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스탄불_ 아야 소피아_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추억하며

[halfmoonwish]

'Too good to be true'인 이스탄불이지만, 밝음 뒤에는 어두운 이면이 있는 법. 바로 변태와의 조우.

중동을 돌며 변태에게 휘말리지 않아 내심 의기양양해 있었는데-_- 이스탄불에서 제대로 당했다. 늦은 시각 외진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다, 뒤에서 자전거 타고 지나가던 양아치에게 엉덩이를 꼬집혔다. ㅠ_ㅠ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바람에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사라지는 망할 자식에게 욕도 못 퍼부은 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야 소피아. 과거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상징.

천하를 주름잡은 고대제국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그리스, 스파르타, 페르시아, 로마, 카르타고 등), 내게 가장 친숙한 건 로마 제국이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맞물린 서로마 제국 멸망은 천하를 호령하던 고대의 무지개빛 신비에 결국 마침표를 찍었다. 그 이후로 프랑크 왕국의 난립등을 거치며 세계는 서서히 중세의 모습을 띠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이로 인한 동로마(비잔틴) 제국 멸망은 다시 이전 세계에 균열을 초래했다. 오스만 투르크를 필두로 한 아랍과 무슬림의 도래, 르네상스의 발현과 함께 세계는 이제 근대를 향한 기본틀을 한발한발 갖춰간다. 미미하게나마 과거 로마제국과의 끈을 유지하던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함께, 까마득한 고대제국의 향취와 기억은 망각속에 묻힌 채로.

오래전에 '(현대사를 바꾼)' 세계사 100장면' 이라는 역사사 다큐멘터리를 즐겨 시청했는데 거기엔 콘스탄티노플 함락도 포함돼 있었다. 역사를 거쳐 숱한 문명들이 부침과 난립을 거듭해 왔지만, 불과 한 도시의 멸망이 서로 다른 문명의 충돌을 대변함과 동시에(말 그대로 clash of civilization) 한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경우는 흔치 않다.

1453년, 십자군 전쟁과 강대한 주변세력들 사이에서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위시한 좁은 영토를 위태위태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새로이 투르크 제국의 왕좌에 오른 불과 약관의 청년, 술탄 메흐멧 2세는 집권하자마자 그의 숙원인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돌입한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당대 최강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어려운 과제였지만, 치열한 공방전가 드라마를 거쳐 결국 메흐멧 2세가 이끄는 투르크 군대는 성벽을 넘어 콘스탄티노플 입성에 성공한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비잔틴 군대는 불과 7,000여명의 병력으로 8만이 넘는 투르크군과 맞서야 했다.

오지도 않을 서방으로부터의 원군을 기다리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벽 수비에 혼신의 힘을 쏟아넣었다.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The Fall of Constantinople)], 스티븐 런치만 -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외교적 방편으로 메흐멧 2세에게 진귀한 보물을 보내기도 하고, 서방세계에 원조를 요청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메흐멧 2세는 사면초가에 몰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항복하면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직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두려워서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담담하게 이른다. 

-신께서, 아버지께서 저기 계시다. 너희는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황제는 신의 구원이나 맹목적인 기적을 일컫지는 않았다. 그는 제국의 운명을 예감하고 그에 준비가 돼 있었던 것 같다. 성문을 뚫고 적의 군대가 몰려오자, 이 위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비잔틴 황제의 표식인 자줏빛 가운을 벗고 최후의 결사대와 함께 적진으로 돌진했다. 그것이 역사에 기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마지막 모습. 전장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지만 비극적 황제의 시체는 행방이 묘연하다. 혹자는 황제가 신었던 부츠로 시신을 확인했다고도 하고, 그의 목은 베어져 소아시아(Asia Minor)로 보내졌다고도 한다. 또 전설에 따르면, 성문이 열리기 직전 천사가 황제를 거두어 지하동굴에 안전하게 모셨다고도 한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그는 對 터키 그리스 독립전쟁 때 그리스인들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성문이 열리고 투르크 쿤대가 들어섰을 때, 아야 소피아(당시에는 성당)에서는 밤새 경건한 미사가 진행중이었다. 다수의 비잔틴 시민들이 성당 안에서 운명을 준비하면서도 신의 기적을 기다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투르크 군이 몰려오자 아야 소피아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다. 그러나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군에 의해 문이 부서져 열렸고,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이 자행됐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노예가 되었다. 미소년과 고귀한 출신의 여자들은 술탄의 하렘으로 보내졌다.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역시 노예가 되었다. 메흐멧 2세가 입성해 3일간의 공식적인 약탈기간에 종말을 고할 때까지 아비규환은 계속됐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고, 동로마 제국의 심장인 아야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로 재건축된다. 서유럽의 왕과 교황은 이에 경악해 2차 십자군 원정과 성지탈환을 논의하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논의에 그치고 만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중세의 종말과 근세의 서막을 알리며,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를 바라보며 그 곳에 서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난 테오도시우스 성벽. 해자와 도랑, 흉벽과 외벽이 교차된 삼중성벽으로 설계됐다.

