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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숭혁 교수의 에코이야기: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이야기를 시작하며
얼마 전 평생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갔다. 중학 동창회이다. 생각해 보니 졸업 후 40여년이 더 지났다. 서로들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서히 처음 보는 얼굴에 옛날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마치 나 혼자 안개 속에서 한참 헤매어 다닌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헤르만 헤세의 시 하나가 생각이 났다. ‘안개 속에서’라는 시이다.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수목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하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누구나 모두 언젠가는 청춘 시절이 지나가고 서서히 나이가 들어간다. 젊음은 본질적으로 거부와 적대의 시기이다. 젊은 시절 나는 세상을 우습게보며 편향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단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며, 어쩌면 세상을 무시하였다. 개인적 자유가 사회적 제약에 막혀 있다고 불평하였다. 일단은 BJR(배째라) 식으로, 젊다는 것에는 꿈이 있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나를 믿어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젊은 시절 방황하였기에 부끄럽다”라는 말이거나, 또는 “이제 젊음이 그립고 아쉽다”라는 말이 아니다. 안개 속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다 혼자이다”라는 헤세의 선문답 같은 시구에 고개가 끄덕거려진다는 말이다. 젊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모두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내가 조금씩 깨달아 간다는 의미이다.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도 우리 인생사와 같이 변화한다. 과거 지구상 인류는 환경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며 살았으나, 문명의 발달과 함께 계몽주의 과학(Science in Enlightenment)이라는 청년기적 사고방식이 등장한다. 특히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인류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환경은 단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불균형적 관점이 아니라, 상호 조화에 바탕을 둔 균형적 관점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과 환경을 서로 유기체적인 상생 관계를 가지고 있는 순리 체계로 보는 것이다.
본지에 글을 연재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며칠을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나의 생각을 말로 공개하는 것보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누군가가 내 글을 곰곰 읽는 일일 것이다. 말과 글, 그거나 저거나 둘 다 개인 생각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말에는 즉흥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글에는 이미 기록성을 전제로 한다. 말은 말하는 사람이 중심이라면, 글은 말하는 사람보다도 읽는 사람이 전제가 된다. 따라서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다. 진정성과 조심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 시절 영자신문에서 글을 썼던 이후 지난 30여년, 논문과 주례사를 제외하고 개인적인 글을 쓴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금년 초부터 모 음악잡지에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원고 청탁을 받으니 우쭐하기도 하다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공명심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움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인생과 환경 모두 순리의 법칙에 따름을 나름대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여기에 더하여 엉뚱한 나는, 이를 쓰고 싶으면 쓰는 것이 순리라는 엉뚱한 해석을 하였다. 이제 나이가 드니, 세상은 보는 대로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사랑의 사람이 보일 것이고, 미움의 눈으로 보면 미움의 사람이 보일 것이다. 망설임 끝에 긍정의 대답을 하였다.
나의 글을 대표하는 제목을 무어라고 할까? 다시 헤르만 헤세의 시 하나가 생각이 났다. ‘아름다운 사람(Die Schöne)’이다. 아마 60/7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이 헤세의 시를 바탕으로 서유석이 작곡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노래를 한 번쯤은 흥얼거려 보았을 것이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오 오오오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라는 곡이다. 이 노래를 속으로 다시 불러 보았다. 독자들에게 나의 삶에서 만나고 느꼈던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하여 글을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제목을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라고 하였다.
이제 나의 지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참된 행복은 어쩌면 과거의 잊힌 행복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불행마저도 지금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또한 이것이 바로 인생의 행복 순리라는 것이 앞으로 나의 이야기의 주제일 것이다. 나는 행복한 기억을 더듬으며 동시에 행복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써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자제위께 한 가지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 소심한 A형 학삐리는 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감히 본명으로 적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급적 성 또는 직함으로만 언급하고자 하니, 이에 부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린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한 방 목사님
“인생은 한 방이다”라고 한다. 조폭들이 좋아하는 말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게릴라성 난센스 퀴즈 하나를 만들어 보자. 조폭을 제외하고 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답은 ‘동거인(一室)’이다. 이 외에도? 다른 답은 ‘한의사(韓方)’이다. 또 다른 답은 ‘펭귄(寒房)’이다. 최근 나의 ‘펭귄 나라의 썰렁 개그’이다. 아무튼 내게 동거인, 한의사, 또는 펭귄이 아닌 진짜 한 방의 사람이 있다. 나의 주먹 한 방에 날아간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게 한 방을 날린, 아니 내게 인생의 한 방을 선물한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80년대 초부터 약 10여 년 동안 나의 미국 및 캐나다에서 유학 및 직장 시절을 보냈다. 새로운 도시에 정착을 시작하면, 매번 새 집 이 외에 새 교회를 찾는다. 새 교회 찾기는 먼저 같은 교파를 찾고 거기에 거리의 편리성 등을 고려하면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큰 도시에서는 그렇게 만만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박사후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슈퍼컴퓨터 연구소 및 미네소타 대학에 직장을 잡아 새 정착지에 도착하니, 당시 도시 주변에만 해도 거의 ‘social gathering’에 가까운 100여 개 이상의 한인교회가 공존하고 있었다. 교파 이 외에도 소위 이민자 교회, 유학생 교회, 지역연고 교회 등을 추가로 고려하여야 하였다.
