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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 : 23. 빛이 어두우면 24.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
마 6 : 23. 빛이 어두우면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창세기 13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잘못된 선택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 가까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창세기 13: 13은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말한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외적인 조건, 즉 물질적 유여함만 보고 그들의 종교적, 도덕적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판단과 선택은 나중에 그의 재산과 아내까지 잃어버리고 자신과 딸들만 겨우 구원을 얻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직장이나 직업이나 거주지를 택할 때 월급이나 직위나 외적 조건만 보지 말고 먼저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생각과 태도이다.
1] 눈이 나쁘면(*, 포네로스)
이 말은 분명 22절의 '성하면'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흔히 '악한'의 뜻을 가진다.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이기적이고 인색(吝嗇)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눈이 나쁘다'라는 어구는 문맥상 하나님과 재물 양자에다 관심을 두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2]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스코테이노스)
앞 구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빛을 받아들이는 물질적 몸을 가리킴과 동시에 도덕적 차원의 전 인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둡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대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즉 세상 재물에 현혹되어 영적 세계와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은 온몸에 진리의 세계를 전달해 주는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온몸으로 상징되는 그의 전 인격과 영혼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흑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3]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여기서 '빛'은 헬라어로 '토 포스'(*)로서 태양 빛과 같은 일반적인 빛(light)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이는 22절의 등불로 번역된 '호 뤼크노스'(*)와 같은 뜻의 빛(lamp)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인 진리의 세계를 밝혀주는 마음의 등불이 어두우면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4]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쁜' 눈을 통해 전달된다. 실로 본래의 기능이 밝은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눈이 어두움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온몸의 상태는 얼마나 치명적이며 절망적이겠는가!
진정 '성한' 눈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죄와 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육신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서 온몸이 밝고 어둡다.
이같이 ‘네게 있는 빛’ 곧 영적 지식의 빛 또는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의 영혼 전체, 인격 전체가 어두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재물 사랑이 영적 눈을 어둡게 함을 보이는 것 같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자는 영적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다.
* 딤전 6: 9-10 –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5] 밝은 눈과 어두운 눈 ( 마 6: 22-23 )
사람 신체의 모든 기관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이 있다면 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시면서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눈은 우리에게 있어 몹시도 귀한 것입니다.
(1) 어둠을 좇는 눈
① 눈은 죄가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바라보았다. 하와의 눈에 비친 선악과는 먹어서는 아니 될 금기의 실과가 아니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실과였다. 선악과의 겉모습에 매료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것을 따먹는 죄를 범하였다. 이것으로 인류는 최초로 죄를 경험하였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음의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죄의 통로가 된 것이 바로 눈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죄는 눈을 통하여 들어온다. 음란, 방탕, 호색 같은 죄악이 바로 그렇다. 이러한 눈으로 인한 범죄에 대해 예수님은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마 18: 9)
② 어두움을 좇는 눈은 바로 보지 못하는 눈이다.
인생은 무엇을 바로 보느냐와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되었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인생은 성공하는 인생이요 똑같은 목표를 정해 놓고도 그것을 망각하고 목표 이외의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인생은 실패하는 인생이다.
하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실패의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살아계시고 인간들을 향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은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라고 말한다. (겔 12: 2)
③ 결국 눈이 멀게 된다.
어둠을 따르는 눈은 얼마 못가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 정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다.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재물에 눈이 먼 사람도 있다. 이들은 어두운 것만 바라보다가 눈이 멀어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한 동물인 박쥐나 부엉이는 빛을 제일 싫어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세력에 거하는 사람은 빛을 거부한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어둠을 좇는 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 눅 24: 16 -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 온 몸을 밝게 하는 눈
반면에 온 몸을 밝게 하는 눈은 빛을 좇는 눈이다. 항상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기븜과 즐거움이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
① 자기를 돌아보는 눈이다.
일반적인 눈은 상대방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그러나 밝은 눈은 타인보다 자신을 향해 늘 열려 있다.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기 위해 깨어 있는 눈이다.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회개를 뜻한다. 자기가 지은 죄악들을 하나하나 들춰낼 수 있는 눈이라야 빛을 바라볼 수가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② 내일을 보는 눈이다.
현실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만을 인정한다. 그들의 눈은 가까운 것은 볼 수 있으나 먼 곳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근시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은 졸업 후를 생각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임종을 생각해서 생존해 계실 때 효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있으면서 우리는 하늘나라를 보아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볼 즐 알아야 한다.