술탄 메흐멧 2세가 기용한 우르반이 특별히 주조한 대포가 아니었다면, 이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긴 힘들었을 듯하다.

투르크군 적함이 저 바다를 빼곡히 채웠을 1453년이 머리에 그려진다.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  

아무리 핑계를 갖다붙여도 내부의 높다란 천장과 복원중이 프레스코화, 기하학적인 창문들 틈새로 들어오는 빛을 놓친 건 아깝다. 

유독 기억에 남던 세계사 다큐멘터리에라 나레이션이며 영상이며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관심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1453', '비잔틴 제국의 흥망사' 등 여러 서적을 참고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연유로 내게 이스탄불의 영광은 그 이면에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제국의 향수를 떠올리는 매개체였다. 매끈하고 세련된 코스모폴리탄 도시, 이스탄불 거리를 유쾌히 걸으면서도, 한편으론 수 세기 전 이 곳에서 벌어졌을 애절하고 비극적인 이미지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듯 했다. 아야 소피아, 듬성듬성 남아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흔적, 트램 정거장인 귀르하네 역이나 베이요유 지역 등, 비잔틴 제국의 옛 영화는 이 곳 생기 넘치는 과거 술탄의 도시, 현대의 이스탄불 곳곳에 녹아있었다. 역사에 'IF'는 무의미하고 이스탄불의 매력에 빠져버렸지만, 과거의 도시에 경도당한 내겐 모스크로 변한 아야 소피아도 유쾌하진 않았다. 동로마 정교회와는 상관없지만, 내가 (날라리)천주교 신자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실제로 무슬림 정복자들은 꽤나 관대한 편이어서 아야 소피아 벽면의 성화(聖畵)를 파괴하기보단 회벽으로 덧칠만 해 버렸고, 콘스탄티노플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도 투르크 군대가 아닌 '신의 정의'를 외치는 이전 세기의 십자군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성화훼손은 훼손이고 오스만 투르크는 내 취향에 정감넘치는 제국은 아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가 기저에 깔려있었던 거 아닐까. 톱카피 궁전은 잘만 입장하고서도 벼르고 벼르던 아야 소피아는 띵겨넘은 것 말이다. 입장문 앞에 늘어선 긴 대기열도 귀찮았고 10YTL이라는 입장료도 부담스러웠지만, 아야 소피아 내부의 입 벌어지는 인테리어 한편에 어린 비잔틴 제국의 슬픔을, 마지막 로마황제의 최후를, 시민들의 두려움을 감지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 

정복과 약탈과 수난의 역사는 어디에서나 반복돼 왔고, 콘스탄티노플의 비극만이 유별난 것도 아닌데 난 심하게 감정이입하고 있다. 아야 소피아 앞에서, 기껏해야 솜사탕이나 베어먹으면서-.

바람직한 구도로 기념사진을 찍어주신 아저씨 :)

(아마도 물건을 판매한다든가, 속셈이 있지 않았을까. -_- 이스탄불에선 그래도 박시시 요구는 거의 없었다)  

+)

서방 vs 동방, 크리스챤 vs 무슬림 식의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는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호시탐탐 EU가입을 노리고 유럽대륙에 분주히 눈길주는 오늘날 이스탄불은 아이러니다.

터키인에 대한 유럽인의 차별에 분노하는 터키인들도 종종 본다.

[*미니*]

일단 여행가면.. 어지간한것은 무조건 다 가보고 먹어보고 해야 후회가 없더라고요..ㅎㅎㅎ

[멍사랑]

터키 여행기 더 올려 주시면 안될까요? 죄송 ^^

[환hee]

그림같은 사진 컬러세계사책을 보는것같습니다 공부를좀 해서 봐야 쓰것구만요...잘봤습니다

[그 山(산으로)]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 서양도 되고 동양도 되고 사실 그들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그들도 많이 헷갈리게 되는 부분이겠지요. 새삼 오르한 파묵이 묘사해 놓았던 이스탄불의 모습들이 압축파일로 저장된 머릿속에서 열림 모드로 전환되고 있는 기분이다. 랄까요.. 모처럼 유익하고 꺼리가 있는 여행기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찬물]

여행기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덕분에 즐겁습니다. 에효~ 세상은 넓고 공부할 것 많기도 하네요...

[살구꽃]

그러게요

[선도부]

구경 잘 하고 설명 잘 듣고 갑니다