나의 새 교회 찾기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목사님이다. 목사님의 용모나 취향이 아니라 그 분이 주시는 ‘영적 말씀’, 소위 요새말로 목사님의 ‘메시지’일 것이다. 따라서 직접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결정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몇몇 한인교회를 방문 후에도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한인교회 목사님을 만난 것은 이러한 새 교회 방문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금테 안경이 조금은 날카롭게 보였지만, 처음 뵌 목사님의 모습은 입매가 부드러우셨다. 설교 말씀보다도 특히 웃으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목사님께 실례의 표현이지만, 첫 인상이 종교인이라기보다 마치 장난꾸러기 오동(惡童)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목사님과 사모님은 같은 대학 철학과 출신이라고 하였다.
처음 몇몇 교회를 주저하였더니, 이제 “새 교회 찾기는 한 방이다”라고 무조건 한 방 예배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졌다. 다음 주 두 번째 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 참석 전 우연히 교회 길목에서 목사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목사님은 따뜻하게 손인사를 청하시면서 내게 묻는다. “아하, 서숭혁 집사님. 전 주에 처음 나오셨지요?” 나도 반갑게 목사님께 다시 꾸벅 인사를 드리며 대답을 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 상 세상에서 이름을 가장 잘 기억하시는 분들이 목사님들이신 것 같습니다. 저의 이름이 어려운데 아직까지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조금 어색하였지만 정성을 표한 나의 문어체 대답이었다.
목사님은 짐직 놀란 표정으로 한 마디를 하신다. “그래요? 제게는 남의 이름을 외우는 나만의 비법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만.” 내가 놀라 묻는다, “예? 비법이라고요?” 목사님은 내게 귀를 가까이 하라고 손짓을 하신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쉬하는 작은 목소리로 비법을 알려 주신다. “저는 남의 이름을 처음 소개 받고, 그 이름 뒤에 언제나 ‘새끼’라는 말을 붙여봅니다.” 0.1초 이내에 폭소가 터짐은 물론이었다. 웃음과 함께 나도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다. “제가 이 느낌을 영어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가까이 오신 목사님께, 바로 전 목사님의 쉬하는 작은 목소리로 답을 드렸다. “You win!” 0.1초 이내에 두 번째 폭소가 터짐도 물론이었다.
목사님은 고전 음악을 좋아하셨다. 많은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양계 우주 탐험선 보이저호에 탑재된 골든 레코드에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선정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칼 세이건 그 친구 허 참”하고 혀를 차시던 분이 목사님이셨다. 찬송가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라는 부분을, 혼자 눈을 감고 ‘하나님의 딸과 아들들’이라고 부르셨다. 바쁘신 목회 일정으로 유명 연주가의 협연을 놓치시는 경우 내게 가끔 감상을 묻곤 하셨다. 처음에는 몇 번 대단하였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아쉬워하시는 목사님께 그저 그만그만했다고 얼버무리기도 하였다. 나의 초청으로 또는 목사님의 초청으로 음악회에 몇 차례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어느 토요일 저녁, 연주장 입장을 위해 목사님과 나는 긴 줄에 함께 서있었다.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여 조용조용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있던 어떤 숙녀 한 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What language do you speak with?(어느 나라 말이지요?)” 나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답을 하였다. “We are supposed to speak English.(그야 영어이겠지요.)” 이와 동시에 나는 목사님을 쳐다보며 짐짓 동의를 구하였다. “Am I missing something?(제가 뭘 잘 모르고 있나요?)” 목사님은 야구 주심의 스트라이크 손짓과 함께 대답하신다. “You win!” 우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폭소가 동시에 터졌다. 유쾌한 웃음 뒤 한국어라고 알려주었으며, “한국어가 불어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음의 소리를 가졌다” 등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기억된다.