③ 하나님을 보는 눈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보이시는 분이 아니다. 또 우리들의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 거듭나야 한다.
* 요 3: 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새로이 태어난 새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 마 5: 8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하려면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를 하면 우리의 눈은 밝아진다.
ⓒ 기도를 해야 한다.
* 왕하 6: 15-20 –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유일한 통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마 6 : 24.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는 한쪽을 더 위하거나 다른 한쪽을 더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 즉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1]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예수께서는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디에다 보물을 쌓아야 할 것인지 또는 우리의 눈을 무엇에 고정(fixation)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선택적 문제를 제시하였다(J. Stott, Sermon on the mount, p. 158).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
2] 섬기지 못할 것이니
누가는 불의(injustice)한 청지기 비유를 설명한 다음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싣고 있다.
* 눅 16: 13 -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는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야 하고 목적이 분명해야 함을 가리킨 내용이다.
'종'이란 오직 한 주인에게 전적으로 매인 바 되어 그 주인의 명령에 자신의 전 의지를 동원해 순종해야 한다(Tasker).
그 종이 진실하다면 결단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만약 그가 두 주인을 섬긴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을 자신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얻는 한 수단으로서 그 주인들을 섬긴 것이 된다.
3]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한 주인을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려 하는 것은 한 주인도 섬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움'과 '사랑'은 인간이 지닌 본성적 감정을 뜻하기보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성을 지닌 마음의 현상을 뜻한다.
어찌 되었든 이 양자는 엄밀히 말해 겸비(兼備)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른다고 말한다.
* 롬 6: 16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4]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에 헤노스 안뎌세타이)
'중히 여기다'란 말은 그에 대해 변함없이 성실하다는 뜻이다.
본 어구에서는 둘 중의 하나인 '이를'이란 말이 강조되고 있다.
5] 저를 경히 여김이라.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 한쪽을 더 위하거나 다른 한쪽을 더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 맘모나)을
이는 나쁜 의미로서의 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서 특정한 부(富)나 재산을 뜻하는 아람어 '마노나'에서 유래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재물과 돈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이 재물은 하나님과 병기(倂記)되어 의인화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 재물 역시 종의 주인으로 묘사되었다.
7]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겸하여'(*, 카이)란 원어상 '대등하다'는 뜻의 접속사로서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물질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받으시거나 아예 섬김을 받지 않으시거나 둘 중의 하나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양자 모두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주를 따르는 제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부분적 죄악이 아니라 근본(根本)적인 죄악으로서 그 원인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재산 소유를 정죄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재산을 모을 수 있으나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편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할 경우가 온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마 19: 21-22 –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만을 참 주인으로 섬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재물은 언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쓸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것에 종노릇 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우리가 재물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 재물을 나를 위하여 이 땅 위에 쌓아 두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도와 구제를 위하여 그것을 언제든지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씨라고 말씀하셨다(마 13: 22). 재물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국 실패케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기에게 찾아온 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으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다(마 19: 21-22).
주께서 세우신 열두 사도 중 가룟 유다는 결국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은 삼십 개(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 노동자의 4개월 품삯)을 달아 주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딤후 3: 1-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며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오직 하나님과 그의 뜻을 구하는 자들만 영원할 것이라고 교훈했다(요일 2: 15-17).
결국,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 즉 돈인가,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만 참 주인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바른 길에 서 있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돈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는 돈에 종노릇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돈을 이 땅에 쌓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도와 구제를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과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에 서 있는 것이며 우리는 결국 실패자가 될 것이다. 세상과 돈을 섬기는 자는 결국 세상과 돈이 불탈 때 함께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8] 물질에 대한 교훈
현대 교회가 물질 만능주의의 성향을 띠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교회가 물질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물질에 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데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물질관이 성립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은 낮은 곳에서 존귀와 위엄을 나타내셨다.
①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나셨으며 가난하게 사셨다.
예수님은 어떤 지도자들처럼 부하게 살면서 대중에게는 가난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위선적인 지도자가 아니셨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에수님은 비천하게 태어나셨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다.
② 예수님의 삶은 위엄이 있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 비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가난한 공생애 기간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표현하시면서도 매우 당당하고 위엄 있는 삶을 사셨다.
