마련 골프 대회를 주최하기도 한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인맥을 넓히기 위해 시작했다는 골프를 여전히 배우는 중이라는 던은 에모리경영대학원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자선 프로젝트에도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Peyton Manning
페이튼 매닝
미식축구 팀 인디애나폴리스콜츠에서 덴버브롱코스로 이적한 그는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겸손해 했지만, 한 자릿수의 핸디캡을 보유하고 있는 매닝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아동병원을 운영하며 이스트테네시아동병원과 자신의 페이백재단을 위해 해마다 기금마련 골프 행사를 개최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극심한 피해를 초래했을 때 매닝은 “언론에 알리기보다 실질적인 일처리”에 집중했다(그의 형제와 부모님도 그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그가 실질적인 사장을 맡고 있는 페이백재단은 99년에 설립된 이후 테네시와 인디애나, 그리고 플로리다 일대에서 청소년 리더십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아동 지원 프로젝트에 430만달러가 넘는 돈을 지원해왔다. 매닝이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 재단에서는 프로젝트를 콜로라도로 확대할 예정이다.
음악계
Vince Gill
빈스 길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자라던 일곱 살 때부터 골프를 해왔다는 컨트리 음악계의 스타인 빈스 길은 현재 그곳의 특수 치료 시설에 상당한 기금을 제공하고 있으며, 골프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을 다룬 이번 특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아마추어이기도 하다. 길은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테네시주의 주니어 골프계에서는 ‘수호천사’로 통한다.
그가 93년에 설립한 비니셀레브리티인비테이셔널은 테네시골프재단에 수백만달러를 기부했으며, 벨몬트대학의 여러 프로그램을 포함해 코스 안팎에서 기회를 확장하려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은 수많은 학생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내시빌의 퍼스트 티 시설은 비니링크스에 터를 잡고 있다. 한때 빈스길주니어투어에서 활동했었던 벤 비요크 Ben Bjork는 위암 치료를 위해 길의 병원에 들렀다가 위기를 넘겼고, 빈스에게서 영감을 얻어 자신도 음악의 길에 접어들었다.
골프업계
Tom Fazio
톰 파지오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골프 코스 설계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골프업계에서 가장 자선 활동에 열심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톰파지오자선기금이 채택한 혁신적인 기금 마련 접근 방법 덕분이다. 그의 파지오골프투어에서는 회비 450달러(또는 한 달에 40달러)를 내면 동남부 지역에서 거의 500개에 달하는 파지오가 설계한 홀 어느 곳에서나 할인된 가격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으며, 그 회비 가운데 일부가 기금에 출연된다. 파지오의 책 판매 수익금 가운데 일부도 기금으로 들어간다.
여섯 자녀를 둔 그는 아이들을 깨워서 아침을 먹이고 토요일 오전 농구 대회에 데리고 나갔던 90년대에 처음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카운티에서 위기에 처한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농구를 하던 청소년이 파지오와 부인인 수 덕분에 만들어진 헨더슨카운티의 청소년클럽의 수장이 되었다. 부부는 지역의 예술 연극 프로젝트도 지원하고 있다.
산업계
Tom Cousins
톰 커즌즈
<HBO>에서 방영되는 <와이어 The Wire> 팬이 관심을 가질 소식. 미국 도심의 곤궁한 상황이 절망스럽다면 도널드 로스가 애틀랜타에 설계한 보석 같은 이스트레이크골프클럽에 쏟는 부동산 개발업자의 헌신적인 태도에서 용기를 가질 것. 커즌즈는 코스 복원에만 집중하는 대신 재단을 설립해서 애틀랜타 주택기구와 협력을 맺고 주거와 교육,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문제에 전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한때 침체되고 위험했던 이 지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커즌즈는 워렌 버핏, 그리고 자신이 정책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퍼포즈빌트커뮤니티 기구의 지원을 받아 이 방식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하길 희망하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뉴올리언스라고 한다.
Jim McGlothlin
짐 맥글로슬린
화석 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지만, 변호사 출신으로 유나이티드컴퍼니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된 맥글로슬린이 자신의 고향인 버지니아주 그런디에 세운 마운틴미션스쿨에서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2010년에 자신이 인근 브리스톨에 지은 올드팜클럽에서 열린 단 하루 일정의 행사에 파머와 플레이어, 그리고 니클러스, 이 세 명의 거물을 불러 모은 그는 이 지역 2만 여 명의 학생들이 도움을 받은 기숙학교 설립을 위해 1500만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오래전부터 빈곤 해소와 교육 개선에 헌신해온 그는 1000만명 청소년을 위한 퍼스트 티 캠페인의 부회장을 맡아 2017년까지 1억600만달러가 넘는 기금을 모으고 1000만명 청소년을 골프에 입문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의 동생인 톰은 이렇게 말했다. “형은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형보다 골프에 더 열의가 강한 사람은 없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일주일에 8일도 플레이를 할 사람이다.”
정계
Jim Clyburn
짐 클라이번 하원의원
워싱턴의 파워 브로커 중에는 아마 뛰어난 골퍼도 많을 테지만, 이 게임에 대한 열정이 더 뜨거운 사람, 그리고 정파를 초월해 정치적인 인맥을 맺는 것이든 숭고한 가치를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든, 골프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클라이번(민주당 : 사우스캐롤라이나)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가 두려웠지만, 아버지의 이런 반응에 용기를 얻었다. “때로 설교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낫지.” 인권운동가이자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샌티쿠퍼컨트리클럽에서 핸디캡 12를 기록하고 있으며, 20년 넘게 자선 대회를 개최하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의 장학금과 기부금을 모금해왔다.
평범한 개인
Connie Keiter
코니 카이터
평생 골프를 즐겨왔으며 힐크레스트와 타마리스크에서 미국골프협회 USGA 핸디캡 인덱스 17.4를 게시한 그는 남편 조지와 함께 UCLA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해왔다. 그들은 UCLA의 암센터와 도시 건축 설계 대학원에 아버지 이름을 딴 강좌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그녀는 여자 골프 팀의 수호천사 역할도 해왔으며, 오래 전부터 이곳의 연례 자선 토너먼트에서 자원봉사와 플레이를 하고 팀에 직접적으로 기부도 해왔다. 최근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라운드를 많이 하지 못했지만 “코니는 함께 플레이하면 유쾌한 사람”이라고 UCLA의 캐리 포사이스 감독은 말했다. “그녀는 늘 솔직하고, 플레이에 늑장을 부리거나 자신이 스윙을 할 때 누가 말을 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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