목사님이 담임 교회를 떠나신 것은 일종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의한 퇴출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평양을 방북하던 1989년 3월 말경, 그 주일 목사님의 설교는 늦봄 문익환의 통일시 한 편을 낭독함으로 시작되었다. 시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목사님의 “통일로 가는 얼어붙은 동토가 봄기운으로 녹는 것을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요지의 말씀은 아직도 내 가슴에 뭉클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앞자리 장로님들의 계속된 헛기침을 신호 삼아 회중은 동서남북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실 쯤에는 이미 교회는 남북으로 마치 얼음장 깨지듯 깨끗하게 두 동강이가 나 갈라졌다.
설교와 축도를 마치신 목사님은 평상시처럼 교회 앞에서 신도들을 하나하나 배웅하신다. 벌써 상당수의 교인들이 목사님의 인사를 모른 체하고 외면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빨갱이 목사라며 당장 목이라도 움켜쥘 태세이다. 내가 목사님께 다가가자, 목사님은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시는 듯 내게 물었다. “오늘 제 설교가 부족하였나요?” 조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전혀 아닙니다.” 목사님은 항상 그러하신 오동의 미소와 함께, 당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뚱맞은 일을 보았다는 듯이 내게 말씀하신다. “항상 말씀으로 배고픈 우리 교인들이, 오늘은 육체적으로나 배를 채워보자고 빨리들 집에 가시네요.”
아아, 목사님! 나의 ‘한 방’ 목사님! 그 때 저는 무어라고 대답을 드렸어야 하나요. 오늘도 그 날처럼 내 눈이 촉촉해 진다. 목사님은 떠나실 때 내게 ‘Absolute Zero Gravity’라는 과학 웃음책과 함께 성경 테이프를 선물하셨고, 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CD를 선물로 드렸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어찌사 쓰까이…
주말에 읽을거리로 몇 권의 권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그 중에 하나가 ‘클래식 인생 변주곡(마로니에북스, 2008)’이다. 먼저 목차를 살피고 군데군데 대강 훑어본다. ‘희’, ‘노’, ‘애’, ‘락’이라는 4개의 장에, 우리 인생의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조각들을 클래식 이야기와 함께 묶어 쓴 일종의 음악 수필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열정과 치기를 엿보는 듯하다.
‘음악은 나의 수다 친구’라며 클래식 해설을 들려주는 작가의 더듬이가 여성스럽고 세심하다. 이력을 읽어본다. 분명히 주변에 하나쯤은 있다는 58년생 개띠이다. 고등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을 하다가, 인생의 딱 절반이라고 생각되는 나이에 음악 듣기를 정리해 보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단다. 전체를 살펴보다, 처음부터 천천히 읽기를 시작하였다. 광주 민주화운동 이야기가 등장하는 ‘노’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작가의 이름을 다시 찾아보았다. ‘윤○○’이라고? 아니, 내가 아는 ‘해남댁 윤○○’이라고? 깜짝 놀랐다. ‘어찌사 쓰까이…’
내게 단 하나의 개인 모임이 있다. 고교동창생들 간의 부부 모임이다. 원래 나를 포함하여 7명으로 시작하였다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다른 모임 하나와 합해져 30 여명으로 수가 늘었다. 원 멤버를 제외하고 타 멤버 부부의 면면까지는 잘 알지 못하였다. 윤○○은 타 멤버 부부이다. 누군가는 모임에서 ‘윤 작가’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무슨 별명 정도로 그냥 그런가보다 하였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니체가 되고 싶다면 나에게 약속한 찻그릇을 꼭 만들어 와라. 언제라도 좋으니 기다리고 있으마”라고 다그치던 윤리 선생님의 이야기를 썼고, 또한 “이제는 잠들어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 알 수 없는 애잔함과 흰 머리카락에서 쓸쓸함을 읽어낸다”는 지어미의 이야기를 썼던 작가라는 사실을.(이후 글에서는 나도 윤 작가라고 부르기로 하자.)
몇 년 전에 경주에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모임을 위해 나는 일일이 유료 음원을 뒤져 ‘추억의 팝스’라는 제목으로 CD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시간 노력에 비하여 별 인기가 없었다. 사실 대부분 공치기 이 외에는 별 관심들이 없다. 우리 중년 할배들의 모임은 거의 노가다 술판에 가깝다. 술로 시작하여 술로 마감한다. 다음 날 아침, 경주를 몇 번 들린 적이 있다는 윤 작가의 소개로 근처 순두부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였다. 과음으로 속이 말이 아니다. 밥뚜껑을 열다가 비릿한 냄새에, 마치 반찬 투정하는 애들처럼 바로 밥뚜껑을 닫아 버렸다. 순간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윤 작가가 나를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마눌님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어찌사 쓰까이…’
윤 작가의 책을 읽고 나니, 한 번쯤은 그쪽 부부와 우리 부부가 같이 음악회에 가고 싶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샤를 뒤투아가 이끄는 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RPO)의 내한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유자왕(Yuja Wang, 1987-)이 협연을 한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공연 서너 주 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같이 가자고 흔쾌히 대답을 하였다. 내가 글을 쓰는 음악잡지에서 초청권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단 1장이라고 한다. 별 생각이 없이 마눌님에게 혼자 서울 음악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무슨 출장 통고에 가까웠으리라.