이는 가난이 절대로 비굴한 삶을 살아야 할 조건이 아님을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물질의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예수님은 부(富)의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① 부자는 부를 지키기 위해 죄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부한 자는 쌓을 때 뿐만 아니라 쌓아 놓은 후 그 관리를 하는 과정에서도 정당하고 올바른 방법만으로는 사실상 관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② 부자들은 부를 책임있게 사용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허락하신 것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만족을 위해 재능과 물질과 문명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자기만이 즐거워하고 쾌락을 누리라고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여 함께 즐거워하려고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신 재능과 재물은 이해타산(利害打算)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마지막 날 예수님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때에 많이 가진 자들에겐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이므로 가진 자들은 그 부를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책임 있는 관리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를 사랑하므로 끊임없는 주님의 경고가 필요하다.
① 물질은 축복이 될 수 있고, 주님의 사업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물질을 섬기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고 해서 물질 자체를 부정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물질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도구가 되며, 사실상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 중의 하나이다. 이러할 때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상급이 되는 것이다.
② 물질은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거나 양심을 좀먹는다.
물질이 하나님의 상급으로 주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질 때에도 물질은 쉽게 우리의 인격을 파괴시키거나 양심을 좀먹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물질로 인하여 자주 우리의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고 영혼을 실족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주님의 경고 말씀이 필요하며 이 경고의 말씀을 쉼 없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4) 예수님은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으라 하셨다.
① 영적 축복을 소유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땅의 것을 찾는 삶이 아니다.
* 골 3: 1-2 –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위의 것을 추구하는 진정한 크리스찬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두라는 주님의 교훈은 성도으로서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② 그럼으로써 성도는 '우월성', '교만한 생각' 등을 버리게 된다.
우리는 물질이 인간 자체보다 절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시인하면서도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어떤 우월감 또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은 온갖 우월감, 교만한 생각 등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말씀이다. 물질을 비움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천국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5)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살려면
① 신령한 눈을 가져야 한다.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중국 진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시장 한복판에 금은방이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나이가 넋이 나간 듯이 진열대 위의 황금덩어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그 황금덩어리를 들고서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가지 못해서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재판관이 물었다. "너는 시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들고 뛰었는고?"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 순간 저의 눈에는 황금만 보였지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교훈도 돈에 눈이 어둡지 말라는 것이다. 돈에 눈이 멀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짓도 한다. 성경에서 돈은 재판관의 판결을 굽게 하는 주요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마음의 재판관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돈이란 말이다.
돈에 눈이 어두우면 하나님의 것인지 내 것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 돈에 눈이 어두우면 하늘의 보배를 보지 못하고 땅에다만 쌓으려고 한다. 주님이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신령한 눈이 어두우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도 하게 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육신의 눈은 떴지만 신령한 눈은 감겨있었다. 영적인 소경들이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바로 눈앞에 서 있건만 메시야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의롭고 신령하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다.
예수님께서 요 9: 39에 내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물었다. "우리도 맹인인가?"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 41) 하셨다.
우리들도 본다고 하지 말고 눈이 더 열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스데반 집사처럼 천사의 얼굴로 닮게 될 것이다. 참된 진리에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늘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복 받은 간증도 늘 들어 깨달아서 성한 눈을 만들어야 한다.
② 한 주인만 섬겨야 한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절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한 편을 섬기면 다른 한 편을 경히 여기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편만 섬겨야 하는데 어느 편을 택하렵니까? 이것은 신앙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다. 하나님을 택하기 바란다. 하나님을 택하면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니 물질도 책임져 주신다. 그러나 물질을 택하면 하나님도 물질도 떠나게 된다.
③ 하나님이 공급자라는 확신이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어 읽어보면 하나님이 공급자라고 말씀이 있다.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라는 대 원칙에 선다면 욕심이나 염려가 필요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물질에 대해서 자유롭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교육하였다. 한 벌 옷만 입히고 돈주머니도 갖지 않게 하고 무전여행을 시켰다. 다녀온 제자들이 기쁨이 넘치는 보고를 했다. 귀신이 나가더이다. 병이 낫더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 또 한 가지가 있었다.
눅 22: 35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냥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걸 믿기 바란다. 특별히 하나님의 종들은 이걸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있을 때 당당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궁핍을 당하지 않게 된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왕궁처럼 호화롭지도 않았지만 이 믿음이 있으셨기에 궁핍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말씀과 기도로 영의 눈을 떠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물질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공급하신다는 믿음 가지고 물질에 대해서 시험 들지 않고 공급받아 살아가는 일꾼들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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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만 섬깁시다.
게시물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시간 행복이 넘쳐 나시길 기원 드립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설교 감사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