공연 며칠 전, 친구로부터 그의 아파트 주소와 함께 “그럼 인천에서 만나세”하는 문자가 왔다. 그들은 현재 인천에 살고 있다. 그제야 비로소 초청권이 단지 한 장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차 싶어 인터파크에 들어가 마눌님의 티켓 한 장을 예약하려고 하였다. 이미 표는 모두 매진되어 있었다. 그럼 뭐 까이 거, 공연 전반부를 내가 듣고 후반부를 마눌님이 들으면 될 것이다. 당일 아침에 일어나 마눌님에게 당장 서울에 같이 가자고 하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냥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왔다. ‘어찌사 쓰까이…’
윤 작가 부부와 RPO 공연을 관람하였다.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이 끝나고, 유자왕의 첫 내한 공연으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시작되었다. 유튜브를 통하여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오늘도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낸 주황색 초미니 드레스 차림이다. 높이가 20cm 정도로 보이는 킬 힐인가 하는 은색 구두를 신었다. 작년 랑랑의 공연에서도 스키니 차림에 금박 땡땡이 구두가 눈에 익숙하지 않아 초반부에는 아애 눈을 감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눈을 감고 들어 보았다. 작년 랑랑과는 다르다. 유자왕의 쇼팽 피협 1번은 손의 흐름은 있으나 애절함을 담은 운율의 흐름이 없다. 쇼팽이 그리는 사랑은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피아노의 서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앙코르 곡으로 비제의 <카르멘 판타지>와 쇼팽의 <왈츠 7번>을 들려주었다.
도중 휴식 시간에 윤 작가 부부를 만났다. 합창석에 앉았던 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슨 휴대폰을 여닫듯 오를락 거렸던 엉덩이 두 개만이 인상에 남는단다. 실제로 유자왕은 한 쪽 다리를 앞에 내밀고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90도로 깊숙이 숙이는 소위 ‘웨이브 인사’를 수차례 되풀이하였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은 법이다”라고 웃음말을 하려다, 무슨 성적비하 같은 표현이어서 혼자 침만 꼴깍하고 삼켰다. 옆에서 친구는 내 속마음을 눈치 챈 듯이, ‘으흐흐’하고 나를 바라보며 마치 잡아먹을 듯이 웃고 있었다. ‘어찌사 쓰까이…’
전반부의 따분함은 어쩌면 RPO의 시차적응 실패 때문일 수도 있다고 서로 위로하고, 후반부를 기대하였다. 정말 갑자기 대단한 반전이 일어났다. 드뷔시의 <바다>가 시작되자, 전반부에 졸던 현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며 밀려오는 잔물결들을 눈앞에 펼치고 있었다. 하프에 가세한 관들이 샤를 뒤투아의 지휘봉에 맞춰 물보라를 일으키며 즐겁게 장난치는 파도의 유희와 동시에 바람과 바다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집 2번>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공연 후반부를 뜨겁게 달군 샤를 뒤투아의 RPO는 베를리오즈의 <헝가리 행진곡>을 커튼콜로 답하였다. 합창석에서 엄지를 내미는 윤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에서 열광적인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공연이 끝난 뒤 윤 작가 부부와 야외 간이 판매점에서 생맥주 한 잔을 나누었다. 감상평은 샤를 뒤투아에 모아졌다. 역시 명불허득(名不虛得)이라는 점에 만장일치를 보았다. 친구는 이미 늦었고 기왕에 서울까지 온 바에는, 아애 자기 집에서 같이 바둑이나 두며 하루 밤을 자고 다음 날 내려가라고 한다. 내기 바둑을 두어 차비라도 챙겨 볼까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아침에 도망 나온 나의 꼬락서니가 자꾸 눈에 밟혔다. 다음으로 기약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윤 작가 부부가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바래다주었다. 새벽에 도착을 하였다. 잘 다녀왔다고 방문을 열고 마눌님을 불러도, 정말 자는지 아님 자는 체를 하는지 대답이 없다. ‘정말, 어찌사 쓰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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